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성론 제4권
4. 변상분 ⑨
10) 무차별품(無差別品)
다시 무차별의 뜻을 마땅히 알라. 무차별이라는 것은, 이 여래의 성품이 이미 지극히 청정한 지위에 도달한 것이다.
광의로 말하면,
이 유전없는 경계에서 여래의 성품에 근거하여 말하는 것에 네 가지 뜻이 있고,
이 네 가지 뜻으로 인하여 네 가지 이름을 세우고,
네 가지 사람에 근거하여 네 가지 특징을 나타내니,
네 가지 뜻이란,
첫째는 일체 불법은 앞뒤가 서로 떠나지 않고,
둘째는 모든 곳이 다 있는 그대로이고,
셋째는 망상과 전도된 법이 없고,
넷째는 본래의 성품이 고요한 것이다.
≪해석≫
일체 불법은 앞뒤가 서로 떠나지 않았다는 것은, 승만경(勝鬘經)에 설한 것과 같으니,
“세존이시여, 여래장(如來藏)이 공하지 않은 것으로, 항하사(恒沙) 보다도 많은, 서로 떠나지 않고 지혜를 버리지 않고 생각할 수 없는 모든 부처님의 공덕이 있다.” 고 하였으니,
여래장은 여래의 공덕으로 말미암아 공하지 않음을 알라.공하지 않다는 것은 곧 부처님이 갖추신 일체 공덕을 밝히기 때문이며,
이 성품이 일체 처소에서 다 그러한 것이란, 일체 법은 자성(自性)이 없기 때문이다.
무상의경(無上依經)에 설한 것과 같으니,
“일체 중생은 음, 계, 입 (陰界入)이 있어서 그 뛰어나고 그렇지 못한 종류가 안팎으로 나타난다. 무시이래로 상속하여 유전하고 법답게 얻을 수 있는 것이 지극이 밝은 묘선이다.”라고 하셨다.
이러한 의미이기 때문에, 모든 처소가 다 그러한 줄을 아는 것이다.
다음 망상과 전도된 법이 아니라는 것은, 해절경(解節經)에서 설한 것과 같다.
부처님이 무진의(無盡意) 보살에게 설하기를,
“선남자여, 여래의 성품은 참된 진리이니, 여래가 세간에 출현하거나 세간에 출현하지 않거나 그 성상(性相)이 항상 그러한 것은 허망한 법이 아니기 때문이니라.”라고 하셨다.
이 경으로 말미암아 망상과 전도된 법이 없는 것을 참된 진리(真實諦)라고 하는 줄을 아는 것이다.
본래의 성품이 고요하다는 것은, 문수사리변행경(文殊舍利遍行經)에 설한 것과 같으니,
부처님이 문수사리에게 설하시기를,
“모든 부처님 여래의 본래 성품은 스스로 반열반(般涅槃)이어서 생기지도 않고 멸하지도 않느니라.”라고 하셨으니,
이런 의미로써 본래 자성이 적정하다는 것을 아는 것이다.
다시 네 가지 이름을 세우는 것이란,
첫째는 불법이 서로 떠나지 않기 때문에 그 이름을 법신(法身)이라 하고,
둘째는 불성이 일체 처소에 다 그러하기 때문에 그 이름을 여래라 하고,
셋째는 허망함과 전도됨이 없기 때문에 그것을 참된 진리라고 하고,
넷째는 본래 적정하기 때문에 그 이름을 반열반이라 하는 것이니,
이 네 가지 뜻과 네 가지 이름이 여래의 성품에서 아무런 차별이 없기 때문에 차별없는 모양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다시 네 가지 사람에 근거하여 말하는 것이란,
첫째는 신견(身見)을 가진 중생의 경계가 아니다. 이 진실한 성품으로 말미암아 삿된 집착을 대치하기 때문에 신견의 사람을 위하여 법신을 말하는 것이다.
[문] 어떻게 이 사람에 대하여 진여를 가지고 법신이라고 하는가?
[답] 모든 범부의 물질 등 모든 쌓임(陰)은 이 성품이 없는데 억지로 나(我)가 있고 내것(我所)이 있다고 집착하니, 이 사람(人)과 법(法)의 두 가지 집착으로 말미암아 그 마음을 더럽히는 것이다.
신견(身見)이 없어지는 그 자리가 바로 감로(甘露)의 경계이니, 믿고 즐거워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여래의 법계를 통달할 수 있겠는가?
만약에 이 경계를 본다면 신견의 집착이 없어질 것이며, 비록 또 신견을 이미 제거했거나 아직 제거하지 못했거나 이 경계는 항상 그러하니, 이 때문에 이 경계를 이름하여 진실한 몸이라 하는 것이고,
범부들이 집착하는 것은 이미 진실이 아니기 때문에 함께 있지 않아 진실한 몸이라 할 수 없는데, 이러한 신견의 범부들을 대치하기 위해 몸이라는 명칭을 세우는 것이다.
둘째는 전도된 사람을 대치하기 위해 여래라는 이름을 설하는 것이니,
전도된 사람이란, 2승(乘)의 사람들을 말한다. 여래는 상주한다고 마땅히 닦고 행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뒤집히고 전도되어 무상한 생각 등을 닦으니,
왜 그런가? 이 수행이 허망한 경계에 의지하여 일어나기 때문에 전도된 수행이라고 한다.
낙(樂)ㆍ아(我)ㆍ정(淨) 등도 또한 그러하다. 전도된 행으로 말미암아 모든 2승들은 나아가 닦아도 여래의 도과(道果)와 서로 같은 것을 얻을 수 없다.
이 때문에 상(常) 등의 진여는 그 경계가 아니고, 이 진여가 무상(無常)한 것들과 같지 않음은 세간을 대치하기 때문이다.
이 진여는 진여가 아닌 것에서도 진여가 있고 진여 아님이 없는 것에서도 또한 진여이고, 2승의 진여는 진여가 아닌 것에서 진여라고 하고, 진여 아님이 없는 것에서 진여가 아니라고 한다.
어떻게 그러한가?
이 2승의 사람들은 허망한 시각에 근거하여 무상등의 모양들을 진여라고 생각한다.
이 허망한 관찰은 원인 가운데에만 있고 결과의 자리에는 없는 것이다.
때문에 이 진여가 혹은 성립되고 혹은 무너져서, 원인에서는 성립되고 결과의 자리에서는 무너지는 것이다.
보살의 진여라는 것은, 허망함을 떠나서 참된 성품에 근거하여 그 진실함을 관찰하기 때문에, 마치 또 이러한 진여는 원인과 결과의 두 장소에서 다름이 없기 때문에 성립되고, 파괴되지 않는다.
이 때문에 2승 사람들의 진여는 결정코 멸하는 것을 쫓아서 가기만 하고 오지는 않는데, 보살의 진여는 원인과 결과가 항상 있어서 가거나 오거나 다르지 않라.
원인을 버리고서 결과에 이르기 때문에 여거(如去)라고 일컫는 것이고, 결과를 따라 작용하기 때문에 여래(如來)라고 일컫는 것이다. 이 때문에 여래는 2승들의 경계가 아니고, 이 때문에 2승들을 대치하기 위해 여래라는 이름을 내세우는 것이다.
셋째는 산란하고 동요하는 마음을 가진 사람을 대치하기 위해 그 이름을 진실한 진리(真諦)라고 하는 것이니, 진여라는 것은, 증감이 없는 법이다.
산란하고 동요하는 마음을 가진 사람이란,
처음으로 대승(大乘)을 행하는 보살로서 여래장에 미혹하는 자에 두 종류의 사람이 있으니,
하나는 모든 법의 소멸만을 믿는 자이니, 이것을 공이라 하고, 일체법이 아직 분석되지 않았을 때를 유(有)라고 하고, 분석이 끝나면 곧 공이라 하는 것이요,
두번째는 참된 법이 있는 것을 공이라 하여 ‘내가 이제 닦아야 하고 얻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 두 사람이 바로 여래장에 미혹한 것이니, 앞 사람은 없음에 집착하기 때문에 미혹하고, 뒷 사람은 있음에 고집하기 때문에 미혹하는 것이다. 여래장이란 그 도리(道理)가 어떤 모양인가? 게송에서 설한 것과 같으니,
한 가지 법도 덜할 수 없고
한 가지 법도 더할 수 없으니
응당 진실 그대로를 보아야 할 것이니
진실을 본다면 해탈을 얻을 것이다.
객진으로 말미암아 공함은
법계와 서로 떠난 것이고
무상법이 공하지 않음은
법계와 서로 따르는 것이네.
여래의 성품이란, 스스로가 청정하기 때문이고, 능히 더럽힐 수 있는 객진(客塵)은 그 자성(自性)이 공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한 가지 법도 덜 수 없다고 말하는 것이다.
진여란 것은 청정한 원인과 더불어 서로가 떠나지 않고 항하사(恒沙)수 보다도 많은, 그 버리지 않는 지혜와 생각할 수 없는 모든 부처님의 공덕이 항상 상응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한 가지 법도 더할 수 없다고 말하는 것이다.
만약에 법이 없다면, 이 법이 없다는 것에 근거하여 진여는 공하다고 관찰한다.
다른 법이 있기 때문에 진여가 공하지 않다고 관찰한다.
그러므로 진여는 공하기도 하고 공하지 않기도 하다고 말하는 것이다.
왜 그런가? 증감을 여의었기 때문이다.
한 가지 법도 덜할 수 없기 때문에 공한 것이고 한 가지 법도 더할 수 없기 때문에 공하지 않는 것이다.
만약에 이와 같이 관한다면 진실한 관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때문에 증감의 두 극단을아주 떠날 수 있겠지만,
처음으로 수행하는 보살은 이 여래장의 이치를 얻어 볼 수가 없기 때문에, 이 사람을 대치하기 위해 참된 진리를 설하는 것이니, 초지(初地)로부터 십지(十地)까지가 그 경계이다.
이러한 이치를 관하여 십지의 행을 수행하는 것이니, 이 때문에 처음으로 수행하는 경계와는 관계되지 않는 것이다.
넷째는 십지 보살을 대치하기 위해 열반을 설하는 것이니, 부처님 한 사람만이 열반을 얻을 수 있고 다른 모든 보살은 열반에 이를 수 없기 때문이다.
승만경(勝鬘經)에 설한 것과 같으니,
“세존이시여, 열반을 얻음으로 말미암아 세존께서 여래아라하삼먁삼불타(阿羅訶三藐三佛陀)를 성취하시어 모든 한량없고 생각할 수 없는 지극히 청정한 모든 부처님의 공덕을 얻으셨나이다.”라고 하였다.
이 때문에 열반의 네 가지 공덕은 차별된 모양이 없는 것이다.
다시 네 가지 공덕이란,
첫째 일체 공덕이고,
둘째 한량없는 공덕이고,
셋째 불가사의한 공덕이고,
넷째 지극히 청정한 공덕이다.
열반을 얻음으로 말미암아 여래를 성취하고 이 때문에 여래는 열반과 더불어 차별이 없나니,
왜 그런가? 부처님을 떠나서는 열반을 얻을 수 없고 열반을 떠나서는 부처가 될 수 없기 때문이다.
≪해석≫
공덕이란, 첫째의 일체 공덕은 곧 여덟째의 부동지의 계위(不動地位)다. 이 지위는 분별도 없고 번뇌(穿漏)도 없고 중간도 없이 자연히 성취되는 것이다. 보살의 성스러운 도가 항상 상응(相應)하기 때문에 모든 부처님 여래의 그 유전없는 경계에서 모든 공덕을 다 성취하게 되는 것이며,
둘째의 한량없는 공덕은 곧 아홉째의 선혜지의 계위(善彗地位)이다. 이 계위는 무수한 선정 다라니문(陀羅尼門)의 바다이다. 능히 한량없는 공덕을 다 성취하게 되는 것이다.
셋째의 불가사의한 공덕은 곧 열째의 법운지의 계위(法雲地位)다. 이 계위는 일체 여래의 비밀 법장(法藏)이니 증득하여 보는 명료한 지혜가 여기에 의지하기 때문에 불가사의한 공덕을 다 성취하게 되는 것이다.
넷째 지극히 청정한 것이란, 모든 번뇌와 습기와 모든 지혜의 장애를 이미 다 멸했기 때문이다. 지혜의 장애까지를 다 멸했기 때문에 지극히 청정한 공덕이 원만하게 성취되는 것이다.
열반이란, 이 네 가지 공덕과 더불어 상섭하고 서로 떠나지 않기 때문에 부처님만이 열반을 얻고 다른 사람은 얻지 못하는 것이다. 이 때문에 여래의 성품은 이 네 가지 뜻과 네 가지 이름과 네 가지 사람과 네 가지 특징에 아무런 차별이 없기 때문에 차별없는 공덕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또 이 인연으로써 이 자성(自性) 등 열 가지 모양은 세 가지 뜻을 나타내기 위한 것이다.
첫째는 본래 불가사의한 경계가 있음을 나타내고,
둘째는 도리(道理)에 의지하여 수행함으로써 얻을 수 있음을 나타내고,
셋째는 얻고 나서 한량없는 공덕으로 하여금 지극히 원만하게 할 수 있음을 나타낸 것이다.
이 때문에 이 논(論)을 지은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