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 속에 있다가 깨어나서, 세상을 바라보며 자라다가, 죽음으로 삶을 마무리한다.
알 속에 있을 때는 갇혀있는 줄도 몰랐고, 깨어나서도 내가 보는 좁은 세상이 전부인 줄로만 알았던 나에게, 죽음이란 또 얼마나 먼 이야기인가?
죽음이란 것은 참으로 어려운 주제이다. 왜냐하면 그 어느 누구도 체험해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죽었기 때문에 불행해진 사람을 보았는가? 그러니 그대들 자신에 의하여, 또는 남에 의하여 체험해 보지도 않고 나쁘다고 결정해 버리는 것은 너무나 단순한 일이다.”라는 몽테뉴의 말처럼.
혹자는 ‘임사체험’이라 하여 죽었다 살아난 이야기를 책으로 쓰기도 하고 연구를 하기도하지만, 실제로 완전히 죽었다가 되살아난 사람은 아무도 없다. 단지 몇 시간 내지 길어야 며칠 동안 뇌가 정지했다가 다시 작동한 것일 뿐이다. 쉽게 말해 덜 죽은 상태에 있다가 죽기 직전에 깨어난 것이다.
더구나 어떤 사람은 천국에 가서 천사, 예수님을 봤다고 하고, 또 어떤 이는 극락에 가서 부처님과 보살들을 보고 왔다고 하니, 사후세계가 여러 개가 아닌 이상 납득하기 어려운 이야기이다. 꿈을 꾼 것과 무엇이 다른가.
몽테뉴는 사형수에게 어떠한 진미가효도 맛있지 않은 것처럼, 죽음에서 초월하지 못하면 인생의 고통을 덜 방도가 없다고 말한다. 보통 사람들은 죽음을 생각하지 않음으로써 죽음을 극복했다고 생각하지만, 이는 당나귀 꼬리를 고삐 삼아 거꾸로 끌고 가는 것처럼 미련한 짓이며, 세상을 떠날 때에는 벌써 가야 하는 것을 억울해하거나 아쉬워하게 된다.
몽테뉴는 죽음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죽음을 자주 염두에 둠으로써 그와 친숙해져야 하고, 우리의 정신을 단련시키고 강화해야 하며, 제자리에 굳건히 발을 딛고 죽음과 싸우는 법을 배워야 한다고 말한다. 죽는 법을 배우는 것이 바로 사는 법을 배우는 것이며, 이를 통해 노예근성을 씻어내고 모든 굴종과 구속에서 해방된다.
생명을 잃는 것이 불행이 아님을 잘 이해한 사람에게는 이 세상에 불행이라는 것이 없다는 것이다.
나는 오늘 길 가다가 죽는다 해도 담담히 죽음을 맞이할 수 있을까?
그럴 수 있으리라는 생각도 들지만, 많은 것들에 대해 아쉬움이 남을 것 같다.
언제 죽더라도 후회를 남기지 않도록 매 순간 현재에 충실하려 하지만...
마음과 몸이 늘 일치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 그저 아쉬울 뿐이다.
첫댓글 글을 읽는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가에 대하여 창수가 정말 좋은 본보기를 보여주는 것 같네! 그리고 이 글, 정말 좋다~ 독후감을 쓰지 못해 글을 올리지 못했다는 말의 의미를 제대로 알겠네....! 글을 읽는 것을 포함하여 우리 모든 행위가 사실 자기의 내면과의 대화가 아니라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창수의 글읽기를 통해 많은 생각을 하게 되네^^*~ 그리고 딱 맞는 시기에 딱 맞는 선물을 한 것 같은 마음에 기쁘기도 하고^^*~
이렇게까지나 칭찬해주시다니~~~ㅎㅎ 그나저나 이제 몇개 안남았는데 마무리가 잘 되야할텐데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