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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어도, 걸어도
조도영 작가
그러니까 나는, 아직 이 세상이 너무나 수수께끼 같아서, 도저히 내가 배워온 지식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감정들이나 사건들이 툭툭 튀어나오는 것이 두려워지기 시작했고, 그러다 보니 자연스레 오늘과 내일의 시간을 살아갈 자신 또한 희미해졌던 것이다. 너무나 모르는 것이 많은데, 누구에게도 물어볼 수 없었고, 공감을 받을 수도 없었다. 사람들이 감정을 표현하기 위해 사용하는 용어를 아무리 정교하게 사용해도, 나의 감정을 제대로 표현했다는 느낌이 들지 않을뿐더러 상대방이 나의 감정을 완전히 이해한 것 같지도 않았다. 그래서 나는 종종, 내가 겪은 일을 상대방에게 이야기할 때면, 나와 네가 같은 고통을 분유하는 것이 아니라 초대 게스트인 내가 방청객인 너에게 나의 사연을 이야기해주는 토크쇼에 나온 것만 같은 느낌이 들곤 했다. 그리고 이러한 감정을 느끼는 빈도가 늘어날수록, 나는 점점 나의 아버지와 관련된 일에 대해 말하는 것을 삼가게 되었고, 그 대신 홀로 걷기 시작했다. 그런데 나는 왜 그토록 혼자 걸어 다녔었는가? 걷기 시작한다고 해서 그날의 이미지들이 사라지는 것도 아니었는데 말이다.
태양이 보이지 않지만, 밖이 밝아오는 여명의 시간. 간호사 선생님께서 병실로 찾아와 나와 아버지를 깨우고, 나는 이불을 개어 간이침대의 머리맡에 정리한다. 그 후 아버지가 누워있는 환자용 침대 밑으로 간이침대를 밀어 넣으며 신발을 신고, 간단히 세수를 마친 후 아버지의 마실을 준비한다. 왼쪽으로 편마비가 온 아버지는 왼팔과 왼 다리를 사용하기 불편하니, 워커에 앉힌 후 화장실로 데려가야 한다. 워커는 걸음이 불편한 환자의 보행을 도와주도록 바퀴가 4개 달린 타원형 모양의 보조기구다. 가운데 부분에 의자를 설치하여 앉을 수 있어 짧은 거리를 이동할 때 종종 사용하곤 한다. 하지만 그 옮김의 과정에서 느껴지는 아버지의 몸의 무게와 아버지를 바라보며 느끼는 마음의 무게는 차마 글자로 담아낼 수 없는 부분인지라, 그냥 간단히 ‘힘든 과정’이라는 단어로 대체한다. 화장실 입구에는 1cm 정도의 문턱이 있다. 휠체어나 워커를 타면 이 1cm의 문턱 때문에 여간 고생하는 것이 아니다. 워커와 아버지를 통째로 들 수도 없는 노릇이니, 우선 워커를 살짝 후진시킨 후 약간의 속도를 주어 꽝, 하고 힘을 주어 돌진한다. 그리고 문턱과 워커의 바퀴가 부딪치는 순간 워커를 화장실 안으로 빠르게 밀어 넣어야 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너무 빠르게 밀면 아버지가 앞으로 고꾸라질 수 있으니 재빠르게 밀고, 또 재빠르게 당겨야 한다. 그 후 워커의 방향을 조정하여 볼일을 해결하고, 다시 워커의 방향을 틀어 세면대 앞으로 이동한 후 왼손의 소매가 물에 젖지 않도록 뒤에서 아버지를 안으며 그 부분을 잡아주어야 한다.
여기까지가 우리의 아침 마실이다. 하지만 나는 그 날 아침 마실에서 기어코 아버지의 심기를 건드리고 말았다. 병원에는 오전과 오후에 한 번씩 병실에서 벗어나 재활치료를 받는 시간이 있다. 그리고 그곳에는 엉덩이와 허리 부분을 고정해 강제로 서 있게 하는 ‘기립기’라는 재활기구가 있는데, 힘이 들어가지 않는 다리로 10여 분 이상을 지탱하는 것이 만만치 않은 일이라, 아버지는 종종 기립기로 안내하는 재활치료사에게 가기 싫다며 말다툼을 하곤 했다. 그리고 그 날 아침 마실의 끝자락에서, 나는 어제 기립기를 사용할 때 아버지의 자세가 왼쪽으로 너무 치우친 것 같다는 둥, 다리에 힘을 넣어서 지탱해야 빠르게 다음 단계로 넘어간다는 둥, 하는 소리를 했던 것이다. 순간 아버지는 손을 닦고 있던 수건을 패대기치며 그딴 거 해봤자 달라질 일은 없다며 역정을 내셨고, 나는 나대로 아버지에게 역정을 냈다. 하지만 사실을 말하자면, 나의 화는 아버지의 역정을 향한 것이라기보다는 간병 생활을 시작하면서 발견한 새로운 아버지의 모습에서 느낀 당황스러운 감정을 향한 것이었다.
우연인지 필연인지는 몰라도, 나의 아버지의 이름은 ‘태일’이다. 그리고 이름 때문인지 아니면 본래의 천성 탓인지는 몰라도, 나의 아버지는 두산 중공업 노조를 시작으로 30년 가까운 시간을 노동운동을 하며 보내셨다. 하지만 내가 기억하고 있는 아버지의 모습은 사무실에서 컴퓨터로 문서작업을 하시던 모습인지라, 그 이전의 아버지의 모습이 정확히 어떠하였는지는 잘 알지 못한다. 하지만 그 시절의 아버지의 삶에 대해 아는 것이 얼마 없음에도, 적어도 아버지의 삶의 방향이 틀리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준 날이 있는데, 그날이 바로 아버지가 사고를 당한 날인 것은 참으로 아이러니하다. 원인은 평소 지병으로 앓고 계시던 고혈압 때문인 뇌출혈이었다. 나는 그때 과외를 막 마치고 근처의 맥도날드에서 빅맥을 주문한 후였다. 그리고 마치 영화에 등장하는 장면처럼, 햄버거를 막 받아 앉은 순간에 어머니로부터 연락이 왔다. 그 순간이 참 미묘했다. 언제나 TV 속에서, 혹은 영화나 소설 속에서 단골로 등장하는 ‘가족의 갑작스러운 사고’가 나에게, 그것도 예상치 못하게 들이닥쳤기 때문이다. 이제는 너무나 식상해져서 드라마에 그러한 내용이 등장하면 ‘진부하다’고 말해지는 일이 나에게는 실제로 일어난 것이다.
그때가 일 년 전, 그러니까 내가 스무 살이 되어 성인이 되고, 12년의 세월을 입시를 위해 희생한 끝에 얻은 자유의 첫 여름이었다. 아마 내가 알지 못한 것은 성인이 됨으로써 얻는 자유의 이면에 숨어있는 책임이었으리라. 다만, 나의 처지에서 그 책임에 대해 변명을 해보자면, 아무리 자유의 대가가 책임이라고 하더라도 스무 살 초입의 나에게 굳이 이 정도의 책임을 던져줄 이유는 없어 보인다는 점 정도가 있다. 그래서 나는 아버지가 수술실로 들어간 후, 수술이 진행되는 8시간 동안 도대체 나에게 이러한 책임을 던져준 존재가 있는지에 대해, 만약 있다면 어떤 존재이고, 왜 그러한 짓을 하는 지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보았다. 하지만 아무리 기를 쓰고 생각을 해보아도, 나에게 이 책임을 던져준 존재가 있는지 없는지는 끝내 알 수 없었다. 아마 있다면 신일 것이고, 없다면 ‘그냥’ 나에게 이런 일이 일어난 것일 텐데, 어느 쪽이든지 나의 고통을 해결해주는 답변이 아니었기에 결국 끝에 가서는 그냥 질문을 머릿속에서 삭제해 버렸다.
그렇게 수술실 밖을 정처 없이 떠돌던 나는 수술실 앞으로 돌아와 의자에 앉았다. 그리고 그때 내가 보았던 것은 언젠가 아버지의 친구로서 뵌 적이 있던 아줌마들과 종종 아버지와 함께 술 동무로 지내시는 아저씨들이 나와 어머니의 옆에서 그 고통의 시간을 나누어주고 있는 모습이었다. 그리고 정말 영화의 한 장면처럼, 나는 그러한 모습을 바라보며 아버지가 살아온 인생과, 아버지가 맺어온 연대와, 아버지와 함께한 동지들에 대해 생각을 해 보았다. 그러면서 나는 어렴풋이 느꼈었다. 내가 알지 못하는 아버지의 시간이 나의 상상보다 더 아름다웠을 것이라는 점과 그러한 인생을 견디고, 또 펼쳐온 아버지라면 앞으로의 고통을 쉽게 극복해 갈 것이라는 점을 말이다. 그 후로 나는 중환자실로 면회를 갈 때마다 아버지에게 ‘투쟁’으로 인사하였고, 아버지는 ‘쟁취’로 받아주셨다. 그렇게 상태가 조금 호전된 후, 아버지는 병원을 옮겨 서울 강동으로 오셨다. 서울로 병원을 옮긴 후, 월요일부터 목요일까지는 하남에 거주하시는 큰아버지께서 간병을 담당해주셨고, 나는 목요일 점심부터 토요일 점심에 어머니께서 상경하시기 전까지 아버지의 간병을 담당했다. 그리고 간병을 위해 학교 기숙사를 나선 첫날, 나는 일부러 어딘가에 놀러 가는 분위기를 내며 지하철에 올랐다. 재활은 시간과의 싸움이다. 시작도 전에 지쳐서 혼자 우울해하고, 슬퍼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은 긴 마라톤을 위한 선수의 코치로서는 어울리지 않는 자세였다. 그렇게 지하철을 타고 1시간 30여 분을 달려서 병원에 도착한 나는 얼굴에 웃음을 띠고, 마침내 중환자실이 아닌 일반 병실에서 이루어진 우리의 만남을 축복하기 위해 병실의 문을 열었다. 그리곤 와장창! 이제 영화가 끝나고 현실로 돌아올 시간이었다.
아버지는 자신을 휠체어에 태워 밖을 구경시켜 주려는 큰아버지와 서로 고성을 주고받으며 잔뜩 심술이 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나는 우선 그 상황을 이해하는 데 시간이 걸렸다. 처음에는 당연히 큰아버지가 무슨 잘못을 하신 줄 알고 아버지 편을 들기 위해 자리로 다가갔는데, 두 분의 말씀을 계속해서 들어보니 굳이 화낼 일도 아닌 것을 가지고 죽자 살자 싸우고 계셨던 것이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신기했던 것은 난생 본 적 없던 아버지의 심술궂은 표정이었다. 아주 그냥 용심과 악으로 가득 차 보이는 찡그린 얼굴이 표독스럽게 나를 쳐다보고 있었는데, 그야말로 ‘아이고 아부지’ 소리가 절로 나오는 상황이었다. 이후 아버지를 어르고 달래 휠체어에 태우는 것에 성공했고, 병원 주위를 돌며 햇빛도 받고 바람도 쐬기 위해 엘리베이터 쪽으로 이동했다. 병원 로비에 도착한 우리는 정문을 통해 밖으로 나가려고 했지만, 아버지는 먼저 로비를 한 바퀴 돌고 싶다고 말씀하셨다. 굳이 로비를 왜 한 바퀴 도려 하나, 하고 생각했지만, 아버지가 스스로 무언가 하고 싶은 일이 생긴 것이 신기하여 휠체어로 한 바퀴를 쭉 돌았다. 그런데 아버지가 로비를 돌며 지나가는 사람들의 뒤에 몰래 ‘퉷퉷퉷’하고 침을 뱉는 시늉을 하는 것이 아닌가. 화들짝 놀란 나는 황급히 휠체어를 세우고 도대체 지금 뭘 하는 거냐고 물어보았다. 지금 생각해도 기가 막힌 것이, 아버지는 자신의 바이러스를 전파하기 위해 그러고 있다고 답변하셨던 것이다. 이런 아버지의 답변에 나는 그야말로 아연실색하고 말았다. 부끄럽지만 그래도 솔직하게 말하자면, 나는 아버지가 머리를 심하게 다쳐서 지적으로도 문제가 생긴 줄 알고 가슴이 얼마나 철렁했는지 모른다.
아버지의 개그 코드는 원래부터 익살이나 풍자에 가까웠다. 그래서 종종 아버지를 처음 만나는 분들은 그 코드를 잘 이해하지 못하고 당황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실제로 아버지의 개그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지난한 노력이 필요하다. 특히나 수술을 받은 후에는 아버지가 하신 말이 농담인지 진담인지 헷갈릴 때가 많아 나도 여간 고생한 것이 아니었다. 일례를 들어보자면, 아버지가 중환자실에 계실 때, 면회하러 간 우리에게 아버지는 대뜸 전봉준 장군이 보인다고 말씀하셨다. 나와 어머니는 도대체 이게 무슨 소리인가, 하며 혹시 뇌수술 이후에 종종 나타난다는 선망 현상인지 걱정이 되어 발만 동동 구르고 있었는데, 알고 보니 아버지의 맞은편 침대에 누워있는 몸이 야윈 아저씨 한 분을 보고 ‘전봉준 장군 같다’고 말씀하신 것이었다. 그 순간 나는 웃기는 것은 고사하고 속에서부터 울컥하고 화가 치솟아서 아버지에게 화를 낸 적이 있는데, 뭐가 그리 좋은지 요즘에도 전봉준 장군 이야기만 나오면 얼굴에 웃음꽃이 피신다. 이러한 아버지의 농담에 관한 일화는 몇 가지가 더 있는데, 나는 그 순간마다 인생에서 가장 힘든 순간을 경험하는 사람의 웃음의 힘을 느끼면서도, 혹시 그 웃음이 자조로 이어지고, 곧 이것이 자학으로 이어지지는 않을까 걱정이 되기도 하였다. 아버지와 나는 시간 대부분을 서로 농담하고, 일상생활을 하는 것으로 보냈는데, 혹시 아버지가 지금의 상태에 체념한 것은 아닌가 하여 걱정되었던 것이다.
아닌 게 아니라, 아버지는 통증을 이유로 운동하시는 것을 꺼리셨다. 그리고 그렇게 시간이 점점 흐르자 병원에서 지정해준 운동시간을 제외하면 침대에 누워서 휴대폰을 하거나 TV를 보는 시간이 점점 늘어나기 시작했다. 여기서 나는 무언가 나의 계획이나 상상에서 거리가 멀어지기 시작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버지의 수술실 앞의 얼굴들을 보며 느낀 희망의 불씨가 예전 같지 않다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사실 우리 집의 모두가 나와 똑같은 감정을 느끼고 있었는데, 우리 집은 아버지께서 스스로 당신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밤낮없이 투쟁하리라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내가 사람들에게서 들어오고, 나 스스로 지켜본 아버지의 삶은 불합리한 일을 해결할 가능성이 아무리 적다고 하더라도 본인이 할 수 있는 일을 함으로써 목표를 이룰 수 있다는 낙관주의적인 열정으로 가득했기 때문이다. 그랬기 때문에 ‘퉷퉷퉷 사건’이나 ‘전봉준 사건’, 혹은 운동을 심히 꺼리는 아버지의 모습에서 나는 때때로 섬뜩함을 느끼곤 했다. 지금 내가 바라보고 있는 아버지의 모습이 사고 이후 변화한 아버지의 모습인지, 아니면 내가 모르던 아버지의 원래 모습인지 구분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모든 인간이 명확한 인과관계를 포착할 수 없는 사건 앞에서 경외를 느끼거나 두려움을 느끼는 것은 경험적으로도 알 수 있는 사실이다. 그리고 나는 그러한 상황에서 두려움의 감정을 더욱 강하게 느낀다. 그러한 상황 속에서 아버지의 변화한 모습은 도대체 우리 집에 왜 이러한 일이 일어났는지에 대한 질문과 함께 나를 사로잡았다. 그리고 해결할 수 없는 두 가지 문제를 동시에 안게 되면서 나는 종종 우울하다는 느낌을 받는 순간이 많아졌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아버지 앞에서 울거나, 힘들다는 소리를 할 수는 없어서 항상 아버지의 농담을 받아치며 시간을 보냈다. 그러다 그 날 아침 마실의 끝에서 일이 터졌던 것이다. 하지만 이와 비슷한 싸움은 이전에도 몇 번씩 했기 때문에 우리 둘 다 크게 신경을 쓰지는 않았다. 다만, 새로 병실에 들어오신 약간의 치매증상이 있으신 할아버지께서는 적잖게 놀라셨는지 눈이 동그랗게 변해계셨다. 늘 나보고 효자라고 말씀해주시던 할아버지였기에 부자가 서로서로 역정을 내는 모습이 상당히 신기하게 보였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그리고 할아버지의 그 눈동자 속에서, 나는 어느새 아버지에게 화를 자연스럽게 내는 나의 모습과 내가 꿈꾸었던 간병 생활을 비교하며, 이제는 어떤 모습이 진정한 나의 모습인지조차 구분할 수 없다는 무기력함을 느꼈다. 간병을 하는 시간 동안, 나는 아버지를 사랑하는 만큼 아버지가 미워지곤 했다.
이렇게 간병을 하면서, 더군다나 사랑하는 사람의 간병을 하면서 느낀 점은 간병이라는 일이 생각보다 빠르게 우리의 영혼을 잠식시킨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종종 평범한 상황에서 인지하지 못하던 사랑을 지나가고 난 후에야 알게 되었다고 말하곤 한다. 하지만 사실은 그 반대에 가깝다. 평범한 상황이야말로 우리가 가장 상대방을 사랑하고 있는 상태이다. 막상 불합리한 일이 닥치면, 사랑 또한 그 상황에 적응하지 못해 방황하기 시작한다. 우선 이 사람이 내가 사랑하던 사람이 맞는지 의심하기 시작하고, 왜 나의 사랑을 이 정도밖에 받아주지 못하냐는 생각이 들기도 하며, 어쩌면 나는 이 사람을 사랑한 적이 없었던 것일 수도 있다는 생각마저 들며 스스로가 무서워지기 때문이다. 내가 어떤 모습이 진짜 아버지의 모습인지, 왜 나의 간병에도 불구하고
운동을 안 하려 하는지, 그리고 이런 식으로 아버지에게 무언가를 요구하기만 하는 내가 진정으로 아버지를 사랑하고 있는지와 같은 문제를 고민하며 스스로를 질타하기도 한 것처럼 말이다. 그러니까, 나는 그러한 순간과 마주할 때마다 나의 태일이의 마음속에 있는 우물 하나와 마주했다. 아무리 그 우물 안을 들여다보려고 해도, 그리고 그렇게 바라봄으로써 태일이의 시간과 삶에 대해 더 이해하고 싶어도, 도무지 밑에 무엇이 있는지 알 수 없는 우물이 언제나 하나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부지불식간에, 나는 나의 마음속에도 나조차 바라볼 수 없는 우물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 안을 들여다봐야만 진정으로 내가 어떤 모습인지 알 수 있을 것 같은데, 도무지 그 안이 보이지 않는 것이었다. 물론 시간이 지날수록 그 우물의 존재를 느끼는 순간은 줄어들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우물이 사라진 것은 결코 아니었다. 친구들을 다시 만나기 시작하고, 혼자서 우는 순간도 조금씩 줄어들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친구들과의 만나는 도중에 갑자기 우울해지는 순간과 혼자서 우는 순간이 완전히 사라진 것이 아닌 것처럼 말이다.
그러던 어느 날, 전태일 기념관이 신축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나는 병문안을 마친 후 학교로 돌아가는 중간에 그곳을 방문해보았다. 기념관 내부는 단조로우면서도 묵직했다. 의외였던 것은 태일이가 직접 기획했다는 사업과 관련된 내용이었고, 언제나 가슴을 아프게 하는 것은 나의 기숙사 방보다도 좁은 태일이의 작업장이었다. 그렇게 기념관 안을 천천히 둘러보다가, 나는 전태일 평전에서 읽었던 ‘풀빵 길’을 직접 지도로 표시한 안내문을 읽었다. 시다들에게 풀빵을 사주고, 돈이 없어 평화시장에서 도봉산까지 약 15km 정도 되는 거리를 태일이가 걸 종종 걸어가곤 했다는 사실이 그 순간에 매우 묘하게 다가왔다. 태일이는 그 길을 걸어가며 무슨 생각을 했을까. 중학교 시절 처음 전태일 평전을 읽었을 때는 정의감과 분노로 가득 찬 태일이가 씩씩거리며 길을 냅다 달리고 있는 모습을 그렸었다. 그런데 지금 와서 태일이가 걸었던 길을 직접 지도로 보니, 우선 뛰어서 갈 거리는 결코 아니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또한, 자주 걸어본 사람으로서, 걸으면서 화나는 생각하는 것만큼 재미없는 일도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도대체 태일이는 무슨 생각을 하며 이 길을 걸었을 것인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무슨 생각을 하며 지금까지 걸어왔던 가에 대해 다시금 생각을 해보았으나, 나와 태일이가 같은 생각을 했을 것이라고는 장담할 수 없었기에 더욱 혼란스러워지기만 했다. 그러다 문득, 어쩌면 여기까지가 나의 역할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난 태일이가 15km의 길을 걸으며 무슨 생각을 하였고, 무슨 감정을 느꼈는지 알지 못한다.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은 내가 태일이에 대해 알고 있는 사실과 내가 지금 느끼고 있는 감정을 조합하여 태일이를 상상해보는 것뿐이다. 그리고 나는 나의 태일이, 아버지와의 간병 생활을 통해 때로는 사랑이라는 이름 아래에서 일어나는 상상이 얼마나 나의 영혼을 잠식시켰는지도 알고 있었다. 우물은 그 밑이 보이지 않기 때문에 우물인 것처럼, 각자의 삶에는 타인의 접근을 허용하지 않는 자신만의 공간이 하나쯤은 있기 마련이다.
내가 그토록 힘들어하고, 나 자신을 원망했던 이유는 그 사실을 몰랐었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내가 사랑한다는 이유 아래 나의 아버지의 우물과 나 자신의 우물을 비롯하여 타인의 우물을 들여다볼 권리가 당연히 나에게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사실은, 나는 평화시장 태일이의 우물을 볼 권리를 얻기에는 너무나 그에 대해 몰랐고, 마찬가지로 창원병원 태일이의 우물을 볼 권리를 얻기에는 아버지에 대해 너무나 몰랐다. 내가 원하는 태일이의 모습을 위해 태일이가 도봉산까지 뛰어가도록 강제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내가 원하는 아버지의 모습을 위해 지금 가장 힘든 순간을 겪고 있을 아버지에게 운동 자세에 관해 조잘조잘 이야기할 수도 없는 노릇 그렇게 전태일 기념관을 나오며, 나는 언제인지는 모르지만, 눈이 펑펑 내리는 날의 청계천 거리를 걷고 있는 나의 모습을 본 것도 같았다.
사람 없는 청계천 거리를 따라 나는 멀리 보이는 사내를 향해 걸어가지만, 앞에 가는 사람의 얼굴은커녕 옷의 색깔도 구분할 수 없을 정도로 눈은 펑펑 내린다. 일순간 휘몰아친 눈보라에 눈을 잠시 감았다 떠보면, 그 사이에 나와 사내 사이에서 걸어가는 또 다른 사내가 나타나 뚜벅뚜벅 걷는다. 그렇게 두 사내의 발자국을 따라가면서, 나는 그들을 소리쳐 부르고 싶기도 할 것이고, 내가 먼저 달려가 그들을 부둥켜안고 싶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하지만 그때의 나는, 우리들 사이의 거리의 의미에 대해 생각할 여유가 있을 것이고, 걸어도 걸어도 닿을 수 없는 거리로부터만 그들과 진정으로 마주 볼 수 있음에 웃음 지을 것이다. 그리고 나는 그들의 발자국에 겹쳐진 나의 발자국을 바라보며, 문득 나의 뒤를 걸어오고 있을 또 다른 누군가를 상상해 볼 것이다. 그리고 언젠가 우리는, 모두 태일이들의 발자국을 따라왔음을 깨닫고는 각자의 자리에서 서로를 생각할 것이다.
그리고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면, 나는 나의 어머니에 대해 언급을 하지 않고 넘어갈 수 없다. 여기까지 나의 글을 읽은 사람이라면 모두 유추할 수 있겠지만, 나는 천성부터가 게으르고, 잡생각이 많으며, 대학에서는 철학을 전공하고 있고, 오후 한가한 시간에 책 읽는 것을 낙으로 사는 사람인지라, 이렇게 많고 다양한 생각을 하고도 결국 잠자기 전에 한껏 우는 것으로 하루를 마무리하는 경우가 많다. 이런 내 처지와는 달리 가족을 부양해야 하고, 아버지와 관련된 실질적인 사무를 해야 하고, 가정을 관리해야 하는 어머니가 겪어야 했을 고통과 슬픔은 내가 상상도 할 수 없는 어머니만의 우물로 남아있을 것이다. 다만 나는 여기서 모성애나 현모양처 프레임 안으로 어머니를 가두고 싶지는 않다. 오히려 나는 어머니의 변화한 삶 속에서 참된 어른의 모습을 보았기 때문이다. 어머니는 참 잘 잔다. 주무시는 것도 아니고, 자시는 것도 아니고, 참 잘 잔다. 집에 오면 현관문 다시 돌아볼 여유도 없이 참 잘 자는데, 어머니와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정말이지 잘 때만큼은 아무 생각 없이 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누군가는 어머니의 고된 하루를 생각할 것이고, 누군가는 너무 생각이 없는 것 아니냐고 말하겠지만, 나는 어머니가 아버지와 살아온 세월을 통해 무의식적으로 우물 간의 거리를 알고 있기 때문에 그렇다고 생각한다. 자신과 타인과의 거리를 정확히 알게 된 사람은 쓸모없는 감정소비를 줄일 수 있고, 그렇게 아낀 감정을 내일 다시 한 번 그 사람에게 쏟을 수 있다. 내가 언젠가 정신을 차려서 어른이 된다면, 어머니와 같은 어른, 잠을 잘 자는 어른이 되고 싶다. 아버지는 짜증이 너무 많으셔서, 가끔 재수 없을 때도 있으니까.
아버지는 지금 사고 당일보다 훨씬 호전된 상태로 재활운동을 계속하고 계신다. 종종 간식으로 사온 빵을 앞에 두고 입맛을 다시는 모습이 어이가 없기도 하고, 머리를 다치신 분이 우리 가족이 가입된 자동차보험 회사 이름을 어떻게 기억하는지 놀랍기도 하지만 말이다. 그렇게 나는 아직 아버지와 나 사이의 거리를 찾아가고 있다. 서로 상처를 줄 만큼 가깝지 않으며, 서로 소원해질 만큼 멀지 않은 거리를 찾아가는 것. 그것이 지금의 내가 시간을 견디는 방법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언젠가, 나와 아버지는 병원 복도에서 걷기 연습을 한 적이 있었다. 아버지는 한 손으로는 복도의 난간을 잡고, 불편한 다른 손은 나에게 맡기셨다. 그렇게 우리 둘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내가 걸어서 30초면 갈 거리를 10분이고 20분이고 천천히 반복해서 걸었다. 물론 종종 내가 자세를 고쳐야 한다며 말을 꺼냈지만, 곧바로 아버지의 역정을 맞고는 입을 닫았다. 아버지는 우선 발에 힘을 힘껏 줘서 몸을 고정한 후, 오른 다리를 들어 앞으로 이동시키고, 다시 한 번 온몸에 힘을 줘서 다리를 바닥에 확실히 고정했다는 느낌이 들면, 남은 다리를 따라오게 하는 식으로 연습한다. 그러면 나도, 아버지의 왼팔을 보좌해야 하는지라, 아버지의 왼발을 따라 나의 왼발이 나아가고, 아버지의 오른발이 따라오면 나의 오른발도 따라오는 식으로 걸어간다. 그렇게 한참을 걷던 나는 문득, 그때야 내가 태일이와 같은 속도로 걷고 있음을 깨달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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