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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부르 킹은 거구에 호남(豪男)이었다.한국인 아버지와 원주민 어머니를 둔 60대 중반의 노부르
킹은 너그러운 눈매와 품넓은 분위기를 지니고 있었다.그는 팔라우에서 이름난 실업가였다.
나는 그에게 꼭 궁금한 몇가지를 알아보고 싶었다. 펠렐류섬의 동굴속에서 잡혔던 그 조선인에
대한 여러가지 사실, 노부르 킹 그의 아버지에 대한 구체적인 사실등을 묻고 싶었다.그러나 그는
아무 대답도 할 수 없었다.몸을 가눌 수 없을 정도로 몹시 아파있었다. 오래 앉아 있기도 기억을
모아 옛일을 생각해내기도 무리가 되는 듯 했다. 그러나 그는 내가 한국에서 왔다하니 기어히 몸
을 일으켜 거실까지 인사를 나왔던 것이다. 그만큼 아버지의 나라 한국을 동경했고 한국을 알고
싶어했다. 그의 방에는 한국노래 가라오케가 설치되어 있으며 차속에는 한국노래 테잎이 얼마든
지 있다고 럭키 김이 귀뜸했다. 그러나 그는 지금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기만 할 뿐 입을 열어 역
사를 증언할 기력을 갖고 있지 못했다.
" 이 PD님, 아무래도 안되겠습니다. 이토록 편찮으시니 어쩌겠습니까? 차라리 나에게 그 질문서를
주고 가시면 기력을 회복하시는 대로 내가 알아내서 연락드리면 되지 않겠습니까?"
" 지금 단순히 몸살입니까? 아니면 어떤 숙환입니까?"
" 몸살일 겁니다. 그동안 괜찮게 활동하셨거든요."
취재(取材)란 때때로 잔인한 일이기도 하다.만일 노부르 킹이 숙환을 앓고 있는 것이라면 오히려
이대로 물러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언젠가 다시 만나 대답을 들을 수 있다고 확신할 수 없기
때문에 어떻게든 취재를 마치고 나가야 하는 것이었다.
아무리 그렇다 해도 노부르 킹은 더 앉아 있을 수가 없어 보였다. 그는 한점의 서류를 건네 주고
아쉬운 듯 방으로 들어갔다. 그의 아버지가 고국 조선땅을 떠나올 때 품고 왔다는 호적등본이었
다. 신분증이 따로 없었던 당시는 해외여행자들에게 호적등본을 지참하게 했었다. 호적등본에 그
의 이름이 적혀있었다. 럭키김이 평소 그에게서 들은 대로 보충설명해주었다. 그는 OO金씨 였고
이름은 金登이었다. 登(오를 등)은 일본어로 '노보리'라 발음하고 金은'긴'이라 발음한다. '노보
리 긴'. 일제치하에서 그의 이름은 그랬다. 그가 아버지를 잃고 그 섬 팔라우에서 우왕좌왕하고
있을 때 연합군이 상륙하였다. 연합군은 살아남은 주민들을 등록받으면서 '노보리 긴'을 '노부르
킹'으로 알아듣고 그렇게 적어버렸다. 승자인 연합군에게는 그가 김씨건 긴씨건 킹씨건 알바가
아니었다. 등록 그 행위를 마치는 것이 중요했을 뿐이다. 그는 그렇게 해서 팔라우사람 '노부르
킹'이 된 것이다.나라가 구심력을 잃었을 때 거센 역사의 바람에 날려 강남의 귤에서 강북의 탱
자로 변해버린 잊혀진 한국인들이었다.
나는 하는 수 없이 그의 집을 나왔다.그리고 며칠동안 분주히 남태평양 섬들을 돌아다니며 그곳
구천을 떠돌지 모르는 고혼(孤魂)들의 사연을 캐고 다녔다.이름모를 유골을 위해 명절때마다 태
평양 절벽에서 한국을 향해 제사를 지내주는 사이판 이씨의 이야기, 온 섬 주민의 45%가 한국혈
통이라는 티니안섬의 애사 등등...
답사출장이었으므로 수사관이 취조파일을 만들 듯이 꼼꼼히 취재노트를 정리해놓고 귀국길에 올
랐다. 부족한 것은 촬영출장시에 더욱 보충해야 한다는 메모와 함께.
그런데-,
서울로 돌아와 팔라우 답사사진들을 정리하는데 몇장의 사진이 눈에 밟혔다.
김정곤과 그의 딸 아리랑이었다.
애초의 생각대로 김정곤의 고향집에 우송하려고 사진을 봉투에 넣고 아버님댁 주소를 써서 우체
통으로 갔다.그런데 이상한 일이었다.편지로 부칠 것이 아니라 직접 찾아가 전해줘야 한다는
어떤 의무감이 뜬금없이 나를 압박해오는 것이었다. 다음날 나는 떠밀리듯이 경상남도 사천의
아버님댁 농가로 차를 몰았다.
김정곤의 부모님은 나를 은인처럼 반겼다. 그도 그럴 것이 14년동안이나 돌아올 줄 모르는 큰아
들의 소식과 사진을 들고 찾아온 사람이었다. 묻고 대답하고 눈물짓고 또 묻기를 한시간 여,
나는 슬프고 무거운 그 분위기를 벗어나고 싶어서 그냥 물었다.
" 큰아버님이 계시다는데 어디 사십니까?"
" 바로 뒷집입니다."
" 가면 뵐 수 있을까요?"
" 네,그라지요."
내외분과 함께 뒷집 큰아버님댁으로 올라갔다. 뒷산에서 칠십노인 한분이 지게를 지고 내려왔다.
큰아버님이었다.다리를 약간 절었다. 모두들 마루에 걸터 앉았다. 편안하게 질문을 시작했다. 빨
리 끝내고 서울로 올라가야 했으니...
김정곤씨의 큰아버님.
" 할아버님, 다리 왜 저세요?"
" 징용가서 피부병 옮아가지고......"
" 징용 어디로 가셨나요?"
" 남양군도지"
" 남양군도 어디요?"
" 어디라 캤더라...남양군도...가만 있거라...파..라..오..."
순간 나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 파라오요?...파라오...혹시 팔라우 아닙니까?" (참고 : 팔라우=Palao)
" 맞아요 맞아. 일본놈들은 파라오라고 했지.섬이 엄청스레 많은 나라요."
피가 머리로 몰리는 듯 했다. 그때까지 마루에 걸터 앉아있던 나는 위로 올라 앉았다.
" 할아버님, 저도 팔라우에 다녀왔는데요, 섬이 정말 많던데요."
" 그럼 그럼. 그 놈들이 섬 하나하나에 전부 지 군인들 배치했었지. 동굴파고 대포 숨겨놓
고...."
" 할아버님, 그 나라 섬이 삼백개나 된다던데 할아버님은 어디서 일하셨죠?"
" 찾기 쉬워. 끝에서 두 번째 섬이었으니까."
이런. 이런. 세상에 이런!
그 섬은 지금 김정곤, 당신의 조카가 살고 있는 섬이 아닌가! 입이 마르고 목이 잠겨들었다.
나는 무릎걸음으로 큰아버님께 더 가까이 다가 앉았다.
" 할아버님, 그 섬 이름이 뭐였습니까?"
" ...가물가물해. 그게 몇십년 됐는데....페...페..." (참고 : 끝에서 두 번째 섬 = 펠렐류)
" 그럼 어떻게 생겼었는지 생각은 하시겠습니까?"
" 밀림지역이었어. 달팽이 잡아서 끓여 먹었으니까. 밀림속에 우리가 비행장 만들었어.죽을 고생
다했지 뭐. 전부 산호 빻아서 모래대신 깔고 활주로 만들고...그 끝자락에."
" 네, 할아버님. 끝자락에..."
" 끝자락에 일본놈들 신사가 있었지. 일본귀신 모시는 절 말야! 그 뒤에 자그마한 산이 있었는데
그 산 이름도 신사산이라고 했어."
나는 떨렸다.세상에 어찌 이런 기막힌 경우가 있을 수가 있단 말인가.그 섬과 그 밀림은 김정곤
이 살고 김정곤이 지나다니는 펠렐류섬 거기였던 것이다. 남양군도에 나라가 몇 십개요 섬 또한
천수백개를 헤아리는데 징용으로 끌려가 매맞고 굶주리며 죽다 살아온 그 원한의 섬 그 현장에
훗날 당신의 혈족이 상륙해서 원주민으로 살고 있다니...큰아버님이 매맞고 배고플 때마다 흐느
끼며 불렀던 그 노래‘아리랑'이 그 조카의 딸 이름으로 불리우다니! 이 기막힌 운명의 주인공을
눈앞에 두고 나는 말문이 막혀있는데 큰아버님은 40여년 전으로 되돌아가 혼자도는 바람개비처럼
당신의 고생담을 술술 풀어놓고 있었다.
펠렐류섬과 비행장. 큰아버님은 펠렐류섬 밀림에 방치되어있는 펠렐류섬의 선착장(맨 오른쪽).
이 비행장공사에 동원되었다. 일본군 전차 김정곤씨의 큰아버님은 선착장공사에도
동원되었다.
" 치가 떨릴만큼 고생했지. 배고픈 것이 가장 견디기 힘들었어. 달팽이 잡아먹고 도마뱀도 잡아
먹었는 걸. 그렇게 굶주리면서 비행장 만들고 선착장 만들고 동굴파고 무기 들어다 숨겨놓
고....."
할아버님! 정곤이가 할아버님이 만드신 선착장마을에 살고 있어요. 할아버님! 정곤이 처가 다음
달에 그 선착장에서 배를 타고 셋째아이 낳으러 코롤로 나간대요. 할아버님! 정곤이가 안내해서
그 신사산에 올라갔다 왔어요. 내 입안에서 그런 말들이 꿈틀거리고 있었다. 나는 끝내 이 팽팽
한 긴장을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말문을 열었다.
" 할아버님, 조카 정곤이가 어디에 살고 있는지 알고 계세요?"
" 남양군도 어디라 카더만......"
" 그 이상은 모르시구요?"
" 낸들 아나? 동생은 알랑가 그 섬 이름을."
" 저도 모릅니다 형님"
이제는 말씀을 드려야 했다. 나는 도대체 왜 아직까지 그 말을 꺼내지 못하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 할아버님, 그리고 정곤이 부모님! 정곤이가 바로 그 섬에 살고 있어요. 큰아버님께서 고생하고
오신 팔라우, 그 끝에서 두번째 섬 펠렐류에요! 제가 며칠전에 그 섬에서 정곤이를 만났습니다.
이 사진 다 거기서 찍은 것들입니다. 정곤이도 모르고 있는데 큰아버님 말씀을 들어보니 바로
그 섬이네요."
순간 물을 끼얹은 듯 모두가 말을 잃었다. 큰아버님은 동생을 바라보고 있었으며 정곤이 부모님
은 그곳에서 찍어온 사진을 한장한장 넘기며 눈물을 떨구고 있었다. 어머님은 사진속의 아들을
쓰다듬었다. 큰아버님은 그러나 사진들을 외면했다.
침묵이 흘렀다. 불안하리만큼 긴 침묵이었다.
큰아버님은 하늘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느릿느릿 말씀을 하셨다.
" 거기가 어디라고,
...............
거기가 어디라고,
...............
정곤이 이놈아!
거기가 어디라고
하필 거기 산다는 말이냐?"
힘없이 내뱉으시는 늙은 징용자의 눈에서 드디어 눈물이 떨어졌다. 40여년 전의 악몽이 되살아나
는 듯한 표정이었다. 위로받지 못한 눈물, 오로지 참고 삭이는 것 밖에는 할 바가 없었던 울분이
바위의 이끼처럼 달라붙은 얼굴이었다. 형제 넷중 셋이 징용으로 끌려갔고 그중 하나가 살아서
돌아오지 못한 깊은 한이 서려있는 장남의 얼굴이었다.
내가 큰아버님의 이야기를 들으며 거기가 거기라는 것을 알게 됐으면서도 그 말을 쉽게 꺼내지
못했던 이유를 알 것 같았다. 큰아버지의 쇼크가 염려스러웠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 늙어서 힘을
잃어버린 쇠약한 피해자에게는 극단에까지 이를 수 있는 감정의 힘마저 쇠약해진 것 같아 보였
다. 그것이 세월이요 그것이 역사의 흐름인지 모른다.
나는 천천히 그 집을 나왔다.
아무것도 먹지 않은 채 새벽녘까지 차를 몰아 서울집에 도착했다.
김정곤씨와 딸 아리랑 큰아버님이 동원됐던 비행장을 주행하는 큰아버님이 동원됐던 선착장에 도착한
김정곤씨 김정곤씨와 부인
그후 나는 팔라우로 돌아가 본격적인 촬영을 시작했다.
이번에는 김정곤에게 큰아버님의 이야기를 들려 주었다. 김정곤이 뭐라 말할지 궁금했다.
그런데, 그는 그저 담담하게 "그래요? 허허..참 희한한 일이군요."라고만 말할 뿐이었다.
세월은 억울함 분함 비통함까지도 두리뭉실하게 만드는 묘약이다. 그렇다. 모든 일은
당사자에게만 심각할 뿐, 한 뼘만 떨어져서 보아도 그 색깔이 바래져 보인다.
*** 나는 그동안 이 글에 쓴 거의 모든 과정을 담아 1992년 3월 <잊혀진 전쟁-태평양전선을
따라서>(3부작)라는 제목으로 Documentary를 만들어 방송하였다.이 프로그램은 Documentary
사상 최고의 시청점유율로 아직까지 남아있다.***
*** 10여년 뒤, 나는 내손으로 직접 5부작 다큐드라마 <인간극장>을 기획 제작하면서 제작진을
팔라우에 보내 김정곤씨의 삶을 기록해왔다.그러면서 한편으로 이 기회에 김정곤씨를 제 고향집
에 다녀가도록 할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떠올랐다. 나는 편집중인 제작진에 지시했다.
"원주민인터뷰를 번역하려면 원주민 말과 우리 말을 동시에 아는 사람이 있어야 하는데 김정곤
밖에 누가 있느냐? 여비를 보내서 김정곤을 초청해와라!" 그렇게 해서 그는 고국에, 고향집에
왔다.프로그램은 많은 감동을 남겼고 그는 고향집에서 이제는 가난을 면한 부모와 형제를 만났
다. 그리고 또 갔다.가면서 하는 말은 "처가 있고 자식이 있으니..."였다. (태평양전선에서- 끝)
그동안 호흡을 같이 하고 의욕을 돋구어 주신 동기생 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
첫댓글 독방이 생겼으니 좋은글 많이 담으세요. 세월이 또 많이 흐른 뒤 감동으로 ....
Stand by상태입니다. 이사분위기가 좀 가라앉으면 올리지요.
이형 글에 대한 친구들 답글이 너무 정겨워서 한데 모아서 옮겨봤음다 . 카페에 이런 글은 첨이지 싶은데...ㅎㅎㅎ
좋은 친구들이니까요. 좋은 이야기를 좋게 수용하는 사람은 순수한 사람이구요. 그많은 답글을 붙여주시느라, 그리고 독방을 마련해 주시느라...그리고 경추형, 번호를 통일하는 방법은 없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