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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장달수의 한국학 카페 원문보기 글쓴이: 樂民(장달수)
韓・中 人蔘詩의 양상과 특징
김 보 성*
< 目 次 >
Ⅰ. 서론
Ⅱ. 역대 문인이 취합한 인삼시
1. 人蔘史의 인삼시
2. 詩話書의 인삼시
Ⅲ. 한・중 인삼시의 양상
1. 인삼에 대한 찬미와 경계
2. 인삼 문화에 대한 Monograph
Ⅳ. 결론
<국문초록>
人蔘은 한국에서 재배가 시작되어 일찍이 동북아시아에서 활발히 거래되고,
나아가 동남아시아 및 서양 권역에까지 그 명성과 가치를 널리 알린 産品이다.
고대부터 지금에 이르도록 인삼은 한국의 대표 약용작물로서 각광 받았다.
이른바 ʻ만병통치약ʼ이라 소문난 인삼을 구하려 했던 동아시아인들의 노력相
은 현존하는 고문헌에 산재되어 있다. 중국과 일본에서도 인삼은 오랜 세월동
안 값비싼 名藥으로 자리매김했다. 인삼 수요가 동아시아 차원에서 급증하자,
인삼 생산국인 우리나라는 적잖은 부작용을 감수하게 된다. 예를 들어, 백성들
은 중국에 바치는 필수 朝貢品이 되어버린 인삼을 채취하느라 노역에 시달렸
고, 조정 중신들은 일본의 採蔘者나 商人이 배출한 위조 인삼을 막느라 골머리
를 앓았다.
인삼은 한・중・일의 주요 관심사로 늘 부각되면서 동아시아 문화권의 한 축
을 담당했다. 인삼이 중증 환자를 치유하는 약용식물로 각인되고, 높은 이윤을
* 성균관대학교 대동문화연구원 선임연구원 / E-mail : creison@hanmail.net
漢文古典硏究, 한국한문고전학회
Journal of Korean Classical Chinese Literature
2018, 第36輯, pp.299~329
http://dx.doi.org/10.18213/jkccl.2018.36.1.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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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기는 무역상품으로 부상하여, 이로 인해 오히려 몸을 상하게 하는 남용・오용
이나 백성의 생계를 파괴하는 지경의 조공을 초래하는 일련의 과정이 漢詩에
고스란히 녹아있다. 또한, 개인 체험으로 습득한 생생한 인삼 정보가 장편 한시
에 보인다. 인삼에 대한 공적 기록물(역사서)과 더불어 개인 기록물(한시)을 함
께 분석하는 것은 동아시아 인삼 문화사를 온전히 재구하는 일환으로 반드시
필요한 과정이라 할 수 있다.
【주제어】 人蔘, 人蔘詩, 家蔘, 蔘商, 동아시아
Ⅰ. 서론
人蔘1)은 한국에서 재배가 시작되어 일찍이 동북아시아에서 활발히 거
래되고, 나아가 동남아시아 및 서양 권역에까지 그 명성과 가치를 널리
알린 産品이다.2) 고대부터 지금에 이르도록 인삼은 한국의 대표 약용작물
로서 각광 받았다. 인삼에 관한 제반 사항, 곧 인삼의 종류 및 효능, 公・私
인삼 무역 등에 대해 약학계・식품학계・사학계를 비롯한 각 전문 분야에
서 묵직한 성과들이 배출된 것은 필연적 결과로 보인다.
이른바 ʻ만병통치약ʼ이라 소문난 인삼을 구하려 했던 동아시아인들의
노력相은 현존하는 고문헌에 산재되어 있다. 기록에 의하면, 18세기까지
1) 明나라 화가 李日華는 紫桃軒雜綴에서 인삼이 人參, 人薓, 人㣲, 人御, 鬼葢, 神
草, 地精, 海腴 등으로 불린다고 정리했다.(王士禎, 居易錄 권4 재인용) ʻ人參,
一名人薓, 薓者, 漸漬之義. 又名人㣲, 㣲亦㣲漸之意. 一名人御, 以其生有階級. 又
名鬼葢, 以其生背陽向隂. 又有神草・地精・海腴之名.ʼ 본고는 고문헌의 작품명을
그대로 차용했다. 이를 통해 대부분 한국문헌에는 人蔘으로, 중국문헌에는 人參
으로 명기된다는 사실을 재확인할 수 있었다. 일반 해설에는 한국문헌의 용례에
따라 人蔘으로 썼음을 미리 밝힌다.
2) 베트남, 영국 등지에서 인삼을 주목한 사례에 대해서는 ʻ최병욱, 「19세기 전반
베트남에서의 ʻ고려인삼ʼ」, 동남아시아연구 22, 한국동남아학회, 2012; 설혜심, 「19세기 영국신문에 나타난 인삼」, 영국 연구 34, 영국사학회, 2015ʼ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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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 해도 부나 권세가 없는 사람은 인삼을 얻기가 극히 어려웠다. ʻ먹으면
원기를 도울 수 있고 질병을 고칠 수 있어 세상에서 모두 신선의 丹藥처
럼 보배로 삼아 藥籠 속의 가장 요긴한 물건으로 여긴ʼ 인삼은 그 값이
한량없었다. 가난한 사람은 병을 치유하기 위해 인삼을 구하느니 차라리
죽는 편이 쉽다는 평이 나올 정도였다.3) 중국과 일본에서도 인삼은 오랜
세월동안 값비싼 名藥으로 자리매김했다.
인삼 수요가 동아시아 차원에서 급증하자, 인삼 생산국인 우리나라는
적잖은 부작용을 감수해야 했다. 예를 들어, 백성들은 중국에 바치는 필수
朝貢品인 인삼을 채취하느라 노역에 시달렸고, 조정 중신들은 일본의 採
蔘者나 商人이 배출한 위조 인삼을 막느라 골머리를 앓았다. 인삼을 향한
동아시아인들의 갈망과 그로 인해 드리워진 그림자를 보여주는 자료들은
쉽게 발견된다.
동아시아 문인들 사이에서 인삼의 효능에 대한 찬미와 폐단에 대한 경
계는 대대로 공존해왔다. 말하자면, 인삼은 한・중・일의 주요 관심사로 늘
부각되면서 동아시아 문화권의 한 축을 담당했다고 할 수 있다. 인삼 자
체에 대한 관심으로 활발히 이루어지던 ʻ인삼 교역ʼ이 19세기에 접어들면
서 또 다른 ʻ문화 교류ʼ를 양산했다는 사실도 주목할 만하다. 조선 사절단
의 숙소인 玉河館 주위에 집중적으로 설치되었던 인삼 거래소-參局(人參
局)은 조선 문인과 청조 인사들의 만남의 장소로 활용되었다. 인삼을 거래
하는 장소가 ʻ양국 인사의 모임과 연회의 장소, 그리고 물품 및 편지 교환
의 장소ʼ로 부상한 것이다.4)
외국에서 국내로 유입된 신문물을 문화사 측면에서 분석한 연구 성과
3) 윤기 저, 김채식 역, 무명자집 13, 성균관대학교 출판부, 2013, p.317. 뒤이어 윤
기는 19세기 초반에 이루어진 인삼의 성공적인 재배가 인삼 값을 낮추는 요인이
되었으며, 이에 의원은 환자에게 인삼의 복용을 쉽게 권하고 환자는 이를 적극
수용하는 경우가 빈번했다고 증언했다. 여기에서의 ʻ家蔘ʼ은 기존의 ʻ山蔘ʼ과 다른
층위에 놓고 살펴볼 필요가 있다.
4) 더 자세한 내용은 ʻ정후수, 「북경 인삼국 공간 활용–19세기 한중 인사의 교류를
중심으로」, 우리어문연구 38, 우리어문학회, 2010ʼ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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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꾸준히 나오는 가운데5) 국내에서 외국으로 널리 전파된 전통문물의
폭넓은 검토가 병행되어야 한다. 본고는 동아시아 문화권에서 살펴야 할
대표적인 전통문물로 ʻ인삼ʼ을 우선 주목하고, 현존 자료가 적지 않으나
그간 연구의 사각지대였던 人蔘詩를 분석함으로써 동아시아 인삼 문화사
의 일면을 재구하는 것을 목표로 삼는다.6)
Ⅱ. 역대 문인이 취합한 인삼시
1. 人蔘史의 인삼시
이마무라 도모[今村鞆, 1870~1943]가 편찬한 人蔘史(朝鮮總督府 專
賣局, 1935)는 인삼의 사상사・정치사・경제사・문예사를 개괄하여 인삼에
대한 종합적인 기술서로 일컬어진다. 그 가운데 第6卷 雜記篇의 第1, 2,
3, 5章에는 한・중・일 문인들이 남긴 인삼 관련 傳說, 小說・逸話, 漢詩, 文
籍 등이 소개되어 있다. 고대부터 근대까지의 삼국 詩文 자료를 망라했다
는 의의와, 기술상 부분적으로 소략하거나 오해의 여지가 있다는 한계가
공존하는 자료다. 제3장 ʻ人蔘文藝ʼ의 第1節 ʻ漢詩ʼ에 배열된 중국과 한국
의 작품, 그리고 작품 말미마다 부기된 注 가운데 특기할 만한 내용을 중
심으로 논해본다.
중국 문인의 인삼시로 첫 번째 제시된 작품은 「高麗人參贊」이다. 현재
로서는 最古의 인삼시라 여겨진다. 역대 문인들 또한 같은 맥락에서 이
5) 안대회, 담바고 문화사, 문학동네, 2015; 강명관, 조선에 온 서양 물건들: 안경
망원경 자명종으로 살펴보는 조선의 서양 문물 수용사, 휴머니스트, 2015; 진재
교, 「조선조 후기 안경 문화의 생성-안경으로 읽는 조선조 후기 문화의 한 국면」, 한국한문학연구 62, 한국한문학회, 2016 등이 있다.
6) 지면의 한계로 인해 인삼을 오랫동안 향유해온 한국과 중국 문인의 인삼시를 중
심으로 검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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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을 인삼시와 관련하여 우선적으로 언급했다. 「고려인삼찬」의 전문은
다음과 같다.
三椏五葉세 가장귀 다섯 잎은
背陽向陰양에는 안 맞고 음에는 맞네.
欲來求我와서 나를 구하려거든
椵樹相尋椵樹7)에서 찾기를.
이 시는 인삼의 모양 및 인삼의 체질을 묘사한 1, 2구와 인삼의 소재지를
설명한 3, 4구로 크게 나뉜다. 이 시(특히 1구)가 후대 시인들에게 시적 영
감을 불러일으킨 양상은 후술하도록 하고, 먼저 인삼사 주석에 제기된
「고려인삼찬」의 ʻ작자ʼ 문제를 재고해볼까 한다. 이마무라는 일단 ʻ고려인
삼찬ʼ의 ʻ고려ʼ가 ʻ고구려ʼ를 가리킨다는 기존의 설8)에는 이견을 표하지 않
았다. 단, 名醫別錄에는 ʻ高麗人人參贊ʼ으로 되어 있어 명백히 고구려 문
인이 인삼에 대한 찬을 지은 것으로 보이지만, 續博物志에는 人자가 하
나 생략된 ʻ고려인삼찬ʼ으로 되어 있어 중국인이 고구려 인삼에 대한 찬을
지은 것으로 이해된다고 주장했다. 말하자면 명의별록의 표기는 ʻ고려인
인삼찬ʼ으로, 속박물지의 표기는 ʻ고려인삼 찬ʼ으로 풀이된다는 것이다.
그는 명의별록은 正本이 전해지지 않는 상태이고, 당시 고구려인의 문화
수준으로 이러한 시를 지을 수 없기 때문에 속박물지의 표기를 신뢰할
수밖에 없다고 역설했다.9) 그러나 이마무라의 주장은 몇 가지 의구심을
불러일으킨다. 첫째, 명의별록의 저자라 알려진 陶弘景(456~536)이
7) 1748년 조선의 制述官 朴敬行 및 良醫 趙崇壽 등과 일본인 의사 直海龍 사이에
오간 필담을 모은 班荊閒譚(「附錄和漢用字式」)을 보면, 本草經集注의 人蔘
條에 나오는 椵樹가 우리말로 ʻ가죽나무ʼ라는 설명이 있다. *반형한담에 대한
해제는 한의고전명저총서 홈페이지에 자세하다.
8) 한치윤, 해동역사 권47, 「예문지 6・우리나라 시 1」(한국문집번역총서) 등을
참조.
9) 朝鮮總督府專賣局 編, 人蔘史 권6, 「第三章 人蔘文藝 ・ 第一節 漢詩」, 朝鮮總督
府專賣局, 1935, p.1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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本草經集註에 ʻ高麗人作人參贊ʼ이라 하고, 李時珍(1518~1593)이 本草綱
目에 이를 그대로 재인용한 것10)은 왜 묵과했는가? 둘째, 한국에서는 인
삼을 ʻ參(蔘)ʼ으로만 쓴 사례가 적지 않으므로 ʻ고려인삼찬ʼ이라는 표기는
ʻ고려인 삼찬ʼ을 의미할 수도 있지 않은가? 셋째, 충분한 근거 자료 없이
고구려인의 문화수준으로 이러한 작시가 불가능하다고 단언하는 것은 섣
부르지 않은가? 공교로운 일은 「고려인삼찬」의 출처를 밝힐 때 대체로 한
국 문인은 명의별록이나 본초경집주・본초강목을 거론했고, 중국 문
인은 속박물지를 거론했다는 것이다. 중국 문인은 이마무라처럼 속박
물지에 명기된 ʻ고려인삼찬ʼ이라는 詩題를 근거로 이를 중국 문인의 작품
이라고 주장하진 않았지만, 한국 문인의 작품으로 소개하지도 않은 채 다
른 중국 문인의 인삼시 사이에 끼워 혼란을 초래하기도 했다. 吳景旭
(1611~1697)의 歷代詩話가 그 예이다.
「고려인삼찬」 이후 제시된 작품은 당나라 王績의 「採藥詩」, 段成式의
「與周爲憲求人參」, 周繇의 「以人參遺段柯古」, 韓翃의 「送客之潞府」, 皮日
休의 「友人以人參見惠, 因以詩謝之」, 陸龜蒙의 「和襲美謝友人惠人參」・
「和題達上人藥圃」, 송나라 宋祁의 「九日藥市作」, 楊萬里의 「李仁甫用東
坡寄王定國韻, 賦新羅參, 見貽亦復繼作」11), 蘇軾의 「小圃人參」・「紫圃參寄
王定國」, 謝翶의 「效孟郊體」・「送上黨長」(이상은 佩文齋詠物詩選, 古
今圖書集成에서 발췌), 청나라 王柘의 인삼시(瀋故에서 발췌), 趙翼의
「俊兜以我年邁强進參劑, 其價四百八十換, 此豈吾輩所宜」(甌北詩鈔에서
발췌), 高宗의 「又詠人葠」(天藻題詠, 寗安縣志에서 발췌), 朱鑰의 「人
參」(本草詩箋에서 발췌)으로 총 17수이다. 당・송 작품을 13수 뽑았으며,
10) 李時珍, 本草綱目, 「草部・木部・石部・果部・人参」(전자판 사고전서). ʻ弘景曰:
(전략) 其草一莖直上, 四五葉相對生, 花紫色. 高麗人作「人參贊」云, ʻ三椏五葉, 背
陽向陰. 欲來求我, 椵【音賈】樹相尋.ʼ 樹似桐, 甚大, 附廣則多生, 采作甚有法.
今近山亦有, 但作之不好.ʼ
11) 본래 양만리가 아닌 張栻(1133~1180)의 작품이다. 南軒集 권3, 「古詩」에 이
시가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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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명 작품은 수록치 않고 다시 청 작품을 4수 실었다. 인삼사에 실린
당・송・청 인삼시를 내용별로 분류해보면, 지인과 인삼을 주고받은 상황
이나 인삼이 시장에서 거래되고 밭에서 재배되는 상황을 읊은 시(唐・宋
詩)와, 인삼의 생김새・소재지・향유층・종류・값 등을 차례대로 묘사한 시
(淸詩)12)로 나눌 수 있다. 후자는 인삼 자체에 대한 정보를 종합적으로 담
고 있다는 점에서 역대 인삼시와 차별된다.
이마무라는 약초의 본질 및 효용 등을 口誦하게 하여 약을 쉽게 조제하
는 데 일조할 목적으로 지어진13) 청나라 문인 주약의 본초시전(1739년
간행)에서, 그의 「인삼」 시를 취택해 자신의 인삼사, 「인삼문예・한시」,
중국 편의 마지막 작품으로 인용했다. 주약의 「인삼」을 보면, ʻ고려의 것
이 좋다. 음이 허해 속 타고 기침을 해 숨차면, 青鹽을 써서 조제하여 肺經
과 脾經에 스며들게 해야 한다[高麗者良. 陰虛火炎, 欬嗽喘逆, 宜用青鹽
製, 入肺脾二經.]ʼ라는 詩題의 주석과,
人參功大益精神인삼의 효용은 커서 정신에 유익하니
甘苦微溫性自馴달고 쓰고 미지근함에 본성이 절로 길드네.
反與藜蘆休並用藜蘆와 상반되어 같이 복용하길 그치고
畏同鹽鹵莫相親鹽鹵와 꺼려하여 서로 가까이하지 않네.
保元旺血除邪氣원기를 보충하고 혈기를 왕성히 하며 나쁜 기운을 몰아내
明目開心利弱身눈을 밝게 하고 마음을 열어주며 약한 몸을 이롭게 하네.
味厚最宜尫怯症맛이 진한 게 나약한 병증에 가장 좋고
必須尤在腎虛人腎臟이 허약한 사람에게는 더욱 좋으리.
라는 시구에 인삼의 효용, 인삼과 상반되는 약재, 인삼이 도움이 되는
체질에 관한 정보가 담겨 있다. 당나라 문인 단성식과 주요가 각각 ʻ아홉
12) 楊同桂(?~1886)의 瀋故 권3에 실린 ʻ王柘의 인삼시ʼ 참조. 왕자는 天津 사람으
로 일명 雪菴先生이며 咸豐 연간에 遼陽의 관리를 역임하다가 40세에 세상을
떠난 인물이다. 작품이 풍부했는데 지금은 閱莒草堂詩 4권만 전한다(이상은 심고의 해설).
13) 조선총독부전매국 편, 앞의 책, p.1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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줄기의 신선초는 정말 얻기 힘드니, 다섯 잎의 영험한 뿌리를 어찌 베풀
지 않는가[九莖仙草眞難得, 五葉靈根許惠無.]ʼ, ʻ叔子14)도 아니면서 헛되이
약을 가진 게 부끄러우니, 거듭 청컨대 伯言15)은 자세히 살펴주기를[慚非
叔子空持藥, 更請伯言審細看.]ʼ이라고 하여 인삼을 청하거나 인삼을 보내
는 소회를 고사를 통해 우회적으로 드러낸 것과는 성격이 사뭇 다르다.
요컨대, 청대에 배출된 인삼시는 그간 축적된 인삼에 관한 정보를 압축하
여 한눈에 보여준다는 특색을 띤다고 할 수 있다.
다음으로 한국의 인삼시를 인용하고 풀이했는데 그 분량이 중국의 인
삼시를 다루었을 때보다 대폭 축소되었다. 이마무라가 인용한 한국의 인
삼시는 大東韻府群玉에 실린 俞好仁(1445~1494)의 ʻ젊을 시절 일찍이 「
麗人贊」을 암송해, 신령한 싹이 음을 달가워함 알았네[少年曽誦麗人贊,
認得靈苖喜向陰.]ʼ, ʻ찬란한 관서의 자옥삼, 천리 밖 봉함을 뜯으니 그대 마
음 보이네[曄曄關西紫玉蔘, 開緘千里見君心.]ʼ16)라는 시구와, 江界府志
에 실린 李壽鳳(1710~?)의 「竹田六章」이다. 「죽전육장」은 江界府使 이수
봉이 당시에 인삼 最多 생산지였던 竹田嶺에서 人蔘貢納으로 고통 받는
백성들을 목도하고 지은 작품으로서 4언 12구17)의 시 6수로 이루어졌다.
ʻ세 사람은 활을 잡고, 네 사람은 창을 잡네. 저 자루를 맨 사람은, 엎어지
14) 晉의 장군으로 활약한 羊祜(221~278)를 가리킨다. 적장인 吳의 陸抗이 병이 들자
양호가 약을 보냈는데 육항이 양호의 성품을 믿고서 바로 약을 복용했다고
전한다.
15) 육항의 부친인 陸遜의 字이다. 본래 문맥상 양호에게 약을 받은 육항의 자인 幼
節을 써야 옳다.
16) 權文海, 大東韻府群玉 권8, pp.75-76(전자판 대동운부군옥). *이 본은 예천군청
에서 개설한 대동운부군옥 홈페이지에서 확인 가능하다. *이마무라는 대동운
부군옥의 두 면에 각각 소개된 유호인의 시구를 차례로 재인용했는데 유호인
의 문집을 확인하면 ʻ曄曄關西紫玉蔘, 開緘千里見君心. 少年曽誦麗人贊, 認得靈
苗喜向陰.ʼ이 하나의 시임을 알 수 있다. 俞好仁, 㵢谿集 권2, 「陽德縣監表侯
【沿漢】, 以人蔘數本見惠](한국문집총간 15, 106c).
17) 이마무라는 8언 6구로 나누어 분석했다. 이 시는 성해응의 문집에서 이수봉의 ʻ竹田詞ʼ로 소개하고 있다. 成海應, 硏經齋全集外集 권51, 「地理類・四郡考」(
한국문집총간 277, 413d-414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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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 넘어지기도[三人執矢, 四人執槍. 彼負槖者, 或顚或僵]ʼ(제1수 9-12구)
는 맹수가 도사린 숲속에서 백성들이 인삼 캐는 모습을 실감나게 묘사했
고, ʻ가파른 언덕에서 등덩굴 더위잡아도, 내 피로함을 몰라주네. 내 조세
만 생각할 뿐이니, 하물며 내 개인 일을 근심할까[懸崖攀藤, 莫知我疲. 念
我公稅, 況恤我私.]ʼ(제3수 9-12구)는 인삼을 구하려 절벽에 매달리는 백성
들과 조세로 바칠 인삼을 독촉하는 관리들을 선명하게 대조했다. 18세기
중반 蔘弊의 실태를 실감나게 보여주는 자료라 생각된다.
이마무라는 삼국에서 고려에 이르는 시기에 배출된 文籍 가운데 인삼
시문이 실린 책은 전하지 않는데다 조선 시대에 나온 인삼시도 무척 드물
다고 총평함으로써 한국의 인삼시 자료가 본래 빈약한 것으로 결론을 내
렸다.18) 그러나 한국문집총간의 문집 중에서 ʻ人蔘(人參)ʼ 혹은 ʻ蔘(參)ʼ에
관한 시를 추려보면, 安軸(1282~1348)의 「蔘歎【蔘貢多弊故云】」(謹齋
集)부터 卞榮奎(1826~1904)의 「石州太守贈蔘歌」(曉山集)까지 적지 않
은 작품이 발견된다. 인삼시를 한데 묶은 選集이 미비할 뿐, 개인 문집에
산재된 인삼시는 쉽게 찾을 수 있다.
이마무라의 인삼사에 정리된 인삼시는, 분석 대상의 범위를 동아시아
차원으로 넓힌 점과 編者의 학술적 주석이 부기된 점에서 높이 평가되지만,
「고려인삼찬」(「고려인인삼찬」)을 중국 작품으로 소개한 부분과 한국의 인
삼시를 상대적으로 너무 소략하게 다룬 부분은 미흡하게 다가온다.
2. 詩話書의 인삼시
중국의 작품을 편중하여 기술한 이마무라의 인삼사는 온전한 인삼시
선집이라고 할 수 없다. 그렇다면 예부터 詩文의 精髓라 생각한 작품을
골라 비평할 목적으로 엮은 詩話書에는 어떠한 인삼시가 수록되었던가?
또 인삼시의 어떠한 측면을 집중 조명했는가?
18) 조선총독부전매국 편, 앞의 책, p.161.
308 漢文古典硏究 第36輯
조선 중기 문인 魚叔權의 稗官雜記19)에는 조선의 외교 정황을 보여
주는 幽事를 비롯하여 눈여겨볼 만한 역대 문인들의 詩文・言行・逸話 등
이 수록되었다. 그중 ʻ「고려인인삼찬」이 본초에 실렸는데 ʻ세 가장귀 다
섯 잎은, 양에는 안 맞고 음에는 맞네.ʼ라는 말은 唐나라 이후로 시인들이
많이 썼다.ʼ20)라는 비평은, 우리나라 문인의 문장이 중국 문인의 작품에
차용된 일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여기에서 「고려인인삼찬」의 출처로
명기한 ʻ본초ʼ는 도홍경의 본초경집주이다. 즉, ʻ고구려 문인의 운문(「
고려인인삼찬」) -> 양나라 문인의 산문(본초경집주) -> 당나라 문인의
운문(당시) -> 조선 문인의 산문(패관잡기)ʼ으로 연결되는 도식은, 한・중
문인의 인삼 관련 문장이 상호 영향을 받으며 파생되었음을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본래 본초경집주에는 「고려인인삼찬」의 네 구가 모두 실렸지만,
어숙권은 앞 구절만 인용하고 ʻ당나라 이후로 시인들이 많이 썼다.ʼ라
평했다. 패관잡기에 더 이상의 기술이 없어 당나라 시인들이 「고려인
인삼찬」을 인용한 양상을 파악하기 어렵지만, 청나라 문인 오경욱의 역대
시화를 참조하면 그 대략이 짐작된다.
韓翃의 시, ʻ필시 인삼은 다섯 잎이 가지런하리.ʼ 呉旦生(오경욱)이 말한다.
ʻ속박물지에서 ʻ「고려인삼찬」에 <세 가장귀 다섯 잎은, 양에는 안 맞고 음
에는 맞네. 와서 나를 구하려거든, 가수에서 찾기를>이라 했다. 椵는 음이 賈
이다. 나뭇잎이 오동나무와 같이 대단히 커서 그늘이 넓게 생기는데 인삼이
19) 패관잡기는 大東野乘과 詩話叢林 속 불완전한 초록 상태의 본으로 연구
되다가 寒皐觀外史에 그 완본이 수록되었음이 밝혀졌다. 더 자세한 사항은 ʻ
이수인, 패관잡기 연구 시론 -한고관외사 본 패관잡기 완본의 발굴 보고
를 겸하여-」, 한문학논집 18, 근역한문학회, 2000ʼ 참조.
20) 魚叔權, 稗官雜記 권1, 金鑢, 寒皐觀外史 책1(미국 Harvard-Yenching Library
소장본). ʻ「高麗人人參贊」載於本草, 而三椏五葉背陽向陰之語, 自唐以來, 詩多
使之.【頭註: 一本詩字下有人字, 恐是.】ʼ *한고관외사 옌칭도서관 본은 1820
년 筆寫本이며 국립중앙도서관 홈페이지에서 확인 가능하다. *대동야승 속
패관잡기 본에는 「인삼찬」이 권2에 나온다.
韓・中 人蔘詩의 양상과 특징 309
그 그늘에서 많이 자란다.ʼ라고 했다. 段成式의 「求人參」 시에서 ʻ아홉 줄기의
신선초는 정말 얻기 힘드니, 다섯 잎의 영험한 뿌리를 어찌 베풀지 않는가.ʼ라
했고, 皮襲美(皮日休)의 「謝恵人參」 시에서 ʻ신령스런 풀로 장수하는 법은 道
家에서 나왔지만, 누가 드러내어 세 가장귀라고 기록했던가.ʼ라 했으며, 蘇東
坡(蘇軾)의 「次韻正輔」 시에서 ʻ누런 흙을 세밀히 패어 세 가장귀를 심네.ʼ라 했
다. 모두 讚辭로 쓰였다.【동파가 自注에서 말했다. ʻ正輔가 인삼을 나눠주어
돌아와 韶陽에 심었다. 보내온 편지에는 본래 䃁자가 쓰였는데 惠州에 책이
없어 이 글자가 나온 바를 보지 못해서 잠시 木변을 따르고 화답했다.ʼ】ʼ21)
오경욱은 당나라 문인 한굉의 「送客之潞府」에 쓰인 ʻ인삼ʼ과 ʻ다섯 잎
[五葉]ʼ의 연결 고리를 추적하다가 당・송 문인들이 인삼을 묘사할 때에 애
용한 ʻ세 가장귀[三椏]ʼ 혹은 ʻ다섯 잎ʼ은 모두 「고려인삼찬」에서 유래한 표
현이라고 잠정 결론지었다. 그리고 「고려인삼찬」의 시어에 영향을 받은
또 다른 당・송 작품으로 단성식의 「寄周繇求人參」, 피일휴의 「友人以人
參見惠, 因以詩謝之」, 소식의 「次韻正輔同遊白水山」 등을 제시했다. 인삼
을 ʻ세 가장귀ʼ, ʻ다섯 잎ʼ이라 한 데에 작자(한굉, 단성식, 피일휴, 소식)의
찬탄이 내재되어 있다고 한 오경욱의 평은 자못 타당하다. 지인을 통해
인삼을 구하려는 의지, 혹은 지인에게서 인삼을 받은 뒤의 감회가 詩題와
詩句를 통해 고스란히 드러나기 때문이다. 피일휴와 소식이 인삼을 대한
태도는 특히 주목할 만하다. 피일휴는 인삼 복용법을 고안해낸 쪽은 도가
이지만 인삼의 雅稱을 세상에 퍼뜨린 쪽은 문인이라는 입장을 표명함으
로써 애초 인삼의 ʻ문화적 향유층ʼ이 문인임을 못박았다. 소식은 매부인
程正輔가 나누어준 인삼을 손수 심거나, 매부가 기록한 ʻ三䃁ʼ는 출처가
모호한 단어이기에 ʻ三椏ʼ로 정정하여 화답시를 보내는 등, 인삼 문화를
21) 吳景旭, 歷代詩話 권49, 「庚集中之上・唐詩・人蔘」(전자판 사고전서). ʻ韓翃詩, ʻ應是人參五葉齊.ʼ 呉旦生曰: 續博物志, ʻ髙麗人參賛云, <三椏五葉, 背陽向隂.
欲來求我, 椵樹相尋.> 椵音賈. 木葉似桐甚大, 隂廣, 參多生其隂.ʼ 段成式「求人參」
詩, ʻ九莖仙草真難得, 五葉靈根許惠無.ʼ 皮襲美「謝恵人參」詩, ʻ神草延年出道家, 是
誰披露記三椏.ʼ 蘇東坡「次韻正輔」詩, ʻ細斸黄土栽三椏.ʼ 皆用賛語也.【坡自注云, ʻ
正輔分人參, 歸種韶陽. 來詩本用䃁字, 惠州無書, 不見此字所出, 故且從木奉和.ʼ】ʼ
310 漢文古典硏究 第36輯
적극 누리는 문인의 면모를 과시했다.
오경욱은 ʻ삼아ʼ나 ʻ오엽ʼ이라는 시어를 활용하여 인삼을 찬미한 당・송
문인의 작품을 비평하기에 앞서, 두 시어의 어원인 「고려인삼찬」(「고려인
인삼찬」)을 첫머리에 비중 있게 다루었다. 17세기 중후반 문인도 인삼시
와 관련하여 의견을 개진할 때 「고려인삼찬」을 가장 먼저 떠올렸던 것이
다. 사실, 이러한 경향은 19세기 문인에게까지 이어졌다. 李圭景
(1788~1856)은 자신의 시화집인 詩家點燈에 인삼을 소재로 한 시가 극
히 드문데 「高麗采蔘」(「고려인삼찬」을 달리 명명함) 시가 남아있다며 우
선적으로 소개했다. 뒤이어 거론한 시는 단성식의 「求人蔘」, 王士禎
(1634~1711)의 「御苑人蔘」(왕사정 전집에서 보지 못해 시제만 기록한다
고 밝힘), 한굉의 「送客之潞府」, 賈島22)의 「蓮峰歌」, 朱彝尊(1629~1709)의
「高麗蔘歌」 등이다.23) 단성식・한굉・가도와 같은 당나라 문인의 작품뿐만
아니라 주이존・왕사정과 같은 명말청초 문인의 작품도 예시에 포함시켰
다는 의의가 있다. 특히, 주이존의 「고려삼가」에는 ʻ듣자니 요양에선 흙
나무로 불가마를 만들어, 우선 열탕으로 화로에 찐다는데, 감자에서 즙을
빼내 소반에 올린 것과 뭐가 다르랴? 이 나라 사람들은 햇볕에 말리고 바
람에 말려, 원기가 줄지 않고 형신이 완전하네[聞諸遼陽土木榾地, 先以熱
22) 왕사정의 폭서정집과 이를 수용한 이규경의 시가점등에는 작자가 ʻ溫歧(溫
庭筠)ʼ라 되어 있지만 시의 내용에 의거하여 ʻ가도ʼ로 정정했다.
23) 李圭景, 詩家點燈, 2권 35칙 「人葠詩絶罕」((修正增補)韓國詩話叢編, 태학사,
1996). ʻ人葠, 本草稱皺面還丹. 方密山曰: ʻ蔘之如人形者力大, 白者切之, 須有金
井玉欄.ʼ 以人葠入詩者絕罕. 「高麗采蔘」詩: ʻ三椏五葉, 背陽向陰. 欲來求我, 椵樹
相尋.ʼ 唐段成式「求人蔘」詩: ʻ少賦令才猶強作, 衆醫多識不能呼. 九莖仙草真難得,
五葉靈根許惠無.ʼ 王漁洋士禛曰: ʻ康熙戊午, 予直內庭, 曾應制賦「御苑人蔘」詩.
【而未見全集, 姑略之.】 唐人詩惟韓翃云: <上黨人蔘五葉齊.> 溫歧云: <松刺
流空石差齒, 烟香風軟人蔘蕊.>ʼ 清朱竹垞彝尊「高麗蔘歌」: ʻ晉上黨, 趙邯鄲, 遠以
新羅百濟根結蟠. 我昔於高麗圖經曾覽觀, 胥餘啓宇後, 朝鮮世世稱外藩. 森羅
三千七百島, 四至八到提封寬. 域中生蔘類羊魚, 其上椴樹清陰攢. 春州產尤嘉, 堅
白少垢瘢. 聞諸遼陽土木搰地, 先以熱湯野爐煮, 何異都蔗去汁方登盤. 此邦之人日
炙風戾乾, 元氣不損形神完. 珍藥豈易得, 恆愁致者難.ʼ 予僅采數篇, 便自詫爲吉光
片羽也.ʼ
韓・中 人蔘詩의 양상과 특징 311
湯野爐煮, 何異都蔗去汁方登盤? 此邦之人日炙風戾乾, 元氣不損形神完.]ʼ
처럼 당시 조금씩 차이 나던 동아시아의 인삼 문화를 짐작케 하는 구절이
발견되어 주목된다.
19세기 중반에 이르러서는 家蔘의 성행 여파로 인삼 값이 1근에 數緡
을 넘지 않았다. 이규경은 이것이 ʻ모싯대[薺苨]ʼ나 ʻ도라지[桔梗]ʼ와 다를
바 없는 가격이라고 지적했다.24) 이렇듯 가삼이 성행하게 된 것은 山蔘의
공급은 한정되어 있는 반면 수요는 급속도로 늘어났기 때문이다. 인삼의
수요・공급 간의 불균형이 심해지면서 1차 공급자인 백성들은 가혹한 노
동에 시달려야 했다. 그러나 인삼사 한시 조에 인삼의 폐단을 고발한
이수봉의 「죽전육장」 전문이 인용된 것과 같은 경우를 시가점등이나
역대시화와 같은 시화서에서는 찾아보기 힘들다.25)
Ⅲ. 한・중 인삼시의 양상
현존하는 문헌 가운데 인삼시 선집의 성격을 띠는 자료가 전무하므로
우선 인삼의 전반적 사항을 기술한 ʻ전문서ʼ와 역대 시문을 종합해놓은
ʻ시화서ʼ를 통해 역대 문인이 지은 인삼시의 일면을 살폈다. 전문서와
시화서에는 각종 한중 인삼시가 소개되었으나 한국 인삼시가 매우 소략한
편이다. 따라서 개인 문집의 한국 인삼시를 포함시켜 논의할 필요가 있다.
인삼시는 대체로 ① 지인에게 받은 인삼의 효능을 찬미한 시, ② 인삼으로
24) 李圭景, 앞의 책. ʻ人蔘, 以我東江界廢四郡山生蔘, 爲天下第一品, 而今家種極蕃,
一斤不過值數緡銅錢, 與薺苨桔梗等.ʼ
25) 이규경은 인삼에 관한 고금의 전술, 인삼 재배법에 관한 기록 등을 모아 家葠
牒을 편찬했는데 지금 전하지 않는다. 따라서 가삼첩에는 백성의 애환을 담
은 인삼시가 채택되었는지 알 수 없다. 李圭景, 五洲衍文長箋散稿, 「人事篇・
技藝類・醫藥[0801]人葠詩文辨證說」(고전원문). ʻ不佞嘗有家葠牒, 略收古今傳
述, 臚列栽種之法.ʼ *이마무라는 원문의 구두를 달리 떼어 이규경의 저술서가
家葠牒略이라 했다.(조선총독부전매국 편, 앞의 책, p.314)
312 漢文古典硏究 第36輯
인해 생긴 폐단을 경계한 시, ③ 인삼의 제반 정보를 비교적 풍부하게
담은 시로 나뉜다. ①과 ②는 인삼 복용자와 채취자의 극단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③은 인삼史를 수정・보충할 만한 객관적인 자료를 제시해준다.
개인문집에 산재한 인삼시도 이 분류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인삼사,
시화서, 개인문집 등에 존재하는 인삼시 가운데 이러한 면모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작품을 선정하여 구체적으로 살펴본다.
1. 인삼에 대한 찬미와 경계
윤증(1629~1714)은 李舜岳이 麟蹄에서 보내온 生蔘 서너 뿌리를 화분
에 옮겨 심었다. 그리고 새싹이 돋자 기쁜 마음을 감추지 못한 채 다음의
시를 읊었다.
亭亭玉立小牕間작은 창 사이에 뾰족뾰족 돋아난 삼
來自寒溪萬疊山한계령의 첩첩 산을 넘어서 여기 왔지.
不是閑人要玩物일없이 완물하려 하는 것이 아니라
且將生意對衰顔시든 이 몸 너의 생기 대하려 함이지.26)
인삼의 화분 재배가 완상을 위한 화훼 관리와는 목적이 전혀 다름을 명
기한 작품이다. 윤증은 이순악에게 받은 인삼을 바로 복용하지 않고 화분
에 심음으로써 약효를 더 오래 취하고자 했다. 강원도는 ʻ며칠 양식을 지
니고 산에 들어가면 한 근을 캘 수 있다.ʼ27)라는 발언이 공식 석상에서 언
급될 만큼 대표적인 인삼 생산지였는데 1680년부터 1687년 한성부판관으
로 체직하기 전까지 인제현감을 역임한 이순악은 이러한 강원도 인삼을
26) 윤증, 명재유고 권3, 「李兄汝詢【舜岳】自麟蹄寄生蔘數本, 種之盆中, 新芽挺
生, 喜而詠之. 丁卯」(한국문집번역총서).
27) 인조실록, 인조 2년(1624) 11월 3일 기사, 「최명길・서성 등이 대동법 운영에
대해 논의하다」(조선왕조실록, 한국고전번역원).
韓・中 人蔘詩의 양상과 특징 313
누구보다 쉽게 접할 수 있었다. 윤증이 인삼시를 지은 시기를 정묘년
(1687)으로 밝혔으니 이순악이 인제를 떠나기 직전 윤증에게 인삼을 보낸
것으로 추정된다.
질 좋은 인삼을 수년간 지척에서 관장한 이순악 외에 조선 팔도의 貢納
을 받아보던 숙종 또한 윤증에게 몇 차례 인삼을 하사했다. ʻ약이 만약 증
상에 맞지 않으면, 인삼과 백출 되려 해가 되는 것[藥苟不對病, 害反由參
朮]ʼ28)이라고 인삼의 효능을 맹신하는 태도를 삼갔지만 唐瘧 등의 질병을
심하게 앓아 기력이 급격히 쇠잔해진 그에게 윗사람들이 보내온 인삼은
절실히 다가왔을 터였다.
병든 신하를 위해 임금이 인삼을 하사한 사례는 종종 보인다. 정조는
蔡濟恭(1720~1799)에게 인삼을 하사하면서 특별히 ʻ蔘料는 결코 함부로
써서는 안 되니 반드시 外氣가 모두 풀리고, 신열이 모두 내리고, 虛汗이
난 뒤에야 쓸 수 있다. 모쪼록 의원과 신중히 논의하도록 하고, 또한 근자
에 삼을 쓴 사람의 병증을 탐문하여 참작해서 비교하는 것이 지극히 옳
다. 영남 사람의 약은 병세를 보아서 쓰되 또한 경솔하게 시험하기 어렵
다. 멀리서 헤아릴 수 없지만 食治가 제일이니, 땀을 내고 열을 내리는 방
도를 십분 마음을 써서 하되 약은 절대 함부로 쓰지 말고 십분 신중히 하
라는 뜻을 전하라. 그간의 동정을 기록해 보내는 것이 어떻겠는가.ʼ29)라고
당부했다. 인삼의 무분별한 복용을 엄금하는 동시에 신하를 향한 깊은 우
려가 담겨 있는 어찰이다. 문집을 살펴보면, 채제공은 임금에게서 수차례
인삼을 하사받았다. 그중 특별한 은전을 받고는 다음의 시를 남겼다.
新羅異草蘊天香신령한 신라 약초 천향 속에 감싸여
寶氣深深卧內藏상서 서린 대내에 깊이 들어 있었네.
臣死臣生何足慮신이 죽고 사는 걸 염려할 게 있으랴만
一包翻荷萬金良한 봉지에 만금 값 귀한 것을 받았노라.30)
28) 윤증, 앞의 책 권4, 「次道以冒雨遊山韻」.
29) 채제공, 번암집 권수 하, 「遣閣吏問病賜札」(한국문집번역총서).
314 漢文古典硏究 第36輯
한치윤(1765~1814)의 해동역사에는 인삼의 등급이 上黨(지금의 산서
성 동남부), 백제, 고려 순으로 매겨져있다. 신라 인삼은 상당 인삼만 못하
다고 했다. 신라, 백제, 고려 인삼의 순위를 명확히 가르지 않았지만 상당
삼 외에는 특등급으로 취급하지 않은 것이 분명하다. 다만, ʻ신라삼은 옅
은 황색이며 맛이 약한데, 사람 모습에 가까운 것이 신기한 효험이 있으
며, 닭다리[鷄腿]와 같이 생긴 것이 효험이 크다.ʼ31)라고 고증하여 일부 신
라삼의 영험한 효능을 부각시켰다. 앞서 인용한 시의 시제에는, 인삼이 귀
해져 外局에는 진품이 없고 內局에도 하품만 남은 상황에서 정조가 大內
에 따로 보관하던 ʻ특별한 인삼ʼ을 채제공에게 전달하고 채제공이 이를 ʻ
신령한 신라 약초ʼ로 받든 정황이 자세하다. 여기에서 신령한 신라 약초란
한치윤이 영험하다고 별도로 분류한 신라삼으로 보인다.
재배 방식의 변화로 인해 인삼의 보급화가 진행될수록32) 효험이 탁월
한 진품은 오히려 찾기 힘들어졌다. 따라서 지인이 보낸 ʻ특별ʼ하고 ʻ신령ʼ
스런 인삼은 여전히 최고급 선사품으로 간주되었다. 인삼을 받고 감흥이
일어서, 혹은 사례하기 위해 읊은 시는 대체로 어느 지역의 삼인지 밝힌
후 지인과의 도타운 관계를 부각하는 쪽으로 내용이 기운다.
衰病年來頗不堪몇 년 사이 쇠병을 몹시 감당 못했더니
一包靈藥自湖南한 꾸러미 영약을 호남에서 보내왔네.
方多異製分生熟조제 다른 처방 많아 생숙이 구분되고
味徧新嘗雜苦甘새로 맛본 여러 맛엔 쓴맛 단맛 섞였네.
我謗如今非薏苡지금 나에 대한 비방은 율무가 아니고
君材從少是楩楠그대 재주는 젊어서부터 편목과 남목이라.
30) 채제공, 번암집 권2, 「上爲慮賤臣久病, 使內閣吏賫傳別品蔘一封, 諭曰: ʻ比來
蔘踊, 外局絶無眞品, 雖內局所儲, 皆不免下乘. 特少大內曾所別儲者, 爲卿送之,
須煎服以收速瘳之效也.ʼ 臣披衾拜稽, 感淚千行, 異恩不可不傳示後昆, 聊記之」
(한국문집번역총서). 총 3수로 인용한 시는 그중 첫 번째 시이다. 두 번째와
세 번째 시는 군왕의 은혜에 초점을 맞추었기에 생략한다.
31) 한치윤, 해동역사 권26, 「物産志・草類・人葠」(한국문집번역총서).
32) 주석 3번 참조.
韓・中 人蔘詩의 양상과 특징 315
佺期正叔千秋意왕전기와 정정숙이 천추에 품은 뜻을
後日何人屬第三훗날 누가 세 번째로 뒤이을까.33)
위 작품은 조긍섭(1873~1933)이 인삼을 보내준 조병태에게 사례한 시
이다. 수련과 함련에는 호남 인삼을 받고서 처방에 따라 조제하여 복용한
경위를 읊었고, 경련과 미련에는 작자 조긍섭과 문하생 조병태의 교분을
읊었다. 이중 경련과 미련은 전체가 상징적인 시어(고사)로 이루어져 해석
에 주의를 요한다. 제5구의 ʻ율무ʼ는 ʻ뇌물ʼ34)을, 제6구의 ʻ편목과 남목ʼ은 ʻ
좋은 재목ʼ35)을 의미한다. 현재 자신을 에워싼 비방이 뇌물 수수와는 무관
하며 문하생 조병태가 본래 특출한 인재임을 재차 강조하여 조병태의 인
삼이 부정한 청탁품으로 전락하지 않도록 조치했다. 나아가 제7구와 제8
구에서 조병태가 자신에게 인삼을 선사한 일화를 王佺期가 정정숙(程伊
川)에게 약을 보낸 고사36)와 접목함으로써 조병태의 인삼을 ʻ지극한 정성
[至誠]ʼ으로 승화시켰다.
지인에게서 인삼을 받은 사람은 영험한 약재와 두터운 마음을 동시에
찬미했다. 이러한 인삼시에서는 인삼의 부정적인 측면을 전혀 찾아볼 수
33) 조긍섭, 암서집 권5, 「曺安卿【秉泰】遠惠人蔘五物之貺, 賦此爲謝]」(한국문
집번역총서). 문맥에 맞게 번역을 다소 수정했다.
34) 漢나라 馬援이 交趾에서 율무[薏苡]라는 약초를 가져오자 간신들이 고운 구슬
[明珠]과 무늬 있는 무소뿔[文犀]이라는 뇌물을 받아 왔다고 모함한 고사에서
유래되었다.
35) 唐나라 陸龜蒙은 「경구에서 벗과 작별인사 하며[京口與友生話別]」에서 ʻ집을 지
을 땐 반드시 편남을 목재로 하네[成廈必楩柟]ʼ라고 했다.
36) 한국고전번역원의 번역본에 ʻ왕전기ʼ가 아닌 ʻ심전기ʼ라 되어 있는 것은 명백한
오류이다. 정이천은 왕전기에게서 약을 받고 「謝王佺期寄藥」이라는 시를 써는
데 전문은 다음과 같다. ʻ至誠通聖藥通神, 遠寄衰翁濟病身. 我亦有丹君信否, 用
時還解壽斯民.ʼ 본 고사와 관련하여 송자대전의 ʻ伊川이 왕전기가 약을 보낸
데 대해 사례하며 하나의 정성 誠자로써 백성을 오래 살게 하는 선약[丹]이 된
다고 했고, 涪州로 귀양 갈 때 사나운 파도에서도 마음에 誠敬을 보존해서 마침
내 기력을 얻어 七分의 큰 가르침을 이루었다고 한다.ʼ라는 설명이 긴요하다.
송자대전 권2, 「次贈元進士【次山】」(한국문집총간 108, 127b-127d).
316 漢文古典硏究 第36輯
없다. 그런데 앞서 정조가 채제공에게 인삼을 함부로 복용하지 말 것을
신신당부했듯, 인삼의 誤濫用을 심각한 사회적 문제로 대두시켜 경계한
시가 인삼을 찬미한 시 못지않게 발견된다.
인삼은 金井玉蘭(本草綱目), 玉精(吳晋本草), 人身(事物異名), 人
御(神農本草經), 皺面還丹(本草綱目, 淸異錄), 血參(名醫別錄), 活
人草(述異記)라고도 불렸다. 순조 중엽부터는 仁蔘으로도 널리 쓰였
다.37) 인삼은 명칭뿐만 아니라 실제 종류도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이러한
인삼을 온전히 알고 복용하는 일은 쉽지 않았던 듯싶다. 19세기 무렵 조
선에서는 효능이 월등한 白蔘만을 복용하는데 청에서는 紅蔘을 복용하고
있는 사실에 대해 강한 의구심을 품은 문인도 있었다.38)
인삼이 동아시아 권역에 널리 유통되면서 인삼의 오용・남용 문제가 공
식적으로 불거졌다. 청나라 고종(弘曆, 건륭제)은 ʻ본초강목에서 ʻ인삼
은 地氣의 정수를 받은 지 오래되면 뿌리가 사람 형체와 같다.ʼ라고 했는
데 이 인삼이 똑같다. 또 세상 사람들은 인삼을 귀한 물건으로 여기니 몸
을 보양할 수 있다. 그러나 잘못 복용하여 화를 초래한 경우도 적지 않으
므로 언급하지 않는다.ʼ39)라고 단언한 후에 아래의 시를 지었다.
五葉三椏長白珍다섯 잎 세 가장귀는 장백산의 보배
年深形肖竟何因세월 흐를수록 사람 닮아감은 대체 왜인가.
太原土貢今焉是太原의 조공은 지금 어찌 이러한지
上黨沙生寧有眞上黨의 沙蔘이 정녕 참되랴.
37) 이유원, 임하필기 권29, 「春明逸史・仁蔘之稱」(한국문집번역총서). ʻ애당초
인삼의 ʻ仁ʼ은 사람 ʻ人ʼ 자였다. 순조 중엽에 內醫院의 탕제 약방문에 대하여 仁
자로 고치도록 명하여 그대로 定規가 되었고, 公私 문서에 모두 이 글자를 쓰게
되었다.ʼ
38) 徐慶淳, 夢經堂日史編 권3, 十二月 十二日【庚子】(국학원전, 연행록선집11). ʻ大抵紅蔘藥力, 少遜於白蔘, 故弊邦專用白蔘, 而中國之捨白取紅, 未知其意.ʼ
39) 清高宗 弘曆 撰, 蔣溥等 編, 御製詩三集 권38, 「古今體一百四十三首・詠人形薓
六韻」(전자판 사고전서). ʻ本草, ʻ薓, 受地氣之精, 年久者, 根如人形.ʼ 此薓正似
之. 又世人以薓爲貴物, 能滋補, 然錯用致禍者, 亦復不少, 故未及之.ʼ
韓・中 人蔘詩의 양상과 특징 317
具體㡬曾五官具형체가 五官을 갖춘 적 있었나
陳筐徒訝四支陳광주리마다 四肢가 늘어져 괴이쩍네.
雖縁滋補稱延命보양하여 목숨을 잇는다고 말하지만
頗見輕投致䘮身쉬이 투약하여 죽은 경우를 꽤 봤네.
大約佐饔圖利益얼추 요리에 곁들여 이로움을 바라며
遂忘剜肉值艱屯결국 살이 깎여 고생할 일을 잊도다.
草莖誰悟文殊語누가 풀줄기로 문수보살 말을 깨달을까
能活人還能殺人사람을 살릴 수도 되려 죽일 수도 있다네.
1, 2, 5, 6구는 사람 형체와 비슷한 백두산의 인삼을 묘사했다. 본초강
목에서 말한, 지기의 정수를 받은 지 오래된 인삼을 가리킨다. 3구는 당
시 공물로 바쳐지던 태원의 토산물을 비판했다. 태원은 전국시대 趙나라
의 도읍지로 산서성 汾河江 상류에 위치한 도시이다. 주목할 점은 앞서
한치윤이 최고급 인삼의 생산지로 꼽은 상당과 같은 관할 구역이었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본구는 태원의 조공으로 假蔘이 진상되던 세태를 비판
한 것으로 보인다. 4구의 ʻ상당의 사삼이 정녕 참되랴.ʼ에서 ʻ사삼ʼ은 모래
에서도 잘 자라며 인삼과 비슷한 효능을 지녔다는 의미를 내포한 ʻ더덕ʼ의
별칭이다. 3구에서 말한 불량한 조공, 즉 가짜 인삼은 바로 더덕을 가리킨
다고 할 수 있다.
9구는 조제법을 정확히 지키지 않고 대강 음식과 함께 먹으면서 인삼
의 효능을 바라는 어리석음을 풍자했으며, 10구는 이렇듯 인삼의 잘못된
복용이 오히려 건강을 해치는 결과를 초래할 것임을 암시했다. ʻ우선 눈앞
의 부스럼은 고쳤지만, 도리어 심장의 살을 도려내네[醫得眼前瘡, 剜却心
頭肉.]ʼ(聶夷中, 「傷田家」)라는 시구는 9, 10구에서 말하고자 하는 바와 연
관이 닿아있다. 나머지 7, 8, 11, 12구는 인삼을 오용하면 최악의 경우 목
숨을 잃을 수 있다는 사실을 우회 없이 강조했다. 특히, 마지막 두 구에
문수보살과 선재동자의 일화40)를 인용함으로써 인삼을 전문 지식 없이
40) 문수보살이 선재동자에게 약이 아닌 풀을 캐어오라고 하자 선재동자가 산의 풀은
모두 약이 된다고 답했는데, 문수보살이 다시 약이 되는 풀을 캐어오라고 하자
318 漢文古典硏究 第36輯
섭취하려는 이들에게 강한 메시지를 던졌다.
인삼에 대한 경계는 복용법의 타당 여부를 헤아리는 데 그치지 않았다.
「關東別曲」과 「竹溪別曲」의 저자로 알려진 고려 후기 문인 安軸(1287~1348)
은 일찍이 인삼 조공의 폐단과 관련하여 통렬한 일침을 가했다. 그의 「蔘歎」
시 전문은 다음과 같다.
神農著書論草名신농씨가 책을 지어 풀이름 논하기를
草中羅蔘藥最精풀 중에 나삼의 약효가 가장 영험하다 하였지.
一根三枝開五葉한 뿌리 세 가지에 다섯 잎이 피고
理人神效難具評사람을 치료하는 신묘한 효능 다 평하기 어렵네.
年年貢獻聖天子해마다 천자께 공물을 바치느라
藥局老醫皆嘆驚약국의 늙은 의원 모두 탄식하고 놀라는구나.
船車商沽競求買배와 수레로 상인들 다투어 사니
轉賣遠方價不輕먼 지방에 내다 팔면 값이 비싸서라네.
從此官家利其利이로부터 관리들이 그 이익을 이롭게 여겨
歲收編民有期程해마다 기한을 정해 백성에게 거두어 가네.
物之貴者本自貴이 물건 귀한 것은 본래부터 귀해
非如凡草賤生成날 때부터 천한 여느 풀과는 다르다네.
方民採掘遍山谷백성들 채취하러 온 골짝 돌아다니지만
千搜萬索得一莖천만번을 찾아야 한 뿌리를 얻는다네.
何曾計日足銖兩언제나 기한에 맞게 근수를 채우나
農衣弊盡披蓁荊가시덤불 헤치느라 농부의 옷 다 해졌네.
是時秋禾臥風雨가을 벼가 비바람에 누운 이때에
畏吏督納忘私營독촉하는 아전이 두려워 제 농사일을 잊었네.
歸來對妻苦悲泣돌아와 아내 마주하고 몹시도 슬피 울면서
已有棄土流亡情이미 고향 버리고 떠돌아다닐 마음먹었네.
乾坤生物賦藥性천지가 사물을 내고 약의 성질 부여한 것은
本以至仁濟群生본디 지극한 인으로 군생을 구제하려는 것인데.
生民一病出於藥백성의 온갖 괴로움이 이 약초에서 나오니
선재동자가 아무 풀이나 집어 주었고 이를 받아든 문수보살이 ʻ이 약은 사람을
죽일 수도 사람을 살릴 수도 있다ʼ고 말한 일화가 전한다.
韓・中 人蔘詩의 양상과 특징 319
理藥之藥其誰行이 약초를 다스리는 약은 누가 만들려나.
有能移根種遠方뿌리를 옮겨 먼 지방에 심을 수 있다면
括根無種非所爭뿌리 뽑고 종자 없애기는 다툴 일 아니네.
吾民寧作至愚民우리 백성 차라리 어리석은 백성이 될지라도
不須益智多聰明지혜와 총명이 늘어나기를 바라지 않으리라.41)
아직 家蔘이 전파되지 않아 깊숙한 산에서 어렵사리 구해야 했던 山蔘은
천자에게 바쳐야 하는 공물이자(5, 6구), 상인에게 높은 이윤을 창출하는
상품이자(7, 8구), 관리에게 각광 받는 자산이었다(9, 10구). 조정과 관리,
상인의 인삼 독촉이 매년 뒤따라 백성들은 농사일을 잊고 고향을 버릴
만큼의 궁지에 몰렸다(17-20구). 안축은 사람을 살리는 명약이 오히려
사람을 죽이는 독약이 되었음을 한탄했다(21-24구).
조선 시대에도 貢蔘에 뒤따르는 폐단이 끊임없이 상기되었다. 蔘政에
대한 공적인 논의로 조선왕조실록의 ʻ숙종 19년(1693) 3월 17일, 춘천 부사
이현석이 춘천부의 폐해에 대해 상소하다ʼ, ʻ정조 4년(1780) 8월 29일, 내
국에 바치는 貢蔘의 수량을 감하라고 명하였다ʼ, ʻ순조 3년(1803) 2월 9일,
강계 부사 유사모가 백성들이 蔘政의 고통이 크므로 卜定을 낮추도록 청
하다ʼ 등의 기사가 참조되며, 사적인 논의로는 정약용의 글42)이 비교적 상
세하다.
이영보(1687~1747)는 ʻ관동의 조공품 세 가장귀 풀, 청동전으로 변한 지
오래됐네. 삼은 귀하고 돈은 많아 백성들 급해지니, 옛날엔 산에서 채집했
고 지금은 밭에서 나오네. 어떻게 하면 곡식처럼 밭 갈고 씨 뿌릴 수 있을
까.ʼ43)라는 시를 남겼다. 춘천 부사 이현석은 ʻ인삼의 품귀 현상이 날로 심
해져, 인삼 1냥은 동전 12냥으로 환산되는데, 本府에서 인삼값으로 민간
41) 안축, 근재집 권1, 「蔘歎【蔘貢多弊故云】」(한국문집번역총서).
42) 丁若鏞, 與猶堂全書 第五集政法集第二十六卷, 「牧民心書 ・ 東南貢蔘之弊, 歲
加月增, 盡心稽察, 毋至重斂」(한국문집총간 285, 561a~561c).
43) 李英輔, 東溪遺稿 권3, 「蔘貢」(한국문집총간 68, 399d). ʻ關東貢獻三稏草, 久
矣變作靑銅錢. 蔘貴錢多民轉急, 昔採於山今出田, 安得耕種如粟然.ʼ
320 漢文古典硏究 第36輯
에서 거둬들이는 것이 1천 1백 20냥 이상에 이릅니다.ʼ라고 상소한 바 있
다. 강원도 인삼의 값어치, 조정에서 요구하는 수량을 맞추지 못해 山蔘이
家蔘으로 대체된 경위 등을 읊은 이영보의 인삼시는 이현석이 지적한 문
제를 함축적으로 보여준다.44)
2. 인삼 문화에 대한 Monograph
앞서 인삼 조공의 폐단에 대해 정약용이 비교적 상세한 글을 남겼음을
밝혔는데 그밖에 인삼 자체, 혹은 인삼에 얽힌 문화를 종합적으로 보여주
는 운문 작품들도 눈에 띈다. 蔘亭(五葉亭)에서 인삼을 재배한 체험을 기
반으로 지은 정약용의 「五葉亭歌」가 대표적이다. ʻ삿갓만한 정자에 오엽
이라 편액을 했으니, 백아곡의 입구에다 산 옆구리에 자리했네.ʼ(1, 2구) ʻ
세 가장귀 다섯 잎새는 본디 신선의 약초라, 반드시 천만첩의 깊은 산중
에 나는 거라오.ʼ(3, 4구)는 인삼의 본래 산출지와 그곳에 자리한 자신의
정자를 묘사했고, ʻ그런데 지금은 곳곳의 포전에 이것을 심어, 무밭 겨자
밭과 두둑이 서로 잇닿아서.ʼ(9, 10구) ʻ개성의 크나큰 밭 삼백 이랑의 수확
으로, 해마다 연경에 수출함이 영구한 업이 되었네.ʼ(11, 12구) ʻ가꾸는 자
는 농부요 파는 자는 장사꾼이라, 사류에 못 끼는 걸 겁낼 겨를이 어디에
있나.ʼ(21, 22구)는 개성 인삼의 상품화와 士族의 위세를 넘어선 인삼 상인
의 致富를 노래했다. ʻ떡갈 잎과 검은 흙을 손수 체질도 하고, 삼대의 얇은
인삼막을 허리에 끼기도 하네.ʼ(23, 24구) ʻ일년 된 삼 뿌리는 잎이 겨우 터
나오고, 삼년 된 이삭에선 비로소 꽃이 피는데.ʼ(25, 26구) ʻ규벽처럼 보배
롭게 갓난이같이 보호해라, 뜨거운 볕 사나운 비가 모두 금물이로세.ʼ(27,
28구)는 인삼을 직접 재배하여 얻은 정보를 여과 없이 적었다.45) 이처럼
44) 비슷한 사례로 이진상(1818~1886)의 시도 참조한다. 李震相, 寒洲集 권1, 「江
陵界中【庚子○時仲父宰江陵】」(한국문집총간 317, 035a). ʻ荒荒草樹滿良畬,
十里行時見一家. 午竈堪嗟蒸橡實, 春山何事産蔘芽【郡有蔘貢爲大瘼】.ʼ
45) 정약용, 다산시문집 권6, 「五葉亭歌」(한국문집번역총서) ʻ一笠之亭扁五葉,
韓・中 人蔘詩의 양상과 특징 321
「오엽정가」는 인삼에 관한 객관적인 정보-인삼의 생태, 가삼의 상업적 가
치, 인삼 재배 방법 등에 두루 초점을 맞춘 작품으로서 19세기 전반기까
지 축적된 한국 인삼 정보의 寶庫라 할 수 있다.
청나라 문인 趙翼(1727~1814)은 五言古詩體 인삼시 自序에서 당시 인
삼과 얽힌 문제를 매우 세밀히 다루었다. 그가 주목한 점은 한없이 치솟
은 인삼 값이다. 시를 지을 당시(1796년) 시장에서 파는 인삼 1냥은 백금
300냥으로 환산되었는데 이러한 고액을 주고도 좋은 상품을 얻기 힘들었
다. 고려와 인삼 무역을 하던 淸初에 인삼 정가가 10냥(1근)이었던 사실을
감안하면 가격이 지나치게 상승한 셈이다. 조익은 고려 蔘商이 인삼 수요
가 적은 명나라 사람에게는 10% 할인한 가격으로 판매한 일, 청나라가 중
원을 온전히 장악하면서 인삼을 구매하려는 사람이 늘어나 인삼 값이 급
등한 일 등 역사서에 기재된 사실을 언급하는 한편, ʻ1냥의 황삼이 5천냥
이네.ʼ 혹은 ʻ금 10냥으로 1냥을 사네.ʼ라는 查悔餘(査愼行, 1650~1727)의
시구를 근거로 시대별 인삼 값을 고증했다.46) 본 詩序는 시를 史料로 활
용한 일례로도 주목할 만하다.
1711년(강희 50)까지만 해도 인삼의 가격은 그리 높지 않았다. 1750년
(건륭 15)에는 백금 1냥 6전으로 인삼 1냥을 사게 되었다. 1763년(건륭 28)
에 이르러 좋은 품질의 인삼은 32냥을 주고서야 구입할 수 있었고, 약간
낮은 품질의 인삼이라도 25냥을 주어야 했다.47) 백금 1냥 6전, 32냥, 25냥
白鴉谷口當山脅. 三椏五葉本仙草, 生必深山千萬疊. (중략) 今人處處圃種之, 葑
菁菘芥畦相接. 中京大田三百頃, 歲輸燕鋪作永業. (중략) 圃者爲農販者商, 不齒
士類奚暇怯. 槲葉黲土手自篩, 麻稭薄棚腰自挾. 一年之根葉纔舒, 三年之苗花始
燁. 寶如圭璧護如嬰, 烈陽暴雨皆所慴. (후략)ʼ
46) 趙翼, 甌北集 권38, 「(丙辰)人參詩」(전자판 사고전서). ʻ偉兒久病, 需用參劑, 市
價甚貴, 白金三百兩, 易一兩, 尙不得佳者. 曩閱國史, 我朝初以參貿高麗, 定價十
兩一斤, 麗人詭稱明朝不售, 以九折給價, 而我朝捕獲偷掘參者, 皆明人, 以是知麗
人之詐, 起兵征服之. 迨定鼎中原, 售者多, 其價稍貴. 然考查悔餘壬辰甲午兩歲,
俱有謝揆愷功惠參詩, 一云ʻ一兩黃參直五千ʼ, 一云ʻ十金易一兩ʼ, 皆康熙五十年後
事也, 其時參價不過如此.ʼ
47) 趙翼, 앞의 책. ʻ乾隆十五年, 余以五經應京兆試, 恐精力不支, 以白金一兩六錢易
322 漢文古典硏究 第36輯
등은 모두 조익이 스스로 인삼을 구입하면서 알게 된 市價이다. 실제 체
험에서 우러나온 핍진한 기록이라 할 수 있다.
앞서 조익은 1796년 현재 인삼 1냥의 시가가 백금 300냥이라고 밝혔다.
1763년에 32냥이었던 것과 비교하면 불과 30년 사이 10배가량 오른 것이
다. 인삼 값이 최고로 오른 시점에서 조익이 읊은 시를 전문 인용한다.
貧家患富病가난한 집안 온갖 병에 걸려
用藥需葠劑약을 쓰매 인삼 처방 구하네.
吾兒抱沉疴내 아이 묵은 병 품고 있어
藉補丹田氣단전의 기운을 보충해야지.
其如價過昻지나치게 오른 값을 어떡할까
刀圭購不易선약을 사기 쉽지 않도다.
此物瑤光星이 식물은 요광성처럼
散華凝入地흩뿌려져 땅속에 엉겨있네.
三椏五其葉세 가장귀 다섯 잎
獨與凡卉異홀로 평범한 화훼와 다르구나.
結子蓮米紅씨앗은 蓮米 같이 붉다가
分陰椵樹翠순식간에 椵樹처럼 푸르러지네.
年深根成形세월 갈수록 뿌리가 형체 이루어
肢體或粗備지체가 대략 갖추어지기도.
土中兒啼聲흙속의 아이 울음소리에
往往驚夜睡이따금 놀라 밤잠 설치네.
其始岀上黨처음 上黨에서 생산되어
僅等苓術類거의 苓術류와 같아졌네.
地運有轉移땅 기운이 옮겨가니
乃爲我朝瑞바로 우리 청조 상서롭다.
高高長白山높고 높은 장백산에
鬱蟠王氣萃무성히 서린 王氣가 모였네.
靈苗茁其間그 사이 돋은 신령한 새싹
參一錢. 二十八年, 余病服參, 高者三十二換, 次亦僅二十五換, 時已苦其難買, 以
今較之更增十餘倍矣. 市値愈貴, 購之益艱, 詩以誌嘅.ʼ
韓・中 人蔘詩의 양상과 특징 323
孕結飽生意생기를 가득 품었구나.
以之療羸疾이것으로 허약병 고치며
庸醫亦奏技엉터리 의원도 연기하네.
幾同返䰟香返魂香과 거의 같으니
不數肉芝臂팔 닮은 肉芝는 아랑곳 않지.48)
當年評直賤그해 값이 싸게 매겨져
購買不繁費살 때 큰돈 들지 않았네.
十金易一斤금 10냥에 1근을 샀으니
鄰市舊有例이웃 시장도 예부터 관례 지켰네.
十金易一兩ʻ금 10냥으로 1냥을 사네.ʼ
詩家亦有記시인도 이리 적어두었지.
迨我服食時내가 복용할 때에 이르자
猶只倍三四오히려 가격이 3,4배 올랐네.
彈指三十年손가락 튕기는 30년 사이에
徵貴乃無藝이익 추구49)가 끝도 없구나.
一兩三百金삼 1냥에 금 300냥이건만
其品猶居次품질은 오히려 떨어졌네.
中人十家産중인 열 가구의 재산50)으로도
不滿一盃味한잔 맛보기 충분치 않도다.
珍過服玉方방옥 착용보다 귀하고
艱於鍊丹秘단약 제련보다 어렵네.
古稱萬金藥옛날에 만금약이라 불렀으니
始信語非僞비로소 거짓말이 아님을 믿겠네.
48) 漢 武帝가 사별한 李夫人을 方士의 혼을 되돌리는 향(반혼향)을 써서 재회한 고
사와, 소식이 팔과 손가락을 모두 갖춘 어린아이 손 같이 생긴 식물(육지)을 먹
게 된 일화(蘇軾, 「石芝詩引」. ʻ頃在京師, 有鑿井得如小兒手以獻者, 臂指皆具, 膚
理若生. 予聞之隱者曰: ʻ此肉芝也.ʼ 與子由烹而食之.ʼ)를 활용하여 인삼의 영험이
육지보다 높고 반혼과 비슷하다는 것을 표현했다.
49) 원문은 ʻ徵貴ʼ이다. 史記, 「貨殖列傳」의 ʻ물건이 싸면 비싼 데에 내다팔고, 비
싸면 싼 데서 사온다[物賤之徵貴, 貴之徵賤.]ʼ라는 구절에서 유래했다.
50) 중인은 중산층을 의미하고, 중인 열 가구의 재산은 백금을 뜻한다.(漢書, 「文
帝紀贊」의 ʻ百金, 中人十家之產也.ʼ라는 구절과 顏師古의 ʻ中, 謂不富不貧.ʼ이라
는 주석을 참조.)
324 漢文古典硏究 第36輯
嗟哉此神物아아, 이 신령스런 물건은
天以救疵癘하늘이 질병을 치료하라고 준 것.
乃因價不訾곧 값을 매겨놓지 않아
翻若天勢利하늘의 권세와 재리가 치솟은 듯.
但許活富人다만 부자를 살리는 데 쓰일 뿐
貧者莫可冀가난한 사람은 기대하지 못하네.
此事關隱憂이 일은 깊은 근심과 관련되니
蒼生命所繫백성의 목숨이 달렸기 때문이라.
吾兒病已深내 아이 병은 이미 깊어져
非此不得濟인삼 아니면 구제할 수 없네.
燃眉倘可救눈썹 타는 일은 혹 도울 만하지만
剜肉遑敢計살 깎는 일은 감히 따질 겨를 있나.
搜括罄貲儲모은 재물 모두 수탈하고
典賣到衣被입은 옷까지 저당 잡네.
所愁力將竭수고로운 노력을 다 해도
兒病痊尙未아이 병은 여전히 낫지 않도다.
中宵撫空囊한밤중에 빈 주머니 어루만지니
徬徨不能寐방황하며 잠들지 못하네.
위 인삼시에는 조익이 병에 걸린 아이를 위해 처방 받은 인삼(1-6구),
세 가장귀 다섯 잎으로 이루어진 보통 인삼과 사람의 형체와 비슷한 영험
한 인삼(7-16구), 상당에서 처음 생산된 인삼과 청조에 이르러 각광 받은
백두산 인삼(17-24구), 1근에 10냥이나 품질 좋은 인삼(25-34구), 1근에 300
냥이나 품질이 떨어지는 인삼(35-46구), 가난한 사람은 엄두도 내지 못하
고 부자만 쓸 수 있는 비싼 인삼(47-54구), 전 재산을 털어 샀지만 아이 병
을 낫게 하지 못하는 인삼(55-64구) 등, 인삼의 다양한 면모가 시대 순으로
묘사되었다. 인삼의 정보가 집대성 된 시로, 인삼 문화에 대한 일종의
Monograph라 간주된다.
韓・中 人蔘詩의 양상과 특징 325
Ⅳ. 결론
심 주사가 ʻ서양인이 장차 인삼을 사려고 하니, 看色할 것 몇 근을 올려 오
라고 하였다.ʼ라고 말하므로 염에게 편지를 하였다.51)
경기도 陽根의 分院貢所 貢人이었던 池圭植(1851~?)이 1891년에 남긴
기록이다. 서양인과의 인삼 교역이 스스럼없이 진행되었음을 알 수 있다.
1832년 영국 상선이 충청남도 홍성군 古代島에 정박하여 조선의 인삼과
大黃 등을 사고자 했을 때 완강히 거부했던 상황과는 판이하다.52) 인삼은
흔히 동아시아의 전유물로 생각되지만 17세기 유럽에 전해진 후 곧 세계
상품으로 각광받게 되었다. 인삼을 둘러싼 후광과 엄청난 이윤은 영국과
미국에 인삼에 관한 관심을 불러일으켰고 많은 담론이 생산되었다.53)
17-19세기 중반 동안 중국과 서양의 인삼 직거래가 주를 이루었다면 19세
기 말에 이르면서 조선과 서양의 인삼 직거래가 활발해진 것으로 보인다.
인삼이 중증 환자를 치유하는 약용식물로 각인되고, 높은 이윤을 남기
는 무역상품으로 부상하여, 이로 인해 오히려 몸을 상하게 하는 남용・오
용이나 백성의 생계를 파괴하는 지경의 조공을 초래하는 일련의 과정이
漢詩에 고스란히 녹아있다. 또한, 개인 체험으로 습득한 생생한 인삼 정보
가 장편 한시에 보인다. 인삼에 대한 공적 기록물(역사서)과 더불어 개인
기록물(한시)을 함께 분석하는 것은 동아시아 인삼 문화사를 온전히 재구
하는 일환으로 반드시 필요한 과정이라 할 수 있다.
51) 지규식, 하재일기, 「辛卯陰晴錄 ・ 二十三日」(한국문집번역총서).
52) 李圭景, 五洲衍文長箋散稿, 「人事篇 ・ 技藝類 ・ 醫藥」, <大黃辨證說>(고전원
문). ʻ頃年英吉利國船泊我湖西洪州府古代島時, 懇請通市, 欲貿我人蔘・大黃諸寶
物云, 而不許.ʼ
53) 설혜심, 「17-18세기 영미권의 인삼(Ginseng) 인식」, 의사학 제25권 2호, 대한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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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8 漢文古典硏究 第36輯
Abstract
Characteristics of Korean and Chinese Poems on Ginseng(人蔘詩)
Kim, Bo-sung*
54)
Ginseng(人蔘) has been cultivated in Korea and was actively traded in Northeast Asia
early on. Furthermore, it is a product that spread its reputation and value to Southeast
Asia and Western regions. From ancient times to the present, ginseng has been recognize
d as the representative medicinal crop of Korea.
In the old literature, it has been recorded that East Asian people tried to save Panacea
ginseng from other countries. In China and Japan, ginseng has long been known as an
expensive and valuable medicine. As the demand for ginseng soars in East Asia, Koreans
producing ginseng had to suffer some side effects. For example, people suffered from labo
r pain to send out ginseng to China and meet their demand. In addition, the officials
of the Joseon government struggled to prevent fake ginseng from being made by Japanes
e ginseng merchants.
Ginseng has always been a major interest for Korea, China, and Japan, and it has
become one of the major cultural products of East Asia. Ginseng has been recognized
as an excellent medicine for treating patients with serious diseases and has emerged as
a high-margin trading product. So it caused many unexpected problems. For example,
they are wrongly taking, over-taking, or demanding too much ginseng, threatening the
livelihood of the people. Such problems are documented in the Korean and Chinese Ginseng
poems. In addition, the lively information about ginseng that individuals have gained from
their experiences can be found in Ginseng poems. Therefore, analyzing the historical records
of ginseng (history book) and individual records (ginseng poems) together is an important,
necessary process to fully understand the history of the East Asian ginseng culture.
* Senior Researcher, Daedong Institute for Korean Studies (Academy of East Asian Studies)
in Sungkyunkwan University / E-mail : creison@hanmail.net
韓・中 人蔘詩의 양상과 특징 329
【Key words】 Ginseng(人蔘), Ginseng poems(人蔘詩), Ga-Sam(家蔘, Ginseng
cultivated by people), San-Sam(山蔘, Ginseng naturally grown
inmountain), East Asian ginseng culture.
투고일 : 5월 30일, 심사완료일 : 6월 11일, 게재확정일 : 6월 12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