숭악의 10월 산행 주제는 단풍. 서둘러 출발했지만 문산휴게소에 들리니 이른 아침인데도 사람들로 붐빈다. 아침식사하고 화장실에 가보니 발 디딜 틈 없이 이곳저곳에 줄을 서 있다. 중산리에 도착, 간발의 차이로 차량통제를 당하고 걸어서 매표소까지 가니 9시 30분. 오솔길이 시작되는 입구를 둘러보니 산장 안내 팻말에 ‘햇빛이 들면 역사가 되고 달빛에 젖으면 신화가 된다.’는 글이 눈에 띄고, 宇天 許萬壽의 추모비도 있다. ‘지리산의 산신령’으로 불렸을 만큼 전설적인 인물로 알려진 그를 추모하기 위해 세운 비석, 뒷면에 새겨 놓은 글을 읽고 싶은데 일행이 달아나 나도 그냥 지나쳐 버렸다. 자료<智異山/崔和秀 지음/1994년 발행>를 찾아보니 그 비문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고 한다.
『산을 사랑했기에 산에 들어와 산을 가꾸며 산에 오르는 이의 길잡이가 되어 살다 산의 품에 안긴 이가 있다. 사람들이 일러 산사람이라 했던 그 분 우천 허만수님은 1916년 진주시 옥봉동 태생으로 일본 경도전문학교를 졸업했으며, 재학시 이미 산을 가까이 하고자 하는 열정이 유달랐던 분이다. 님은 산살이의 꿈을 이루고자 40여세에 지리산으로 들어와 가없는 신비에 기대 지내며 산을 찾는 이를 위해 등산로 지도를 만들어 나눠주기고 하고, 대피소나 이정표시판을 세우기도 하고, 인명구조에 필요한 데는 다리를 놓는 등 자연을 진실로 알고 사랑하는 이만이 해낼 수 있는 사람에 대한 사랑의 길을 개척해 보였다. 조난자를 찾아 헤매기 20여년, 조난 직전에 사람들을 구출하거나 목숨을 잃은 이의 시신을 찾아 집으로 돌려보내고 부상당한 사람들을 안전하게 옮겨 치료한 일 헤아릴 수 없으며, 지리산 발치의 고아들에게 식량을 대어주고, 걸인들에게 노자를 보태어 준 일 또한 이루 헤아릴 길 없으니, 위대한 자연에 위대한 품성 있음을 미루어 알게 되지 않는가. 님은 평소에 변함없는 산의 존엄성은 우리로 하여금 바른 인생관을 낳게 한다고 말한 대로 몸에 배인 산악인으로서의 모범을 보여 주었으니, 풀 한 포기, 돌 하나 훼손되는 것을 안타까워한 일이나, 산짐승을 잡아가는 사람에게 돈을 주고 되돌려 받아 방생 또는 매장한 일이 이를 뒷받침해 준다. 그런데 어찌된 일이랴. 님은 1976년 6월 홀연히 산에서 그 모습을 감추었으니, 지리 영봉 그 천고의 신비에 하나로 통했음인가. 가까운 이들과 따님 덕임의 말을 들으면 숨을 거둔 곳이 칠선계곡일 것이라 하는 바, 마지막 님의 모습이 6월 계곡의 철쭉빛으로 피어오르는 듯하다. 이에 님의 정신과 행적을 잊지 않고 본받고자 이 자리 돌 하나 세워 오래 그 뜻을 이어가려 하는 바이다.』
우리들이 오늘 장터목으로 가는 길은 법계사 코스가 아니고 법천골 코스. 법계교~칼바위까지는 법계사 코스와 같은 길이지만 우리들은 계곡을 타고 오른다. 아름다운 단풍이 바로 내 곁 가까이에 있고, 먼 곳에도 멋진 단풍이 현란한 모습으로 전개된다. 와! 탄성이 절로 나온다. 허금화 대원은 오늘 오지 못한 한혜란 선생님에게 약 올릴려고 한다면서 폼 잡아 사진 찍고.
일명 중산리계곡 코스라고 불리는 법천골 코스. 옛날 시천마을 주민들이 장터목에서 천왕봉 북쪽의 마천마을 주민들과 물물교환을 위해 무거운 생필품을 지고 오르내리던 애환이 서려있는 길을 우리들은 오른다. 그 때의 자취인가. 곳에 따라 잘 다듬어진 돌길을 밟고 간다. 우리들이 2003년 1월 3박4일 동안 잉카루트를 따라 마추피추로 갈 때의 돌길이 생각난다.
유암폭포 위에서 간식을 먹고 휴식할 동안 게스트로 온 가락중 교무부장 박재봉선생님, 부산진고 박은수선생님과 그의 부인 김정숙여사와 정식으로 인사를 나누었다. 오늘 단풍놀이(?) 간다고 하여 왔는데, 부인은 가볍게 걷고 박은수선생님은 너무 힘들어한다. 부부가 되돌아 갈려고 하여, 오르막은 얼마 남지 않았으니 함께 가자고 권유, 장터목으로 향한다. 가파른 3㎞의 오르막길을 통과하니 장터목 대피소. 1시 15분이다. 가을인가 했더니 어느새 가을이 떠나가고 단풍은 저 아래로 내려갔다. 많은 사람들로 왁자지껄하다. 야영장 식탁에 앉아 박은수선생님 부부를 기다리면서 시장기를 달래려고 간식과 과일을 먹다보니 1시 50분. 두 분이 도착, 오순도순 맛있게 점심을 먹고 2시 15분에 출발.
하산하는 길은 한신지계곡 코스(장터목~장군대~내림폭포~백무동). 원래 계획은 하동바위 코스(장터목~망바위~하동바위~백무동)였는데, 오늘 주대장이 단풍놀이의 진수를 보여주고자 죽여주는(?) 코스를 선택한 모양이다. 이정표에 출입통제구역으로 되어 있으니 얼마나 좋을까.
한신지계곡은 이름 그대로 한신계곡의 지류. 본류보다 훨씬 더 아름다운 선경들을 지니고 있어 대 단히 매혹적인 등산로로 사랑받고 있는 계곡이라고 한다. 과연 좋다. 계곡 주변의 넓은 반석, 연이어 걸려 있는 크고 작은 폭포들, 때로는 장관을 이루는 계곡 암벽이 너무 좋다. 아래로 내려갈수록 산수화의 그림세계로 여행을 하는 듯, 사람들의 발자취가 거의 없는 낙엽길을 밟고, 청량한 공기를 마시고, 백옥의 계류를 곁에 두고 걸으니 마치 선경에 들어온 같다. 산도 붉고, 물도 붉고, 사람도 붉으니 三紅이라고 했던가.
이 코스는 아름다운 계곡길이지만, 기상조건이 좋을 때에만 찾아야 한다고 한다. 평소에는 여성적인 부드러움이 넘치지만, 날씨가 나쁠 때는 사나운 길로 변해 절대 접근하지 않는 것이 불문율로 되어 있다고 한다. 이 아름다운 계곡을 보호하기 위해서, 그리고 위험한 곳이어서 출입통제구역으로 지정했나보다. 위험한 곳이 많아 조심스럽게 내려오니 한신계곡과의 합수 지점에 도착, 4시 50분이었다. 이제는 계곡을 끼고 걸어가는 평탄한 길. 우리에게 이토록 깨끗하고 아름다운 자연세계가 있다는 것이 자랑스럽고, 또한 그것이 얼마나 소중한 자산인가를 새삼 깨닫게 해주었다.
백무동 마을에 도착하니 5시 40분. 맥주, 막걸리에 도토리묵을 안주로 하고 이야기를 나누다가, 함양 읍내로 들어가 삼일탕에서 목욕하고, 대신동이 친정인 여주인의 소개로 함양돼지 생갈비로 이름난 多味園 (☎ 055-963-2607 www.damiwon.co.kr)에 가서 회식을 하니 성취감과 넉넉한 마음과 행복감이 넘쳐흘렀다. 10시 이전에는 차를 고속도로에 올리지 말라고 하여 9시 30분에 식당을 출발, 정체구간을 피해 고속도, 국도를 거쳐 부산으로 돌아오니 12시가 지났다. 과묵한 편이고 짜증내지 않는 김춘구 기사에게도 고맙다고 인사를 해야겠다. <기록 : 방 재 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