임진왜란-16 : 조헌 (七百義塚)
04.08.21
5월 하순에 충청도 옥천에서 의병을 일으킨 조헌은 전 참봉 조광윤, 선비 장덕익, 신난수, 고경우 등의 도움을 받으며 충청도 서남 지역을 돌면서 모병을 계속하여 7월 하순에는 1천 6백여 명의 병력을 거느리게 되었다.
조헌은 다시 옥천에서 보은으로 진출하여 그곳에서 공주에서 최초로 기병한 의승군장 기허 영규가 지휘하는 승군 1,000여 명과 청주성을 잃고 연기 쪽에 진을 치고 있던 방어서 이옥의 500여 병력과 합류하여 총 군세가 3천여명으로 늘어나자 청주성을 수복하기로 하였다.
이 때 청주성은 일본군 제 5번대 하치스가 이에마사의 부장이 1,000여 명의 병력으로 성을 지키고 있었다.
7월 하순 윤선각과 이옥의 관군은 연기에서 영규의 승군은 안심사에서 조헌 의병군은 옥천에서 각각 청주성 근교에 집결한 뒤 8월 1일 청주성에 대한 공격을 시작했다.
조헌의 의병군을 선두로 청주성 서문을 향해 공격을 시작하자, 일본군쪽에서도 수십 명이 성 밖으로 나와 조총을 쏘면서 반격을 하였다. 의병군은 지형과 수목을 이용하여 적의 조총 사격을 피하면서 활의 사정거리 내로 거리를 좁혀가다가 일시에 일본군을 포위하여 활로 집중 사격을 퍼부었다.
이 후 의병군과 일본군사이에 치열한 백병전이 벌여졌는데, 여러 부대가 뒤섞여 싸웠기 때문에, 갑옷 입은 관군, 승복 입은 승군, 한복을 입은 의병군등 복장과 무기가 가지각색이었다.
당시가 8월 한 여름이라서 일본군 중에는 훈도시만 걸친 채 싸우는 자들이 많았다. 의병부대쪽에서도 윗 저고리를 벗어 던진 채 싸우는 의병들이 늘어나자, 이 모습을 본 조헌은 '가죽 갑옷 위에 옷을 입어라'하며 소리치자 의병군 여기저기에서 폭소가 터져나왔다.
이렇게 사기가 높은 의병군들이 점차 일본군을 압박하여 몰아부치자, 일본군은 성 안으로 후퇴를 하였고, 의병과 승병, 관군은 일제히 성으로 돌진하여 긴 사다리를 이용 성벽을 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갑자기 천둥과 번개를 동반한 폭우가 쏟아져 공격을 계속할 수 없게 되었다.
조헌은 할 수 없이 병력을 철수하여 서쪽 산봉우리에서 적의 동정을 살폈다. 일본군은 철수하는 조선군을 추격할 기미도 보이지 않았다.
날이 저물어 조헌 군은 산 위에서 야영을 하고, 다음 날 새벽 다시 청주성을 공격하기 시작하였는데, 일본군의 저항이 전혀 없었다.
전날 전투에서 많은 사상자를 낸 일본군은 야음을 틈타 모조리 달아나고 없었던 것이다.
조헌 군은 청주성에 무혈 입성하여 3개월 동안 일본군이 장악했던 청주성을 수복하였다.
청주성을 잃으면서 일본군은 경상도 금산(김천) - 추풍령 - 영동 - 청주 - 용인을 잇는 보급로를 상실하였다.
조헌은 청주성 수복 후 군량 부족으로 인해 다시 모이기로 하고 의병군을 일단 해산하였다가, 다시 의병군 1천여 명을 모아 근왕을 위해 온양으로 진출했다.
순찰사 윤선각이 이 소식을 듣고 조헌 휘하의 장덕익을 불러 『금산의 적부터 물리쳐서 양호(兩湖:호남과 호서)를 보전한 뒤 근왕을 해도 늦지 않다』며 관군과 합동으로 금산성 공격을 제의했다.
당시 조선의 관군과 의병들은 고경명의 패배를 교훈 삼아 깊이 쳐들어가지 않고, 좁은 령(領)만을 지키며 일본군의 진출을 저지하고 있었다. 다만 보성과 남편의 두 부대만이 고개를 넘어 적을 엿보다가 오히려, 일본군의 기습을 받아 남평현감 한순이 전사하고, 500여명의 군사는 전멸당했다.
윤석각의 제의를 받은 장덕익은 곧 조헌에게 전하였고, 조헌도 이에 동의하여 공주로 군사를 돌려 금산으로 향했다.
조헌은 이전 금산성을 공격하다 전사한 고경명과 했던 약속을 지키지 못했던 것이 못내 아쉬었던 것이었다.
원래 고경명은 금산 공격에 앞서 조헌에게 글을 보내 함께 형강(荊江)을 건너 금산을 치자고 했고, 조헌도 승낙하였는데, 조헌이 미처 거병을 하기 전에 전투가 벌어져 고경명과 그의 의병군은 전멸하고 말았다.
조헌은 청주성을 공격하려가다 형강(금강)을 건너면서 먼저 간 고경명을 추모하는 시를 남기기도 했다.
비휴처럼 날쌘 동녘 땅의 백만 용병들이
(東土 百萬師-중간에 한자가 안 나오는군요)
어찌하여 이 간난의 위기를 구하지 못하는고
(如何無術濟艱危)
형강을 함께 건너자 한 그대는 어디로 가고
(荊江有約人何去)
이제 내 홀로 건너는데 차가운 바람만이 노를 치는구나
(擊楫秋風獨渡時)
한편 윤선각은 조헌으로 하여금 근왕을 포기하고 금산으로 가게 한 후 합동작전은커녕 조헌 의병군에 가담한 장정들의 부모와 처자를 잡아 가두고 각 읍에 공문을 보내 협력하지 못하도록 했다.
그렇게해서 1천여 의병 중 300여 명이 이탈하고 현지에 도착한 의병은 7백여 명에 불과했다.
윤선각이 갑자기 이처럼 돌변하여 조헌을 방해한 이유는 일전에 청주성 전투 당시 조헌은 순찰사인 윤선각과 방어사 이옥등 관군이 제대로 전투를 하지 않는다고 질책을 하였고, 그러한 내용을 조정에 장계를 올리기도 하였기 때문에, 조헌과는 사이가 좋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그가 조헌에게 합동군사작전을 제의한 것은 그의 이러한 행위들이 조헌을 통해 중앙 정부에 알려지지 못하게 하기 위한 연막이었던 것이었다.
당시 관군과 의병군 사이에는 모병과 전공 다툼, 그리고 합동작전 때 지휘권 문제등으로 알력이 심하였다.
그래도 온양 현감 양응춘이 조헌 군에 합류하였다.
조헌은 얼마 안되는 군사를 이끌고 단독으로 일본군을 치려 하였지만 전라감사 권율과 충청감사 허욱이 한꺼번에 같이 치자며 공격을 말렸다.
조헌은 권율에게 8월 17일에 금산성을 함께 공격하자고 제의한 후 권율의 회신을 기다리지 않고 15일 공주를 출발하여 16일 유성에 도착하여 영규의 승군 6백여 명과 합세하였다.
영규가 관군의 도움없이는 들어갈 수 없다고 하였으나 조헌은 단호히 물리치며 북을 울리며 진군하였다.
영규는 조헌을 혼자 죽게 할 수 없다며 자신이 거느리고 있던 의병군을 조헌의 부대와 합쳐 금산성으로 떠남과 아울러 관군이 빨리 따라와 주기를 바라는 글을 보냈다.
17일 금산성 밖 10리 지점인 연곤평에 도착하여 권율 군을 기다리던 조헌은 그날 저녁까지 권율 군이 도착하지 않자 다음날 단독으로 공격할 결심을 했다.
이 때 권율은 전라도 군이 미처 출전준비를 갖추지 못하였으므로 금산성 공격을 연기하자는 회답을 보냈는데, 조헌은 그날까지 회답을 받지 못했던 것이다.
금산성에는 일본군 제 6번대 고바야가와 타카가게의 1만여 병력이 지키고 있었는데, 고바야가와는 비록 웅치와 이치의 조선군 방어선을 돌파하지 못하였고, 고경명 부대의 기습을 받기도 하였으나, 금산 쪽으로 북진하려던 전라도 보성군과 남평현의 관군을 급습해 남평 현감 한순을 전사시키는 등 군세는 여전했다.
관군의 지원도 확실하지 않은 상황에서 1천 3백여 명의 의승병군만으로 정예 1만여 일본군이 지키고 있는 금산성을 단독으로 공격하는 것은 자살행위나 다름없었다.
그러나 충(忠)과 의(義)만을 알고 대쪽 같은 성품의 그는 물러나 뒷 날을 기약하자는 주위의 만류에 『임금이 욕을 당하면(主辱), 신하는 죽어야 한다(臣死)』며 단호히 결전 의지를 밝혔다.
이에 영규와 의병군 전원이 옥쇄를 각오했다.
밤을 새워 공격 준비를 한 조헌 군은 18일 아침에 병력을 출동시켜 공격을 개시했다.
일본군은 뒤따라오는 후속부대가 없음을 알고 전 날 밤 야음을 틈타 의병의 배후에 군사를 매복시켜 뒤를 끊은 뒤 군사를 모두 내어 조헌군을 포위할 계획을 세웠다.
그런 사실을 모르고 성을 향해 진격하고 있을 때 일본군이 성에서 나와 선제 공격을 가해왔다. 그와 동시에 매복해 있던 일본군이 의병의 배후를 공격해 왔다.
적의 의해 포위상태에 빠진 조헌 군은 무기면에서 열세임에도 불구하고 하루종일 분전했다.
조헌은 "오늘은 오직 죽음만이 있을 뿐이다. 마땅히 의롭다는 한마디에 부끄럽지 않아야 할 것이다"라고 명령을 내려 독려했다. 한참동안 치열한 격전을 벌였다.
그 때 이미 조헌의 부대는 화살이 떨어져가고 있었다. 그렇게 한참을 싸웠다. 조헌은 부대는 화살이 다 떨어졌다.
그러나 조헌은 다급해하지 않고 장막안에서 움쩍하지 않았다. 곁에 있던 사람이 같이 나가자고 하였지만 "대장부는 죽으면 그만이지 구차하게 살 수 없다"며 더욱 북을 세게 치며 독전하였다.
조헌을 따르는 의병들은 손에 무기하나 없이 육박전을 펼쳤다.
조헌, 영규, 온양 현감 양응춘 이하 관, 의병군, 의승군 거의 전원이 제자리를 떠나는 사람하나 없이 조헌과 함께 역사속으로 묻혔다.
조헌의 아들 완기도 함께 순국하여 고경명 부자에 이어 두 번째 부자 순국을 기록했다.
일본군 또한 전사자 시체를 성 안으로 옮기는 데만 3일이 걸렸다.
일본군이 물러간 뒤 조헌의 제자들이 700명의 시신을 수습하여 경양산(景陽山) 기슭(금산군 서리면 의총리)에 큰 무덤을 만들고 '700명의 의로운 사람들의 무덤'(七百義塚)이라 하였다.
일본군은 두 차례의 금산성 전투에서 모두 승리를 거두었으나 그들이 입은 타격도 적지 않았다. 이에 일본군은 전라도 점령 계획을 포기하고 9월 7일에 무주의 별군을 금산으로 합류시킨 후 16일에 전군을 옥천으로 철수시켰다.
이로써 일본군의 전라도 진입은 저지되었다.
한편 경주에서 의병을 일으킨 전 훈련 봉사 김호는 경주 부근을 돌면서 민심을 안정시키고, 의병의 대오를 편성하여 훈련을 실시하고 있었다.
일본군은 조선 의병들의 활약으로 영천, 신령, 하양 등지를 빼앗기고 대구 - 청도 - 밀양 - 양산의 병참선 방어에 주력하면서 경주성에는 소수의 병력을 잔류시키고 있었다가, 영천을 빼앗긴 후 의병이 경주성을 공격할 것에 대비하여 양산 주둔 일부 병력을 경주성으로 보내기로 하고, 일본군 정병 500 여 기가 양산을 출발, 8월 1일에 언양에 도착하였다.
이 때 경주 부근에서 의병을 훈련시키고 있던 김호는 이 소식을 듣고 일본군이 경주에 진입하기 전에 언양에서 격퇴시키기로 계획을 세워고, 8월 2일 의병 1,400여 명을 거느리고 숙영지를 출발하여 언양을 향해 진격하였다. 그런데 의병부대의 선봉이 경주인근을 벗어나 노곡에 이르렀을 때 일본군과 조우해 버렸다. 일본군은 그날 언양을 떠나 경주로 올라오고 있었던 것이었다.
불시에 적과 부딪히게 된 의병 선봉대는 함성을 울리면서 돌격을 감행하였고, 일본군은 갑작스런 공격에 당황하여 계곡으로 달아났다. 의병들은 언덕으로 올라가 돌을 굴리고 화살을 쏘아 달아나는 적을 사살하였다.
이렇게 선봉대가 기선을 제압하고 있을 때, 김호가 이끄는 본대는 즉각 일본군의 퇴로를 차단하였고, 완전 포위된 일본군은 다시 언덕을 기어 올라오려고 애를 썼으나, 의병들은 활을 쏘고 백병전을 벌여 일본군 수십 명을 사살하였다.
일본군 패잔병 일부는 의병의 배치가 엷었던 경주 방면으로 포위망을 뚫고 달아나 경주성으로 후퇴하였고, 김호의 의병부대는 언양까지 가지 않고도 경주성에 대한 구원병력을 격퇴시킬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