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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여섯쯤 되던 시절에 형이 즐겨보던 思想界에서 허의연 시인의 “사월에 알아진 베고니아 꽃”이라는 시를 읽고 몇 번이고 소리 내어 읊조리던 기억이 난다. 그 시를 읊조리며 꽃다운 나이로 4월19일에 숨져간 피 끓는 젊은 형들이 안타까워 얼마나 마음이 아팠는지…….
당시 나는 가난으로 중학교에 가지 못해 파출소에서 급사로 일했다.
그날 이후 나는 만해와 타고르의 시를 읽게 되었고 김현승 선생과 未堂의 시를 즐겨 읽게 되었다. 또 송욱 교수의 '시학평전'을 읽게 되었다. 그리고 세월이 흘러 나도 오십 대 중반의 사내가 되었다. 이제 인생의 맛을 조금이나마 아는 나이가 된 것이다.
갑자기 시를 읽고 싶어 사 본 ‘나를 매혹시킨 한편의 시-문학사상사’ 란 책에서 白石의 ‘南新義州 柳洞 朴時逢方’이란 시를 읽게 되었다. 많은 시인들을 매혹시킨 시란 점은 차치하고라도 이 한편의 시에는 구절구절이 한 사내의 회한과 인생의 굴곡과 깨달음과 관조가 담담하게 펼쳐져 있었다.
많은 시인이 이 글을 읽고 찬탄했지만, 어디 시를 전유하는 것이 소위 유명하다는 시인이나 시평론가들만의 것이랴 싶어 나도 슬그머니 이 글을 보태기로 한 것이다.
이 시의 첫머리는 이렇게 시작된다.
어느 사이에 나는 아내도 없고. 또,
아내와 같이 살던 집도 없어지고,
그리고 살뜰한 부모며 동생들과도 멀리 떨어져서,
그 어느 바람 세인 쓸쓸한 거리 끝을 헤매이었다.
하루는 후배가 찾아왔다. 술이 과해 중독 초기의 상태라 그 후배와는 정담을 나누고 싶어도 술한잔 할 수 없는 상태였다. 술만 취하면 전화를 하는데 결국은 울음이 터지고 지금은 헤어진 아내를 못내 못 잊어 괴로워하곤 했다. 맑은 정신에 이야기 하자 싶어 그 아내와 다시 결합을 위해 노력하는 게 어떠냐고 했더니 이런저런 이유를 들어 극구 거절하였다.
이야기를 들어보니 일리가 있는 듯도 싶어 “ 그래, 사실 그런저런 이유라면 다시 결합하지 않는 게 좋을 수도 있겠다”라고 했더니 갑자기 화를 벌컥 내면서 “사치스런 소리 하지도 말아요, 형이 뭘 안다고 그래요?”라고 화내는 것이 아닌가?
그리고 그 눈에 눈물이 가득히 괴어 오르더니 담배를 빼어 무는 것이었다.
“아들이란 놈이 전화도 안 받아요.” 성균관 대학원에서 철학을 전공한 심성이 약한 친구인데 이제는 직업도 잃고 아내도 잃고 자식도 잃고 늙으신 부모께 신세를 지는 그야말로 불쌍하고 고독한 처지가 되고 만 것이다.
이 사내는 거기에 더하여 부모 형제를 떠나, 南新義州 먼 땅에서 쓸쓸한 거리를 정처 없이 헤매고 있으니 이 얼마나 견디기 어려운 고독한 처지일 것인가? 그러니, 사내의 뼈에 스미는 바람은 낙엽을 날리며 추운 거리를 쓸기만 할 뿐 아니라 가슴에 휭 하니 뚫린 구멍을 아리게 넘나들며 상처를 할퀴는 매서운 고독의 바람일 것이다.
이미 사내는 ‘어느 사이에 나는 아내도 없고.’ 라고 쉼표가 아닌 마침표를 찍었으니 이미 그 가슴의 무덤에 여인의 비석을 세운 지 오래가 아닐 것인가.
바로 날도 저물어서,
바람은 더욱 세게 불고, 추위는 점점 더해 오는데,
이 추운 속에서 겨울날은 쉬이 저물어 가고, 몸을 웅크리고 추위에 떨며 잘 곳을 찾아 이리저리 헤매는 사내가 만난 곳은 柳洞이란 동네에 朴時逢이란 목수의 집이었다. 옛말에 ‘목수치고 잘 사는 사람 없다.’ 했으니 그 집인들 여북했을 것인가? 허구많은 집 중 목수의 집에 숙소를 구했으니 그 사정이 얼마나 딱할 것인가.
나는 어느 목수네 집 헌 삿을 깐,
한 방에 들어서 쥔을 붙이었다.
이리하여 나는 이 습내 나는 춥고 누긋한 방에서,
낮이나 밤이나 나는 나 혼자도 너무 많은 것같이 생각하며,
노래기라도 헌 삿에도 스멀스멀 기어 나올듯한 습내 나고 축축한 작은 방, 나 혼자도 너무 많은 것 같은 이 좁은 방에서 사내는
딜옹배기에 복덕불이라도 담겨오면,
이것을 안고 손을 쬐며 재 우에 뜻없이 글자를 쓰기도 하며,
또 문밖에 나가지두 않구 자리에 누워서,
머리에 손깍지베개를 하고 굴기도 하면서,
시간을 보내게 된다.
이 구절을 읽으며 문득 어린 시절 호롱불 아래서 보면 어두컴컴한 방 저쪽에 앉아 계신 엄마 얼굴이 한없이 멀어지며 작아지는 것을 느끼고 하던 기억이 떠올랐다. 그리고 질화로에 숯불을 담아오면 질화로를 사타구니에 끼고 그 숯불의 사그라져 가는 불빛을 하염없이 들여다보며 재 위에 글자를 쓰고 인두로 곱게 다림질하며 지우곤 했던 기억이 새로웠다.
혹시 시인의 이런 무심결에 하는 행위가 한편으로는 어린 시절로의 심리적 퇴행행위가 아닌가? 혹은 회귀본능이 아닌가 하고 생각하기도 하였다. 하여튼 방에서도 딜옹백이에 손을 쬐어야 될 정도로 남신의주의 얼음비수 같은 한파는 바람과 함께 매섭게 윙윙거리고, 누워있으면 발이 시리고 무릎이 서늘하여 온통 이불로 몸을 이리 싸기도 하고 저리 싸기도 하였을 이 사내는
나는 내 슬픔이며 어리석음이며를 소처럼 연하여 쌔김질하는 것이었다.
내 가슴이 꽉 메어올 적이며,
내 눈에 뜨거운 것이 핑 괴일 적이며,
또 내 스스로 화끈 낯이 붉도록 부끄러울 적이며,
나는 내 슬픔과 어리석음에 눌리어 죽을 수밖에 없는 것을 느끼는 것이었다.
“눈물에 젖은 빵을 먹어보지 않은 사람하고 인생을 이야기하지 마라.” 라는 말이 아니라도, 이 글을 읽으면 나이 먹은 사내의 실패의 설움과 회한이 절절하게 전이되어 옴을 느끼게 된다. 되새김질하는 소처럼 슬픔을 씹고 되씹으며 좁은 방에서 괴로워하는 사내, 빨래해 줄 아내, 살 부비며 살 아내, 밥 차려 줄 아내도 없이 먼 타향에서 남루한 옷에 몸을 감싸고 마음마저 추운 사내......
‘나는 왜 이리 어리석을까? 나는 왜 이리 못났을까? 내 인생은 왜 이리 실패로만 점철되었을까? 나는 왜 남들이 모두 누리는 평범한 가정의 행복마저 누리지 못하는 처지가 되었을까? 어쩌다 나의 인생은 품은 뜻을 이루기는커녕 먼 타향에서 제 몸 하나 누일 곳 없는 딱한 처지가 되고 말았을까? 왜 나는 시류에 영합하지 못하고, 시도 쓰지 못하고 무능력하기만 한 보잘 것 없는 사내가 되고 말았을까? 왜 나는 이 무서운 땅에 살게 되었을까? 이 모양 이 꼴이 되고 말았을까? ’
사내는 어느새 가슴이 꽉 메어오고, 눈물이 핑 고이고, 낯이 달아오르고 하여 ‘아아 이제는 죽을 수밖에 없구나! 절망에 직면하게 되는 것이다.
나는 교회의 로비에서 한 노숙자와 두 시간여 대화한 일이 있었다. 사십대 초반의 눈이 매서운 사내였다. 믹스커피를 타 먹는 사내에게 말을 붙였더니, 사내는 그날은 일을 못하고 돈도 떨어져 무료 급식하는 곳에 갔었지만, 급식일이 아니라서 굶었다고 했다. 삼천 원을 꺼내 주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보니 카드빚에 쫓기는 처지임을 알게 되었다. 사내는 내게 물었다 “제 인생은 왜 이리 순탄치 못한가요? 남들처럼 가정도 갖지 못하고 제 몸 하나 간수하기도 어려우니 말입니다. 저는 저주받은 것일까요?”
각설, 어떤 이에게는 인생은 정말로 서러운 것이고 헤어나기 어려운 고해인 것이다.
시인 白石이야말로 이런 처지였던 듯하다. 그러나 모든 위인이 그러하듯 이러한 슬픔의 나락에서 고개를 들고 또 다른 세계를 바라보는 눈을 뜨는 것이니 이 시인도
그러나 잠시 뒤에 나는 고개를 들어,
허연 문창을 바라보든가 또 눈을 떠서 높은 천정을 쳐다보는 것인데,
이때 나는 내 뜻이며 힘으로, 나를 이끌어가는 것이 힘든 일인 것을 생각하고,
이것들보다 더 크고 높은 것이 있어서, 나를 마음대로 굴려가는 것을 생각하는 것인데,
이렇게 하여 여러 날이 지나는 동안에,
내 어지러운 마음에는 슬픔이며, 한탄이며, 가라앉을 것은 차츰 앙금이 되어 가라앉고,
외로운 생각만이 드는 때쯤 해서는,
나는 사업에 실패하고 영혼마저 해골같이 죽었구나 하고 괴로워하던 때에 기도원에 간 적이 있었다. 좁은 기도 굴은 축축하니 음습하고 불을 끄니 참으로 무덤과 같은 공간이었다. 무릎을 꿇고 앉아서 '저의 죄를 용서해 주세요.'를 반복하며 얼마나 울었던지 온통 얼굴은 눈물과 콧물이 범벅이 되었다. 그리고 나에게 찾아온 것은 평강이요 주님의 은총이었다. 그런 밤이 지나고 나는 뒷산을 천천히 거닐며 하나님의 섭리를 생각하고 겸손해지고 조금은 더 낮아진 자신을 바라보았다. 그 날 본 나무와 산골짝 물과 바람은 더 이상 예전의 것이 아니었다.
아마 이 시인이 슬픔의 나락에서 건져 올린 것은 내 인생을 내가 원하는 대로 살지 못하도록 하는 섭리에 대한 깨달음이 아니었을까 하고 추측해본다. 인간의 유한함과 그보다 더 큰 존재가 있음에 대한 본능적인 앎이랄까 하는 것이 아니었을까 하고 생각해본다. 그 존재는 시인을 마음대로 이리굴리고 저리 굴리는 크고 높은 존재이며 항거할 수 없는 실재로서 나타나는 것이다. 이리하여 이 사내는 슬픔이며, 한탄이며 마음을 괴롭히던 오만가지 괴로움과 집착을 앙금과 같이 가라앉히고 죽을 수밖에 없다는 생각에서 벗어나게 된다.
시인은 이때의 심정을 ‘외로운 생각이 드는 때쯤 해서는’ 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이것은 마치 죽으려고 하던 사람이 그 나락에서 벗어나 ‘배고프다’라고 하는 것과 같으니, 이는 한편 시인의 관심이 인간들과 부대끼며 사는 것임을 엿볼 수 있게도 한다. 이 외로운 생각에 사람이 그리워지면서 밖을 향해 시인의 눈은 떠지고 귀가 열리고 마음이 열리고 있음을 우리는 다음의 구절에서 맛볼 수 있다.
더러 나줏손에 쌀랑쌀랑 싸락눈이 와서 문창을 치기도 하는 때도 있는데,
나는 이런 저녁에는 화로를 더욱 다가 끼며, 무릅을 꿇어보며,
어느 먼 산 뒷옆에 바우섶에 따로 외로이 서서,
어두워 오는데 하이야니 눈을 맞을, 그 마른 잎새에는,
쌀랑쌀랑 소리도 나며 눈을 맞을,
그 드물다는 굳고 정한 갈매나무라는 나무를 생각하는 것이었다.
아마 시인은 이미 바위 섶에 따로 외로이 서서 눈을 맞을 갈매나무로 시를 마무리하는 것을 볼 때 이미 외로운 처지를 받아들이고, 의연하게 섭리에 고개 숙임을 예견하게 한다. 아마 이 시인은 죽기까지 영혼을 두드리며 쌀랑거리는 싸락눈 소리를 들었으리라. 그리고 드물고 굳고 정한 갈매나무의 꿈을 품고 살았으리라.
추사의 歲寒圖와 이 탁월한 한 편의 시는 가끔 나를 돌아보게 하고 또 하나의 위안이 되곤 한다.
주:
백석(白石, 1912년 ~1996년)은 본명이 백기행으로 평북 정주에서 태어났다. 일제강점기에 오산고등보통학교를 졸업 후 일본 아오야마 가쿠인대학 전문부 영어사범과를 졸업했다. 위의 시는 1948년 「학풍」창간호에 발표한 시이다. 광복 이후 고향인 정주에서 문예활동을 했지만 ‘사상 이외에 문학성도 중시해야 한다.’는 논조 때문에 1960년 북한 문단에서 숙청당했고, 이후 양강도 삼수군의 협동농장에서 농부로 일하면서 청소년을 대상으로 과외 지도를 하며 여생을 보냈지만, 문단에 복귀하지 못하고 사망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알려지기로는, 백석의 애인은 함흥 권번에서 만난 기생 진향(김영한)이라고 하며 백석은 궁중무용과 가무에 능한 그녀를 자야라고 불렀다. 그러나 자야는 백석의 성공을 위해 안타깝게도 백석을 스스로 떠났다고 한다. 자야는 후일 3공화국 시대에 서울의 3대 요정의 하나였던 대원각(나도 회사 근무 시 대원각에 한번 가보고 그 규모가 큼에 놀란 적이 있다.)의 주인이 되었고, 법정스님의「무소유」를 읽고 느낀 바가 있어 1995년 수차례의 간청 끝에 법정스님에게 당시 시가로 일천억원이 넘는 대원각을 시주했다. 법정 스님은 1997년 대원각을 길상사(吉祥寺)라 이름짓고 조계종에 넘겼다. 한편 법정 스님은 김영한에게 길상화(吉祥華)라는 법명을 주었다. 길상화는 이년 후 고달픈 육신의 옷을 벗었다.
알려지기로는「나와 나타샤와 흰당나귀」란 시에서 나타샤는 전쟁과 평화의 등장인물 나타샤 로스토바를 모델로 했다라는 이도 있고, 러시아 문학을 동경했던 백석에게 나타샤는 러시아 여인의 흔한 이름대로 그냥 일반적인 여성이라고도 한다. 조금은 낭만주의자인 나는 백석 시인이 산골로 들어가 살고 싶은 여인, 떠났기에 기다리는 여인은 나타샤가 자야라고 생각하기로 한다.
자야의 시인 백석에 대한 깊은 사랑은 자야가 법정 스님에게 대원사를 시주하면서 남긴 말에서 나타난다.
“ 내 재산 천억은 백석의 시 한 줄만 못해요.”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백석
가난한 내가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
오늘 밤은 푹푹 눈이 나린다
나타샤를 사랑은 하고
눈은 푹푹 날리고
나는 혼자 쓸쓸히 앉어 소주(燒酒)를 마신다
소주를 마시며 생각한다
나타샤와 나는
눈이 푹푹 쌓이는 밤 흰 당나귀를 타고
산골로 가자 출출이 우는 깊은 산골로 가 마가리에 살자
눈은 푹푹 나리고
나는 나타샤를 생각하고
나타샤가 아니 올 리 없다
언제 벌써 내 속에 고조곤히 와 이야기한다
산골로 가는 것은 세상한테 지는 것이 아니다
세상 같은 건 더러워 버리는 것이다
눈은 푹푹 나리고
아름다운 나타샤는 나를 사랑하고
어데서 흰 당나귀도 오늘 밤이 좋아서 응앙응앙 울을 것이다
* 이글과는 상관없지만, 제가 16살 때 크게 감동을 받았다고 언급한 허의령 시인(전남 순천 출신)의 1961년 사상계 제2의 신인문학상 수상작도 올려봅니다. 온갖 비유와 秘意로 중첩되어 얼굴을 쉬이 알아보기 어려운 요즈음 시에 익숙한 분들에게는 이 두편의 시가 아마 아날로그 시대에 진공관 앰프를 통해 재현되는 빛 바랜 LP소리 같지 않을까 짐작해 봅니다.
4월에 알아진 베고니아 꽃
허 의 령
그러니까......
내가
그날
그 무렵
어쩌다 서울 장안에 있었고
물샐 틈 없이 겨눈 어깨가
하늘을 밀고 가던 날에
말이다.
포연에 서린 자욱
짓궂게도 아물지 않아
엘레지에 파묻힐 때
아니
태풍을 맞서고 나선 등불마냥
내 숨결이 낮아질 때
장안이 들끓어
하늘이 내려앉고
그래서는 안 될 얼굴끼리
불장난이 있을 때
말이다.
그날 밤
병원문이 터져 나가고
십대의 꽃송이들이
가닥가닥 찢긴 채
아직은 꺼져 가는 체온을 걷어 가며
곁에 와 나란히
자리를 마련하던 날에
말이다.
누가 놓았는지 모르지만
병실의 꽃
그것이 베꼬니아라 하기에
가까스로 몸을 일으키고
손을 내밀어
씨종자 가리듯
유심히 보고 또 보고
했으니 ......
그 꽃이 사철 피는
베꼬니아라 하기에.
선혈같이 붉은 빛 간직타 못해
그냥 쏟아버리고
도려 핏빛을 아신 듯한
그 꽃이 말이다.
아기의 입술마냥
금붕어가 내품는 물거품마냥
피었다가 제 발 밑에 소롯이 고여가는
귀엽기만한 그 꽃이
말이다.
화분에 담긴 그 꽃이
베꼬니아라 하기에
마음 가다듬어 보고파지며
어느 새 눈시울이 뜨거웠음은
4월에 알아진 때문이라.
그러니까.......
내가
그날
그 무렵
어쩌다 서울 장안에 있었고
물샐 틈 없이 겨눈 어깨가
하늘을 밀고 가던 날에
말이다.
* 17년 전 54세 때 2006년 7월 5일 백석의 시를 처음 읽고 썼던 글을 올렸습니다. 註는 지금 달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