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美] 경북 경주 - 신라에서 조선까지, 고요하고 찬란한 발자국을 더듬다 한국의미 등록일2015.01.08
경북 경주 - 신라에서 조선까지,고요하고 찬란한 발자국을 더듬다
연일 쌀쌀한 날씨가 계속되고, 차디찬 겨울바람에 마음마저 얼어붙은 요즘이다. 그래도 거리 곳곳에 울려
퍼지는 자선냄비의 종소리를 듣노라면 마음 한쪽이 군불 지핀 듯 따스해진다. 이번 달 여행은 경주로 떠난
다. 떠들썩하지 않고 번잡하지 않은 여행지면 좋겠다는 분이라면 가볼 만하다. 첫 목적지는 최부잣집으로
알려진 교동 최씨고택이다.
한옥의 그윽한 정취를 느낄 수 있는 최씨고택.
우리나라의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만나다
경주를 찾은 이들이 가장 많이 가는 곳이 바로 대릉원과 첨성대. 이곳에서 발길을 안압지로 돌리지 않고 계림 숲 속
뒤쪽으로 가면 교동이다. 신라 때 학교 시설인 국학이 있던 곳으로 돌담길과 그 너머로 얼핏 보이는 기와지붕이 이런저런
복잡한 심사를 잊게 하는 마을이다.
최부잣집은 이 마을 한가운데에 자리하고 있다. 흔히 ‘9대 진사, 12대 만석꾼’으로 회자되는 집이다. 부자는 3대를 넘기
기 힘들다지만, 최부잣집은 300여 년 동안 부를 유지했고, 마지막에는 기부와 독립군 자금, 그리고 교육사업에 모든 재산을
써버림으로써 영원한 부자로 남았다.
최부잣집의 토대는 최국선(1631~1681)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 역시 처음에는 여느 부자와 다르지 않았다. 당시의 관행대로
8할의 소작료를 받았고, 보릿고개에 양식을 빌려주고 많은 이자를 붙였다. 그런 최국선의 의식이 바뀐 사건이 있었다. 어느 날
도적 떼에게 침입을 당했는데, 그 도적 무리 안에 자신의 소작농과 그들의 가솔이 포함돼 있었던 것이다. 게다가 도적 떼는 양
식은 손도 대지 않고 장리를 준 증표인 채권 서류만 가져갔다. 도적들이 돌아간 뒤 주변 사람들은 도적을 잡아야 한다고 했지
만, 최국선은 외려 80% 이상 받던 소작료를 50%로 낮춰버린다. 당시로는 파격적인 조치였다. 이때부터 최부잣집의 나눔과 상
생의 노블레스 오블리주가 시작된다.
최부잣집은 왕궁 터 월성을 끼고 흐르는 문천 옆 양지바른 곳에 자리 잡고 있다.
1700년쯤에 지어졌는데, 원래 아흔아홉 칸이었지만 마지막 최부자인 최준(1884~1970) 선생이 돌아가시던 해에 사랑채와
별당이 화재로 소실돼 지금은 70여 칸으로 줄었다.방문객을 가장 먼저 맞이하는 건 솟을대문이다. 여느 대갓집과 달리
소박하다. 크게 높지도 않고 화려하지도 않다. 더불어 사는 삶을 실천한 최부잣집은 주변 집들과의 조화를 고려해 솟을대문
을 일부러 낮게 지었다. 집 역시 왼쪽에 자리한 계림향교보다 2계단 낮게 터를 깎아내고 지었다.
최씨 고택의 사랑채. 부를 과시하지 않은 담백하면서도 당당한 모습이다. / 사랑채 뒤를 돌아 사당으로 가는 길,
그윽하고 소담한 정원이 숨어 있다.
솟을대문을 지나 발을 들이면 큰 사랑채가 버티고 서 있다. 지난 2006년에 복원한 것이지만 최부잣집의 역사와
연륜을 느끼기에 모자람이 없다. 이 집에서 면암 최익현, 구한말 의병장 신돌석, 의친왕 이강 등이 묵었다. 스웨
덴의 구스타프 6세도 최부잣집과 인연이 있다. 일제 강점기 당시 황태자였던 구스타프 6세는 신혼여행차 우리
나라를 방문했다. 당시 조선의 명가인 최부잣집에서 묵은 그는 융숭한 대접을 받았고, 최준 선생의 인품에 반했
다고 한다. 후에 국왕이 된 구스타프는 여성 전용 공간이라 둘러보지 못했던 안채의 모습이 궁금해 한국전쟁에
파견한 간호장교들에게 사진을 찍어오라는 밀명을 내렸다고 한다.
사랑채에서 안채로 가다 보면 드넓은 공간에 떡하니 서 있는 목재 곳간을 볼 수 있다. 정면 5칸 측면 2칸 크기로 지었
는데, 현존하는 목재 곳간 가운데 가장 크다. 이 곳간은 최부잣집이 실천한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상징이다. 최부자는
흉년이면 곳간을 열어 쌀을 나눠줌으로써 사방 100리 안에 굶어 죽는 사람이 없도록 해 자칫 부자로서 사기 쉬운 원성
을 듣지 않았다고 한다.
최부잣집이 실천한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배경에는 대대로 전해 내려오는 육훈이 깔려 있다. ‘과거를 보되 진사 이상
벼슬을 하지 말라’, ‘만석 이상의 재산은 사회에 환원하라’, ‘흉년기에는 땅을 늘리지 말라’, ‘과객을 후하게 대접하라’,
‘주변 100리 안에 굶어 죽는 사람이 없게 하라’, ‘시집온 며느리들은 3년간 무명옷을 입으라’ 등 가훈처럼 내려오는 가
르침이다. 실제로 최부잣집의 1년 쌀 생산량이 대략 3,000석이었다는데 1,000석은 집 안에서 사용하고, 1,000석은 과객
에게 베풀었으며, 나머지 1,000석은 주변 어려운 사람들에게 나눠줘 농민이 굶주리지 않도록 했다고 한다.
최부잣집의 노블레스 오블리주는 마지막 최부자인 최준(崔浚, 1884~1970)에 의해 완성됐다. 일제 강점기에 백산상회
를 설립해 독립 운동 자금을 지원하고, 임시정부 주석 김구에게 군자금을 보낸 그는 광복 후에는 인재를 양성하기 위
해 전 재산으로 대구대학(현 영남대학교)과 계림학숙을 설립했다.
지난해에는 최부잣집의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입증하는 고문헌 3,000점이 발견돼 화제가 되기도 했다. 문서 중에는 노
비나 소작인의 빚을 탕감하고 병자호란 중 전사한 충노(忠奴)를 표창해달라는 등의 내용이 많다고 한다. 증오가 아닌
솔선으로 주위를 밝힌 최씨 가문의 선견지명은 오늘날에도 큰 모범이 된다.
그때는 왜 몰랐을까 다보탑이 이토록 아름다운지
신라 문화의 정수를 보여주는 다보탑.
여행지도 나이에 따라 달리 보이고 다른 모습으로 다가온다. 20대 배낭여행자가 느끼는 인도와 40대 중반 여행자가 느
끼는 인도가 같을 리 없을 터이다. 경주 역시 마찬가지다. 들판에 구르는 돌 하나, 길가의 기와 한 장도 하찮은 것이 없
을 정도로 수많은 문화재로 가득한 경주. 다시 찾은 경주는 까까머리 고등학생 시절 친구들과 키득거리며 찾았던 수학
여행지 경주와는 다른 모습으로 다가온다.
예나 지금이나 경주 여행의 하이라이트는 불국사. 그곳에서도 가장 눈길을 끄는 곳이 다보탑과 석가탑이다. 마주 보고
선 두 탑은 전혀 다른 매력으로 보는 이를 감탄시킨다. 다보탑이 화려하면서도 세밀한 형상미를 가지고 있다면, 석가
탑은 단순하면서도 균형적인 조형미를 갖추고 있다. 첨성대와 대릉원 주변은 저물녘 찾는 것이 좋을 듯. 경주에서 야
경이 가장 아름다운 곳이기 때문이다. 첨성대를 비롯해 대릉원과 여러 고분군, 계림 등이 모여 있다.
경주의 야경. 해가 지면 첨성대와 계림에 조명이 들어와 신라의 달밤을 밝힌다.
오후 6시 무렵이면 조명이 켜지기 시작한다. 이때면 사람들은 삼삼오오 첨성대로 향한다. 조명을 받은 첨성대는 ‘동양
에서 가장 오래된 천문대’라는 타이틀이 무색할 만큼 화려하다. 첨성대 건너편은 계림.경주김씨의 시조 김알지의 탄
생 설화가 얽힌 곳이다. 그가 태어날 때 흰 닭이 그 사실을 알렸다고 해서 계림으로 불리기 시작했다.
첨성대에서 계림 방면으로 걷다 서쪽으로 바라보면 둥그스름한 곡선의 능이 몇 기 있다. 석양이 질 무렵, 여인의 가슴
선을 닮은 봉긋한 고분의 곡선이 뒤쪽 산의 능선과 어우러져 절묘한 풍경을 빚어낸다. 한 걸음을 가면 능 2개가 겹치고
두 걸음을 가면 능 3개가 포개진다. 가까운 능은 진한 곡선을, 먼 산은 옅은 곡선을 만들어낸다. 그리고 그 곡선 위로,
신라의 땅 위로 장엄하게 번지는 노을. 옛 신라는 아마 이보다 더 황홀한 왕국이었을 것이다.
안압지의 밤 풍경도 분위기 있다. 안압지는 신라의 궁궐을 화려하게 장식한 연못. 좁은 연못을 넓은 바다처럼 보이게
하기 위해 어느 곳에서도 연못 전체를 조망할 수 없도록 만든 것이 특징이다.
조선 시대 대표 서원 옥산서원. 각 현판의 글씨는 조선 최고 명필들의 작품이다.
그윽한 겨울 운치를 즐기기에는 독락당과 옥산서원이 좋다. 조선 시대 큰 학자인 회재(晦齋) 이언적(李彦迪)이 여러 가지
정치 공학적인 이유로 벼슬할 뜻을 잠시 접고 고향으로 내려와 지어놓고 5년간 머문 곳으로 알려졌다. 집 주위가 깊은 산
속도 아닌 그냥 개울 옆인데, 마치 심산유곡에 들어선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겨울의 적요와 아름다움이 가득한 곳이
다. 옥산서원은 수령이 수백 년 된 굴참나무와 느티나무가 가득한 곳으로, 한석봉과 추사 김정희, 퇴계 이황의 현판이 볼
만하다.
바닷길 따라 즐기는 낭만 드라이브
감포항 가는 길. 기암괴석이 가득한 동해바다를 옆에 두고 달린다. / 감포에서 포항으로 이어지는 해안 도로.
겨울 바다의 정취를 제대로 느낄 수 있다. / 한적한 포구의 정취를 느낄 수 있는 감포항.
사실 경주를 하루 이틀에 두루 살펴보기란 불가능하다. 남산만 제대로 보려 해도 족히 일주일은 걸린다. 보문단지에서
문무대왕릉과 감포항을 잇는 코스는 경주 답사 여행 코스로도 손색없고, 문무대왕릉에서 감포까지 이어지는 해안 도로를
따라 바다 드라이브도 즐길 수 있어 가족 여행 코스로 괜찮다.
위풍당당하게 서 있는 감은사 탑. 탑 위에 솟은 송곳 같은 찰주에 서슬 퍼런 전의가 서려 있다.
추령재를 지나 동해 쪽으로 가다 보면 감은사지다. 완벽한 조형미 덕분에 신라 탑의 전형으로 불린 감은사 탑이 있는 곳이다.
감은사 탑 높이는 13.4m. 지금까지 남아 있는 신라의 탑뿐 아니라 삼층석탑 중에서도 가장 크다. 더할 것도 뺄 것도 없는
감은사 탑의 완벽한 조형미는 보는 이를 감탄하게 한다. 감은사지에서 5분을 가면 문무대왕릉이 있는 해변에 다다른다.
삼국 통일을 완수한 문무왕은 자신이 죽으면 시신을 불에 태워 동해에 묻어달라는 유언을 남겼다.
‘내가 죽은 뒤에 용이 되어 불법을 받들고 나라의 평화를 지킬 터이니 나의 유해 를 동해에 장사 지내라. 화려한 능묘는 공연한 재물의 낭비이며 인력을 수고롭게 할 뿐 죽은 혼은 구할 수 없는 것이다. 내가 숨을 거둔 열흘 뒤에는 불로 태워 장 사할 것이요, 초상 치르는 절차는 힘써 검소와 절약을 좇아라.’ -<삼국사기> 중에서
문무왕은 왜적의 침입을 막기 위해 자신의 유골을 동해에 뿌리게 했다. 수중 왕릉 대왕암. 새해를 맞는 일출
여행지로도 인기다.
문무대왕릉의 일출은 장관 그 자체다. 거센 파도를 뚫고 문무대왕릉 위로 불쑥 솟아오르는 커다란 햇덩이는 보는 이에게
형언할 수 없는 감동을 준다. 해마다 이맘때면 일출을 촬영하기 위해 전국에서 사진작가들이 몰려든다. 이곳에서 감포
항을 지나 구룡포에 닿는 31번 국도는 멋진 드라이브 코스기도 하다. 대본, 나정, 전촌 등 크고 작은 해변을 지난다. 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