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에 복지의 씨앗을 뿌린 유진 벨
나하나
1. 유진 벨의 생애유진 벨(Engene Bell)은 1868년 미국 컨터키 주에서 출생하여 1985년(당시 27세) 아내 로테 벨(Lotte Bell)과 함께 조선으로 파송된 미국 남자로교 선교사다. 그의 한국이름은 배유지(裵裕祉)로 불렸다.
이들 부부는 샌프란시스코 항을 출발해 두 달 만에 제물포에 도착했다. 1895년의 조선은 처일 전쟁이 끝나고 전국적으로 콜레라가 극성을 부리던 시기로 고종황제는 배유지 선교사에게 콜레라 퇴치에 적극 참여해 달라는 요청과 함께 진료소를 설치해 진료하도록 했다. 배유지는 콜레라 퇴치에 적극 참여해 큰 기여를 했다. 이후 고종 황제는 그에게 콜레라 퇴치운동에 앞장선 공로를 인정해 감사패와 선물을 전달했다.(안영로, 1998).
배유지는 1897년 목포에 교회를 세우고 전도여행을 시작했으며 활발한 선교를 전개했다. 1901년 4월 전주에서 선교활동을 벌이고 있을 때, 임신 7개월의 부인이 심장병으로 위독하다는 전보를 받고 목포로 이동하던 중 부인이 군산에서 숨을 거두었다는 안타까운 소식을 듣게 된다. 로테 벨은 서울 양화진(양화대교 근처) 외국인 묘지에 안장되어 있으며 우리나라에서 숨진 최초의 미국 남장로교 선교사이다.
배유지는 부인의 갑작스런 죽음에 충격을 받고 어린 남매(아들 헨리와 딸 샬럿)을 데리고 미국으로 건너가 2년간 머물다 1903년 새 부인 마가렛트 벨과 미국에서 혼인한 후 한국으로 돌아왔다. 1919년 배유지 선교사와 그의 부인 마가렛트 벨은 3·1독립운동 때 일본헌병들에 의해 많은 교인들이 학살당한 제암리 교회 현장을 돌아보고 귀가하던 길에 수원을 지나 병점 근교 건널목에서 타고 가던 차가 기차와 충돌하는 사고가 발생해 부인 마가렛트 벨마저 사별하게 되고 다시 미국으로 건너갔다.
배유지는 1921년 9월 줄리아 디저트 선교사와 혼인하고 다시 광주로 돌아왔다. 줄리아 디저트 선교사는 1907년 9월 군산선교부에서 아이들에게 교육을 담당하는 선교사로 일할 때 배유지 선교사와 인연이 있었으며, 혼인한 후 한국으로 돌아와 부부가 함께 교육현장에서 더 열심히 일했다.
유진 벨은 1925년 9월 28일 갑작스럽게 숨을 거두었고, 현재 광주광역시 양림동 선교사 묘역에 안장되어 있다.
2. 목포에서의 의료·교육 복지 활동배유지는 목포가 곧 개항된다는 소식에 이눌서 선교사와 함께 제물포에서 배를 타고 목포로 향했다. 그는 목포가 개항하면 전남 지방의 선교 기지가 될 뿐만 아니라 일본과 중국을 잇는 국제항이 될 것으로 예측하였다. 그런데 개항한다는 소식을 먼저 들은 일본인들이 좋은 평지를 다 구입해 배유지 선교사는 좋은 땅을 구입할 수 없었고, 유달산을 바라보는 공동묘지의 땅을 구입하였다.
목포의 개항이 늦어지자 배유지 선교사는 나주에 땅을 매입하려고 했으나 유생들의 거센 반발로 실패하고 목포로 이동해 1897년 교회를 설립했다. 이것이 목포지역 최초의 교회이다. 그 후 목포가 개항이 되었고 그의 선교활동도 활발히 전개됐다. 1898년 11월 오웬(Clement C. Owen 1867-1909, 한국명 오원 또는 오기원)목사가 목포에 도착하였고, 진료소 건물이 없는 상태에서 배유지 목사의 집에서 간판만 걸고 환자들을 진료하였다. 선교활동에 의료가 함께 하기 시작했다.
목포는 개항이후 타지방에서 모여든 사람으로 형성된 신흥도시였기에 보수성이 약하고 무역항으로서 외국인에 대한 거부 반응도 적었기에 오원 목사와 함께 목포에 양동교회를 세우고 이를 중심으로 교육과의 의료활동을 활발히 전개하였다. 타 지역에 비해 외국인과 외국종교에 거부반응이 적었지만, 선교활동은 쉽지 않았기에 대중에게 접근하기 쉬운 의료, 교육 사업을 시작하였다. 목포 선교부 의료시설을 한국인들이 이용하면서 선교사들과 자연스럽게 접촉하였고, 배유지 선교사는 1903년 영흥학교와 이 지역 최초의 여성교육기관인 정명여학교 등을 설립·운영하였다.
영흥학교는 배유지 선교사의 사랑채에서 몇명의 학생들을 중심으로 출발하였다. 변요한 선교사의 협력으로 영흥학교를 발전시키고 목포교회 교인들의 도움으로 인부를 동원해서 산정동 돌산에서 채취한 돌로 산뜻한 건물을 완성시켰다. 제일교회 당회장 존 와킨스 목사의 이름대로 '목포 와킨스중학교'라고 부르게 되었다. 1937년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로 폐교를 하고 선교사들은 귀국길에 올랐다.
정명여학교 1902년 봄 스트레퍼 선교사에 의해 시작되었고, 첫 수업은 남녀 학생들을 포함되었다. 처음으로 10여명의 어린 학생들을 모아 보통과 과정을 교육시켰다. 몇 년 안되어 25명으로 학생이 증가하여 해외선교부의 지원으로 석조건물을 건립하면서 자리를 잡아갔다. 스트레퍼 선교사가 1905년 광주로 옮겨가자 하위렴 선교사 부인이 교장 직을 맡았으며, 1908년 선교사 마틴(한국명 : 마율리)이 교작 직을 이어갔다. 그 후 유서백 선교사 부인과 조마구례 선교사가 각각 교장으로 일했으며, 이후 신사참배 거부로 1938년 학교가 폐교되자 마율리 선교사는 감시를 견디지 못하고 1940년 목포를 떠났다.
선교사들이 설립한 정명여학교나 영흥학교는 일본인들의 학교보다 사상적으로 자유로웠다. 그 때문에 이곳에서 교육을 받은 학생들이 3·1운동 당시 만세운동을 주도하였다.
3. 광주에서의 의료·교육 복지 활동1904년 전라남도 도청소재지가 광주에 개설된다는 소문을 듣고 배유지 목사는 자신의 협력자인 김윤수 집사를 광주로 보내 거처를 확보하였다. 광주에 도착한 이들은 처음에 지금의 산수동에 터를 잡으려 했으나 호환(虎患)이 잦다는 소문에 우선 양림리 동산에 임시주택을 마련하고 짐을 풀게 되었다. 배유지 목사 집에서 1904년 12월 25일에 드린 성탄절 예배를 광주 최초의 예배라고 한다.
1) 최초의 교회 - 북문안 교회 건립배유지 선교사 사택에서 시작된 교회는 점차 사람들이 많아지자 북문안으로 이사하였다. 북문안 교회는 설립자인 배유지 목사가 당회장으로 시무하다가 1916년에 이르러 평양출신 한국인 최초 목사 이기풍 목사를 초빙하여 제2대 당회장으로 시무케 하였다.
그때는 건축자재가 귀하고 교회 재정이 어려운 시기로 북문안 교회의 건물을 ㄱ자인 목조기와집 50평 규모의 큰 집을 지었다. 건물을 ㄱ자로 한것은 남녀 교인이 자리를 따로 하고 가운데는 포장을 쳐서 서로 볼 수 없게 하기 위한 것이었다.
기독교가 들어 온 뒤 선교 활동을 통하여 빈부귀천과 반상의 계급을 타파하여 양반이나 상민, 부자와 가난한 사람, 사농공상 등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한자리에 모여 예배를 볼 수 있었지만 남녀유별이란 관습은 좀체 타파하기 어려운 과제였다.
일제는 북문안 교회를 탄압하기 위하여 교회 터가 국유지라는 이유를 내세워 명도를 요구하였다. 이 땅은 본시 조선의 소유인 억만고(億萬庫, 정부 양곡 보관소)가 있었던 사창(社倉) 마당으로 한말에 한국군(진위대)의 훈련장으로 쓰였다.
그러나 그 때는 빈터로 있어서 배유지 목사가 당시 윤웅렬 관찰사를 통하여 대한제국 정부의 허락을 받아 교회를 세웠는데 한일합병으로 조선총독부 재산이 되었던 것이다. 이로 말미암아 교회는 부득불 남문 밖 금정(錦町, 지금의 금동)으로 옮기게 되었으며 교회 명칭도 남문밖교회 또는 금정교회라고 했다.
2) 숭일학교의 설립숭일학교는 1907년 배유지 목사와 오원 목사가 기독교 신자 자녀교육을 목적으로 설립하였으며, 여학생 3명과 남학생 1명, 교사 2명으로 양림동 배유지 선교사 집 사랑방에서 시작되었다 이 때 배유지 선교사는 학생들을 따로 분리해서 굥ㄱ시켜야 한다면서 남녀를 따로 교육을 시켰으며, 남학생은 계속 배유지 목사의 사랑채에 머물면서 교육을 받았다. 1908년 숭일 소학교로 인가가 나고, 1909년 광주시 양림동 66번지에 종각이 있는 3층(지하별도)으로 된 학교 건물을 착공하여 1910년 여름에 완공하였다. 이 건물은 광주에서 최초의 서양식 건물로 완공된 후 변요한 선교사가 초대 교장으로 부임하면서 학교는 발전하였다.
교장으로 수고하였던 변요한 선교사, 녹스(한국명 : 노라복)선교사 등의 뒤를 이어 1915년 제3대 교장으로 타마자 선교사가 취임했다. 타마자 선교사는 미국 모 교회에서 야구공, 야구배트, 글러브 등을 기증 받아 숭일학교에 야구단을 조직하였으며, 야구에 대한 광주의 인기는 대단하였다.
3) 수피아여학교 개교배유지 목사 사랑에서 시작되어, 남녀 학생을 따로 분리시면서 변요한 목사 사택 사랑채로 옮겨가게 되었다. 1908년 정식으로 초대 교장 그레이엄(한국명 : 엄언라)이 취임하며 수피아여학교가 시작되었다.
1909년 학교를 오원 선교사의 사랑채로 옮겼으며, 엄언라 교장의 일시적 귀국으로 윌슨 선교사의 부인인 로버트 윌슨 선교사가 임시로 교장의 책임을 맡았다. 1910년 한일합방 이후 9월 매퀸(한국명 : 구애라) 선교사가 제2대 교장으로 취임하였다. 조선 총독부에서 사립학교를 정비한다는 명목하에 수피아여학교도 폐교의 대상이 되었지만 구애라 선교사는 1911년 귀국하여 미국 남장로교 총회 지원을 받아 회색벽돌 3층(현재 수피아홀) 건물을 건축하였다.
이 건물을 건축할 때 미국의 스턴스 여사가 친정의 어린 동생 제니 수피아를 위하여 5천달러를 기증했기에, 구애라 선교사는 스턴스 여사 정신을 오래 간직하기 위해서 광주여학교란 교명을 수피아 여학교로 바꾸었다.
4) 순천에서의 의료·교육 복지 활동배유지 선교사와 변요한 선교사는 오원 선교사가 순교한 이후 전남 내륙 지방인 화순, 보성, 순천까지 선교를 하러 다니면서 순천이 철도의 중심지가 된다는 소식을 듣고 순천에 선교부를 세웠다. 고잇(한국명: 고라복) 선교사 가족이 순천에 이사 온 지 얼마 안되어 두 자녀가 이질로 고생하다가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다른 선교사들도 충격에 휩싸였고, 변요한 선교사는 광주로 이거하고 팀몬스 의사만 머무르게 된다.
순천선교부가 완공되자 변요한 안채륜, 고라복 선교사, 크레인(한국명 : 구례인), 듀프이(한국명 : 두애란) 선교사, 팀몬스 선교사는 의료선교 활동을 하게 되었다. 1916년에 매산 남학교는 구례인 선교사가, 매산 여학교는 두애란 선교사가 맡아 학교를 운영하였다. 처음에는 학교 허가신청이 반려되었다가 1919년 총독부 정책이 문화정책으로 바뀌면서 문을 열게 되었다.
5. 배유지 목사와 오웬 목사오웬 목사는 햄포던-시드니 대학, 스콜틀랜드 유대학, 유니온신학교 버지니아 의과대학 등에서 수학하였고, 1898년 11월 5일에 한국에 왔다.
그는 배유지 목사와 함께 목포에 전라남도 최초 서양의료소인 목포진료소를 세우는 등 의료사업에 열정을 쏟았다. 1900년 12월 12일 불장로회 의료선교사 조지아나와 결혼식을 올리고 함께 의료활동을 하였다.
그는 초기에 목포, 광주에서 의료활동을 하다가 유진벨 목사와 함께 1904년 12월 광주로 옮겨왔다. 미국선교사들은 서문 밖 광주천 너머 양림동에서 서양촌을 형성하며 선교활동을 하였다. 수피아여고 뒷동산에 위치한 오웬 선교사 집 주변에는 당시 양림천의 거지들과 한센병 환자들이 장사진을 쳤다고 한다.
오웬 선교사는 장흥으로 가던 중 과로로 인해 쓰러졌고 오한과 고열로 시달리면서 급하게 광주로 돌아왔다. 여러 사람의 간호에도 불구하고 상태가 악화되어 1909년 4월 숨을 거두었다. 양림동 선교사 묘역에 최초로 안장되었다.
[유진벨 재단]1. 설립배경유진벨재단은 1895년 한국에 파송된 유진 벨 선교사의 한국선교 100주년을 기념해 그의 4대손인 인세반(Stephen W. Linton)박사가 설립한 대북지원 비영리 민간단체이다. 유진벨재단은 1995년 미국에서 설립되었고, 이어 2000년에 한국 법인이 설립되었다.
지원초기에는 식량난을 겪고 있던 북한에 곡물을 보냈으며, 1997년 북한 보건성으로부터 결핵퇴치지원을 공직요청 받은 이후 지금까지 전역에 25만 여명분, 북한 내 인구 1/3이상 지역을 맡아 결핵 퇴치 지원사업을 하고 있다. 또한, 북한의 서남부 지역의 결핵관련 병원 및 일반 주민들이 이용하고 있는 외부 지원의 손길이 닿기 어려운 지역의 병원을 대상으로 지속적인 의료지원을 하고 있다.
2. 주요사업① 북한 내 가장 절실한 다제내성결핵 환자 치료를 위한 지원
② 북한 의료진 자립적인 발전을 위해 의약품과 의료물품을 지원, 의료진 재교육 등 지원
③ 후원자가 직접 방문하여 물품을 전달할 수 없기에 후원자의 이름과 뜻을 밝히고 지원물품을 전달
④ 전반적인 보건의료 환경을 개선시킴으로써 건강한 한반도의 미래를 준비하는데 지원
3. 유진벨재단의 기본 원칙① 북한측에서 결핵 환자를 위한 시설을 갖추고 의료진을 배치하는 곳에만 지원, 또한, 결핵 요양소나 병원에서 필요로 하는 물품만 외부 모금을 통해서 지원
② 맹목적인 무조건적 지원보다는 북한 당국의 의지를 끌어내고자 하는 취지
③ 북한 의사를 대신하여 치료를 하지 않는다는 것, 북한 의료진을 배척하는 의료지원은 금지한다는 것, 다만 첨단 의료장비의 기술 이전 관계 등은 지원함. 유진벨재단은 특정한 종교적 단체에 직접 연관되어 있지 않고 순수한 지원만을 함. 현재 북한 전역에 있는 결핵 치료기관의 거의 절반에 달하는 35곳의 결핵예방원과 요양소에 결핵 퇴르를 위한 지원품을 공급함
※ 출처 : 이용교 편저, 한국사회복지를 개척한 인물, 광주대학교 출판부, 20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