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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들뢰1980천원09년1933
제9장 1933년 미시정치와 절편성 (Ch. 9. 1933: Micropolitique et segmentarité. pp. 253-283). in 천개의 고원(Mille Plateaux: capitalisme et schizophrénie, 1980), 들뢰즈/가타리(Deleuze/Guattari), 김재인, 새물결, 2001(1980). pp. 395-440.(P.1000.)
[1933 독일 대통령 힌덴부르크는 경제계와 정계의 혼란을 수습하기 위하여 1933년 1월 30일 히틀러를 수상으로 임명하였다. 히틀러는 보수파와 군부의 협력을 얻어 반대파를 탄압하고 1933년 7월 일당독재(一黨獨裁)체제를 확립하였다. 1934년 8월 대통령 힌덴부르크가 죽자 대통령의 지위를 겸하여, 그 지위를 ‘총통 및 수상(Fuhrer und Reichskanzler: 약칭은 총통)’이라 칭하였다.(42SMC)]
[1923년 11월 20일(제4장 1923년 11월 20일: 언어학의 기본 전제들)에 기존 화폐의 폭락이라는 파국, 즉 명령어에 의해 살 수 밖에 없는 시대가 있었다. 그로부터 10년, 1933년 7월(제9장 1933년: 미시정치와 절편성) 히틀러의 슬로건이 먹혀드는 것이며, 이번 파국은 곧 다가올 미래의 파국임에도, 대중은 믿고 싶은 것만 믿는, 거짓 뉴스도 믿는, 괴벨스의 이야기에 안도와 평온을 찾고 믿고 싶은 것이다. 히틀러는 이 착각에 빠진 민중을 전쟁으로 몰아넣었다. (유대)자본을 적으로 규정하면서 당의 결속을 만들었다. (51PLD)].
[1933년이란 장의 제목인데, 본문 속에는 나오지 않는다. 들뢰즈/가타리가 말하지 않은 내용에 대해 생각해 보아야 한다. 그럼에도 글 사이에는 있다. / 그런 점에서 보면, 1933년의 제목 속에는 내용이 있다. 즉 히틀러가 그해 1월에 수상이 되고, 8월에 총통이 된다. / 벩송은 도덕과 종교의 두 원천은 1932년에 나온다. 그는 독일 사상이 전쟁의 위험으로 몬다는 것을 알아차린다. - 나는 일본의 사상이 전쟁의 위험이 있다고 느낀다. 그러기에 우리가 새로운 사유를 할 필요가 있다. - 닫힌 종교가 또는 일신교 신앙이 무엇을 실행했던가를 생각해야 한다. 벩송의 영웅은 들뢰즈식으로 보면 전쟁기계의 첨점인 셈이다. 즉 구국이나 종교의 선도자가 아니라 심층의 발현자들(창발자들, 인민) 중의 선두에서 균열을 내는 자이다. 인민은 새로운 세상을 만드는 기계이다. “우주는 신들을 만드는 기계”라고 한다.(51PLJ)]
목차
역자 서문 - 연애에 관하여
이탈리아어 판 서문
머리말
1. 서론 - 리좀
2. 1914년 - 늑대는 한 마리인가 여러 마리인가?
3. 기원전 1만년 - 도덕의 지질학(지구는 자신을 누구라고 생각하는가?)
4. 1923년 11월 20일 - 언어학의 기본 전제들
5. 기원전 587년 및 서기 70년 - 몇가지 기호 체제에 대하여
6. 1947년 11월 28일 - 기관 없는 몸체는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7. 0년 - 얼굴성
8. 1874년 - 세 개의 단편소설 또는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9. 1933년 - 미시정치와 절편성
10. 1730년 - 강렬하게-되기, 동물-되기, 지각 불가능하게-되기 441-585
11. 1837년 - 리토르넬로에 대해
12. 1227년 - 유목론 또는 전쟁기계
13. 기원전 7000년 - 포획 장치
14. 1440년 - 매끈한 것과 홈이 패인 것
15. 결론 : 구체적인 규칙들과 추상적인 기계들
[들뢰즈의 배치는 리좀이 탈영토화를 거쳐서 실질적 활용론으로 되는 과정을 그린 것이다. 리좀 전쟁기계]
*** 연대순 배치
3. 기원전 1만년 - 도덕의 지질학(지구는 자신을 누구라고 생각하는가?)
13. 기원전 7000년 - 포획 장치
5. 기원전 587년 및 서기 70년 - 몇 가지 기호 체제에 대하여
7. 0년 – 얼굴성 319-363
12. 1227년 - 유목론 또는 전쟁기계
14. 1440년 - 매끈한 것과 홈이 패인 것
10. 1730년 - 강렬하게-되기, 동물-되기, 지각 불가능하게-되기 441-585
11. 1837년 - 리토르넬로에 대해
8. 1874년 – 세 개의 단편소설 또는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2. 1914년 - 늑대는 한 마리인가 여러 마리인가?
4. 1923년 11월 20일 - 언어학의 기본 전제들
9. 1933년 - 미시정치와 절편성
6. 1947년 11월 28일 - 기관 없는 몸체는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15. 결론 : 구체적인 규칙들과 추상적인 기계들
*******내용
제9장 1933년: 미시정치와 절편성 1933: Micropolitique et segmentarité. pp. 253-283).
천개의 고원(Mille Plateaux: capitalisme et schizophrénie, 1980)
들뢰즈/가타리(Deleuze et Guattari), 김재인, 새물결, 2001(1980). pp. pp. 395-440.
- Segmentarité, primitve et civilisée. - Molaire et moléculaire. - Le facisme et le totalitarisme. - Ligne à segments, flux à quanta. - Gabriel Tarde. - Masses et classes. - Machine abstraite: mutation et le surcodage. - Qu’est-ce qu’un centre de pouvoir? - Les trois lignes et les dangers de chacune. - Peur, clarté, pouvoir et mort. (644)
제9장 1933년: 미시정치와 절편성 1933: Micropolitique et segmentarité. pp. 253-283
§09.00. 1933: Micropolitique et segmentarité 253-283
Fernand Léger, Les hommes dans la cité, 1919. The Solomon R. Guggenheim Museum, New York, photo Robert E. Mates. (642) - 이 입체파적인 그림을 저자들은 “Les segmentarités(l’ensemble des types)”(절편성들: 전형들의 집합)이라 이름 붙여 놓았다.
- 레제(Fernand Léger, 1881-1955)의 “도시 속에서 사람들”, 뉴욕의 솔로몬 구겐하힘 미술관 소장, 메이트스(Robert E. Mates, s.d.)의 사진. - [395쪽 (그림), 절편성들(유형들의 집합) - 이 몬드리앙(Mondrian, 1872-1944)과 피카소(Picasso, 1881-1973) 류의 이 그림은 기계를 통한 생산의 발달시기와 사회조직이 이루어지는 사회체를 묘사한 것으로 보인다. 그림 속에 B와 C의 문자의 표시가 눈에 띠는 것은 무엇일까?(42SMC)]
제9장 1933년 미시정치와 절편성 395 Ch 9. 1933: Micropolitique et segmentarité. 253
§09.01 원시적 절편성과 문명화된 절편성 397 - Segmentarité, primitve et civilisée. 294
우리는 모든 곳에서, 모든 방향으로 절편화 된다. 인간은 절편적 동물이다. 절편성은 우리를 구성하는 모든 지층들에 속해 있다. 거주하기, 왕래하기, 노동하기, 놀이하기 등 체험은 공간적으로 그리고 사회적으로 절편화된다. 집은 방의 용도에 따라 절편화된다. 거리는 마을의 질서에 따라 절편화된다. 공장은 노동과 작업의 본성에 따라 절편화된다. 우리는 사회 계급, 남자와 여자, 어른과 아이 등 거대한 이원적 대립에 따라 이항적으로(binairement) 절편화된다. 우리는 나의 일, 내 동네의 일, 도시의 일, 내 나라의 일, 세계의 일 … 등 조이스(Joyce)의 “글자(la lettre)” 방식으로 점점 확대되는 원들 안에, 점점 더 커지는 원반들 또는 환(環)들 안에 원형으로(circulairement) 절편화된다. 우리는 하나의 직선 위에서, 우리는 하나의 직선 위에서, 여러 직선 위에서 선형적으로(linéairemnt) 절편화되는데, 거기서 각각의 절편은 하나의 에피소드 또는 “소송(un procès)”을 표상한다. (254, 397)) [절편화의 세 가지]
리조(Jaques Lozot, 1938-)는 <공동주택>이 어떻게 내부에서 외부로, 장소를 지정할 수 있는 여러 유형의 활동(종교 의식과 제례, 그 다음 재화의 교환, 그 다음 가족생활, 그 다음 쓰레기장과 뒷간)이 수행되는 원형의 계열 안에서 조직화되는지를 보여준다. 하지만 동시에 “이 환들 각각은 그 자체로 횡적으로 세분되며, 각 절편은 특수한 혈통에 할당되고 상이한 형제자매 집단 사이에서 세분된다.” 보다 일반적인 맥락에서 레비-스트로스(C. Lévi-Strauss, 1908-2009)는 원시 부족의 이원론적 조직화는 원형적 형태와 결부되며, “몇 개의 집단이 됐건 해당 집단을”(적어도 셋) 포괄하는 선형적 형태 안으로 이행한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254, 398)
그런데 중요한 것은 우리의 삶인데, 왜 원시부족으로 돌아가는가? 사실 절편성이라 개념은 고정된 중앙국가 장치도 없고, 포괄적인 권력도 없고, 전문화된 정치제도도 없는 이른바 원시 사회를 고려하기 위해 민속학자들이 만들어낸 개념이다. (254-255, 398)
원시적 절편성은 가계들과 그것들의 다양한 상황과 관계에 기초한 다성적 절편성인 동시에 뒤얽힌 국지적 나눔들에 기초한 순회하는 영토성의 절편성이다. 코드와 영토, 씨족의 가계와 부족의 영토성은 비교적 유연한 절편성의 직물을 조직한다. (255, 399)
그렇지만 우리가 보기에 국가 안의 사회들이, 더욱이 우리 현대 국가들이 덜 절편적이라고 말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 절편적인 것과 중앙 집권적인 것 간의 고전적 대립은 전혀 적합한 것 같지 않다. 국가는 자신이 부양하거나 지속시키는 절편들 위에서 작동할 뿐만 아니라 제 안에 나름의 절편성을 소유하고 있으며 또한 그것을 강요한다. 모르긴 해도 사회학자들이 절편성과 중앙 집중 사이에 설정하는 대립은 환형동물과 중추신경계라는 생물학적 배경을 갖고 있는 것 같다. 하지만 중앙의 뇌 그 자체는 뇌의 모든 대체 기능들에도 불구하고 그리고 그 대체 기능이 있기 때문에 다른 거들보다 더 절편화된 하나의 벌레( )이다. 중앙 집중적인 것과 절편적인 것 사이에 대립이 존재하지 않는다. (255, 399)
기술관료주의는 절편적 노동 분업(국제적 노동분업을 포함한다)을 통해 진행한다. 관료주의는 칸막이로 구획된 사무실을 통해서만 존재하며, “목적의 자리바꿈”과 여기에 대응하는 “기능장애”를 통해서만 기능한다. 위계는 단지 피라미드 모양만은 아니다. 사장실은 건물의 높은 곳에 있는 만큼이나 복도의 끝에 있기도 하다. 요컨대 우리의 현대 삶은 절편성을 몰아내기는커녕, 반대로 그것을 독특한 방식으로 견고하게 만들었다고 할 수 있다. (255-256, 400)
따라서 절편(le segmentaire)과 중앙 집중(le centralisé)을 대립시키기보다는 오히려 절편성의 두 유형을 구분해야만 할 것이다. 하나는 “원시적”이고 유연한 절편성이고 다른 하나는 “현대적”이고 견고한 절편성이다. 그리고 이러한 구분은 앞서 살펴본 [절편성의] 모습들 각각을 검증하게 될 것이다. (256, 400)
1) 이항 대립(남자-여자, 상층민-하층민 등)은 원시 사회에서 매우 강력하다. 하지만 이항 대립은 그 자체로는 이항적이지 않은 기계들과 배치물의 결과인 것 같다. (256, 400)
따라서 여성이나 하층민의 지위상의 우열을 아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어떤 유형의 조직화로부터 이런 지위가 나오는지를 아는 것이 문제다. (256, 401)
2) 이와 동일한 방식으로 원시부족들에게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점을 주목할 수 있을 것이다. 즉 원형적 절편성은, 원들이 중앙 집중적이라거나 동일한 중심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사실을 필연적으로 함축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유연한 체제에서 중심들은 이미 노드들, 눈들, 또는 검은 구멍들처럼 작용한다. 401
이제 모든 원들은 나름대로 하나의 중심만을 가진 유일한 원을 통과해야 한다. 샤먼(le chamane)은 모든 점들 또는 정신들(les esprits, 정령들) 사이에서 특질들을 끌어내어 성좌를, 중심의 나무에 이어진 뿌리들을 방사하는 뿌리 집합을 그린다. 중앙 집중화된 권력이 탄생해서, 여기서 나무 모양의 체계가 원시적 리좀의 돌출을 다스리게 되는가? 그리고 여기서 나무는 이분법이나 이항대립의 원리 역할을 하는 동시에 순환의 축‥…역할을 한다. (256-257, 401)
중앙국가는 원형적인 절편성을 제거함으로써 구성되는 것이 아니라, 상이한 원들을 중앙 집중화하거나 중심들을 공명하게 함으로써 구성된다. 원시사회에도 이미 권력의 중심들이 있다. 아니면 사람들이 더 좋아하는 표현을 쓴다면, 국가 안의 사회에도 여전히 권력의 중심들이 있다. 하지만 국가 안의 사회가 공명 장치로서 작동하며 공명을 조직화하는 반면, 원시 사회는 공명을 금지한다. (257, 402)
3) 끝으로 선형적 절편성의 관점에서 보면, 각각의 절편은 그 자체로는 물론이고 다른 절편들과 관련해서도 강조되고 교정되고 등질화된다고 얘기할 수 있다. 절편들 각각은 나름의 측정 단위를 가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절편들 사이에는 단위들의 등가성과 번역 가능성이 있다. (257 403)
그리스의 도시와 클레이스테네스(Clisthène, Κλεισθένης)의 개혁이래로 계통의 절편들을 덧코드화하게 될 등질적이고 동위체(同位體, isotope)적인 정치 공간이 나타났으며, 그와 동시에 공통분모로서 작용하는 하나의 중심 안에서 상이한 초점들이 공명하기 시작했다 또한 폴 비릴리오는 그리스 도시에서 더 멀리 나아가 로마 제국이 어떻게 기하학적 또는 선형적인 국가 이성을 강요하는지를 보여준다. 그런데 이 이성은 진지 요새에 대한 일반적인 그림, “도면에 의해 경계표를 세우는” 보편적 기예, 영토의 정비, 공간을 장소와 영토성으로 대체하기, 세계를 도시로 변형시키기 등, 요컨대 점점 더 견고해지는 절편성을 포함하고 있다. 이처럼 강조되었거나 덧코드화된 절편들은 자신의 발아 능력 및 만들어지고 해체되는 작동 중인 절편화 작용과의 역동적 관계를 상실한 것처럼 보인다. (258, 403)
조작적 기하학에서는 형상(形象, 도형)들은 형상들에 가해지는 변용과 분리될 수 없고, 선들은 선들의 생성과 분리될 수 없고, 절편들은 절편화 작용과 분리될 수 없다. “둥근 것”은 있지만 원(圓)은 없으며, “열(列)들”은 있지만 직선은 없다 등. 반대로 국가의 기하학, 또는 차라리 국가와 기하학의 연계는 정리(定理)라는 요소의 우위 안에서 드러나는데 정리라는 요소는 유연한 형태론적 형성체들을 관념적이거나 고정된 요소로 대체하고, 변용태들을 성질들로 대체하고, 진행 중인 절편화 작용들을 미리 결정된 절편들로 대체한다. (258, 404) [조작적 기하학=유목과학, 국가 기하학=폴리스 과학. 현실화 건축(주춧돌 중심)과 도면의 건축(허가, 구조와 지붕)]
우리는 견고한 절편성과 유연한 절편성 사이의 주된 차이들을 이렇게 요약할 수 있다. 견고한 양태 아래에서 [첫째로] 이항적 절편성은 그 자체로 유효하며 직접적 이항화의 거대 기계들에 의존하는 반면, 유연한 양태 아래에서 이항성들은 “n차원을 가진 다양체들”의 결과로부터 생긴다. 둘째로 원형적 절편성은 동심원을 그리는 경향이 있다. 다시 말해 원형적 절편성은 끊임없이 자리바꿈되면서도 그 속에서 불변하는 채로 남아 있는 단일한 중심 안에서 공명기계를 참조하면서 모든 초점들을 일치시킨다. 끝으로[셋째로] 선형적 절편성은 기하학적 방식으로(more geometrico) 등질적 공간을 구성하는 덧코드화 기계를 통과하며, 절편들의 실체와 형식과 관계 안에서 결정된 절편들을 끄집어낸다. (258-259, 404)
왜냐하면 원시 사회들은 본질적으로 코드와 영토성에 의해 진행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영토성의 부족 체계와 가계의 씨족 체계라는 두 요소의 구별이 공명을 방해한다. 반면 현대사회 또는 국가 사회는 일의적 덧코드화를 통해 쇠약한 코드드를 대체했으며, 특수한 재영토화(이것은 바로 덧코드화된 기하학적 공간 안에서 행해진다)를 통해 잃어버린 영토성들을 대체했다. 절편성은 언제나 추상적인 기계의 결과물로 나타난다. 하지만 견고한 절편성과 유연한 절편성 안에서 작동하는 것은 결코 동일한 추상적인 기계가 아니다. (/// 405) [ 견고한 절편성은 도면과 건축허가인데 비해, 유연한 절편성은 대목과 재료들이다.]
§09.02 분자그램적 과 분자적 405 - Molaire et moléculaire. 259
따라서 중앙집권화된 것과 절편화된 것을 대립시키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나아가 두 가지 절편성, 즉 원시적이고 유연한 절편성과 견고하고 현대적인 절편성을 대립시키는 것으로도 충분하지 않다. (259, 405) [유연=노마드, 견고=정주적]
유연한 절편성을 원시인들만의 특전으로 생각할 수 없다. ... 유연한 절편화란 견고한 절편성과 분리할 수 없는 철저하게 현대적인 하나의 기능이다. 모든 사회와 모든 개인은 두 절편성에 의해, 즉 그램분자적인(molaire) 절편성과 분자적인(moléculaire) 절편성에 의해 가로질러간다. (260, 406) - [노마드 과학(기술)은 고도의 건축물에도 살아있다. 그것은 9.11의 쌍둥이 건물의 붕괴의 장면에서 보아도 알 수 있다.]
요컨대 모든 것이 정치적이다. 그러나 모든 정치는 거시정치인 동시에 미시정치이다. (260, 406)
왜냐하면 남녀 양성은 다양한 분자적 조합들을 이루며, 여기에 여자안의 남자나 남자안의 여자뿐만 아니라 남녀 각각이 상대방의 성의 내부에서 동물이나 식물 등과 맺는 관계도 포함되기 때문이다. 요컨대 수없이 많은 자그마한 성들이 존재하는 것이다. (260, 406)
따라서 군중과 계급을 구분하려는 시도는 결국 이러한 한계에 부딪히게 된다. 즉 군중이라는 개념(la notion de masse)은 분자적 개념이라는 것. 따라서 군중이라는 개념은 계급이라는 그램분자적(molaire) 절편성으로 환원할 수 없는 절편화 작용의 유형을 통해 나아간다. ... 그러나 군중과 계급이 서로 전제된다고 해서 양자의 관점, 본성, 등급, 기능 상의 차이가 미리 배제되는 것은 아니다(이렇게 이해하게 되면 군중이라는 개념은 카네티가 제안한 것과는 전혀 다른 함의를 갖게 된다). (260, 407) [왜 들뢰즈/가타리는 이 장(章)에서 인민이란 용어를 쓰지 않고 군중이란 용어만 썼을까?]
§09.03 파시즘과 전체주의 407 - Le facisme et le totalitarisme. 260
견고한 절편성, 즉 칸막이로 구분된 인접한 사무실들 각각의 절편에 있는 부서장, 복도의 끝이나 건물 높은 곳에서 이루어지는 이에 상응하는 중앙 집중화 등을 통해 관료주의를 규정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가 않다. ... 카프카가 관료주의에 관한 최고 이론가일 수 있었던 것은, 그가 특정한 층위에서(하지만 어떤 층위에서? 위치를 결정할 수 없는 층위에서) 어떻게 사무실들을 나누는 장벽들이 “엄밀한 경계선”이기를 그치고 분자적 환경에 빠져들게 되는지를 보여주기 때문이다. 그 분자적 환경은 엄밀한 경계들을 용해시키고, 그와 동시에 식별이나 인지가 불가능한 미시 형태의 책임자를 증식 시키며, 중앙 집중화될 때에만 분간될 수 있다. 견고한 절편들의 분리 및(et) 총체화와 공존하는 또 하나의 체계가 존재하는 것이다. (260-261, 407) (이어지는 문장)
마찬가지로 파시즘은 그램분자적인 절편들이나 이러한 절편들의 중앙 집중화와는 구분되는 분자적인 체제를 내포하고 있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물론 전체주의 국가라는 개념은 파시즘의 발명품이지만, 파시즘을 파시즘 자신이 발명한 개념에 의해 규정할 이유는 없다. 스탈린주의 유형 또는 군사 독재 유형처럼 파시즘 없는 전체주의 국가가 있기 때문이다. (261, 407-408) - [독일의 파시즘 전체주의와 소연방의 당중심 전체주의가 다른 점은 무엇일까? 하나는 민중의 맹목성을 충동하는 가까 뉴스(괴벨)를 생산하는데 비해 다른 하나는 인민의 자발성을 끌어내려는 교조주의가 있다. 이렇게 말해도 될까? / 이승만 정권의 서북청년단의 무법활동과 전두환 정권의 주사파의 분신이라는 대비에서, 전자에서 대중을 동원한 전체주의의 횡횡과 같은 것을 후자에서 군대를 동원한 절대권력의 종횡무진을 보게 된다. (51PLC)]
그러나 파시즘은 분자적 초점들과 불가분의 관계에 놓여 있는데, 이 초점들은 점에서 점으로 상호 작용하면서 우글거리며 도약하고 나서, 뒤이어(avant) <국가(민족) 사회주의 국가(nationaliste socialisme d'Etat>에서 분자적 초점들을 다함께 공명하게 한다. 농촌의 파시즘과 도시의 파시즘 또는 도시 구역의 파시즘, 젊은이의 파시즘과 퇴역 군인들의 파시즘, 좌익의 파시즘과 우익의 파시즘, 커플 가족 학교나 사무실의 파시즘. 이들 파시즘은 모두 미시적인 검은 구멍에 의해, 즉 일반화된 중앙 집중적인 거대한 검은 구멍 속에서 공명하기 전에 자체로서 효력을 가지며 다른 것들과 소통하는 미시적인 검은 구멍에 의해 규정된다. 각각의 구멍에 각각의 거처에 전쟁기계가 장착되면 파시즘이 존재하게 된다. (261, 408)
이러한 점에서 독일의 국가 수뇌부가 아니라 히틀러가 독일의 국가 행정기구를 넘겨받았다기보다는 오히려 권력을 장악한 것은, 그가 먼저 사회의 모든 세포들 속에 침투할 수 있는 비길 데 없으며 대체할 수 없는 수단을 그에게 마련해준 미시 조직들을 유연하고 분자적인 절편성, 그리고 모든 종류의 세포들 속에 침투할 수 있는 흐름을 수중에 넣었기 때문이라는 다니엘 게랭(Daniel Guérin, 1904-1988)의 이야기는 옳다고 할 수 있다. (261-262, 409) (이어서)
반대로 자본주의가 파시즘의 경험을 파국적이라고 생각해서 이보다는 훨씬 사려 깊고 온건해 보이는 스탈린의 전체주의와 결연하는 길을 택한 것은, 스탈린주의의 절편성과 중앙 집중화가 좀 더 고전적이고 좀 덜 유동적이었기 때문이다. 파시즘을 위험한 것으로 만드는 것은 분자적이거나 미시정치적인 역량(une puissance)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군중의 운동기기 때문이다. 즉 그것은 전체주의적인 유기체가 아니라 오히려 암적인 몸체인 것이다. 미국 영화는 종종 이러한 분자적 초점들, 즉 패거리, 갱, 분파, 가족, 마을, 구역, 교통수단 등 아무도 모면할 수 없는 파시즘을 보여주었다.(262, 408) (이어서)
욕망은 왜 스스로 억압되기를 바라는가, 욕망은 어떻게 자신의 억압을 바랄 수 있는가? 이처럼 포괄적인 질문에 대답할 수 있는 것은 미시 파시즘밖에 없다. .. 욕망이란 필연적으로 여러 분자적 층위들을 지나가는 복합적인 배치물들과 절대 분리될 수 없으며, 이미 자세 태도, 지각, 예감, 기호계 등을 형성하고 있는 미시-구성체들과 분리될 수 없다. 욕망은 결코 미분화된 충동적 에너지가 아니라 정교한 몽타쥬에서, 고도의 상호작용을 수반한 엔지니어링(engineering)에서 결과되는 것이다. (262, 409)
이러한 유연하고 분자적인 절편성과 관련해 네 가지 오류만은 피해야만 하겠다. 첫째 오류는 가치론적인 것으로, “더 좋아하기”위해서는 약간의 유연성만으로도 충분하다는 믿음이다. 그러나 파시즘이 정말 위험하게 만드는 것은 미시 파시즘으로서, 섬세한 절편화 작용은 극히 견고화된 절편들만큼이나 유해하다. 둘째 오류는 심리학적인 것으로... 셋째로 이 두 형태는 작은 형태와 큰 형태처럼 규모에 의해서 단순하게 구별되지는 않는다. ... 마지막으로[넷째] 이 두 선의 질적인 차이가 양자의 상호 자극이나 교차를 저해하는 것은 아니며 또한 이러한 결과로서 이 양자 간에는 정비례건 반비례건 항상 하나의 비례관계가 존재한다. (262, 410)
[첫, 국가 권력 또는 제국의 권력의 경우] 구가 실제로 첫째 경우에 그램분자적인 조직이 강력하면 할수록 이 조직은 자체의 요소들과 이 요소들의 관계와 장치들을 분자화되도록 촉진한다. 기계가 지구적 또는 우주적인 것이 될수록 배치물들은 점점 더 소형화되어 미시 배치물이 되려는 경향을 갖게 된다. 고르츠(Andre Gorz,1923-2007)의 공식에 따르면, 세계자본주의가 간직하게 되는 유일한 노동 요소는 분자적인 또는 분자화된 개인, 즉 “군중(masse)”으로서 개인일 뿐이다. 대규모로 조직화된 그램분자적인 치안 관리는 작은 공포들에 대한 전적인 미시-관리, 전적인 분자적 불안전을 상관항으로 갖고 있기 때문에 내무성은 다음과 같은 공식을 천명할 수 있을 것이다. 즉 불안전의 미시정치를 위한 또한 이러한 정치에 의한 사회의 거시-정치. 그러나 분자적 운동들이 세계 규모의 대조직을 보충하는(complèter)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을 반대하고 거기에 구멍을 뚫을수록 둘째 경우가 훨씬 더 중요하다. (263, 410-411) [국가 권력안에서, 첫째는 거시 선들, 둘째는 미시 흐름들인가?]
발레리 지스카르 데스탱(Valéry Giscard d'Estaing, 1926-)이 정치ㆍ군사지리학 강연에서 주장한 것도 바로 이것이었다. 즉 덧코드화되었고 군비 과잉인 이원적 기계 안에서 동서가 균형을 이루면 이룰수록 북에서 남으로 이어지는 또 다른 선상에서는 불필요한 “불안전화”가 일어난다는 것이다. 팔레스타인인은 항상 존재하며 또한 바스크인과 코르시카 인도 여전히 존재해서 “안전의 지역화 불안전화”를 유발한다는 것이다. 이리하여 결국 동서 양진영에 있는 대규모의 그램분자적 집합은 지그재그의 균열과 함께, 자기 자신의 절편들 조차 보유하는 것을 곤란하게 만드는 분자적 절편화 작용에 의해 부단히 변형된다. (263, 411)
항상 무엇인가가 흐르거나 탈주하고 있으며, 이항적인 조직화와 공명 장치와 텃코드화 기계로부터 달아난다. 젊은이, 여성, 미치광이 등 “풍속의 진화(une évolution des moeur)”라고 여겨지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프랑스 68년 5월은 분자적인 것이었으며, 따라서 거시정치의 관점에서는 이를 초래한 상황을 더욱 지각할 수 없었다. 이리하여 최고로 진보적인 정치가 또는 조직이라는 관점에서 스스로를 진보적이라고 믿는 정치가보다는 아주 편협한 관점을 가진 사람이나 나이가 아주 많은 사람 쪽이 그 사건을 더 잘 파악할 수 있었던 것이다. (264, 412) - [최고로 진보적인 정치가 또는 조직: 알뛰세(Althusser, 1918-1990)와 공산당을 지칭할 것이다. 알튀세가 그 봉기 다음날 장 귀똥(Jean Guitton, 1901-1999)을 찾아갔다는 것은 알려진 사실이다. 귀똥이 스승으로 삼은 철학자는 벩송의 제자이자 카톨릭 신자인 자크 슈발리에(Jacques Chevalier, 1882-1962)이다. - 편협한 사람(낭떼르 학생, 가타리?)과 늙은이(퐁피두, 드골)는 누구일까?] [“편협한 자”란 원주20에 나오는불트와 무와루: 불트(Nicolas Boulte, 1943?-1975) 가명(Baruch Zorobabel), 크리스트교 학생 좌파 운동가. 1968년에 반제국주의 극좌파. 마오주의자. & 무와루(Jacques Moiroux, s.d.), 아마도 불트와 같은 공산주의 운동가. / 저자들은 극우파(카톨릭)을 지칭하고자 했을까?]
가브리엘 타르드(Gabriel Tarde, 1843-1904)의 주장대로 어떤 농민이, 남 프랑스의 어떤 지역에서 이웃의 지주에게 인사를 하지 않기 시작했는지를 알아야만 한다. 이점에 관해서는 시류에 뒤쳐진 늙은 지주가 시류를 제대로 알고 있는 사람보다 사태를 더 잘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264, 412) [서울 지하철에 아침마다 전단지신문이 엄청나서 그 폐지를 줍는 할배들이 있었는데 사라진지 2년 되었나? 그저께 동서울터미널에 신문가판대가 사라졌다. 지난 겨울에 그 자리에 일회용 악세사리점이 들어섰을 때만 해도 내부 어디엔가에는 신문을 팔거라고 생각했는데, 많은 상점들 중에 신문가판은 없었다. - 스마트 폰 없는 늙은이는 뒷전으로 밀릴 수밖에 없다. 글쓰기 탈영토화에서 건드리기 탈영토와의 시대에 들어선 것이다. (51PLI)]
68년 5월에 대해서도 똑같이 이야기할 수 있다. 거시-정치의 견지에서 판단하는 사람들은 그 사건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도대체 어떻게 배정할 수 없는 무엇인가가 탈주했기 ? 때문이다. 정치가들, 정당들, 조합들, 많은 좌파인사들은 그 점을 대단히 원통해했다. 이 때문에 이들은 “조건”이 성숙되지 않았다는 말을 계속해서 반복할 수밖에 없었다. 마치 이들을 유효한 교섭 상대로 만들어주는 모든 이원적 기계를 일시적으로 빼앗기라도 한 것처럼 말이다. 기묘하게도 다른 어떤 사람들보다 드골(Charles de Gaulle, 1890-1970), 나아가 퐁피두(Georges Pompidou, 1911-1974)가 사태를 더 잘 이해하고 있었다. 하나의 분자적 흐름이 분출해서 처음에는 미약하지만 그 후에는 규정할 수 없는 상태로 커져 간다‥…. (264, 412)
-§09.04 절편들로 이루어진 선(線), 양자들로 이루어진 흐름 413
- Ligne à segments, flux à quanta. 264
따라서 문제는 그램분자적인 것과 분자적인 것은 크기, 단계, 자원뿐만이 아니라 고려되는 좌표계의 본성에 의해서도 구분되느냐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선”과 “절편”이라는 말은 그램분자적 조직을 위해 놔두고, 분자적 조성에 대해서는 적합한 다른 말을 따로 찾아야만 할 것이다. 실제로 우리가 잘 규정된 절편들로 이루어진 선(ligne à segments)을 정할 수 있을 때면, 항상 우리는 그 선이 다른 형식 하에서 양자들로 이루어진 흐름(flux à quanta)으로 연장된다는 것을 보아왔다. (264, 413)
그런데 지불-화폐(monnaie-paiement)의 선은 전혀 다른 국면과 결부되어 있다. 즉 그 선은 이미 절편이 아니라 극들, 독자성들, 양자들(des quanta)을 포함하는 융자-화폐(monnaie-financement)의 흐름과 관련을 맺는다(흐름의 극이란 화폐의 창조와 폐기를 말하며, 독자성은 명목적인 유동자산을 말하며, 양자는 인플레션, 디플레이션, 스태그플레이션 등을 말한다). 이런 점에서 “돌연변이적이고 경련적이고 창조적이고 순환적인 흐름”에 대해 얘기하는 사람도 있었는데, 이 흐름은 욕망에 묶여 있었고, 항상 견고한 선 아래에 있었으며 이 선상에서 이윤, 수요, 공급을 결정하는 절편 아래에 있었다. 국제 수지(une balance de paiement)에서도 우리는 예컨대 독립거래들(des opérations dite autonomes)과 보완거래들(des opérations dite compensatoires)를 구별하는 이항적 절편성을 만나게 된다. (264-265, 413-414) (이어서)
하지만 자본의 운동은 “본성과 지속성, 그리고 채권자나 채무자의 인격에 따라 가장 철저하게 분해되어 있는” 운동이기 때문에 쉽사리 이런 식으로 절편화 되지 않으며, 따라서 우리는 자본의 흐름에 관해 어디에 선을 그어야 할지 더 이상 알지 못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두 국면은 끊임없이 상관관계를 맺는다. (265, 414)
요컨대 분자적인 것, 미시-경제, 미시-정치는 그것의 요소들의 작음에 의해 규정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의 “군중”의 본성에 의해 정의 된다. 가령 양자들로 이루어진 흐름은 그램분자적인 절편들로 이루어진 선과는 다른 것이다. 절편을 양자에 대응시켜 양자에 맞춰 절편을 조절하는 작업은 리듬과 양태의 변화를 내포하며, 이러한 변화는 전능(toute-puissance)의 힘을 내포하고 있다기보다는 그럭저럭 행해지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 항상 무엇인가가 탈주하고 있다. (265, 414)
다른 몇 가지 예를 들 수도 있을 것이다. 가령 [둘] 교회 권력의 경우 이 권력은 항상 죄의 종류(7가지 대죄), 측정 단위(몇 번?), 등가성과 보상의 규칙(고해, 속죄‥…) 등 강한 절편성을 가지며 소위 죄의 관리와 관련되어 있다. 그러나 이것과 상보적이면서도 두드러진 차이를 보이는 소위 범죄 성향(peccabilité)이라는 분자적 흐름도 존재한다. 이 흐름은 마치 선형적 지대를 가로질러 교섭이라도 하듯이, 선형적인 지대를 둘러싸지만, 이 흐름 자체는 극들(원죄라는 극, 구원 또는 은총이라는 극)과 양자들(“죄의식을 갖지 않는 죄”, 죄를 의식하는 죄, 죄를 의식한 것에서 발생하는 죄)뿐이다. 법적인 코드의 그램분자적인 선과 이 선에 의한 재단과는 다르게 범죄성의 흐름에 대해서도 같은 이야기를 할 수 있을 것이다. .. 그러나 클라우제비츠(Clausewitz, 1780-1831)의 직관에 따르면 전쟁기계는 이것과는 전혀 다르다. (266, 414-41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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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A- [그림은 타원으로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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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b b3 b2 b1 Bb
A: 흐름과 극들. a: 양자 b: 선과 절편들 B: 권력의 중심.
(이것들의 집합이 사이클(un cycle, 순환) 또는 주기(une période) (266, 416)
§09.05 가브리엘 타르드 416 Gabriel Tarde. 267
가브리엘 타르드(Gabriel Tarde, 1843-1904)에게 경의를. 오랜 동안 잊혀졌던 작업은 미국 사회학, 특히 미시-사회학의 영향을 받아 현재적 현실성을 획득했다. 타르드는(퀴비에와 조프르와 생-틸레르의 논쟁과 동일한 성격을 갖는 격렬한 논쟁에서) 뒤르켐(Émile Durkheim, 1858-1917)과 뒤르켐학파에 의해 짓밟혔었다. 뒤르켐은 통상 이항적이고 공명하고 덧코드화된 거대한 집단적 표상들 속에서 특권화된 대상을 찾았기 때문이다. (267, 416)
타르드는 집단적 표상들은 아직 설명을 요하는 것, 즉 “수백만 명의 인간들의 유사성”을 전제하고 있다고 반박했다. 그 때문에 그는 오히려 세부적인 세계 또는 무한소의 세계, 즉 표상 아래 단계의 질료를 이루는 작업은 모방들, 대립들, 발명들‥…에 관심을 가졌다. 타르드의 책에서 가장 뛰어난 곳은 관료제나 언어학 등에서 이루어진 미세한 혁신을 분석한 부분이다. 뒤르켐주의자들은 그것은 심리학이나 관계-심리학이 될 수는 있어도 사회학은 아니라고 반박했다. (267, 416) [타르트는 심층에서 내재적 인식을, 뒤르켐 류는 상층에서 표상적 지식을 수집 분류했을 뿐이다.]
모방이란 흐름의 파급이다. 대립이란 흐름의 이항화, 이항 구조화이다. 발명이란 다양한 흐름의 결합 또는 연결접속이다. 그러면 타르트에게서 흐름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믿음이나 욕망(모든 배치물의 두 양상)이다. 흐름이라는 것은 항상 믿음(de croyance)과 욕망(de désir)의 흐름이다. 믿음과 욕망은 모든 사회의 토대(le fond)이다. 믿음들과 욕망들은 흐름이며, 그래서 “양화 가능”하며, 진정한 사회적인 <양>인데 반해, 감각은 질적인 것이고, 표상은 단순한 결과물이다. 따라서 무한소의 모방, 대립, 발명은 흐름의 양자(量子)들이며, 흐름의 양자들이 믿음들과 욕망들의 파급, 이항화 또는 결합을 표시해 준다. (267, 417)
타르드는 미시-사회학의 발명자로서, 이 사회학에 그 외연과 의미를 부여하면서 후일 이 사회학이 떠안게 될 오해를 미리 고발한 것이다. (268, 417)
이런 방식으로 절편들로 이루어진 선(ligne à segments)과 양자들로 이루어진 흐름(flux à quanta)이 구별될 수 있을 것이다. 돌연변이의 흐름은 코드를 피하고 코드에서 벗어나는 경향을 가진 무엇인가를 항상 내포하고 있다. 그리고 양자란 바로 탈코드화된 흐름 위에 있는 탈영토화의 기호들 내지는 정도들이다. (268, 417-418)
원죄의 경우로 되돌아가 보자. 그것은 흐름의 행위 그 자체(l’act meme d’un flux)이며, 이 흐름은 창조와 관련한 탈코드화(단 성모를 위해 작은 섬 하나가 남겨진다)와 아담의 땅과 관련한 재영토화를 표시한다. 그러나 동시에 원죄는 공명하는 이항조직(<권력들>, <교회들>, 제국들, 부유한 자-가난한 자, 남자-여자 등)과 보충적인 재-영토화(카인의 토지, 노동, 생식, 돈‥…위에서)를 통해 덧코드화 작업한다. 그러나 이 두 좌표계는 .. 반비례관계에 있다. (268, 418)
사회적 장은 저마다 다른 속도와 보폭에 따라 “군중들”을 변용시키는 온갖 종류의 탈코드화와 탈영토화 운동들에 의해 끊임없이 생기를 부여 받는다. 그 운동들은 모순들이 아니라 탈주들이다. (268, 418)
연애와 결혼을 둘러싼 옛 코드에서 이탈하는 여성 군중들, 축재의 대상이기를 그치고 대규모의 상업적 유통 속에 투입되는 통화량(masse monétaire). 이러한 흐름들을 연결접속 시키고 각각의 흐름이 다른 모든 흐름들(심지어는 “먼 곳의 공주님”에서 볼 수 있는 여성성의 흐름이나 13세기의 소년 십자군에서 볼 수 있는 아이들의 흐름까지도)을 활성화하고 촉진시키는 예로 십자군을 들 수 있다. (269, 419)
십자군은 교황에 의해 덧코드화되어 영토적 목표를 할당 받았다. <성지>, <신의 평화(la Paix de Dieu)>, 새로운 유형의 수도원, 새로운 화폐 형태, 소작료와 임금제에 의한 농민의 착취의 새로운 양식(또는 노예제도의 부활), 도시의 재영토화 등이 복잡한 시스템을 형성했다. 이제 이런 관점에서 우리는 흐름의 연결접속(la connexion)과 결합(la conjugaison)이라는 두 개념의 차이를 도입해야만 한다. ... 흐름들의 양자들을 더하거나 자극하는 방식을 가리키는 것이 “연결접속”이라고 한다면, 이 흐름들의 “결합”은 차라리 흐름들의 상대적 정지를 가리키며, ... (269, 419)
그러나 정확히 말해 첫째국면에서는 가장 탈영토화된 흐름이, 둘째 국면에서는 과정들의 집적이나 접합접속을 수행하고 덧코드화를 결정하고 재영토화를 기반으로 기여한다(우리가 제7편에서 이미 만났던 정리에 따르면, 재영토화는 반드시 가장 탈영토화된 것 위에서 일어나게 되어 있다). 가령 도시의 상업부르주아는 지식, 테크놀로지, 배치물들, 유통회로를 결합하거나 자본화하는데, 귀족, 교회, 직인들과 농민들까지도 모드 이의 지배하에 들어가게 된다(entreront). 상업부르주아가 이처럼 전체를 재영토화 할 수 있었던 것은 이들이 진정한 입자 가속기로서 탈영토화의 첨점이었기 때문이다. (269, 420)
§09.06 군중들과 계급들 269 - Masses et classes.420
역사가의 임무는 이 두 가지 운동(한편으로 탈코드화-탈영토화와 다른 한편으로 덧코드화-재영토화)이 공존하거나 동시적으로 존재하는 “기간”을 정하는 일이다. 그리고 바로 이 기간에 대해 분자적 양상과 분자그램적 양상이 구별된다. 한편으로 군중들 또는 흐름들이 있으며, 거기에 그것들의 변이들, 탈영토화의 양자들, 연결접속들, 가속들이 동반된다. 다른 한편으로 계급들 또는 절편들이 있으며, 거기에 그것들의 이항적인 조직, 공명, 접합접속이나 집적, 어느 한쪽에 유리한 덧코드화의 선이 동반된다. (269-270, 420)
미슐레(Michelet, 1798-1874)는 기묘한 문구에서 교회에 대항해 싸우고 있던 수많은 사람들을 프랑스로[부터] 몰아낸 이주의 흐름을 잘못 평가했다는 이유로 프랑수아 1세(François 1er, 1494-1547: 재위 1515-1547)를 비난했다. 즉 프랑수아 1세는 이것을 당시 이루어지던 종교개혁과는 다른 종교 개혁의 선두에 섬으로써 프랑스의 이익으로 전환시킬 수도 있었던 군중의 분자적인 흐름으로 느끼는 대신 이용 가능한 병사들의 유입으로만 보았다는 것이다. 문제는 항상 이런 식으로 나타낸다. 좋은 정치이건 나쁜 정치이건 정치와 정치적 판단들은 항상 그램분자적[정치공학적]이지만, 정치를 “행하는” 것은 분자적[위상적]인 것이자 분자적인 것에 대한 평가이다. (271, 422) - [인민 속에서 정치이지, ‘인민을 위한’이란 미명의 정치가 아니다.] [기무사의 계엄관련 계획이든 유일신앙자들의 전쟁무기 확충이든 인민 속에서가 아니라, 그들만의 주장으로 인민을 위한이다. 상층은 특수한 단위의 우연한 성립을 필연적 전제 삼고자 가짜 뉴스, 픽션 사실을 퍼트린다. 죽음 후 부활이라는 황당한 우화도 이야기 거리로 삼는 것은 여섯 살 짜리 애들용, 요강공주용이다. 허위, 허구, 우화에 온갖 의미를 붙이는 짓이 얼마나 세상을 바꾸어 놓았는지를 상층은 잘 알고 있기에 그 짓을한다. / 1945년 12월27일자 동아일보 1면에 실린 “소련은 신탁통치”라는 가짜 기사는 전날 조선일보가 먼저 터뜨린 것이라 한다. 지금도 가짜기사의 대부분은 조선일보가 조그많게 쓰고 그 다음 날 일본 극우신문이 서울발로 보도하는데도 그 다음에 꼴꽁신문들이 일본발로 기사화하는 짓을 한다. 가짜 기사 첫 발원지를 문제 삼지 않은 제국의 주구들이다. 그러니까 북한에서 죽은 자가 재생하는 기사가 난다. (51RMG)]
§09.07 추상기계: 돌연변이와 덧코드 422
- Machine abstraite: mutation et le surcodage. 271
이제 우리는 지도(une carte)를 더 잘 그릴 수 있게 되었다. “선(ligne)”이라는 말에 아주 일반적인 의미를 돌려주면 우리는 두 가지 선만이 있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세 가지 선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1) 코드와 영토성이 서로 뒤얽힌 비교적 유연한 선. ... 2) 절편들의 이원적인 조직화, 공명하는 원환들의 동심성, 그리고 일반화된 덧코드가 실행되는 견고한 선. ... 3) 양자들에 의해 표시되며, 탈코드화와 탈영토화에 의해 규정되는 하나 또는 여러 개의 탈주선(이 선들 위에서 기능하는 전쟁 기계와 같으나 무엇인가가 항상 존재한다). (271, 422-423)
그러나 이 설명은 마치 원시 사회를 최초의 사회인 것처럼 만든다는 점에서 위험하다. 실제로 코드들은 탈코드화의 운동으로부터 결코 분리할 수 없으며, 영토들은 이 영토들을 가로지르는 탈영토화의 백터들로부터 분리할 수 없다. 게다가 덧코드화와 재영토화가 사후적으로 오는 것은 더욱더 아니다. (271, 423)
가령 야만족들에 대한 역사가 피렌느(Pirenne, 1862-1935)의 명제를 보자. “야만족들이 [로마] 제국을 덮친 것은 자발적인 것이 아니었다. 훈 족의 쇄도에 의해 그렇게 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바로 이런 식으로 훈 족의 쇄도가 침략의 원인이었던 것이다……” 한편에는 로마 제국의 견고한 절편성이 있고, 그와 더불어 공명의 중심과 주변, 국가, “팍스 로마나”, 기하학, 주둔지, 변경의 요새 지대가 있다. 그리고 [다른 한편] 지평선에는 전혀 다른 선, 유목민들의 선이 있는데, 이들은 스텝을 떠나 능동적이고 유동적인 탈주를 시도하고, 도처로 탈영토화를 가져가고, 국가 없는 전쟁 기계에 의해 활기를 띠고 촉발되는 양자들의 흐름들을 만들어낸다. (271-272, 423) [이어서]
이 이주하는 야만족들은 실제로 이 둘[제국과 유목] 사이에 있다. 이 들은 오가 가며, 국경을 지나가고 다시 지나가며, 약탈하거나 강탈하지만 또한 통합되고 재영토화된다 어떤 때는 제국 안으로 깊숙이 들어가 그 절편을 자기 것으로 만들고 용병이나 지원병이 되기도 하며 정주해 토지를 점유하거나 스스로 국가를 세우는 경우도 있다(온건한 서고트 족). 또한 다른 때는 반대로 유목민들의 편으로 넘어가 이들과 연합해 식별할 수 없게 되는 경우도 있다(빛나는 동고트 족). 항상 훈 족과 서고트 족에 패배하기만 한, “고트 족의 제2지대”인 반달 족은 하나의 탈주선을 긋는대, 이 선이 이들을 이들의 지배자들만큼 강하게 만들어 준다. 반달 족은 지중해를 건넌 유일한 패거리 또는 군중이다. 그러나 아프리카 제국이라는 가장 예기치 않은 재영토화를 행한 것도 이들 반달 족이었다. 따라서 세 선은 공존할 뿐만 아니라 서로를 변경시키고 각각이 다른 선들로 옮겨가는 것 같다. 게다가 우리는 선들이 상이한 집단들에 의해 나타나는 간략한 예를 보았다. 하물며 동일한 집단, 동일한 개인에게서는 더 말할 것도 없다. (272, 423-424)
그러니 <추상적 기계>의 동시적 상태들을 살펴보는 것이 더 좋을지도 모르겠다. 한편에서는 덧코드화의 추상적인 기계가 있다. 바로 이 기계가 견고한 절편성, 거시-절편성을 규정한다. (272, 424)
단지 국가 장치는 이 장치가 실행하는 추상적인 기계와 다소간 동일화되는 경향이 있다고 말할 수 있을 뿐이다. 바로 여기서 전체주의 국가라는 개념이 의미를 갖게된다. 즉 하나의 국가가 전체주의 국가가 되는 것은, 국가가 자기 자신의 한계 안에서 덧코드화의 세계적 기계를 실행하는 대신,“자족적 체계(autarcie)”의 조건을 창출해내고 진공의 책략 속에서 “닫힌 꽃병 상태(par vase clos)”를 통해 재영토화를 수행하면서 덧코드화의 세계적 기계와 동일화될 때이다(이 책략은 결코 이데올로기적인 조작이 아니라 정치적이고 경제적인 조작이다). (272-273, 424-425)
다른 한편, 다른 한쪽 극에는 탈코드화와 탈영토화에 의해 작동하는 변이의 추상적인 기계가 있다. 바로 이 기계가 탈주선들을 그리는 것이다. (273, 425)
§09.08 권력의 중심이란 무엇인가? 426 Qu’est-ce qu’un centre de pouvoir?
권력의 중심 또는 초점은 무엇인가? 이 물음은 이 모든 선들의 착종을 보여주기에 적당하다. 흔히 군부 권력, 교회 권력, 학교 권력, 공적 권력 또는 사적 권력 등에 대해 말한다. 권력의 중심들은 분명히 견고한 절편들과 관련 있다. 각각의 그램분자적인 절편에는 반드시 하나나 여러 개의 중심이 있다. (273, 426)426
국가는 다른 점들을 받아들이는 하나의 점이 아니라 모든 점들의 공명상자이다. 그리고 국가 전체주의적인 경우라도 각각의 중심들과 절편들을 위한 공명 기능은 바뀌지 않는다. 이 기능은 그것의 내적인 효력을 증가시키거나 “강제적 운동”의 “공명”을 배가시키는 닫힌 꽃병 상태라는 조건에서만 이루어 진다. (274, 426)
권력의 각 중심은 또한 분자적이며, 미시논리적인 조직(tissue micrologique)에 행사된다. 여기에서 권력의 각 중심은 확산되고 분산되고 확대되고 모형화되고 끊임없이 대체되고 유한한 절편화에 의해 작용하고 세부 및 세부적인 것들의 세부에서 작동함으로써만 존재한다. “규율들” 또는 “미시-권력들”(학교, 군대, 공장, 병원 등)에 대한 푸코의 분석은 이 “불안정한 초점들”을 증언해 주고 있는데, 여기에서는 재편성들이나 집적들, 그리고 도피들과 탈주들이 서로 충돌하며, 역전들이 산출되기도 한다. (274, 427)
(“이 관리들이 항상 같은 책 곁에 머물러 있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들은 책이 아니라 장소를 교환한다. 게다가 장소를 바꿀 때는 통로가 좁기 때문에 서로 몸을 부딪히면서 지나가야 한다.‥….” “그 공무원은 클람을 꼭 닮았다. 만약 그가 사무실에서 자기 책상에 앉아 있고, 문에 그의 이름이 있다면 나는 더 이상 의심하지 않을 것이다‥….) 바르나스는 이렇게 말한다. (274, 428)
그리고 이러한 미시적 짜임을 갖고 있지 않은 권력의 중심은 없다. 억압당하는 자가 억압의 체계 속에서 항상 능동적인 자리를 취할 수 있는 이유를 설명해주는 것은 마조히즘이 아니라 바로 이 미시적 짜임(cette micro-texture) 이다. 부유한 나라의 노동자들은 제3세계에 대한 착취, 독재자들의 무장, 대기 오염에 능동적으로 가담하고 있는 것이다. (275, 428) [부유한 나라의 노동자들... ... / 비정규직이 무릎 꿇고 정규직에 하소연하는 경우, 대한항공은 노조가 가면을 쓰고 촛불을 드는 경우, 달리 표현할 개념을 만들어야 할텐데...]
그리고 이것은 놀랄 만한 일이 아니다. 이 [미시적] 짜임(cette texture)은 견고한 절편들로 이루어진 덧코드화의 선과 양자들로 이루어진 궁극적인 선[흐름이 아닌가?] 사이에 있기 때문이다. 이 미시적 짜임은 항상 이 두 선 사이를 왔다갔다하면서 때로는 양자들로 이루어진 선을 절편들로 이루어진 선으로 끌어내리기도 하고, 때로는 흐름들과 양자들이 절편들로 이루어진 선에서 도주하도록 만들기도 한다. (275, 428)
이들 정치인들이 탈주선 위에서만 서로 만나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설령 잘못 판단해서 몰락하는 한이 있어도 이들은 탈주선을 그리고 탈주선을 예감하고 탈주선을 뒤쫓거나 앞서간다(히브리인 모세, 반달 족 가이세리크, 몽골 족 징기스칸, 중국의 모택동…) 그러나 이 흐름들 자체를 조절하는 <권력(Pouvoir)>은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는 “통화량(masse monnataire)”의 증가조차 지배하지 않는다. (275-276, 429) [화폐의 유통이 노마드이면, 시장경제는 권력의 지배에 들어가지 않는다. 그럼에도 공황으로 화폐개혁에서 화폐 명령어에 속한다. 그 개혁된 화폐는 자유로운 유통이 아니다. 즉 권력이 유통(총량)을 지배하지 못한다.]
바로 이러한 의미에서 가령 은행 권력(세계은행, 중앙은행, 신탁은행)에 대해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융자금이나 신용화폐의 흐름이 경제거래의 총량(masse)을 가리킨다면 은행에서 맡아 하는 일은 창조된(créée) 이 신용화폐를 적합한(appopriée, 권력에 속한) 절편적 지불화폐로, 즉 그 자체로 절편화된 재화를 구매하기 위한 금속 화폐나 국정화폐로 변환하는 작업이다(금리가 중요한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은행에서 맡아서 하는 일은 두 화폐간의 변환, 그리고 지불 화폐의 절편들을 등질적 집합으로 변환하고, 지불화폐를 하여튼 재화로 변환하는 작업이다. (276, 430)
모든 권력의 중심은 다음의 세 가지 양상(trois aspects) 또는 세 가지 지대(trois zones)를 지닌다. 1) 견고한 선의 절편들과 관련된 역량의 지대. 2) 미시-물리학적인 조직으로의 확산과 관련된 식별 불가능성의 지대. 3) 통제하지도 규정하지도 못하고 단지 변환할 수밖에 없는 흐름들 및 양자들과 관련된 무력함의 지대. (276, 430)
다시 화폐의 예로 돌아가면, 첫째 지대는 공적인 중앙은행으로 대표되며, 둘째 지대는 “은행들과 차용자들 간의 사적인 관계들의 무한 계열”에 의해, 그리고 셋째 지대는 경제 거래의 총액에 의해 규정되는 양자들의 화폐를 욕망하는 흐름에 의해 대표된다. (277, 430-431)
하지만 모든 경우에 권력 중심의 첫째 지대는 그램분자적인 덧코드화의 추상적인 기계를 실행시키는 배치물로서 국가 기구 속에서 규정된다. 둘째 지대가 이러한 배치물이 잠겨버리는 분자적 조직 속에서 규정된다. 그리고 셋째 지대는 변이, 흐름들 그리고 양자들의 추상적인 기계 속에서 규정된다. (276, 431)
§09.09 세 가지 선들과 각각의 위험들 431 - Les trois lignes et les dangers de chacune.
§09.10 공포, 명확성, 권력, 죽음 - Peur, clarté, pouvoir et mort.
그러나 이들 세 가지 선들 중 어느 선이 본성상 또는 필연적으로 더 좋거나 나쁘다고 말할 수 없다. 이 세 가지 선의 위험에 대한 연구는 표상하거나 해석하거나 상징화하려 하지 않고, 단지 지도들을 만들고 선들을 그어 이들의 혼합이나 구별을 표시하려 하는 한 화행론 또는 분열분석의 대상이다. 니체(Nietzsche, 1844-1900)의 차라투스트라와 카스타네다(Carlos Castaneda, 1925-1998)의 인디언 돈 후안에 따르면, 위험에는 세 가지 아니 네 가지가 있다. 우선 <공포(la Peur)>, 다음으로 <명확함>, 그리고 <권력>, 마지막으로 거대한 <혐오(le grand Dégout)>, 즉 죽이고 싶다는 욕구, 소멸의 <열정(Passion, 수동)>.
[첫째 위험] 공포, 그것이 무엇인지 우리는 짐작할 수 있다. 우리는 항상 잃는 것을 두려워하고 있다. 안전, 우리는 지탱시켜주는 거대한 그램분자적 조직, (277, 431) [혐오가 죽음으로 이끈다.... 그를 사랑하라는 그를 역지사지하여 생각하라 ...] [확실성이 모자라서?]
“우리의 허영과 자기만족이 관대하게 우리에게 부여해준 여러 가치, 도덕, 조국, 종교, 개인적 확신 등은 안정된 사물들 속에서 정지해 있다고 생각하는 자들을 위해 세계가 마련해 놓은 체류자이다. 이들 자신들이 나아가고 있는 이러한 거대한 혼란에 대해 아무 것도 모르고 있다‥…. 탈주 앞에서 탈주” (277, 431-432)
귀가하자마자 “수프는 준비되어 있어?”라고 묻는 남자. “얼굴이 왜 그래? 뭐 안좋은 일 있어?”라고 대답하는 여자. 이것이 둘씩 맞서는 견고한 절편들의 효과이다. 절편성이 견고할수록 우리는 더 안심한다. 바로 이것이 공포로서, 공포가 첫째 선으로 우리를 수그리게 하는 방법은 그러하다. (278, 432)
둘째 위험인 <명확함(la Clarté)>은 덜 분명해 보인다. 이것은 사실상 명확함이 분자적인 것과 관련되기 때문이다. [명확함 보다는 엄밀함이 아닐까? ] 여기서도 역시 지각이나 기호계를 포함해 모든 것이 관련되는데, 하지만 여기서는 둘째 선위에서 일어난다. 카스타네다는 가령 마약(수많은 것들이 마약의 역할을 할 수 있다)이 우리에게 열어주는 분자적 지각의 존재를 보여주고 있다. (278, 432)
모든 것이 현미경의 명확함을 획득한다. ... 먼저 유연한 절편성은 견고한 절편성의 변용들과 직무들을 축소된 모형의 형태로 재생산할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 가족은 공동체에 의해, 혼인은 교환과 이주의 체제에 의해 대체되는 것이다. 더 나쁘게는, 미시-외디푸스들이 세워지고, 미시-파시즘들이 법을 만들고 어머니는 아이의 성기를 주물러 주어야 한다고 믿게 되고, 아버지는 엄마가 되어버리는 것이다. (278, 433)
우리는 공포를 이겨냈고, 안전함의 기슭을 떠나 왔지만 결코 그에 못지 않게 집중되고 조직화된 시스템에 들어왔다. 이처럼 작은 비-안정성들의 시스템에 의해 각자가 자신의 검은 구멍을 발견하고, 이 구멍 안에서 위험하게 되며, 자기 입장이나 역할이나 임무에 대해 첫째 선의 확실함들(les certitudes보다 훨씬 더 우려할 만한 명확함(une clarté)을 갖게 된다. (279, 434) [첫 선이 제국이면 둘째 선은 제국의 기하학 같은데..]
<권력(le Pouvoir)>은 셋째 위험이다. 이는 그것이 두 선 위에 동시에 걸쳐있기 때문이다. 권력은 견고한 절편으로부터, 그것들의 덧코드화와 공명으로부터 미세한 절편화 작용들로, 그것들의 확산과 상호 작용들로 나아가며, 그 역으로 진행되기도 한다. 권력자라면 누구나 반드시 한 선에서 다른 선으로 도약하며, 저속한 스타일과 세련된 스타일, 건달 스타일과 허풍장이 스타일, 담배 가게(bureau de tabac)[카페, 선술집]의 민중 선동과 고급 관료의 제국주의를 넘나든다. (279, 434)
요컨대 배치물에 기계의 차원들을 부여해야 하는 것이다. 이것이 전체주의나 “닫힌 꽃병 상태”의 인위적인 조건 속에서 생산되는 일이다. (279, 435)
그러나 아직 넷째 위험이 남아 있다. 물론 이것이 우리에게 가장 흥미로운 것이다. 이것은 탈주선들 자체와 관련되어 있기 때문이다. ... 도주선 자체가 죽음과 제물의 냄새처럼, 사람을 파괴해버리는 전쟁 상태처럼 이상한 절망을 발산한다. 탈주선들은 앞에서 살펴본 위험들과 혼동할 수 없는 고유한 위험들을 갖고 있는 것이다. (279-280, 435) (이어서)
바로 이런 이유로 피츠제럴드(Fitzgerald, 1896-1940)는 이렇게 말했던 것이다. “황혼녘에 탄창이 빈 소총을 들고 표적들이 쓰러져 있는 버려진 사격장에 서 있는 느낌이다. 해결해야 할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 나 자신의 숨소리 말고는 오로지 적막이었다. (……) 나의 자기 공양은 뭔가 습기와 어둠 같았다.” 도주선 자체가, 파괴할 수 없는 것은 모두 파괴한 후, 우리 자신도 해체되고 파괴되어버릴 위험이 있는 전쟁인 것은 왜일까? 바로 이것이 넷째 위험이다. (280, 435-436) - [개조와 교체가 이루어져도 인민의 삶을 바꾸지 못하는 경우에 혁명인데 혁명은 혁명가들이 산화하면서 무너트린 제도를 새로 (창조적) 세우는 것이다. 개축과 개선의 많은 비용이 들어도 근본적 변화가 없을 때, 부지자체(고른평면)의 새로운 지평위에 새우는 것이 탈영토의 재영토화일 것이다.(51PLD)
즉, 탈주선은 벽을 넘고 검은 구멍들로부터 빠져나와도 다른 선들과 연결접속되고 매번 원자가를 증가시키는 대신 파괴, 순수하고 단순한 소멸, 소멸의 열정으로 바뀐다. 클라이스트(Kleist)의 탈주선, 그가 이끈 불가사의한 전쟁, 그리고 자살, 탈주선을 죽음의 선으로 바꾸는 출구로서의 이중의 자살이 그런 것처럼. (280, 436) - [노마드가 답이라고 할 때, 도시를 떠나 토지로 돌아가는 하방이 답이다. 윤구병의 말대로 20대 인구의 3/4은 농촌으로 내려가서 삶을 살아보고 다시 도시로 세계로 나가도 괜찮다. 토지의 삶에서 소박과 절제를 나아가 금욕과 나눔(포틀래치, potlatch)을 느낄 것이다. 이 삶이 인도주의(humanitaire)이다. 이를 겪은 다음에 도시에서 휴머니스트가 되던 자유주의자가 되던 말이다. (51PLD)]
그렇다고 여기서 죽음의 충동(aucune pulsion de mort)을 내세우는 것은 아니다. 욕망 속에는 내적 충동이 없으며 오직 배치물들만 있다. 욕망은 언제나 배치되어 있다. 욕망이란, 배치물이 욕망이 그러하도록 결정하는 그것이다. 탈주선들을 그리는 배치물은 탈주선들과 동일한 층위에 있으며, 전쟁기계의 유형을 하고 있다. (280, 436)
전쟁 기계는 유목적 기원을 가지며, 국가 장치에 맞선다. 국가의 근본적인 문제들 중의 하나는 국가가 이질적인 이 전쟁기계를 자기 것으로 삼아 고착된 군사 기구의 형태로 국가 장치의 부품으로 만드는 것이다. 그리고 이 점에서 국가는 언제나 커다란 어려움들을 만난다. 그러나 전쟁기계가 가장 파국적인 전하(電荷)를 풀어 놓는 것은 전쟁만을 목적으로 할 때, 그래서 변이를 파괴로 대체할 때뿐이다. 하지만 변이는 결코 전쟁의 변형이 아니다. 반대로 전쟁이야말로 변이의 추락이나 되떨어짐 같은 것이며, 바로 그것이 변이의 역량을 잃었을 때 전쟁기계에 남게 되는 유일한 목적이다. ...(나중에 우리는 전쟁기계와 전쟁의 이런 복잡한 관계에 대해 하나의 가설을 제시할 생각이다). (280-281, 436)
[§09.11 파시즘의 역설 437 – Le paradoxe du facisme 281. ]
[이 단락을 우리가 새로이 구성하는 것은 히틀러의 파시즘과 스탈린의 전체주의는 다르다는 점이다. 윤구병의 이야기로, 독일은 인민을 피폐하게 만들었지만, 소련은 구석구석의 인민들을 살 수 있게 했다고 했다. (51PLD)]
바로 여기서 우리는 파시즘의 역설, 그리고 파시즘과 전체주의의 차이를 재발견한다. 전체주의는 국가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 군부독재의 경우에도, 권력을 장악하고 국가를 전체주의 단계로 끌어올리는 것은 국가의 군대이지 결코 전쟁기계가 아니다. 전체주의는 특별히 보수적이다. (281, 437) (이어짐)
반면 파시즘에서는 분명 전쟁기계가 문제가 된다. 그리고 파시즘이 전체주의 국가로 구성된다는 것은 국가의 군대가 권력을 장악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반대로 하나의 전쟁기계가 국가를 탈취한다는 의미로 이해해야 한다. 비빌리오의 색다른 지적은 우리를 다음의 길로 인도 한다. 즉, 파시즘 국가는 전체주의적(totalitaire) [국가]이라기보다는 자살적(suicidaire) [국가]이다. 파시즘에는 실현된 허무주의가 있다. 모든 가능한 탈주선을 봉쇄하려는 전체주의 국가와 달리 파시즘은 강렬한 탈주선 위에서 구성되며, 이러한 탈주선들을 순수한 파괴와 소멸의 선으로 변형시킨다. (281, 473) [죽음 충동을 이야기하는 자는 최고 상층의 지배하게 있으며, 생명충동은 심층의 고른 평면의 결연(알리앙스)과 연결접속의 흐름을 느끼고 있다]
클라우스 만(Klaus Mann, 1906-1949)의 소설 메피스토(Mephisto, 1936)는 나치의 통상적인 담론이나 대화의 견본을 제공한다. “우리의 실존에서 영웅적인 파토스는 점점 더 없어져 가고 있다. (……) 실제로 우리는 지금 행진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비틀거리며 나아가고 있다. 친애하는 총통은 우리를 암흑(les ténèbres)과 심연(l’abîme) 속으로 끌고 간다. 그러니 우리 시인들이, 암흑과 심연에 대해 특별한 관계를 가지고 있는 우리 시인들이 어찌 총통을 찬미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 지평선에 타오르는 불빛들, 모든 길 위에 있는 피의 냇물들, 그리고 생존들의 홀린 듯한 춤, 시체 주위를 맴도는 아직 손상되지 않은 자들의 춤!” 자살은 징벌이 아니라 타인들의 죽음에 대한 화관(花冠)으로 나타난다. 항상 이것은 그저 모호한 담론, 이데올로기 문제일 뿐이며, 이데올로기 이외에는 아무 것도 아니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281-282, 438) [여기서는 나치 편에 선 견해 / 아래에서는 나치에 대한 비판 견해]
우리는 오히려 파예(Jean-Pierre Faye, 1925-)의 분석을 따르고자 한다. 파예는 가장 불합리한 대화뿐만 아니라 정치적 대화, 경제적 대화 속에서 작용하는 나치의 언표들에 대한 정확한 형성과정(formation)에 대해 자문했다. 나치적 언표 속에서 우리는 항상 <죽음 만세!>라는 “어리석고 혐오스런” 외침을 재발견한다. 심지어 군비 확장이 소비 증가를 대체하고, 생산 수단으로부터 순수한 파괴 수단으로 투자의 방향이 바뀌는 경제의 수준에서도 그러하다. 전체주의 국가라는 개념이 아니라 자살적 국가라는 개념으로 파시즘을 규정하는 폴 비릴리오(Paul Virilio, 1932-)의 분석은 우리가 보기에 아주 정당하다. (282, 439) [벩송이 독일 철학에서 위험과 전쟁을 보았다. 상층의 절대성을 인정하는 철학과 논리는 전쟁을 감추고 공포를 심는다. 게다가 정신분석학의 죽음 충동 또한 그러한 유비에 들어간다. 1919년 전쟁이 끝나고 독일계 상황에서 타나토스가 나왔다고 보는 것도 일리가 있다. (51PLD)]
“실제로 한계도 목적도 없는 현실적으로 알려지지 않은 물질적 과정의 시동. (……) 일단 시동이 걸리면, 그 메카니즘은 평화로 귀착될 수 없다. 간접적인 전략이 시간과 공간의 통상적인 범주 바깥에다 지배적 권력을 효과적으로 설치하기 때문이다. (……) 히틀러가 마침내 자신의 가장 확실한 통치 수단과 자신의 정치와 군사 전략의 정당화를 발견한 것은 결국 일상성의 공포와 일상성의 환경의 공포 속에서이다. 그리고 이것은 끝까지 간다. 왜냐하면 전면전에 따른 파괴, 공포, 범죄, 혼란은 히틀러의 권력의 혐오스러운 본성을 무너뜨리기는커녕 보통은 그 권력의 폭을 확대시킬 뿐이기 때문이다. 전문 제71호. 전쟁에 지면 나라도 망함. 이 속에서 히틀러는 자신의 노력과 적군의 노력을 연합해 자국민에 대한 파괴를 달성하려고 했는데, 이르 위해 자국에 남겨져 있던 최후의 자연, 민간용의 모든 비축물(음료수, 연료, 식량 등)을 없애버렸다. 이것은 당연한 귀결이었다….” (282-283, 439-440 (이어서)
파시즘(le facisme)의 모든 분자적 초점들을 살아나게 하고, 그것들을 국가 장치 속에서 공명하게 하기보다는 전쟁기계 속에서 상호작용하게 한 것은 탈주선이 이미 파괴의 선으로 역전되었기 때문이다. 전쟁이외 다른 목적을 갖지 않는 전쟁기계. 그리고 파괴를 정지시키기보다는 오히려 자신에게 봉사하는 것들을 소멸시키기를 수락한 전쟁기계[나치즘]. 다른 선들의 모든 위험은 바로 이 위험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다. (440) -
*참조: [§09.11 파시즘의 역설 437 (Le paradoxe du facisme 281)]의 소절을 만든 이유.
[** 파라독스의 이중성: 내재적 점과 외향적 무한은 각각이 파라독스가 있다. 전자는 이질성이고 후자도 이질성인데 동질성으로 착각해온 것이 사상사이다. 전자의 파라독스는 내용상으로 그러하고, 후자의 파라독스는 형식상이며, 무한의 다양한 위상들을 보면 하나라고 하는 것이 착각, 오만, 절대 정지 속에서 자유인 것으로 여긴다. 점의 자유는 이질성들 각각이 자시 생성과 창조를 향하기에 진솔한 자유를 구가 한다고 할 수 있다. 윤구병의 점으로부터 시작 하는 담론은 내재적 점인데, 아무리 작은 점(현재)도 지속이 또는 무한 반복이 들어 있다는 벩송의 이론을 수용하고 있다고 본다. 점의 파라독스는 벩송에서, 무한의 파라독스는 플라톤주의자를 비판한 퀴니코스와 스토아에서 찾을 수 있다. 스토아의 전복은 들뢰즈가 의미의 논리(1969)에서 밝힌 바 있다. (51PLJ)]
[[*전쟁기계(나치)가 소멸과 죽음을 지향할 때 파라독스인가? 전쟁기계는 1(최상의 하나, 부동의 원동자)이 정주적이고 부동이라는 점에 대한 저항, 항거, 봉기 일 것이다. 욕망의 능동성과 역능에서 나온 전쟁기계가 최상의 1에 복무하게 되면 파라독스인가? 전쟁기계는 1(단위)이 전유하는 것, 즉 체재를 무너뜨리려는 것이 아닌가. 고대 그리스에서는 위험한 하나를 제거(추방)하는 도편추방(오스트라시즘)이 민주주의의 토대를 마련한 것이 아닌가. “하나”만을 추출하는 것, 특별기고: 우리는 하나다(윤구병, 보리, 2017.), 「제2장. 2014년 통일은 수박이다」 속에 “딱 하나만!”이라고 말하는 것, 이것이 민주주의로 가는 길일 것이다. 문제가 되는 것은 하나의 제거에서 ‘전유된 인민을 포함하여’ 제거하는 나치즘이다. 인민을 전쟁에 동원하여 죽음으로 몰아넣는 혐오가 문제다.
상층의 최고위에서 하나에는 파라독스가 있다. 이 파라독사(paradoxa)는 독사(doxa)를 데비시킨(모방한) 가짜이다. 민중은 파라독사의 욕망에 이끌려 가는데 비해, 인민은 심층의 doxa에서 모방할 ‘하나’가 없기에 새로운 모방체를 만든다. 이 모방체는 사유의 에피스테메이지, 사고의 인지가 아니다. 새로운 모방체, 새로운 창발, 새로운 창조는 자연 또는 우주(벩송의 표현으로 신들을 만드는 기계)의 고유한 작업이다. 이는 달리 말한다, 달리 산다, 달리 사유한다, 달리 신들을 만든다. 새로운 되기(devenir)이다. 이를 실행하는 자들 각각이 들뢰즈 표현으로 ‘전쟁기계’일 것이다. (51PLD)]]
(옮김: 5:7, 51PLC) (14:10, 51PLD) (20:23, 51PLJ) (22:24, 51PM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