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인이 싸인을 한 LP를 두 장 가지고 있다.
하나는 우리노래전시회 1집에 '최성원 드림'이라고 씌여있는 것인데
최성원씨가 직접 준 건 아니고 청계천에서 구입한 중고음반이다.
또 하나는 1990년에 만난 박경씨가 싸인을 해서 준 것인데 한자로 된 글자체가 아주 멋있다.
음악도 좋고, 가사도 좋고, 사람도 멋있고, 글자도 멋있고 해서 계속 궁금하던 분이었는데
최근에 그가 죽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과음으로 인한 간경화로 이미 2000년에 죽었다고 한다.
깃발 없는 내 인생
새벽없는 나의 기도
잘려 나간 나의 꿈
나를 위해 노래 불러 줘어
그가 불렀던 노랫말이 떠올랐다.
나도 스무살 무렵 한동안 따라불렀던 노래이다.
제목은 '내가 살아있으니'
망자가 되어버린 그로서는 이제 부를 수 없는 노래이다.
1990년대 이후 김두수, 박경, 그리고 그룹 11월에 계속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나는 그들에게서 모종의 전설적인 면모를 느껴왔던 바였다.
그들에 관한 소식은 거의 찾을 길이 없었다. 1999년 인터넷을 시작하던 첫날에 나는 검색창에 그들의 이름을 타이핑했었다. 거의 언급이 되지 않았는데 하나 반가운 글이 있었다.
Korean Progressive Music Vol. 3라는 제목으로 한국의 음악을 정리한 원종우, 정종화님의 글이 약간이나마 갈증을 식혀 주었는데 김두수나 그룹 11월의 음악에 굳이 프로그레시브라는 레떼르를 붙여야 하는가는 의문이었다.
그래서 무슨 역사적인 소명처럼 사라지는 전설들을 인터넷 시대에 부활시켜야 한다는 의무감 같은게 생겨서 홈페이지를 만들면서 김두수, 박경, 그룹 11월, 더불어 한대수(이우창과의 공동앨범), 송명관, 박동률 등의 음반(저작권 문제등은 신경쓰지 않아도 될거라는 나름대로의 판단을 하였고)을 통채로 들을 수 있게 올려 놓았다.
김두수와 박경의 노래들은 여러분들이 좋아해주어서 나름대로 뿌듯한 느낌을 가졌다.
그 즈음 어느 음반점에서 박경씨를 아는 사람을 만나 그의 소식을 들었다. 그는 박경씨가 고양리인가 원당리에서 286인가 386인가하는 술집을 하고 있다고 했고 주색酒色에 빠져 건강도 좋지 않고 목도 가벼려서 노래를 제대로 부를 수 없다고 이야기해 주었다.
지금 따져보면 그때쯤 그에게는 죽음의 그림자가 몰려들고 있었을 것이다.
그 즈음 나는 이렇게 썼다.
그들의 음악은 영혼의 자양분 같은 것이었으므로
나는 그들의 노랫가락을 해가 지는 어느 길에서
보이지 않는, 세상과 인간의 행간을 읽는 마음으로는
항상 떠올리고 있다, 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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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수라고 김두수의 음반을 프로듀스한 분은 이렇게 말한다.
80년대 후반부터 90년대 초반
그러니까 서태지가 나오기 직전까지의 시기에 발표되었던
초창기 인디앨범들은 그다지 아는 사람이 없는 것 같더군요.
아마 80년대의 들국화,한영애 등과 90년대 서태지 이후의 새로운 흐름 사이에 끼여서
별 주목을 받지 못한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나 이때 뜻밖에 괜찮은 음반들이 제법 있었는데요,
(포크적 정서에 기반하면서도 신디사이저등의 활용으로 프로그레시브한 색채를 띠는후기 시인과 촌장의 명곡들도 이때 나왔지요.)
지금 소개하는 김두수의 앨범도 그렇습니다.
시인과 촌장과는 좀 다르지만 역시 포크적 감수성을 지닌 어쿠스틱 기타 연주에 신디사이저나 드럼비트를 활용한 몽환적이고 신비주의적인 분위기가 강한 곡들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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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경씨의 죽음을 알게된 기사는 다음과 같다.
그가 죽은 뒤 씨디가 재발매되면서 인터넷에 올라온 글이다.
박경 - EXPERIMENTAL NAKEDEYES [발매: 1990년 / CD재발매: 2003년]
짚시와 같은 삶을 살다간 가요계의 기인 故 박경의 유작앨범. |
언더그라운드 가요 컴필레이션인 우리노래전시회를 통하여 데뷔하여 |
1990년에 발표한 그의 첫 독집앨범이자 마지막 앨범으로 자연과 고향에 |
대한 그리움, 삶에 대한 그의 고뇌를 잘 나타내는 포크음악으로 채워져있다. |
앨범에 참여한 뮤지션으로는 그룹 들국화의 멤버들(손진태, 주찬권, |
최구희)과 그룹 11월의 멤버들(조준형, 김효국,장재환), 김두수, 김목경, 김광석, 이종만 등... 국내 언더그라운드의 내노라하는 뮤지션들이 대거 |
참여하여 앨범의 완성도를 높여주었다. |
▣ 앨범內 해설 ...
박경(朴慶)...
가요계 아니 대한민국의 대표적인 기인으로 회자될 정도로 짚시와 같은 삶을 사셨던 박경님은 고향인 부산에서 '종고'라는 이름의 파트너와 듀오 '들불'을 결성하여 활동하셨고 상당히 이름이 알려진 중에 전인권님과 하덕규님의 도움을 받아 서울로 진출을 하게 되었습니다.
서울에서의 활동을 시작한 듀오 '들불'은 박경님이 솔로로 데뷔하시면서 자연스럽게 해체를 하게되었고 이후 박경님은 방배동에 거주하면서 그곳을 근간으로 밤무대에서 활동을 하게되었습니다.
그리고 평상시의 워낙 기인같은 행동으로 인하여 그를 서울로 진출시킨 전인권님과 하덕규님은 그와 거리를 두게되었고 그후 박경님은 들국화의 최성원님과 친분을 가지면서 1985년부터 최성원님이 기획하시던 언더그라운드 가요 컴필레이션인 '우리노래전시회' 3집(1988년)에 듀오 '들불'시절에 불렀던 '울면 안돼'라는 곡을 '들불'이라는 이름으로 참여를 하고 더불어 앨범의 자켓 일러스트도 담당하셨습니다.
박경님은 이 당시에 많은 언더그라운드 뮤지션들과 교분을 쌓았으며 이때 쌓았던 교분으로 1990년에 대도레코드사를 통하여 발표하게되는 솔로 독집앨범인 'EXPERIMENTAL NAKEDEYES'에 김두수, 김목경, 손진태, 최구희, 주찬권, 이종만, 김효국, 조준형, 김광석 등.많은 뮤지션들이 그의 앨범에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그의 첫 독집 앨범이 발표될 당시에는 경기도 일산의 '백마 화사랑'이라는 카페에서 주로 활동하신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당시 백마 화사랑은 김목경, 강산에 등...많은 언더그라운드 뮤지션들의 집합소라고 말할 수 있었습니다.
이후 박경님은 계속되는 기행과 언더그라운드 활동속에 1990년에 발표되었던 1집 앨범을 1996년에 자켓과 앨범 타이틀을 바꾸어 'FEED BACK LIFE OF PARK KYUNG'으로 CD제작하여 당시 직접 운영하시던 경기도 장흥의 카페에서 직접 판매를 하기도 하였습니다. 워낙 예측불허의 기인같은 성격으로 인하여 마광수님의 소설에도 등장하고 기인열전에도 등재가 될 정도로 특이했던 박경님은 그 자신이 말하기를 자신의 인생 모토는 '재미있게 사는'이라고 했던것처럼 일반인들과의 생각과는 다분히 다른 차이를 보여주었습니다. 그분의 노래는 일반적인 대중보다는 노래를 직업으로 삼고 살아가는 음악인들이 더욱 좋아했었고 그들중에는 '동양에서는 나올 수 없는 목소리'라는 표현을 하며 그를 기억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170센티미터의 다소 호리호리한 체격으로 매일 술과 더불어 살았으며 그림과 요리에도 남다른 재능이 있었던 박경님은 평상시에 좋아하시던 술로 인한 간경화로 2000년 즈음에 세상을 등지셨습니다.
박경님이 지금 생존해계시다면 연세는 50세이며 그의 부인을 비롯한 유가족들은 현재 부산에서 생활하시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박경님은 워낙 사생활에 관한 이야기가 복잡다난하고 상식을 뛰어넘는 짚시같은 분이신지라 더 이상의 이야기는 망자에 대한 예의에 벗어날 것 같습니다.
박경님은 한마디로 '가요계의 짚시'였습니다. 그는 방랑자처럼 특유의 입담과 재담으로 사람들을 때론 힘들게 때론 놀래키고 때론 즐겁게해준 분이였습니다. 뒤늦게 나마 어떤 평가나 조명도 받지 못하고 지하로 사라진 그분의 음악이 새 빛을 보게 되었다니 지하에 계신 고인도 기쁨의 눈물을 흘리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돼지우리 속의 진주를 찾듯 재발매 결단을 내린 기획사 Tone Music에 감사의 말씀과 다시금 이 글을 통해 故 박경님의 명복을 빌어봅니다.
글: 최규성 (kschoi@hk.co.kr)
한국일보 기자, 가요칼럼니스트
▣ Lyrics & Compose: 박경
▣ Arranged By: 새벽, 바다야, 한 개피 푸후, 경의선, 쉬! 지금은 - 박경, 김두수
내가 살아 있으니, 그래, 울면 안돼 - 주찬권, 박경
▣ Musician:
Acoustic Guitar: 손진태, 장재환, 김광석, 박경, 조준형
E. Guitar: 최구희, 손진태 Bass Guitar: 강영상, 김영태
Drum: 주찬권, 박기형, 배수연 Synthesizer: 김효국
Oboe: 임정희 Horn: 오광석 Cello: 김복경
Harmonica & Citra: 박경
Chorus: 이정희, 김두수, 이종만, 최덕환, 이장석
Recording Engineer: 정용원 Photograph: 안정해
Extra Recording: 정필영, 심승진, 김성우
Art Direction & Design: 박경, 안정해
Director: 김목경
Executive Producer: 김성태
▣ 녹음: 대도레코드사 돈암 녹음실 A Studio & B Studio
Engineer: 정용원 Layout: 이무성
▣ 녹음 연주에 참여해주신 분들과 '칼짧은 로마의 병사'처럼 용감한 백마화사랑(白馬畵舍廊)
김원조 주인장, 김목경, 강산에, 섬의승희, 백마화사랑 식구 정석, 대원, 영희, 은희, 성열,
주방 아줌마들, 사랑스러운 토토에게 감사드린다.
첫댓글 아마 2002년쯤 썼던거 같네요.
음악도 많이 듣고
음악세계애청자 모임의 음악친구들도 자주 만나던 시절이었지요.
사실 허영택씨에게 할 말들이 있어 찾게 되었는데
이야기를 쓰려니 무슨 폭로같은게 될 거 같아서 내가 보낸 문자들만 옯겨 보았습니다
이런 질문과 마주치게 되었습니다
'좋은 마음이 좋은 음악을 만드는가?'
김두수님의 이름을 보자 옛 기억들이 떠올라 옛 추억의 글들을 옮겨 보았습니다.
그냥 인간 세상의 이런 저런 이야기라고 받아들여주셨음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