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월 대보름, 액을 날리고 복을 맞는다
강 근 숙
정월 대보름은 설 못지않은 우리민족 고유의 명절이다. 설날은 가족과 친인척끼리 보내는 명절이라면 대보름은 마을 사람들과 정을 나누고 화합하는 의미가 있다. 농경사회가 차츰 산업화 되어가면서 전통문화가 점점 잊혀가지만, 지금도 마을 곳곳에선 윷놀이를 하고 음식을 나눠먹으며 친목을 다지는 행사가 열린다. 정해진 회비는 없으나 잘사는 사람들은 많이 내고 형편이 어려운 이들은 좀 적게 내더라도 흉이 되질 않는다. 희사금喜捨金을 낸 사람들의 이름과 금액을 붓글씨로 써서 줄줄이 붙여놓고 윷놀이를 하는 모습은 정월 대보름에나 볼 수 있는 훈훈한 시골풍경이다.
우리고장에서는 해마다 파주문화원 주관으로 대보름행사가 펼쳐진다. 임진각 평화누리 너른 마당에는 군데군데 장작난로를 펴놓고 끓는 물과 커피, 녹차를 준비해 놀러 나온 이들이 몸을 녹이고 따끈한 차를 마실 수 있도록 하였다. 가족과 이웃끼리 손을 잡고 온 사람들은 널뛰기, 윷놀이, 투호, 제기차기를 하고, 사물놀이패는 태평소 가락에 맞혀 신바람이 났다. 개량한복을 입은 중년여인들은 ‘쾅쾅’ 발을 구르며 널뛰기를 하고, 청년들은 어릴 적 실력을 발휘하여 제기를 찬다. 문화원 가족들은 멍석을 펴놓고 윷놀이를 하느라 시끌벅적하다. 통나무를 쩍 갈라놓은 장작토막 같은 윷을 양손으로 모아 쥐고 기도하듯 신중하게 던진다. 윷이 엎어지고 젖혀질 때마다 소리를 지르고 말이 잡힐 때 안타까워하는 모습이 볼만하다.
점심은 오곡밥이다. 솜씨 좋기로 소문난 ‘오리마루’ 식당에서 직접 농사지은 것으로 만들어 바리바리 차에 싣고 왔다. 잡곡밥과 여러 가지 나물은 깊은 맛이 있어 모두들 먹고 더 먹으며 찬사를 아끼지 않는다. 겨우내 부족했던 비타민과 무기질을 보충하고 원기를 북돋운다는 오곡밥과 묵은 나물을 든든하게 먹었으니 올 한해도 거뜬히 지낼 수 있으리라. 부럼과 인절미가 쌓인 본부석 한쪽에선 아이들이 떡메치기 체험을 한다. 떡메 찧은 인절미는 그 옛날 엄마가 돌절구에 찧어 만든 것 같이 말랑해 입에 넣는 대로 꿀떡꿀떡 넘어간다.
오후 2시에 연날리기 할 시간인데 바람 한 점이 없다. 뒷자리에서 막걸리 판을 벌린 동네어른들이 걱정하는 소리를 들었는지 술 한 잔을 따라놓고 “바람이여 불어주소서 바람이여 불어주소서.”비는 게 아닌가. 과연 바람의 신이 있기라도 한 것처럼 잠잠하던 하늘에 설렁설렁 바람이 분다. 연이 잘 날 것 같다. 연날리기는 연초부터 보름까지만 했던 놀이였다. 보름이 되면 액운을 띄운다는 의미로 연에다 액厄자를 쓰기도 하고, 연싸움을 하다 줄이 끊어지면 연날리기를 끝냈다. 정월 대보름이 지나면 농사가 시작되기 때문이다. 접수대에는 부모와 함께 온 아이들이 줄을 잇는다. 연과 얼레, 호일에 싼 고구마를 받아든 아이들은 고구마에 이름을 써서 난로 위에 올려놓고 연을 날리러 바람 부는 언덕으로 올라간다.
유치부, 초등부, 일반부로 나누어 연을 높이 날린 사람은 상품으로 땅콩과 밤, 호두를 넣은 부럼상자를 준다. 아이는 상품에는 관심이 없는 듯, 부모와 함께 연 날리는 것이 그저 행복해 보인다. 예전에 아버지는 동생들에게 대나무 갈퀴나 싸리를 잘라 연살을 만들고 문창호지를 발라 연을 만들어 주었다. 가오리연이나 방패연을 주로 만들어 그림을 그려 꼬리를 길게 달고 엄마 반지고리에서 이불 꿰매는 굵은 실을 꺼내 얼레에 감았다. 줄을 풀어주면 내려가고 감으면 올라가는 연은 단순한 연이 아니라 꿈이었다. 꿈을 쫒는 아이들의 마음은 연줄을 따라 하늘높이 날아올랐다.
연날리기 대회가 끝나고 새해 소망을 적어 날려 보내는 ‘소망의 연날리기’ 시간이다. 파주문화원에서는 오늘 평화누리에 놀러 온 사람들에게는 모두 연을 나누어 준다. 아이들 손을 잡고 나온 젊은 부부도, 주름진 얼굴의 농부도, 파주를 대표하는 시장도 새하얀 연에 간절한 소망을 적는다. 어떤 소망들을 적었을까. 건강하게 해달라고 빌었을까. 부자 되게 해달라고 빌었을까. 평범하게 사는 사람들은 그리 많은 것을 바라지 않는다. 그저 안전하게 살 수 있는 세상, 열심히 일해서 땀 흘린 만큼 가족들과 행복하기를 바랄뿐이다.
‘통일 부르기’곁에서 풍물놀이패가 흥을 돋운다. 파주시민이 하나 되어 어깨를 들썩이는 모습이 신명지다. 고개를 젖히고 올려다보던 이들은 “그년들 참 잘도 난다” “큰 년도 잘 나는대요”하며 한바탕 웃음꽃이 핀다. 평화의 땅 임진각 하늘에는 소망 실은 연들이 꼬리를 흔들며 까마아득히 날아오른다. 액을 날리고 복을 맞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