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철이 지나는 바로 두뭇개 시작부터 사냥과 낚시 꽃놀이를 함께 즐겨온 절경이 펼처진다.
바로 독서당길을 따라 가다보면 왕십리를 거쳐 응봉동과 금호3가의 고개에 응봉산(95m)이 있다.
중랑천과 한강이 만나고 서울숲 등 주변 일대가 한눈에 들어온다. 봄이 오면 개나리가 산을 뒤덮는다.
응봉산은 멀리 한강을 은근히 굽어보고 있다. 아담한 크기에 그리 높지 않아 혹자는 언덕이라 표현하기도 한다.
이 응봉을 매봉산이라고도 한다. 응봉은 산이 높지 않으나 경관이 빼어난다.
조선 태조가 살곶이벌에서 매사냥을 즐기기 위해 즉위 4년(1395년)에 매사냥을 관장하는 응방을 한강 위,
곧 지금의 응봉기슭에 설치하였다. 응봉은 조선 태조가 한양에 도읍하기 전에도 동교(東郊)에서
매를 놓아 사냥을 했고 그 후 태종 세종 때도 이곳에 나와 매사냥을 즐겨 했다.
태조 때부터 성종 때까지 100여 년간 151회나 매사냥을 했다는 기록이 고서에도 나와 있다.
임금이 사냥할 때 이곳에서 매를 놓아 꿩을 잡기도 해 매봉 또는 한자명으로 응봉(매봉우리)이라 불리기도 했다.
태조의 사랑을 받으며 ‘응방’이라는 관청까지 설치됐던 역사를 간직하고 있다. 응봉산에는 1987년 2층형의 전통
한식목조로 응봉산정(鷹峰山亭)을 지었다
응봉산 정상 응봉산정 아래 매봉산을 노래한 매봉산 시비가 있다.
오동춘 시인이 매봉산에 올랐을 때 정답고 기쁜 마음과 건강한 신체를 표현한 시 '
매봉산에서'가 그 시비에 새겨져있다.1992년 옥수동 매봉산 산악회에서
설립 기증한 시비이다.
응봉산 자락에는 서울 도심에서 암벽을 이용한 유일한 암벽 등반 시설이 있어 체력증진과 여가 선용을 할 수 있는 소공원 시설들이 있다
또한 응봉 기슭은 일찍이 빗살무늬토기의 산포지로 밝혀져 신석기 문화가 이 땅에 전개될 때부터 조상들의 생활터전이었음을 증명해 주고 있으며 1930년에는 문화동 뒷산 응봉 기슭에서 기원전 700년경의 청동기시대 주거지와 유물이 발견되기도
했다.
1956년 옥수동 제방에서 바라본 입석포다.한강을 따라 철둑길이 보인다.
입석포(立石浦)는 현재의 용비교 북단 부분으로 한강 본류와 중랑천이 합류하는 응봉동 강변에 있었다.
입석포는 천연의 낚시터로 이름이 높았던 곳이다. 입석포는 한천변의 큰 바위들이 사람처럼 서 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조선시대에는 선돌개라고 불리기도 하였다.
입석포는 동남쪽으로는 뚝섬 광나루를 연결하는 넓은 살곶이의 평야지대가 한눈에 들어오고
그 밑으로는 강 가운데 저자도(著子島)와 강 건너 압구정(鴨鷗亭) 부근의 경치가
한눈에 바라볼 수 있어서 조선시대 문객이 끊이지를 않았다고 한다.
입석포를 즐겨 찾은 인물로는 조선 초 문인인 서거정과 강희맹 등이 있으며
이들은 입석포를 예찬하는 시를 짓기도 하였다.
이러한 입석포의 수려한 경치와 천연의 낚시터로서의 명성은 성종 때에
한성을 대표하던 열 가지 볼거리인 ‘한성십영’ 안에 입석조어(立石釣魚; 한강 입석포에서의 낚시)가 당당히 들었다.
현재는 성수대교가 옛 나루 위로 가설되어 입석포의 이러한 옛 모습을 찾아보기 어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