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9.6. 울산두레교회 수요기도회
사랑을 받는 자녀들(엡 5:1-7)
햇살이 강렬하면 풀은 다 말라 죽습니다. 그래서 은근한 햇살이 좋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사랑은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가장 강렬하게 타올랐지만 우리의 일상적인 삶에서는 은근히 다가올 때가 더 많은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우리들이 하나님으로부터 사랑을 받는 자녀라고 말씀합니다. 나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자녀라는 것을 항상 생각하고 살아가는 것이 참 힘이 됩니다. 그래서 나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을 위해서로도 무엇인가를 해야 되겠다는 마음을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자녀로서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지를 말합니다.
1. 사랑 안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사랑은 하나님에게서 시작되었습니다. 사랑은 사람 안에서 본능적으로 생성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셨기 때문에 우리 안에 새겨진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사랑입니다. 그러나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을 떠남으로 하나님이 주신 사랑도 타락하였습니다. 사랑이 타락하자 자기중심적인 사랑으로 변질되었습니다. 선악과를 따먹은 직후 아담은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 있게 하신 여자 그가 그 나무 열매를 내게 주므로 내가 먹었나이다”라고 하나님께 책임을 전하고 아내인 하와에게 책임을 전가했습니다. 타락한 사랑은 남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것입니다.
어느 대중가요에서 “사랑이 무엇이 무어냐고 물으신다면 눈물의 씨앗이라고 말하겠어요” 라고 노래했습니다. 사랑이 눈물의 씨앗입니까? 그것은 자기 중심에서 나온 애착의 결과입니다. 그래서 사랑하다 상처받고, 사랑하다 미워하고 상처주고, 사랑하다 심지어 죽이고... 이것이 타락한 인간의 사랑의 방정식입니다. 그러나 십자가는 인류에게 베푼 하나님의 가장 큰 사랑입니다. 이 사랑이 하나님에게서 왔습니다. 사랑은 위에서 옵니다. 사랑은 사람에게서 나오지 않습니다. 물이 위에서부터 흐르듯이 사랑은 가장 위에계신 하나님에게서 흘러나옵니다. 사랑을 받는 사람은 사랑을 해주는 그 사랑을 닮게 되어 있습니다.
2차 대전이 절정에 이르렀을 때였습니다. 필리핀 군인들이 일본군에게 패하여 포로로 수 천 명이 잡혔습니다. 포로수용소는 그야말로 지옥과 같았습니다. 포로의 생명은 파리 생명과 같았습니다. 인간 취급을 받지 못 하고 동물처럼 살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비둘기 한 마리가 철조망 안으로 날라 와 떨어졌습니다. 독수리에 찢긴 상태였습니다. 포로들은 돌아가면서 상처 입은 비둘기를 열심히 치료하기 시작하였습니다. 배고프면서도 자기들이 먹을 음식을 비둘기에게 먹였습니다. 얼마 후 비둘기는 회복되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이 발견되었습니다. 비둘기에게 관심을 가지는 사람들이 훨씬 더 건강하게 살았다는 것입니다. 이 사례를 통해서 사랑하면 상대방이 잘 되기도 하지만, 사랑하는 사람이 더 잘 된다는 사실이 밝혀졌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넘치도록 큰 사랑을 주님께 받았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큰 사랑도 내게서 흘러넘쳐야 합니다. 그래서 그 사랑이 다시 사랑을 낳는 여러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2. 하나님을 본받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받는 자녀가 되었다는 것을 살펴보았습니다. 그런 우리가 이 세상을 살면서 해야 할 일이 있는데 그것은 아버지가 되시는 하나님을 본받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처럼 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지만 최대한 흉내라도 내고 모방이라도 하면서 살라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하나님을 모방하고 흉내를 내라고 하니까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을 흉내 내려고 합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가지고 계시는 그 마음을 닮아 가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마음에 가지고 계시는 성품을 "하나님의 속성"이라고 합니다. 모방할 수 없는 속성이 있는가 하면 하나님이 우리에게도 나누어주신 성품이 있습니다. 모방할 수 없는 하나님의 성품은 스스로 계신 것, 언제나 변함이 없는 것, 언제나 어디에나 제한이 없이 존재하시는 것, 한 분이시며 유일하신 것입니다.
우리에게도 나누어주신 하나님의 성품은 지식과 지혜입니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을 우리가 배우고 본받아서 지혜로운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선하신 분이십니다. 이 선하심을 본받아 선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요일 4:8절 말씀에 "하나님은 사랑이시다"라고 했습니다. 그 사랑을 닮아 가는 것이 우리가 해야 할 소중한 일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신 동시에 공의의 하나님이십니다. 다른 사람의 죄와 허물에 대해서는 사랑으로 용서해야 하지만 내가 세상을 사는 원리는 의로운 삶을 살려고 몸부림을 쳐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피조물과 절대로 구별되시는 거룩하신 분이라고 했습니다. 그 하나님께서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도 그 거룩하심을 본받아서 세상의 죄로부터 구별된 삶을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참되시며 거짓이 없으시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진실하시기 때문에 자녀된 우리도 거짓이 없는 진실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에게 예수님과 보혜사 성령을 보내 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령의 도우심을 받아 예수님을 본받을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을 본받는 것은 예수님처럼 한 번 해 보는 것입니다. 미운 사람을 용서하는 것, 이웃을 사랑하는 것, 섬김과 희생의 십자가를 져 보는 것입니다. 우리는 사랑하는 대로 무엇이든지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예수님을 본받고, 사랑하는 대로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3. 악한 삶을 버리는 것입니다.
바울은 사랑받는 자가 되기 위해 하지 말아야 할 것과 해야 할 것에 대해서 상세히 밝혀줍니다. 3, 4절에서 음행과 온갖 더러운 것과 탐욕, 누추함, 어리석은 말, 희롱의 말은 이름도 부르지 말라고 합니다. '음행'은 결혼 관계 이외의 모든 불법적인 성관계를 말합니다. 영적으로는 우상 숭배를 이에 비유합니다. 그래서 5절에 우상숭배자들도 하나님 나라에서 기업을 얻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하나님 외에 다른 신을 섬겨서가 아닙니다. 우상숭배를 하는 사람은 자기만족과 자기 사랑에 사로잡힌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섬긴다는 것은 자기 사랑을 초월하는 사랑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예배함에 자신의 욕심이 들어가서는 안됩니다. 이는 하나님을 욕되게 하는 것이며, 결코 사랑받지 못할 행동입니다. 그리고 '누추함'은 저급하고 속된 것을, '어리석은 말'은 아무 유익이나 가치가 없는 말이고, '희롱하는 말'은 임기응변을 위한 독설이나 상스러운 말을 의미합니다. 이러한 것들을 가까이 해서는 결코 하나님으로부터 사랑받지 못합니다. 또한 이러한 것들은 성도로서 마땅하지 않은 것들이라고 합니다. 이러한 것을 이름조차 부르지 않는 것이 마땅한 것입니다.
이런 죄악들은 이기적이고 자기 중심적인 특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자기 본능, 자기 욕심, 자기 감정을 충족시키기 위해서 다른 사람을 이용하거나,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는 것들입니다. 그 사랑은 다른 사람에게 평안과 기쁨을 주는 것이 아니고 자기 자신을 기쁘게 하고, 자기 욕심을 충족시키면서 다른 사람에게 손해를 끼치고 다른 사람을 파멸하게 만드는 가짜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사랑은 하나님의 사랑, 아들을 주시기까지 사랑하신 희생적 사랑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가짜 사랑입니다.
제리 브릿지즈라는 분이 “거룩한 삶의 추구” 라는 책을 썼는데 그 책에서 그는 옳고 그름을 분별하는 기준 4가지를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첫 번째는, 이 일이 육체적으로, 영적으로 정신적으로 유익한가를 따져 봐야 합니다. 우리는 보통 그 일이 재미있느냐 아니냐를 따집니다. 경제적으로나 여러 가지로 이익이 되느냐를 따집니다. 그런데 그것은 기준이 되는 것이 아니고 기준은 육체적으로, 영적으로, 정신적으로 이것이 유익하냐 유익하지 않느냐를 따져 볼 때 하나님을 닮는 기준이 될 수 있습니다.
두 번째는 이 일이 나를 지배하고 있지 않느냐를 따져봐야 합니다. 그 일이 건전하고 좋은 일이지만 거기에 중독되거나 탐닉하거나 집착해서 지배를 당하면 내가 그 일에 노예가 되는 것입니다. 한 사람이 테니스를 치는데 어쩌다 테니스를 하루라도 안치면 몸살이 나고 좀이 쑤셔서 견딜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분이 내가 예수 믿는 사람인데, 하나님께서 나를 지배해야지 테니스가 나를 지배하면 되겠나 생각이 되어 일정 기간 동안 테니스 치는 것을 중단했습니다. 그리고는 테니스의 지배로부터 벗어났다고 판단되었을 때 다시 테니스를 치기 시작했습니다. 자기 자의로 할 수 있을 때에 그 때 한 것입니다. 나를 지배하는 일이라면 그것은 옳고 그른 것을 분별할 때에 좋은 것이 안 된다는 것을 우리가 판단할 수 있습니다.
세 번째 기준은 이 일이 다른 사람에게 해가 되지 않는다는 것을 점검하는 것입니다. 나만 좋으면 되는 것이 아니고 다른 사람에게도 유익이 되어야 합니다. 다른 사람에게 해가 된다면 그 일은 옳은 일이 아닌 것입니다. 하나님 닮는 삶이 아닙니다.
네 번째는 이 일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인가를 점검해 봐야 합니다. 이 4가지가 하나님을 닮아가는가를 분별하는 기준이 될 수가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은 지금 누구를 가장 많이 닮아 있습니까? 하나님을 닮아있습니까, 세상을 닮아 있습니까? 하나님의 사랑을 입은 자녀 된 여러분, 하나님 아버지를 닮아가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말과 행동이 하나님을 닮아 가시기 바랍니다. 날마다 거룩하신 하나님을 닮아 가십시오.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기에 합당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여러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