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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바울의 고난과 복음의 진보
(빌립보서 1:12-21)
“12 형제들아 나의 당한 일이 도리어 복음의 진보가 된 줄울 너희가 알기를 원하노라 13 이러므로 나의 매임이 그리스도 안에서 온 시위대 안과 기타 모든 사람에게 나타났으니 14 형제 중 다수가 나의 매임을 인하여 주 안에서 신뢰함으로 겁 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더욱 담대히 말하게 되었느니라...19 이것이 너희 간구와 예수 그리스도의 성령의 도우심으로 내 구원에 이르게 할 줄 아는 고로 20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럽지 아니하고 오직 전과 같이 이제도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히 되게 하려 하나니 21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니라."
오늘은 2020년 마지막 주일이다. 1월부터 코로나가 발생해서 거의 11개월 동안 우리는 대면을 거의 못하고, 인터넷으로 스카이프나 줌을 통해서 교제하고 있다. 그렇지만 우리 형제자매님들이 큰 갈망을 가지고 계셔서 인터넷을 통해 활발하고 진한 교제를 했기 때문에, 이런 부정적인 상황을 통해 교회가 더 성장하고 우리의 교통이 더 깊어진 것 같다. 수요집회를 보더라도 오프라인으로 할 때는 20명 내외가 나왔는데, 지금 스카이프를 통해서는 팔십 명 내지 백 명 가까운 형제들이 수요모임에 참가하고 있고, 각 세대별 지역별로 순모임이 많이 활성화돼 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이런 기회를 통하여 어떤 환경이 와도 그 환경이 우리를 해할 수 없고 오히려 그 환경을 통하여 우리가 더 성장하고 성숙할 수 있는 그 생명을 우리가 확인할 수 있게 되었다. 이제 며칠 있으면 올해는 가고 2021년 새해가 오는데, 코로나가 어떻게 될지는 몰라도 상황이 악화되는 지경에 이를지라도 우리의 교통은 더 깊어질 것이라고 생각된다. 여러분에게 참으로 감사드린다.
오늘은 빌립보서 4번째 말씀이다. 바울의 고난과 복음의 진보에 대한 말씀이다. 바울은 복음 때문에 로마에 잡혀가서 로마 감옥에 갇히게 되었다. 그런데 오히려 부정적인 것을 통해서 말씀이 나온 것처럼, 온 시위대와 그 주위에 있는 사람들이 복음을 받게 된 그런 계기가 되었다. 그래서 바울은 나의 당한 일이 도리어 복음의 진보가 된 줄을 형제들이 알기를 원한다고 빌립보 형제들을 격려하고 있다. 미나리를 보면, 시궁창이라고 하는 부정적인 상황이지만 그 생명이 시궁창을 정복하는 생명이기 때문에, 오히려 부정적인 상황을 통하여 아주 부드럽고 맛있는 미나리가 자란다.
그러므로 우리가 어떤 환경에서라도 세상을 다스릴 수 있는 생명이 된다면, 우리가 가지고 있는 환경이 오히려 생명에 유익한 환경이라고 할 수 있다. 목사님을 생각하면, 목사님은 태어날 때부터 아주 연약한 몸으로 태어나셨고, 한번 실컷 먹어보지도 못하고 맘껏 달리기도 못 하고 모든 일에 있어서 많은 제한을 받으셨다. 구미병원에 계실 때 '어떻게 나한테 십자가의 계시가 열렸는가! 세상에 얼마나 천재가 많은가! 능력있는 사람이 많다. 웟치만리, 위트리스리 같은 훌륭한 분도 있지만 어떻게 나에게 십자가의 계시가 열렸는가! 이것은 바로 나의 연약함 때문에 그렇다.'라고 말씀하셨다. 목사님이 여러가지 부정적인 조건에 매여 있었지만, 오히려 그 매임을 통하여 결국 복음의 비밀이 밝혀졌다.
창세기를 보면 하나님이 만물을 다 창조하시고 마지막에 사람을 창조하셨다. 이것은 결국은 사람 안에 온 만물이 들어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무엇을 알면, 그것을 다 지배할 수 있다. 기계도 복잡하지만 기계를 아는 사람은 기계를 너무너무 쉽게 다룰 수 있다. 기계가 자기 안에 들어있기 때문에 그렇다. 만물이 바로 사람 안에 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만물을 지배하고 정복하고 다스리라고 하신 것이다. 하나님이 그냥 말씀하신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그렇게 만드신 것이다.
그러니까 사람이 정상적인 사람의 자리에 있으면, 사람은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위치에 있는 것이다. 그러나 사람이 잘못됐기 때문에, 그 환경이 오히려 사람을 괴롭히는 것이 되고 말았다. 그래서 사람이 원망하는 것은 주로 환경 때문에 원망을 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이 얼마나 중요한가! 환경이 문제가 아닌 것이다. 환경 때문이 아니고, 내가 어떤 사람이 되면 유익한 환경이 되기도 하고 또 무익한 환경이 되기도 한다는 것이다.
바울이 받은 고난이 복음에 유익한 진보가 되었다고 했는데, 바울은 왜 이런 사람이 되었는가? 바울이 받는 모든 고난과 환경들이 자기 때문에 일어난 것이 아니라, 전부 복음 때문에 일어난 것이기 때문이다. 바울의 소원은 '내가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기를 원한다.'는 것이다. '내가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하다.'고 바울은 말하고 있다. 바울은 어떤 환경에서라도 그리스도가 나타나기를 원하는 그런 사람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어떤 경우에도 당신 자신이 손해를 보실 분이 아니라는 것이다. 목사님이 구미병원에 입원해 계실 때 우리는 매우 걱정했다. 목사님이 혼수상태까지 가시고, 어떻게 될지 모르는 상황에서 형제들이 23일간 교회에 모여 특별집회를 하고 함께 기도하고 간증을 했을 때가 있었다. 목사님이 그때 병원에서 “하나님께서 나를 살려주시는 것은 이 십자가의 계시를 완전하게 밝히기 위해서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나를 일찍 데려가시면 하나님이 손해다.”라고 말씀하신 적이 있다. 하나님과 동역하는 사람은, 어떤 경우에도 손해를 보지 않는다는 것이다.
머리와 몸을 보면, 몸은 머리에 동역한다. 그리고 머리는 몸을 위한다. 그래서 몸이 자기를 온전하게 표현하기를 원한다.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도 똑같다. 우리가 하나님의 몸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몸을 통하여 당신의 몸이 온전하게 드러나기를 원하신다. 그래서 몸을 소중하게 여기고, 몸을 귀하게 여기고, 무엇보다 하나님께서 몸을 보호하신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아담은 머리가 분리되었다. 하나님과 분리되었다. 창세기 10장에 내가 사람 지은 것을 한탄한다고 말씀하실 정도로 사람의 지경이 그 지경까지 갔다는 것이다. 머리와 분리된 아담은 이리 가도 망하는 길이고, 저리 가도 망하는 길이다.
가지가 포도나무에서 떨어져 나가면 망하는 길밖에 없다. 그러니까 우리가 어떤 길을 택해서 어떤 길 안에 사느냐 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어떤 길 안에 사느냐에 따라서 우리가 가는 곳이 달라진다. 보통 사람들은 환경이 사람을 결정한다고 생각하는데, 안 그렇다. 사람이 환경을 결정한다. 좋은 사람이 가면 그 환경은 좋은 환경이 되고, 나쁜 사람이 가면 나쁜 환경이 된다. 잭슨빌에 이** 형제가 있는데 그 형제 집을 가봤는데, 예전에는 폐가였다고 한다. 그런데 그 형제가 가서 그 집을 깨끗하게 해서 너무나도 좋은 집이 된 것을 봤다. 원래 버려진 집이었지만, 그 사람이 들어가니까 폐가가 좋은 집이 되었다. 그런데 아무리 좋은 집이라도 나쁜 사람이 들어가면 그 집은 흉가가 된다. 그러니까 사람이 환경을 결정하는 것이다.
바울은 오직 하나님의 경륜을 유익하게 하기만을 위해서 살아왔다. 지난 시간에 말씀드린 것처럼, 신약경륜의 비밀이 밝혀지기 위하여서 살았던 것이 바울의 삶이다. 내가 하나님과 동행하게 되면, 하나님이 가시는 곳으로 갈 수밖에 없게 돼 있다. 동행한다는 것은 옆에 손 잡고 간다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가시는 곳을 따라가는 것이다. 주의 손에 이끌려서 하나님이 가시는 곳으로 우리도 가게 된다는 것이다. 이렇게 살다보니까 바울은 하나님의 경륜에서 벗어나는 모든 것을 거절하게 되었다. 바울은 그리스도를 알고 난 다음에, 내가 전에 알던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긴다고 했다.
전에 알던 모든 것이 무엇인가? 유대교다. 종교와 유대교의 율법, 할례나 의식, 종교적인 전통 등이 그것이다. 바울은 공부를 많이 한 사람이다. 어떤 주의나 사상, 문화도 여기에 속한다. 그리스도를 알고 나니까, 이런 모든 것들이 전부 다 배설물이다. 그래서 바울은 그런 모든 것들을 거절하게 됐다. 문화와 종교와 율법 등이 세상을 지배하고 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 문화도 바뀌고, 종교의 형식들도 바뀐다. 옛날에 우리가 어릴 때는 교회에 의자가 없었고 마룻바닥에 무릎을 꿇고 예배를 드렸었다. 또 피아노를 치면 이단이라고 했다. 교회에서 악기를 절대 다루면 안되는 그런 곳도 있었다. 그런데 이런 것들은 전부 다 바뀐다.
아담의 생각에서 나온 모든 것은 시간이 지나면 전부 다 바뀐다. 그러나 생명으로 가는 길은 절대 바뀌지 않는다. 천 년 전이나, 오백 년 전이나, 백 년 전이나, 지금이나 생명으로 가는 길은 똑같다. 봄에 씨를 뿌려서 경작해서 가을에 추수하는 그것은 바꿀 수가 없다. 남녀가 결혼해서 아이를 가지면 열 달 후에 아이를 낳는다는 것은 바꿀 수가 없다. 이것은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생명이 사람에게 와서, 사람이 하나님 사람이 되는 것, 이것은 바뀌지 않는다는 것이다.
생명은 생명대로의 길을 가고 있고, 지식은 지식대로의 길을 가고 있다. 그래서 지식은 사람의 생각대로 따로따로 놀고 있다. 꼭 그와 같이 하나님의 경륜도 생명의 길이기 때문에 절대 바뀌지 않는다. "우리 가운데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의 예수의 날까지 이르실 줄을 확신한다."고 말씀하고 있는데, 왜 그런가? 하나님이 시작한 생명의 길이기 때문에 그렇다. 두 길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하나는 생명 나무의 길이고, 하나는 선악을 알게 하는 지식나무의 길이다.
이 두 길이 계속 전쟁을 하고 있다는 것을 우리가 알 수 있다. 사람의 생각으로 만들어진 것들, 이것은 지식나무의 길이다. 종교, 율법, 교리, 제도, 관습, 문화, 주의, 사상 등, 이 모든 것은 전부 창세기 3장 이후에서 나온 것이다. 그런데 이런 것들이 본래부터 있는 것들을 계속해서 도전하고 핍박하고 있다. 본래부터 있는 것은 생명나무의 길이다. 하나님으로부터 말미암은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경륜을 수행함에 있어서, 무엇이 방해하는가? 사람의 생각에서 나온 것들이 방해한다. 그것이 아무리 좋은 것이라 할지라도, 아무리 경건하고 거룩하고 아름답고 선한 것이라 하더라도, 사람의 생각에서 나온 것은 생명나무의 길을 방해하고 있다.
그래서 종교, 율법, 문화, 의식, 관습, 주의, 사상 등, 이 모든 것은 생명나무의 길을 방해하고 있다. 나도 철학에 무엇이 있는가 싶어서 대학을 그쪽으로 공부했다. 지금 그리스도를 알다 보니까, 이런 지식들이 깊이 하나님의 생명을 방해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그런데 이것 가운데 하나님의 생명의 길을 제일 방해하고 있는 것은 자아이다. 자아는 원래부터 있는 것이 아니다. 선악과를 먹고 난 다음에 선악과가 육신이 된 것이 자아이다. 사람은 원래부터 자기가 있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자기 생각, 자기 주장, 자기 고집, 이런 것을 다 자기로 알고 지키고 있다.
우리가 이 복음을 알고 난 다음에, 십자가에 못 박힌 완전한 인생, 참 사람을 알고 난 다음에 이런 것을 거절하게 됐다는 것이다. 농사를 짓는 사람은 농사짓는 데 필요한 것만을 가져야 한다. 농사짓는 기술을 배우는 귀농학교가 있다. 거기서 농사 기술 공부를 열심히 하고, 농사에 관한 책들을 많이 보고, 농기구들을 많이 산다. 그래서 머릿속에 농사 기술 지식이 있고, 농기구도 있는데, 정작 씨와 땅이 없다면 무슨 소용이 있는가! 씨와 땅이 없으면, 자기가 가지고 있는 것이 무슨 필요가 있겠는가?
우리는 다른 것이 다 없어도 땅이 있어야 되고 씨가 있어야 된다. 그래야 농사를 지을 수 있다. 이것은 오늘날 종교의 상황과 똑같다. 하나님에 관한 지식도 많고, 종교적인 방법들도 좋은 게 너무 많다. 그런데 정작 꼭 있어야 하는 본질이 빠져버리고 말았다. 정말 그리스도가 없다. 그리스도에 관한 것은 너무 많은데, 정작 그리스도를 모른다. 그리스도가 누구인지를 모른다. 이것이 오늘날 종교적인 상황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나라는 서방에서 천주교가 먼저 들어왔는데, 천주교가 처음 들어왔을 때 우리나라의 전통과 부딪쳐 핍박과 고난을 받고 많은 사람들이 죽임을 당했다. 서양에서 들어온 서양 문화와, 한국 문화가 부딪친 것이다. 선교사들이 들어와서 보니까, 우리나라 사람들이 제사를 드리면서 조상에게 절을 하더라는 것이다. 절을 하는 것은 우리의 고유한 전통이다. 그런데 그들은 우상숭배라고 하여 이것을 금지시켰다. 이것을 금하는 천주교를 당시의 위정자들은 우리 전통을 파괴하는 것으로 보고, 천주교인들을 얼마나 많이 죽였는지 모른다. 서울에 절두산이란 곳이 바로 목을 자르는 처형 장소였다.
이것을 볼 때 복음을 위하여 순교한 것 같지만, 그게 아니다. 서양 사람들은 절을 하지 않는다. 그들의 문화적 관점에서 보니까, 절을 하는 것은 우상 숭배로 생각됐던 것이다. 이것은 문화 충돌이다. 순교했다느니, 복음을 전하려다 죽임 당했다느니 그렇게 말하지만, 사실 이것은 복음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일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우리는 복음을 전파하는 데 있어서, 본질적인 것과 부수적인 것을 구별해야 한다. 아무리 좋은것이라도 그리스도가 아니면 말하지 말아야 한다. 그리스도가 아니면 우리는 관계를 해서는 안 된다.
세상의 문명이 아무리 바꿔져도 씨 뿌리는 것은 여전한 것과 마찬가지로, 세상이 아무리 바꿔져도 복음을 전하는 것은 똑같은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고전2:2)고 말하고 있다. 우리가 진짜 복음을 알면, 다른 것은 말을 할 수가 없다. 나는 대학 다닐 때 조그만 책자를 가지고 다니면서 예수를 많이 전도했다. 그런데 그것은 결국 교리를 전하는 것이었다. 복음은 누가 전하는가? 내가 그런 사람이 되어서, 내가 그리스도에게 점령 당하는 사람이 되어서, 내가 십자가에 점령 당하는 사람으로서 다른 사람에게 그 생명을 전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단순하게 전달하는 것이 아닌 것이다.
하나님의 경륜은 어떤 경륜인가? 하나님의 경륜은 평화의 복음이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경륜의 내용은 십자가에 못 박혀서, 하나님이 원래 지으셨던 인생의 정체가 완전히 드러난 그 자리다. 하나님께서 이 사람을 보고 "보시기에 심히 좋았다"고 하는 바로 그 사람이다. 이 사람이 전해지면 어떻게 되는가? 둘이 합하여 하나가 되는 것이다. 이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전해지면, 모든 벽이 다 허물어지는 것을 우리는 느낄 수 있다.
왜 인간은 평화가 없는가? 종교, 율법, 문화, 관습, 주의, 의식, 사상, 이런 것은 부딪치면 바로 싸우게 된다. 종교와 종교가 부딪치면 싸움이 일어난다. 전쟁이 일어난다. 율법이 만나면 잘 한 사람, 못 한 사람 차별이 생긴다. 문화, 관습, 주의, 사상은 부딪치면 충돌이 생긴다. 결국 이런 것은 평화를 가져오지 못하고 정반대가 되고 만다. 부모 자식 사이라도 이것이 끼어 들면 원수가 된다. 내가 서울교회 처음 왔을 때 자기 아들이 다른 데 다니고 있는데, 나보고 좀 만나 달라고 하는 형제가 있었다. 이 아들이 종교에 빠져서 아버지와 관계가 안되는 것이다. 아버지 말이 조금도 먹히지 않는다. 자기 아들이라도 종교가 들어가면 하나가 될 수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하나님과 사람, 사람과 사람 사이에 언제 평화가 오는가? 우리가 십자가 안으로 인도될 때, 하나님이 원래 지으셨던 그 자리로 우리가 가기 전에는, 평화라는 것이 절대 없다. 인류가 다 평화를 누리는 길은 오로지 십자가밖에 없다. 십자가는 둘 사이의 막힌 담을 헌다. 그래서 아까 말씀드린 종교, 율법, 전통 등 이 모든 것은 전부 다 자기중심적이다. 기독교는 기독교 중심으로 세계 종교를 통일하길 원하고, 불교는 불교 중심으로 종교를 통일하길 원한다. 같은 자리에 앉아 있지만, 전부 생각이 다르다. 동상이몽이다. 남북한 대표가 판문점에서 만나 통일을 논의하지만, 전부 자기 중심으로 통일이 되길 원하기 때문에 절대 통일될 수가 없다.
그래서 우리는 십자가의 도가 평화의 복음이라고 이야기하는 것이다. 십자가는 종교가 아니다. 십자가는 하나님이 사람을 지으신 원래의 자리로 돌아가는 것이지, 종교가 아니다. 십자가에 달린 사람을 놓고 어떻게 두 사람 사이에 담이 생기겠냐는 것이다. 자기가 이런 고집을 가지고 있고 이런 사상을 가지고 있지만,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일컬음을 받았던 그 사람이, 모든 것이 다 끝나고 재가 되어 버린 그 자리로 우리가 인도될 때, 우리는 그 앞에서 할 말이 없다. 아무 할 말이 없다. 우리는 참으로 죽은 사람을 만나게 되면, 그 앞에서 아무 할 말이 없다는 것을 경험하게 된다.
십자가가 아니면 사람과 사람 사이의 막힌 담이 결코 허물어지지 않는다. 사람들은 다 방법을 가지고 있다. 다 좋게 하려고 방법을 가지고 있지, 나쁘게 하려고 방법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그런데 방법 안에는 다 선악과가 들어 있는 것이다. '이렇게 하면 될 텐데. 저렇게 하면 될 텐데.' 그래서 좋게 하자고 모였는데 결국 마지막에는 싸움을 하게 되는 것이다. 사람의 생각에서 나온 것은 어떤 것이라도 하나가 될 수 없다. 십자가는 모든 방법을 끝내는 것이다.
죽은 자 앞에 가면 모든 방법이 소용없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상대방이 먼저 끝나기를 원한다. '네가 먼저 끝나면 좋겠다. 네가 끝나면, 네가 먼저 내려 놓으면 나도 그렇게 하겠다.'고 한다. 그런데 십자가는 누구하고 타협하는 것도 아니고, 그 앞에서 바로 내가 끝나는 자리다. 나도 내가 끝나지 않고 상대방이 끝나기를 원하니까 하세월을 보내고 말았다. 그래서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다. 그런데 십자가에서 내 운명이 발견되니까, 아! 저 자리가 내 자리구나! 하나님께 버림을 받아도 아무 할 말이 없는 자리구나! 그때 내가 흙이라고 하는 사실을, 진짜 놀라운 것을 발견하게 된 것이다.
이 자리가 인생의 자리구나! 그래서 여기에 똥을 부어도 받을 수밖에 없고, 오줌을 뿌려도 받을 수밖에 없고, 어떤 것을 뿌려도 받을 수밖에 없는, 그 자리가 인생의 자리다. 하나님은 이 재료를 가지고 사람을 만드신 것이다. 이 재료를 가지고 사람을 만드셨기 때문에, 하나님 마음대로 하시지 않겠는가! 인생은 하나님 마음대로 하셔야 복이 되는 것이다. 내 마음대로 해서는 절대 복이 되지 않는다. 십자가는 우리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 모든 것을 다 태우는 자리다.
구약의 번제단의 불은 사람이 만든 불이 아니다. 하늘에서 내려온 불이다. 이 불은 모든 것을 완전하게 태워 버리는 불이다. 소나무도 태워 버리고, 감나무도 태워 버리고, 참나무도 태워 버리고, 송아지도 태워 버리고, 양도 태워 버리고, 모든 것을 다 태워 버린다. 재가 되었는데 거기서 나를 찾아 볼 수 있는가? 재가 되었는데 거기서 소나무를 찾아볼 수 있는가? 재에서 참나무를 찾아볼 수 없다. 나를 찾아볼 수 없다. 이 말은 원래 나라고 하는 것이 없다는 이야기다.
원래 '나' 라는 것이 없는데, 속아서 원래 내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십자가에서 완전히 태워져서 재가 되면, 소나무재하고 참나무재는 구별이 없다. 이방인과 유대인이 구별이 없다. 재가 됐는데 잘 난 사람, 못 난 사람 구별이 없다. 그렇기 때문에 평화가 온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경륜이 수행되려면 사람으로 말미암아 만들어진 모든 것들이 다 끝나야 한다. 나로 말미암은 것이 다 끝나면, 하나님의 경륜의 모든 것이 자동적으로 수행된다.
십자가는 우리를 창세 이전으로 돌아가게 한다. 창세기 3장 이후에 사람이 만든 최상의 것이 종교이다. 그래서 가인과 아벨이 하나님에게 제물을 드리러 간 것이다. 하나님이 오라고 한 것도 아니고, 또 하나님이 찾아오신 것도 아닌데, 자기들이 갔다. 그들은 누구에게 간 것인가? 자기를 만드신 하나님에게 갔는가? 자기가 원하는 신에게 갔는가? 자기를 지으신 하나님께 간 것이 아니다. 자기가 원하는 신에게 간 것이다. 이것이 만들어진 신이다. 사람들은 왜 신을 만드는가? 자기 소원을 들어주는 신을 만드는 것이다.
자기 소원을 들어주는 신은 자기가 만든 것이다. 결국은 도로 자기가 신이다. 모두 각자가 신이니까, 신과 신끼리 싸움을 할 수밖에 없다. 최초의 종교로 말미암아 최초의 전쟁이 일어난 것이다. 마지막 전쟁은 아마겟돈 전쟁이다. 아마겟돈 전쟁은 결국 종교전쟁이다. 최초도 그렇고, 최후도 그렇고, 종교로 인한 것은 그 결과가 전쟁밖에 없다는 것이다. 결국 사람이 만든 종교는 극단적인 결과를 가져올 수밖에 없다. 십자가만이 모든 것을 하나 되게 할 수 있다. 하나가 되려고 노력하는 게 아니고, 하나가 될 수밖에 없다. 아무것도 없기 때문에 저절로 하나가 될 수밖에 없다.
그래서 바울은 그리스도를 위하여 모든 것을 해로 여긴다고 말하고 있다.(빌3:7) 하나님으로부터 오지 않은 모든 것은 다 해다. 우리가 만일 내 일로 고통을 당하고 있다면, 절대로 평안의 복음이 전해지지 않는다. 내 일이 많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대부분 내 일을 하고 있다. 염려가 생기는 것도 내 일 때문에 생기는 것이고, 걱정이 생기는 것도 내 일 때문에 생기는 것이고, 잘 하고 못하고 하는 것도 전부 다 내 일 때문에 생기는 것이다. 만약에 하나님의 일 때문에 염려가 생긴다면, 그 사람은 얼마나 복된 사람이겠는가?
부산과 서울을 오가며 화물차를 운전하는 김*환 형제가 있는데, 몇 년간 관계가 끊겼다가 최근 스카이프를 통해 말씀을 잘 듣는다. 이 형제가 최근에 귀가 뚫렸다. 이 형제를 보면서 아! 화물 트럭이 정말 극한 직업이구나! 하고 느낀다. 밤새 운전을 한다. 지난 번에는 쌀 25톤을 싣고 어디 가냐고 물으니 강릉 간다는 것이다. 거기서 다시 물건 싣고 부산으로 온다. 애기가 있어서 마누라가 코로나 걸린다고 집으로 들어오지 말라고 해서 노숙인처럼 잘 씻지도 못하고 사는데, 그 형제가 점점 밝아지는 것이다. 그 형제가 간증하길 '내 인생이 사는 것은 먹고 사는 것 때문에 사는 게 아니고,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기 위하여 내 인생이 사는 것이다.'라고 간증했다. 그 형제의 간증을 듣고 큰 감동을 받았다. 우리 인생의 육신적인 고통은 고통이 아니구나!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기 위하여 우리가 사는 것은 고통이 아니구나! 하고 알게 됐다.
하나님의 비밀의 경륜은 하나님의 비밀이신 그리스도와 그리스도의 비밀인 교회이다. 하나님이 누구신 줄을 어떻게 알겠는가? 전부 다 자기 하나님을 진짜 하나님이라고 하고 있는데, 이 영계의 세계, 혼란스러운 세계를 누가 통일시키겠는가? 사람이 될 수 있는 하나님만 진짜 하나님이시다. 그러니까 증명되지 아니하면, 어떤 씨가 진짜 씨인지 어떻게 아는가? 심어 봐서 나와야 진짜 씨 아니겠는가? 진짜 열매가 나와야 진짜인 줄 알게 된다.
하나님의 비밀을 아무리 알려고 해도 안 된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을 나타내셨다. 예수님을 보니까 이제 하나님에 대한 의문이 없다.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 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요1:18)고 하셨다. 하나님이 나타나셔야 하나님을 아는 것이다. 그래서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비밀이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비밀은 교회이다. 이천 년 전에 이 땅에 왔던 예수 그리스도라는 이 사람만큼 사람의 구설수에 오른 사람이 없다.
이 사람이 신이냐? 인간이냐? 인간이면서 신이냐? 이 복잡한 것이 오늘도 해결되지 않고 있다. 예수님에 관하여 쓴 전기는 수없이 많다. 전부 다 자기 관점에서 썼는데, 그것을 보고 예수를 만날 수가 없는 것이다. 이 사람이 누구인가? 왜 이렇게 사람의 입에 오르내려도 결론이 없는가? 이것은 그의 표현으로서의 교회가 없었기 때문이다. 나도 교회 오기 전에 하나님 문제가 해결이 안되어 암담했다. 대학 4년 동안 CCC에서 전도 활동하고, 마지막 4학년 때 엑스플로74가 끝나고 난 다음에 내 속에 공황상태가 오고 말았다. 내가 그렇게 몸 바쳐 일했던 그 하나님을 도무지 모르겠고, 어디로 가야 할 바를 모르는 깊은 어둠이 몰려 왔다.
그동안 내가 모르는 하나님, 모르는 예수를 계속 이야기하고 있었다는 생각이 깊이 들었다. 그런데 하나님의 표현체, 실체로서의 교회를 보고 난 다음에, 아! 그리스도가 이렇게 몸으로 드러났구나! 하고 알게 되었다. 그리스도가 몸으로 드러나지 않으면 우리는 그리스도를 전혀 알 수 없다. 하나님의 비밀이신 그리스도, 그리스도의 비밀인 교회, 이것이 밝혀지는 것이 바로 신약경륜이 수행되는 것이다. 교회가 확실하게 밝혀진다면 모든 이론은 다 끝난다. 그리스도에 대한 이론은 더 이상 필요가 없다. 삼위일치니 이위일치니 필요가 없다. 모든 구설수가 끝나게 된다. 하나님은 예수 안에서 인격이 되고, 예수는 교회 안에서 인격이 된다.
우리가 들은 바고, 본 바고, 주목하고 우리 손으로 만지는 것이 인격이다. 최종적인 열매가 드러날 때 최종적으로 먹을 수 있다. 구약에 있는 사람은 하나님을 먹을 수 없었다. 그런데 예수를 만나니까, 하나님을 먹을 수가 있게 되었고, 교회 안에서 우리는 예수를 먹을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신약 경륜이다. 우리 교회 간판을 '최종적 사회의 이상을 제시하는 서울교회'라고 붙였다. 만약에 이 이상이 지금 현재 실현되지 않고 있다면 이건 거짓말이고 공수표다. 우리는 하나님의 최종적 이상이 실현되고 있는 이 아름다운 몸 된 교회에 살고 있기 때문에, 이것을 붙이고 싶었다. 그래서 와 보라! 와 보라! 하고 말하고 싶다.
바울은 이 비밀의 경륜을 수행하기 위해서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내 육체에 채우겠다."고 말하게 되었다. 다시 말하면 우리 자신이 예수의 복사판이 되지 아니하면, 우리 자신으로 그리스도가 나타나지 아니하면, 예수를 어떻게 알겠는가? 자기 인생을 통하여 그리스도가 나타나는 이 일을 위하여, 바울은 자기 인생의 모든 것을 쏟아 붓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경륜은 누군가의 육체를 통해서 채워져야만 완성되어진다. 예수 그리스도의 육체를 통해서 이것이 채워졌을 때, 하나님의 경륜이 드러나게 되었다.
예수님이 마지막에 십자가에 못 박혀서 마지막 하신 말씀이 "다 이루었다."는 말씀이다. 무엇이 다 이루어졌다는 것인가? 육체를 통하여서 하나님이 하나님 되신 것이 드러나게 됐다는 것이다. 참 사람이 드러나니까, 진짜 사람이 드러나니까, 하나님이 드러나시게 되었다는 것이다. 바울의 육체를 통하여 그리스도가 채워지게 되었을 때, 교회가 드러나게 되었다. 그래서 바울은 '나의 달려갈 길을 다 달리고 믿음을 지켰다'고 이야기하고 있다. 바울은 이 교회에서 그리스도가 온전하게 나타나기 위하여, 자기의 남은 고난을 육체에 채운 사람이다.
농사 짓는 사람들은 전에 농사지은 사람들의 남은 고난을 자기 육체에 채우고 있다. 작년에 농사 지었다고 해서 작년에 거둔 것으로 계속 먹을 수는 없는 것이다. 그 씨를 받아서, 작년에 농사 지은 사람이 고생한 것처럼 나도 고생을 해야, 가을에 추수를 하게 되는 것이다. 엄마는 엄마 자신의 고난으로 나를 키웠다. 내가 엄마가 됐을 때, 나도 엄마가 했던 것처럼 아기에게 해야, 아기가 자라게 된다. 만일 예수께서 자기의 육체로 그것을 감당하지 않았다면 하나님의 경륜은 나타날 수 없는 것이다.
예수님은 하나님이 사람이 되시는, 하나님이 온전하게 나타나시는 이 일을 위하여 자기의 전인생을 드린 사람이다. 목사님 일생을 보면, 단순하게 딱 하나뿐이다. 하나밖에 없다. 목사님을 만난 지 40년이 넘지만, 40년 전이나 지금이나 똑같다.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자기 육체로 채워서, 형제들에게서 그리스도가 온전히 나타나기를 원하는 것, 이 목표 하나로 사셨다. 우리의 목표도 마찬가지이다. 목사님의 남은 고난을 우리 육체에 채워서 교회가 온전하게 세상에 드러나기 원하는 이 목표로 사는 것이다.
“자고로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지만 아버지 품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 ‘아버지 품속의 독생하신 하나님’이라는 말을 제자들은 언제 하게 되었을까? 그들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시기 전에는 이것을 몰랐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서 인생의 정체가 완전하게 드러나게 되었을 때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신, 숨이 코에 붙은 그 인생, 아무리 조롱해도 뛰어내릴 수 없는 그 참사람이 드러나는 것을 보게 됐을 때, 제자들이 ‘아버지 품속의 독생하신 하나님’이 바로 저 사람이구나! 하고 알게 되었다.
나도 십자가에 못 박힌 그 그리스도를 알기 전까지는, 능력으로 나타나는 하나님의 개념이 깨끗하게 정리가 되지 않았다. 하나님은 능력이 아니시구나! 하나님은 온전한 사람, 참사람을 통해서 나타나시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분의 육체를 통해서 하나님이 드러나시게 되었다. 그래서 육체가 너무나 소중하다. 육체를 통해 고난을 받을 수밖에 없지만, 육체의 고난이 아니면 하나님이 온전하게 드러나실 수가 없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우리의 육신을 통해서 드러나게 되려면, 우리는 고난을 받게 된다.
왜 그런가? 우리 육신은 교회 오기 전에 종교와 지식과 세상으로 찌들었었다. 거기서 하나님이 나타나시려면, 우리 안에서는 싸움이 일어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나는 처음에 목사님께 ‘나는 왜 이렇게 말씀이 안 들립니까? 답답합니다’ 하고 물으니 목사님께서 ‘전쟁이다. 생명과 지식의 전쟁이다.’라고 말씀하셨다. 우리 육신을 통하여 그리스도가 나타나려면 이 전쟁에서 생명이 승리해야 된다. 만약 이 전쟁에서 우리가 미온적 태도를 취한다면, 우리는 많은 시간을 소모하게 될 것이다. 결국 교회에 와도 시간이 많이 걸리는 것은 이 전쟁에서 미온적 태도를 취하고, 지식에 세상에 손을 들어주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적극적인 자세를 취해야 한다. 적극적은 자세는 말씀을 깊이 듣고 형제들과의 깊은 교제 안에 들어가는 것이다. 적극적인 교회생활을 통해, 우리 안에 지식과 생명이 갈라지게 된다. 교회 안에서도 빨리 말씀을 알아 듣고 교회 안으로 금방 들어오는 형제들은 왜 그런 것인가? 생명의 물줄기를 찾아 거기에 파이프를 확실히 꽂고, 그 물이 들어와서 지식과 세상이 바로 씻겼기 때문이다.
오늘날의 기독교 상태를 보면, 세상과 지식이 교회를 거의 지배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목회자 모임의 목사님들의 말을 들어보면 '가망이 없다. 희망이 없다.'고 이구동성으로 말한다. 그리스도를 모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가 누구인지 모르고 그리스도를 말한다. 그리스도에 대한 지식은 너무 많은데, 그리스도가 빠져 있다. 생명과 지식의 전쟁에서 거의 패배한 상태가 오늘의 교회 상태라고 감히 진단이 된다.
사도 요한은 유태교를 가리켜서 사탄의 회(會)라고 하였다. 사탄의 집단이라는 뜻이다. 이것은 굉장히 정곡을 찌르는 말이고 무서운 말이며, 유태교의 모든 역사를 한마디로 표현하는 말이다. 내가 미국에서 복음을 전할 때 어떤 형제가 ‘기독교 역사가 이천 년인데 너희 교회가 생긴 지 얼마 안되는데, 너희가 진실이라면 기독교 이천 년 역사가 아무것도 아니란 말이냐?’ 하는 말을 들었다. 그런데 아무리 역사가 깊어도 그리스도가 없으면 가짜다. 아무리 웅장해도 그리스도가 없으면 법궤가 빠진 성막과 같다.
'사탄의 회'라고 말한 이유는 무엇인가? 유태교인들은 그 행동을 보면 아주 훌륭하고 선한 사람들이다. 예수님께서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마5:20)고 말씀하실 만큼 그들은 율법적으로 흠이 없는 사람들이다. 그런데 무엇이 문제인가? 하나님의 신약경륜을 정면으로 반대하는 집단이다. 하나님은 사람이 될 수 없고, 하나님은 영원히 하늘에 계시고 사람은 땅에 있어서, 하늘의 하나님을 경배하고 찬양해야 한다고 그들은 생각한다. 예수님이 죽으신 것도 신약경륜 때문이다. 하나님이 사람이 되신 것, 말씀이 육신이 되는 것을 정면으로 반대하는 집단이기 때문에 사탄
의 회라고 했다.
하나님의 신약 경륜은 그 사람 속에 하나님이 사시는 것이기 때문에, 이것은 사탄에게 치명적인 것이다. 만약에 우리가 예배, 기도, 금식, 봉사 등 모든 것을 다 열심히 잘한다면, 사탄은 잘한다고 할 것이다. 단 하나!하나님의 신약경륜만 빼놓으면, 신약경륜만 없으면 사탄은 다 좋아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신약경륜이 이루어지면 사탄은 치명타를 받는다. 왜냐하면 말씀이 육신이 되어 버리면 사탄이 있을 자리가 없어져 무저갱으로 내려가야 하기 때문이다.
옛날에 우리는 기도로 사탄을 쫓아내려 하고 여러 방법으로 귀신을 물리치려 노력했는데, 하나님의 신약경륜이 완성되면 그 사람 자신이 전신갑주이고 그 사람 자신이 무기이다. 내가 어떤 무기를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고, 내 자신이 무기이고 내 자신이 빛이다. 내 자신이 진리이고 생명이다. 이 사람을 누가 감당하겠는가? 하나님의 신약경륜은 생명을 대체하는 모든 방법들을 다 끝내게 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신약경륜이 나오기 전에는 비슷한 것을 생명으로 말했었고 우리와 비슷한 말을 하는 사람도 많았다.
하지만 문제는 진짜 그 사람으로 그 말을 하느냐? 자기 지식으로 말을 하느냐?이다. 십자가의 복음도 자기 지식으로 말할 수 있다. 그런데 그 사람이 십자가가 되지 않으면, 사탄을 이길 수 없다. 실재가 드러나면 모든 지식과 이론이 저절로 사라진다. 빛이 들어오면 어둠이 금방 사라지는 것과 같이 세상이 조용해지게 된다. 우리 자신이 변화하게 되면 우리의 모든 방법이 없어져 버린다. 우리가 거듭나게 되면, 말씀이 육신이 되면, 우리 안에 있는 ‘내가 형제를 어떻게 사랑해야겠다. 내가 주님을 위해 어떻게 해야겠다.'는 모든 방법이 없어진다.
생명은 방법이 아니다. 생명에는 방법이 없다. 새가 방법으로 날아가는 것이 아니다. 물고기도 헤엄치는 데 방법이 없다. 나의 방법이 없어져버리면, 상대방도 방법이 없어져버린다. 내가 무장해제를 해버리면 상대방도 무장하지 않고 조용해진다. 우리가 만일 방법을 동원한다면, 사탄은 우리보다 더 훌륭하고 더 거룩하고 더 나은 방법을 동원할 것이다. 방법을 가지고 하면, 구분을 할 수 없게 된다.
예수님이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라고 말씀하신 것은 자기 자신이 방법이 된다는 말이다. 하나님이 사람을 지으시고 사람에게 만물을 지배하고 정복하고 다스리라고 하신 것은, 그 사람 자신이 지배하고 정복하고 다스리는 방법이고 길이고 생명이고 진리가 된다는 말이다. 우리 자신이 방법이 된다면, 사탄이 그대로 드러난다. 방법을 가지고 꾸민 것이 사탄이다. 사랑이 없는데 사랑으로 꾸미고, 거룩이 없는데 거룩으로 꾸민 것이다.
하나님의 경륜을 수행하기 위하여 고난 받은 바울을 생각해보자! 바울은 세상과 종교라는 두 세계 사이에서 복음을 전하고 있다. 다른 세계를 전파하고 있었기 때문에, 세상과 종교로부터 고난을 받게 되었다. 그렇지만 고난 받는 그것이 오히려 복음의 진보가 되었다. 우리에게 이런 고난을 받는 자리가 없이 편안하면, 우리 생명이 어떤 생명인지 드러나지 않는다. 우리가 어찌할 수 없는 상황을 만나게 되면, 나도 모르게 생명이 튀어나오는 경험을 하게 된다.
“형제들아 나의 당한 일이 도리어 복음의 진보가 된 줄을 너희가 알기를 원하노라. 이러므로 나의 매임이 그리스도 안에서 온 시위대 안과 기타 모든 사람에게 나타났으니” 라고 말하고 있다. 자기는 매여 있는데 복음이 더 드러나게 되었다고 한다. 참깨는 그냥 있으면 냄새가 나지 않는다. 볶아지고 틀에 짤 때 향기가 더 진하다. 우리 뜻대로 안 되는 그런 자리에 가게 되면 그 사람이 생명으로 말미암았는지, 세상으로 말미암았는지 금방 구분이 된다.
오늘 아침에 뉴욕에 있는 두 누님이 생각났다. 내가 90년 초에 뉴욕에 갔을 때 세탁소를 하고 계셨는데 무척 바쁘셨다. 토토 형님이 나를 그 세탁소에 데려갔지만 너무 바빠서 조용히 마주앉아 대화할 시간이 전혀 없어서 틈틈이 말씀을 전했다. 그때 권** 누님이 복음을 받고 너무 좋아하시면서 ‘내가 형제 말씀을 들으니까, 내 인생이 시골의 흙먼지 날리는 그런 인생이었는데 이제 물이 뿌려져 먼지가 싹 가라앉는 듯 평안을 얻는다’고 간증하셨다. 그때 복음을 듣고 교회에 나오시게 되시고 뉴욕교회의 중심이 되셨다.
그분이 이번에 서울교회에 아주 귀한 헌금을 하셨다. 코로나로 형편이 어려운 가운데서도 헌금을 하면서 내 전부를 드리고 싶은 마음이라고 하셨다. 그때 생각을 하니 용기없는 내가 그 와중에 어떻게 복음을 전했는지 모르겠다. 생명이 그런 것이다. 생명은 아무리 어려운 상황이라도 그 틈을 비집고 들어간다.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셔서 행하신 모든 것은 다 복음의 진보가 되었다. 사탄이 십자가에 그를 매달았을 때, '이제 끝났다. 예수는 끝났다.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했던 저 사기꾼이 막을 내렸다.'고 사탄은 생각했을 것이다. 그런데 그것이 복음의 진보를 가져왔다는 것이다. 그것이 신약경륜의 완성을 가져왔다. 왜냐하면 참사람이 드러나니까, 자동적으로 참 하나님이 나타나셨기 때문이다. 그 자리에서 유대인과 이방인이 하나 되는 십자가의 도가 나타나게 되었고, 하나님의 영원한 경륜이 드러나게 되었다.
내가 무슨 일을 당하든지 신약경륜에 동참하는 그런 자리에 있다면, 겉으로는 고통을 당해도 실속은 하나님의 복음이 진보되고 전파될 것이다. 어떤 형제가 어려운 일을 당했는데 그 어려운 일을 통해서 우리 교회는 더 하나가 되고 더 진보되었다. 이 말씀을 묵상하면서 우리 교회에서 죽음을 앞두고 진한 그리스도를 간증한 형제들이 생각났다. 이것이 참 복음이구나! 어렵고 감당하기 힘든 상황을 통하여 이 생명이 드러나는 것을 보면서 우리는 담대한 마음을 가지게 된다.
우리가 내 문제로 고난을 받는 것과는 달리, 이유 있는 고난 즉 하나님의 이유 때문에 고난당한다면 얼마나 영광스럽겠는가! 복음을 전하다가 욕을 얻어먹는다면, 얼마나 영광스럽겠는가! "내 이름을 위하여 핍박을 받거든 기뻐하고 즐거워하라"고 하셨다. 예수로 인해서 고난 받는 이런 자리에 있게 되면, 그 인생이 얼마나 영광스러운 인생이 되는지 우리가 경험하게 된다. 우리 인생이 어느 자리에 서야 영광스러운 사람이 될 것인가? 하나님의 신약경륜을 수행하는 자리에 있어야만, 우리 인생은 어디를 가도 영광스러워진다.
우리는 이제 무엇으로 승부할 것인가? 인격으로 승부해야 한다. 우리 자신으로 승부해야 한다. 교회 안에서 신약경륜 안에 있을 때에, 말씀이 육신이 되는 하나님의 목표가 우리 자신으로 이루어지는 것을 경험하고 있다. 세상이 변하고 종교가 변해도, 우리는 어디를 가도 씨를 뿌리는 사람이 되어서,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고,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확대되기를 소원한다.
[ 기 도 ]
자비로우신 하나님 아버지, 천지를 창조하시고 마지막에 사람을 창조하셔서 그 사람에게 만물을 다스릴 수 있는 권리를 주셨는데, 우리가 선악과로 말미암아 이탈해서 만물에 종노릇하는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주님이 아버지가 자기 몸에서 나타나기 위하여 그 인생을 모든 고난으로 자기 몸에 채우신 결과로, 하나님이 사람으로 드러나시는 것을 우리가 보게 되었습니다. 이 씨가 바울에게 와서 바울이 자기의 고난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교회에 채움으로써 교회가 드러나게 되었고, 또 우리 목사님이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자기의 육체에 채움으로 아름다운 성육신의 복음이 우리에게 실재가 되었습니다. 이 말씀을 들으면 들을수록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신 이 자리가 얼마나 실재이고 얼마나 존귀하고 영광스러운 자리인지 더 깊이 알게 됩니다. 우리 몸을 하나님께 드려서 우리 인생을 통하여 하나님의 신약경륜이 편만하게 이 땅에 드러나서, 모든 사람이 예수님을 아니라 하는 사람이 없을 때까지 우리 인생을 하나님께 온전히 드리기를 원합니다. 우리를 신약경륜 안으로 인도하신 주님을 찬양합니다.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 드렸습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