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www.youtube.com/live/SDy2G73bJxg?si=MKG7iD9nZYXRnnwI
디모데전서 강론 17
디모데전서 6:17-21
누리게 하시는 하나님
역사란 묵시를 펼쳐 놓은 것이다. 묵시에 대한 것은 역사 속에 비유와 상징으로 던져졌으나 진리의 영을 받지 못한 자들은 눈에 보이는 것을 전부로 여기므로 성경을 문자적으로만 볼 수밖에 없다. 그러기에 예수 그리스도를 복음으로 받아들이지 못한다. 이런 점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보내심을 받은 사도가 믿음 안에서 진리의 아들 된 자에게 넘겨주는 것은 오직 복음이다.
이제까지 우리는 감독과 집사, 남자와 여자, 과부, 장로, 종과 상전에 대한 말씀이 오늘날 교회 생활을 잘하도록 조직을 어떻게 하고 교인들끼리 서로를 어떻게 대하여야 하는가를 교훈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집인 교회를 비유한 진리의 말씀에 대한 것임을 확인하였다. 따라서 본 서신의 끝에서도 우리의 삶에 대한 가르침이 아니라 믿음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진리의 말씀을 넘겨주고 넘겨받음으로 생명을 누리는 은혜를 확인하는 말씀으로 마무리한다.
“네가 이 세대에서 부한 자들을 명하여 마음을 높이지 말고 정함이 없는 재물에 소망을 두지 말고 오직 우리에게 모든 것을 후히 주사 누리게 하시는 하나님께 두며”(17절). “네가”는 일차적으로 디모데를 가리키지만 1:2에서 이미 살펴본 것처럼 ‘믿음 안에서 진리의 아들 된 자’이고 곧 ‘하나님이 된 자’를 말씀한다. “이 세대”는 ‘세상의 시간 안에’라는 뜻으로 ‘세상’ 그 자체를 의미한다(딤후 4:10, 딛 2:12). 성경에서 세상은 언제나 하나님의 뜻을 대적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는 존재로 표현된다(고전 2:8).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롬 12:2)
“본받지 말고”의 ‘쉬스케마티조’는 ‘(어떤 형상을 취하여) 같은 모양이 되다, ~에 순응하다’라는 뜻이다. 여기에 부정을 의미하는 ‘메’가 붙었으므로 ‘세상과 같은 모양이 되지 말라’라는 의미이다. “변화를 받아”라는 말의 ‘메타몰포오’는 ‘다른 형상으로 바꾸다, 변하다, 변형하다’라는 뜻이고, “마음을 새롭게 함”의 ‘아나카이노시스’는 ‘아나’(위에)와 ‘카이노스’(새롭게 하다)의 합성어로 ‘위로 새롭게 된 상태, 하늘의 것으로 새롭게 된 상태’를 의미한다. 성도는 이 세상과 같은 모양을 내는 자가 아니라 다른 형상으로 바뀌어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분별할 줄 아는 존재라는 의미이다.
“부한 자들”이란 말의 ‘플루시오스’는 ‘풍성한, 부유하게, 풍부한, 넉넉히’라는 뜻이고 “명하여”라는 말의 ‘파랑겔로’는 ‘명령을 전하다, 가르치다’라는 뜻이다. 세상 안에 있는 부유한 자들이니까 세상에 기대를 걸고 사는 존재를 의미한다. 율법의 행위를 통해 자기 의를 쌓는 존재로 자신에게 구원의 재료가 풍부하다고 여기는 상태이다. 자족함, 즉 십자가 은혜로 풍성함을 누리는 것과 대조된 표현이다. 그래서 자기 의를 쌓는 자들에 대해서 주님은 눈멀고 벌거벗어 가난한 상태로 보신다.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계 3:17)
“마음을 높이지 말고”라는 단어는 ‘휩셀로프로네오’인데 ‘휩셀로스’(높은, 거만한)와 ‘프로네오’(이해하다, 생각하다)의 합성어에서 유래하였는데 ‘마음이 높다, 거만하다, 교만하다, (정신적인 면에서) 고상하다’라는 뜻이다. ‘휩셀로스’는 “높은 산”(마 17:1, 막 9:2) 혹은 ‘높은 곳, 하나님이 계시는 곳’을 표현하는 용어로 사용되었다(히 1:3). 결국 마음이 하늘에, 하나님의 자리에 가 있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언약으로 일하심을 거부하는 것이고 곧 십자가를 대적하는 마음이 교만이다. 믿음이 있다는 것은 높은 마음을 품지 않은 상태이다.
옳도다 그들은 믿지 아니하므로 꺾이고 너는 믿으므로 섰느니라 높은(휩셀로스) 마음을(프로네오) 품지 말고 도리어 두려워하라(롬 11:20)
“정함이 없는”이란 ‘아델로테스’는 ‘불확실한’이라는 뜻이다. 즉 “정함이 없는 재물”이란 ‘불확실한 재물’이라는 말이다. 세상에서 부요하다는 것은 불확실한 것이다. 거짓 선생들이 신화와 성취함이 없는 족보를 이용하여 복음인 것처럼 내세우지만 결국은 자신의 경제적 이익을 위한 것에 불과한 것으로 하늘의 생명과는 상관없는 불확실한 것으로 결국 재물에 소망을 두는 것에 불과한 것이다. 그래서 “재물에 소망을 두지 말고”라고 부유함에 소망을 두지 않도록 가르치고 전하라는 것이다.
“오직”이라고 번역하였는데 헬라어 ‘알라’는 ‘그러나, 또한, 도리어, 그렇지 않으면’이라는 뜻의 접속사이다. 그러니까 ‘이 세대에 속한 부자들은 교만한 마음으로 불확실한 재물에 소망을 품지만 하나님이 된 우리(교회)는 그렇지 않다’라는 의미의 말씀이다. “후히”라는 말은 “부한 자”와 같은 단어 ‘플루시오스’이다. “누리게”라는 말의 ‘아폴라우시스’는 ‘향유하다, 즐거움을 누리다, 충분한 향락’이라는 뜻이다. “하나님께 두며”라고 하였는데 헬라어 ‘에피’는 ‘~위에, ~가까이에, 근처에’라는 뜻인데 여격으로 사용되면 장소적으로나 시간적으로 ‘그 안에, 함께’라는 의미로 표현된다.
17절을 정리하자면 ‘이 세대 안의 부자들에게 가르치라, 하늘까지 높아진 마음으로 불확실한 부유함에 소망을 가지지 않도록. 그러나 우리에게 모든 것으로 부유하게 하사 충분한 즐거움으로 누리게 하시는 하나님 안에 함께 (소망이) 있다’라는 말씀이다. 그러므로 성도는 세상의 것을 가진 것과 상관없이 하늘의 생명 안에 있는 상태를 부요하다고 말씀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자기 백성들을 부유하게 하시는 가난하게 되심의 죽음이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하신 이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으로 말미암아 너희를 부요하게 하려 하심이라(고후 8:9)
또 무엇이 부족한 것처럼 사람의 손으로 섬김을 받으시는 것이 아니니 이는 만민에게 생명과 호흡과 만물을 친히 주시는 이심이라(행 17:25)
“선을 행하고 선한 사업을 많이 하고 나누어 주기를 좋아하며 너그러운 자가 되게 하라”(18절). “선을 행하고”의 ‘아가도에르게오’는 ‘아가도스’(선한)와 ‘에르곤’(일, 행위)의 합성어로 ‘선을 행하다’라는 뜻이다. “선한 사업”이라고 번역하였는데 ‘선한 행위와 함께’ 혹은 ‘선한 행위 안에서’라는 말이고, “많이 하고”의 ‘플루테오’는 ‘풍부하다, 부요하다, 부요하게 되다’라는 뜻이다. 선을 행하시는 분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예수 그리스도의 선한 행위 안에서 행한다는 의미이다.
“나누어 주기를 좋아하며”라는 말의 ‘유메타도토스’는 ‘유’(잘, 좋은)와 ‘메타’(함께), ‘디도미’(넘겨주다)의 합성어로 ‘좋은 것을 함께 넘겨준다’라는 뜻이다. “너그러운 자”의 ‘코이노니코스’는 ‘코이노니아’(참여, 교제, 나누어줌)에서 유래한 단어로 ‘참여하여 나누는 자’라는 뜻이다. 정리하자면 ‘선한 행위와 함께 선을 행하는 일에 부요하게 되어 함께 좋은 것을 넘겨주고 기꺼이 나누어주는 자들이다’라는 말이다.
세상에서 부유하여 자기 의를 쌓는 자들과 달리 하나님의 집인 교회요 성도인 우리는 불확실한 부유함에 소망을 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를 생명으로 부유함을 누리게 하신 하나님께 소망을 둔 자들은 하나님이 된 자들로서의 특징이 드러날 수밖에 없다는 의미이다. 하나님이 된 자는 복음을 가지고 종교적으로 이용하여 경제적 이익을 얻는 것이 아니라 생명으로 부유하게 되었기에 넘겨줄 수 있는 것은 선한 행위, 즉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으로 이루신 생명을 넘겨주는 자이다.
11 내가 너희 보기를 간절히 원하는 것은 어떤 신령한 은사를 너희에게 나누어 주어 너희를 견고하게 하려 함이니 12 이는 곧 내가 너희 가운데서 너희와 나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피차 안위함을 얻으려 함이라(롬 1:11-12)
“이것이 장래에 자기를 위하여 좋은 터를 쌓아 참된 생명을 취하는 것이니라”(19절). “장래에”라는 말의 ‘멜로’는 ‘오는 것, 미래, 곧 ~하려고 하다, ~하게 되어 있다, ~하는 것이 당연하다, ~하는 중이다, ~해야 한다’라는 뜻인데 여기서는 현재형으로 표현하였기에 “장래”로 번역하기보다 하나님의 뜻에 의해 확실하고 불가피하게 일어나는 사건으로 보아야 한다. “좋은 터”란 ‘선한 기초’라는 뜻이다. “쌓아”라는 말의 ‘아포데사우리조’는 ‘(창고에) 저장하다’라는 뜻이다. “참된 생명”이란 사실상의 실제적 생명이라는 말이다. “취하는 것이니라”라는 ‘에필람바노’는 ‘잡다, 단단히 붙잡다, 돕다, 점유하다, 굳게 지키다’라는 뜻으로 중간디포태로 표현되었다. 즉 내가 스스로 붙잡을 수 있어서 취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단단히 붙잡을 수 있게 되었다는 의미이다. 정리하자면 하나님의 뜻에 의해 지금 선한 기초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마음에 저장하게 된 자는 하늘의 생명을 단단히 붙잡고 지키게 된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자기를 위한 것이라는 의미이다(마 7:24-27).
“디모데야 망령되고 헛된 말과 거짓된 지식의 반론을 피함으로 네게 부탁한 것을 지키라”(20절). “망령되고”의 ‘베벨로스’는 ‘신성하지 않은, 불경스러운, 모독적인, 세속적인, (장소적으로는) 가까이할 수 있는, 하기 쉬운’이라는 뜻이다. 망령된 것은 거룩하지 않는 것으로(딤전 1:9) 허탄한 신화와 같은 것이다(딤전 4:7). “헛된 말”은 비진리, 다른 복음을 의미한다. “거짓된 지식”이란 비진리를 아는 것을 의미한다. 당시의 영지주의를 지칭한 것이다. “반론”의 ‘안티데시스’는 ‘안티’(반대)와 ‘데시스’(두다, 정하다)의 합성어로 ‘반대’라는 뜻이다. 즉 진리의 반대편에 둔 것을 의미한다.
“부탁한 것”의 ‘파라데케’는 ‘파라티데미’(옆에 혹은 앞에 놓다)에서 온 단어로 ‘기탁물, 신탁품’이라는 뜻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바울 사도에게 맡겼고 디모데에게 넘겨준 것, 곧 복음을 의미한다. “지키라”라는 단어는 ‘퓔랏소’로 ‘(꺼내서) 보여주고 나타내라’라는 뜻이다. 다른 교훈을 전하는 거짓 선생들과 대조하여 한 말이다. 다른 교훈을 전하는 자들 앞에 복음을 분명하게 드러내라는 의미이다.
“이것을 따르는 사람들이 있어 믿음에서 벗어났느니라 은혜가 너희와 함께 있을지어다”(21절). “따르는”이라는 말의 ‘에팡겔로’는 ‘선포하다, 약속하다’라는 뜻이다. 중수디포태로 거짓 선생들에 의해 비진리를 따르게 된 것을 의미한다. “믿음”은 ‘그 믿음’이신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벗어났느니라”라는 말의 ‘아스토케오’는 ‘놓치다, 벗어나다, 떨어지다, 떠나다, 빗나가다’라는 뜻이다. 거짓 교사들을 통해 비진리를 따르게 된 것은 믿음이신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떨어진 상태이다. 그러므로 “은혜”가 너희(하나님의 집인 교회)에게 있어야 한다. “은혜”란 비방자요 박해자이며 폭행자, 죄인의 괴수로서 믿지 않고 알지 못하여 행하는 자에게 베풀어진 긍휼이다(딤전 1:13-14).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 너희 무리와 함께 있을지어다(고후 13:13)
주 예수의 은혜가 모든 자들에게 있을지어다 아멘(계 22:21)
이 외에서도 바울 사도는 고린도 교회에 보내는 서신을 마무리하면서(고전 16:23-24), 갈라디아 교회에 보낸 서신에서(갈 6:18), 빌립보 교회에게도(빌 4:23), 데살로니가 교회에게도(살전 5:28, 살후 3:18), 또한 디모데에게 보낸 두 번째 서신에서도(딤후 4:22), 디도와(딛 3:15), 빌레몬에게 보낸 서신에서도(몬 1:25) 마지막 인사에서 “은혜”를 선언하였고, 히브리서 기록자도 “은혜가 너희 모든 사람에게 있을지어다”(히 13:25)라고 마무리하였다. 진리의 아들들이 된 자, 하나님이 된 자들의 생명의 근거가 십자가를 통해 베풀어진 은혜이기 때문이다(20250126 강론/주성교회 김영대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