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시황릉 (秦始皇陵) |
진시황릉은 실제로 하나의 산이다. 능의 높이는 약 79m, 동서 4백 75m, 남북 약 3맥 84m로, 사람이 다니는 길이 나 있으며, 석류나무가 자란다.
전한의 역사가인 사마천에 의하면 진시황은 그가 황제가 된지 얼마되지 않아 서부터 이 능을 만들기 시작해서 36년 만에 완성했다고 하는데 그때는 이미 진시황이 죽은 후였다고 한다.
땅 밑과 땅 위로 이토록 거대한 무덤을 만든 진시황의 스케일에 입이 벌어진다. 진시황은 살아 생전 삶을 즐기기 위해 아방궁을 지었고, 죽은 후를 위해서는 이 거대한 능과 지하 궁전을 만들었던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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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루(鐘樓) 고루(故樓) |
시 중심부 대로에 종루가 있고 그 근처에 고루도 있다. 이곳은 실크로드로 향하는 그 출발점이라 할 수 있는데, 원래 종루에는 종이, 고루에는 북이 있었는데 현재 고루에는 북이 없다. 지진이 일어났을 때 북이 파괴되었다고 한다.
예전에는 낮에는 종을, 밤에는 북을 쳐서 시간을 알려주었다고 한다. 종루를 오르면 시 전체를 내려다 볼 수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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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안탑 (大雁塔) |
서안시의 남쪽의 자은사의 경내에 자리잡고있으며, 자은사는 당고종이 647년 어머니를 기리기 위해 건립한 것으로, 대안탑의 높이는 64m에 이른다.
이 탑은 서유기의 주인공 현장이 652년에 세웠는데, 처음에는 5층 탑으로 만들었다가 10층으로 올려졌고 다시 7층 탑으로 변했다. 이 안에 그가 갖고 온 불서가 보관되었다.
현장은 629년 장안을 출발, 투루판을 거쳐 천산남로를 따라 파미르고원을 넘었으며 천신만고 끝에 인도로 들어가 6백 57부의 불경, 1백 50개의 불사리, 8체의 불상을 22마리의 말에 싣고 17년 만에 돌아왔다.
그 후 현장이 산스크리트어로 된 불경의 번역 작업을 한 곳이 바로 이 자은사다. 대안탑은 나무 계단을 따라 오를 수 있으며, 자은사 경내와 시내가 보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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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안탑 (小雁塔) |
안탑은 13층이지만 높이는 43m로 그 규모로는 대안탑보다 작다.
이 탑은 인도와 동남 아시아를 다녀온 당나라 승려 의정이 귀국시 운반해온 4백 부의 경전을 번역하기 위해 세운 것이다.
이 탑은 아직 완전히 복구가 안된 상태로 당나라때의 그 모습 그대로를 볼 수 잇는 장점을 가지고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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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마용 |
서안에서 가장 유명한 유적지. 진시황릉을 중심으로 약 2km 사방 지하에 건설된 지하궁전의 일부다. 사마천의 <사기>에 따르면 이 궁전은 중국을 최초로 통일한 진시황이 죄인 70여만 명을 동원, 사후를 위해 만든 것으로, 지하수가 세번나올 정도로 깊게 판 후 동판을 깔고 관을 안장했다.
지하묘에는 궁전, 망루와 문무백관의 자리를 만들었고, 접근하는 자가 있으면 자동발사되는 활을 장치해 살해했다.
지하궁전은 계속 발굴중인데 병마용갱은 너비 60m, 길이 210m이며, 지표면으로 부터 약 4.5m의 땅속에 판 10개의 갱마다 병마가 10열로 서있다.
전차대, 포대 그리고 쇠뇌와 화살을 가진 보병대가 있는데, 현재 전시되고 있는 6천여개가 전체의 극히 일부분에 불과한 것이라니 더욱 놀랍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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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진사 (淸眞寺) |
약 5만 정도의 이슬람교도가 살고 있는 서안의 중심에 있는 사원으로 당나라 때인 742년에 창건되었다. 중국 4대 이슬 교 사원의 하나이며 이 사원의 건축 양식은 중동에서 볼 수 있는 둥그런 돔과 미나렛이라는 첨탑을 갖춘 것이 아니고 중국식 절 형식을 띠고 있다. 사원 안에는 아라비아 문자가 새겨진 것들도 눈에 띄며, 안의 대전(大殿은) 약 1,000여 명을 수용할 수 있다. |
흥교사 (興敎寺) |
현장법사의 유골을 모신 사원으로 서안에서 남쪽으로 20㎞ 떨어진 두곡(杜曲)에 있다. 당나라 숙종 황제로부터 내려온 유서 깊은 절로 현존하는 건물은 당대의 것으로 서원에 남겨져 있는 현장삼장의 사리탑과 그의 제자 원측(圓測)과 규기(窺基) 두 사람의 묘탑 정도이다 |
법문사 (法門寺) |
서안에서 서쪽으로 115㎞ 떨어진 고찰로, 서기 300년인 후한시대에 창건되었다. 1650여 년의 역사를 가지 이 사찰이 유명하게 된 것은 법문사탑으로 인해서이다.
법문사탑은 명나라 때인 1579년에 만들어진 것으로 8각 13층의 높이 47m가 되는 벽돌탑이다. 이 법문사탑은 1987년에 재건 보수되면서 지하궁전이 발견되었는데, 이 지하궁전에는 8중의 보물함에 봉납된 석가의 진짜 뼈로 판명된 손가락 뼈 4개가 발견되어서 화제를 모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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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적사 (香積寺) |
당나라 때인 706년에 창건된 중국 정토종의 본산인 사찰로, 당나라 시인 왕유(王維)가 지은 오언율시 과향적사(過香積寺)』로 유명해진 사원이다. 높이 11층 33m 벽돌탑인 선도고탑(善導古塔)은 당나라 때 창건한 것이고, 선도대사(善導大師)의 상이 있는 대웅보전은 청나라 때 중건한 것으로, 1980년에 다시 수리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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곤명지 (昆明池) |
장안 상림원(上林苑) 안에 있다. 그 안에는 한 대에 돌로 만든 고래인 석경(石鯨)을 만들어 놓았는데 크기는 삼장으로 천둥이 칠 때는 꼬리나 지느러미를 흔들며 으르렁거렸다고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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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부산 |
화산의 옛 이름. 전설에 의하면 옛날 주 무왕이 천하를 평정할 때 동원하였던 여덟 필의 준마를 유명한 어자(御者)(말몰이꾼)인 조부(造父)가 잡아 주목왕(周穆王)에게 바쳤다고 한다.
산의 북쪽으로는 수백리에 달하는 광대한 수풀이 있고 거의 복숭아 나무로 도림(桃林)이라고도 불리는데 여기가 바로 고대의 유명한 도림새(桃林塞)라고 한다. |
남전 (藍田) |
장안 동남의 명승. 경옥(硬玉)의 산지이므로 옥산(玉山)이라고도 부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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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외파 (馬嵬坡) |
장안의 서북쪽, 위하 북안의 지명. 당나라 현종이 안록산의 난을 피해 양귀비와 함께 이곳에 왔다가 강압에 못 이겨 양귀비가 죽은 곳. 양귀비의 넋을 기리는 사당이 있다. |
무릉 (茂陵) |
장안의 서북 40킬로에 있는 전한의 황제 무제의 묘. 근처는 황제들의 묘가 열 한 개나 있으나 그중 가장 크다.
저변의 길이는 240미터, 높이 46.5미터로, 외형은 사각형이고 꼭대기 부분은 평평하다. 무제 즉위 다음해부터 건조하여 53년이나 걸려서 완성시켰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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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경사 (寶慶寺) |
섬서성 서안의 남문 내 보경사에 있는 불전과 전탑 벽면에 있었던 석제의 부조 불상. 이들 부조는 본디 당시대에 같은 장안의 광택방(光宅坊)에 있었던 광택시 안, 특히 측천무후의 조영에 걸린 누각칠보대(寶대) 등의 내부 벽면을 장식하고 있었던 것으로서 원래는 130석여(石餘)가 있었다고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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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산 (驪山) |
섬서성 서안부에 있는 산. 여산(廬山), 회창산(會昌山)이라고도하며, 예로부터 온천으로 이름이 높다. 주나라때 여융(驪戎)이 와서 살았기 때문에 이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진시황이 온천을 이용하려고 각도(閣道)를 만들었고 당의 태종은 온천궁을 지었고, 현종은 온천궁을 화청궁(華淸宮)으로 고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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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산릉 (驪山陵) |
사기에 의하면 시황제는 70만명을 동원하여 38년 걸려서 이 능묘를 만들었다고 한다. 높이는 75미터, 봉상(봉상(封上))의 한변이 560미터의 방형(方型)묘이며 주위에는 3,000미터나 되는 흙울타리로 둘러싸여 있다.
묘내에는 궁전이 있고, 문무백관의 자리가 설치되어 있으며, 궁중에서 엄선된 진귀한 물건들로 가득차 있고, 묘도둑이 접근하면 노시(弩矢)가 저절로 발사되도록 되어 있었다.
묘실의 천장은 천체를 본떠서 야광(夜光)의 옥(玉)을 박은 밤하늘이 보이고, 중국의 지형을 본뜬 바닥에는 수은의 강이 흐르고 있다. 묘속에는 영원히 꺼지지 않는 인어(人魚)의 고(膏)를 쓰는 촉으로 비추어지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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