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행일지
참 어려웠습니다. 히말라야에 갔다온 어느 분의 우리 산이 제일 좋다는 말을 이제는 알 듯 합니다. 마치 무슨 극기훈련을 하고 온 듯한 느낌입니다. 처음 네팔이란 나라의 공항에 내렸을 때는 지구상에 이런 나라가 있구나라는 생각뿐이었습니다. 마치 해리슨 포드의 영화 인디아나 존스에 나오는 과거의 세계로 되돌아간 느낌이었으니까요.
그리고 배낭의 분실, 결국엔 찾았지만 여간한 마음졸임이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천진하고 책임감이 강한 셀퍼들, 그들이 아니었다면 대원 전부의 등정은 어려웠다고 생각합니다. 악조건 속에서도 웃음을 잃지 않는 그들을 보면서 참 대단한 종족이구나를 연신 생각나게 하였습니다.
처음 가본 히말라야는 우리에게 거부감을 보였습니다. 남체에서의 고소증과 로부제에서의 호흡곤란, 그리고 대원들의 식사곤란과 설사, 등등등. 가장 생각나는 것이 있다면 정상직하의 200M 설벽입니다. 탈진한 상태에서 시퍼런 크레바스가 군데군데 있는 고드름질의 설벽은 고행 그 자체였습니다.
등정의 영광을 먼저 가신 경일현, 성성모, 박용찬 청암산우회 3동지와 하늘나라에서 너 잘했다며 웃고있을 나의 친구 근태, 그리고 역시 먼저간 사랑하는 동생 인철이에게 바칩니다.
-2000년 1월19일 눈온 아침 권정철 드림
1999년 12월 20일 월요일(떠나기 4일전)
1999년 2학기도 끝나 간다. 학기 끝이라고 관례대로 남교사 쫑파티를 인근 마포네 식당에서 가졌다. 날씨가 매섭다. 영하1도. 바람을 휘날리며 자전거를 타고 갔다.(나는 출퇴근을 자전거로 한다) 회식 후 집에 오면서 생각했다. 히말라야원정 이란 걸 내가 끄집어 내어놓고, 하루하루 날이 가까워 오니까 이렇게 가슴이 답답해진다. 인제 막 무서워졌다.
살아서 돌아와야 한다는 것이 무진장 부담감으로 작용을 한다. 마음을 비워야 하는데... 지금 까진 아무렇지도 않았는데 이제 와서 덜컥 겁이 난 것이다. 그 동안 나 나름대로 열심히 챙기고 준비를 했지만 과연 잘하고 있는 걸까? 라는 걱정과 그리고 그만큼 따라주지 않는 주변의 모든 여건들. 원정대 짐싸는 일과 고향 가서 부모님 인사드릴 일만 남았다.
1999년 12월 24일 금요일(떠나는 날)
계획 : 서울 - 방콕
실제 : 〃
14시30분. 짐을 싸기 위해 학교 등산반 서클룸에 모였다. 짐이 무진장 많다. over charge 문제가 있지만 좌우지간 카고백에 때려 넣었다. 급기야 작은 배낭을 하나씩 더 마련하고... 학교 기를 만들어 놓고 집에서 안 가지고 와서 집사람과 애들이 학교로 가지고 왔다. 식구들을 보내고 나니까 눈이 너무 온다. 함박눈. 그렇게 기다렸던 눈이 한국을 떠나고자 하니까 오는 것 같다.
짐이 너무 많아서 다시 집사람을 불러 짐을 우리 집 차에 싣고 군자 역까지 갔다. 짐을 내리니까 택시로 헤어졌던 원정대원들이 왔다. 지하철역까지 카고백을 질질 끌면서 옮겼다. 지하철엔 사람이 많았지만 첫 번째 칸에 카고백 밀어놓고 캠코더를 돌리면서 지금 현재 여유를 부리고 있다.
20세기에서 겨우 살아가는 사람과
21세기에도 살 수 있는 사람과
22세기까지도 살 수 있을 것 같은 사람이(제 각각인 우리 팀의 개성을 비유하면서)....
19시 05분 출국 검색대 통과. 대기의자에 앉아 잇다. 이제 한국사람이 적어졌다. 무전기통과가 어려울 줄 알았는데 한글이 적혀 있다고(일제 켄우드지만 형식검정은 한글로 되어 있음) 쉽게 통과. 일제 캠코더는 보는 둥 마는 둥 그냥 통과. 적외선 투시대도 통과. 대원 중에 해외여행을 많이 해본 배대원이 있어 쉽게 쉽게 출국을 한다.
공항세 19,000원은 알펜투어 이혜석 사장님이 부담하고 짐이 150Kg 이나 되는데 사장님과 로열네팔 에어라인 지사장님이 어떻게 해서 over charge없이 통과했다. 덥다. 옷을 벗으려고 하다가 속의 복장이 영 아니어서 그만 두었다. 방콕행 KE653 19시 40분발 비행기가 이륙이 늦어져 20시 48분에 출발했다.. 이코노미 클래스인데 자리는 비즈니스 클래스 수준에 앉게되어 액정TV가 자리에 있고 발도 쭉 뻗게 되어 있다.
9,400미터 상공, 824km/h, -94도씨, 지금 군산 상공을 지나고 있다. 아∼ 배고파, 낮에 짐싸면서 우동 하나 먹었더니만 지금 배가 몹시 고프다. 어느 순간 메리크리스마스! 비행기 안에서 크리스마스를 맞이했다. 모두가 담담하다. 다 늦은 나이에 가족을 두고 원정을 나왔으니 죄책감도 들만 하다. 02시 방콕 도착. 태국 현지시간으론 밤12시이다. 우리보다는 네온사인이 덜한 태국시내를 택시로 달려 하루 묵을 FORTUNE 호텔로 왔다.
12월 25일 토요일(네팔 1일째)
계획 : 방콕 - 카트만두
실제 : 〃
아침 일찍 기상. 호텔뷔페에서 밥먹고 동네 한바퀴 돌았다. 집집마다 자기나라 국기를 많이 게양했고 오토바이가 골목골목 많다. 동네에는 간이 음식점이 많이 보였다. 다리가 짧은 개 또한 많이 보인다. 동네 한바퀴 돌고 호텔로 돌아와 TV보다가 나왔다. 택시 타고 와서 14시발 카트만두행 로얄네팔 에어라인 기다리고 있고 전대장님과 조대원이 공항세 500바트씩 내고 왔다(1달러는 36바트). 에어컨을 공항 내에 가동하고 있어 파일재킷을 입고 있어도 덥지 않아 좋다.
출국 수속 중 한국에선 어떻게 통과되었던 50Kg의 over charge 문제가 발생하여 50Kg × 120바트 〓 6,000바트 나온 것을 날리 법석을 떨어 20Kg, 2,400바트만 내는 것으로 무마를 했다. 그래도 큰 금액이다. 내고 나니까 좀 더 억지를 썼으면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 문제에 대한 해결책은 핸드 캐리 할 수 있는 중형배낭(1미터 미만이면 가능)에 될 수 있는 대로 무거운 걸 많이 넣어 가는 것이 상책이다. 우린 5명의 핸드 캐리 화물을 빼고도 150Kg 이니까 50Kg이나 over를 해서 어쩔 수가 없지만, 앞으로 여기에 대해서는 조금만 신경을 쓰면 해결할 수 있으리라고 본다. 또 조금 over한 것은 그냥 넘어간다.
16시 45분이 되어서 이륙. 조대원 코에서 또 피가 났다. 국내에서도 가끔 그랬다고 하지만 안전을 최고로 여기는 이번 원정에서 그를 바라보는 눈들이 사뭇 걱정스럽다. 눈썹 사이에 붉은 점을 칠한 스튜어디스가 히말라야가 오른쪽으로 보인다고 해서 자리를 오른쪽 창가로 바꿔 잡아도 될 만큼 손님이 그렇게 많지 않다. 간다. 드디어 히말라야가 있는 나라로!
비행기는 북쪽으로 향하고 있고 주변에 산이 하나도 없을 정도로 평야의 연속이다. 비옥한 땅인 만큼 여긴 우리처럼 먹을 것 걱정이 없었던 땅이다. 17시 10분. 산이 보이기 시작했다. 길도 없고 집도 없는 원시 그대로의 대자연이다. 그러다가 엄청난 강이 나타났다. 그거도 푸른 빛깔의. 기내식을 먹었다. 생선요리가 많이 나왔다. 특히 참치를 차게 한 것이 먹음직하다.
구름 위를 날고 있다가 19시 20분 드디어 히말라야가 보이기 시작했다. 그런데 너무 멀리 있어 감흥이 덜한 편이다. 저게 에베레스트다! 아냐 로체쯤 될 꺼야.... 떠드는 사이에 네팔의 성냥갑 같은 집들이 나타났다. 평야가 없으니까 산꼭대기에 모두 집을 지어 놓았다. 여기저기 흩어져서 산이란 산에는 모두 집이 있다고 보면 된다. 집과 집 사이에는 또 산길로 연결되어 있고, 그리고 거대한 계곡들, 정상의 웬만한 부분은 개간을 해서 그렇게 수목이 울창하다고 볼 수는 없다. 20시 01분 비행기가 착륙했다. 엉성한 활주로를 걸어서 지나왔다. 마치 모든 분위기가 해리슨 포드가 나오는 레이더스 영화 속으로 들어온 것 같다.
입국비자요금이 30달러이고 1년내에 다시 오게되면 50달러로 올라간다. 왜 그럴까? 하고 생각해보다가 너 때문에 다른 사람이 못 오니까 비싸게 받겠다는 심보가 아닌가라는 결론이 났다. 큰 배낭 5개와 카고백 5개 중에서 배낭 하나를 분실했다. 방콕에서 보내질 않았는지, 누가 먼저 나와서 집어 갔는지 확실하지 않은 가운데 분실신고를 하고 공항을 빠져 나왔다.
캄캄한 국제공항. 정신이 하나도 없다. 형용한 눈빛의 사람들은 벌떼같이 모여 있고, 우리의 알펜투어 네팔 대행업체인 사랑산에서는 아무도 나와 있지를 않고.... 컴컴한 공항 한쪽 귀퉁이에 자리잡고 기다리고 있다가 공항의 보안요원인 듯한 아저씨의 무전기 같은 휴대폰으로 사랑 산에 전화를 했더니 조금 전에 우리를 태울 버스가 출발했다고 한다. 이곳 사람 같은 한국사람 사랑산 매니저인 김창남씨와 함께 한참 후에 버스가 왔다. 짐을 버스에 싣고 어둡고 어지러운 카트만두 시내를 달려 타멜거리 한쪽에 있는 인터내셔날 게스트 하우스에 여장을 풀었다.
307호와 407호에 짐을 올리고 타멜거리를 가로질러 왕궁 앞에 있는 사랑산 식당에 저녁을 먹으로 갔다. 저녁을 먹은 후 사랑산 네팔인 매니저 Hira Karki씨와 이번 원정의 사다셀퍼인 Dawa Chiling Sherpa를 만났다. 히라씨는 연대 어학당에서 수학한 적이 있어 우리말을 잘 했으며 앞으로 서울대학교에서 남은 공부를 하고픈 꿈을 가지고 있었다. 우리들의 사다셀퍼는 에벨레스트에 5번이나 오른 적이 있는 23살의 훤칠한 미남이어서 모두가 좋아하는 눈치다.
미팅후 호텔로 되돌아오다가 타멜거리에 있는 Club Jump에서 술을 먹었다. 크리스마스라 그런지 유럽 애들이 많이 있었다. 카트만두가 히피들의 천국이라고 했던가? 내눈에는 순수한 관광객의 모습은 잘 보이지 않았다. 특히 그 흔하디 흔한 미국 애들은 여기서는 그렇게 보이지 않는데 아무래도 세계에서 가장 문명의 혜택을 받고 있는 사람들인 만큼 모든 것이 불편한 여기와는 어울리지 않기 때문이다라고 나 혼자 생각해 보았다.
테이블 위에 안주로 땅콩을 푸짐하게 차려두어서 술집 바닥은 온통 땅콩껍데기 천지였다. 한 병 두 병... 맥주를 먹다가 무대에 나가 유럽 또라이들과 춤도 추었다. 대장님의 걱정이 대단하다. 국내에서 펄펄 날던 대장님이 의기소침 불안해하는 모습을 보면서 기필코 올라가고 말 리라라고 다짐을 해본다. 숙소로 돌아온 시간 02시 30분.
12월 26일 일요일(네팔 2일째)
07시경 기상. 흐린 날씨에 개가 많이 짖는다. 간밤에는 추웠다. 침낭 생각이 간절했지만 꾹 참고 잤다. 어제 네팔 국내선 경비행기가 떨어져서 다 죽었다는데 혹시 집에서 걱정하지 않을지 모르겠다. 어제는 네팔 와서 충격 속에서 보낸 하루였다. 아직도 이런 나라가 있었구나 라는 생각뿐이었다. 이곳 시간이 한국보다 3시간 15분이 느리다.
지금현재 08시 37분. 호텔 식당에서 아침식사를 마쳤다. 아침 식사는 호텔에서 하고 점심과 저녁식사는 아리랑 식당에서 하도록 되어 있는데 아리랑 식당까지 거의 20여분을 걸어가야 하기 때문에 여간 불편한 것이 아니다. 아침식사로 토스터에 계란을 먹었다. 일명 American Style로 125루피. 1달러에 68루피니까 2달러가 안 되는 가격이다. 네팔 노동자 일당이 100루피 정도라고 하니까 우리가 먹는 게 호사스럽다고 볼 수도 있다.
영자신문 KATHMANDU POST에 하이재킹 이야기가 가득하다. 뭐 이곳에서 출발한 비행기가 하이재킹 당했다고 해서 네팔TV에서도 난리가 났다. 거기다가 그 동안 없었던 비행기 추락사고까지 났으니 슬슬 불안해졌다. 식사 후 구경을 나갔다. 등반지도도 사고, 환전도 하고 주택가도 어슬렁거리다가 돌아왔다. 푸성귀 밭이 주택가에 많이 보였고 특히 네팔은 쓰레기처리를 못하는지 안하는지 공터마다 생활쓰레기가 잔뜩이다.
숙소로 돌아와서 한국으로 전화했다. 자그마치 11달러. 12시10분 서울아리랑 식당 도착. 된장국으로 식사를 마쳤다. 식사 후 식당 직원인 포원과 시내 한바퀴를 돌았다. 네팔엽서도 사고, 시장을 돌아서 네팔의 상징적인 여신 쿠마리가 사는 곳에 갔더니 한참을 기다린 끝에 창가로 내민 얼굴을 볼 수 있었다. 아리안 계통의 소녀의 얼굴이었다.
광장의 사원에 갔더니 내 신발의 창이 떨어졌다며 구두 수선하는(그래봤자 본드밖에 없는) 젊은 청년 하나가 끊임없이 이야기를 건네와서 얼마냐고 했더니 100루피란다. 10루피면 응하겠다고 하니까 어이없는 듯 그제야 돌아선다. 그래도 밉지가 않다. 마음에 없으면 안해도 된다는 이곳 방식의 마음가짐이 부러웠다. 서로 미안한 감정을 가질 필요가 없다는 것이 이곳 사람들의 솔직한 마음가짐이다.
군데군데 이런 류의 젊은이들과 서양 애들이 이야기를 하고 있다. 무슨 이야기인지 모르지만 진지한 표현이다. 일부러 서양 애들이 여기에 와서 네팔 애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듯 하다. 아무래도 철학적인 이야기가 아닐까 한다. 과연 우리 나라에서는 누가 외국 애들 붙잡고 이렇게 진지하게 이야기 할 수 있을까? 라고 생각하니까 새삼스럽게 네팔이란 나라의 저력을 생각나게 했다. 내 밑에는 할머니가 머리를 손으로 빗고 있다. 귀신같은 몰골이지만 무척 자유로워 보인다.
여기는 별천지이다. 마치 다른 별의 세계로 온 듯한, 부숴진 건물, 어지러운 골목길에 릭샤와 자전거와 택시, 오트바이가 마구마구 지나간다. 지독한 매연과 함께... 다시 숙소로 돌아와 앞마당에서 우리를 안내했던 네팔의 젊은이 포원과 이야기를 가졌다. 포원 역시 대학생이었는데 우리의 젊은이와 다른 점이 있다면 뚜렷한 미래에 대한 꿈이 없다는 것이었다. 이것이 어떻게 보면 참 느긋하게 세상을 사는구나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한편으로는 가난한 나라의, 카스트제도로 신분이 구분되어 있기 때문에 더 이상 어떻게 할 수 없는 자신의 능력에 대한 포기라고 생각하니까 마음이 아팠다.
헤어질 때 우리들의 정성이라며 안받을려는 포원에게 275루피짜리 주스를 하나 사서 들려 보냈다. 오늘 아침에는 팬티만 입고 수돗가에서 목욕하는 사람을 보았었다. 인도를 가보진 않았지만 인도의 냄새가 강하게 사회전체에 배어있다. 어떻게 이런 세상이 있을 까라고 생각해 본다. 쑥 들어간 검은 눈, 짙은 눈썹, 가끔 몽고계통의 사람이 지나가지만, 이곳엔 아리안 계통이 나라의 실권을 쥐고 있다. 오늘 하루 미로 속을 헤매고 다닌 듯한 인상이다.
12월 27일 월요일(네팔 3일째)
07시기상. 어제보다 일찍 일어났다. 가볍게 대장님과 둘이서 조깅을 했다. 시내가 아닌 주택가로 가니까 그래도 평평한 길이 나온다. 주인 없는 소가 쓰레기를 뒤지고 있었다. 잡식성이다 보니까 분비물도 우리 소와 다르게 지저분하다. 이곳 사람들은 아침식사를 주로 사먹는 듯 하다. 석유 불에 튀겨서 많이 들 먹고 있다. 아무래도 없는 사람들은 밥해먹기도 어려워서 그런 듯 하다. 식사를 어제처럼 아메리칸 스타일로 끝내고 방으로 올라 왔다. 오늘은 사랑산 가서 시장 보는 것 확인하고 짐 정리한다. 내일 10시 비행기로 히말라야로 날아간다.
사랑산 식당 도착해서 시장보기 위해 준비중이다. 대원들이 한국으로 이메일 보낸다고 사랑산 식당의 노트북 붙잡고 있다. 한국의 경음악이 흘러나오고 있는 가운데 이렇게 손님이 뜸해서 운영이 될까라고 생각하고 있다. 네팔 종업원 4명이 왔다갔다 보리차도 주고 시중도 들고 한다. 물론 지난번 부천 로체원정대처럼 많이들 들이닥치면 좋겠지만... 여기 사람들은 어떤 야망이 있는 걸까? 미소 속에, 무표정 속에 감추어진 그들의 생각은 무엇일까? 김창남씨의 말에 의하면 자존심이 강한 민족이라고 한다. 앞으로 우리의 산행에는 어떤 어려움이 도사리고 있을까?
오늘 오후까지 시장보고 짐 정리하고 우리들 숙소로 차를 보내면 산에 가져 갈 우리 짐을 실으면 내일 비행기로 날아간다. 이곳에는 좌측으로 차가 다닌다. 신호등이 있지만 횡단보도 신호는 없다. 여기 도로는 매연이 심해서 목이 따갑다. 시내에 보면 스카프로 목도리를 하고 다니는 사람까지 있다. 왕궁을 지나왔다. 거지에게는 1루피 정도 집어주면 되는데 많이 주고 싶다. 내가 여유 있게 가지고 와서 매일 100루피씩 쥐어 주면 좋겠다. 장보기가 끝났다. 기본적인 품목은 여기서 준비를 하고 나머지는 루크라나 남체 바자르에서 혹은 트레킹 도중 롯지에서 사먹는다고 한다. 별로 장을 본 것도 없는 듯 한데
시간이 훽하고 지나갔다. 점심먹고 호텔 와서 우리 짐을 실어 보냈다. 대우 시에로 택시인데 여기서는 가장 큰 택시이다. 이렇게 우리 나라 택시가 카트만두 시내를 다닌다는 게 그 나라 국민으로서 여간 자부심이 아닐 수 없다. 대우는 망해도 시에로는 영원하리라. 짐을 잃어버린 배대원과 시내 장비점에 장비 빌리러 갔다. 사랑산 식당에서 소개해 준 곳인데 Tsering Sherpa가 운영하는 곳이다. 하루 100루피에 코플라흐 플라스틱화와 110루피에 에베레스트 원정에 사용했었다는 침낭을 빌렸다. 같은 몽고리안이라는둥, 한국에 소문을 내겠다는둥 해서 많이 깎은 셈이다.
20일을 빌렸으니 210루피×20일〓4,200루피 약62달러 정도 되니까 어떻게 보면 한국에서 비싸게 사 가지고 중량 물고서 가지고 오기보다는 여기서 싸게 빌리는 것도 괜찮아 보인다. 독자 여러분들 한번 잘 생각해 보시고 많이들 이용하시길... 전화번호는 252294이다. 저녁을 식당에서 먹고 식당 종업원들에게 그 동안의 답례로 50루피씩 주었다. 역시 우리 대장님은 시원시원 한데가 있어 좋다. 사랑산 식당에 내일 아침 08시 30분까지 오기로 하고 숙소로 갔다.
12월 28일 화요일(네팔 4일째)
06시 50분 기상. 서둘러 조식을 챙겨먹고 사랑산으로 이동. 준비된 버스를 타고 카트만두 국내선 공항으로 향했다. 10시 20분 Gorka Air Line이 11시로 늦추어 지더니 다시 11시 30분으로 바뀌었다. 비행기 하이재킹 때문에 검색이 대단하다. 휘발유 2통 짱박아서 가져갈려는데 걸리면 잡혀가지 않을까 걱정했지만 우리의 손대원이 무사히 통과를 시켰다.
공항 대기석에 앉아 있자니 온갖 사람들이 다 보인다. 서양인 30%, 일본인 30%, 그리고 나머지는 네팔 사람들 정도의 구성비를 보이고 있다. 일부는 서있고, 앉아 있고, 뭔가를 적고 이야기하고, 무표정하게 있고... 각양각색의 사람들이 히말라야 오지를 찾아서 떠나고 있다. 모두가 트레커나 여행객이고 등반팀은 오직 우리뿐이다. 하염없이 기다리다 보니까 언제쯤 우리 마음대로 산행을 할 수 있을까라고 조바심이 난다. 원래 계획된 팍딩이 아닌 루크라에서 오늘도 일박을 해야 된다는데 그리고 짐도 오늘 다 못 실어서 내일 비행기로 실어야 한다고 해서 모두가 걱정이 태산이다. 여기서는 over charge를 철저히 물린다는데... 등등
우리의 사다, 다와 취링셀퍼는 우리의 걱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씨익씨익 웃고만 있다. 그냥 태평이다. 그 웃는 마음속에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다. 그리고 또 한 명의 고소셀퍼인 다와 텐징셀퍼는 키가 자그마한데 잘 웃지도 않고 가끔씩 날카로운 눈매를 우리들에게 보이곤 한다. 쿡으로 따라온 사랑산 식당의 요리사인 라전은 셀퍼족이 아닌 아리안계로서 큰 눈에 아주 순진하게 생겼다. 일단 이렇게 3명이 동행을 하고 30일쯤 한국을 떠나 합류하는 준규형이 올 때 또 한 명의 셀퍼가 따라 올 것이다.
네팔이란 나라는 모든게 계획대로 되지 않는 듯 하다. 사람들이 일을 하는 모습이나 비행기 시간 등등, 등반에 들어가기도 전에 이런 것들이 우리를 지치게 만든다. 일이 얽히면 웃으면서 넘어가고 또 웃으면서 다른 이야기가 나오고...과연 이런 것들이 세상 사람들을 불러모으는 것일까? 그래서 규모 있는 원정보다는 간편하게 몇 명이 꾸리고 와서 후다닥 해치우는 것도 생각해 볼일이다. 갑자기 국내에서도 말썽을 부리던 나의 무릅이 걱정이 된다. 동네 정형외과 의사선생님의 비방의 약을 5일치 가지고 왔지만...
12시 46분 이륙. 16인승. 떨어져도 죽지 않을 것 같은 꽉 끼이는 좌석에 몸을 실었다. 기압관계로 귀가 몇 번씩이나 뻥뻥 뚫렸다. 좁은 통로를 다니면서 스튜어디스가 사탕과 물을 서비스하고 있다. 밑을 보니 참으로 많은 산과 산길과 집이 널려 있었다. 우리 나라도 산이 많은 국가지만 여긴 뭐 전부가 산이다. 산 산 산 산.... 13시 가까이 되어 드디어 히말라야 연봉이 보이기 시작한다. 눈이 그다지 많아 보이진 않고 설선이 약 5,000m높이부터 형성되어 있는 듯 하다.
작은 비행기라 흔들림이 심하다 보니까 현기증이 났다. 13시 15분 계곡으로 내리 꼽히더니 자갈밭에 내렸다. 200m쯤 되는 경사진 활주로에. 대단한 실력이다. 으∼ 무서워. 14시경 루크라 비행장에서 가까운 할리데이 롯지에 짐을 풀었다. 우린 커피 먹고 있고 셀퍼들은 롯지 부엌에서 이야기를 하고 있다. 고도 2,800이라고 공기가 많이 싸늘해졌다. 중식으로 우리 팀의 쿡인 라전이 요리한 밥을 무말랭이 반찬과 맛있게 먹었다. 모두가 시장한 터에 한 그릇씩 뚝딱 비웠는데 과연 언제까지 저렇게 잘 먹을까하고 생각해 보았다.
식사후 방을 정하고 루크라 거리를 산책했다. 공항 위에 커다란 공지의 롯지가 있어 거기서 그 쪽 동네 개들과 시간을 보냈다. 개들이 사람을 별로 의식하지 않는 듯 하다가 내가 쓰다듬어 주니까 사람이 그리운지 다가와서 곰살스럽게 군다. 털에 먼지가 많아 건드릴 때마다 먼지가 펄펄 난다. 여기선 경비행기 하나 있으면 항공회사를 하는 듯 우리가 타고 온 Gorka Air Line 말고도 여러 회사가 작은 사무실 하나씩 가지고 시간에 관계없이 내렸다가 떳다가를 반복하고 있었다. 가만히 보니까 오는 사람은 많은데 나가는 사람은 없어 보인다. 밀레니엄 축제 탓인가? 이러다가 우리가 나갈 때 머리 터지는게 아닌지...
길거리에는 야크가 많이 보인다. 덩달아 야크똥도 즐비하고, 조심해서 다니지 않으면 밟게된다. 사람들도 아리안 계통은 이제 사라지고 몽고리안 계통이 대부분이다. 우리하고 비슷하면 셀퍼족이나 티벳족 혹은 다망족이라고 한다. 우리가 묵고있는 할리데이 롯지는 사다셀퍼 형님이 운영하던 곳이라고 한다. 나왕셀퍼라고 에베레스트를 2번 올랐다고 한다. 이거 뭐 그 어려운 곳을 5번, 2번 이렇게 올라 다니는 사람들이 즐비한 모양인데, 우린 6,000을 겨우 올라 갈려고 이러고 있으니...
롯지안에는 지난번의 로체 부천원정대의 포스터하며 각 팀의 페넌트, 등정사진이 죽 걸려 있다. 내일은 두 셀퍼가 남아서 카트만두에서 추가로 오는 짐을 챙겨서 오기로 하고 여기서부터는 포터가 아닌 야크로 짐을 수송한다고 한다. 식사 후 옆방의 핀랜드 애들 조용조용 게임하고 있을 때 우리는 방에 올라가서 촛불아래에서 포커를 했다. 어제와 달리 내가 계속 잃다가 중반에 가서야 만회를 했다. 처음으로 네팔와서 침낭을 사용해서 잠을 잤다. 따뜻하다. 아직은 고소증세가 없는 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