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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 구츨라프>
3번째 영어 사용자의 상륙
브로튼 일행이 부산 용당포에서 체류한 데 이어 맥스웰과 홀 일행이 열흘간 조선을 접촉하고 탐사한 경험은, 영어문화권의 조선에 대한 인식을 크게 향상시켰다. 특히 맥스웰과 홀 일행이 제기한 '조선 항해시 중국어 통역 대동'의 필요성은, 이후 조선을 찾는 대부분 항해자들이 적극 실천에 옮겼다.
한반도에 영어 사용자들이 다시 나타난 것은 1832년(순조 32년) 6월이었다. 영어 서적, 영어 성경이 처음 조선에 전래된지 16년 뒤다. 이들 한국 역사상 3번째 영어 사용자들의 조선 상륙에선, 이전과는 다른 깊은 수준의 의사 소통이 이뤄졌다. 이들이 '교역'이라는 분명한 목적을 갖고 있었고, 홀 일행의 충고에 따라 통역을 대동하고 찾았기 때문이다.
3번째 영어 사용자들의 조선 상륙에 대해 이조실록(순조 32년 7월21일자)은 공충감사(충청감사) 홍희근의 장계에 다음과 같이 보고하고 있다.
공충 감사(公忠監司) 홍희근(洪羲瑾)이 장계에서 이르기를,
“6월 25일 어느 나라 배인지 이상한 모양의 삼범 죽선(三帆竹船) 1척이 홍주(洪州)의 고대도(古代島) 뒷 바다에 와서 정박하였는데,
영길리국(英吉利國)의 배라고 말하기 때문에 지방관인 홍주 목사(洪州牧使) 이민회(李敏會)와 수군우후(水軍虞候) 김형수(金瑩綬)로 하여금 달려가서 문정(問情)하게 하였더니, 말이 통하지 않아 서자(書字)로 문답하였는데, 국명은 영길리국(英吉利國) 또는 대영국(大英國)이라고 부르고, 난돈(蘭墩)과 흔도사단(忻都斯担)이란 곳에 사는데 1) 영길리국·애란국(愛蘭國)·사객란국(斯客蘭國)이 합쳐져 한 나라를 이루었기 때문에 대영국이라 칭하고, 국왕의 성은 위씨(威氏)이며, 지방(地方)은 중국(中國)과 같이 넓은데 난돈(蘭墩)의 지방은 75리(里)이고 국중에는 산이 많고 물은 적으나 오곡(五穀)이 모두 있다고 하였고, 변계(邊界)는 곤련(昆連)에 가까운데 곧 운남성(雲南省)에서 발원(發源)하는 한줄기 하류(河流)가 영국의 한 지방을 거쳐 대해(大海)로 들어간다고 하였습니다. 2)
북경(北京)까지의 거리는 수로(水路)로 7만 리이고 육로(陸路)로는 4만 리이며, 조선(朝鮮)까지는 수로로 7만 리인데 법란치(法蘭治)·아사라(我斯羅)·여송(呂宋)을 지나고 지리아(地理亞) 등의 나라를 넘어서야 비로소 도착할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배에 실은 물품은 파리기(玻璃器) 5백 개, 초(硝) 1천 담(担), 화석(火石) 20담, 화포(花布) 50필, 도자(刀子) 1백 개, 전자(剪子) 1백 개, 납촉(蠟燭) 20담, 등대(燈臺) 30개, 등롱(燈籠) 40개, 뉴(鈕) 1만여 개, 요도(腰刀) 60개인데, 아울러서 값으로 따지면 은화(銀貨) 8만 냥(兩)이라 하였습니다.
나라의 풍속은 대대로 야소교(耶蘇敎)를 신봉해 왔으며, 중국과의 교역은 유래(由來)가 2백 년이나 되었는데 청국(淸國)과 크기가 같고 권세가 비등하였으므로 조공(朝貢)도 바치지 않았고 그 나라에서 북경에 가도 계하(階下)에서 머리를 조아리지 않는다 하였으며, 대청 황제(大淸皇帝)는 먼 나라 사람을 너그럽게 대해 주려 하였으나 요사이는 관리들이 황제의 뜻을 잘 받들지 않으므로 황은(皇恩)이 외국인에게는 미치지 못하고 있으며 또 외국 상인은 관리의 횡포로 인하여 많이 어려움을 당하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교역하고 있는 나라는 우라파국(友羅巴國)·법란서국(法蘭西國)·아임민랍국(阿壬民拉國)·자이마미국(者耳馬尾國)·대여송국(大呂宋國)·파이도사국(波耳都斯國)·아비리가국(亞非利加國)·식력국(寔力國)·영정도국(伶仃都國)·대청국(大淸國)이며, 교린(交隣)하는 나라는 아라사국(我羅斯國)·법란치국(法蘭治國)·하란국(荷蘭國)·파려사국(波呂斯國)이라 하고, 영국(英國)의 지방은 구라파(歐羅巴)에 있는데 사람을 귀히 여기고 있으며, 지방이 또 아미리가(亞未利加)에 있는데 그 역시 크고 좋은 땅이고,3) 또 서흔경(西忻慶)에도 있어 섬들이 많으며, 아비리가(亞非利加)의 극남단(極南端)에 있는 호망(好望)의 갑(甲)은 수위(垂圍)의 속지(屬地)이고, 또 태평양의 남쪽 바다에도 영국에 소속된 허다한 미개(未開)한 지방이 있으며, 그 끝은 아서아주(亞西亞州)에 있는데 섬들이 많고, 또 흔도사단(忻都斯担)·고위(古圍) 각 지방도 모두 영국의 판도(版圖)에 들어왔다고 하였습니다. 최근에 중국에서 영국으로 소속된 미개한 지방으로는 익능부(榏能埠) 마지반부(馬地班埠) 마랍가부(馬拉加埠)·선가파부두(先嘉陂埠頭)라 하였습니다."
; 1) 구츨라프는 난돈(蘭墩)과 흔도사단(忻都斯担)이란 곳에 산다고 했다. 구츨라프는 조선에 기독교를 선교하러온 선교사(실제, 통상무역을 요구하러 온것임)이다. 그는 사는 곳을 동시에 두 곳을 말하고 있는데 서자(書字)대답이 참으로 이상하다. 보통 어디에 사냐는 질문에는 한 곳을 말하는것이 상식인데 그는 두곳을 말하고있다. 혹시 시 밑의 구.군과 같은 하위지방 개념일까? 난돈(蘭墩)은 런던을 의미하는데 흔도사단(忻都斯担)이란 지역은 어디를 가리킬까?
흔도사단(忻都斯担)의 뜻은 힌두스탄이란 이란계(系)의 언어로 ‘인도의 토지’를 뜻하며 북인도 평야 또는 갠지스 평야라고도 한다. 동쪽의 벵골만(灣)에서 서쪽으로 아라비아해(海)까지 이르며 동서길이 3,200km, 남북너비 최대 320km에 이른다. 일종의 함몰지대로, 인더스 갠지스 ·브라마푸트라의 3대 하천의 본 ·지류가 광대한 충적평야를 형성하였다. 지형은 극히 평탄하여 갠지스강江) 하구에서 1,500km 거슬러 올라간 지점에서도 해발고도는 150m에 지나지 않는다.충적토 두께는 수백m에 이른다. 이 평야에 거주하는 주민은 전 인도 인구의 40%를 넘으며 역사적으로도 인도 문화를 이룩한 최대 중심지이다.
주민의 거주상태에는 지역차가 있으며, 비가 많은 동부의 갠지스강 중 ·하류부에서는 논농사를 주로 하는 쌀 재배가 성하여 건조한 인더스강(江) 유역에 비하여 5배 이상의 인구가 집중되어 있다. 비가 적은 서부에서는 잡곡을 주로 생산하는 외에 목화 ·사탕수수 등이 재배된다. 이 지역은 현재 정치적으로는파키스탄과 인도로 나누어지나 양국 모두 경제 ·정치상으로 매우 중요한 지역이다.
[출처] 힌두스탄 [Hindustan ] | 네이버 백과사전
흔도사단(忻都斯担), 즉 힌두스탄이란 말이 이란계(페르시아어)라는 것이며 이 말이 인도의 갠지스평원을 뜻하는 말이다. 인도는 16세기부터 18세기 중엽까지 이슬람의 무굴제국이 대부분의 인도를 지배했었고, 많은 힌두교와 불교의 유적을 파괴하고 힌두인의 이슬람 개종을 적극 추진했었던 역사가 있었기 때문에 그 영향을 받지않을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조서에 통상무역을 요구하러 온 독일인었던 구츨라프가 거리상으로 수천Km 떨어져있는 런던과 인도의 흔도사단(忻都斯担),즉 힌두스탄에 산다고 조선의 감사에게 글자(한자)로 답했다는것이다.
그림속의 구츨라프의 외모를 자세히 보면 인도인이 머리에 둘러싸는 터번(turban)에 인도인 복장을 하고
있다.
2) 구츨라프는 영국의 위치를 설명하면서 ' 변계(邊界)는 곤련(昆連)에 가까운데 곧 운남성(雲南省)에서 발원(發源)하는 한줄기 하류(河流)가 영국의 한 지방을 거쳐 대해(大海)로 들어간다' 라고 했다
중국 운남성에서 발원한 하류가 멀리 떨어져 있는 섬나라 영국의 한지방을 거쳐 대해(大海)로 들어간다니 이게 무슨 수수께끼 같은 대답인가?
'영국(英國)의 지방은 구라파(歐羅巴)에 있는데 사람을 귀히 여기고 있으며, 지방이 또 아미리가(亞未利加)에 있는데..(3)' 이 문장으로 판단해보면 지방은 아마도 영국의 식민지를 말하는 것 같다.
과거 유럽중에 영국 식민지가 된 나라로는 지중해의 섬나라 사이프러스나 몰타 같은 나라가 있다.
그럼 운남성에서 발원하여 거쳐가는 것이 지중해라는 것인가? 지중해가 맞다면 대해(大海)는 대서양(大西洋)인가?
구츨라프가 19세기 초때 수천Km를 흘러가는 하류의 흐름을 정확히 알고 대답했다는 것도 놀랍지만 영국의 경계가 곤련(昆連)이라는 곳에 가깝다고 대답했는데 구츨라프가 말한 곤련(昆連)은 어디를 말하는 것인가?
이것이 서유럽에 위치한 섬나라 영국을 위치를 설명했다고 생각하기에는 무엇인가 이상하다.
본문계속)
영국과 교역하고 있는 다양한 나라와 아메리카, 아프리카와 태평양의 많은 속지는 물론 인도 등지에 이르는 판도를 파악하고 있다. 이는 브로튼이나 맥스웰과 홀 일행이 조선에 상륙했을 때와는 전혀 다른 양상이다. 이전에는 조선인은 영어를 전혀 몰랐고, 영국인은 조선어는 물론 중국어조차도 몰랐다. 그래서 의사소통이래봐야 보디랭귀지 수준에서 서로 이해할 뿐이었다.
그러나 이번엔 짧은 시간에 이처럼 의사소통이 원할했던 것이다. 이는 앞서 밝혔듯이, 이들이 조선에 교역을 할 목적으로 오면서 앞선 방문객이었던 홀 일행의 충고에 따라 통역을 대동하고 왔기 때문이다.
교역 요구한 최초 서양선 로드 암허스트호
이 배는 조선에 통상을 요구하기 위해 나타난 최초의 서양선으로, 영국 국적의 로드 암허스트(Lord Amherst)호 였다.
영국 동인도회사는 중국과 조선, 오키나와, 대만 등의 통상에 적당한 항구 등을 조사하면서 동시에 지방관민들의 통상에 대한 관심을 직접 파악하기위해, 1832년 1000t급 로드 암허스트호를 극동지방에 파견했다. 이미 브로튼과 홀, 맥레드 등의 항해기를 통해 조선에 대한 사전 지식을 습득하고 있던 동인도회사는, 린제이(H.H.Lindsay)를 책임자로, 리(Rees)를 선장으로, 독일인 선교사 구츨라프(Karl Friedrich August Gutzlaff, 郭實獵)를 통역 겸 선의(船醫)로 동승하도록 조치했다.
중국어, 즉 한자를 구사하는 구츨라프가 있었기에, 조선 관리들은 과거 접촉에서 보다 훨씬 자세한 문정(問情)을 할 수 있었고,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정보 수집과 의사소통이 가능했다.
영어와 네덜란드어 등에 능통했던 구츨라프는 독일인으로 네덜란드 선교회 소속이었지만, 중국에서 성경 번역 활동 등을 하던 영국 선교사 모리슨(Robert Morrison)의 영향으로 중국선교에 관심을 갖고 중국어를 배웠고, 나중엔 역시 중국 선교사인 메드허스트(Walter H.Medhurst)의 권유로 아예 런던선교회 소속으로 이적했다.
그는 '중국 서해안을 따라서 한 3번의 여행(Journal of Three Voyages along the Coast of China in 1831, 1832 and 1833, with notices of Siam, Corea, and the Loo-Choo Islands)'이란 항해기를 남겼다. 그는 이 항해기의 제5장( p316~356)에서 코레아에 대해 기술하고 있다.
또 이 항해의 책임을 맡았던 린제이(H.H.Lindsay)도 구츨라프와 함께 '중국북방지역 항해 보고서(Report of proceeding on A voyage to the Northern ports of china, in the ship Lord Amherst)'를 남겼다. 이들 역시 구글에서 볼 수 있다.
"코레안은 사람을 가장 싫어하는 사람들"
구츨라프의 '중국서해안을 따라서'를 먼저 보자. 구츨라프 일행은 32일동안 조선에 머물거나 해안을 항해했다. 이들은 7월17일 백령도 앞 황해도 장산(Chwang-shan)에 닻을 내렸다. 해안에 접근하면서 어부를 만났으나 말이 통하지 않자, 한자로 필담을 나눴고 몇권의 책과 영국문장(紋章)의 버튼을 주자 매우 좋아했다고 기록했다.
이들은 이듵날 여러 사람을 만났는데, 그 중에는 유럽산 화승총을 든 사람도 있다고 기록했다.
구츨라프는 "200년전 네덜란드 배가 표류해 오랬동안 억류됐었고, 나중에 암스테르담에서 그 고난의 세월을 출판했다"고 기록, 하멜표류기가 당시 유럽에선 이미 널리 읽혔음을 알 수 있게 해준다. 뿐만아니라 구츨라프는 조선에서 신유사옥 등으로 서학을 신봉하던 사람들이 다수 처형된 사실 등도 알고 있었던 것으로 기술하고 있다. 이미 사전에 충분한 지식을 쌓고 조선에 나타난 것이다.
이들은 조선 관리에게 '왕에게 편지를 전하고 싶다'는 내용 등을 한자로 필담을 나눴으나, 관리들은 "언제 떠날 거냐"에 관심이 컸다고 했다. 또 한 사람에게 책을 건네주자, 그는 'Pulga(불가)'라고 말했고, 구츨라프 일행은 이를 "fire(쏴)" 혹은 'burn it(태워)"라고 알아 들었다<Journal of Three Voyages~, p325>. 그는 '불가(不可)'라는 한자를 한글로 발음했지만, 이를 구츨라프는 알아듣지 못한 것이다. 필담은 통했지만, 말은 전혀 통하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교역을 원했지만, 빨리 떠나기만을 원하는 조선 관리들을 보고, 구츨라프는 '조선사람은 가장 사람을 싫어하는(misanthropic) 종족'이라는 느낌을 받았다고 기록하고 있다.(p325)
구츨라프 일행이 황해도 장산에 닻을 내리고, 조선관리와 필담을 나눈 기록은 조선의 기록에는 나타나지 않는다. 그러나 나중에 이 사실이 드러나면서, 해당 관리는 문책을 당한다. 다음은 조선의 관련 기록이다. <황해도 지도>
"황해 감사 김난순(金蘭淳)이, ‘지난 6월 21일 이양선(異樣船) 1척이 장연(長淵)의 조이진(助泥鎭)에 와서 정방하자, 관내의 어부(漁夫)들이 생선과 서책을 서로 바꾸고 그 진(鎭)의 이교(吏校) 역시 필찰(筆札)로 문답한 일이 있었는데도 수사(水使)와 지방관은 다만 예사로운 당선(唐船)이 왔다 간 것처럼 보고하였는데, 추후에 들은 즉 배의 제작과 인물·언어·복색 등이 홍주(洪州)에 정박한 영길리(英吉利) 배와 다름이 없었으나, 상세히 문정(問情)하지도 않은 채 임의로 떠나게 하고, 끝내 사실에 의거하여 낱낱이 보고하지도 않은 것은 변정(邊情)과 관계가 있다.’면서 장계로 수사 윤우현(尹禹鉉)과 장연 현감 김성익(金星翼) 및 본 진장(鎭將)의 죄를 논하니, 모두 나문(拿問)하여 감처(勘處)하였다." <순조 32년 8월11일자>
구츨라프가 장산(Chwang-shan)이라고 기록한 곳은 장산곶으로 행정구역상 황해도 장연군에 속한다. 이양선이 장연의 조이진에 정박했는데, 제대로 문정도 하지 않고 또 보고도 엉터리로 해서 관리들을 문책했다는 것이다.
고대도 뒷바다에 정박
구츨라프 일행은 장연을 떠나 7월24일에는 고대도 뒷바다에 정박한 것으로 보인다. 이후 공충 감사 홍희근의 장계에 보이는 내용들이 펼쳐진다.
구츨라프는 조선관리의 문정 과정에서 "한 핵심관리는 아주 유창하게 중국 고전을 설명했고, 우리가 중국 통계 서적을 제시하며 '코레아 왕은 중국에 일년에 4번씩 조공를 보낸다는 이 기록이 사실이냐'고 묻자, 그는 즉각 '사실"이라고 답했다"고 기록(p330)했다. 또 큰 모자를 쓴 2명의 고위관리가 배에 도착, 왜 영국이 대영국이라 불리는지, 왜 인도가 힌두스탄이라 불리는지에 대해 설명해야 했다고 쓰고 있다(p331). 이는 홍희근의 장계 내용 그대로다.
심도있는 의사소통 이뤄져
구츨라프의 기록에는, 조선의 교역요청 거부에 따라 조선을 떠날때까지 머물면서 관찰하고 조선 관리들과 나눈 대화등을 자세히 기록하고 있다. 기록 중에는 서울까지의 거리를 이야기 하면서 지도를 꺼내 보이자 놀라는 조선 관리의 모습(p336)이나, 유교를 신봉해 유교사당을 세우고, 우상을 숭배하긴 하지만 불교는 혐오하고,도교에는 익숙치 않다는 등의 내용, 영혼의 불명성 등에 대해 의견을 나눈 내용(p338), 60대 노인의 감기 처방 기록(p347) 등도 보인다. 아울러 외국 식물 유입을 법으로 금지해 감자 심는 것을 반대하는 주민들을 설득, 물가에 감자를 심고 그 재배법도 써줬다고 했다(p341~342). 이전 브로튼과 홀 등의 접촉과는 깊이가 다른 의사소통을 교환하고 있는 것이다.
" 서자(書字)로 문답하였는데, 국명은 영길리국(英吉利國) 또는 대영국(大英國)이라고 부르고, 난돈(蘭墩)과 흔도사단(忻都斯担)이란 곳에 사는데 1) "
이 문장의 원문을 다시 보니
以書字問答, 而國名而國名英吉利國, 又號大英國居蘭墩忻都斯担地
원문에는 난돈(蘭墩)과 흔도사단(忻都斯担)라는 지명을 하나로 쓰고있다
즉 居 蘭墩忻都斯担地 < '런던흔도사단' 땅에 살고있다> 라고 번역된다
번역문처럼 런던과 흔도사단(힌두스탄)을 두 곳을 말한다면 난돈(蘭墩)과 흔도사단(忻都斯担)
사이에 그리고 (而)라는 접속사가 들어가야하지않을까?
영국의 위치에 대해 조선왕조실록 정조 17년계축 때의 기록을 보면 영국의 위치가 더욱더 묘연해진다
정조 17년 계축(1793,건륭 58) 10월26일 (병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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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주 부윤 이의직이 서양 문물을 소개한 헌서 재자관 홍택복의 수본으로 치계하다
의주 부윤 이의직(李義直)이 헌서 재자관(憲書齎咨官) 홍택복(洪宅福)의 수본(手本)을 가지고 치계하였다. 수본에 아뢰기를,
“영길리국(暎咭唎國)은 광동(廣東) 남쪽에 있는 해외 나라로서 건륭(乾隆) 28년에 조공(朝貢)을 바쳐왔었는데 올해 또 바쳐왔고,*) 두목관(頭目官)으로 온 마알침(嗎戛)과 이시당동(呢嘶噹㖦) 두 사람은 영길리 국왕의 친척이었으며 그들이 바친 공물(貢物)은 모두 19종입니다.【서양 포랍니대리옹(布爉尼大利翁) 큰 틀 1대는 하늘의 해·달·별과 지구의 전도(全圖)에 관한 것인데 해·달·별이 자동으로 움직이며 만일 일식·월식 및 별의 도수가 어긋나게 되면 모두 틀 위로 나타나며 그 일이 발생할 연월일시를 아울러 가리켜준다. 또 시간을 알리는 종이 있는데 이름을 천문지리표(天文地理表)라고 한다. 좌종(坐鍾) 한 틀은 천문 기구가 있는데 지구와 하늘 위의 해·달·별이 어떻게 운동하고 있는지를 가리키므로 천문을 학습하는 사람에게 도움이 되고 있다..
*) 광동(廣東)남쪽에 있는 해외 나라가 영국이라고 했다.
광동(廣東)이 어디인가?
<네이버백과사전>
"중국(中國) 광동성의 성도(省都) 광주(廣州)의 국제적(國際的) 관용명(慣用名)임
<위키백과사전>에서 광동(廣東)을 검색하면 광둥성(廣東省)으로 검색된다
" 광둥성(廣東省)은 중국의 남부에 위치한다. 북쪽은 난링(南岭)산맥을 기대고 있고, 동북부는 우이(武夷)
산맥을 향하며, 남쪽은 남중국해(南中國海)를 향하고 있다. 광둥 성 전체의 육지는 북위 20°19′부터 25°31′까지에 위치하고, 동경 109°45′부터 117°20′까지이다."
중국남부에 있는 지방이 광동, 즉 광동성(廣東省)이다. 그런데 광동성(廣東省) 남쪽의 해외나라가 영길리국(英吉利國), 즉 영국이라고 했으니 영국이 19세기에 서유럽이 아니라 동남아시아에 있었단 말인가?
19세기 영국의 위치가 현재 서유럽의 섬나라에 위치하고 있었는지 의심이 들게하는 대답이다.
진정한 영국은 어디에 있었단 말인가?
첫댓글 이호근 선생님 우문愚問 두가지 질러봅니다.
당시 인도는 독립국인가요 식민지 인가요? 또 해가지지 않는 나라라는 것은 무슨 뜻인가요?
인도가 영국의 식민지였다는 것을 얘기하시려는 것 같은데 구츨라프가 동인도 회사 소속이었지만 그가 사는곳과 영국의 위치는 분명히 이상합니다.
본문의 내용을 다시 읽어보면 그의 대답이 왜 이상한지 깨달을 수 있을겁니다
첫째로 사서 원문과 대조하여 문맥을 파악하여야 하겠군요.
모든 대륙론 즉 대륙조선사 서역조선사 지구 조선사 등이 국어문제의 이해력에 걸려있다는 생각이 드니 씁쓸합니다...
이호근 선생님 "영국(英國)의 지방은 구라파(歐羅巴)에 있는데 .... 지방이 또 아미리가(亞未利加)에 있는데" 라는 글에서
아미리가(亞未利加)는 영국입니까 영국이 아님니까?
위 사료에서 구츨라프 일행과 조선인 관리사에에 필담을 하였다고 하니 이 과정 중에서 글 전달의 오해는 없었는지요?
다시 비슷한 질문하여 봅니다, 이호근 선생님은 "필담은 통했지만, 말은 전혀 통하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라고 하시는데 일부의 예(bulga, fire,burn it)만 가지고 다른 모든 필담 내용이 100%로 정확하였는지 어떻게 다시 증명하실 수있겠습니까?
아미리가는 아메리카의 음역입니다. 박자우님이 딴 구절은 고전번역원의 번역본 그대로입니다.
박자우님이 필담 내용의 정확성에 의문을 제기하신다면 반박가능한 다른 해석본을 가지고 있습니까? 만약 해석본이 있으시다면 고전번역원에 문의하실 일이지요.
그리고 '영길리국(영국)이 광동남쪽에 있는 해외나라' 라는 부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이것이 유럽 섬나라 영국의 설명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답답하군요 고전 번역원이 잘못 해석하였다는 것이 아님니다. 이호근님이 인용한 사료들은 역사 문제이기전에 국어문제입니다. 제가 말씀드리는 질문의 요지도 아직 파악하지못한다는 것은 이호근 님 또한 사료 해석에 문제가 있는것이라 것을 반증하는것이라 생각됨니다.
박자우님이 고전번역원 해석이 제대로 되었다고 인정하면서 국어문제라고 말하는 것은 논란의 소지가 있군요. 나는 고전번역원이 한국과 영국의 기존의 지리적 위치에 근거해서 해석을 했기 때문에 저런 번역이 나왔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에 대해 의문을 제기한것이고요.
그리고 박자우님이 저 글 반박할 내용이 있다면 그것에 대해 합당한 해석을 먼저 하고 주장 해야 할겁니다. 내가 질문한 영국의 위치설명에 대해서 근거있는 설명보다는 사료해석의 문제라는 추상적인 주장만 하시는군요.
사료해석의 문제라고 얘기하셨으면 그것이 어떤 문제인지 말해보시라는겁니다
현재도 그러하지만 미국이나 유럽 사람들은 삼성이나 엘지 같은 기업은 알아도 코리아라는 나라는 모르는 경우가 많다 고합니다. 또 그것도 삼성은 일본 기업으로 대부분 알고 있지만요, 당시 조선 지식인 중에 영국 등 유럽 나라들이 정확히 어디 어디에 붙어 있는지 아는 사람들은 몇이나 있었을까요 병인양요 당시의 프랑스 군인들은 대부분 까막눈이 많았다고 합니다. 근대 학교 교육으로 세계지리를 배우게 된지 얼마나 되었을까요. 사료에서 근세사에서 고대사에 이르기까지 사료에 인용된 나라들의 지리 관계에 대하여 기록자에게, 기록의 정확성을 100%을 요구해야 될가요? 기록자의 지리 관계에 대한 부정확성을 찾아내어
전세계에 식민지를 가지고 있었고, 지도를 작성할줄 알았던 영국 동인도회사 소속인 구츨라프가 위치도 제대로 모르고 저런 얘기를 했다고 생각하는 것은 억측입니다.
로스암호스트호가 극동에 있었다는(한반도 조선설에 의하면) 중국,조선,일본등을 배로 돌아다니는데 위치가 어디인지도 제대로 모르고 조선에 도착해서 기독교를 선교(실제로는 통상요구하러)하러 옵니까? 그리고 프랑스 군인과 통상을 요구하러온 동인도 회사 소속이었던 독일인 구츨라프가 무슨 상관관계가 있습니까? 이상하게 논지를 펴시네요. 구츨라프는 한자로 문답을 하였을 정도로 박식한 사람입니다. 관련도 없는 프랑스 군인 얘기로 논점을 흐리지마세요.
그것을 특정세력의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한 역사 왜곡의 결과물이라 해석하여야 올바른 것일까요?
영국(英國)의 지방은 구라파(歐羅巴)에 있는데 사람을 귀히 여기고 있으며, 지방이 또 아미리가(亞未利加)에 있는데 그 역시 크고 좋은 땅이고,
또 서흔경(西忻慶)에도 있어 섬들이 많으며, 아비리가(亞非利加)의 극남단(極南端)에 있는 호망(好望)의 갑(甲)은 수위(垂圍)의 속지(屬地)이고,
또 태평양의 남쪽 바다에도 영국에 소속된 허다한 미개(未開)한 지방이 있으며,
그 끝은 아서아주(亞西亞州)에 있는데 섬들이 많고,
또 흔도사단(忻都斯担)·고위(古圍) 각 지방도 모두 영국의 판도(版圖)에 들어왔다고 하였습니다.
[출처=<조선왕조실록>, 순조 32년(1832년) 7월 21일 4번째 기사]
이 기사의 내용은, 유럽에 있었던 영국(英國)이 아메리카, 아프리카, 아시아 지역에 진출한 역사가 반영된 것이라고 보입니다.
한때 영국(英國)에는 "해가 지지 않는 나라"라는 별명도 붙여졌고요...
대항해 시대에 유럽의 나라들이 아시아에 진출한 역사를 살펴보면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영길리국(?咭唎國)은 광동(廣東) 남쪽에 있는 해외 나라로서 건륭(乾隆) 28년에 조공(朝貢)을 바쳐왔었는데 올해 또 바쳐왔고,
두목관(頭目官)으로 온 마알침(嗎戛?)과 이시당동(呢嘶噹㖦) 두 사람은 영길리국 왕의 친척이었으며 그들이 바친 공물(貢物)은 모두 19종입니다.
[출처=<조선왕조실록>, 정조 17년(1793년) 10월 26일 3번째 기사]
1600년 영국은 동인도회사를 설립했다.
1601년 영국 동인도회사는 자금을 모아 4척의 선단을 동남아시아에 최초로 파견하여 항해에 성공했다.
1602년 영국 동인도회사는 자바 섬 서부의 반텐에 상관을 설치했다.
1711년 영국 동인도회사는 중국 광동(廣東)에 상관을 설립했다.
1786년 영국은 페낭(Penang; 檳島, 檳城, 檳榔嶼) 섬을 식민지로 만들었고, 이후 자유무역항으로서 영국 동인도회사의 거점으로 발전했다.
1819년 영국은 싱가포르(Singapore) 섬에 동인도회사의 상관을 설치했다.
1824년 영국과 네덜란드가 체결한 조약에 의해 말라카는 영국에 양도됐다.
[출처=위키백과]
사료에서 근세사에서 고대사에 이르기까지, 사료에 인용된 나라들의 지리 관계에 대하여, 기록자에게 기록의 정확성을 100% 요구해야 될까요?
기록자의 지리 관계에 대한 부정확성을 찾아내어, 그것을 특정 세력의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한 역사 왜곡의 결과물이라고 해석하여야 올바른 것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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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자우 선생님의 이와 같은 지적에 저도 공감합니다.
아마도 현재의 인도지역 또는 그 북부 지역정도 되지 않을까요? 원래 인도는 현재 방글라데시즉, 버마의 영토까지 포함하고 있었다고 나옵니다.. 바로 태국과 근접한 곳까지이지요... 현재의 인도대륙과는 좀 차이가 있었던 것 같애요..... 핵심을 쥐고 있는 지역이 방글라데시와 버마인데.... 자료가 부족하죠.... '히말라야'가 왜 영산이 되었는가?... 이유가 있겠죠... 한국인에게 히말라야는 어떤 존재인가?....
해당지역에는 현재도 흑인과 유사한 종족이 대거 거주하죠...
이렇게 보면 영국의 정통성을 이어가는 왕의 종족이 백인만 있었던 것은 아닐 수 도 있죠.... 과거도 그렇고, 아마도 현재도...
이렇게 보면 당나라의 역사는 영국의 역사와 어느정도 함께 갈수도 있을 것도 같은데요.... 화란이나 이런 곳도 마찬가지죠... 난돈...??? 사단... 등등...
구츨라프가 도착한 홍주(洪州) 고대도(古代導)의 위치를 먼저 찾아야 영국의 위치가 파악될것 같습니다.
아무래도 바다를 접하고 있어야 조선의 고대도(古代導)란 섬에 도착할 수 있겠죠
어떤 이들은 싱가포르나 홍콩 등 동남아시아 지역의 사회 형태를 보면서 언제부터 동서양의 사람들이 함께 살기 시작했는지를 연구하는 경우도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 보면 그렇게 물어보는 사람들이 이상해 보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네들이 원래 부터, 오래전부터 함께 살았다면.. 즉, 동서양은 한종족이 이쪽으로, 또 다른 종족은 저쪽으로 이동하여 만들어진 대거 군집일 수 있다는 것이죠. 그러므로, 동양과 서양이 모두 오리지널이 아닐 수도 있는 것입니다... 인생을 살다보면 주장은 할 수 있죠...
만약 동양과 서양이 무엇인가의 정체성을 놓고 원래 자신들 것이라고 싸운다면, 또 다른 입장에서 접근해 본다면, 그네들의 다툼의 이유를 이해할 수 없을 수도 있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