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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가 왜 조선인가, 중원을 찾아서 본기 : 조선과 伊犁 其 一>
이리조약은 잘 알려진 바와 같이 러 ,청간의 불평등 조약으로 19세기 제정 러시아의 동진 정책에 따른 영토 분쟁이다. 이리 조약으로 인하여 현재의 중공과 러시아의 국경의 토대가 되는 계기가 되었으며, 본 조약은 서세동점의 종착역이자, 목표는 조선제국(朝鮮諸國)과 중앙정부의 해체이며, 동일시점에 朝, 淸간의 국경 분쟁이 일어나기도 하였다.
흔히 러시아와 청, 조선의 공식적인 관계는 통상 근대로 보고 있으나, 여러 문헌자료를 통해 보면, 中國/天朝/神州 : (조선의 중앙정부)와 고대부터 교류하였음을 알 수 있으며, 소위 말하는 서구의 근대화, 시민혁명과 근대 일본의 명치유신 등은 서구열강의 부국강병정책과 그 맥을 같이 하며, 그 목적은 朝鮮諸國의 붕괴를 위한 수단에 불과하였다.
또한 러시아는 고대에서 근대에 이르기까지 중국 즉 조선중앙정부와의 관계에서 빠질 수 없었으며, 조선의 번국이었던 러시아가 어찌하여 서구 열강과 야합하고, 조선을 멸망시킨 일등공신이 되었는지를 이리조약을 통해 고찰해 보고자 한다.
<中俄伊犁条约>
《中俄伊犁条约》又称《中俄改订条约》、《圣彼得堡条约》,是1881年(光绪七年)2月24日是清朝与沙皇俄国在圣彼得堡签定的有关归还新疆伊犁地区的条约。根据条约及其子约,中国虽收回了伊犁九城及特克斯河流域附近的领土,但仍割让了塔城东北和伊犁、喀什噶尔以西约7万多平方公里的领土。
[<중 ․러 이리조약>
'중․ 러 이리조약' 또한 '중ㅡ러 개정조약', '상트 페테부르크조약' 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1881년 (도광 7년) 2월 24일은 청조와 제정 러시아국이 상트 페테부르크에서 체결한 신강 이리지구 반환에 관한 조약이다. 조약 및 조약사항에 따르면, 중국은 이리 9성 및 탁극사하(터커스하)유역부근의 영토를 찾아가는 대신 탑성 동북 및 이리, 객십갈이(카슈카르, 카스) 서쪽의 7만여, 평방킬로미터의 영토를 (러시아에게) 할양한다.]
< 이리 조약 참고도> - 바이두 백과
<출처 : 중공 바이두 백과(百度百科)>http://baike.baidu.com/view/513969.htm
※필자 번역 및 주
条约原文[조약원문 : 현 중공어 본]
[1881년 2월 24일 광서 7년 정월 26일 , 러시아력
大清国大皇帝大俄国大皇帝愿将两国边界及通商等事于两国有益者,商定妥协,以固和好,是以特派全权大臣会同商定。
[ 대청국 대황제 대 러시아황제가 원하는 양국 변경지대 및 통상에 관한 양국간의 有益에 대해 상의, 타협하여 결정하고, (양국)의 평화로운 관계를 공고히 하며, 이 협상은 특파전권대신으로 회동하고 상의하여 정한다.]
大清国钦差出使俄国全权大臣一等毅勇侯大理寺少卿曾;
大俄国钦差参政大臣署理总管外部大臣萨那尔特部堂格 参议大臣出使中国全权大臣布;两国全权大臣各将所奉全权谕旨互相校阅后,议定条约如左:
[대청국 흠차출사 러시아 전권대신 일등 의용후 대리사 소경 증(필자 주: 증기택을 말함) ;
대 러시아 흠차 참정대신서리총관 외부대신 살나얼특부당격 참의대신출사 중국전권 대신이 선언한다. 양국전권대신은 각 (황제)의 명령을 받들어 상호간에 문서 내용 가운데 잘못된 것을 바로잡아 고쳤으며 정한 조약은 왼쪽에 적힌 바와 같다. ]
第一条 大俄国大皇帝允将一千八百七十一年,即同治十年,俄兵代收伊犁地方,交还大清国管属。其伊犁西边,按照此约第七条所定界址,应归俄国管属。
[제 1조, 대 러시아황제는 1871년, 즉 동치 10년 , 러시아 군대가 이리지방을 대신 접수하며, 대청국 관할로 돌려주는 것을 허가했으며, 그 이리서쪽 변경은, 이 조약의 제 7조에서 정한 경계에 범위에 따라, 러시아가 관리하는 것으로 귀속시킨다.]
...................<중략>......................
两国全权大臣议定,此约备汉文、俄文、法文约本两分,画押盖印为凭,三国文字校对无讹,遇有讲论以法文为证。
[양국의 전권대신이 협정하였으며 조항을 한문, 러시아어, 프랑스어 조약문 2개로 준비하는 것으로 하고, 수결과 직인으로 삼국의 문자가 교열을 통해 오류나 거짓이 없음에 의거하며, 만약 국가대사를 의논할 시에는 프랑스어로 증명한다.]
光绪七年正月二十六日 ,
[ 광서 7년 정월 26일
위 조약문에서 두 가지 의혹과 모순을 제기할 수 있는데,
⑴ 조약체결지점이 해당 지역명과 지리적으로 너무 떨어져 있다.
⑵ 조약서에와 조약명의 조약주체 즉 국가 명칭
註⑴ : 이리지역은 현재의 중공 신강위구르자치구 카자흐족 자치구로 중앙아시아지역이며, 카자흐스탄, 키르기스탄, 우즈벡, 아프가니스탄, 타직키스탄등의 중앙아시아 국가들과 인접한 서북방 국경지역이다. 그러나 조약체결은 러시아 상트 페테부르크에서 체결하였으며, 그 공식명칭은 상트 페테부르크조약 (Treaty of saint Perberg)이다.
註⑵ : 大清国大皇帝 大俄国大皇帝: 조약 문 맨 위에서 두 번 째 줄 문장이다. 1881년 청조(淸朝)는 대외외교에 자국명을 '大淸國'이라고 칭하고 있으며, 러시아 또한 차르 (czar) 정권으로 제국을 자칭하고 있다. 이는 유라시아를 통괄하는 조선의 중앙정부 즉 중국의 지방행정통제력을 상실을 반증하며, 帝國을 참칭하는 국가들이 서구열강을 중심으로 난립하는 특징을 가진다.
19세기초부터 전면적으로 제국주의를 표방한 국가들을 보면, 대영제국, 제정 러시아, 프랑스의 나폴레옹1세와 3세의 황제 정권, 오스트리아 헝가리제국, 대 일본제국 등을 그 예로 들 수가 있다.
필자가 누차 설명한 바와 같이 중국(中國)은 유라시아와 아프리카 북부를 통괄하는 조선(朝鮮)의 중앙조정의 명칭으로 천자(天子)가 직접 관할하는 사방천리를 말한다. 중국은 예로부터 선진기술을 연구하고 문화를 발전시키며 통칭 실크로드를 통해 그것을 四海의 諸邦들에게 전승시켜 중국의 앞선 경제, 문화, 기술등을 공유하고 , 조공무역을 통해 과도한 생산을 지양하고, 세계만민이 더불어 잘 살
수 있는 역할을 수행에 왔다.
그러나 현 력사에서는 고대에서 근세까지의 세계사에 존재했던 중앙정부와 여러 지방정부와의 조공관계를 독립정권 및 각 국가간의 동․서 문명교류로 대체하고 있다. 봉건주의체제에서 황제는 둘이 존재할 수 없는 것이며, 여러 제방의 총수들이 칭제를 한다는 것은, 곧 유라시아의 중앙정부의 권력 붕괴를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19세기 후반이 이루어진 러 ․청간의 ‘이리조약’은 중국의 정치적 생명이 말기에 다다른 것으로 볼 수 있으며, 또한 서구열강과, 청(淸), 일본(日本)등의 나라가 칭제를 하고 식민지 정책을 펼쳐 수 많은 백성들이 불이익을 당하였으며, 전쟁의 희생자가 되는 비극적인 결과를 초래하였다.
현 중공의 력사조차도, 중국의 력대 왕조구분을 秦, 漢朝, 隋朝, 唐朝, 宋朝, 元朝, 明朝, 淸朝로 구분하며, 한나라, 송나라, 명나라, 청나라 라는 용어 자체는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 단어이고 특히 대한민국에서 가장 흔하게 사용되고 있다. 게다가 중국이라는 청조(淸朝)가 쓰고 있는 '大淸國' 이라는 국명은 그 중앙조정의 주체가 무엇인지 확고하게 구분 지을 수 있는 용어도 아닐뿐더러, 만주족이 세운 중국이라면, 그 국명이 만주국(滿洲國) 중조의 이름은 '淸朝'가 되어야 옳다.
이리조약 (伊犁条约) 공식 명칭을 살펴보자
1.영문 : Treaty of Saint Petersburg (1881)
2.중문 : 中俄伊犁条约
3.일본어: イリ条約
영문으로는 ‘상트 페테부르크 조약’이라 하며, 중문은 ‘중․ 러 이리조약’, 일본어 ‘이리조약’
이라 각기 칭하고 있다.
특히 관심을 끄는 부분은 일본어로 '伊梨'가 가진 소리 값이다.
아시아= 조선 카페의
1930년대 말 일본인이 지은 세계사 강의서에 ‘伊犁’를 クルヂア {쿠루지아 クルヂア: ク(쿠)ル(루)ヂ(지)ア(아)} 라고 하고 있다. 이 글을 확인하고, 너무 놀란 나머지 일본인 친구에게 伊犁 : クルヂア 를 손으로 써서 보여주고 읽게 하였더니, 그 친구가 ‘구르치야’ ‘그루지야’라고 발음하였다. 구르치야는 그루지야를 말한다.
グルジア (Geogia)
グルジア語では、საქართველო(サカルトヴェロ、ラテン文字転写 : Sakartvelo)[일본어 위키백과]※필자주 : グ(구) ル(루)ジ(지) ア(아)
그루지야에 대해 간략하게 살펴보자.
그루지야 : 조지아(그루지야)(조지아어: საქართველო 사카르트벨로 [sɑkʰɑrtʰvɛlɔ]
영어: Georgia [ˈdʒɔrdʒə], 러시아어: Грузия 그루지야[*])는 유럽과 아시아 사이의 캅카스 산맥 남쪽과 흑해 동쪽에 있는 공화국이다. [그루지야 한국어 위키백과]
※그루지야 말로는 ‘사카르트벨로’ 라고 한다고 한다.
그루지야의 역사
(.........전략
18세기 후반 러시아의 예카테리나 대제는 군대를 이끌고 오스만 제국이 점령하던 조지아(그루지야) 서부 지역으로 진출하여 그 세력을 확대했고 하략........)
[그루지야 한국어 위키백과]
예카테리나 2세
(예카테리나 2세 대제, 러시아어: Екатерина II Великая 예카테리나 벨리카야[*],
현 러시아사에서 예카테리나 2세는 표도르 대제에 이어 제정 러시아의 중흥을 이끈 女帝로 평가되고 있다. 그러나 국내 정치에 많은 어려움을 겪었기 때문에, 대외정치에서 돌파구를 찾으려고 하여, 오스만 투르크와 전쟁하였으며, 그루지야의 서부 지역으로 진출했다고 한다.
그러나 중앙정치가 불안한 상태에서 대외원정을 감행한다는 것은 정치를 장난감 병정 놀이로 보는 것과 같다고 할 수 있다. 그루지야는 1870년 경에서야 러시아의 보호령이 되는데. 즉 예카테리나 2세의 제정 러시아는 그루지야를 정벌할 수 있는 역량이 없었다는 말이다. 예카테리나 2세 전에 제정러시아를 중흥으로 이끈 인물이 있는데. 그가 바로 표도르 대제이다.
표토르 대제 (표토르 1세)(1672~1725)
그는 아직 몽골의 잔재가 남아 있던 러시아를 서유럽화하는 것을 중히 여겼는데, 서유럽보다 발전이 늦은 러시아를 근대화하기 위해 노력 하였으며, 동양의 영향으로 긴 수염을 기르는 사람에게는 수염세를 매기기도 했다. 표도르의 모스크바 대공국은 대북방 전쟁의 성공으로 1721년에 러시아 제국으로 선포하였으며 만년에 표트르는 새 수도 상트 페테르부르크의 건설에 몰두하였다. 상트 페테르부르크는 북방전쟁의 결과로 획득한 발트해의 바닷가 불모지에 1703년부터 건설되기 시작하였다. [브리트니커 참조]
이와 같이 ‘제정 러시아’ 또는 ‘모스크바 대공국’이라고 하는 러시아는 표도르와 예카테리나 2세 이후 급성장 하였는데, 표도르의 가장 큰 치적은 북방영토확장과 러시아의 근대화이다.
위 본문 중의 <그는 아직 몽골의 잔재가 남아 있던 러시아를 서 유럽화하는 것을 중히 여겼는데.......>
: 서유럽화란 이른바 계몽주의를 말하는 것으로 서유럽의 산업혁명을 본받아 부국강병, 및 대외 식민지 정책을 말한다.
<동양의 영향으로 긴 수염을 기르는 사람에게는 수염세를 매겼다.>
:이 부분에서 동양이라 함은 몽골을 말하는 것으로,
곧 아라사(鄂羅斯)인데, 몽고(蒙古)의 별종(別種)으로 나라가 사막(沙漠) 바깥 지극히 먼 땅에 있다. 그들은 키가 크고, 몸이 건장(健壯)하여, 상모가 극히 흉한(凶悍) 영악(獰惡)하다.
눈은 푸르고(靑眼), 광대뼈가 튀어나왔으며, 코가 주먹같이 높고, 붉은 수염이 텁수룩하게 났다.
[문견잡기(聞見雜記) 하(下) 대비달자(大鼻韃子)]
러시아/아라사의 군주라는 ‘표도르’는 자신들의 풍습을 금지하는 정책을 실시하였으며, 몽골은 문견잡기에서 대비달자는 몽고의 별종으로 오늘날 러시아 슬라브인으로 묘사하고 있다.
이는 몽골과 러시아는 본시 같은 부족이며, 표도르는 그런 아라사의 수염기르는 풍습을 없애려 노력하였고, 그 지역을 대비달자 라고 하는 것으로 보아, 대비달자 즉 아라사의 바로 동쪽엔 몽골이 있었다. 몽골은 Tartar 라고 하며, 대비달자라 함은 큰 코 타타르인, 큰 코 몽골인인이다. 현 러시아 타타르공화국의 타타르족과, 슬라브족을 비교하면 원 몽골과 대비달자의 모습이 그려질 것이다.
표도르의 모스크바 공국은 현 러시아 타타르자치 공화국의 서쪽에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실제로 타타르공화국 수도 카잔에서 서쪽으로 직선거리 700km에 현 러시아 수도 모스크바가 위치해 있다.
결국 표토르가 실시한 러시아의 근대화는 전통문화를 부정하고, 서세와 야합하여 조선의 제방이 아닌 근대 제국주의 국가로 독립하겠다는 강한의지를 표방한 것이다. 그는 만년에 표트르는 새 수도 상트 페테르부르크의 건설에 매우 심혈을 기울였는데, 1703년 당시 상트 페테부르크는 발트해 연안의 불모지였다.
이 상트 페테부르크와 조선변방과의 지리적 관계를 살펴보자.
我孝廟九年戊戌。淸國徵我兵。助攻車漢賊。車漢者羅禪也。於是以惠山僉使申瀏。移拜北虞侯。領兵赴戰。
[우리 효종(孝宗)[‘원문은 孝廟’] 9년 무오〔1658년〕에 淸國 군사를 동원하여 도와 차한(車漢)을 치라 하였으니, 차한은 나선(羅禪)이다. 그러므로 혜산첨사(惠山僉使) 신류(申瀏)를 북우후(北虞候)에 이배(移拜)하여 군사를 거느리고 싸움터로 가게 하였다.]
按羅禪卽鄂羅斯地。在極北。秦漢之間。服屬㐫奴。在漢爲堅昆丁零。在唐爲點戛斯骨利幹等國。
元時阿羅思及吉利吉思撼合納謙州益蘭州等處。皆其地也。
明時阻於朔漢。未通沙漠。淸順治初。其衆曰羅刹。竊據黑龍江雅克薩之地。築城居之 ........중략.......其地與黑龍江所轄北境接界。西接西洋 하략 ....
[羅禪은 즉 악라사(鄂羅斯) [필자 주: 아라사>어루어스>루스>러시아]이다. 북극(北極)에 있다. 진(秦)․ 한(漢) 연간에 흉노(匈奴)에 속했고 한(漢)때에는 견곤(堅昆), 정령(丁零), 당조(唐朝) 때에 점알사(點戛斯), 골리간(骨利幹)이었다. 원조(元朝)때의 아라사(阿羅思)와 길리길사(吉利吉思)[Kyrgiz], 감합납(撼合納), 겸주(謙州), 익란주(益蘭州) 등지인데 모두가 그 지역이다. 명대(明代)에는 북쪽 사막에 막혀서 통하지 못하였으며 청(淸) 순치(順治) 초에 그 나라 사람을 라찰(羅刹)이라 불렀다. 흑룡강(黑龍江) 아극살(雅克薩)의 땅에 몰래 쳐들어와 기거하며 성을 쌓고 산다.........중략..........그 땅은 흑룡강 관할의 북쪽경계와 접한다. 서쪽으로 서양(西洋)과 접한다. 하략] 《 연경재전집》 車漢日記 [차한일기]
성해응 선생(成海應, 1760~1839)은 러시아가 秦 ․ 漢의 흉노(匈奴), 당(唐)의 골리간(骨利干, 원(元)의 아라사(鄂罗斯)와 키르기즈(吉利吉思), 청(淸)의 羅刹 /車漢 /羅禪이라고 기록해 놓았다,
이곳에는 특이한 현상이 나타나는데 그것이 바로 '백야현상'이다.
《당서(唐書)》 회흘전(回紇傳)에 이런 말이 있다.
"몽고(蒙古)의 사막(沙漠) 북쪽에 골리간(骨利幹)이라는 곳이 있다. 이곳에서는 해가 지고 나서 양고기를 삶기 시작해서 고기가 익을 때쯤이면 해가 뜬다." 여기에서는 시기를 말하지 않았으나 이때는 춘분(春分)과 추분(秋分)의 전후(前後)였을 것이다. 북쪽 끝의 지역에는 여름날이 이렇게 긴데, 온성의 여름날이 탐라보다 길지 않을 수 있겠는가. 최고의 북극(北極) 지역에서 해가 제일 긴 시기(時期)는 춘분 전과 추분 후로 이때에는 순전히 낮만 계속된다.
<다산시문집 제11권 논(論) 온성론(穩城論)>
<백야현상>
위도 대략 48 ° 이상인 고위도 지방에서는 한여름에 태양이 지평선 아래 18 ° 이하로 내려가지 않기 때문에 생긴다. 백야가 되는 지역과 그 기간은 다음 식으로 알 수 있다.
90 °-φ-δ<18 ° 여기서 φ는 관측점의 위도, δ는 태양의 적위이다.
예를 들면, 북위 60 °에서는 90 °-60 °-18 °<δ가 되어, δ>12 °인 기간 동안 백야현상이 생긴다. 한편, 태양의 적위는 동지 또는 하지 때 최고 23.5 °에 이르므로 위도 48 ° 이하 지역에서는 백야현상을 볼 수 없다. 백야현상은 북극 지방에서는 하지 무렵에, 남극 지방에서는 동지 무렵에 일어나며, 가장 긴 곳은 6개월이나 계속된다.
백야 현상(白夜現象)은 위도가 높은 지역에서 여름 동안 밤에 어두워지지 않는 현상을 말한다. ‘하얀 밤’이라는 표현은 러시아에서 쓰는 것으로, 스웨덴 등 다른 지방에서는 이를 ‘한밤의 태양’으로 부른다. http://ko.wikipedia.org/wiki/
백야현상은 스칸디나비아반도, 러시아 모스크바 이북지역에서 관측할 수 있는 것으로, 라선정벌은 모스크바 공국의 알렉세이의 반란을 진압한 것으로 보이며, 그 전투 위치는 흑룡강 일대라고 성호사설과, 연경재전집등에 기록되어 있다. 또한 '다산시문집'의 온성론에 등장하는 것으로 보아 라선정벌은 온성도호부 관할지역에서 벌어진 사건이며이 그 시기는, 효종 1651~ 1658년이다.
【건치연혁】 본래 고구려의 영토인데, 비어 있는 틈을 타서 여진이 들어와 살면서 명칭을 다온평(多溫平)이라 하였다. 우리 왕조 세종(世宗) 22년에 처음으로 군(郡)을 설치하면서 현재의 명칭으로 고치고, 경원(慶源) 및 길주(吉州)의 남쪽과 안변(安邊)의 북쪽에 있는 여러 고을 백성의 세대를 이곳으로 옮겨 살게 하였다. 23년에 도호부(都護府)로 승격시키고 판관(判官)을 두고 토관(土官)을 설치하였다. 24년에는 진(鎭)을 설치하였다.
【진관】 보(堡) 1개소 영건(永建).
【관원】 부사(府使)ㆍ판관(判官)ㆍ교수(敎授) 각 1인.
【토관】경원부(慶源府)와 같음.
【군명】 다온평(多溫平)ㆍ전성(氈城).
【제영】 국경의 달, 오랑캐의 피리 소리에 나그네가 근심한다 신숙주(申叔舟)의 시에, “국경의 달 오랑캐의 피리 소리는 오랜 나그네를 근심하게 하고, 산의 꽃 계곡의 버들은 개인 날씨에 아름답구나.” 하였다. 국경의 성에 오랜 나그네가 늦은 봄을 전송한다. 앞사람의 시에, “국경의 성에 오랜 나그네가 늦은 봄을 전송하노니, 제철의 물건들은 어지러이 눈에 닿는대로 새롭기만 하여라. 금(金) 나라 사람들 그때의 사실을 물어보려 하노니, 어느 누가 당시의 남은 백성이더냐.” 하였다. 거진(巨鎭)을 새로 옮겨 긴 강을 등지고 있구나 앞사람의 시에, “거진(巨鎭)을 새로 옮겨 긴 강물을 등지고 있으니, 눈앞에 아득하다. 국경 밖의 하늘이여, 태수(太守)가 일하는 것이 참으로 노련한 솜씨이니, 훌륭한 이름이 이제부터 알려지리라.” 하였다.
<신증동국여지승람 제50권 함경도(咸鏡道) 온성도호부(穩城都護府) >
동시대 유럽에서는 (폴란드-러시아 전쟁 (1654년-1667년)이 일어났으며. 얼마되지 않은 후 러, 청간에 네르친스크 (尼布楚) 조약을 (1689년)을 체결한다다..
*나선정벌 [羅禪征伐] (1651 - 1658 6, 10)
*폴란드-러시아 전쟁 (1654년-1667년)
*네르친스크 조약 [Treaty of Nerchinsk, ― 尼布楚條約]1689년
필자가 인용한 차한일기의 마지막 구절을 보자
其地與黑龍江所轄北境接界。西接西洋
[그 땅은 흑룡강 관할 지역과 북쪽으로 경계하고 있으며, 서쪽으로는 서양과 접한다.]
여기서 그 땅은 현 러시아의 모스크바 일대와 그 이북지방이며, 옛적에는 골리간, 키르기즈, 정령의 땅이었으며 조․청이 관할 하는 흑룡강(鎭)의 북쪽이 그 경계이자, 그땅의 서쪽이 서양이라 하고 있다.
30여년 전에 현 모스크바와 상트페테 부르크에 걸쳐있던 러시아가 30년만에 시베리아를 넘어 현재의 흑룡강[黑龍江], 아무르강 유역으로 갑자기 쳐들어 와서는 네르친스크 조약을 성사시킨다.
과연 그들이 그러한 원정을 수행할 능력이 있었을까?
폴란드- 러시아전쟁(1654년-1667년)은 모스크바 공국이었던 러시아 로마노프왕조가 코자크(Cossak)와 합세하고 폴란드 리투아니아 연방은 크리미안 타타르(Crimean Tatar)와 연합전선을 표방하고는 양국이 국운을 건 긴 전쟁이었다.
<위키백과에 나온 폴란드 러시아 전쟁도>
라선 정벌은 1651년(효종 2)에 흑룡강의 우안(右岸)에 알바진(Albazin) 성을 쌓아
군사 기지로 삼고, 다음해 우수리 강[鳥蘇里江]하구에 새로 성을 쌓으려 하여,
이를 저지하기 위함인데, 이 라선은 러시아로, 옛 골리간, 정령, 키르기즈라고 한다.
국사에서 설명하는 지도와는 매우 다르다.
<라선정벌도> - 다움백과 브리태니커
위에 보이는 지도에서 연길 바로 오른쪽 두만강이 꺽이는 지점이 현 함북 온성이다.
조선 후기의 실학의 거두 정약용 선생을 새빨간 거짓말 쟁이로 만들어 놓았다.
조선총독부와 서세의 조작자들의 당초 목적이 이러한 것이었다. 자신의 선조들을
미워하게 하는 것!!
라선정벌과 네르친스크 조약 사이에 폴란드- 러시아 전쟁이 이미 벌어졌고
그 동기 또한 매우 흡사하다.
폴란드 - 러시아 전쟁의 발단은
1651년 젬스키 소보르(러시아 의회)와 우크라이나 코사크들이 연합하여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에 대해 일으킨 흐멜니츠키의 반란이며,
코사크는 cossack/ kazak/ 으로 표기하며, 군사연합 공동체로, 전투에 능하고,
특히 기병전에 능하여 제정 러시아의 동방진출의 일등공신으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코사크cossack(s)는 kazak 이며 kazakh = 哈薩克= 奄蔡 이다.
이 코사크들의 주요 본거지는 돈강과 카프카스 북쪽과 남쪽의 그루지야 ,남러시아,
우크라이나 일대이다. (폴, 러 전투지역은 현 스몰렌스크 Smolensk 일대를 중심으로)
따라서 원래의 카자흐스탄은 우크라이나 일대에 있어야 하는 것이 마땅하며
현 카자흐스탄이니 키르기스탄, 타직키스탄,신강의 이리지역등의 본 위치는
동유럽에서 동쪽으로 강제적으로 옮겨진 지명이다.
참고로 이리의 정식 행정구역 명은 중화인민공화국
키르키스 초원은 현 카자흐스탄 서부 우랄강 유역에 있다.
결국 이리조약이라는 것은 그루지야 조약으로 불러야 마땅한 것이며,
네르친스크 : 尼布楚는 카프카스의 북쪽과 우랄산맥 이서 지역에서 찾아야 하며
서구 열강이 '그레이트게임'을 통해 중앙아시아를 장악하고 ,서세동점을 11881년 이리조약으로 완성시키기 전까지는 이리伊犁라는 지명도 그루지야와 현 오세티야 지역에서 있던 지명이며,
러시아는 러시아-투르크 전쟁(1877~78)으로 비로소 카프카스로 진출했으며, 따라서 아제르바이잔과
체결했다던 고레스탄 조약 (1813년), 차이조약(1828)은 신뢰할 수 없다.
1881년에 체결된 이리조약의 다음해인 1882년에 임오군란이 일어나고, 그 이후 신강지역으로 실크로드의 악마들이 몰려들어 유물약탈쟁탈전이라는 조선사 최대의 비극이 펼쳐지게 된다.
따라서 이리, 서역회부 , 고대 정령(키르기즈)의 서남에 있었다는 오손(烏孫)의 위치 역시 재고해 볼 문제이다.
첫댓글 현재 역사에서 나선정벌의 주체가 청으로 알고 있는데 조선인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