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16. 해석과 사실
(히12:27)
“이 또 한 번이라 하심은 진동하지 아니하는 것을 영존하게 하기 위하여 진동할 것들 곧 만드신 것들이 변동될 것을 나타내심이라”
인생은 해석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서, 행복할 수도 있고, 불행할 수도 있다. 긍정적인 사람은 긍정적으로 해석하고, 부정적인 사람은 부정적으로 해석한다. 같은 사물이지만, 어떤 색의 안경을 쓰느냐에 따라서, 다르게 보인다. 그래서 사람들은 적극적이고, 긍정적인 사고방식을 가지려고 노력한다.
세상은 적극적인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는 소수의 사람이, 다수를 이끌어 간다. 보통 사람들이 볼 때는 안 되겠다는 일도, 어떤 사람의 눈에는 될 수 있다고 보일 때, 다수의 사람들은 결국 될 수 있다고 믿는 사람의 영향을 받고 따른다. 적극적인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자기 속에 묻혀있는 가능성을 개발하여 현실화시킨다.
인간의 두뇌는 땅에 묻혀 있는 지하자원과 같다. 자원을 개발하면 놀라운 생활의 변화를 가져온다. 선진국과 후진국의 차이는 묻혀 있는 자원을 얼마만큼 개발하여 활용할 수 있느냐의 차이다. 1차 산업에 머물러 있는 나라도 있고, 4차 산업 안에 있는 나라도 있다. 옛날에는 그냥 굴러다니는 돌이었는데, 어떤 사람에 의해서 개발되면, 엄청난 가치가 있는 것으로 변한다. 모래 속에 있는 규소성분에서 유리섬유를 뽑아내어, 그것으로 구리전선을 대체하여 광통신의 혁명을 일으켰다.
자기 신체의 장애를 긍정적인 사고방식으로, 불만족을 만족으로 바꾸는 사람도 있다. 일본 사람 오토다케 히로타다는 태어날 때 상반신밖에 없는 사람이었다. 그는 이 장애를 ‘신체적 특징’에 불과하다고 해석하여, ‘내가 아니면 할 수 없는 일이 반드시 있다.’ ‘불편하지만 불행하지 않다.’는 긍정적인 삶으로 소외받는 사람들에게 희망과 용기, 감동을 주는 사람이었다.
우리 목사님의 주례 가운데 잊을 수 없는 주례가 있다. 대구교회 장윤미 자매의 남동생 결혼식 때 하신 말씀이다. 신랑은 트럭 운전사였는데, 결혼을 앞두고 교통사고가 나서 두 다리를 절단하게 되었다. 신부될 여자는 집안의 반대를 무릅쓰고, 결혼식을 하게 되었다. 그 결혼식장의 분위기는 우울하였다. 그런데 목사님은 그 신랑에게 축복을 퍼부으셨다.
자기는 십대 때 폐결핵을 앓아서, 그때 사형선고를 받았다고 했다. 결핵은 치료되었으나 한쪽 폐를 쓸 수 없게 되었다. 그때 자기는 잃어버린 폐를 생각하지 않고, 남은 폐를 가지고 어떻게 유용하게 쓸 것인가를 생각하여, 연약한 몸으로 교회와 동네에 필요한 사람으로 살았다. 다시 남은 폐가 반밖에 남지 않았을 때도, ‘아직도 1/4 이 남아있지 않은가!’ 하고 생각하여 그 남은 폐로 지금까지 하나님께 쓰이고 있다고 하였다. 목사님은 눈물을 흘리시면서, 자기를 쓰시는 하나님이 계시는 것이 얼마나 감사하냐고 하시면서, 앞날이 어두운 신랑과 신부를 말할 수 없는 축복으로 축복하셨다.
현실은 바꾸기가 쉽지 않지만, 해석은 얼마든지 바꿀 수가 있다. 좋은 현실을 나쁘게 해석하는 사람이 있고, 나쁜 현실을 좋게 해석하는 사람도 있다. 두 사람이 똑같이 죽을병에 걸렸는데, 한 사람은 ‘내가 무엇을 잘못했기에 이런 병이 걸렸나?’ 하고 원망하는 사람이 있고, 다른 한 사람은 ‘내가 이때까지 나를 위해 살았는데 이 병을 주신 것은, 남은 시간 동안 하나님을 찬양하라고 주신 기회이다.’ 라고 해석한 사람이 있었다.
앞에 있는 사람은 자신은 물론이고, 주위에 있는 사람을 함께 사망에 빠지게 하는 물귀신 같은 사람으로 살다가 죽었고, 뒤에 있는 사람은 그 병으로 인해서 자신은 물론이고, 주위에 있는 사람을 살리는 사람으로 살았다.
말씀이 내게 들려오기 전에는, 늘 현실의 파도에 이리저리 밀리는 사람이었다. 내 힘이 빠지고 내 속에 있던 빛이 사라지던 날, 내 귀에 하나님의 말씀이 들렸다. 그것은 전적인 은혜였다. 그때 현실은 그대로 있는데, 나는 현실 안에 있는 사람이 아니고,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으로 발견되었다. 그 길은 나에게 이미 정해진 길이었고, 나는 그 길밖에 다른 길이 없는 사람으로 발견되었다.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산 혼이 된지라(창2:7).” 만물의 찌꺼기인 ‘흙으로 사람을 지으셨다.’ 이 말씀이 나를 다른 판으로 옮겼다. 하나님 앞에 내가 흙으로 발견되니, 나의 자리가 너무나 분명하게 인식되었다. 버려져도 어쩔 수 없는 나를 찾아오셔서, 당신의 생명을 불어넣으시고, 당신이 나를 통해 사신다 하는 이 말씀이 나를 죽음에서 생명으로 옮긴 말씀이다.
그때부터 생각이 바뀌고, 시각이 바뀌고, 삶이 바뀌었다. 내가 흙인 것이 인식되니까, 소화되지 않았던 것이 너무 쉽게 소화되었다. 흙은, 썩을 것은 분해해서 흙이 되게 하고, 씨는 키워서 열매를 생산케 하는 신기한 능력을 가지고 있다. 이 말씀이 내 삶에 그대로 적용되었다. 이 말씀을 깊이 알면 알수록 나의 주제가 더 분명하게 알아지고, 내 분수를 아는 사람이 되었다. 흙은 자존심도 없고, 우월감도 열등감도 없다. 무엇을 주어도 주신 것을 그대로 받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 자리에서 아내와 하나가 되고, 형제와 하나가 되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힌 자리가 이 말씀으로 이해가 되었다. ‘흙과 십자가’가 하나로 인식되었다. 예수님이 가신 길을 흙의 자리에서 보니까 쉽게 해석되었다. “아버지께서 주신 잔을 내가 마시지 않겠느냐(요18:11)?” 흙이 무슨 자기 뜻이 있는가? 무엇을 뿌려도 받을 수밖에 없는 것이 흙의 운명이다. ‘사람은 흙이다. 나도 흙이고 당신도 흙이다.’ 이 말씀을 사방에 뿌렸다. 아무도 거부하는 사람이 없었다. 인생을 이보다 더 명백하게 해석하는 말씀이 없다고 생각했다.
2016년부터 목사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내려오지 못하는 예수’를 말씀하기 시작했다. 그 말씀은 나는 내가 늘 들었던 말씀이고, 알고 있는 말씀으로 생각했고, 한 번도 그 자리를 떠나지 않았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 말씀이 내게 깊이 들어오지 않았다. 같은 말씀을 반복해서 하시는 것으로 생각되어서 때로는 짜증이 난 적도 있었다. 이 말씀을 선포하신 이후 교회가 요동치기 시작했다. 이때까지 한 번도 없었던 일들이 일어났다. ‘우리는 하나’라고 알았던 형제 사이에 골이 생기고 그 골이 점점 깊어갔다.
목사님 자신도 예전에 했던 모든 말씀을 지우고, 다시 쓰고 싶다고 하셨다. ‘내가 희미했다. 내가 예수와 무슨 관계가 있나? 만날 자리가 있나? 연합이 되었나? 결혼은 했나?’ 반평생을 오직 예수만을 증거 하신 분이 마지막에 판을 엎으신 것이다. 예수에 대한 좋은 해석으로 교회를 공양했다고 하셨다. 해석으로 인하여 생긴 교회생활은 더 없이 좋은 사회를 만들었고, 우리는 교회가 전부이고, 목사님과 형제들이 함께 사는 이 사회가 최종적인 이상이 실현되어가는 사회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태풍이 몰아치면 교회가 무너질 수 있다고 하셨다. 그리고 해석은 다른 사람도 다 할 수 있는 것이라고 하셨다.
나는 예수를 해석하셨다고 생각하지 않았고, 예수를 먹고 마셨다고 생각했다. 그러면 내가 알고 있었던 예수는 누구였는가? 내가 참으로 예수를 만났는가? 하는 문제가 나의 문제로 내 앞을 가로막고 있었다. 내가 참으로 예수를 아는가? 십자가에서 내려오지 못하는 예수가 나의 복음인가? 내가 그를 부끄러워하지 않는가? 다 떠나갔다고 했는데 나는 그 자리에 있었는가? 이때까지의 느낌표(!)가 물음표(?)로 바뀌었다. 평생 이 길을 따라왔는데 내가 예수를 모르는 사람으로 생각되니까 멘붕이 왔다.
“내가 또 한 번 땅만 아니라 하늘도 진동하리라. 이 또 한 번이라 하심은 진동치 아니하는 것을 영존케 하기 위하여 진동할 것들 곧 만든 것들의 변동될 것을 나타내심이니라.(히12:26).” 모래 위에 세운 집은 비가 오고, 창수가 나면, 다 무너진다. 반석 위에 세워진 집만이 무너지지 않는다.
모래 위에 세워진 집은 무엇인가? 해석된 예수가 아닌가? 아무리 잘 해석해도 그것은 사실 자체는 아니다. 해석을 잘해서 좋은 결과가 나왔다 해서 그 사람 자체가 다른 사람이 된 것이 아니다. 해석으로 사람이 거듭날 수는 없다. “당신이 거듭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다.” 나는 좋은 해석으로 대구교회의 니고데모로 살았던 것이 아닌가? 나 자신은 그대로인데 다만 긍정적으로, 생명적으로 해석을 함으로써 그럴듯한 창세기 형제로 살았던 것이 아닌가?
참으로 내가 만날 수 있는 예수는 어디 있는가? 짝사랑하고 내가 만나고 싶을 때, 만나는 예수가 아니고, 나와 평생 함께 살 수 있는 예수는 어디 있는가? ‘내 안에 네가 있고, 네 안에 내가 있는’ 그 실재는 무엇인가? 한 치의 거리가 없이, 내가 벌거벗어도 부끄럽지 않은 나 자신으로 서는 그 사람은 어디에 있는가? 내가 나를 버릴 수 없듯이, 아무리 부인하고 버리려고 해도 버릴 수 없는 나의 운명으로서의 예수는 어디에 있는가?
십자가에 못 박혀서 내려오지 못하는 예수는, 내 죄를 위하여 대신 죽은 사람도 아니고, 내가 사랑하고 감사하고 존경하는 믿음의 대상도 아니다. 이 사람은, 그를 부인하면 나를 부인하게 되는 나의 원형이고, 나 자신이고, 나의 정체성이다. 그에게서 능력도 찾아볼 수 없고, 지식, 역사도 찾아볼 수 없다. 어떤 소유도 그에게는 존재하지 않는다. 나를 하나님이 지으신 그 사람으로 돌아오게 하는 나의 구속자이다. 예수에 대해서 해석하는 일이 끝이 나고, 나 자신으로 예수를 증거 하는 증인으로 살게 하신 은혜에 감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