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릉(王陵)과 조선사(朝鮮史)
○ 반도(半島)! 넓다고 생각하면 넓고, 좁은 땅이라 생각하면 좁디좁은 땅이다. 그러나 역사서 상에 기록된 행정 구역으로 보면, 좁아도 너무 좁은 땅이다. 역사서에 기록된 그 많은 조직(組織)을 채우려면, 반도(半島) 면적의 수십(數十)배는 더 넓어야 할 것이다.
○ 이 좁은 땅 안에서 고조선(古朝鮮)으로부터 수많은 국가(國家)들이 있었다고 한다. 삼한(三韓)시절을 보면, 수백(數百)개 국가(國家)가 난립(亂立)해 있었다고, 반도사학(半島史學)은 설명한다. 좋다. 그들의 역사해설을 믿어보자. 그렇다면 아래 기록에 대한 진실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 홍 재 전 서(弘齋全書) 제28권 / 윤음 (綸 音) 3
《伽倻始祖陵定行春秋時享綸音.附註享祀定式敎.崇德殿及新羅諸陵.承旨看審敎 : 가야(伽倻) 시조(始祖)의 능에 봄가을 정기적으로 시향(時享)을 지내도록 한 윤음 제향의 정식(定式)에 대한 하교와 숭덕전(崇德殿) 및 신라의 여러 능을 승지가 살펴보도록 한 하교를 주(註)로 덧붙임.》
《伽倻始祖.厥享國一百五十有八年.偉功靈蹟.至今爲東人之傳頌.其宮基陵地.在金海府.府之父老建宇.扁之曰會老.祭之日.受胙肉飮福.尊以爲常.自朝廷劃祀田置守丁.立石以表界.禁民犯墾.逮予嗣服.遣官致侑.復竪龜頭.近來監護不如式.一抔蓬科.極目蕪萊.過封前.無不指點咨嗟者.又姦民籍其地之所出而蠶食之.其遺裔具以事.訴籲于輦路.申命有司.治其民贖其賦.大抵致敬於歷代陵廟.卽帝王之令典.而文化平壤月城之立監降香.其儀可取而倣.嗣後春秋時享.送香祝邑倅奠獻.監一人.貫於是鄕者充之. : 가야시조는, 158년 동안 국가를 향유하였는데, 위대하고 신령스러운 공적은 지금까지도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본인 주 : 동인(東人)들에게】 전송(傳 頌)되고 있다. 그 궁궐터와 묘 자리가, 김 해 부(金 海 府)에 있는데, 고을의 부로(父老)들이 사당을 세우고, ‘회로(會 老)’라는 편액을 걸었으며, 제사 지내는 날에는 조육(胙 肉)을 받고, 음복(飮福)하는 일을 정기적으로 행하여 왔다. 조정에서 사전(祀 田)을 떼어 주고 능지기를 두고는, 돌을 세워 경계를 표시하여 백성들이 침범하거나 개간하는 것을 금하였고, 내가 즉위함에 미쳐서는 관원을 보내어 치제(致祭)하고 다시 귀부(龜趺)를 세웠다. 그런데 근래에 와서 감호(監護)를 법식대로 하지 않아 묘소 주변에 쑥대만 무성하기 때문에 봉분 앞을 지나가는 사람들이 모두 손가락질하며 탄식하는 형편이며, 또 간사한 백성들이 그 땅의 소출을 차지하여 잠식(蠶食)하고 있는 실정이다. 그 후손이 이러한 사실을 갖추어 연로(輦 路)에서 호소하였기에 거듭 유사에게 명하여 그 백성들의 죄를 다스리고 조세를 거두어들였다. 대저 역대의 능묘(陵 廟)에 정성을 바치는 것은 바로 제왕(帝王)의 아름다운 법전으로, 문화(文化), 평양(平壤), 월성(月城)에 감(監)을 세우고 향(香)을 내려 주는 것에서 그 의식을 취하여 본받을 만하다. 앞으로 봄가을 시향 때 향축을 보내 주고 고을 원이 전(奠)을 드리도록 할 것이며, 감 1명은 본관이 이 고을인 자로 채우도록 하라.》
《春秋享祀依文化三聖祠.平壤崇靈殿.慶州崇德殿.例以春秋仲朔行祭.祭儀用可倣之例.而監一人差出.亦用崇靈,崇德殿例. : 봄가을 제사는 문화의 삼성사(三 聖 祠), 평양의 숭령전(崇 靈 殿), 경주(慶州)의 숭덕전(崇德殿)의, 예에 따라 봄과 가을 중삭(仲朔)에 제사 지내고, 제사 의식은 따를 만한 예를 쓰도록 하라. 감 1명을 차출하는 것도 숭령전과 숭덕전의 예를 쓰도록 하라. 》
《伽倻始祖駕洛國王陵致祭承旨.明當受香.崇德殿.卽新羅始祖妥靈之所.而我世宗朝立廟祀之.每歲春秋.降香祝幣.先朝立神道碑.今行過月城.殿與陵一體看審致祭.而南解王陵,儒理王陵,脫解王陵,婆娑王陵,味鄒王陵,奈勿王陵,法興王陵,眞興王陵,眞智王陵,眞平王陵,善德王陵,太宗武烈王陵,文武王陵,孝昭王陵,聖德王陵,景德王陵,憲德王陵,興德王陵,僖康王陵,閔哀王陵,神武王陵,文聖王陵,憲安王陵,憲康王陵,定康王陵,孝恭王陵,景哀王陵.一體看審. : 가야 시조인 가락국왕(駕 洛 國 王)의 능에 치제할 승지는 날이 밝으면 향을 받아야 할 것이다. 숭덕전은 바로 신라 시조의 영령을 모신 곳인데, 우리 세종 조에 사당을 세워 제사 지내고 매년 봄가을에 향축과 폐백을 내렸으며, 선조(先朝)에는 신도비를 세웠었다. 지금 행차가 월성(月城)을 지나게 되었으니, 전(殿)과 능을 일체 살펴보고 치제하도록 하라. 그리고 남해왕릉(南解王陵), 유리왕릉(儒理王陵), 탈해왕릉(脫解王陵), 파사왕릉(婆娑王陵), 미추왕릉(味鄒王陵), 내물왕릉(奈勿王陵), 법흥왕릉(法興王陵), 진흥왕릉(眞興王陵), 진지왕릉(眞智王陵), 진평왕릉(眞平王陵), 선덕왕릉(善德王陵), 태종 무열왕릉(太宗武烈王陵), 문무왕릉(文武王陵), 효소왕릉(孝昭王陵), 성덕왕릉(聖德王陵), 경덕왕릉(景德王陵), 헌덕왕릉(憲德王陵), 흥덕왕릉(興德王陵), 희강왕릉(僖康王陵), 민애왕릉(閔哀王陵), 신무왕릉(神武王陵), 문성왕릉(文聖王陵), 헌안왕릉(憲安王陵), 헌강왕릉(憲康王陵), 정강왕릉(定康王陵), 효공왕릉(孝恭王陵), 경애왕릉(景哀王陵)도 일체 살펴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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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朝鮮)의 22대 정조 대왕(正祖大王, 1752~1800) 시절의 이야기다.
(1) <而南解王陵,儒理王陵,脫解王陵,婆娑王陵,味鄒王陵,奈勿王陵,法興王陵,眞興王陵,眞智王陵,眞平王陵,善德王陵,太宗武烈王陵,文武王陵,孝昭王陵,聖德王陵,景德王陵,憲德王陵,興德王陵,僖康王陵,閔哀王陵,神武王陵,文聖王陵,憲安王陵,憲康王陵,定康王陵,孝恭王陵,景哀王陵.一體看審. : 그리고 『남해왕릉(南解王陵), 유리 왕릉(儒理王陵), 탈해 왕릉(脫解王陵), 파사왕릉(婆娑王陵), 미추왕릉(味鄒王陵), 내 물 왕릉(奈 勿 王陵), 법 흥 왕릉(法 興 王陵), 진흥왕릉(眞 興 王陵), 진지왕릉(眞智王陵), 진평 왕릉(眞 平 王陵), 선덕왕릉(善德王陵), 태종 무열왕릉(太宗武烈王陵), 문무왕릉(文武王陵), 효소왕릉(孝 昭 王陵), 성덕왕릉(聖德王陵), 경덕왕릉(景德王陵), 헌 덕 왕릉(憲德王陵), 흥덕왕릉(興德王陵), 희 강 왕릉(僖康王陵), 민 애 왕릉(閔 哀 王陵), 신무왕릉(神武王陵), 문성왕릉(文 聖 王陵), 헌 안 왕릉(憲 安 王陵), 헌강왕릉(憲 康 王陵), 정강왕릉(定 康 王陵), 효 공 왕릉(孝 恭 王陵), 경애왕릉(景哀王陵)』도 일체 살펴보라.> 했다는 말은 당시에, 신라(新羅)왕들의 무덤인 “왕릉(王陵)”이 존재했었다는 이야기가 아닌가!!!!!!!!!!
(2) 지금 반도(半島) 땅에서 신라(新羅)의 왕릉(王陵)의 유적(遺跡)이 있는가? 위의 기록대로라면 수많은 신라왕들의 무덤인 “왕릉(王陵)”이 있었으며, 이 왕릉(王陵)들을 보존(保存)하기 위해 “조선(朝鮮)”의 왕이었던 “정조”가 어명(御命)을 내린 것이 아닌가!
(3) 문무왕릉(文武王陵) 역시 왕릉(王陵)으로 땅위에 묘지(墓地)로써 있었다는 것이지, 그 왕릉(王陵)이 바다 물속에 삐죽 튀어나온 암초【수중릉 (水中 陵)】를 보고 말하는 것이 아니잖은가? 어느 카페의 글에 【1955년 정인보에 의해 괘릉의 문무왕 설은 부정되고 1967년도 5월 17일 한국일보가 주관한 삼산오악조사단의 문무왕릉 발견보도가 있은 연후에야 ”김 씨“ 문중에서는 5∼6년의 논의 끝에 문무 왕릉의 ”괘릉“ 설을 철수하기에 이르렀다. 그 후 1973년경에 조선전기까지 전해오던 이곳의 대왕암을 다시 문무 왕릉으로 받아 들였다. 그러나 이후에도 오늘날까지 왕릉의 실체가 '장골(藏 骨)이냐 아니면 산골(散 骨)이냐' 등을 둘러싸고 논란이 계속되고 있다. 】는 글을 적고 있다. 결국 모든 것은 20세기에 결정(決定)되었다는 것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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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高 麗 史 4 卷-世 家 4-顯 宗 1 의 본문(本文)에,
《是 月 敎 : "高 勾 麗 新 羅 百 濟 王 陵 廟 令 所 在 州 縣 修 治 禁 樵 採 過 者 下 馬." : 시월 교하시기를, 『고구려(高句麗). 신라(新羅). 백제(百濟)의 능묘(陵 廟 : 왕릉과 사당)가 있는 주현(州縣)에서는 법제화하여, 땔감을 채취하는 것과 파내는 것을(樵採) 금하고, 말을 타고 지나가는 자는 말에서 내려 걸어가라.』명 하셨다.》
► 이렇다면 현존(現存)하는 고구려(高句麗), 백제(百濟), 신라(新羅)의 왕릉(王陵)이나 또는 위패(位牌)를 모시는 사당(祠堂)이 어디에 있는 것인가? 경주(慶州)에 있다는 무슨, 무슨 왕릉(王陵)이라는 몇 기의 능 역시도 “추정(推定)” 뿐이다. 왜냐하면 그 묘 속에서 신라(新羅)의 왕릉(王陵)이라는 그 어떤 증거물(證據物)도 발견(發見)되지 않았기 때문이며, 왕관(王冠) 또는 금동(金銅)관이라는 것 역시 해설(解說) 하는 분들이 왕관(王冠)이 아닐까하고 추정(推定)하는 것이지 그것이 신라(新羅)의 왕(王)이 사용했던 왕관(王冠)이라는 어떤 증거물(證據物)도 되지 못하고 있다.
► 반도(半島) 땅에서는 특히 일제(日帝) 식민(植民)시대에 많은 유물(遺物)이 쏟아져 나온다. <고조선(古朝鮮)으로부터 삼한(三韓)과 삼국(三國), 고려(高麗)를 지나 조선(朝鮮) 5-7천년 세월을 반도(半島)에서 왕조(王朝)를 지켜온 좁은 땅 안에서 왕릉(王陵)이나 왕의 위패를 모시는 사당(祠堂)이 있는 곳을 모른다!!!!!!!!!!!!!!!!!!!!!>
그런데 왜 당시의 반도(半島)를 지배하던 왕조(王朝)에서는 명(命)을 내려 왕릉(王陵)과 사당(祠堂)을 수리하고, 제사(祭祀)를 지내며, 보존(保存)하려 했을까? 당연히 왕릉(王陵)이나 사당(祠堂)이 있었으니 이러한 명령(命令)이 내려진 것이 아니겠는가!
이러한 말은 『“조선(朝鮮)”은 반도(半島) 땅에 존재(存在)하지 않았다.』는 것과 맥을 같이 하는 것이다.
첫댓글 서양 서역 조선설의 주장은 7묘 9묘를 쓰면 섣불리 천자국이라 단정합니다.
월남과 일본 역시 7묘가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천자국이 하나 더 늘어습니다. 조선, 월남, 일본입니다.
"섣부른 일반화 오류"가 아닌지 생각하여봅니다.
네, 공감합니다.
桓武天皇は延暦10年(791年)3月23日になって、中国の天子七廟の制に倣って国忌を7つとすることとし、古い時代のものや現在の天皇と疎遠なものは廃止することとした。この時の7つとは、天皇の曾祖父(天智天皇)- 祖父母(志貴皇子-紀橡姫)- 両親(光仁天皇-高野新笠)- 自身の皇后(藤原乙牟漏)と平城天皇の大同2年(806年)に廃止された聖武天皇の合わせて7つとされている(聖武天皇の存置の理由は不明)。
[출처=위키백과(일본어)]
[http://ja.wikipedia.org/wiki/%E5%9B%BD%E5%BF%8C]
바로 위의 자료에 따르면, 8세기 고대(古代) 일본(日本)이 중국(中國)의 칠묘(七廟) 제도를 모방하였다고 합니다.
예컨대 신라(新羅), 고려(高麗), 조선(朝鮮) 시대의 왕릉(王陵)들 주변에 반드시 비석(碑石)과 같은 표지(標識)가 세워져 있었나요? 현재가 아니라, 옛날 각각의 시대에...
제가 잘 몰라서 질문합니다. 아시는 분에게 답변을 요청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