벼루 만든 장인이 자리 잡았던
미타산 자락의 유서 깊은 마을
산과 들, 강이 어우러진 의령군 부림면 묵방리로 오지마을을 찾아갔다. 2년 전 이곳 '유학사'를 찾았다가 찻길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첩첩산중 작은 마을을 보았기 때문이다. 미타산(彌陀山·662m) 동남쪽 자락의 능선과 골짜기가 행정구역인 묵방리는 자연마을이라곤 몇 집 되지 않는 본마을과 칠공마을 두 곳뿐이다.
글·사진 심재근 명예기자(옛그늘문화유산답사회장)
한지로 유명했던 '신반장' 북쪽에 위치
예부터 의령군 동부지역 중심지인 부림면 신반리 버스정류장에 '신반 5일장'에서 구입한 물건을 든 어르신들이 앉아 여유로운 담소를 나누고 있다. 부지깽이도 일을 거든다는 농번기가 끝나고 마실 나왔다 돌아가는 길인가 보다.
「한국의 발견 - 경상남도. 뿌리깊은나무 발행. 1983년5월 20일」 의령편에 보면 '천지를 떠올려서 정이월에 소지 올리고/방풍지를 떠서는 봄가을에 신방 차리세'라는 민요 가사가 나온다. 부림면 신반리와 봉수면 죽전리 등에서 불려온 민요다.
'천지'와 '방풍지'가 한지의 한 종류였고, 의령은 나라 안에서 한지가 가장 많이 나는 곳으로 유명했다. 국사봉 인근에 지금은 절터만 남은 대동사에서 주지스님이 한지 기술을 전파했다. 예전에 신반지역은 포근한 날씨와 닥나무가 풍부해 한때는 200여 가구가 한지를 생산하고, '신반장'에 질 좋은 한지를 구입하려는 사람들로 가득했다고 전해온다.
장터에 들어가 보니 옛 흔적은 간데없다. 세월의 흐름은 이곳에서도 다를 바 없나보다. 이곳의 한지 명성은 신반시장에서 해마다 열리는 '의령한지병풍축제'로 그 명맥을 이어가고 있을 뿐이다.
합천군 적중면에서 1982년 부림면 편입
길을 묻기 위해 '신반택시' 사무실을 찾았다. 동료들과 손님을 기다리던 김성찬(59) 씨는 자신이 묵방마을에 사는 김희수·준수(13) 쌍둥이를 6년 동안 부림초등학교까지 등하교시켜 준 '묵방마을 지킴이'라고 했다.
묵방마을은 1982년 합천군 적중면에서 의령군 부림면에 편입됐다. 부림면 소재지 신반리에서 합천 낙동강 방향으로 가면 교량이 나온다. '유학사' 이정표를 보고 마을을 2개쯤 지나면 고즈넉한 절집 유학사가 있다.
유학사 옆으로 산길을 따라 승용차 한 대가 겨우 지나갈 수 있는 가파른 길이 이어진다. 예전에 유학사에 왔을 때는 암자 가는 길로 여겼다. 1km쯤 구불구불한 산길을 따라가면 민가 3가구가 있는 묵방 본마을이 고요와 적막에 잠겨있다.
지금은 산골짜기 작은 마을이지만, 지명이 통일신라 때 묵(墨·벼루)을 만든 장인이 자리 잡았다는데서 유래한다고 전할만큼 유서 깊은 마을이다. 산길을 넘거나 자동차로는 한참을 돌아가야 하는 묵방 '본마을'과 '칠공' 2개 마을로 이루어져 있다. 칠공은 옻나무가 많이 자생한데서 유래된 지명이라고 한다.
열세 살 쌍둥이와 함께 3가구 '오순도순'
신반택시 김성찬 씨가 알려준 김희수·준수 쌍둥이의 집에 어머니 유영옥(50) 씨가 있었다. 본마을에는 또 김명관(75)·이군자(73) 씨 부부와 홍재금(77) 할머니가 소와 염소·닭을 키우고 양봉을 하며, 자연이 주는 만큼 받으며 오순도순 살고 있다.
본마을은 희수·준수 쌍둥이의 아버지 김종돌(56) 씨의 고향이다. 김 씨는 부산에서 3년간 직장에 다니던 1992년 유영옥 씨를 만나 결혼했다. 1995년 어머니가 갑자기 세상을 떠나는 바람에 아버지 혼자 있는 고향에 돌아왔다. 2003년 쌍둥이가 태어났다. 종돌 씨는 골짜기 텃밭에서 농사를 짓고, 임대농을 하면서 살고 있다. 종돌 씨는 농사일로 출타중이고, 준수는 친구 생일잔치에 초대되어 가고 없었다.
본마을에서 내려오다 텅 빈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절집으로 오르던 중 돌계단에서 하나둘 떨어지는 나뭇잎을 보자 문득 도종환 시인의 시 <단풍드는 날>의 한 구절이 떠올랐다.
'버려야 할 것이/무엇인지를 아는 순간부터/나무는 가장 아름답게 불탄다/제 삶의 이유였던 것/제 몸의 전부였던 것/아낌없이 버리기로 결심하면서/나무는 생의 절정에 선다.'
천년고찰 '유학사'가 오지마을 적적함 덜어
절집에 들어서니 바람에 흔들리는 풍경 소리만 들릴 뿐 적막하다. 그래도 유학사가 있어 묵방 본마을이 덜 적적해 보인다. 해인사의 말사인 유학사는 통일신라 초기에 창건된 사찰이다. 창건 당시 미타산성 내에 있었는데, 조선시대 무학대사가 "위치가 풍수지리에 맞지 않는다"고 했다. 미타산이 날아가는 학의 형상인데 학의 머리에 해당하는 위치에 옛 절터가 자리했다. 그래서 학이 절을 품고 있는 형상의 지금 위치로 옮겼다. 절 이름도 학이 절을 품고 있다는 뜻의 유학사다.
그 뒤 1780년(정조 4년) 극락전을 중심으로 칠성각과 요사채를 중수했다는 기록이 나온다. 8월이면 잎과 꽃이 만나지 못한다는 꽃 '무릇'이 극락전 마당을 붉게 물들인다. 극락전 추녀 밑에 있는 배롱나무 두 그루는 각각 흰꽃과 연분홍꽃을 달리 피우며 자태를 뽐낸다.
경내에는 조촐한 범종각, 석탑, 석등이 오지마을의 절집을 지키고 있다. 뒤편에 있는 칠성각으로 발걸음을 옮기면 산줄기를 타고 내리는 미타산의 아름다움을 조망할 수 있다. 2년 전 왔을 때 땀을 흘리며 풀을 베고 있던 김종돌 씨를 만난 적이 있다. 스님 혼자 있는 절집 관리를 돕는 봉사를 한다고 했다. 참 고운 마음이다.
옻나무가 많이 자생했다는 묵방 칠공마을
유학사나 본마을에서 걸어서 칠공마을로 가려면 등산을 해야 한다. 자동차는 유학사를 나와 부림면 소재지 신반리에서 청소년수련원 방향으로 가면 된다. 이곳에서 미타산 방향으로 오리쯤 가면 좁은 길이 이어지고 도로를 확장하는 공사가 한창이다.
공사장을 지나, 왔던 거리만큼 더 갔을까? 작은 고개를 넘으니 양지바른 곳에 있는 아담한 마을이 반긴다. 허판순(80) 할머니가 텃밭에서 일을 하다 사람이 반가운지 인사를 했다. 꽃다운 열아홉에 이웃동네에서 시집와서 농사짓고 살다보니 세월이 저만큼 갔다고 했다.
마을안쪽 집에서 들리는 웃음소리를 따라갔다. 안임숙(84) 할머니가 반갑게 맞으며 마루에 올라오라고 재촉한다. 열여덟 살에 지정면 양곡리에서 부모님 뜻에 따라 시집을 왔단다. 아들 3형제를 두었는데 모두 장성해서 외지에 산다. 막내아들이 며느리와 손자랑 다니러 왔다며 행복한 모습이다.
묵방마을에는 논을 일굴 땅이 없다. 옛날 마을사람들은 외지에서 농사를 지어 지게로 지고 왔는데, 나락을 다섯 번 지고 오는 동안 밥은 여섯 번을 먹었다고 한다. 그만큼 혹독한 세월이 할머니를 스쳐갔다.
귀농·귀촌인, 미타산 자락에 둥지 틀고 정착
할아버지는 10년 전에 세상을 떠나고 양산에 사는 아들이 보내왔다는 개가 할머니와 살고 있다. 이름이 양산에서 온 수놈이라 '양돌이'란다. 밖에서 놀던 녀석이 할머니가 부르자 재빨리 뛰어왔다. 마을을 나오다 자매처럼 담소를 나누고 있는 한석이(83)·조외숙(83) 할머니를 만났다.
지게를 지고 산비탈에 있는 밭에 땔감을 가지러 간다는 노순희(67) 씨에게 요즘도 지게를 사용 하느냐고 했더니 산길에는 지게만한 도구가 없단다. 세상은 새로운 것으로 바뀌어 가고 있지만, 옛것도 버릴 것만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칠공마을 길은 미타산 정상으로 이어진다. 20년 전 부산에서 홀로 귀농한 정대균(65) 씨를 만났다. 정씨는 산비탈에 보리와 벼, 콩과 팥을 소득 작물로 기른다. 창원에 살던 권병학(60)·강종숙(57) 씨 부부도 친구 집에 놀러왔다가 미타산자락의 아름다움에 푹 빠져 2012년 귀촌했다.
이들은 귀농·귀촌을 꿈꾸는 도시 사람들에게 수익을 찾을 생각이라면 꿈을 접으라고 했다. 자연이 주는 만큼 받으면서 자연과 인간이 공존하는 지혜를 깨닫는 것이 진정한 귀촌이란다. 긴 여름 해도 어느새 미타산을 넘어가며 땅거미를 내리고 있었다. 땀 흘리며 다닌 오지 길 위에서 참 좋은 사람들을 만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