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몽골의 침입-3 : 개전(開戰)
04.09.18
본격적인 몽골의 침입에 앞서 고려 국경 밖 함경도 일부와 간도 지방에서 서성거리던 거란 유민들은 몽골군에 쫓겨 양수척(고려 사회의 천민계층)의 안내로 고려땅에 밀려들어온다.
그러나 이때 고려군 대부분의 정예 병력이 최충헌 독재 체재의 유지에 동원되어 있는 즉, 국경수비는 쇠약한 노병들에게 맡겨질 수밖에 없으니, 순식간에 넘어오는 거란 유민들의 무차별 살육과 약탈, 갖은 만행 등은 당연한 수순이다.
당시 이들 거란 유민들은 그저 춥고 배고픈 소수의 패잔병 무리에 불과한지라, 무인정권 휘하의 날렵한 정예병 일부만 출동시켜도 즉시 격퇴시킬 수 있었다. 하지만 최충헌은 자신의 신변과 저택의 경비에만 골몰하고 자신의 가병들 중 북방에 출병하여 거란족과 싸우겠다고 자원하는 병사들을 곧바로 섬에 귀양보내는 우매한 짓을 저지른다.
이러한 사태를 보고 있던 몽골에서는 칭기스칸의 동생 카치온에게 몽골 군사 1만명과 동진국에게 압력을 가해 얻어낸 병사 2만을 이끌고 고려로 가서 거란 잔당들을 섬멸할 것을 명한다. 고려와 몽골의 연합군은 강동성으로 쫓겨가 웅크리고 있던 거란 유민들을 가볍게 섬멸하였다. 포로가 되었던 고려 사람 2백명과 거란의 부녀자 7백명은 고려에 넘겨졌고 나머지는 몽골군의 차지가 되어 몽골로 끌려갔다.
이때 카치온은 고려군 원수 조충과 친분이 생겨 의형제를 맺었는데 조충이 나이가 더 많아 형이 되었다 한다. 그런데 이것이 빌미가 되어 조충의 아들 조숙창은 훗날 살리타이가 이끄는 몽골군이 쳐들어오자 자신이 몽골 황족과 의형제를 맺은 장군의 가족이라 말하며 투항해 버린다.
거란 유민 토벌이 끝나고 나서 몽골군은 고려 땅에서 약탈이나 기타 위협적인 행동을 벌이지 않은 채 재빨리 몽골로 귀환했다.
침략자의 근심
기탁하이, 내 할일도 조금은 남겨 두시게
그러나 몽골군은 혼란스러운 고려의 내부 사정을 상세히 파악하게 되었다. 그들은 적절한 과정을 거쳐 고려를 보다 간단히 자국의 세력권에 편입시킬 기회를 노린다.
고려 집권층 또한 요와 송, 금에게 눈치껏 알아서 처신해 온 전례가 있어 가급적 몽골을 구슬려 자극은 피하려 하였다.
처음 고려를 접했을 때, 몽골은 대륙에 희미하게 드러워진 고구려의 기백을 전승한 나라라고 여겨 대단히 신중하게 접근한다. 앞에서 서술한 것처럼 거란 유민을 토벌할 때까지 몽골군은 고려를 함부로 대하지 못하였다.
(이러한 인식은 몽골군의 고려 침략이 거의 끝나가던 시기에 자신을 찾아왔던 고려 태자에게 쿠빌라이칸이 하던 말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고려는 만리 밖에 떨어진 나라이며 당태종도 굴복시키지 못했는데 지금 그 나라의 세자가 나에게 왔으니 하늘의 뜻이다." 즉 몽골인들은 고려를 고구려와 동일시 하여 보았던 것이다)
허나 자업자득의 고질적 병폐가 다시금 불거진다. 몽골은 고려의 상층부에 습관화 되어있던 '미리 알아서 기는' 자기 위축의 기질을 너무도 쉽게 파악하며, 또한 새로운 외세에 기대어 권력 유지를 꾀하는 고려 지배층의 행태를 발견한다.
이러한 꼬락서니에 한껏 자신감을 얻어 돌변한 그들의 태도는 점령자가 된 것 마냥 부리는 횡포와 무한대의 공물 징발, 그리고 고려 궁정에 기본 예우를 벗어난 무장 출입(고려 국왕에게 서신을 들고 간 몽골 사신들은 칼과 활을 찬 상태였다)등 그 단적인 예를 보인다.
마침내 그들은 지속적인 침략이란 압박을 통해 고려 내의 민심을 이반시켜 고려를 복속시키는 데 성공한다.
침략자의 진입
죽일 수도, 살릴 수도, 삼가 백정의 말투일랑 거두소서
저고여라 하는 몽골의 사신이 1225년 고려에서 귀국하던 중 압록강 근처에서 살해됨으로써, 침략의 음험한 줄거리는 설정된다. 당시 고려와 몽골 간의 이간을 획책하여 조금이나마 자국의 위기를 모면하려는 동진국(남만주에 있던 금의 잔존 세력들이 만든 나라. 바투의 유럽 원정 전에 오고타이칸의 아들인 구유크가 이끄는 몽골군의 공격을 받고 멸망한다)의 소행으로 알려진 이 사건을 구실로 몽골은 1231년 살리타이의 지휘하에 압록강을 건너 고려로 침공해 온다.
몽골군의 제 1차 고려 침공은 점령을 시도하는 전면 공세라기보다는 그보다 한해 전 본격적으로 개시한 금나라 섬멸 전략의 한 모서리를 차지하는 후방견제 및 병참조달 작전인 동시에, 고려와 금의 연대를 차단하기 위한 보조전 및 지원 엄호의 성격으로 보인다.
몽골 군대가 압록강을 건너 맨 처음 공략한 곳은 의주의 함신진이었다. 그때 의주를 방어하고 있던 방수장군 조숙창은 의주 부사와 모의끝에 싸워보지도 않고 항복해 버린다. 그때 내세운 명분이 바로 자기가 몽골 황족과 의형제를 맺은 장군 조충의 아들이라는 것이었다.
방어 책임을 맡은 장수로서 싸우지도 않고 적에게 항복한다는 것은 분명 옳은 일은 아니다. 하지만 그로 인해 의주 백성들의 생명이 무사히 보존되었다는 점을 고려해 본다면 비판만 할 일은 아니라는 생각도 든다. 더구나 몽골군의 전략 중 하나인 <항복하면 살려주고, 저항하면 몰살시킨다>에 비추어 볼 때도 그렇다. 무모한 항전을 벌이다 끔찍한 참변을 당한 사례들에 비교해 본다면 차라리 그렇게 하는 것이 나을지도 모른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서, 조숙창은 항복에 그치지 않고 자신이 몽골 황족과 의형제를 맺은 조충의 아들임을 몽골군에 널리 알리고, 의주의 곡식 창고를 풀어 몽골군을 먹이기까지 했다. 게다가 인근 성에 글을 보내 진짜 몽골 군대가 왔으니 싸우다 개죽음 당하지 말고 항복하라는 권유까지 했다. 이후 몽골군은 남하하면서 이르는 성마다 조숙창을 앞세워 항복을 권유하는 데 이용해 먹었다.
(그래도 몽골에 적극적으로 빌붙어 권력을 등에 업고 횡포를 부린 홍복원 일파에 비하면 그는 최소한 백성들의 피해를 줄여 보겠다는 심산에서 투항했을지도 모른다는 추측이 든다)
다음의 철주(평안북도 철산)에 비하면 의주의 항복은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의주 다음으로 공격당한 철주는 몽골군에 끝까지 저항하다가 성 전체가 무자비하게 학살당했다.
의주를 쉽게 손에 넣은 몽골군은 곧바로 철주로 진격해 항복을 권유했지만 군민들은 응하지 않고 농성전을 결심했다. 보름 동안이나 집중 공격을 받고서도 1천여명의 군민들은 성안에서 저항을 포기하지 않았다. 이런 결사항전을 이끈 사람은 철주의 방어사 이원정이었다. 그는 힘을 다해 싸우다 도저히 이길 수 없음을 알자 아내와 자식을 끌어안고 불속에 뛰어들어 자결했다.
철주는 중과부적으로 무너지고 말았는데, 함락이 눈 앞에 보이자 철주성의 판관 이희적인 성안의 부녀자와 어린이들을 창고에 넣고 불을 질렀다. 그리고 자신은 그때까지 살아남은 장정들을 거느리고 자결해 버렸다.
살리타이는 철주성을 함락시킨 후, 살아남은 백성들을 남김없이 도륙했다. 저항에 대한 무자비한 보복이었다. 끝까지 항전하다 죽임을 당한 철주 백성들, 그들의 죽음을 예찬만 하기에는 너무나 처절한 것이었다.
철주가 함락된 지 사흘 만에 이 소식은 바로 개경으로 전해졌고, 그 대비책을 처음 논의한 것이 1231년 9월 초의 일이었다. 몽골군이 압록강을 건넌 지 보름이나 지난 후였으니, 최이 정권의 느려터진 대응에도 문제가 많았다.
최이는 재상들을 자신의 집으로 불러 몽골군을 막을 방안을 논의케 하였다. 여기서 3군으로 방어군을 조직하기로 하고, 대장군 채송년을 북계 병마사로 삼아 즉시 파견키로 하였다. 그리고 거란의 침입때와 마찬가지로 다시 여러 지방의 군사를 징발하기로 결정하였다.
이러는 사이, 몽골군은 귀주성에 밀어닥쳤다. 그런데 이 귀주성은 현종 9년, 강감찬이 소배압이 이끌던 10만 거란군을 섬멸한 귀주대첩의 장소다. 그러한 역사적 현장이어서 그랬는지는 몰라도 몽골 침략에 맞선 이때도 대승을 거둔다.
몽골군이 귀주성에 이르렀을 때, 성안에는 병마사 박서를 비롯한 서북면 각 지역의 방위를 책임지는 분도장군과 수령들이 군사를 이끌고 모여 있었다. 그 중에는 몽골군의 공격을 받고 정주에서 간신히 탈출한 정주 분도장군 김경손도 함께하고 있었다. 지금의 평안북도 여러 지역에 흩어져 있던 군사를 한데 모아 귀주를 거점으로 방어전을 펴려는 것이었다.
그런 귀주성을 몽골군이 포위한 것은 1231년 9월 3일이었다. 성안에는 병마사 박서의 지휘 아래 고작 2천여명의 군사가 성의 4면을 각각 나누어 방어에 들어갔다. 몽골군은 성을 여러 겹으로 포위하여 각 성문을 동시에 공격했는데, 이 공방전은 거의 한달 동안이나 계속되었다.
처음에 고려군은 나가서 싸우는 것을 극도로 두려워 하다가, 김경손의 몸을 아끼지 않는 분투를 보고 감동하여 항전 의지를 결집했다.
김경손은 정주에서부터 함께 싸웠던 결사대 12명과 250명의 군사를 이끌고 성문 밖으로 나갔다. 하지만 250명의 군사들은 몽골군을 보고 겁에 질려 엎드린 채 한 발자국도 움직이려 하지 않았다. 김경손은 그들을 모두 성안으로 들여보내고 불과 12명의 결사대만을 이끌고 몽골군에 맞섰다.
싸우는 도중 날아오는 화살에 팔이 맞아 김경손은 피를 낭자하게 흘렸지만 전투를 멈추지 않으니, 나머지 군사들도 이를 보고 성에서 나와 분전하였고 마침내 몽골군은 멀리 물러났다.
이기고 성안으로 돌아온 김경손을 맞아 박서는 엎드려 절하면서 울고 또 울고, 김경손도 또한 절하며 울고 또 울었다고 한다. 이 승전 이후 박서는 성을 방어하는 일체의 지휘권을 김경손에게 맡겼고 고려의 군사들도 자신감을 갖게 되었다.
그 뒤 고려군은 틈틈이 성 밖으로 출격하여 적에게 타격을 가했다. 그런 과정에서 위주 부사 박문창이 적에게 사로잡혔다. 그는 몽골의 요구로 성안에 들어와 항복을 권유하다가 분노한 박서의 칼에 목이 달아났다.
몽골군은 각종 공성기를 동원해 성을 함락시키려 했으나 그때마다 박서는 뛰어난 임기응변과 기상천외한 기지로 몽골군을 격퇴시켰다. 김경손은 전투를 독려하다가 몽골군의 투석기에서 날아오는 바위에 맞아 박살이 날 뻔도 했지만 자기 자리에서 꼼짝도 않고 계속 지휘를 했다고 한다.
마침내 살리타이는 이런 귀주성의 저항에 대해 하늘이 돕는 것이지 사람의 힘이 아니라고 여겨 퇴각을 결정했다.
귀주성 함락에 실패한 몽골군은 그 이후인 10월, 11월, 12월 세 차례나 대대적인 공격을 퍼부었으나 끝내 함락시키지 못했다. 이를 본 70세의 몽골 장수는 다음과 같은 감탄을 남겼다.
"내가 어려서부터 종군하여 천하 각지의 성지를 공격해 함락시키지 못한 곳이 없었건만, 이런 맹공격을 받고도 항복하지 않은 성은 처음이로다. 저 성을 지키는 장수는 하늘이 내린 명장임이 분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