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래]
시조 이천일(李天一)은 신라 때 사람으로 문장가로 이름을 날려 기원전 53년(신라 박혁거세 5년)에 한나라에 들어가 대사마(大司馬) 대장군(司馬大將軍)이 되어 흉노적(匈奴賊) 정벌에 공을 세워 요동백(遼東伯)이 되었다.
병으로 귀국하여 여러 벼슬을 거쳐 문하시중 평장사(門下侍中 平章事)에 이르고 공산부원군(公山府院君, 공주)에 봉해졌다. 시호(諡號)는 문무(文武)이다.
그래서 후손들이 공주를 본관으로 하여 세계를 계승하고 있으며 공산이씨(시조는 이응규: 李應圭) 로 부르는 종문이 있으나 같은 집안이다.
또한 31세 이백령(李栢齡)이 양산이씨, 34세 이자송(李子松)이 수원이씨로 갈라졌다.
-시조묘소는 충남 공주군 월송동 충절사에 단을 세우고 매년 음력 10월 5일에 향사한다.
[가문의번영]
공주이씨는 조선시대에 들어서 번성하여 조선에서 문과 급제자 13명을 배출하였다.
조선초의 이명덕(李明德)은 1396년에 생원으로 식년문과(式年文科)에 급제, 대사헌(大司憲), 동지총제를 거쳐 판중추원사(判中樞院事)에 승진하고 궤장을 하사받았다.
인조 때의 이건(李鍵)은 1624년 정시문과(庭試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하고 6조판서(六曺判書)를 거쳐 우의정(右議政)에 이르렀으며, 이붕수(李鵬壽)는 1592년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켜 길주, 서천 등지의 싸움에서 공을 세우고 옥탑평(玉搭坪) 싸움에서 전사했다. 전공으로 지평(持平)에 추증되고 뒤에 다시 감찰(監察)에 가증(加贈)되었다.
이응거(李膺擧)는 1788년 학행과 효행으로 천거되어 숭례전랑(崇禮殿郞)이 되었다. 그후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 도총관을 거쳐 한성부판윤(漢城府判尹)에 이르렀다.
이원배(李元培)는 조선 정조 때의 인물로서 1798년 추천을 받아 왕 앞에 나아가서 구경(九經)에 대한 질문에 적절하게 대답하여 많은 상을 받았다. 1801년 장릉령(莊陵令)에 보직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구한말의 인물인 이봉창(李奉昌)은 서울 출신으로 19세 때 용산역 만철견습소에 입소하여 1924년에 퇴직하고 1931년 상해로 건너가 한인애국단에 가입, 김구와 접촉하며 일본천황의 암살을 기도하고 기회를 노렸으나 실패하고 말았다. 후에 시곡형무소(市谷刑務所)에서 사형당했으며 1962년 대한민국건국공로훈장 복장이 수여되었다.
[계 파]
공주이씨는 조선초 강원도관찰사를 지낸 39세손 이엽(曄)과 의정부참지사를 지낸 이서(李曙)의 아들대에서 7파로 갈라졌다.
그 중 종파인 경력공파에서 많은 인물이 나왔고 후손도 가장 많다.
-경력공파(經歷公派) : 40세손 이명선(李明善)을 파조로 한다.
-어사공파(御史公派) : 40세손 이명성(李明誠)을 파조로 한다.
-공숙공파(恭肅公派) : 40세손 이명덕(李明德)을 파조로 한다.
-지평공파(持平公派) : 40세손 이명보(李明保)를 파조로 한다.
-참의공파(參議公派) : 40세손 이명윤(李明尹)을 파조로 한다.
-현감공파(縣監公派) : 40세손 이명의(李明義)를 파조로 한다.
-강양공파(剛襄公派) : 40세손 이부(李敷)를 파조로 한다.
[유래]
시조 이식(李軾)은 고려 충렬왕 때 국자진사(國子進士)로 송악 군수(松岳郡守)를 역임하였다.
시조 이식의 6세손 이자가 담양교도(潭陽敎導)를 지낼때까지 모두 6대에 걸쳐 진사(進士)를 지냈고, 후손들이 사천에서 여러대에 걸쳐 살면서 동성을 본관으로 하고 있다.
동성이씨의 선대(先代)는 중국 농서이씨 이익(李益)의 후손으로 되어있는 족보도 있으나 이를 인정하지 않는다.
[본관지] 동성 : 경상남도 사천시의 옛이름이다.
[ 인 구 ] 1985년 인구조사에서는 동성 2,538, 사천 4,560명이 있었다.
3.진안이씨(鎭安李氏)
[유래]
진안이씨의 이특룡(李特龍)은 진안 사람으로 학문과 덕행이 뛰어나 진사(進士)에 급제한 후 여러 차례 시정(時政)을 바로잡기 위한 상소를 하다가 안화(정주)로 유배되었다.
그의 후손들이 안화에 정착하여 살면서 그에 대한 사적을 알고자 하였으나 수차의 전쟁으로 소실되어 알 길이 없어 그가 살던 진안을 본관으로 하였다.
시조 이교(李校)는 고려 말에 보문각 직제학(寶文閣直提學)으로 있으면서 날로 기울어져 가는 국운을 그대로 볼 수가 없어 왕에게 구국의 방도를 상소하였지만 가납되지 않고 오히려 간신들의 참소를 받아 월랑(月浪 : 지금의 鎭安)으로 유배되었다. 그 후 조선 개국 후 태조 이성계가 누차 불렀으나 끝내 사양하고 불사이군의 충절을 지켰다.
본관은 시조가 유배된 당시의 지명이 월랑현(月浪縣)이었기 때문에 월랑으로 하다가 1413년(태종13) 진안으로 개칭됨에 따라 진안으로 고쳐 부르고 있다. 진안군 진안읍 군하리에 시조의 단을 모아 매년 음력 10월 초정일(初丁日)에 향사하고 있다.
[가문의번영]
조선시대에 직장(直長)을 지낸 이득림(李得霖)을 비롯하여 부호군의 이승영(李承榮), 사정(寺正) 이승빈(李承彬), 권관(權管) 이정남(李貞南), 만호(萬戶) 이두장(李杜章), 별장(別將) 이여각(李汝覺), 첨정(僉正) 이이각(李而覺), 주부(主簿) 이대춘(李待春), 만호(萬戶) 이대의(李大義), 판관(判官) 이천춘(李千春) 등을 들 수 있다.
관직이 내자정(內資正)에 오른 이인현(李仁賢)과 사직(司直) 이원엽(李元葉),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 이진화(李鎭華), 별장 이진열(李進說), 부호군 이하적(李夏迪), 중추부사 이경보(李景補), 부호군 이두병(李斗柄) 등은 당대 진안이씨 가문을 빛낸 인물들이었다.
이인현(李仁賢)은 이영준의 아들로 중종 때 문과에 급제, 종부시정(宗簿侍正) 겸 춘추관 편수관(春秋館編修官)을 지내고 대사성(大司成)에 이르렀다. 그는 학문이 뛰어난 대학자로 명나라에 사신으로 갔을 때 문명을 떨쳤고, 죽은 뒤에 명나라 조정에서 <유명조선국 통훈대부 종부시정 겸 춘추편수관 대사성 이공묘(有明朝鮮國通訓大夫宗簿寺正兼春秋編修官大司成李公墓)>라는 비문(碑文)과 비(碑)를 보내 묘소에 세워졌다.
[집성촌]
평북 선천군, 철산군 일원
평북 용천군 외상면 일원
평북 박천군 양가면 서동동
[본관지] 전라북도 진안군
[ 인 구 ] 1985년 인구조사에서는 2,861명이 있었다.
4.봉산이씨(鳳山李氏)
[유래]
시조 이수(李隨)는 고려 공민왕 23년 태어나 조선 태종 때 문과에 급제하여 예문관 대제학(藝文館大提學), 의정부 참찬(議政府參贊) 등을 역임하고 모친상을 당하자 사직했다가 후에 이조(吏曺)와 병조판서(兵曺判書)에 이르렀으나 취중에 말에서 떨어져 사망했다.
문장과 덕행이 높아 충령대군(忠寧大君. 세종)의 사부가 되었고 봉산 토지를 하사받아 후손들이 그곳에 살면서 본관을 봉산으로 하고 있다.
[가문의번영]
조선시대에 지평(持平)을 지낸 이균종(李龜從)을 비롯하여 호조 좌랑(戶曺佐郞) 이서종(李筮從), 현령(縣令) 이즙(李楫), 부사(府使) 이복종(李福從), 참봉(參奉) 이길종(李吉從), 병마사(兵馬使) 이팽구(李彭丘), 판윤(判尹) 이탄(李坦), 군자감정(軍資監正) 이숭조(李崇祚), 선전관(宣傳官) 이덕(李德), 부사과(副司果) 이계한(李繼漢), 우후(虞候) 이질, 이돈,현감 이두명(李斗明), 판관(判官) 이귀서(李貴恕) 등이 그 대표적인 인물로 꼽힌다.
그밖에 판관에 오른 이석재(李碩梓), 참봉(參奉) 이수생(李秀生), 참판(參判) 이익기(李翊奇), 총관 이연준(李延俊), 오위장(五衛將) 이학종(李學從), 돈영부도정(敦寧府都正) 이영욱(李永旭) 등의 인물과
또 효자로 이름을 날렸던 이응열(李應說), 이종함(李宗涵), 이준일(李俊一), 이병관, 이덕성(李德成) 등의 이름이 전해온다.
[유래]
시조 김장수(金長壽. 호는 포제, 시호는 충간)는 염주인(鹽州人-延安)으로 일찍이 당나라 명신(明臣) 초은(樵隱) 이인복(李仁復 : 성주 이씨)의 문하(門下)에서 학문(學問)을 닦아 지식이 해박하고 경술(經術)이 뛰어났으며, 1361년(공민왕 10) 상호군(上護軍)으로 홍건적(紅巾賊)을 격퇴하는 데 공을 세워 중랑장(中郞將) 겸 도지휘사(都指揮使)에 올랐다. 1363년(공민왕 12) 중신(重臣) 김 용(金 鏞)이 공민왕(恭愍王)이 흥왕사(興王寺)에 있음을 기회로 왕을 시해(弑害)하려고 하자 상장군(上將軍)으로 이를 평정(平定)하려 싸우다가 순절하였다.
파평 김씨(坡平金氏)는 신라 경순왕(敬順王)의 후손으로 전하나 고증(考證)할 문헌(文獻)이 없어 상고(祥考)할 수 없다. [파평김씨신해보(坡平金氏辛亥譜)]에 의하면 시조(始祖) 김장수(金長壽)는 홍건적(紅巾賊)의 난(亂)이 평정(平定)되자 왕이 그의 절의를 가상히 여겨 일등공신(一等功臣)에 책록하고 봉익대부(奉翊大夫)로 개성윤(開城尹)에 추증하였으며 파평군(坡平君)에 추봉(追封)한 후 시호(諡號)를 충간(忠簡)으로 하사(下賜)하였다고 한다. 그리하여 후손들은 본관(本貫)을 파평(坡平)으로 삼게 되었다.
[인구] 2,112명이 있다.(1985년)
6.해주최씨(海州崔氏)
[유래]
시조 최온(崔溫)은 널리 알려진 해동공자(海東孔子) 최충의 아버지로 해주 대령군 수양산 밑에서 오래동안 살았다고 하며 그곳의 별칭이 고죽군이어서 고죽최씨라고도 한다. 시조 최온은 일찌기 해주 목민관(牧民官)으로서 선정을 베풀어 이름을 떨쳤으며 문장으로도 명성이 높았고, 뒤에 판이부사(判吏部事)를 지냈다. 이러한 모든 것이 해주에서 이루어졌고 또 여러 대에 걸쳐 해주에 살았으므로 후손들이 본관을 해주로 하여 대를 계승하고 있다.
[ 대표적 인물 ]
- 최충(崔沖 984-1068) : 최온의 아들. 자는 호연(浩然), 호는 성재(惺齋)·월포(月圃)·방회재(放晦齋), 시호는 문헌(文憲)
동방 유학(儒學)의 비조(鼻祖).1005년(고려목종8) 문과에 장원, 문종때 문하시중(門下侍中)을 지내고 은퇴하여 開京에 최초의 사학(私學)인 구제학당(九齊學堂)을 열어 많은 영재를 배출하였다. 1055년(문종 9) 내사령(內史令)으로 치사(致仕)한 뒤 사숙을 열어 많은 인재를 배출하였으며 그의 제자들은 문헌공도(文憲公徒)라 불리웠다. 그의 두 아들 최유선(惟善)과 최유길(惟吉)은 모두 宰相의 자리에 올라 부자 2 대에 名門의 기반을 확고히 다지게 된다.고려사열전(高麗史列傳)에 의하면 "동방 학교의 일어남이 최충에서 비롯되었고 최충의 자손으로 재상에 오른 사람이 수십명이 된다"고 했다.
- 최경회(崔慶會) : 그 유명한 논개(論介)의 남편으로 전해진다. 논개는 사실 기생이 아니고 최경회의 부실(副室)로 남편이 진주에서 전사하자 기생을 가장, 왜장들의 승전축하연에 참석해 왜장을 안고 투신했다고 밝혀지고 있다.
[인구] 161,782명이 있다.(1985년)
7.양주최씨(楊州崔氏)
[유래]
시조 최억(崔億, 시호는 문경)은 학문과 덕행이 높아 태사에 천거되고 1353년(고려 공민왕 2년)에 호부상서로 양주군에 봉해져서 후손들이 본관을 양주로 하였다.
- 묘소는 충북 청원군에 있다.
[인구] 4,370명이 있다.(1985년)
8.거창유씨(居昌劉氏)
[유래]
유씨는 원래 중국 제요의 후손이 유땅에 봉해지면서 유씨로 성을 받은 것이다. 그후 수천년을 지나 초한 시대에 이르러 유방(한고조)이 중원을 통일하고 한제국을 창건하면서 유씨가 두각을 나타내게 되었다.
우리나라 유씨의 도시조인 유전(劉筌, 시호는 문양)은 한고조의 41세손으로 도학과 문장이 뛰어났고 송나라에서 벼슬이 병부상서에 이르렀다.
그는 1082년(고려 문종 36년) 8학사의 일원으로 고려에 들어온 후 경북 영일군에 정착하여 살았으며 고려 공민왕 때에 이르러 특명으로 그를 위한 사우가 건립되고 고려 태조와 함께 7왕을 모신 숭의전에 배향되고 있다.
거창 유씨 - 유전의 첫째 아들 유견규가 거타(거창)군에 봉해져 후손들이 본관을 거창으로 했다.
강릉(江陵) 유씨 - 유전의 12세손인 유창이 조선개국공신 2등으로 옥천(강릉) 부원군에 봉해져서 본관을 강릉으로 하였다.
백천(白川) 유씨 - 유전의 8세손 유국추가 배천군에 봉해져서 본관을 백천으로 하였다.
[유래]
시조 정배걸(鄭倍傑)은 초계성산(草溪城山)에 정착해 살았으나 그 선조에 대해서는알 수 없다.
그는 1017년(고려현종8년) 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고 문종 때 예부상서, 중추원부사를 지냈으며 사학을 창시하여 홍문공도(弘文公徒)를 이루었는데 12공도 중 문헌공도(文憲公徒)와 함께 최성(最盛)하여 유가(儒家)의 대가요, 백세의 존사(尊師)라 일컬었다. 홍문광학 추성찬화공신(弘文廣學 推誠贊化功臣)으로 문하시중 상주국 광유후(門下侍中 上柱國 光儒侯)에 이르고 초계군에 봉해졌다.
그래서 후손들이 초계를 본관으로 삼았다.
[가문의번영]
조선시대 57명의 문과급제자를 배출하였다.
고려 때 예부상서를 지낸 정문(鄭文)을 비롯하여 조선시대에 우참찬의 관직에 오른 정엽(鄭曄), 우찬성 정종영(鄭宗榮), 한성부좌윤 정기광(鄭基廣), 대제학 정선등을 그대표적 인물로 꼽는다.
우참찬(右參贊) 정화는 1583년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승문원에 등용되고 1587년 감찰, 형조좌랑을 거쳐 1593년 광주판관으로서 왜군을 격퇴한 공으로 중화부사(中和府使)가 되었다. 그후 대사간, 공조참판등을 역임한 뒤 1617년 폐모론이 일어나자 자원하여 양양부사로 나갔다가 1년만에 사퇴하였으며 1623년 인조반정 후 대사성(大使成) 겸 동지경연(同知經筵)이 되었고 대사헌, 우참찬 등을지냈다.
대표적 인물은 이조참판 정온(鄭蘊)이다. 그는 성품 이 곧고 절개가 높기로 유명하여 광해군 6년에 강화도에 귀양가있던 영창대군이 죽음을 당하자 그 하수인 강화부사 정항의 처형을 주장, 광해군의 비위를 거슬려 10년 동안이나 제주도에서 귀양살이를 겪었다. 귀양생활 중에 지은 "망북두시(望北斗詩)", "망백운가(望白雲歌)" 등은 그의 애군우국(愛君憂國)의 뜻을 토로한 것이었다. 그 뒤 인조반정으로 풀려나와 경상도 관찰사, 부제학 등을 역임하고 이조참판에 이르러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김상헌(金尙憲) 등과 함께 척화(斥和)를 주장했으나 마침내 화의가 성립되자 벼슬을 버리고 덕유산에 들어가 은둔생활을 하였다.
[본관지] 경상남도 합천군 초계면
[ 인 구 ] 1985년 인구조사에서는 83,311명이 있었다.
10.횡성조씨(橫城趙氏)
[유래]
시조는 조익(趙翌)으로 조욱(趙昱)이라고도 하는데 고려사 연표에는 조익으로 적혀있다.
중국 주나라의 목왕(穆王)이 서언왕(徐堰王)을 정벌할 때 조부(造夫)가 공을 세워 조성(趙城)에 봉해졌으므로 나라이름을 따서 성을 조씨라고 하여 조씨가 시작되었다 한다. 그후 주나라가 진나라 안국군(安國君)에게 망한 후 고려 정종 때 조첨(趙瞻)이 우리나라에 들어와 평장사(平章事)를 지냈다고 한다.
시조 조익(趙翌)은 조첨(趙瞻)의 후손(일부 기록은 아들로 되어있음)으로 965년(고려 광종 9년) 처음 실시한 과거에 장원급제하고, 벼슬이 한림학사에 이른 그의 품행이 깨끗하고 덕이 높아 광종이 횡성군에 봉함으로써 후손들이 본관을 횡성으로 하였다.
[가문의번영]
고려시대에 문하시중을 지낸 조승인(趙承藺)을 비롯하여 중서승(中書丞)을 지낸 조주조(趙周祚), 합문저후를 지낸 조정신(趙正臣), 상서의 조시언(趙時彦) 등 많은 관직자를 배출하면서 가문이 번영하였다.
조영인(趙永仁)은 고려 의종 때 문과에 급제하여 기사를 지내다가 명종이 즉위하자 태자의 보도(輔導)를 맡았는데 1174년 좌사원외랑(左司員外郞)으로 정조사가 되어 금나라에 다녀왔으며 참지정사, 문하시랑평장사를 역임하고 1201년 특명으로 문하시중에 올랐다.
조영인의 아들 조충(趙沖)은 음보로 벼슬에 등용된 후 명종 때 문과에 급제하고 동지공거(同知貢擧)를 역임하고 문무를 겸비해 거란군을 대파했으며 평장사에 이르렀다.
조계순은 평장사를 지냈고, 조변은 원종 때에 낭장 겸 감찰사(郞將 兼 監察史)를 지내고 1284년 대장군을 거쳐 우부승지를 역임하고 지밀직사사(知密直司事)에 이르렀는데 전고(典故)에 통달한 인물이었다.
조선 인조 때의 인물인 조응영(趙應榮)은 1627년 이인거(李仁居)가 횡성서 변란을 일으켰을 때 토평에 공을 세워 소무원종공신(昭武原從功臣)에 책록되었고, 선조 때의 조목(趙穆)은 이황(李晃)의 문하생으로 공조참판을 역임, 일생을 학문에만 힘써 대학자로 존경을 받았으며 문장과 글씨에도 뛰어나 "월천집(月川集)" "곤지잡록(困知雜錄)" 등의 저서를 남겼다. 그리고
조신인(趙臣仁)은 도승지, 조성입(趙誠立)은 목사를 지내면서 선정을 베풀었고, 조정입(趙正立)은 직제학, 조식(趙湜)은 관찰사를 역임하였다.
[유래]
시조 조용(趙庸)은 배천조씨의 시조 조지린의 11세손으로 1374년(고려 공민왕) 문과(文科)에 장원급제하고, 벼슬은 정헌대부, 예의판서, 좌찬성 겸 수전대제학을 역임했다.
그는 정몽주의 문인으로서 문장과 학행이 탁월하였는데 1392년(태조 1년) 조선이 개국되면서 벼슬에서 물러나 야주군(夜珠郡 : 예천)에 은거(隱居)하자 조정에서는 그의 절의를 가상히 여겨 진보군에 봉하하였다.
그가 죽은 후 학문과 품행을 추모한 후손들이 예천에 향현사를 건립하여 그를 제향케 했으며,시호는 문정이며 조정에서는 예문관 대제학을 증직하였다.
그뒤 후손들이 배천에서 분관하여 진보를 본관으로 하였다.
[가문의번영]
조선시대에 평사(評事)를 지낸 조이(趙耳)를 비롯하여 현령을 지낸 조담, 병마절도사를 지낸 조청(趙聽), 녹사(錄事)를 지낸 조극인(趙克仁), 사직(司直)의 조문행(趙文行), 첨절제사(僉節制使)의 조무행(趙武行) 등 관료들을 배출하였다.
조선(趙瑄)은 도호부사를 지냈고, 조충준(趙忠俊)은 만호를 지냈으며, 조충걸(趙忠傑)은 부호군, 조립은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를 역임하였다.
[본관지] 경상북도 청송군 진보면
[ 인 구 ] 1985년 인구조사에서는 734명이 있었다.
12.안동장씨(安東張氏)
[유래]
시조 장정필(張貞弼, 888~?, 시호는 충헌)은 중국 절강성 소흥부에서 대사마장군인 장원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가 5살 되던 892년(신라 진성여왕 4년) 아버지가 나라 정치가 문란하자 이를 피해 신라에 망명 할 때에 따라 들어와서 강릉에 살다가 경북 노전으로 이사하여 정착하였다.
그후 18세 때에 중국으로 파견하는 정조사를 따라 다시 중국에 들어가 24세 때에 문과에 장원 하였으나 벼슬을 사양하고 입산하여 제자를 가르쳤다. 문장과 덕행이 뛰어나 명성이 천자에게 까지 알려져서 한때 벼슬이 이부상서에 까지 올랐으나 벼슬을 버리고 우리나라에 다시 들어와 경북 인동 노전에서 제자들에게 학문을 가르쳤다.
930년(경순왕 4년)에 김선평, 권행과 함께 향병을 모아 고려 태조를 도와 고창(안동)군에서 견훤을 토벌하여 병산대첩의 전공을 세운 삼태사(三太師) 중의 한 사람이다. 그 공으로 삼중대광보사벽상공신 태사에 오르고 고창(안동)군에 봉해져서 후손들이 본관을 안동으로 하였다.
- 경북 인동 노산서원과 안동시 북문동 삼태사묘 에서 제향한다
[ 대표적 인물 ]
- 장사길(思吉) : 의주의 토호로서 1390년(고려 공양왕 2) 밀직부사로 이성계의 위화도회군에 공을 세워 회군공신이 되었고, 조선 개국에도 공을 세워 개국공신 1등으로 중추원지사에 올랐다.
- 장철(哲) : 장사길의 아들. 고려 말기 무과에 급제하여 1388년(우왕 14) 아버지와 함께 위화도회군에 공을 세웠고 첨절제사, 영흥부사 등을 지냈다.
- 그밖에 학자로는 장흥효(興孝), 장세량(世良) 등이 있으며, 홍경래의 난 때 크게 공을 세운 장몽열(夢說), 장낙현(洛賢) 부자도 있다.
[인구] 64,814명이 있다.(1985년)
13.남양홍씨(南陽洪氏) - 당홍계(唐洪系)
[유래]
시조 홍천하는 고구려 27대 왕인 영유왕때 중국 당나라에서 8학사의 한사람으로 우리나라에 들어와 유학과 문화를 혁신시켰다. 신라 27대왕인 선덕여왕때 유학의 발전에 공을 세워 당성(남양)백에 봉해졌고 태자태사가 되었으며 본관을 당성으로 하였다. 당성이 후에 남양으로 지명이 바뀌어 본관을 남양으로 하고있다.
그리고 고려 개국공신며 삼중대광태사인 홍은열을 중시조로 1세 조상으로 하여 대를 잇고 있다. 홍은열은 원래 이름이 홍유(儒)이었는데 고려 개국에 공을 세워 태조가 '은(殷)나라 부열(傅說 : 중국 은나라 고종 때의 명재상)과 같다.'며 이름을 은열로 하사 했다고 한다.
회인 홍씨도 후에 합본하였다고 한다.
[ 대표적 인물 ]
- 홍처량(處亮) : 숙종 때 예조판서를 지냈다.
- 홍명원(命元) : 인조 때 시문으로 이름을 떨쳤다.
- 홍계희(啓禧) : 영조 때 이조판서를 지냈다.
- 홍명하(命夏) : 현종 때 영의정을 지내고 청백리에 올랐다.
[인구] 382,077명이 있다.(1985년)
14.풍산심씨(豊山沈氏)
[유래]
시조 심만승(沈滿升)은 원래 중국 오흥 사람으로 1110년(예종5년) 동료 호종단(胡宗旦:복주인)·유 재(劉 載)·안신지(安愼之) 등과 함께 상선(商船)을 따라 동래하여 태백산 아래인 풍산현에 정착 하였다.그는 문장이 뛰어나 왕의 총애를 받았으며 청환직에 발탁되고 1114년(예종 9년) 태자첨사부첨사에 오르고 풍산에 대대로 살았으므로 후손들이 풍산을 본관으로 였다.
[인구] 12,024명이 있다.(1985년)
15.봉화금씨(奉化琴氏)
[유래]
금씨(琴氏)의 본관은 봉화(奉化) 외에도 계양(桂陽:金浦)·강화(江華)·안동(安東)·평해(平海)·문화(文化) 등이 문헌에 전해지고 있으나 모두가 봉화금씨(奉化琴氏)의 분파이고, 봉화의 옛이름이 봉성(鳳城)인 까닭에 봉성금씨(鳳城琴氏)라고도 하였으나 현재는 봉화금씨로 일원화되었다.
시조는 고려 초의 삼한공신(三韓功臣)인 태사(太師) 금용식(琴容式)으로 일찍이 기자(箕子)와 함께 우리나라에 온 금응(琴應)의 후손이라고 한다. 그러나 금응으로부터 금용식까지의 세계를 상고할 수 없고, 또 금용식으로부터 6세 내지 8세의 세계가 실전되어 금의(琴儀: 초명 克儀, 자 節之, 시호 英烈)를 1세조로 하고 있다. 금의는 금씨 성을 쓰는 인물 중 우리나라 역사와 문헌에 등장하는 최초의 인물로 고려 명종·신종·강종·고종 4조를 섬기며 수태보(守太保)·문하시랑(門下侍郞)·동중서문하시랑 평장사(同中書門下侍郞平章事)·판이부사(判吏部事)로 벽상공신(壁上功臣)에 오르고 김포(金浦)로 적(籍)을 받은 당대의 명신이다.
중시조가 적을 받은 곳이 김포라면 금씨의 본관은 의당 김포라야 할 터인데 어째서 봉화로 관직을 했는지 그 사유에 대해서는 자세히 알 수 없다. 《봉화금씨세보(奉化琴氏世譜)》에 의하면 <영렬공(英烈公) 의(儀)의 본관이 김포인데 그 자손은 모두 봉성(鳳城)으로 관적을 했으니 이것이 어느 대부터 그렇게 되었는지 알 수 없다.>하였고, 또 <시조 금용식으로부터 금의에 이르기까지 본관을 봉성으로 하다가 금의가 김포로 사관(賜貫)을 받았으면 그 후손은 마땅히 김포로 따라야 할 것인데 어째서 봉성으로 하였는지 알 수 없는 일이다. 혹시 금의가 김포로 적을 받았다가 당대에 다시 봉성으로 복관을 했는지 알 수 없다.>고 하였다.
-중시조의 묘소는 김포의 봉황산(鳳凰山)에 있으며 1727년 봉화의 하눌재 (下訥齋) 에 단을 모아 향사하고 있다.
금용식의 7세손 금의와 금부를 중시조로 하고 있다.
금의는 고려 명종과 고종사이의 명신이었으며, 문장이 뛰어나 금학사라는 별칭을 가졌고 관직은 평장사에 이르렀다.
[인구] 19,681명이 있다.(1985년)
16.감천문씨(甘泉文氏)
[유래]
감천 문씨의 시조는 문세광이며,문원길의 선조는 원래 경주 김씨 헌안왕자의 17세손 김세광 이며 중국에 들어가 글씨로 이름을 떨쳐서 문씨(文氏)로 성을 하사 받았다고 한다. 그러나 자식이 없어서 외손자가 성을 이었다고 한다.
감천문씨(甘泉文氏)는 남평문씨(南平文氏)의 지파로 조선 초에 좌의정을 지내고 감천군에 봉해진 문구(文龜)의 후손들이 그를 시조로 하고 본관을 감천으로 하여 세계를 이어왔다. 그러나 문구는 남평문씨 1세조 경절공(敬節公) 익(翼)의 12세손이요, 고려조에 집현전 태학사에 이어 평장사를 지낸 양간공(寶簡公) 문득걸(文得傑)의 현손으로 밝혀졌고, 남평문씨와 동원임이 확인되어 남평문씨의 《임술대동보(壬戌大同譜)》 간행 때 남평으로 환본, 남평문씨 감천군파로 합보하였다. 그래서 사실상으로는 감천문씨는 없어진 셈인데 관례에 따라 아직도 흔히 감천문씨라고 부르고 있다. 이와는 달리 문세광(文世光)을 1세조로 하고 문구를 4세로 하여 계대한 또 한 계통의 감천문씨가 있었으나 이 역시 남평으로 환본하였다.
한편 《조선씨족통보(朝鮮氏族統譜)》에 의하면 대보공 김알지(金閼智)의 후손 김고벽(金高檗)이 중국에 들어가 문장으로 이름을 날려 <文>씨로 사성되었고, 그의 아들 문원길(文原吉)이 우리나라에 들어와 낭장을 지내고 감천문씨의 시조가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문세광을 시조로 하는 또 한 파가 있다고 하였다. 또 그의 후손에서 문근(文瑾)이 문과에 급제, 참찬을 지냈고 아우 문관(文瓘) 역시 문과에 급제, 장령을 지냈다고 되어 있다. 《만성보(萬姓譜)》에도 역시 시조는 문세광 이라 하였고 그뒤의 세계가 실전되어 문원길을 기세조로 하여 계대한다고 되어 있다. 그러나 《국조방목(國朝榜目)》·《조선과환록(朝鮮料宦錄)》·《한국과거사(韓國科學史)》 등 여러 문헌에 문근 형제가 모두 남평문씨편에 실려 있는 것으로 보아 김씨가 문씨로 사성된 감천문씨와는 관련이 없는 것으로 짐작된다.
[인구] 12,698명이 있다.(1985년)
17.정선문씨(旌善文氏)
[유래]
《조선씨족통보(朝鮮氏族統譜)》 등 문헌에 의하면 시조 문임간(文林幹)은 원래 전씨(全氏)였는데 중국에 들어가 문장으로 이름을 떨치고 황제로부터 <文氏>로 사성(賜姓)받았다 하며, 귀국하여 고려조에서 문하시랑 평장사·태자소부를 지냈다고 한다. 그러나 본관을 정선(旌善)으로 하게 된 유래가 확실치 않은 점으로 보아 원래 정선전씨였던 것으로 짐작된다. 그의 아들 문관(文冠)은 고려조의 <명장록(名將錄)>에 기록된 인물로, 벼슬은 참지정사에 이르고, 장경(章敬)이라는 시호가 내려 후손들이 중조로 삼고있다.
[인구] 8,366명이 있다.(1985년)
18.남원진씨(南原晋氏)
[유래]
진씨(晋氏)는 중국(中國) 괵군(괵郡 : 지금의 하남성 하락도)에서 계출(屆出)된 성씨(姓氏)로 당(唐)나라 희종(僖宗) 때 사람인 진휘자(晋暉者)의 후손으로 전한다.
시조 진함조(晋含祚) 시호는 문경이며 어려서 부터 총명하고 장년해서도 문장과 천문 등에 뛰어나 고려 현종이 사부로 예우하고 호부상서에 등용하여 뒤에 좌복야 겸 도정상서 좌복야를 역임하였다. 그는 역학(易學)과 술수(術數)에 정통하여 나라에 큰 일이 있을 때마다 그의 도참설(圖讖說)이 크게 작용했다고 한다. 그의 후손 진석이 고려 고종 때 거란(契丹)을 크게 무찌른 공으로 남원군에 봉해지고 남원을 식읍으로 하사 받았으므로 본관을 남원으로 하였다. 그리고 진광인을 1세조상으로 하였다.
시조 문경공(文敬公) 진함조(晋含祚)의 묘단
- 소재지 : 전북 남원시 대산면 금성리 291번지
[인구] 7,868명이 있다.(1985년)
19.광산탁씨(光山卓氏)
[유래]
탁씨의 본관은 광산(光山) 단본이다. 시조 탁지엽(卓之葉: 자 玉立, 호 學圃, 시호 文成)은 고려 선종 때 학행으로 한림학사(翰林學士)에 천거되고, 그 후 태사(太師)에 올라 광산군(光山君: 광산은 지금의 光州)에 봉해졌다. 그래서 후손들이 본관을 광산으로 하여 세계를 이어 오고 있다.
시조의 묘소는 광주광역시 지산동에 있다. 광산탁씨는 고려 경종조의 대제학 탁도민(卓道敏), 현종조의 어사중승(御史中丞) 탁사정(卓思正), 신종조의 대제학 탁종성(卓宗成), 고종조의 평장사(平章事) 탁영(卓英) 등 많은 명신을 비롯하여 탁광무(卓光茂), 탁신(卓愼) 등을 배출했다.
[인구] 광산 15,196명, 광주 1,057이 있다.(1985년)
20.거제반씨(巨濟潘氏)
[유래]
반씨(潘氏)는 중국(中國) 형양(滎陽 : 지금의 하남성 개봉도에 속한 지명)에서 계출(系出)된 성씨(姓氏)로, 주(周)나라 문왕(文王: 무왕의 아버지)의 여섯째 아들 필공(畢公) 고(高)의 아들 계손(系孫)이 반(潘) 땅에 봉해져서 식읍(食邑)으로 하사(下賜) 받은 땅이름을 성(姓)으로 삼았다고 한다.
춘추시대(春秋時代) 이후로 유학자(儒學者)와 재상을 많이 배출하여 명족(名族)으로 일컬어진 반씨(潘氏)는 송(宋)나라 출신인 반 부(潘 阜)가 이종(理宗) 때 문과(文科)에 장원하여 한림학사(翰林學士)를 거쳐 이부 상서(吏部尙書)를 지내고 몽고정벌(蒙古征伐)을 간청했다.
그런데 간신(奸臣) 가사도(賈似道)가 그를 미워하여 1265년 몽고에 사신으로 보내어 은밀히 죽이게 하였으나, 원(元)의 세조(世祖 : 홀필렬)는 문무(文武)를 겸비한 그의 재주를 가상히 여겨 죽이지 않고 벼슬을 내려 부하로 삼으려 하였다. 그는 사양한 후 제국대장공주(齊國大長公主: 원재의 딸, 충렬왕비가 됨)를 배종(陪從)하고 동래(東來)하여 고려 원종(元宗)과 충렬왕조(忠烈王朝)에서 정당문학(政堂文學)을 지내고, 명장(名將) 김방경(金方慶)을 따라 일본정벌(日本征伐)에 공(功)을 세워 시중(侍中)에 오르고 기성부원군(岐城府院君)에 봉해졌으며, 65세에 벼슬을 사직하고 거제(巨濟)로 내려가 정사(精舍)를 짓고 여생을 마쳤다.
-시조의 묘소는 경남 거제군 장승포읍 계주리 국토봉에 있으며,향사일은 9월 9일 이다.
[인구] 총 21,548명이 있다.(1985년)
*후손들이 전국 각지에 산거하며 세거지명(世居地名)에 따라 기성(岐城), 충주(忠州), 남평(南平), 결성(結城), 청도(淸道) 홍천(洪川), 광주(光州) 등 17본으로 갈리었으나 모두가 동원(同源)이므로 '거제반씨정미대동보(巨濟潘氏丁未大同譜)'에는 거제반씨로 합보(合譜)하였다.
21.보성선씨(寶城宣氏)
[유래]
선씨(宣氏)는 중국(中國) 시평(始平:협서성 관중도 흥평현)에서 계출(系出)된 성씨(姓氏)로 노(魯)나라 대부(大夫) 선백(宣伯)의 후예로 전한다.
우리나라 선씨는 명(明)나라 때 문연각 학사(文淵閣學士)인 선윤지(宣允祉)가 1382년(고려 우왕 8) 사신(使臣)으로 고려에 왔다가 귀화(歸化)하여 전라도 안렴사(全羅道按廉使)로 나가 해안지방에 침입하여 우거(寓居)하는 왜구를 섬멸하고 민생을 안정시켰으며, 조선이 개국(開國)되자 벼슬을 버리고 전라남도 보성(寶城)에 은거(隱居)한 것이 시초가 된다.
그후 선윤지(宣允祉)는 유교(儒敎)의 진흥에 앞장섰고 인재 양성에 진력하며 보성에 터를 잡아 살게 되었으므로, 후손들이 그를 시조(始祖)로 받들고 보성을 관향(貫鄕)으로 삼아 세계(世系)를 계승하게 되었다. 그러나 본관(本貫)을 같이 하면서 고려 말에 예의 판서(禮儀判書)와 우문각 대제학(右文閣 大提學)을 지낸 선원지(宣元祉)를 시조로 하는 계통(系統)과 평장사(平章事)를 지낸 선천계(宣天桂)를 시조로 주장하는 계통이 있었는데, 모두가 동원(同源)으로 밝혀져서 1978년 합의에 의하여 동행(同行)으로 합보(合譜)를 하였다.
[인구] 33,077명이 있다.(1985년)
22.수성(달성)빈씨 守成(達城)賓氏
[유래]
빈씨(賓氏)는 중국(中國)에서 계출(系出)된 성씨(姓氏)로 정확한 연원(淵源)은 알 수 없고,「조선씨족통보(朝鮮氏族統譜)」의 기록에 의하면 주(周)나라 경왕(景王 : 기원전 544∼521) 때 대부(大夫)를 지낸 빈골주(賓骨周)의 후손 빈모가(賓牟賈)가 노(魯) 나라에서 성인(聖人) 공자(孔子)를 시중(侍中)하였다고 한다.
우리나라 빈씨(賓氏)의 본관(本貫)은 수성을 비롯하여 육창(陸昌 : 영광지방), 대구(大邱:달성達城), 안주(安州) 등 4본이 전하고 있으나 계대(系代)를 밝힐 수 없다.
「빈씨세보(賓氏世譜)」에 의하면 수성빈씨(壽城賓氏)의 시조(始祖) 빈우광(賓宇光)은 송(宋)나라에서 제과(制科)에 급제하여 한림학사(翰林學士)를 지냈으나 송나라가 망하자 비각(秘閣)에 수장(收藏)된 귀중한 서적(書籍)을 가지고 고려(高麗)에 들어와 학풍(學風)을 크게 진작시켜 충숙왕(忠肅王)이 그 공(功)을 치하하고 수성군(壽城君)에 봉했다고 한다.
빈씨(賓氏)는 1960년도 국세조사(國勢調査) 당시 2,186명, 1975년에는 504가구로 집계되었고,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남한(南韓)에 총 637가구, 2,647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23.옥천(관성)육씨 沃川(管城)陸氏
[유래]
육씨(陸氏)는 중국(中國) 하남성(河南省) 평원반군(平原般郡) 육향(陸鄕 : 육종)의 지명(地名)에서 시작되었다고 하며, 우리나라 육씨(陸氏)의 연원(淵源)은「옥천육씨대동보(沃川陸氏大同譜)」와「조선씨족통보(朝鮮氏族統譜)」에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옥천육씨(沃川陸氏)의 시조(始祖) 육보(陸普)는 중국(中國) 절강성(浙江省) 사람으로 서기 927년(통일신라 경순왕 원년, 고려 태조 10) 당(唐)나라 명종(明宗)이 문학전례지신(文學典禮之臣)을 뽑아 신라(新羅)에 선교사(宣敎師)로 보낼 때 홍은열(洪殷說)·정 한(鄭 헌) 등과 함께 8학사의 한 사람으로 동래(東來)하여 뛰어난 공적을 쌓아 경순왕(敬順王)의 부마(駙馬)가 되었고 관성(管城 : 옥천의 고호) 군(君)에 봉해졌다.
그리하여 후손들이 충청북도 옥천(忠淸北道沃川)에 정착 세거(定着世居)하며 육보(陸普)를 시조(始祖)로 하고 옥천(沃川)을 본관(本貫)으로 삼아 세계(世系)를 이어왔으나, 중간 계대(繼代)를 실전(失傳)하여 고려(高麗) 충렬왕(忠烈王) 때 주부(主簿)를 역임한 육인단(陸仁端)을 일세조(一世祖)로 하여 세계(世系)를 계승(繼承)하여 왔다.
육인단의 증손 5형제가 모두 현달하여 4파를 이루었다. 다섯째 육태귀(陸台貴)는 공양왕 때 1품벼슬에 올랐으나 자손이 없는 것으로 전한다.
[분파]
- 덕곡공파(德谷公派) : 육여(麗)는 공양왕 때 도순찰사를 지냈다.
- 목사공파(牧使公派) : 육항(沆)은 공양왕 때 공주목사를 거쳐 서해도안렴사를 역임하였다.
- 순찰사공파(巡察使公派) : 육비
- 낭장공파(郞將公派) : 육수(綏)
[대표적 인물]
- 육홍(鴻) : 육여의 아들 고려 말에 부마가 되었다.
- 육명산(命山) : 육홍의 아들. 조선 초에 대장군으로 이름을 떨쳤다.
- 육홍운(鴻運) : 숙종 때 문장이 뛰어나고 덕행으로 이름이 났다.
[인구] 옥천육씨 18,023명, 관성육씨 460명이 있다.(1985년)
24.경주설씨(慶州설氏)
[유래]
시조 설손(설遜, 호는 근사재)은 원래 회골(위그르)사람이다. 조상이 설연하에 대대로 살아서 성을 설이라고 했다고 하며 태전 설극직의 8대손이라고 한다. 설손은 원나라에 귀화하여 단주태수 벼슬을 지냈으며 학문이 깊고 문장이 뛰어난 시인이다. 그가 상을 당하여 대령(大寧)에 가있었는데 1358년(고려 공민왕 7년) 홍건적의 난을 피해 우리나라에 귀화 하자 공민왕이 그를 대접하여 부원후에 봉했다. 그리고 맏아들 설장수(설長壽:시호는 문정)가 1362년(공민왕 11) 문과(文科)에 급제, 여러 관직을 두루 역임한 후 공양왕(恭讓王) 때 정난공신(定難功臣)으로 판삼사사(判三司事)에 올라 지공거(知貢擧)를 겸했으며, 정몽주(鄭夢周)가 화(禍)를 입을 때 그 일당으로 몰려 유배되었으나 태조(太祖)에 의해 풀려 나와 검교문하시중(檢校門下侍中)에 복직, 연산부원군(燕山府院君)에 봉해지고 계림(鷄林)을 사적(賜籍)받아 후손들이 본관(本貫)을 경주(慶州)로 하게 되었다.
첫댓글 공주이씨가 저 외가 성씨 입니다(저희 모친이 공숙공 21세손이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