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의 멍에
박 윤 경
아직은 어둑한 새벽, 예전 같으면 닭들이 홰를 치며 자명종 시계처럼 울어댔을 시간이다. 이른 공기를 가르고‘상지말’고개 너머 친정집으로 달려가고 싶다. 지금은 피붙이 하나 기거하지 않지만 한 땐 친정집 외양간에‘뎅그렁 뎅그렁’워낭소리 울리던 적이 있었다.
요즘‘워낭소리’라는 독립영화가 관객들의 가슴에 잔잔한 여운을 준다. 나 역시 며칠 전에 관람했었는데, 해외 교포들의 눈시울도 젖게 할 만큼 영화는 탯줄을 찾아가고 싶어지게 하는 것 같다.
소와 함께 동반자인 노인의 모습은 땅을 일구며 살아온 농사꾼의 자화상이다. 뼈대가 드러난 등걸에 멍에를 걸고 쟁기질을 하는 늙은 소와, 땅에 닿을 것만 같은 굽은 등, 덩덕새머리로 갈고리 같은 손을 얹고 달구지를 타고 가는 노인과의 삶은 운명인 것만 같다. 땅을 일궈 생계를 책임져야 하는 가장이 짊어진 멍에나 농사꾼을 주인으로 섬기고 멍에를 걸머진 소는 숙명이듯 묵묵히 옛 방식을 지키며 따른다.
농촌에 부모님이 살아계시거나 소죽을 끊여 본 사람, 향수병에 몸살을 앓고 있는 이들이라면 흙과 함께 살고 있는 농부들 생각에 가슴 찡할 것이다. 반응이 좋은 영화는 새로운 깨달음을 얻고 그리움에 젖는다고 했다. 내면으로 소통하지 않고서는 수 많은 관객을 사로잡을 수 없는 실화, 감정이 몰입되면서 밭고랑에 앉아 울고 싶은 건 왜일까.
내가 어린 시절, 농사꾼 집에 소를 키울 수 있는 것은 자식농사의 희망이고, 부의 상징이었다. 자식들 교육비로 쓰이기도 하지만 혼례준비로도 한몫을 했었을 뿐 아니라 요즘 농기계의 버금가는 큰 일꾼이었다. 우리 집 역시 소를 키우는 것이 소원이었지만 송아지를 구입하기란 만만하지가 않았다. 어머니는 부엌 구석진 짠지광 옆 작은 항아리에 한줌씩의 쌀을 모았다. 그렇게 저축을 하면서도 장날이면 우시장을 돌아보곤 하셨다.
그러던 어느 날 우리 집에 송아지가 생겼다. 정부에서‘잘살아보세’의 일환으로 마을마다 송아지 한 마리씩을 배정해 주었다. 어미소로 키워 새끼를 낳아 송아지로 되갚으면 되고, 쟁기질이며 써레질도 할 수 있으니 어머니는 신이 났다. 우리 형제들도 덩달아 부자가 되었다. 돼지우리를 고쳐 여물통을 달아주고 쇠지랑물이 고일 수 있는 작은 웅덩이도 파놓았다. 죽젓광이와 지게작대기를 다시 만들었고 바소쿠리와 등 긁개도 사왔다.
품앗이 일에 지칠 만도 하지만 어스름한 저녁이면 어머니의 등에는 한 소쿠리 꼴이 짊어져 있었다. 몸에선 땀에 절어 쉰 냄새가 나도록 피곤해 보였지만, 방울소리 딸랑이며 되새김질로 여물을 먹고 있는 모습을 보면 배가 부르다고 했다.
하지만‘음메’소리 울던 날은 오래가지 못했다. 큰할아버지가 송아지의 코뚜레를 뚫어주고 쇠죽을 쑤는 양이 늘어났어도 아버지는 외양간엔 관심이 없었다. 이발사라는 직업이 있었지만 집에 머무는 것을 싫어 하셨고, 어머니의 잔소리에 작두를 만지고 있지만 어머니 혼자 고구마줄거리든 콩대를 써는 게 빨랐다. 한 바탕 언쟁이 마당을 휘젓는 날은 부림소만 있으면 무엇 하냐는 어머니의 푸념이 아궁이 앞에서 불길 속으로 타들어갔다. 얼마 후 아버지를 믿는 게 아니었다며 누런 중송아지가 우시장으로 끌려갔다. 이후 더 이상 우리 집에서는 워낭소린 울리지 않았다.
따비밭에 밭갈이를 할 때면 어머니는 우리 삼남매를 리어커에 태우고 밭으로 갔다. 그리고는 어머니가 부림소가 되어 어깨에 멍에를 걸머졌다. 언니와 남동생은 어머니 옆으로 서서 봇줄로 쟁기를 끌고 나는 쟁기를 부여잡아 밭을 갈기 시작했다. 하지만 힘이 장사인 소를 대신하기엔 턱도 없었다. 멍에를 짊어진 어머니의 어깨만 짓무르고 손바닥이 부르틀 뿐, 그 날 밤‘아-퍼 아-퍼’뜨거운 입김과 함께 애잔 하면서도 미련한 어머니의 신음소리가 신경 쓰이도록 싫었다.
영화 주인공은‘아-퍼 아-퍼’쇠잔한 몸이 울고 있는 신음소리와 어머니가 누워 있는 모습이 겹쳐지면서 귓전으로 파고든다. 어쩌면 주인이 심한 몸살을 앓았던 그 날, 말 못하는 늙은 소도 밤새워 몸살을 앓은 건 아닌지.
기계도 외면하고 소먹이를 위해 농약도 치지 않으면서 꼴을 베는 옹고집 노인의 신음소리가 봉화골과 관객을 울렸다. 자연을 외면하지 않고 토농(土農)이로 살아오신 분, 농부들이 그래왔듯 워낭소리의 노부부가 9남매를 키워 객지로 내 보낼 수 있었던 기반은, 30년 지기 소가 있었기에 가능 했던 것이다.
전 세계가 경제난을 겪고 있는 시점에 기축 년 소의 해에 선보인‘워낭소리’는, 급격하게 성장해온 난개발에 대한 자각을 일깨워 주기도 한 것 같다. 무엇보다 한 번 더 부모를 생각하고 내면으로 소통하는 동물과의 인연이 얼마나 끈끈한 것인지에 대한 가르침을 얻었다.
어머니는 외양간이 비워지면서 다리에 힘이 없다고 했었다. 외양간을 생각하면 가슴이 아리고 맘이 고프다. 오늘따라‘상지말’고개 너머에서 울 엄니가 자꾸 나를 부르는 것만 같다.‘음-메- 음-메’그럼 나는 어떻게 엄마를 부르지?‘엄매야- 엄매야’이렇게 부르면 저 세상에 계신 울 엄니 어깨가 조금은 펴질까나.
2009년 3월
가슴으로 피워낸 메달
박 윤 경
2008 베이징 올림픽이 화려한 폐막식과 함께 끝이 났다. 각 국을 대표하는 선수들이 한 자리에 모여 4년간의 기량을 발휘한 올림픽, 애초 우리는 금메달 열개로 종합순위 10위 안에 드는 것이 목표였었다. 하지만 감개무량하게도 금메달 13개로 종합순위 7위를 차지했다.
지도상에서 손톱만한 나라가 세계인들을 누르고 스포츠의 힘을 발휘하였기에 환호성을 지르지 않을 수 없었다. 올림픽 경기가 치뤄지는 내내 다음날이 기다려질 만큼 하루 일과가 신이 났었다. 아직도 여운이 남아 어깨가 으쓱거려지면서도 또 다른 감동과 아쉬움에 메달이 스칠 때면 스포츠에도 교차가 있는 것만 같다.
이번 올림픽에서도 감동과 좌절이 있었다. 백혈병을 이겨내고 끝까지 경기를 치룬 선수와 한쪽다리를 잃고서도 완주한 선수, 8관왕을 목에 건 수영선수도 있었다. 유럽선수는 이기지 못 할 것이라는 예상을 뒤엎은 우리의 수영과 세계신기록 역도는 그야말로 꽃이었다. 일본에게만큼은 지지 말아 달라고 빌고 빌었던 야구까지 짜릿한 일등을 했음에도 가슴 한켠이 애잔한 것은, 같은 아줌마라는 동질감을 떠나 죽을 것만 같다가도 회생하며 눈물바다를 이룬 핸드볼의 여인들 모습이 지워지질 않아서이다.
투혼이라는 말 외에 무슨 말이 더 필요할까. 아니 정말 운이라곤 지지리도 없다고 해야 하는 걸까.
베이징으로 떠나기 전 TV를 통해서 그녀들의 훈련하는 모습을 본 적이 있다. 모든 스포츠가 그러하듯이 세계의 무대에서 뛴다는 것은 죽을 만큼의 훈련 없이는 메달획득이란 있을 수가 없을 것이다. 그네들은 아줌마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정열로 가득했다. 덩치 큰 유럽선수들을 상대하려면 몸싸움에서부터 지지 않아야 하기에 혈기 왕성한 남자 고등학생들과의 연습경기는 레슬링 선수들보다 더 치열해 보였고, 숨이 차올라 쓰러질 것만 같은 그 훈련을 지옥훈련이라고 했다.
올림픽 예선전부터 난항을 거듭하며 재경기로 이겨낸 억척이었다. 핸드볼 심사위원이 어쩌면 아줌마들의 투혼이 두려워 우리나라의 핸드볼 출전을 막으려 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국내에서도 변변한 연습장이 없어 지방을 돌며 연습에 몰두했던 그녀들의 평균 연령은 서른이 넘었다.
어린자녀를 떼어놓고 끝까지 싸운 그녀들 덕에 두 주먹을 불끈 쥐기도 하고, 애매한 판정에 분통을 터트리기도, 목에 핏줄이 곤두서도록 고함을 치며 손바닥이 아려올 만큼 박수를 쳤다. 넘어지고 깨지면서도 불리한 판정을 참아내며 그녀들은 동메달을 목에 걸었다. 한 사람의 국민으로서 힘찬 박수를 보내면서 나의 손등은 연신 눈 밑의 물줄기를 훔쳐냈다.
가끔씩 오일장을 간다. 마트처럼 화려하게 정돈 되어 있진 않지만 사람과 사람이 부대끼며 정을 얻어오는 곳은 장터가 제격이다. 가족을 위해 좀 더 싸고 풍성한 식탁을 차리려는 주부들이 100원을 놓고 실랑이를 벌이는 장면은 밉지가 않다. 한 움큼의 덤이 하루를 부자로 만들어 주는 곳, 탁주 한 사발에 순대국밥의 정겨움이 있는 곳에 아주매의 손길이 분주한 장터, 시골 할머니들이 요것조것 야채들을 좌판에 널려놓고 북두갈고리 같은 손으로“이보게 애기 어멈, 이거 내가 농사진겨”하면 친정할머니 생각에 발길을 재촉할 수가 없다. 할머니의 할머니, 어머니의 어머니들이 흙에서 자식을 키웠고, 세계시장에서 메달을 걸 수 있는 부강한 나라로 만든 밑거름이 되어 주었다.
누군가 내게 한가정의 지킴이로서 매달을 걸어준다면 나는 과연 어떤 메달을 목에 걸 수 있을까. 남편에게 물어볼까? 아예 꿈도 꾸지 말아야지. 날이면 날마다 핀잔만 주는 남편인데 50점짜리도 안 되는 마누라에게 메달은커녕 예선 탈락이나 당하지 않으면 다행이지.
그 누구도 아닌 나 스스로가 점수를 매겨 보려니 애매하고 모호하다. 아내로서 엄마로서 투혼을 발휘하진 못했어도 집안에 누를 끼치거나 사회에 혼란을 준적은 없다. 정해진 규칙도 없는 농촌 생활이 힘들어 발버둥을 치며 스스로에게 앙탈을 부리긴 했어도 가정을 내치진 않았으니, 노년이 된 후 사회에 기여한 개근상겪인 메달은 걸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가져본다.
핸드볼의 지킴이가 철저하게 담벼락을 갖춘 수비이듯이 한 나라의 지킴이는 시작이 가정이고 가족을 위한 도약이라고 본다. 설령 아줌마 부대가 메달을 따지 못했더라도 끝까지 포기하지 않은 정신에 금보다 더 값진 국민의 힘찬 박수로 뭉친 메달을 걸어주었을 것이다. 절절하게 가슴으로 품어낸 메달이야말로 그녀들의 몫이라 여겨졌기 때문이다.
올림픽에서 매달을 따지 못한 모든 선수에게도 또다시‘한 번만 더’를 향해서 도약을 하라고 외치고 싶다. 그리고 나 자신에게도 다짐을 한다. 삶이 고단하다고 짜증을 낼 것이 아니라 이웃과 더불어 삶의 향기를 뭉쳐 메달을 전해줄 수 있는 아줌마가 되어 보자고.
2008년 8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