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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가방
사람은 모름지기 몸이 건강해야 한다. 허약해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하고 싶은 것도 제대로 할 수 없는 것이다. 예를 들면, 맛있는 음식을 먹거나, 볕이 좋은 날 산책을 하거나, 아름다운 한 편의 영화를 감상한다거나, 그렇지 않으면 멀리 해변이 아름답고 전통이 고스란히 잠겨 있는 먼 이국의 땅을 여행해보는 새로움을 가져볼 기회가 없는 것이다. 그것뿐이랴. 모든 것이 귀찮아지고 의욕은커녕 어떻게 되지나 않을까 하는 전전긍긍만 하루 종일 머릿속에서 열병에 걸린 사람처럼 끙끙대고 말 것이니까.김학질은 이제 자신이 늙어 더 이상의 것은, 지금까지 이룬 것을 제외하면 욕심을 가져서는 안되겠다며 한숨을 포옥 쉬었다.
늦은 저녁을 먹고 일찍 잠자리에 들었지만 잠 대신 좀체로 떨쳐지지 않는 망념, 곧 지금 오십 하나의 이 나이까지 자신이 이룬 것을 곰곰이 따지고 돌아보게 된 것은 점심을 갓 먹고 얼마 되지 않은 시간 집 근처에서의 우연한 만남 때문이었다. 점심을 먹고나니 이것이 나이에 따른 식곤증인지 봄이 온 탓에 자연스럽게 찾아든 춘곤증인지 구분이 안가는 졸음에 의자에 앉은 채 잠시 졸다가 이래서는 아무 것도 안되겠다, 자꾸 이렇게 졸음이 온다고 닭병 걸린 듯 꾸벅꾸벅 졸다가는 지금 잔뜩 벌려놓은 일은커녕 건강에도 자신이 없을 것 같은 공연한 우려가 생겨 일이 있든 없든 일단 무조건 밖으로 나가야겠다는 생각을 굳히며 문을 나섰던 것인데, 틈만 나면 졸음이 온다는 것은 일단 이 나이에 적신호라고 어느 신문의 건강 컬럼에서 얼핏 본 적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집 뒤에 있는 초등학교의 저학년 수업이 막 끝났는지 한 떼의 아이들이 재잘거리며 집을 향해 걸어가고 있고, 그 옆으로 나이가 많은, 그러나 여전히 근력이 좋아 보이는 노파 한 사람이 그네들의 모습에 흥에 겨운지 친구처럼 따라붙으며 윽박지르듯 말을 붙이고 있고, 아이들은 그런 것에 아랑곳하지 않은 채 명랑하게 답변을 하는 정경이 눈에 들어온다. 골목을 돌아 대로(大路)가 보이는 조금 넓은 길로 들어서니 아직 날이 차가운지 아니면 습관인지 반쯤 자른 철제 드럼통에 군불을 때며 오순도순 이야기를 나누는 시장 사람들이 보이고, 사실 이 길로는 잘 다니지 않는데 늘 다니는 길에 지금 하수로 공사가 한창이라 어쩔 수 없이 걸어 들어왔지만 언제 이런 건물이 들어섰는가 싶게 단층 빌라들과 그 주변의 치킨점, 식당, 세탁소들이 즐비한 것이 다소 낯설게 느껴지기도 했지만 그럼에도 좀 색다른 분위기인 것 같아 기분이 썩 나쁘거나 불쾌하지는 않았다.
요즘 자주 찾아오는 치통 때문에 자주 들르는 곽배호 치과의 뒷 주차장을 지나 막 건널목 앞으로 가는 길이었는데, 누가 봐도 눈에 뜨일 까만색 고급 중형차가 한 대 있었고 창문을 반쯤 열어젖힌 채 무료한 듯 운전석에 앉아있던 사람과 그만 눈이 마주치고 말았던 것이다. 얼떨결에 눈을 돌려야 한다고 생각하고 얼굴을 돌리는데 퍼뜩 정신이 들었다.
“니, 학질이 아이가. 내 모르겠나, 학질아.”
이 동네에 사업 관계로 이사온 지 어느 덧 이십 여년이 흘렀지만 아직 자신의 이름을 이렇듯 힘차게 불러온 사람은 아직 한 사람도 없었던 터라 하마터면 다리가 휘청 꺽일 뻔했다. 자신의 이름을 불렀던 사람은 황급히 차문을 열고 밖으로 나와 학질의 앞에 당당하게 섰는데, 눈을 휘끔이 들고 쳐다보았지만 학질은 처음에는 잘 알아볼 수가 없었다.
“이 친구, 그래 날 모르겠나. 나 학용일세. 송학용. 학교 다닐 적에 고물상이라고 자네가 틈만나면 놀렸잖아. 그러다 언젠가 앙심을 품고 자네를 뒤쫓아 비 오는 날 집까지 쳐들어갔다가 왜, 자네 앞집에 살던 고약하게 생긴 노인네한테 욕을 들어먹기도 했던 학용이 나 말일세.”
상대가 행인이 오고가는 길가에서 얼마나 크게 이야기를 하는지 배에 힘을 잔뜩 주고 자세를 바로하며 기억을 더듬었지만 생각이 얼른 나지를 않았다.
“이 친구, 나이가 들더니 많이 흐려졌구만. 이럴게 아니라 어디 가까운 찻집에나 가서 이야기를 좀 나눔세. 내가 원래 좀 바쁜 사람이기는 하지만, 그래 근 사십 년만에 어렵게 만난 자네를 여기서 어정쩡하게 보낼 수야 있나. 가세.”
이거 초면에 실례가 많다는 어리둥절한 표정만 지을 수밖에 학질은 달리 도리가 없었다. 상대가 이끄는 대로 따라 가보기는 하겠지만 속이 찜찜한게 무슨 벌건 대낮에 날벼락 같은 도둑을 만나 한바탕 왕창 속는 기분이 드는 것이 영 개운치가 않았다. 그렇지 않아도 마누라가 아침에 먹던 밥상을 고스란히 그대로 차려주는 바람에 억지로 구겨넣다시피 밥을 먹고 나온 터라 속이 거북한 것도 사실이었다.
찻집이랄 이름은 붙일 것도 없고 주변 동네 근처의 돈 많고 할 일없는 노인네들이나 동사무소, 농협 같은 점심을 먹고나면 꼭 커피를 마셔야 직성이 풀리는 족속들이 자주 찾는 허름하기 짝이 없는 여느 다방이었다. 테이블이래야 서 너개 구색을 맞춘 것이 지난 겨울에 써먹은 것인지, 아니면 몇 년 전에 써먹고 치우기가 귀찮아 그대로 둔 것인지, 오색 셀로판지와 알전구에 먼지가 새까맣게 앉은 크리스마스 추리가 구석에 웅크린 채 눈치보듯 들어서는 학질과 학용을 맞고 있었다.
“어서 오이소. 오빠 뭐 드리까예? 여기 메뉴판에 없어도 잡숫고 싶은 게 있으면 말만 하이소. 근처 시장을 뒤져서라도 다 갖다드리끼예.”
지미, 오빠는 무슨 얼어죽은 오빤가. 허리통이 조금 전 시장 입구에서 본 드럼통만한 이제는 할마씨라고 불러야 어울릴 살이 디룩디룩 찐 여자가 얼굴에 화장을 떡칠한 채 싸구려 향수를 내뿜으며 잡아먹을 듯한 눈으로 다가오며 한 말이었다.
“아니, 우리는 지금 바쁜 사람이라 자네와 농담할 시간이 없네. 그리고 우리는 지금 근 사십 년 만에 만난 죽마고우란 말이야. 군말 필요없고, 너네들 찻값도 나갈 때 별도로 내놓을 테니 따끈한 커피로 두 잔 들고와. 어째 재떨이가 이게 뭐야. 이것도 좀 싹 비우고 깨끗한 걸로 하나 가져오고. 그러면 되겠지?”
학질은 주인인 듯한 이 집 여편네를 떡 주무르듯 갖고 노는 학용을 지그시 바라보며 낡은 의자에 등을 기대며 기억을 가다듬으려 용을 썼다. 학용인지 각용인지 모르긴 해도 자신의 이름을 대며 이제는 까마득한 고향의 학교를 제대로 대는 걸 보면 어리숙한 자신을 얼러먹을 시러배는 아닌 것 같고. 요즘은 하도 사기꾼이 많다 보니 한 이부자리에서 몸을 서로 뎁혀주며 지금껏 살아온 마누라 한테조차 의심을 해보기도 하는 학질이라 얼른 아는 체를 하기는 비록 늦기는 했지만 좀 쑥스러웠다. 그렇다고 시장 바닥에 도는 날라리들마냥 애초에 없는 연기를 할 수도 없고. 어차피 못 알아봤으니 난감하고, 이왕 따라온 거 커피나 나오면 기억을 더듬어야겠다며 품에서 담배를 꺼내 한 개피를 문다.
“야, 이런 좁은 길에서 자네를 만날 줄이야. 그래 내가 이곳을 얼마나 자주 들르는데 오늘에서야 자네를 보다니. 이 나이 되도록 어지간한 데는 빠뜨리지 않고 다 다니는데 말이야. 자네 그러고 보니 많이 늙었구먼. 얼굴은 동안처럼 그대로 남아있는데 말이야.”
“아, 그런가. 세월이 그만큼 흘렀으니. 자네 학용은 여전하구먼.”
“하, 이 사람, 이제 날 알아보는구먼.”
그 참, 말이라는게 기억은 나지 않고 일단 상대를 인정한다는 의미로 가르쳐 준 이름을 대며 평소에 안면이 좀 있는 사람들에게 하는 어투로 이야기를 시작하니 금방이라도 기억이 날 것 같았고, 일면 친근감이 들기도 했다. 그러나 그렇다고 안심을 하기에는 아직 이르다.
“그래, 자넨 요즘 뭐하고 먹고 사는가? 난 조그만 건설회사를 운영하네만. 그렇지 않아도 이 근처에 새로 길이 난다는 소식을 오래 전에 들었는데, 착공시기가 그동안 불분명했거든. 그런데 앞으로 한 달 후면 개시한다고 입찰서류를 내라고 연락이 왔지 않겠는가. 그래서 늘 하던대로 견적도 좀 뽑고 유지도 미리 찾아봐야 할 것 같아서 나왔던 걸세.”
그렇지 않아도 새로 길이 난다는 이야기를 며칠 전 아파트 반상회에 다녀왔던 마누라로부터 얼핏 듣기는 했지만, 그런 것에 원체 무관심한 학질은 그 길이 구체적으로 어디에 나는 지도 물을 줄 몰랐다. 그것보다는 다니는 길이 또 바뀌겠군 하는 귀찮은 표정만 지었을 뿐이었다.
“오빠들 천천히 맛있게 드세요. 필요하시면 언제든지 부르세요.”차 배달을 나갔다가 왔는지 얼굴에 찬 바람을 묻힌 채 조금 전 들어올 때는 보이지 않던 뚱뚱한 주인 여편네보다는 좀 나은 여자였지만, 요즘 사람 구하기가 하늘에 별따기라 하던데 이곳 사정도 그것에서 조금도 나아지지는 않은 모양인지 얼핏 봐도 막 집에서 밥하다 나온 여자마냥 청바지에 숙이면 가슴이 덜렁 들여다 보이는 헐렁한 브라우스 차림이라 별로 눈도 가지 않았다.
"시간이 되면 좀 더 근사한데서 술 잔도 기울여야 하는 건데...”
“아니, 그럴 필요 없네. 술은 무슨 술?”
평소 술자리라면 빠지지 않는 학질은 술 이야기가 나오자 대번 혈색이 돌며 군침부터 흘렸다. 그리고 이번에는 자리를 좀 더 편하게 고쳐 앉았다.학용은 결국은 마누라를 잘 얻었다는 이야기였다. 시골 학교를 나와 변변치 않은 주제로 당시 먹고 살만한 곳이면 어디도 가리지 않고 뿔뿔히 뛰어나가던 때였다. 학용은 제대로 공부를 할 수 있었으면 했을 것이라며 시대를 잠시 한탄하기도 했다. 안 해 본 것이 없다고 했다.
부둣가 노역부터, 역 근처나 극장 주변의 구두닦이, 시내 유흥주점의 종업원, 한때는 서울까지도 진출해서 이름만 대면 알만한 부자 동네의 어느 잘 사는 집의 경비며, 정원사, 그리고 한번 돈맛을 알고 모은 돈으로 여느 사람하듯 땅 투기도 해서 재미를 좀 보았다는 둥, 시간의 순서는 잘 맞지가 않았지만 가만히 들어보니 이 곳에 눌러앉아 별 기복없이 살아온 자신에 비하면 학용은 파란만장한 삶을 살은 역경의 인물이었다.
“마누라를 만난 건 군대 갔다 오고서야. 그전에는 벌은 돈도 사실 버는 족족 쓰기 바빠 모아놓은 게 전혀 없었고. 해서 광안리 해수욕장 알지 자네? 그곳 해변 노천에서 어렵게 포장마차 자리를 하나 얻어 시작을 했지. 그것도 지금까지 계속 했으면 꽤 괜찮았을 거야. 가끔 찾아갈 기회가 있어 가보면 안면이 남아 있는 사람들이 제법 그 자리에 있는데, 거의 다 알부자 다 되었더라고. 이 년을 꼬박 포장마차를 해서 번 돈으로 난 조그만 레스토랑을 운영할 계획을 그 때 가지고 쉬는 날도 없이 계속 뛰었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는 자네도 잘 아는 그 뭐 서양 속담이 있잖아. 그 말이 나에게 그대로 딱 들어맞았던 거야. 일 년 지나고 다음 해 찾아 온 어느 여름인가, 초가을인가. 그래 초가을일거야. 그렇지 않으면 그렇게 찾아오지도 않았을 여자니까. 마누라는 집이 서울이었거든.”
게으른 처남이 가게에 나왔는지 확인을 해보고 싶었다. 가게라야 손바닥만한 조그만 곳에 벌린 잡화점으로 파리만 날리며 그럭저럭 입에 풀칠을 하는 정도였다.
“난 그때 인생에서 과연 횡재라는 것이 있긴 있는 것이구나 하는 것을 깨달았지. 난 그녀를 필생의 내 반려자로 마음 속으로 정하고 집요하게 물고 늘어졌지. 휴가 일정이 불과 일주일 남짓된다는 이야기를 듣고 내 온 정력을 다기울여 그녀를 내곁에 붙들어 놓는데 결국은 성공을 했고, 난 마누라 덕에 처가로부터 재산을 물려받아 그 길로 냅다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달려서 이곳까지 오게 된 것일세. 어떻게 보면 풍운아라고도 할 수 있지. 난 스스로를 소설이나 드라마에 나오는 주인공들과 많은 점에서 비슷하다고 생각하며 가끔 그런 것을 텔레비전으로 볼 때면 지나간 시간들이 떠올라 눈물을 글썽이기도 하네.”
학질은 들었던 커피 잔을 소리나게 내려놓았다. 슬슬 쓴맛이 나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만 이런 불결하기 짝이 없는 곳에서 나가고 싶은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러나 저러나 학용인지 각용인지 길에서 만나 이곳 다방까지 끌려오다시피 따라오긴 했지만, 그리고 시종 감격해하는 그의 간간히 피어오르는 표정과 흘러간 이야기를 듣긴 하지만 아무리 눈동자를 굴리며 이리 뜯어보고 저리로 훔쳐보고, 머리를 갸우뚱하기도 하며 기억을 더듬었지만 도통 생각이 나지를 않았다. 이거 실수하는 것은 아닌가. 싶은 생각에 등짝이 서늘해지며 식은 땀이 조금씩 흐르는 것 같기도 했다. 설령 기억이 난다고 해도 이왕의 그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지금의 자신의 처지를 돌아보니 슬며시 열불이 나는 것이, 자신은 인생에서 그런 운이 한 번도 따라주지를 않아 지금도 조그마하고 허름한 아파트에서 별로 늘어난 것도 줄어든 것도 없이 세월아 네월아 하며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다는 생각이 불현듯 치밀었던 것이다.
제 이야기가 어느 정도 끝났다고 생각한 학용인지 각용인지 하는 넉살좋은 친구는 득의의 미소를 흠뻑 지으며 사람좋은 사람처럼 커피 잔을 내려놓으며 누가 봐도 인자하기 짝이 없을 흐뭇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적어도 학질은 그 자리에서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럼 난 뭐야.
“이 친구, 어릴 때하고 달리 많이 점잖아졌구먼. 하긴 나 같은 일을 하는 사람치고 달변 아닌 사람 없고 말 아끼는 사람 없으니, 그런 자네가 좀 부럽기도 하네.”
어렵소, 이건 완전히 자기 안방처럼 이제는 슬슬 갖고 놀려드네.
“아닐세, 자네 참 이야기를 잘 해 주었네. 그렇지 않아도 자네를 길에서 만나 무척 반가웠는데, 나야 어쩔 수 없다지만 자네처럼 여유가 많은 친구를 재회할 수 있어 무엇보다도 기쁘네. 사실, 나도 자네한테는 어떻게 보일지 모르지만 그렇게 한가한 사람은 아닐세. 이곳저곳 벌려놓은 사업이 많아 요 며칠간 짬을 낼 수 없을 정도로 바쁘게 지내다가 어제서야 좀 한가해서 마침 날도 따뜻한 봄날이라 차를 쓸 필요도 없이 산책삼아 걸어보기로 작정하고 나왔던 것이네. 아무튼 반가우이. 어디 연락할 만한 곳을 알려주게. 내 시간이 나면 기회를 만들어서 자네와 오랜만에 만난 기념으로 회포를 풀도록 할 테니까.”
“여기 있네, 내 명함이야. 그리고 난 아까도 말했다시피 이 주변의 공사건으로 자주 오게 될걸세. 그러니 이제 만나는 일이 수월찮게 있을 것 같구만.”
그렇지 않아도 학용도 일어나야할 판이었다. 이 자리에서 어떤 짓을 하는 건지 시커먼 땟국물이 곳곳에 잔득 끼여 있는 테이블에 올려놓은 학용의 핸드폰으로 찾는 전화가 쉴새없이 빨간 벨소리를 울려댔기 때문이었다. 학질은 다리에 힘을 잔뜩 모으느라 애를 쓰며 자리에서 일어났지만 그만 아찔한 현기증으로 자리에 털썩 주저앉을 뻔 했다. 그러나 다행히도 학용이 먼저 찻값을 낸다며 앞장 서 나가는 덕택에 그런 볼썽사나운 풍경을 들키지 않을 수 있었다. 한참 따뜻할 대로에서 학용의 손을 맞잡은 채 작별 인사를 나누던 학질은 갑자기 찾아든 한기로 부들부들 떨었는데 얼른 손을 놓은 탓에 그것마저도 상대에게 들키지 않았다고 생각했다. 낮에 그런 갑작스런 경우를 당하고, 말이 좀 이상하지만 학질은 당했다고 생각하며 곰곰이 지난 자신의 살아온 길을 오랜만에 그야말로 오랜만에, 좀체 뒤돌아보지 않는 그렇다고 불도저처럼 앞만 보고 달려온 성격도 아니고, 돌아보니 한숨만 절로 폭폭 소리가 나게 터져나왔다. 그렇지 않아도 날이 갈수록 몸도 이상해지는 불안도 겹쳐지는 판인데 앉은 허리가 전보다 더 굽어지는 것이다.
학질은 어째 몸이 찌푸드드한 노곤함을 이기지 못하겠다는 말을 속으로 중얼거리며 집을 나섰다. 아니나 다를까 이틀 전에 학용으로부터 연락이 왔는데, 집 근처에서 술 한 잔 사겠다며 재촉하는 듯한 전화가 걸려왔던 것인데 오늘이 바로 약속한 그 날이었다.
“내가 기필코 술을 한 잔 사야할 것 같아 늦은 시간에 염치를 무릅쓰고 전화를 했네. 혹시 자네가 집을 비운 사이 전화를 해서 이야기하면 불편해 할 것 같아서 말이야. 자네를 만나고 나서 발주처에 갔는데 그럴려고 그랬는지는 모르지만 제시간에 닿았다면서 구청장이 긴히 할 말이 있다더니 다음 날 입찰하고 보니 우리 회사가 낙찰을 받은 거야. 길게 이야기하면 잘 모를테고 일단 전에 갔던 그 다방으로 나오게. 시간은 저녁 식사도 곁들여야 하니까 여섯 시가 어떤가. 그럼 그 때 만나세. 끊네.”
별 말을 할 여유도 주지 않는 일방적인 전화였다. 허긴 바쁜 친구니까. 애고 모르겠다. 술을 사준다는데 거절할 이유는 없지 라며 입맛을 다신 학질이었다. 비가 좀 내리고 나니 기온이 좀 올랐는지 두꺼운 외투까지 걸칠 필요도 없을 것 같아 가벼운 옷차림으로 나섰는데, 만남의 성격이 그래서 그랬는지 이전보다 발걸음은 가벼웠다. 산다는 게 뭔지, 오늘 받아먹는 술은 맛있을란지 모르겠다는 둥, 난 그래도 다른 건 몰라도 술 하나만큼은 복이 있단 말이야. 먹고 싶으면 물론 대개 아파트 입구의 슈퍼에서 막걸리나 소주 한 두병을 직접 사들고 집으로 와서 먹는 편인데, 간혹 집으로 연락이 와서 나가보면 술사는 사람은 늘 상대편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아직 학질은 술 살 일이 별로 없었던 것인데, 그만큼 변화가 없는 미미한 시간이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술을 산다고 하면 자식 결혼식이나 사업이 번창하던가 재산이 불어 좋은 집으로 새로 이사를 한다 던가 해야 하는데 그럴 일은 애당초 학질과는 먼 관계의 일이라고 생각되었다.
일전에 그 친구를 만났던 건널목을 향해 걸음을 재촉하고 있는데 요새는 보기 드문 장의차가 한 대 서있고 흰 상복차림에 두건을 쓴 가족들로 보이는 사람들이 그 앞에서 얼쩡거리는 것이 보였다. 학질은 원체 둔해서 그런지 미신같은 것에는 별로 관심이 없다. 신문을 봐도 오늘의 운세같은 그날의 일정을 조목조목 적어둔 페이지는 대개 뛰어넘었다. 그런데 갑자기 그 차 옆을 지나게 되자 기분이 묘해지는 것이었다. 학질은 고개를 옆으로 비스듬히 돌린 채 들릴락말락한 소리로 욕을 내뱉었다. 이노무 자슥들, 좀 잘 하지. 그리고는 앞에 빤히 보이는 허름한 예의 그 다방으로 냉큼 들어갔다. 마음이 들떠 조금 일찍 집을 나선 학질은 아직 학용을 만나려면 시간이 좀 남았다는 것을 알고 기다려야 한다는 것을 알지만 개의치 않았다. 학질에게 시간은 사실 그전부터 별 의미가 없는 것이었다. 오히려 눈만 돌리면 걸려있는 시계들을 보며, 또 그런 시계에 눈을 돌리며 뭔가에 쫓기듯 사는 사람들을 보면 혀를 끌끌 차곤 했던 학질이다. 허름하긴 하지만 구색을 갖춘 다방에만 해도 벌써 시계가 서너 개는 될 것 같았다. 학질이 앉아 있는 쇼파 맞은 편의 흰 벽에 하나, 들어오며 얼핏 눈에 뛴 주방에 시계가 하나, 그리고 또 본 것 같았는데 그것은 잘 생각이 나지 않는다. 얼마전 오랜만에 찾은 집근처 뒷산의 약수터에도 그 시계는 어김없이 걸려 있는 것을 보고 피식 쓴웃음을 흘렸었는데, 좌우지간 참 시계도 흔한 세상이다. 시계가 많으면 시간도 많아야 하는데 그것은 그렇지 않은 것 같다. 모두들 더 늦기 전에 한몫 보겠다며 바쁘게 설쳐대는 걸 보면 세상에 걸려있는 수많은 시계와 시간은 반비례하는 모양이었다.
“일전에 오셨던 그 오빠 아닙니꺼. 요즘 세상에 오빠와 같은 단골을 만들기가 쉽지 않은데, 가만 있어, 이럴게 아니라, 아, 마침 오는구나. 경자야 여기 녹차 한 잔 아니, 두 잔 들고 와. 넌 녹차가 싫으면 딴 걸로 가져오고. 오빠 오해하지 마세요. 이 기회에 점수 좀 딸려는 것뿐이니까. 그런데 어떻게 혼자 오셨어요. 전에 그 분은.”
그러니까 이 여자가, 나 같이 한 눈에 봐도 별 수 없는 사람한테 이렇게 찰싹 달라붙어 있는 없는 애교를 뜨는 걸 보니 일전에 그 친구가 나가면서 뭔가 언질을 준 모양이구만, 아니면 돈 냄새를 맡았거나. 학질은 그렇지만 싸구려 화장품 냄새를 흘리면서 붙는 여자가 집에서 독기서린 소리만 주절주절 늘어놓는 마누라보다는 낫다는 생각이 들었다.
“얘, 경자야. 인사드려. 난 좀 급히 가 볼 데가 있거든. 잘 알지.”
퉁퉁 불은 허릿살로 꽉 끼어입은 바지가 터져나갈 것 같았는데 움직임은 의외로 재빠른 것 같았다. 여편네가 그래도 눈치 하나는 빠르구먼. 허긴, 이런 물장사로 돈 남기려면 저 정도는 되어야 될 것 같기는 하네. 녹차 대신 분홍빛 색깔이 도는 음료가 담긴 학질은 이름도 알 수 없는 걸 경자라고 불린 여인이 들고 와서 녹차는 학질 앞에 공손히, 분홍빛 음료는 제자리 앞에 놓으며 학질 옆에 바짝 들어붙어 앉았다. 전에 왔을 때 보았던 불쾌한 것들은 웬일인지 하나도 눈에 들어오지 않고 대신 녹차를 든 학질은 손을 잠시 흥분한 듯 떨며 주위를 휘이 들러보았는데 으슥한 다방 안에는 손님이라고는 자신 외에는 없다는 것을 순간 알아챘다.
“왜 이렇게 손님이 없어.”
“그렇잖아요. 지금 저녁 시간이 저녁을 먹고 난 시간이 돼야 와요.”
손가락 끝에는 분홍빛 매니큐가 발라져 있었는데, 자세히 보니 군데군데 벗겨져 나가 있었다. 녹차를 한 모금 천천히 들이마신 학질은 본래의 성격대로 얼른 경자의 허리로 손을 돌렸다. 가만 있다. 허, 이것 봐라. 그러면 얌전히 하는 대로 앉아 있겠다는 건가 싶어 학질은 얼른 경자의 얼굴을 들여다본다. 경자는 별 의심없이 음료수로 배를 채우겠다는 듯 마시는 일에만 열중한 듯 보였다. 혹시 그 사이에 학용이 들어올 지도 모른다는 의구심에 입구 쪽으로 눈을 한 번 흘낏 준 학질은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싶자 얼른 나머지 한 손으로 경자의 물렁한 젖을 움켜쥐었다.
아, 왜 이래요, 아직 이른 시간에.
라는 반격이 들이칠까봐 조마조마했던 학질이었는데 경자는 이 부분에 있어서는 학질보다 한 수 위인 듯 별 내색을 않고 그대로 고스란히 받아주고 있다. 손끝으로 미끌미끌하게 전해져오는 감촉에 벌써부터 학질은 목울대로 침을 꿀꺽꿀꺽 감질나게 넘기기 시작했다. 눈시울이 축축하게 감기는 기분이 들어 내친김에 상한선까지는 가보아야겠다는 오기로 얼굴을 바짝 쳐들고 경자의 얼굴로 다가서는데 딸랑하며 문이 열렸고 숨 찬 소리를 내며 학용이 막 들어섰다. 학질은 눈앞에 둔 떡을 놓친 듯 안타까운 얼굴 표정을 얼른 고치며 자세를 순식간에 좀전의 위치대로 바꾸었다. 그러느라 테이블에 놓여있던 녹차를 하마터면 칠 뻔 했다. 얼굴이 막 술 마신 사람처럼 목까지 벌겋다.
“좀 늦었지. 잘 오다가 한 건널목 뒤의 도로에서 그만 접촉 사고가 나는 바람에, 아무 문제는 없었어. 내가 잘못한 것 없었으니까, 뭐가 그리 급한지 차선을 넘어 끼어들더라니까, 제가 잘못 한 걸 아는지 죄송하다고 하길래 그냥 기분 좋게 봐줬어. 허허허.”
“으응, 그랬나. 큰일 날 뻔 했군. 요새 애들이 그렇다니까. 난 기다리다 벌써 차 한 잔 했네.”
"이럴게 아니라 나가지."
오랜만이기는 하지만 멀리 갈 것은 없었다. 학용이 이미 예약을 해둔 곳이 있다며 의아해하는 학질을 데리고 찾아간 곳은 평소 학질이 길을 다니면서 썩 괜찮다고 생각한 집이었는데, 들어가보니 누군가 벌써 와 있었다. 둘만의 자리라 생각했던 학질은 입맛을 다시는 수 밖에는 별수가 없었다. 오히려 까만 정장에 번쩍거리는 금빛 태의 안경을 착용한 벌써 공무원 신분이라는 냄새가 나는 또래보다 약간 나이가 어린 듯한 사람이 자리에서 일어나는 시늉만 했고, 학용은 송구스럽다는듯 허리를 정중히 숙여 인사를 하였으며 옆에 어정쩡하게 서있는 학질을 동네 유지이자 오랜 친구라며 소개를 했다. 이렇게 되다보니 학질은 본의아니게 술을 먹으러 온 사람이라기 보다는 친구의 사업을 도와주는 약자의 입장에 서게 되고 말았다. 그리고 이 땅의 공무원이라는 족속은 또 얼마나 거만스러운가. 그들은 자신들의 일을 일이라기 보다는 관할하는 모든 업무에 걸쳐 옛날 지방 수령들이 제 것을 배알꼴린대로 아랫것들에게 베푼다며 선심쓰듯 노략질을 하는 행태는 어찌 그리 강산이 변하고 세월이 변한 지금에 와서도 하나도 변한 것이 없는지. 그렇지만 할 수 없는 노릇이다. 이럴줄 알고 온 것도 아니고, 이왕 이렇게 되었으니 요즘 흔히 숨어서 하는 작태를 한 번 볼 량으로 처음 들어섰을 때 자신도 모르게 의기소침하던 자세에서 학질은 아랫배에 힘을 꽉 준 채, 어차피 자신은 이 일과는 하등의 관련이 없다는 방관자적인 유유자적함으로 모든 것을 보리라 생각하고 그렇지 않아도 요즘 온 몸이 찌푸드드한 게 정신을 가누기도 힘든 요즘을 오늘 이 자리를 빌어 뭔가 변화를 모색해보리라 하는 대책없는 심지를 돋우었다.
"이번에 이렇게 도와주셔서 정말 고맙습니다. 계장님의 손빠른 도움이 없었으면 제가 이번에 이 공사를 딸 수 있었을 지, 허허."
"원, 별 말씀을. 최사장님이 아니면 성공적으로 마무리를 할 수 없을 공사인지라 제가 미리 판단해서 윗분에게 넌지시 말씀을 드린 것 외에는 제가 한 거라고는 아무 것도 없습니다. 이게 다 저희 지역을 위한 일이라 생각해서 판단한 일이라..."
평소 학질이 말만 들어보았을 뿐 여직 마셔보지 못한 값비싼 양주들이 들여져오고 어디서 왔는지 이 동네에 있을만한 것 같지 않은 아가씨들이 들어왔으며, 바로 술잔을 나누기 시작했다. 학질은 이 자리에 와 있을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시간이 흐를수록 취해지지 않는 것으로 봐서 옆에서 상황의 눈치를 챈듯한 여급들의 눈치로 보나 불편해지기 시작했다. 될 수 있으면 나가고 싶었다. 이미 학용은 학질에 관심을 둘 수가 없는 형편이다. 오랜만에 만난 친구의 청한 술자리에 결국 들러리로 밖에 안되는 자신의 처지가 주는 족족 술을 들여부었고, 이윽고 화장실에 갔다오겠다며 밖으로 슬며시 나와버렸다. 그들이 이야기하는 도중 자신에 대해 힐끔거리는 눈빛과 지금 자신들이 가진 권력과 재물의 힘을 과시하는 데에 그만 자신의 알량한 자존심의 비위를 건들였기 때문이었다. 길가를 터벅터벅 걸어가는 학질의 어깨가 씁쓸하다.
오늘따라 하루가 고단하다. 발걸음도 잘 이어지지 않는다. 집에는 술 한 잔 단단히 먹는다고 하고 나왔지만 걸음은 어느덧 가게로 향하고 있었다. 세상이라는 게 그 참. 해먹는 놈은 어떤 수를 써도 해먹는구나. 그런데 나같은 놈은 그런 재주도 없으니. 나이는 헛 먹는 것이 아닌데. 그들은 참. 술이 과했는지 속으로 떠올리는 말도 자꾸 끊긴다. 아직 자정까지는 시간이 많이 남았다. 가게 문을 열고 불은 켜지않은 채 자리에 털썩 주저앉아 머리를 숙인 채 한참동안 있었다. 갑자기 누군가 가게 안으로 들어서는 소리가 났다. 영업은 이미 끝난 시간인데 말을 하는 것도 귀찮아 가만히 있다.
"아버지, 접니다. 경호예요."
"응, 네가 웬일이냐?"
"집에 가는 길에 불도 안켜진 채 가게 문이 열려있길래 들어왔습니다."
이 아이도 나를 닮아 영악한 것 과는 거리가 멀고 무뚝뚝하고, 학질은 몸을 못가누는 것도 아닌데 그냥 가만 있다. 살아가면서 제일 싫은 것은 바로 이런 것이다. 자신의 이런 모습이 아들한테 보여질 때, 갑자기 처연해진다.
"불켜고 좀 앉을래?"
"술을 많이 하셨나 봅니다."
"오랜만에 친구를 만나 술 한 잔 했다. 경호야, 이 아버지가 참 초라하지?"
"허허, 아버지도 왜 그런 말씀을, 뭐 언찮은 일이라도 있습니까?"
허, 이 놈 웃는 소리가. 이 애비 처지를 다 안다는 투구나. 학질은 아들을 오랜만에 한참동안 들여다보았다. 그런 학질을 경호는 아무 표정없이 물끄러미 쳐다본다. 허허, 저 놈 코밑에 수염이 벌써 거뭇거뭇하구만. 혹시 아들의 얼굴에서 어떤 근심이나 불안의 그림자는 없는지, 자신처럼 스스로에 대해 불만은 없을지 차근차근 훑어본다. 어떤 내색도 읽을 수가 없다. 늘 보아오고 대해오던 변함없는, 학질이 생각하는 아들의 모습에서 조금의 변화도 없었음을 감지하고 속으로 안심한다. 아니, 감사해한다.
"경호야, 아버지랑 어디가서 한 잔 안할래?"
경호는 졸업을 앞둔 학생이다. 그런 말을 이젠 해도 되고, 그런 말을 할 수 있게 해준 아들이 오늘따라 듬직하다.
"학생이 무슨 술을 먹습니까? 설령 술을 먹는다해도 아직 아버지랑은 싫습니다."
"왜, 이 아버지가 너한테 주정할까봐?"
"주정이야 늘 하시는 거니까 별로 문제될 것은 없는데, 시간이 많이 늦었어요. 어머니도 기다리실테고."
"그래 그렇게 하자. 그럼 우리 다음에 술 한 잔 하는거다. 이 아버지가 꼭 한 잔 사고 싶으니까."
가게 문을 닫고 밖으로 나오니 달이 참 밝다. 머리도 맑아지는 느낌이다. 가방을 든 채 앞서 걸어가는 아들 경호의 등이 듬직하다. 가방을 좋은 걸로 하나 사주리라 마음 먹는다. 여태까지 썩 잘하지는 못해도 가방은 늘 책으로 꽉 찬 채 묵직했다는 것을 학질을 새삼느끼며 기분좋게 웃음을 짓는다. 그래 제기랄, 나한테는 아들이 있다. 너희들은 술 먹고 아무 곳에 쳐져 있을 때 찾아올 아들이 있느냐. 가방을 사주고 싶은 아들이 있느냐 라고 학질은 고함을 지르고 싶은 충동이 입안에서 맴돌았다.-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