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11월 04일 토요일 정선 전씨 임하군파 광명 시향제에 강릉에서 버스 1대를 전세내어 다녀왔습니다.
[ 임하군파 휘 계홍公 문중과 임하군파 휘 필구公 강릉문중 ] 버스에서 간단한 연수를 진행하였습니다. 연수 내용을 첨부합니다.
정선전씨 임하군파 광명시 시제 연수자료
Ⅰ. 시조 섭(聶) [전섭(聶)]
BC 18년 백제개국 공신
Ⅱ. 중시조 [전선(愃)]
신라 성덕왕때 추부시랑 역임
(고려시대 관제로는 전법판서, 요즈음 법무부장관)
Ⅲ. 전이갑 장군
고려개국공신, 조선 시대 공문인 각양수교등록에 기록됨
Ⅳ. 경학박사 전보인
989년 고려사에 등재된 최초의 전씨 인물임,
경학박사, 상서좌복야(정2품) 역임. 숙유(宿儒) [학문과 명망이 높은 선비]로 존경받음.
Ⅴ. 강릉지방의 임하군파 세 집안
[Q]
우리가 알기로는 “후석릉군파”로 알고 있었는데 어째서 “임하군파”로 명칭이 변경되었는가?
[A]
1990년 경오보를 만들 때 회의에서 “후석릉군파”에서 “임하군파”로 변경된 것으로 추측됨
이유는
▶ 석릉군 전룡의 형제가 4형제 [全龍,全雲,全福,全麟]인데 전룡 후손은 후석릉군파, 형제들은 석릉군파로 칭하고 있어서
▷ 석릉군 휘 룡자의 부친인 『임하군 휘 응조』로 바꾸어서 석릉군 4형제 전부다 「임하군파」로 하게 되었습니다.
※ 참고로 “후석릉군”은 없고 바른 표현은 “석릉군”입니다. 조선왕조실록의 공식기록에 “석릉군 전룡”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문제는 고려말 “석릉군 전윤장”이 있습니다. 그래서 공식적인 명칭은
「고려 시대 석릉군 전윤장(30세)」, 그의 후손인
「조선 시대 석릉군 전룡(42세)」이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 “임하군파”는 적어도 임진왜란 전에는 공식 명칭이
[석릉군파]였습니다.
임진왜란 때 3등 공신이 되신 후 『조선 시대 석릉군파』로 분파되어 나왔습니다. 그래서 후손들이 고려 시대 석릉군과 조선 시대 석릉군을 구분할 필요가 생겨서 [선석릉군 또는 상석릉군] [후석릉군]으로 편의상 구분한 것입니다.
이후에 여러 가지 사정을 고려하여
[임하군파]가 되었습니다.
※ 우리 문중은 대분류는 “정선전씨”이고 중간 분류는 “석릉군파”이고 소분류는 “임하군파”입니다.
다른 사람들하고 인사할 때 제일 정답은 “임하군파”라고 해야 하며 “석릉군파”라고 해도 큰 문제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① 파조(派祖) 전응조
● 전룡 [全龍]
본관은 정선(旌善)이며 자는 여견(汝見), 호는 석천(石泉)이다. 석릉군(石陵君) 윤장(允藏)의 12세손이다. 선조(宣祖) 때 사복시판관(司僕寺判官)(종5품)으로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어가(御駕)를 호위하였다. 이때 도성 궁궐이 타 없어질 것을 염려한 선조의 명을 받고 목숨을 걸고 종묘 위패를 모시고 돌아왔다. 이 같은 충의(忠義)로 환도(還都)후 사복시 내승(內乘)[정3품 정도로 추정]을 역임하였으며 석릉군(石陵君)에 추대하였다. 사후 증 형조판서(刑曹判書)에 추증되었다.
※ 조선왕조실록 기록에 의하면 1604년 6월 25일(선조 37년)에 임진왜란에 공이 많은 이들을 표창하였던바 호성공신 109명, 선무공신 18명, 청난공신 5명입니다.
1등 호성공신은 이항복, 정곤수였으며 정식 명칭은 충근정량갈성효절협책 호성공신이고
2등 호성공신은 충근정량효절협책 호성공신이고
3등 호성공신은 충근정량 호성공신입니다. 석릉군 전룡은 3등 충근정량 호성공신에 선발되었습니다.
②-1 입강릉 선조
정선전씨 45세 전계선 嘉善大夫 漢城府左尹 兼 五衛都摠府副摠管
석릉군 휘 룡자 할아버지 증손임
강릉시 왕산면 왕산리 곰자리에 석릉군 할아버지 손자인 정선전씨 44세 지탄 전이복, 45세, 46세, 47세, 48세, 48세(생부), 49세 7위의 묘소가 있고 매년 한 번씩 합동 전사를 봉행하고 있습니다.
※ 전이복
산림처사로 지탄집 2권의 저서 있음
공(公)이 조정(朝廷)의 기강(紀綱)이 차츰 쇠해지고 선비의 기풍(氣風)이 퇴패(頹廢)함을 민망(憫惘)하게 여겨 ‘붕당만언소(朋黨萬言疏)’를 지어 한당송(漢唐宋)으로부터 흥(興)하고 쇠(衰)함을 논하고 사(詐)와 정(正)을 변명(辨明)하여 상달(上達)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주역(周易)의 둔괘(遯卦)가 나와서 ‘붕당만언소(朋黨萬言疏)’ 원고(原稿)를 불태우고 지탄집(止灘集) 2권을 지었으니 주자(朱子)의 일과 비슷하였다.
②-2 입강릉 선조
정선전씨 48세 전계홍 嘉善大夫 龍驤衛副護軍
구분 | 강릉 왕산 | 강릉 병산 | 강릉 필구공문중 |
41 | 應祖 [ 임하군 ] |
42 | 龍[석릉군] 사복시 내승역임 3등 호성공신 |
43 | 大翼(대익) 청송부사 역임 |
44 | 以恒(이항) | 以復(이복) |
45 | 斗旻(두민) | 繼善(계선) 1660년경 입강릉으로 추정 在강릉 약 360년으로 추정 |
46 | 守春(수춘) | 時萬(시만) | 時建(시건) |
47 | 愛善(애선) | 德基(덕기) | 德元(덕원) |
48 | 繼洪(계홍) | 天賚(천뢰) | 矩黙(구묵) 仁壽(인수)(生) |
49 |
|
| 弼龜(필구) |
③ 석릉군 전윤장(고려시대)
1342년
‘상호군(정3품)’으로서 조적의 난을 진압하는 데 공을 세워 2등 공신에 오름
-아들에게 8품직 제수하고, 토지 70결 과 노비 5명을 하사받음
1343년
‘우상시(정3품)’로 서해 평양도 순위사로 활동함
1347년
‘동지밀직사사(종2품)’로 교주도 도순문사를 임명받아 쌍성의 인구를 하였음
1348년
‘첨의참리(정2품)’로 이학도감 판사로 임명됨
1351년
‘찬성사(정2품)’로 임명되며, 판도판서를 겸직함
☞ 조선시대 호조판서, 지금 기획재정부 장관에 해당하는 벼슬임
④ 석릉군 전룡 (조선시대)
1593년(선조 26)
수문장이 제수(除授)되었다. 임진왜란 때 종묘의 위패를 무사히 옮긴 공으로 사복시주부(司僕寺主簿, 종6품)가 제수(除授)되었다.
1601년(선조 34)
공이 인정되어 특별히 사복시판관(司僕寺判官, 종5품)이 제수(除授)되었다.
1605년(선조 38)에는
다시 내사복시내승(內司僕寺內乘)에 제수(除授)되었다.
이후 석릉군(石陵君)에 봉해졌으며, 다음 내용을 교서에 명시하였다.
(모습을 그려 후세에 전하며, 품계와 관작을 한 자급 초천한다.
그들의 부모와 처자도 한 자급 초천하되, 아들이 없으면 생질과 여서를 가계(加階)하라. 적장은 세습케 하여 녹봉을 잃지 않게 할 것이며, 대대로 영원히 사유를 받게 하라. 이 반당 4인, 노비 7구, 구사 2명, 전지 60결, 은자 5냥, 내구마 1필을 하사한다.)
1624년(인조 2)에는
정사공신(靖社功臣) 88인의 《회맹록(會盟錄)》에 올랐다.
1625년
석릉군(石陵君)
사후
자헌대부(資憲大夫) 형조판서(刑曹判書)에 증직되었다.
▶ 반당[ 伴倘 ]
조선시대 종친·공신·당상관들에게 그 특권을 보장하고 신변 안전을 도모하기 위해 지급한 호위병.
▶구사[ 丘使 ]
고려시대 이속(吏屬) 중 잡류직.
관노의 성격을 띠고 세습되었으며, 관인(官人)에게 분급되어 호종(扈從)의 업무를 담당하였다. 국상(國相)에는 30인, 3품 이상의 열경(列卿)에는 15인, 정랑(正郎)에는 15인, 원랑(員郎) 이상에는 10인 등 관인들의 관품에 따라 분급된 수에 차등이 있었다.
▶내사복시:
사복시(司僕寺)의 부속관아(附屬官衙)로서 궁내의 말에 관한 일과 임금의 탈 것에 관한 일을 관장하였다. 병조(兵曹)의 경관직(京官職) 중 산직(散職: 일정한 직무가 없는 벼슬)의 하나로, 대궐 안에 따로 설치한 사복시(司僕寺)이다. 내사복시(內司僕寺)에 대하여 사복시를 외사복(外司僕)이라고 칭하였다.
내사복시 관원으로 내승(內乘)이 3원인데, 1인은 사복시(司僕寺)의 정(正: 正三品)이 예겸하고, 2인은 종이품에서 구품까지 관원이 겸직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