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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보 시인
시집 < 가시연꽃 >
책머리에
수년 전부터 ‘사단시(四短詩)’라는 이름으로 네 마디 짧은
시를 시험해 보고 있다. 그리하여 그 첫 번째 시집으로
『운주천불』(2000,우이동사람들)을 선보인 바 있다.
이 『가시연꽃』은 그러니까 『운주천불』 이후에 쓴
작품들의 묶음이다.
시라는 글은 가능한 한 짧을수록 이상적이라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 그런데 줄여 쓰다 보니 미진하다는 생각이
없지 않아 이번에도 작품마다의 말미에 사족을 달았다.
읽지 않고 넘어가도 상관없지만 작품의 한 부분이라고
생각하고 읽어도 무방할 것 같다.
아무쪼록 이 작은 시편들이 읽는 이에게 기쁨의 인연이
되기를 바라 마지않는다.
2008년
운수재에서 임보
가시연꽃 / 임보
탱자나무 울타리 속
과수원집
내 어렸을 적
앉은뱅이 가시내처럼
풀리지 않는
세상의 아픈 비밀
연못 위에 떠 있는
푸른 가시방석
* 가시연꽃은 둥근 잎을 물 위에 띄우고 물속에 숨어 산다.
가끔 자신의 잎을 뚫고 솟아오른 가시투성이의 꽃대 끝에
등대의 불빛 같은 작은 보라색 꽃을 무슨 비밀인 듯
수줍게 내보인다.
짝사랑 / 임보
내 전생에 너를
얼마나 울렸기에
한평생 날 붙들고
잠 못 들게 하는가
사랑은 행복이 아니라
형벌일레
보이지 않는 끈으로
영혼을 묶는 ―
* 한평생을 두고 못 잊는 사랑을 간직한다는 것은 행복이 아니라
형벌이다. 그러나 베아트리체의 포로가 된 단테는 『신곡(神曲)』
을 만들어 내지 않았던가.
어부漁父 / 임보
바우는 배를 몰고 바다로 나가
낚시로 두 마리만 잡으면 종일 낮잠이다
한 마리는 제놈의 것이고
다른 하나는 여편네 몫이다.
* 모든 재앙의 근원은 욕심에 있다. 끼니를 때울 음식만 있으면
족하거늘 사람들은 쓸데없는 욕심을 부려 제 마음과 세상을
어지럽게 만든다. 자족(自足)을 모르는 자는 늘 불행의 늪에서
허덕일 뿐이다.
교육 무용론 / 임보
일자무식 가난뱅이 박석돌은
여든의 에미를 잃고 석 달을 우는데
대학 출신 유식한 황금녀는
여섯 돌 새끼를 두고 가출을 한다
사랑에 관한 잠언 / 임보
열등생이 없는 과목은
<식사>이고
모두가 우등생인 과목은
<사랑>이다
학습이 필요 없으므로
사랑을 과외 받는 자는 없다
인물人物 / 임보
그제는 노산(嶗山)에서 노자를 보았고
어제는 곡부(曲阜)에서 공자를 만났다
오늘 오른 것은 태산(泰山)이지만
결국 산 끝에서 만난 것은 사람들일 뿐
* 산동성의 노산에는 노자의 사당이 있고 곡부에는 공자의
사당이 있다. 태산의 위에도 수많은 인물들의 흔적으로
요란하다
성인聖人 / 임보
노산을 보러 만 리의 창해를 넘고
곡부를 보러 또 만 리의 광야를 건넜다
어찌, 기천 년 전에 이미 떠난 노공(老孔)이
한 선비의 멱살을 잡고 이리 흔든단 말인가?
* 유적을 찾는 여행이란 결국 역사적 인물의 탐방에 지나지 않는다.
사람들아 / 임보
사람의 집에 가서 삯일을 하지 말고
산과 들녘에 나가 더운 흙일을 해라
사람을 너희 집 뜰에 기르지 말고
산과 들녘에 곧은 나무나 심을 일이다
* 인재를 기르는 것보다 더 의미있는 것은 나무를 심는 일이다.
나무는 배반을 모르기 때문이다.
빛의 공해 / 임보
네온의 불빛에 하늘이 죽어
도시의 아이들은 은하수를 모르고
가로등 불빛에 어둠이 죽어
도시의 매미들은 밤에도 울고
* 은하수를 모르는 도시의 아이들이나 어둠을 모르는
도시의 매미들이나 다 불행한 생명들이다
속도 / 임보
달팽이가 몸으로
풀잎과 풀잎 사이를 길 때
다람쥐는 발로
나무와 나무 사이를 건너뛰고
물고기는 지느러미로
강물을 거슬러 오르며
새들은 날개로
높은 산등성이를 넘어간다
* 사물은 다 자신의 속도를 지니고 불편없이 잘 살아간다.
유독 인간만이 욕심을 부려 제 속도를 넘어서려 한다.
자동차를 만들고 비행기를 만들고… 속도를 높이는 것은
어쩌면 종말을 향해 더 빨리 달리는 것인지도 모른다.
더듬이 / 임보
더듬이로 살아가는 개미를 보고
사람들아, 답답하다 비웃지 말라
망원경으로 바라다보는 그대의 눈도
우주의 다락에서는 겨우 더듬이일 뿐
* 허불 망원경을 만들어 먼 우주공간을 관측한다고
야단들이다. 그러나 광막한 우주에서 내려다보면
인간이 바라보는 거리도 미미하고 미미할 뿐이다.
열등인간 / 임보
배우지 않아도
암탉은 알을 잘 낳고
가르치지 않아도
까치는 보금자릴 잘 튼다
조산원에 누워 있는
만삭의 여인들아
청약에 또 낙방한
무주택 서민들아
* 인간이 만물의 영장이라고? 제 새끼도 제 힘으로 못 낳고.
제 집도 제 손으로 못 짓는 생물은 오직 인간뿐이다.
비상飛上 / 임보
높이 나는 새를
부러워 말라
결국 그가 깃들일 곳은
지상의 숲이다.
나무의 고행 / 임보
삼복(三伏)에 성장(盛裝)하고
삼동(三冬)에 벌거벗은
장립불와(長立不臥)
평생부동(平生不動)
* 어느 고행승도 한 그루 나무의 수행을 따를 수 없다.
설경설경 / 임보
문을 열자
단도직입(單刀直入)이다
정월
아침 산
* 눈 덮인 아침 산은 칼처럼 다가선다.
방랑자의 아침 / 임보
나를 위해 해가 돋고
나를 위해 산하가 푸르고
나를 위해 만물이 싱그럽도다
나를 위해 세워진 눈부신 제국이여!
* 세상은 그대를 위해 마련된 그대의 영토다.
현명한 사람은 거기에 얽매이지 않고 방랑자의
호연지기를 즐긴다.
시가 뭐냐고? / 임보
우리가 꿈꾸는 것들에 대한
찬양이며
우리가 미워하는 것들에 대한
설득이다
* 시는 그렇게 되었으면 하고 바라는 것들에 대한
기록이며, 잘못된 것들에 대한 비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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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보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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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머릿속이 아주 가벼워집니다.
간결하며 깊은 임보 선생님의 혜안에 그저 감탄할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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