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 다르크' 라 하면 짧은 머리에 칼을 차고 말을 달리는
보이시한 여전사의 이미지를 떠올리게 된다.
어렸을 적에 읽었던 '잔 다르크' 이야기가 많은 영향을 준 것 같다.
그 이야기는 많은 고민을 담아내지는 못했던 것 같다.
그저 나라를 너무 사랑한 나머지 애국심에,
남자들도 하기 어려운 일을 해낸 여자.
아마도 내가 어렸을 그 당시엔 '애국심'이 국가적 이슈가 되었었고,
잔 다르크에게서 애국심(?) 외에 다른 요소를 뽑아낼 필요조차 없었겠다 싶다.
하지만, 애국심?
잔 다르크가?
다소 왜곡되어지고 이용되어진 '잔 다르크' 이야기에서 벗어나,
진짜 '잔 다르크'에겐 정말 많은 '다른 이야기'가 있었다.
[잔 다르크의 수난]은 잔 다르크를 다룬 최고의 역작이라 평가 받고 있다.
칼 테오도르 드레이어의 마지막 작품인 [잔 다르크의 수난]은
기적적으로 우리 앞에 다시 등장하게 되었다.
무슨 이야기인가 하면,
1928년작인 이 영화의 필름은 창고 화재로 인해 많은 부분이 손실되었다고 한다.
개봉할 당시에도 검열 등의 이유로 제대로 된 원판이 상영되지 못했고,
영화를 보면 알겠지만 절대로 흥행이 될 만한 영화도 아니었다.
사정이 그렇다보니 시간이 꽤 흐른 지금에까지
원본이 제대로 보존되기가 쉽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런데 정말 놀랍게도,
약 반세기 동안 분실되었던 원본 필름이
1980년대에 노르웨이의 한 정신병원에서 발견된다.
그래서 우리는 정말 기적적으로
칼 테오도르 드레이어의 [잔 다르크의 수난]을 볼 수 있게 되었다.
원본의 상태는 꽤 훌륭한 수준이다.
물론 여러가지 복원작업을 거쳤겠지만,
촬영된 화질이나 영상의 상태가 분실되었다가
기적적으로 찾아낸 필름 치고는 놀랍게 깨끗하다.
잔 다르크 역으로 인상적인 연기를 펼친,
르네 팔코네티.
드레이어가 찾아낸 팔코네티는 연극배우 출신이다.
드레이어는 팔코네티에게 분장없이 그대로 연기해 줄 것을 요구했다고 한다.
이 영화는 대부분 '클로즈업'으로 이루어져 있다.
인물의 감정을 가장 가까운 거리에서 잡아내는 '클로즈업'
따라서 연기하는 배우들은 상당히 곤욕을 치뤘을 것으로 예상된다.
살짝만 감정에서 빗겨나가도 얼굴을 통해서, 커다란 스크린을 통해서,
그 어색함이 바로 드러나니 말이다.
그래서일까 드레이어는 2시간이 안되는 이 영화를 만드는데,
무려 1년 반이라는 시간을 쏟아부었다고 한다.
배우들은 충분한 리허설을 거친 후 촬영에 들어갔다고 한다.
인물, 그것도 얼굴이 '주'가 되는 영화.
배경은 대개가 하얀 세트의 벽면이며,
얼굴의 디테일을 묘사하는데 방해가 되는 요소는 인위적으로 배제한 느낌이 난다.
따라서 이 영화는 철저히 '장치'적이다.
불순물이 없는 정제된, 또는 극도로 드러난 인물들의 감정을 잡아내기 위해
다른 요소들을 철저히 지워냈다. 감정적 컨트라스트가 강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클로즈업'이 '주'가 되는 영화라서 '단조롭다.'
하지만 그 단조로움 안에서 카메라는 수만가지도 넘는 선택을 할 수 있다.
이 영화의 앵글을 보면 그 수만가지의 선택들 가운데서 고민하는 작가의 흔적이 보인다.
'익스트림 클로즈업'
배우의 입은 잔 다르크가 느끼는 압제적 상황이 된다.
이 영화는 '힘든' 영화다.
영화 속 잔 다르크 뿐 아니라 보는 관객도 힘들다.
고통스럽다.
빛이 의미하는 '신'의 개입, 혹은 '신'의 중립.
잔 다르크는 어쩌면 건물안으로 비치는 빛을 보고 신을 느꼈을까.
빛은 어디에나 있다.
하지만 모두가 다 신을 느끼지는 못한다.
파리에 있는 하원 도서관에는 세계사에서 가장 특별한 문서 중 하나인
잔 다르크를 죽음으로 이르게 한 바로 그 재판에 관한 기록이 남아 있다고 한다.
그 실제 재판의 공식기록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이 영화는
프랑스에서 잔 다르크를 시성(諡聖)한지 8년만에 만들어진 영화이며,
그 사건은 드레이어의 해석이 깊게 관여한다.
죽음의 기로에 선 잔 다르크를 조롱하는 사람들.
무엇이 기반한 권위인가...
당시의 성직자들과 신학자들이 잔 다르크의 진정성을 판단한 기준은 무엇이었으며,
과연 그럴만한 자격이 있는가에 대한 의문은
인간의 얄팍한 오만함에 대해 역설한다.
배우들의 연기와 특히 조명과 촬영의 수준이 상당하다고 여겨진다.
화면 전체에서 느껴지는 질감은 영화적인 깊이로 이어지는 듯 하다.
죽음.
그 누구도 인간에게 죽음 너머에 무엇이 있는지 이야기해 줄 수 없다.
죽은 자는 말이 없기 때문에.
모른다.
그 모른다는 사실 하나로 '죽음'은
충분히 모든 인류에게 공포의 궁극적 정점이 되어 있는지도 모르겠다.
수난.
잔 다르크의 수난은 내가 알고 자랐던 잔 다르크의 영예와는 상반되는 진실이다.
진실은 힘이 있다.
그 힘은 사람들로 하여금 '믿음'을 이끌어내는데 있다고 생각한다.
잔 다르크의 마지막이 다가오고 있다.
드레이어가 묘사한 잔 다르크의 수난은 예수 그리스도의 '그것'과 흡사하다.
종교적 지도자들과의 대치.
아무에게도 인정받지 못하는 극도의 외로움.
사람들의 비난과 조롱.
신마저 침묵하는 순간에서도 흔들림없는 믿음.
그리고 솔직한 괴로움.
어쩌면 그들은 두려웠을까.
'내가 지금 하고 있는 일이 정녕 옳은 일일까?'
어쩌면 그들은 의구심이 들었을지도 모를일이다.
누가 먼저 시작했는지 모를 역사의 파도 위에 몸이 실린채로
이제는 멈출 수 없는 큰 힘 속에서 이미 자신의 의지는 잃어버린지 오래...
맨발, 십자가 등은 더욱 더...
그리스도의 고난을 밀어내고 생각할 수 없는 수준에 이른다.
꽤 많은 부분에서 오버랩되는 두 고난은
'신'을 이야기하는가,
아니면 '인간'을 이야기하는가.
죽음을 코앞에 둔 잔 다르크.
하지만 끝내 자신이 만난 '신'에 대해서 부정하지 못하는 그녀.
아이러닉하게도,
같은 '신' 때문에 같은 '신'의 이름으로 죽어가는 그녀에게
같은 '신'을 들이대는 이 상황.
도대체 '신'은 어디에?
잔 다르크의 죽음을 목격한 사람들은,
오열하기 시작한다.
"우리가 성인을 죽였다!"
모를 일이다.
사람은 가장 잘 알고 있다고 스스로 여기는 것마저도
가장 모르고 있는 미련한 존재인지도 모른다.
이미 알고 있다고 여기는 사실도
그 순간 저만치 멀어져간다.
지혜로울수록 지혜롭지 못하다는 사실을 극명하게 느낀다.
그것을 스스로 깨닫는 순간 인간은 두려워진다.
두려움을 애써 피하기 위해 사람들은,
두려운 존재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