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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언 16장
여호와의 주권아래 살아가는 삶과 언어
(찬송 35장)
2020-9-3, 목
맥락과 의미
16장은 여호와께서 주권적으로 다스리므로 그 분을 경외하라고 합니다. 이것이 참 지혜임을 가르칩니다. 1절과 31절에서 사람이 계획해도 여호와께서 이루심을 말합니다.
16장 잠언 31장 전체에서 중심입니다. “여호와”라는 말이 가장 많이 나오기 때문에 내용에서도 중심입니다(11번). 15장에서도 많이 나와서(9번: 3장에서도 9번) 잠언의 장들 중에서 두 번째로 많이 나옵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참 지혜라는 것은 잠언 전체의 주제이지만 잠언의 중간인 16장에서 확연하게 강조하고 있습니다. 욥기도 전제 40장의 중간인 28:28에 “주를 경외함이 지혜요. 악을 떠남이 명철이라”고 말한 것을 기억하시지요?
30장의 내용 흐름은 다음과 같습니다.
1. 여호와의 주권아래 사는 사람과 왕(1-15절)
2. 지혜로운 사람과 어리석은 말, 그리고 하나님의 주권(16-33절)
1. 여호와의 주권아래에 사는 사람과 왕(1-15절)
여호와를 경외하라는 주제는 15:30에서 다시 강조하기 시작했습니다. 15:33은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은 지혜의 훈계라 겸손은 존귀의 길잡이니라”고 했습니다.
1) 여호와의 통치(1-9절)
1-9에는 8절을 제외하고는 절마다 여호와라는 말이 나옵니다. 잠언에서 이렇게 여호와라는 말이 집중적으로 나오는 곳은 없습니다. 지금까지 읽었던 4,7,13장에는 여호와라는 말이 한 번도 나오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섭리가운데 하시는 일에 대해 말했기 때문입니다. 여호와라는 말을 많이 쓰는 것은 그 분을 인격적으로 알고 경배하라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입니다.
1절과 9절은 사람이 계획해도 하나님께서 길을 인도하신다는 같은 내용을 말하여 앞 뒤가 쌍을 이룹니다(수미쌍관법).
1절, 마음의 경영은 사람에게 있어도 말의 응답은 여호와께로부터 나오느니라,
“사람에게, 여호와께로부터”를 대조시킵니다. 마음의 경영의 원어의 뜻은 “마음을 질서있게 정돈해 두고” 계획하고 실천하는 것을 말합니다. 응답하고 이루시는 것은 여호와께서 하십니다.
2절, 사람의 행위가 자기 보기에는 모두 깨끗하여도 여호와는 심령을 감찰하시느니라
“사람의 행위”는 “한 사람의 길들”이라는 뜻입니다. 사람의 행동에는 다양한 동기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마음의 동기를 다 아십니다. 그리스도의 제자들인 우리는 자기 생각으로 자기가 잘 하고 있다고 칭찬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계속 자기를 비추어 보아야 합니다. 회개하며 더 거룩하게 성장하도록 간구해야 합니다. 우리가 하는 모든 것을 주님께 맡기고, 우리의 동기들과 길들이 하나님을 기쁘게 하도록 하나님을 의지합시다.
바울은 말합니다(고린도전서 4:4,5) “내가 자책할 아무 것도 깨닫지 못하나 이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지 못하노라. 다만 나를 심판하실 이는 주시니라.” 예수님께서 재림하실 때 “그가 어둠에 감추인 것들을 드러내고 마음의 뜻을 나타내시리니 그 때에 각 사람에게 하나님으로부터 칭찬이 있으리라.” 이렇게 자신의 선함도 하나님 앞에 완전하지 않다고 인정하는 성도에게 재림 때 “칭찬” 이 있을 것입니다.
3절, 너의 행사를 여호와께 맡기라 그리하면 네가 경영하는 것이 이루어지리라
맡기는 것은 “굴려 버리라”는 뜻입니다. 모든 행동을 여호와께 굴리고 던져 던지십시오(베드로전서 5:7). 그러면 하려고 계획하고 생각하는 것이 견고하게 서게 될 것입니다.
4절. 여호와께서 온갖 것을 그 쓰임에 적당하게 지으셨나니 악인도 악한 날에 적당하게 하셨느니라
여호와께서는 모든 것을 그것의 목적에 맞게 주권적으로 일하십니다. 악인은 재난의 날에 재난을 받는 일에 쓰임받도록 일하십니다. “악한”은 “재난의”라는 뜻도 있습니다. “쓰임”은 “응답/대답”의 뜻도 있습니다. 1절에서 말하듯이 사람이 계획해도 하나님께서는 그 분의 응답하심을 따라 일하십니다.
5절, 무릇 마음이 교만한 자를 여호와께서 미워하시나니 피차 손을 잡을지라도 벌을 면하지 못하리라
교만한 마음, 말, 행동, 교만한 자는 대개 뭔가 좋은 것이 있습니다. 세상적 성취, 심지어 선한 삶 때문에 교만해질 수 있습니다. 교만은 좋은 것에서 자라는 독버섯입니다. 자기는 좋다고 자랑하지만 여호와께서는 혐오하십니다. 우상처럼 싫어하십니다. 자신의 영적 은사를 자랑하는 고린도 성도들에게 성령님은 바울을 통해 말씀하십니다. “”누가 너를 남달리 구별하였느냐? 네게 있는 것 중에 받지 아니한 것이 무엇이냐? 네가 받았은즉 어찌하여 받지 아니한 것같이 자랑하느냐?”(고린도전서 4:7).
6절, 인자와 진리로 인하여 죄악이 속하게 되고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말미암아 악에서 떠나게 되느니라
인자와 진리는 무조건적 사랑과 신실을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해 이런 언약적 사랑을 먼저 보여주셨습니다. 죄를 용서해 주셨습니다. 이 사랑을 받은 우리도 이웃을 향해 신실한 사랑을 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이웃을 향한 사랑이 없이 종교행위만 하는 것은 하나님이 받지 않으십니다.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지를 사하여 주옵시고”라는 기도와 같습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의 죄를 용서하는 것이 공덕이 되어 하나님께서 우리 죄를 용서해 주는 것은 아닙니다. “주님의 은혜의 증거가 우리 안에서 있어서 우리가 이웃을 용서하기로 굳게 결심하는 것처럼, 그리스도의 보혈을 보시사 우리의 모든 죄과와 아직도 우리 안에 있는 부패를 불쌍한 죄인인 우리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하이델베르크요리문답 제126문).
우리가 죄로부터 떠나는 동기와 힘은 어디에서 나옵니까? 여호와를 두려워하며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여호와를 사랑하기 때문에 여호와의 말씀에 순종하고 악에서 떠납니다.
7절, 사람의 행위가 여호와를 기쁘시게 하면 그 사람의 원수라도 그와 더불어 화목하게 하시느니라
“사람의 길들이 여호와를 기쁘시게 하는 것”은 “제물을 기쁘시게 받으시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 인생길 전부를 하나님이 기쁘시게 하는 제물처럼 바칩시다. 그러면 하나님은 일하십니다. 우리를 원수처럼 대하는 사람도 우리와 평화를 회복하게 하십니다. 인간관계의 갈등이 있을 때 사람과의 관계에 대해 너무 고민하지 맙시다. 먼저, 우리 삶에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않는 일이 없는 지 돌아보고 회개합시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을 새롭게 삽시다. “하나님께서 화목하게 하신다” 이 약속의 말씀을 굳게 믿읍시다. 그래서 우리를 원수처럼 대하는 사람에게도 계속 평화의 말을 하고 평화를 이루기 위해 수고합시다.
8절, 적은 소득이 공의를 겸하면 많은 소득이 불의를 겸한 것보다 나으니라
윤리와 경건이 스며든 물질이 아름답습니다. 불의한 재물은 여호와께서 싫어하십니다. 오히려 그 재물 때문에 심판을 당할 것입니다. 불의한 부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들으라 부한 자들아 너희에게 임할 고생으로 말미암아 울고 통곡하라. 너희 금과 은이… 불같이 너희 살을 먹으리라”(야고보서 5:1,3). 우리 주 예수님께서 선언하십니다. “복 되도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들, 그들이 배부를 것임이요”(마태복음 5:6).
9절.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의 걸음을 인도하시는 이는 여호와시니라
3절과 비슷합니다. 원어에는 같은 단어 두 쌍이 있습니다. 계획=경영(3절), 인도=이루어 짐(3절). 사람은 생각하고, 계획하고 실천에 옮깁니다. 그러나 여호와께서 그의 걸음에서 계획대로 이루어 지게 하십니다. 삼위 하나님의 자비를 구하며 우리 모든 일을 해야 하겠습니다.
2) 여호와의 통치를 전달하는 왕의 역할(10-15절)
여호와께서는 의롭고 지혜로운 왕을 통해 이 땅에서 그 분의 통치를 이루어 가십니다.
10절, 하나님의 말씀이 왕의 입술에 있은 즉 재판할 때에 그의 입이 그르치지 아니하리라.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는 정상적인 왕은 자기 옆에 율법책을 두고 읽어야 했습니다(신명기 17:18-19). 그래야 백성에게 교만하지 않고, 하나님의 명령으로부터 좌로나 우로나 치유치지 않습니다. 정책을 결정할 때나 재판을 할 때 그의 입이 어긋나고 죄를 짓지 않습니다.
11절, 공평한 저울과 접시 저울은 여호와의 것이요 주머니 속의 저울추도 다 그가 지으신 것이니라
사람들 사이에 물건을 사고팔 때 정직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물질세계뿐 아니라 사회를 위한 정직과 정의와 공정함도 창조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창조질서에 맞게 정적하고 공정하게 사는 개인과 사회는 번성합니다.
12절, 악을 행하는 것은 왕들이 미워할 바니 이는 그 보좌가 공의로 말미암아 굳게 섬이니라.
왕이 악행을 미워한다는 것은 5절에서 마음이 교만한 자를 여호와께서 미워하신다는 말과 같습니다. 왕은 하나님이 미워하시는 것을 미워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왕위는 의를 인해 굳게 서기 때문입니다. 굳게 선다는 것은 “이루어 짐(3절), 인도함(9절)”과 같은 말입니다.
13절, 의로운 입술은 왕들이 기뻐하는 것이요 정직하게 말하는 자는 그들의 사랑을 입느니라
왕을 기쁘게 하는 것에 대해 말합니다. 여호와께서는 그 분의 대리자인 왕을 통해 여호와께서 기뻐하시는 것을 나타내십니다. 의를 말하는 사람(입술)입니다. 바른 것 혹은 바르게 말하는 것을 왕은 사랑합니다. 12절에서 악을 미워하는 왕은 이렇게 바르게 말하는 것을 사랑합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뜻이 이 땅에 이루어 집니다.
이 아름다운 왕국은 하늘에 계신 위대한 왕 예수님께서 성령님을 통해서 교회 안에 이루십니다.
14절, 왕의 진노는 죽음의 사자들과 같아도 지혜로운 사람은 그것을 쉬게 하리라
왕의 진노는 왕 개인의 것이 아닙니다. 이상적인 이 땅의 왕은 하나님의 진노를 이 땅에 내리는 대리인이기 때문입니다. 악인에 대한 사형집행권도 있습니다. 그러나 지혜로운 사람은 왕의 진노를 쉬게 합니다.
15절, 왕의 희색은 생명을 뜻하나니 그의 은택이 늦은 비를 내리는 구름과 같으니라
15절을 직역하면 “왕의 얼굴의 빛에 생명이 있고, 그가 기쁘게 받아주심은 봄비의 구름과 같다.” 왕의 진노는 죽음의 사자들 같습니다. 그러나 앙의 얼굴에서 빛이 나옵니다. 여호와께서는 왕의 얼굴의 빛을 통해 여호와의 얼굴 빛을 비추시고 생명을 주십니다. “여호와는 그 얼굴 빛을 내게 비추사 은혜 주시기를 바라고 (민수기 6:25). “주의 얼굴 빛을 비추사 우리가 구원을 얻게 하소서”(시편 80:3,7,19).
이스라엘에는 이른 비(10, 11월)가 올 때 씨를 뿌립니다. 늦은 비(4월)에 비가 그칩니다. 늦은 비를 먹으면서 곡식은 영글어 갑니다. 여호와께서는 그 분을 중보하는 의로운 왕을 통해 심판하시고, 생명을 주십니다.
2. 지혜로운 말과 어리석은 말, 그리고 하나님의 주권(16-33절)
1) 지혜에 참된 안전함(16-19절)
16절, 지혜를 얻는 것이 금을 얻는 것보다 얼마나 나은고 명철을 얻는 것이 은을 얻는 것보다 더욱 나으니라
지혜를 얻는 것은 이렇게 가치가 있습니다.
17절, 악을 떠나는 것은 정직한 사람의 대로이니 자기의 길을 지키는 자는 자기의 영혼을 보전하느니라
인생길이 열리고 생명이 넘치게 하기위해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않아야 합니다.
18절,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니라
18, 19절은 교만함을 경고합니다. “멸망의 앞에 교만이 오고, 넘어지는 것의 앞에 거만한 마음이 한다.” (직역). 교만하고 거만하면 얼마 후 멸망하고 넘어집니다. 하나님이 정하신 질서입니다.
19절, 겸손한 자와 함께 하여 마음을 낮추는 것이 교만한 자와 함께 하여 탈취물을 나누는 것보다 나으니라
겸손한 자는 “마음의 겸손”입니다. “마음의 교만”(18절)과 대조됩니다. 교만한 자와 함께 다른 사람의 것을 뺏고 이익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 보다는 겸손한 자와 함께 마음을 낮추는 것이 낫습니다. 누구와 우정관계를 맺고 인생을 함께 할 것인가가 중요합니다. 겸손하고 온유하신 그리스도의 길을 따르는 교회 공동체와 성도는 외부적인 화려함이 없습니다. 자랑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교회 공동체와 함께 하는 것이 참 행복입니다.
2) 지혜를 말하는 자(20-24절)
20절, 삼가 말씀에 주의하는 자는 좋은 것을 얻나니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는 복이 있느니라
말씀에 주의를 기울이는 것은 지혜롭기 위해 말씀에 주의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면 좋은 것을 얻습니다. 말씀에 주의를 기울이는 것을 그 말씀을 하신 여호와를 의지하는 삶을 말합니다. 그에게 복이 있습니다.
21절, 마음이 지혜로운 자는 명철하다 일컬음을 받고 입이 선한 자는 남의 학식을 더하게 하느니라
마음이 지혜로운 자는 지혜로운 말을 합니다. 다른 사람에게 유익을 줍니다. 그래서 명철한 사람이라고 인정을 받습니다. “입이 선한 자”는 “입이 달콤한 자”를 말합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지혜를 말할 때 달콤하게 말합니다. 음행하는 여자가 하는 달콤한 말과 다른 입술입니다. 지혜로운 말을 하여서 공동체에 학식을 더합니다. “학식”은 공동체를 통해 전승되어 온 지혜를 합니다.
예수님이 이런 분이십니다. “그분의 입에서 나오는 바 은혜로운 말을 놀랍게 여겼습니다”(누가복음 4:22).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그 십자가의 은혜로 구원받은 우리들도 지혜로운 자가 되어 사람들에게 지혜를 전해줍니다.
22절, 명철한 자에게는 그 명철이 생명의 샘이 되거니와 미련한 자에게는 그 미련한 것이 징계가 되느니라
명철함은 20절에 “말씀에 주의를 기울이는 것”과 같은 말입니다. 명철한 자는 그 말씀에 주의를 기울여 인생을 살아가는 실제적 지혜를 얻은 자를 말합니다. 그에게는 지혜가 생명의 샘이 됩니다. 생명을 누립니다. 그러나 미련한 자는 그 말씀을 배우지 않으려 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징계를 받을 것입니다. “생명의 샘”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말씀대로 살아갈 때 우리에게 참 생명이 있습니다.
23절, 지혜로운 자의 마음은 그의 입을 슬기롭게 하고 또 그의 입술에 지식을 더하느니라
마음에 지혜를 품은 자는 말을 할 때 마다 상황에 맞는 현명함이 있습니다. 또 계속해서 공동체 전해 주는 지식을 자기 입술로 외우는 일을 합니다. 그래서 입술로 현명한 말을 합니다. 20-23절은 이어집니다. 주의(20절)=명철(22절)=슬기롭게(23절)는 같은 말입니다. 학식(21절)=지식(23절)도 같은 말입니다.
24절, 선한 말은 꿀송이 같아서 마음에 달고 뼈에 양약이 되느니라
지혜의 말은 선합니다. 듣는 사람에게 기쁨과 은혜를 줍니다. 달콤할 뿐 아니라 삶 전체에 치유를 줍니다. 뼈는 삶 전체를 말합니다. 상처나고 비뚤어진 마음에 이런 치유와 회복, 나아가 완전한 평화를 주는 말쟁이들이 되기 바랍니다.”달다”(24절)는 입이 선한 자(21절)와 같은 말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서 이 말솜씨를 얻습니다. 삶에 유익을 주는 말을 달콤하게 말하는 것도 성령님이 주시는 지혜입니다.
3) 어리석게 말하는 자(25-30절)
25절부터 어리석게 말하는 자에 대해 다룹니다. 멸망의 길(25절)로 이끄는 말이 여러 종류가 있습니다. 문제를 일으키는 불량한 자(27절), 비뚤어 진 말을 하여 분열을 일으키는 자(28절), 포악한 자(29절)등을 말합니다.
25절, 어떤 길은 사람이 보기에 바르나 필경은 사망의 길이니라
26절, 고되게 일하는 자는 식욕으로 말미암아 애쓰나니 이는 그의 입이 자기를 독촉함이니라
이것이 사람이 이 땅에서 살아가는 방법입니다. 사람은 먹고 살기 위해 수고하여 일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리스도인 중에서 경건생활을 힘쓴다고 하면서 일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성령님은 말하십니다. “누구든지 일하기 싫거든 먹지도 말라”(데살로니가후서 3:10). 동시에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썩을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 이 양식은 인자(예수님)가 너희에게 주리니”(요한복음 6:27). 예수님을 믿을 때 예수님 안에 있는 생명이 우리의 것입니다. 말씀과 성찬을 통해 이 생명을 받게 하신 은혜 감사합시다.
27절, 불량한 자는 악을 꾀하나니 그 입술에는 맹렬한 불 같은 것이 있느니라
깡패 같은 자들은 악을 우물을 파듯이 계획합니다. “꾀한다”는 판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의 입술은 사람을 상하게 하는 불이 나옵니다. 다른 사람도 공동체도 그 악한 말로 파괴합니다. 불이 나오는 그의 입술이 더 많이 화상을 입을 것입니다.
28절, 패역한 자는 다툼을 일으키고 말쟁이는 친한 벗을 이간하느니라
패역한 자는 하나님이 정하신 사회 질서를 “뒤집어 던져버리는”자입니다. 그들의 마음상태가 그렇습니다. 공동체에 “싸움을 던집니다.” 다툼이 번지게 합니다. “말쟁이”는 남의 이야기를 나쁘게 하고 수근거리는 사람은 사람 사이를 갈라 놓습니다.
29절, 강포한 사람은 그 이웃을 꾀어 좋지 아니한 길로 인도하느니라
마음이 폭력적인 사람이 있습니다. 자기의 이익을 얻기 위해 서슴지 않고 다른 사람에게 잔인하게 행합니다. 이들은 다른 사람들을 유혹해서 자기들이 아는 나쁜 조직에 끌어 들입니다. 악한 자들은 악을 계획하고 (27절), 갈등을 일으키고 친구의 사이를 나쁘게 하고(28절), 친구를 유혹해서 폭력적인 행동을 합니다.
30절, 눈짓을 하는 자는 패역한 일을 도모하며 입술을 닫는 자는 악한 일을 이루느니라
30절은 29절을 설명합니다(분사). 폭력을 행하고, “패역한 일”(28절의 “패역한 자”와 같은 말)을 행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그들은 눈을 깜빡깜빡합니다. 입을 꼭 다뭅니다. 자기들이 먹이감으로 삼은 사람들이 몰래 일을 꾸밉니다. 그리고 그 악한 일을 “끝까지 다 이룹니다.” 철저하게 악한 일을 합니다.
잠언은 우리와 함께 사는 사람들과 그 안에 사는 세상이 전적으로 죄에 물들어 있음을 보여줍니다. 성도는 마음이 순수해야 하지만 그냥 순박하게 속기만 해서는 안 됩니다. 지혜롭게 잘 분별해서 악한 자로부터 자신을 잘 지킵시다. 또 이런 악에 빠지지 않는 지 잘 돌아보아야 하겠습니다. 우리가 이런 시험에 들지 않고, 이런 “악한 자들”로부터 지켜 주시기를 매일 기도합시다.
3. 의로움을 통해 나이들어 감은 영광스러움(31-33절, 17:1-6)
31절은 인생 길에 대해 말합니다. “백발의 면류관”이 17:6에 “노인의 면류관”과 연결됩니다. 그래서 16:31-17:6은 한 단락으로 보입니다.
31절, 백발은 영화의 면류관이라 공의로운 길에서 얻으리라
나이가 들면 몸의 힘은 약해집니다. 그러나 의롭게 인생을 살아간 사람에게 그 흰머리는 마치 왕관과 같이 영광스럽습니다. 의로운 길을 지혜롭게 산 인생길이 하나님 앞에서 영광스럽습니다. 백발 성성한 그 사람의 인생길을 아는 사람들은 이것을 인정할 것입니다.
32절, 노하기를 더디하는 자는 용사보다 낫고 자기의 마음을 다스리는 자는 성을 빼앗는 자보다 나으니라
힘있는 용사는 성을 뺏고 다스립니다. 그 “무력”보다 더 큰 힘이 있습니다. 화를 참는 “인내력”입니다. 성을 얻기 위해 싸우는 것 보다 자기의 분노와 싸우는 일을 먼저 해야 합니다. 분노는 바른 생각을 하지못하게 합니다. 자기와 다른 사람에게 해를 줍니다. 성을 정복하지 못하고 자신이 무너지게 합니다. 인내할 때 맑은 정신으로 이룰 것을 이룹니다. 무엇보다도 공동체를 회복합니다. 분노하는 이유는 부당한 일을 당했기 때문입니다. 인내하고 그 다음에 용서할 때 분노는 사라집니다.
“노하기를 더디하는 것”은 반역한 하나님의 백성에 대해 인내하시며 용서하시는 하나님의 성품입니다. “여호와라 여호와라 자비롭고 은혜롭고 노하기를 더디하고 인자와 진실이 많은 하나님이라. 인자를 천대까지 베풀고 악과 과실과 죄를 용서하리라. 그러나 벌을 면제하지는 아니하고 아버지의 악행을 자손 삼사대까지 보응하리라(출애굽기 34:6,7),
우리 죄를 용서하시기 위해 하나님께서는 그 분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희생시켰고 부활하게 하셨습니다. 아예 우리에 대한 진노를 없애셨습니다. 우리도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라…. 서로 친절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에베소서 4:26, 32)
33절, 제비는 사람이 뽑으나 모든 일을 작정하기는 여호와께 있느니라.
구약 성경 시대에는 항아리 안에 작은 돌을 넣고 그것을 집어 내거나 땅에 쏟아서 어떤 일을 결정했습니다. 사람이 제비 뿝지만 그 모든 결정(판단, 작정)은 여호와께로부터 나옵니다. 1, 8, 33절이 같은 말을 합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일을 주관하십니다.
믿고 복종할 일
죄악오늘 16장의 중요한 말씀을 기억합시다.
1. 사람이 계획해도 여호와께서 일을 이루십니다. 계획할 때도 행동할 때도 삼위 하나님의 은혜를 간구합시다. 염려 말고 우리의 문제와 삶을 예수님께 던져 드립시다.
2.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삽니다. 그러면 나를 원수 삼는 사람도 나와 화목하게 하십니다.
3. 교만하면 얼마 후 넘어집니다. 겸손한 사람들과 함께 낮은 자기에서 섬기는 것을 자랑스러워 합시다.
4. 화내는 말을 하지 맙시다. 화내는 사람보다 인내하며 용서하는 사람이 강합니다.
우리 하나님께서는 우리 죄를 용서하기 위해서 그 분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희생시켰고 부활하게 하셨습니다. 아예 우리에 대한 진노를 없애셨습니다. 우리도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라…. 서로 친절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에베소서 4:26, 32)
조금 더 생각하기
<참고> 죄악을 “속한다(6절)=왕의 진노를 “쉬게 한다”(14절),
죄악을 “속한다”(6절)와 왕의 진노를 “쉬게 한다”(14절)은 같은 단어입니다(카파르). 원래 하나님의 율법에 따라 제사장이 제사를 드리며 죄에 대한 징벌을 “속죄한다”는 뜻으로 쓰입니다(레위기 1:4, 4:20,26).
“기쁘게 받으심이 되어(라차) 속죄가 될 것이다”(레위기 1:4)에도 나옵니다. 한 사람 대신 벌을 받는 제물을 기쁘게 받으면서 죄인을 기쁘게 받으십니다. 그러면서 죄를 용서해 주십니다.
<참고> 기뻐하는 것(13)=은택(15절)
기뻐하는 것(13절)=은택(15절)은 ‘라찬(라차)’이라는 같은 뜻입니다. 잠언에는 16장에서 두 번 나오는 것이 전부입니다. 이것은 원래 하나님께서 제물이나 사람을 기쁘게 받으신다는 데에 쓰는 단어입니다. 왕에게 이 말을 씀으로써, 하나님께서 땅을 통치하실 때 왕을 매개자로 세워서 하심을 나타냅니다.
14-16절은 왕이 기뻐하며 속죄한다는 표현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백성을 받으시고 은혜 베푸시는 일을 왕이 중개하는 일을 함을 보여줍니다.
<참고> 주의(20절)=명철(22절)=슬기롭게(23절)
주의(20절)=명철(22절)=슬기롭게(23절)는 같은 원어(샤칼)입니다.
<참고> 학식(21절)=지식(23절)
. 학식(21절)=지식(23절)은 같은 원어(레카흐)입니다.
<참고> 어떤(25절), 사람(27,28,29절)
27,28,29절은 모두 사람(이셔)라는 말로 시작합니다. 25절은
“……이 있다” (예셔)라는
말로 시작합니다. 이것이 한 단락이라는 표시를 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