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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미야 1/35 M-41탱크 - 모터 구동 및 유선 리모콘 포함 키)
(타미야 1/35 키트- 박스아트가 이후에 바뀝니다. 70년대 박스아)
최근에 올린 제 디오라마 완성작이 미육군 M-41 탱크 2차대전 이후에 본격적으로 실전에 사용된 경전차였습니다. 2차대전 중에 대(大)전차, 중(中)전차, 경(輕)전차로 구분하여 개발되었습니다. 2차대전 미육군 주력전차 M-4 셔먼과 같은 모델이 대표적인 중전차였고 전쟁 말기에 나치의 킹타이거와 같은 큰몸집의 강력한 화력을 갖춘 탱크와 상대하기 위해서 개발된 M-26 퍼싱의 경우 대전차로 분류되었습니다. 반면 경전차는 M-24 채피가 있습니다.
(M-26 퍼싱 - 90mm 주포로 무장한 이 괴물 탱크는 1945년 6월에나 투입되어 실제로 큰 전과를 올리지는 못했습니다.)
(M-24 채피 탱크도 1944년에야 2차대전 전선에 투입되었습니다.)
그런데 2차대전이 끝나고나서 더이상 나치나 "왜놈"들은 미국에 적이 아니었고 냉전 체제가 시작되면서 잠재적인 적은 공산진영의 맹주 소련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2차대전이 끝난지 5년도 안되어 1950년 발발한 한국전쟁은 미군과 소련군의 무기 경연장이 되었습니다. 문제는 2차대전때 쓰던 M-26 퍼싱 전차와 M-24 채피 전차가 한반도로 투입되었는데 그들이 맞닥뜨린 상대는 소련제 T-34/76과 T-34/85였습니다.
(T-34/85는 85mm 주포를 장착하여 몸집은 中전차급이었지만 90mm 주포의 M-26 퍼싱 전차와 충분히 맞대응이 가능했습니다.)
(T-34/76의 경우 76.2mm 주포는 비슷한 화력의 M-4 셔먼에게 대등할 뿐만 아니라 경전차 M-24 채피가 75mm주포로 무장했다고 하지만 경쟁 상대가 되지 못할 우수한 전차였습니다. T-34/76이 채피 전차보다 훨씬 이전에 개발된 탱크임에도 불구하고 말이죠)
M-24 채피 경전차의 상황은 퍼싱이나 셔먼에 비해서 매우 심각했는데 소련제 탱크들을 만나자마자 일방적으로 불쏘시개가 되어버리는 참사가 벌어집니다. 미군은 이런 엄청난 결과에 당황하여 그당시 개발 단계여서 프로젝트名으로 "T-41"이라 불리던 이후의 M-41 경전차들을 모아 모아 한반도로 급히 가지고 와서 채피 전차와 교체하게 됩니다.
(1949년에 설계되어 한국전 발발 싯점에 시작품에 불과했던 T-41 탱크를 미육군은 GM 자동차의 클리블랜드 공장에서 서둘러 양산해줄 것을 요구했습니다.)
시작품 T-41에는 신형 76mm 주포가 장착되었는데 이전에 동일 구경 포에 비해서 경량으로 설계되었습니다. 영화 "퓨리"에 등장하는 M4A3E8에 장착된 동일 구경의 76mm 포보다 포구 속도(포탄 속도)가 향상된 신형포였습니다. 프로젝트 名 대신에 M-41으로 불리게 될 이 탱크는 애초에 경전차들이 주로 맡았던 정찰 임무를 위해서 설계되었지만 근접 보병 지원 및 신속한 공수 낙하 배치까지도 고려된 탱크였습니다. 특히 "워커 불독"이라는 애칭으로 불린 이탱크는 한국전쟁이 발발했던 해인 1950년 전방을 시찰하던 도중에 타고 가던 짚차가 사고를 일으키는 바람에 세상을 떠났던 월톤 워커 장군의 별명이었던 "워커 불독"에서 따 온 것입니다.
어찌되었든 M-41 탱크의 생산업체였던 GM 캐딜락 사업부는 미육군가 한국전쟁에서 초기에 투입한 채피 경전차들이 소련제 탱크들에게 속속 파괴되는 상황에 직면하서 성급하게 생산 요구를 하게 되며 이런 요구에 부응하는 과정에서 양산 후에 발견된 기술적 결함을 해결하기 위한 수많은 변경 작업이 벌어지게 됩니다. 초기 전장에 배치된 M-41은 전차병들에게 별로 긍정적인 평을 받지 못했는데 특히 포탑 내부 공간의 협소함이 주된 이유였습니다. 게다가 사실 미육군은 그당시에 상대적으로 중요도가 떨어지는 경전차였던 M-41보다는 M-4 셔먼 시리즈의 명성을 이어갈 새로운 중형 전차 패튼 M-47(홋날 M-48로 이어지는) 시리즈에 좀 더 개발 비중을 두고 돈을 쏟아붓기도 했습니다.
(M-47 패튼 탱크는 2차대전 전차전 영웅"조지 패튼"장군의 이름을 애칭으로 사용했던 최초의 탱크였으며 얼마 지나지 않아 M-48 탱크에게 미육군 주력 중형 전차의 위치를 넘겨주게 됩니다.)
한국전잴 발발한 후에 불과 두달도 안되어 클리블랜드에 캐딜락 공장은 본격적인 M-41탱크를 양산하기 위해서 준비를 마쳤고 이때 동일한 차체에 대공포탑을 장착한 M-42 더스터의 생산도 준비하게 됩니다. 1952년까지 무려 900대 이상의 M-41이 생산되어 신속하게 한반도 전선으로 배치되었는데 이런 생산 대응 속도가 미국이 아니면 불가능한 놀라운 속도이긴 했지만 사실상 1952년에 접어들면서 한국전쟁은 휴전 국면으로 다가서게되어 실제 전선에서 M-41의 눈에 띄는 전공은 기대할 수 없었습니다.
불과 몇년 사이에 서둘러 생산에 박차를 가한 덕분에 무려 1,800대가 넘는 M-41이 공장에서 쏟아져 나왔는데 전쟁이 끝나가는데도 멈추지 않고 쌓여있던 M-41은 그 엄청난 수량이 생산될 때까지 무려 4,000개 넘는 기술적 결함을 수시로 고쳐나가야 하는 통제 불가능한 혼란에 휩쌓인 상황이었고 이런 결함들을 개선하는 과정에서 애초의 설계와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내부 설계가 바뀌어있었던 탓에 M41A1이라는 파생 모델명을 부여하지 않으면 관리가 어려울 정도가 되었습니다.
이어서 탄환 적재 수량 개선 및 주포와 포탑 설계 단순화 개선을 진행하는 과정에서 M4A2와 M4A3로 후속 버전이 이어지게 됩니다. 이런 끊이없는 설계 개선을 통한 결함 해결을 꾀하였음에도 불구하고 M-41시리즈는 미육군내에서 그리 호평을 받지 못하는 것은 마찬가지였습니다. 여전히 전차병들에게는 비좁은 내부 공간에 대한 불평이 끊이지 않았고 애초 개발 목적에 포함되었던 공수부대와의 공중 낙하 투입 목적 역시 그러기에는 너무 무거운 중량으로 인해서 적합하지 않다는 평가가 내려졌습니다. 사실 이런 M-41의 공수 지원 능력 부족은 M-551 "세리단" 탱크 개발을 미육군이 서두르게 만든 원인이 됩니다.
(M-41대비 훨씬 경량의 M-551 셰리단 탱크는 공수부대 낙하 투입을 위한 최적의 탱크로 개발되었습니다.)
1954년에 접어들면서 M-47 "패튼" 탱크의 생산이 본격화되자 상대적으로 비중이 작았던 M-41은 생산이 중단되었습니다. 1960년대 전후해서 경전차 용도라면 더 적합한 설계의 M-551 셰리단이 M-41의 위치를 빼앗아가게 되었으며 냉전이 본격화되면서 미육군은 소련제 신형 탱크들의 막강한 화력과 철갑을 보면서 2차대전에 전차 구분으로 정의되었던 "경전차"가 전술적으로 이제 와서는 그리 절실하게 필요하지 않다는 판단을 내리게 됩니다. 결국 산더미같이 쌓였던 M-41 완성품 재고들은 처치 곤란한 골치거리로 남게 됩니다.
그때부터 M-41 기존 재고들과 이후 생산물량은 베트남,브라질,대만과 같은 냉전 시대의 미국의 우방들로 저가에 판매되거나 아예 무상 지원되는 신세가 됩니다.
피그만 침공
여기서 뜻밖에 이 천덕꾸러기 M-41 탱크가 연루된 "미국의 훅역사" 사건이 발발합니다. 1961년 미국은 피델 카스트로가 정권을 쥐게 된 쿠바를 무너뜨리기 위해서 쿠바에서 미국으로 건너온 망명자들을 모아 훈련시킨 "괴뢰"부대(2506여단)로 하여금 쿠바의 수도인 아바나에서 불과 100km 떨어져있는 피그만(Bay of Pigs) 해변에 상륙작전을 감행하게 합니다. 이런 배후에 미국 CIA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공식적으로 미국이 배후에 있음을 은폐하기 위해서 전면에 나서지 않았지만 쿠바 망명 부대의 상륙작전 지원을 위해서 수송정에 9대의 당시 재고로 갖고있던 M-41 탱크를 실어서 보냅니다. 카스트로 정부는 일찍부터 이런 미국의 침공이 있을 것이라는 정보를 입수하고 철통같은 방어를 하고 있었는데 특히 소련에서 지원받은 T-34/85 탱크들이 피그만에서 가까운 비행장을 방어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M-41 탱크들은 상륙 후에 한국 전쟁 후에 무려 십년만에 다시 조우하게 된 소련제 탱크들을에 신속한 주포 포격으로 무려 4대를 첫 교전에서 파괴해버립니다. 상륙한 천명이 훨씬 넘는 2506여단 부대원들은 초반에 이런 M-41탱크들의 선전과 함께 방어하는 쿠바 정부군을 패퇴시킬 것으로 기대되었으나 배후 노출을 꺼렸던 미국 정부의 후속 지원 타격 취소와 피그만에서 아바나까지의 지역에 펼쳐진 늪지대 지형으로 인해서 시간이 지나면서 와해되었고 곧 정부군에게 궤멸되었습니다. 마지막까지 적재된 탄환들을 모두 소진한 M-41 탱크는 결국 버려진채로 전차병들 모두 포로가 되었고 이런 미국 정부의 어리석은 군사 행동은 도리어 쿠바에 피델 카스트로가 보다 독재 정권을 보다 공공히해주는 결과를 초래하게 되었습니다.
베트남 전쟁에서 남베트남군 주력 전차로 활약
민주주의를 표방한 남베트남과 공산주의의 북베트남간에 전쟁이었던 베트남 전쟁에서 남베트남군의 기갑부대는 1950년대 식민 통치를 했던 프랑스군의 기갑부대가 사용하던 미제 탱크들(M-24 채피 경전자, M-5 스튜어트 경전차)을 인수하여 창설하게 됩니다. 하지만 1960년대에 접어들면서 본격적으로 미국이 참전하게 되면서 이제는 함께 전쟁을 치루는 남베트남군의 허접한 기갑전력을 지켜보고만 있을 수 없었습니다. M-5 스튜어트 경전차는 이미 고물덩어리가 되어버린지 오래였고 그나마 기동이 가능한 M-24 채피 탱크조차 고장이 나면 수리할 수 있는 부품을 구하는 것이 불가능하고 설사 구할 수 있더라도 전혀 경제 타산이 맞지않는 상황에 직면했습니다.
(베트남 전쟁중 순찰 임무 중인 M-41 탱크)
미군은 남베트남군 기갑전력을 재고가 산처럼 쌓여있는 M-41A3 탱크들을 지원하면서 현대화하기로 결정하게 되는데 과거 미군 전차병들의 끊임없는 불만사항이었던 M-41시리즈의 비좁은 포탑 내부공간이 상대적으로 훨씬 왜소한 체격의 남베트남군 전차병들에게는 전혀 문제될 것이 없을 정도로 만족한 공간이었습니다. 1966년에 본격적으로 남베트남군에게 배치된 M-41탱크는 특히 시가전에서 같은 시기에 배치되었던 미군의 M-48 패튼 중전차에 비해 작은 체구로 보다 효과적인 기동성을 발휘하면서 보병들의 전투 지원 임무를 수행하면서 활약을 합니다. 하지만 1970년대 초로 접어들면서 남베트남 패망이 다가오는 싯점에 북베트남군의 주력탱크였던 소련제 T-54 탱크나 베트콩들에게 지급된 소련제 로켓발사기에 의해서 파괴되거나 전의를 상실한 전차병들이 도주하면서 버려진 M-41탱크들이 엄청난 숫자로 늘어나기 시작했는데 사이공 함락 임박해서 무려 300대의 M-41 탱크의 손실이 발생합니다.
M-41탱크는 2차대전후에 독일 육군이 선택하였으며, "왜놈들"도 자위대 창설할 때 최초로 사용한 주력전차입니다. 하지만 70년대 중반에 이르러서 미국의 우방들조차 M-41을 퇴역시키기 시작하였으며 보다 우수한 패튼 시리즈에 밀려서 사라지게 됩니다. 하지만 대만육군이 2016년 현재 무려 625대의 M-41탱크를 현역으로 보유하고 있다는 거짓말같은 뉴스를 발견하였습니다. 개발 연도를 얼추 계산해도 무려 70세에 가까운 고철 덩어리로 세계 2위 군사력으로 평가되는 중국을 바다 건너 상대하고 있다는 사실이 놀랍기 그지 없습니다.
(대만 육군의 M-41 탱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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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대만에서 용도는 전차전보다 상륙저지 목적이 더 높지 않을까요?
뭐 그 동네 정치적 상황이 최신무기 가지기 힘든 동네라 있는거 어찌 써 볼라는 의지는 높이 사야하지 않것습니까?
이번에 트럼프가 크게 무기수출 허용한다카던데...그러면 저 노익장도 편히 쉬겠죠
뭐 우리 해병대도 도찡개찡. 70년대 후반에 국내 조립했던 M-48 패튼 전차를 작년까지 썼더랬습니다.
예산만 허용된다면.......K-2 흑표전차가 많이 생산되었으면 바램이네요...
다른무기도 마찬가지이지만요
전문성이 좔좔...흐르는 글입니다.
과찬의 말씀입니다. 좀 전문적으로 쓰려다가 너무 글이 건조하고,길어질까봐 대충 쓴겁니다.
오 ** 추억의탱크가,가득하군요 **
잘봣습니다
재밌는 이야기가 올라왔었군요! 저런 히스토리가 있었네요... 허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