評者는 언젠가 우리 작곡가들을 가리켜 '무정란(無精卵) 작곡가'라 혹평 한 적이 있다. 어느 개인을 지칭하기 보다 과연 작곡가가 있는가, 있다면 창작의 생산성은 무엇인가라고 강한 의문을 제기했다.
그것은 대학에 안주하고 미로(迷路)의 기법 속에서 숨어 있을 뿐 생명력 있는 창작의 진정한 목소리를 들을 수 없는 현실을 토로한 것이다. 더욱 곤혹스러운 것은 이들이 학생을 가르치는 교수의 중책을 맡고 있다는 점이다. 자신의 창작 작업과 가르치는 것은 다를 수 있어야 하는데 학생의 특성이나 취향을 외면한 체 똑같은 '붕어빵 만들기'만 강요한다면 이 심각한 문제를 누가 풀어 줄 수 있단 말인가.
학생은 현대음악에 관심이 없는데도 교수가 현대작곡가라 이를 전수 받아야 한다면 학생은 방황하지 않을 수 없다.
창작은 아무나 하는 게 아니지만 그래도 수행(修行)의 과정에서 많은 이야기를 발견할 수 있도록 눈을 열어주기 위해서는 교수들의 의식이 바뀌어야 한다. 그런데 이런 징후를 발견하기 어려운 게 우리의 대학 현실이다.
그러나 작곡가 신동일은 달랐다. 6월 2일 마루홀에서 열린 제1회 '신동일의 작곡 마당'은 창작 교육의 허위의식과 작가의 무능을 감출 수 있는 미로 상자를 열고 '마당'을 제공한 점에서 신선하게 느껴졌다. 이는 암울한 창작계에 한줄기 희망의 빛이기도 했다.
모두 같은 고민과 탐색의 과정을 밝고 있는 창작의 새싹들의 목소리가 그 어느 때보다 진솔하게 다가왔고 자유스러움을 주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반가운 것은 한 때 공부를 하다 멈춘 이들과 전공을 하지 않은 아마추어 작곡가들이 참여했다는 시실이다.
그리고 진행자로 나선 신동일이 예비 작곡가와 관객에게 다리를 놓아 곡을 쓰게된 동기를 말하게 해 대화를 열어 준 점이다. 청중은 그 통로를 따라 난해하다는 작곡 발표를 마치 자신이 작곡한 듯 흥미롭게 받아 들였다.
그래서 신동일은 '발표회'가 아닌 '마당'이란 제목을 선택한 것 같다. 마당은 '노는 곳'이고 개방적이며 폼을 잡지 않아도 된다. 그는 외치고 있었다. 작곡은 '교실'이 아니라 '마당'이라고....
놀기를 원하는 학생들을 창작 교실에 가두어 놓고 논술 학습시키듯 하는 우리 교육이 이런 열린 마당에 의해 큰 변화를 맞게 될 것을 희망하며 간략한 스케치를 해 본다.
김상현은 무언가 2편을 내놓았다. 한양대 영문과 중퇴. 그러나 지금은 한국예술종합학교 음악원에 재학 중이다. 91년 MBC가곡제 본선에 진출했다. 그가 피아노로 반주할 만큼 피아노 테크닉이 있었고 보칼리제 풍의 시종 '아'로 노래하는 것이 무언가다.
이를 굳이 우리 식으로 하면 口音(구음)적 표현이라 할 수도 있는데 그의 곡은 환상성을 잘 전개해 가사가 없는 것이 사물을 구체화하지 않고 더 선의 아름다운 상상을 펼칠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갑작스런 독창자 감기로 代打 전지희가 노래했는데 독보력과 표현력이 좋았다. 잠재력과 악상의 풍부함을 느꼈다.
이지연은 이화여대 작곡과와 대학원을 나왔다. 현직 피아노학원 원장이다. 작곡을 그만두었다가 다시 꿈틀거리는 창작의 흔들림 때문에 오선지를 찾았다.
'시계와 거북'은 바로 그런 자신의 자화상이다. 어느 날 TV에서 거북이가 아다지오로 기는 평화로운 화면과 TV 위의 자명종 시계의 째각 그리는 중첩 화면에서 자신을 발견한 것을 음표로 그린 것이다. 현실의 억압과 여유를 대비해 구성한 것이다. 그것은 몸부림이자 일상을 탈출하려는 욕망이 만들어낸 또 하나의 공간인 것이다.
김수민은 Fantasy for Cello Solo를 발표했다. 경원대 작곡과 재학이다. 구성이 탄탄하고
민속음악의 소재를 첼로 기법적으로도 능숙한 표현이어서 기존의 연주회에서 청중을 설득할 수 있으리 만치 매력적인 곡이다. 현대음악만 전문적으로 연주하는 첼리스트 박정민의 진지함도 집중력을 키운 원인이다.
김정희는 '지는 잎새 싸이거든'과 '송인' 두 곡을 내 놓았다. 가야금 김한나 피리 홍래형, 대금 이영은 타악 채인섭이 반주를 했고 소리는 최현미가 했다. 가곡이 오늘의 반주 형식과 기법을 통해 달라지고 있음을 발견케 했다. 전통과 다른 현대의 가곡창작이 청중의 오염된 귀를 순화시키는 작업은 우리 모두가 노력해야 할 부분이다. 단아한 가곡의 정취가 물씬했다. 우리민요를 우리 젊은이들이 부를 수 없는 원인이 무엇인가에 착안한 것이다. 김정희는 중앙대 음악대학 한국음악과 작곡 전공이다.
우예소라의 단소와 첼로 그리고 피아노를 위한 세계의 짧은 '아리랑 변주곡'. 다소 이질적인 악기 편성이다. 상대 악기에 비해 단소의 음량이 적어 조화에 다소 문제가 있지만 서양악기와의 음색, 테크닉, 호흡 등을 공부하는 과정이어서 의미가 있다고 본다.
김현석은 2대의 플륫과 혼, 현악 5부를 위한 음악이다. 한양대 공대 기계공학과 전공으로 휴학중이다. 그는 고전주의 여러 양식들을 섭렵해 보고 싶다고 했다. 작품으로서 보다 테크닉을 익히는 과정인 것이다. 모차르트, 베토벤 등의 여러 수법들을 녹여 현악 5부를 만든 것이다. 따라서 각 악기의 기능이 살아나는 것까지는 기대하지 않는 곡이지만 그는 수줍은 듯 창작의 문을 두드리고 있다. 클래식을 듣는 이라면 김현석의 곡이라기 보다 아무런 부담없이 들려질 수 있는 곡이다.
아무런 준비 운동도 없이 현대음악이란 벼랑 끝에서 '나는 작곡가'라고 외치는 독백에 비해 이 아마추어 작곡가의 여린 심성에 싹이 돋아날 것을 기대한다.
신동일의 '눈 오는 밤' '풀꽃들과 바람들'이 발표되었다.
신동일 선생이 준 CD '파란 자전거'를 집에와 들었다. 피아노 소품을 통해 '들려지는 음악'을 추구하는 것은 창작의 사회화 내지는 생활화로 보여졌다. 작곡가가 거룩해지는 것은 작품이고 그것은 죽은 후의 평가일 수 있다.
우리 작곡가들이 어깨에 너무 힘이 들어 있어 마치 화석을 보는 듯 하다. 작곡가는 역사가 알아 줄 일이고 그 이전에는 그저 곡 쓰는 사람 정도로 검허한 작업일 뿐이다. 내가 쓴 곡을 듣고 그 어떤 연상과 표정만 해주어도 기쁘지 아니한가
그런데 우리 작곡가들은 작품도 없이 베토벤 같은 '인상'만 쓰고 있다. 교수작곡가들이 반성해야 할 대목이다. 그러나 이런 과정이 있었기에 신동일 같은 소탈한 작곡가도 나오는 것이라면 다소 위안이 되기도 한다.
창작계에, 작곡가 교수들에게 부탁이 있다면, 아이들을 풀어주라고 당부하고 싶다. 교실의 아이들은 속박을 벗어나 계속해 마당에 놀고 싶어한다. 마당은 넘어지고 깨지는 것이 일상인 아이들의 놀이터다. 때론 싸우기도 하고, 해가 기울면 서로 웃는 자연스러움이 있다. 그래서 넘어져도 한번 털면 화해가 되는 마당은 아이들의 창조 텃밭이다.
우리 아이들을 마당에서 놀게 하자. 자기 형식을 강요하지 말고 그냥 자연스럽게 놀도록 놓아주자. 학교다, 인맥이다, 학파다 해 어른들이 갈라놓은 땅에 아이들을 볼모로 해서는 안된다. 아이들은 교수의 밥이 아니다.
신동일의 작곡 마당이 운동장이 되어 더 많은 아이들이 모여 들었으면 좋겠다.
놀다보면 아이들은 서로 놀이에 빠져 고민도, 방황도 잊어버린다. 그런 가운데 잘 노는 놈이 나오지 않겠는가. 신동일의 작곡 마당, 그 마당이 기다려지는 것은 아이들의 창작이 어른들보다 진지하고 진실하기 때문이다.
서울음악제에 들러 잔치 상을 두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나와 버린 것은 식은 그 음식에 향기도 내일도 없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집에서 숙제해야 할 또 다른 아이들이 선생님이 내준 과제 때문에 고역스런 청중이 되어 있었다.
서울음악제 보다 창작 마당에 지원할 줄 아는 그런 문예진흥이 되어야 할 텐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