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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는 침묵하지 않았네 - 박 완서의 한 말씀만 하소서 때로 결정적인 순간에 하나님은 침묵하신다. 이름하여 아들을 잃는 참척의 한(恨). 다섯 자녀 중 하나였지만 아들로서는 하나뿐인 자식을 잃어버린 어미의 심정은 어떠한 것일까? '나목' '도시의 흉년' '휘청거리는 오후' 등으로 이미 필명(筆名)을 세인들에게 널리 알리고 있던 중견작가 박완서.
그녀에게 있어서 1988년은 동시대의 여느 한국인과는 전혀 다른 의미의 한 해로 다가선다. 올림픽으로 전국이 들끓고 법석대던 그 해. 작가는 해로했던 남편을 여의기가 무섭게 청천 벽력같은 비보에 몸져 눕는다. 그 누구라서 25년하고도 5개월 동안, 그것도 착하디 착한 (큰소리 한번 지르지 않고 키웠다고 회상하고 있음), 부모의 마음 헤아림에 있어서 각별했던 '자랑스런 아들'을 잃고 혼절하지 않을 수 있는 모친이 있을까…?
고통이 정도를 넘으면 주변의 위로도 오히려 사치스럽게 느껴진다고 그녀는 고백한다. 곡기(穀氣)를 입에 대지 않고도 전혀 시장기를 느끼지 못하고, 몸이 천근만근 피곤하지만 전혀 잠들 수 없는 나날의 연속도 그녀에게는 그 자체로서 그리 큰 문제로 여겨지지 않고 있다. 다만, 잠시라도 의식을 가눌 수 있는 순간이 들면 끊임없이 솟구치는 분(憤)함…. "하나님, 당신은 과연 계신지, 만일 계시다면 아들을 왜 데려 가셔야 했는지, 내게 이렇게까지 고통을 주셔야 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분함으로 인한 끊임없는 질문, 그리고 질문의 증폭에 반비례해 돌아오는 전혀 고요한 침묵. 하여, 어느 틈에 중얼대는 넋두리… 부디 "한 말씀만 하소서." 가톨릭 신앙에 입문한지 4년이 되었던 그녀에게 그나마 남아있던 기력의 마지막 한 자락은 '살의(殺意)'와 '원망(怨望)'의 에너지로 바뀌어 불러도 불러도 대답없는 하나님을 향한 외마디 비명으로 이어진다. 그래서 그녀의 '일기(日記)' 형식으로 전해지는 '우리 인생에 있어서 고난의 의미'를 다루는 한 권의 책은 예사롭지 않다. 그것은 어쩌면 당장에 전개되는 '내일'이라는 미래에 바로 '나'에게 찾아올 수 있는 삶과 죽음의 서사시가 아닌가!
"편집자가 이 작품집을 통해 하고 싶었던 일이란 독자들을 박완서 문학의 은밀한 내실(內室) 앞으로 안내하는 일이었다. 명민한 독자들은 이 작품을 통해 그 밑 모를 슬픔과 고통을 거의 본능적으로 헤쳐 가는 작가의 '억척 모성'을 느끼게 될 것이고, 또 그 느낌을 통해 박완서 문학의 내실을 들여다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참척의 일기'는 박완서 문학의 소중한 부분이다. 그 억척 모성이 도저한 슬픔과 억척스러이 싸우는 모습은 안타깝고 슬픈 일이다. 그러나 그것이 단순히 한 여성의 개인적인 것이 아니라, 우리의 불행한 현대사가 키운 '위대한 모성'으로서의 '억척 모성'임을 안다면, 독자 여러분들은 선생의 '참척의 일기'가 개인적 슬픔의 일기 이전에, 근본적으로 '한국 여성사가 공유하는 슬픔의 일기'라는 사실에 동의할 것이다..." 라고 잇는 편집자의 덧 글도 이같은 고통의 연대(連帶)'를 주제로 하고 있다.
단지 '문학'이라고 명(名)하기엔 턱없이 모자란 생생한 고통의 현장. 그 내밀한 밑바닥을 절절한 우리의 언어로 들을 수 있는 것만으로도 독자들은 커다란 특권에 초대되는 것이 아닐까? 내 몸 하나 가누기 어려울 고통의 심연 속에서 그녀는 명징(明徵)한 의식으로 자신의 속내를 토로한다. 그것이 소위 '문인(文人)'이기에 가능한 일일까? 아니면,신앙인이기에?
그도 저도 아니면 '억척 모성'이기에? 아마도 이상의 모든 가정은 그리 설득력이 없는 대답들이리라. 단언컨데 그같은 '기적같은' 언어의 창출은 바로 '박완서'이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을 게다. 그녀는 결코 스스로 전문적인 '문인'을 자처하지 않는다. 물론 그같은 논리는 '신앙인' 혹 '억척 모성'의 경우에도 모두 적용된다.
그녀는 그냥 곱게 자라 훌륭한 의사가 되기 위해 불철주야 애쓰던 천금같은 아들을 잃은 한 인간의 비통함을, 소리 높여 울부짖는다. 그녀에게 그것이 행여 무슨 문학의 소재가 될 수 있다는 식의 사치(?)는 가당치 않다. 그리고 더 나아가 그녀의 신심(信心)이 각별하다고 해도 결코 손쉬운 합리화나 적당한 미사여구로 기꺼이 슬픔을 승화(?)할 수 있는 별종이라 자처하지 않는다. 아니, 그녀는 '어머니'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을 모성(母性)을 자랑하고 싶은 마음도 없다. 그러면서도 그들 모두를 합하여 비범함을 이루는, '박완서'이기에 가능한 깨달음과 주옥같은 언어들을 쏟아낸다.
그래서 독자들은 그녀의 작품을 대하면서 일종의 '경외감'을 느낀다. "(아들의 존재를 느끼고 싶어) 잡다하게 읽은 (내세에 관한) 책 중 어떤 목사님이 죽었다 깨어나서 보고 왔다는 천당이 생각이 났다. 그가 보고 온 천당은 바닥은 온통 황금이고 궁정 같은 집은 화려한 보석으로 되어 있더라고 했다. 내가 상상한 천당하고 너무 달라서 더 읽을 마음이 나지 않았다.
내가 그랬으면 하고 그려보는 천당은 내 고향 마을과 별로 다르지 않다. 풀밭, 풀꽃, 논, 밭, 맑은 시냇물, 과히 험하지도 수려하지도 않지만 새들이 많이 사는 산, 부드러운 흙의 감촉이 좋아 맨발로 걷고 싶은 들길, 초가집 등이 정답게 어울린 곳이다. 내 고향 마을에서 천당으로 옮겨 놓고 싶지 않은 건 터무니없이 크고 과히 깨끗치 못한 뒷간뿐이다. 그러나 천당 바닥이 풀밭이 아니면 또 어떠랴. 황금이나 양탄자라 해도 사후에도 뭔가 보이는 것만 있다면 말이다."
그랬다. 그녀에게는 뭔가 '인위적인' 꾸밈이나 가식같은 것들을 찾아 볼 수 없다. 예수께서 "나다나엘이 자기에게 오는 것을 보시고 그를 가리켜 가라사대 보라 이는 참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도다(요 1:47)"라고 말씀하셨다고 하는데, 선생을 대하면 그 나다나엘 생각이 절로 난다.
"아들이 내 속을 썩이거나 실망시킨 일을 생각해 내려고 애쓴다. 물에 빠져 검부락지라도 잡으려는 노력처럼 처참하게 허위적댄다. 하다못해 남에게 흉을 잡힌 일이나 좋지 못한 버릇이라도 생각해 낼 수 있다면 다소 숨통이 트일 것 같다. 이 비참한 자구노력도 허사가 되고 만다. 그 애는 완벽했다. 그 애가 한 짓 중 사랑스럽지 않은 것은 어쩌면 단 한 가지도 없단 말인가. 그 애가 완벽했다는 확신은 그 애를 잃은 상실감 또한 천벌처럼 완벽하게 한다. 바늘 구멍만한 구원의 여지도 없다. 그 애 없이 사는 걸 견디어내야 하다니, 무시무시했다..."
그랬다. 그녀는 저명한 문인이 아닌 우리네 이웃에서 늘상 만나는 여린 한 인간,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하나님은 진실한 기도에 응답하시나보다. 그녀가 결국 '한 말씀'을 듣게 된 사연은 감동적이다. 지인(知人)의 주선으로 잠시 머물게 된 부산의 분도수녀원. 그 속에서 그녀는 우연한 기회에 '구원의 실마리'를 발견한다. 수녀로 서원한 어느 앳된 자매의 고백. 그것이 자신의 마음에 촌철처럼 스치고 지나가는 '한마디 말씀'이 되어 박힌다. 그리고 급기야 자신을 새롭게 발견하는 뜨거운 고백으로 이어진다.
"나는 남에게 뭘 준 적이 없었다. 물질도 사랑도. 내가 아낌없이 물질과 사랑을 나눈 범위는 가족과 친척 중의 극히 일부와 소수의 친구에 국한돼 있었다. 그 밖에 이웃이라 부를 수 있는 타인에게 나는 철저하게 무관심했다. 위선으로 사랑한 척한 적조차 없었다... 주지도 받지도 않은,타인에 대한 철저한 무관심이야말로 크나큰 죄라는 것을, 그리하여 그 벌로 나누어도 나누어도 다함이 없는 태산같은 고통을 받았음을, 나는 명료하게 깨달았다."
물론, 어느 한 인간의 죄 값으로 그의 사랑하는 아들을 데려가실 하나님이 아니시란 사실은 그냥 평범한 교리서에 나오는 내용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같은 일반적 교리를 뛰어 넘어, 새로운 깨달음으로 나아가는 순간은 누가 뭐래도 소중한 '내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살아계심'이다. 때로 하나님은 결정적인 순간에 침묵하시는가? 그 하나님은 때로 결정적인 순간에 또 이처럼 말씀하신다.
이상훈 <목사, 한국정신문화연구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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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처절한 고통속에서 헤어나오지 못할 것인가? 아님 그분을 철저히 신뢰하고 살아가야 할것인가 두갈래 밖엔 선택의 여지가 없음을... 그러나 감당하기엔... 이웃을 향한 사랑의 마음으로 귀착 되었으니 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