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문수사리문경 하권
17. 촉루품(囑累品)
“문수사리여, 만약에 어떤 사람이 이 법을 받아 지니고 이 법을 연설하거나 또는 외우고 쓰고 다른 사람들을 가르친다면 얻는 공덕은 헤아릴 수 없어서 능히 일체종지(一體種智)를 낼 것이며,
이러한 선남자와 선여인은 부처님 경계에 들어가고 부처님의 경계에 머물러서 부처님을 따라 배우는 것이므로 이러한 원(願)을 원만히 성취해야 할 것이다.
‘만약 내가 이 세계에 가득 차게 7보와 갖가지의 의복으로써 날마다 부처님께 보시한다면 이 얻어지는 공덕도 한량없고 그지없겠지만, 어떤 선남자ㆍ선여인이 이 경을 받아 지니고 읽고 외우고 베껴 쓴다면, 얻어지는 공덕이야말로 백분의 1분을 백 등분하여 이와 같이 백 번에 걸쳐 차례로 나눠서 최후의 1분만을 가져도 나의 공덕 만 배보다 뛰어날 것이다.’
왜냐하면 일체지를 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경전이 머무른 곳을 마땅히 공양해야 함은 이 땅이 청정하여 모든 악을 제거할 수 있으니만큼, 이는 청정한 곳이고 적정한 곳이며, 모든 천신의 다니는 곳이고, 모든 부처님께서 염하시는 곳이고, 사람ㆍ하늘이 귀중히 여기는 곳이고, 여래 자리가 머무는 곳이다.”
그때 아난(阿難)이 부처님께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이 경전이 명칭은 무엇이며, 어떻게 받들어 간직해야 합니까?”
부처님께서는 말씀하셨다.
“아난이여, 이 경전의 명칭은 문수사리소문(文殊師利所問)이라 하니 네가 마땅히 받아 간직할 것이며,
또 종종요설(種種樂說)이라 하니네가 마땅히 받아 간직할 것이며,
또 단일체의(斷一切疑)라 하니 네가 마땅히 받아 간직 할 것이며,
또 보살제행수투로(菩薩諸行修妬路)라 하니 네가 마땅히 받아 간직해야 한다.”
그때 문수사리가 부처님께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여래ㆍ응공ㆍ정변지께선 할 일을 이미 끝내고 해야 할 일도 이미 끝내 무거운 짐을 버리셨으며, 이미 일체의 결(結])을 끊고 이미 일체의 번뇌를 제거하고 이미 번뇌의 더러움을 씻고 이미 모든 마군을 항복받고 이미 모든 불법을 얻으셨다.
그 일체를 아는 이와 일체를 보는 이로서 10력(力)과 4무외(無畏)와 18불공법(不共法)을 성취하시고, 5안(眼)을 구족하신 부처님의 눈이 장애가 없어 일체 세간을 보시고는 이러한 생각을 하셨습니다.
‘내가 처음 도를 얻었으니 먼저 누구를 위해 설법할까?
어떤 중생이 청정한 선행을 하고 어떤 사람이 가르치기가 쉬워서 탐욕과 진심과 우치가 적고 어떤 사람이 지혜를 현증(現證)할 수 있을까?
저 사람들이 만약 이 법을 듣지 않는다면 반드시 퇴전(退轉)하기 마련이니, 이 때문에 내가 먼저 그들을 위해 법을 설하겠다. 저 사람들이 능히 법을 받을 수 있다면 의심하거나 비방하는 일이 없을 것이다.’
세존이시여, 아라한(阿羅漢)이라든가 정변지(正遍知)라 함은 어떠한 뜻이 있는 것입니까?”
부처님께서는 말씀하셨다.
“문수사리여, 아라한다(阿羅漢多)라는 것이 정변지를 얻는 것을 이름하여 아라한다라고 한다.
다시 말해서 아(阿)라는 것이 무슨 뜻인가? 범부의 지위를 초월하는 것이 아의 뜻이며,
라(羅)라는 것이 무슨 뜻인가? 더러움에 따르면서도 거기에 더럽힘이 없음이,
라(羅)의 뜻이며, 하(呵)라는 것이 무슨 뜻인가? 번뇌를 말살함으로써 광명을 얻는다는 뜻이며,
나(那)라는 것이 무슨 뜻인가? 제호(醍醐)인 도에 이르러서 생사에 얽매임이 되지 않는다는 뜻이며,
다(多)라는 것이 무슨 뜻인가? 진실함을 찾아 구한다는 뜻이다.
삼먁삼불타(三藐三佛陀)가 무슨 뜻인가? 스스로 깨달아 다른 사람까지를 깨닫게 하는 저 정변견(正遍見)이란 뜻이며,
파(婆)라는 것이 무슨 뜻인가? 모든 법의 평등함이 허공과 같다는 뜻이며,
마(摩)라는 것이 무슨 뜻인가? 능히 교만을 소멸한다는 뜻이며,
야(耶)라는 것이 무슨 뜻인가? 법대로 분별한다는 뜻이며,
엄(奄)이란 것이 무슨 뜻인가? 후세의 몸을 안다는 뜻이며,
가(迦)라는 것이 무슨 뜻인가? 과실된 업이거나 그릇된 업이란 뜻이며,
사(娑)라는 것이 무슨 뜻인가? 생사의 윤회하는 곳을 안다는 뜻이며,
파(婆)라는 것이 무슨 뜻인가? 얽매임을 벗어난다는 뜻이며,
우(優)라는 것이 무슨 뜻인가? 능히 물음에 따라 대답한다는 뜻이며,
타(陀)라는 것이 무슨 뜻인가? 고요함을 얻는다는 뜻이며,
타(他)라는 것이 무슨 뜻인가? 법 성품의 형체와 모양이 없음을 받아 지닌다는 뜻이다.
할 일을 이미 끝냄이란 몸뚱이ㆍ살ㆍ손ㆍ발을 버려가면서 일을 이미 끝낸 것을 일러 할 일을 이미 끝낸 것이라 하며,
가리(迦釐)란 것은 이미 버려서 다시 버리지 않는 것으로서,
가(迦)란 모든 법을 그 손바닥 보듯이 관찰하는 것이고,
리(釐)란 부드럽고도 곧은 마음이 상속되는 것이며,
가(迦)란 모든 업의 행을 끊는 것이고,
리(釐)란 세 가지 업의 성품을 제거하는 것이며,
다(多)란 것은 참된 이치를 깨닫는 것이고,
야(耶)란 것은 멸몰(滅沒)하는 음성이니 법대로를 성취한다는 뜻이며,
또 할 일을 이미 끝냄이란 모든 선근을 이미 끝내는 것이고,
무거운 짐을 버림이란 다시는 생사의 부담이 없게끔 하는 것이며,
이미 일체의 결[結]을 끊음이란 일체 탐욕과 진심과 우치의 결을 끊는 것이고,
일체의 번뇌를 끊음이란 삼계의 모든 번뇌를 뽑아버리는 것이고,
이미 번뇌의 더러움을 씻음이란 업에 대한 번뇌 기운을 없애기 때문이고,
이미 모든 마군을 항복 받음이란 모든 죽음의 마[死魔]를 다 제거하기 때문이며,
이미 모든 불법을 얻음이란 일체 반야바라밀을 법을 삼아 일체 반야바라밀에 도달하는 것이니 이를 일러 이미 모든 불법을 얻음이라 한다.
일체지란 모르는 것이 없다는 것이고,
일체를 봄이란 모든 법을 현증(現證)한다는 뜻이며,
10력을 성취함이란 법대로 성취한 신통력[神力] 등이니,
부처님의 힘이 일체 중생들의 힘보다 뛰어남을 헤아린다면 백 배ㆍ천 배ㆍ백천만억 배이어서 생각하거나 셈할 수도 없는 부처님의 그지없는 힘을 성취한 것이니, 부처님의 10력으로부터 한량없는 힘을 내어 일체의 힘을 성취한 것이 바로 10력을 성취함이다.
10력이란 이른바 처비처력(處非處力)ㆍ업력(業力)ㆍ정력(定力)ㆍ근력(根力)ㆍ욕력(欲力)ㆍ성력(性力)ㆍ지처도력(至處道力)ㆍ숙명력(宿命力)ㆍ천안력(天眼力)ㆍ누진력(漏盡力)이며,
4무외란 일체 지혜의 두려움이 없음과 일체 번뇌를 다 끊음으로써 두려움이 없음과 모든 장애되는 길을 설함에 있어서의 두려움이 없음과 괴로움을 벗어나는 길을 설함에 있어서의 두려움이 없는 것이며,
10력과 4무외와 크게 인자함과 크게 가엾이 여김과 크게 기뻐함과 크게 버림을 일러 18불공법이라 한다.
18불공법을 성취함이 원만하기 때문에 5안(眼)도 역시 원만하니, 이른바 천안(天眼)과 불안(佛眼)과 법안(法眼)과 혜안(慧眼)과 육안(肉眼)이다.
부처님께서는 한량없는 눈이 있으니, 왜냐하면 경계가 한량없기 때문이고, 이 때문에 부처가 5안의 장애 없음을 성취하며, 보는 것의 남김 없음이 허공과 같기 때문에 이 눈으로 일체 세간을 보고, 장애 없는 눈으로 세간을 보기도 하고 장애 있는 눈으로 일체 세간을 보기도 하며, 보고 나서는 생각하기를,
‘어떤 사람을 위해 내가 먼저 설법(說法)해야 할 것인가?’라고 하였다.
문수사리여, 내가 이런 말을 하는 것이 무슨 뜻이 있어서 하는 것이겠는가?”
문수사리는 부처님께 대답하였다.
“저는 아직 세존의 뜻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부처님께서는 말씀하셨다.
“문수사리여, 이 부처님 경계에 무궁한 중생들이 있지만 아라라(阿羅羅)와 울두람불(鬱頭藍弗)에게 먼저 설법해 주어야 했고, 이 두 사람을 제외하고는 다시 다른 사람이 없었는데, 이 두 사람이 죽은 지 이미 7일이었다.
내가 먼저 부처의 지혜로써 십지(十地) 보살을 말하고, 또 세간의 지혜로써 중생들을 위해 설법할 때, 이 두 사람은 나의 법을 듣지 못하였기 때문에 퇴전(退轉)하였으니, 수명이 7일이 모자랐는데,
여러 하늘들이 이 말을 듣고 곧 나에게 말하기를,
‘그러합니다, 세존이시여. 아라라와 울두람불이 죽은 지가 이미 7일입니다’라고 하였다.
문수사리여, 어떤 것이 중생으로서 청정한 선행이고 교화할 만하고 가르치기 쉬운 중생인가? 이른바 공덕이 많은 사람이다.
청정이란 청정한 마음이고, 선행이란 스스로 모든 선근을 행함이며,
교화할 만한 중생이란 간략한 말을 듣고서도 바라밀(波羅蜜)을 얻는 것이고,
가르치기 쉽다는 것은 능히 모든 법을 분별하여 일체 몸과 입과 뜻의 더러움을 잘 소멸함으로써 애견(愛見)에 얽매이지 않는 것이니,
만약 이러한 중생이 있다면 내가 그를 위해 먼저 설법하여 그로 하여금 깨달음을 얻어 나를 비방하지 않게 할 것이다.”
부처님께서는 이 게송을 읊어 말씀하셨다.
울두람불과 아라라 선인이
죽은 지 이미 7일에 내가 이미 알았건만
그 뒤 여러 천인들이 와서 나에게 말하기를
“그러합니다, 세존이시여. 그러합니다, 선서(善逝)시여.
두 사람이 모두 죽은 지가 이미 7일이 지났습니다.” 하네.
“문수사리여, 여래ㆍ선서ㆍ세존을 제외하고 그 나머지 사람으로선 빠른 지혜 있는 이가 없다.”
그때 문수사리가 부처님께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일체 공덕이 출가한 마음과는 같지 않으니,
왜냐 하면 집에 머물면 허물이 한량없고 집을 떠나면 공덕이 한량없기 때문입니다.”
부처님께서는 말씀하셨다.
“문수사리여, 그렇다, 그렇다. 네가 말한 것과 같다.
일체 공덕이 출가한 마음과는 같지 않으니,
왜냐 하면 집에 머물면 허물이 한량없고 집을 떠나면 공덕이 한량없기 때문이며,
집에 머묾이란 장애가 있는 것이고, 집을 떠남이란 장애가 없는 것이며,
집에 머묾이란 모든 더러움을 거둬들이는 것이고, 집을 떠남이란 모든 더러움을 여의는 것이며,
집에 머묾이란 모든 악을 행하는 것이고, 집을 떠남이란 모든 악을 여의는 것이며,
집에 머묾이란 바로 번뇌의 처소이고 집을 떠남이란 번뇌를 제거하는 처소이다.
집에 머묾이란 욕심의 진흙탕에 빠지는 것이고, 집을 떠남이란 욕심의 진흙탕을 여의는 것이며,
집에 머묾이란 어리석은 사람의 법에 따르는 것이고, 집을 떠남이란 어리석은 사람의 법을 멀리하는 것이며,
집에 머묾이란 바른 생활을 얻지 못하는 것이고, 집을 떠남이란 바른 생활을 얻는 것이며,
집에 머묾이란 원수가 많은 것이고, 집을 떠남이란 원수가 없는 것이며,
집에 머묾이란 고통이 많은 것이고, 집을 떠남이란 고통이 적은 것이며,
집에 머묾이란 바로 근심과 슬픔과 괴로움이 있는 곳이고, 집을 떠남이란 바로 기쁨과 즐거움이 있는 곳이다.
집에 머묾이란 바로 나쁜 갈래의 사다리이고, 집을 떠남이란 바로 해탈의 길이며,
집에 머묾이란 곧 결박되는 곳이고, 집을 떠남이란 바로 해탈하는 곳이며,
집에 머묾이란 두려움이 있는 것이고, 집을 떠남이란 두려움이 없는 것이며,
집에 머묾이란 벌을 받는 일이 있는 것이고, 집을 떠남이란 벌을 받는 일이 없는 것이며,
집에 머묾이란 바로 상해(傷害)하는 곳이고, 집을 떠남이란 상해하는 곳이 아니며,
집에 머묾이란 뜨거운 번뇌가 있는 것이고, 집을 떠남이란 뜨거운 번뇌가 없는 것이다.
집에 머묾이란 이익을 탐하는 괴로움이 있는 것이고, 집을 떠남이란 이익을 탐하는 괴로움이 없으며,
집에 머묾이란 바로 시끄러운 곳이고 집을 떠남이란 바로 고요한 곳이며,
집에 머묾이란 바로 아끼고 인색한 곳이고 집을 떠남이란 아끼고 인색한 곳이 아니며,
집에 머묾이란 바로 낮고도 천한 곳이고 집을 떠남이란 바로 높고도 뛰어난 곳이며,
집에 머묾이란 번뇌의 불에 타게 되는 것이고 집을 떠남이란 번뇌의 불을 끄는 것이며,
집에 머묾이란 항상 남을 위하는 것이고 집을 떠남이란 항상 자신을 위하는 것이며,
집에 머묾이란 작은 마음의 행이고 집을 떠남이란 큰마음의 행이며,
집에 머묾이란 괴로움으로써 즐거움을 삼고 집을 떠남이란 벗어남으로써 즐거움을 삼으며,
집에 머묾이란 고난의 길[蕀刺]을 증장시키는 것이고 집을 떠남이란 고난의 길[蕀刺]을 없애는 것이며
집에 머묾이란 큰 법을 성취하는 것이며 집을 떠남이란 작은 법을 성취하는 것이며,
집에 머묾이란 법의 쓰임이 없는 것이고 집을 떠남이란 법의 쓰임이 있는 것이다.
집에 머묾이란 후회가 많은 것이고 집을 떠남이란 후회가 없는 것이며,
집에 머묾이란 피와 눈물과 젖을 증장시키는 것이고 집을 떠남이란 피와 눈물과 젖이 없는 것이며,
집에 머묾이란 3(乘)이 헐뜯는 것이고 집을 떠남이란 3승이 찬탄하는 것이며,
집에 머묾이란 만족할 줄을 모르는 것이고 집을 떠남이란 항상 만족할 줄 아는 것이며,
집에 머묾이란 마왕(魔王)이 사랑스럽게 여기는 것이고 집을 떠남이란 마왕으로 하여금 겁내게 하는 것이며,
집에 머묾이란 방일(放逸)함이 많은 것이고 집을 떠남이란 방일함이 없는 것이며,
집에 머묾이란 바로 멸시를 당하는 곳이고 집을 떠남이란 멸시 당하는 곳이 아니며,
집에 머묾이란 남의 심부름꾼이 되는 것이고 집을 떠남이란 심부름꾼의 주인이 되는 것이다.
집에 머묾이란 바로 생사의 언저리이고 집을 떠남이란 바로 열반의 언저리이며,
집에 머묾이란 바로 타락되는 곳이고 집을 떠남이란 타락이 없는 곳이며,
집에 머묾이란 바로 암흑이고 집을 떠남이란 바로 광명이며,
집에 머묾이란 모든 감관[根]을 함부로 하는 것이고 집을 떠남이란 모든 감관을 거둬 가지는 것이며,
집에 머묾이란 교만을 늘리는 것이고 집을 떠남이란 교만을 없애버리는 것이며,
집에 머묾이란 바로 낮은 곳이고 집을 떠남이란 바로 맑고 높은 곳이며,
집에 머묾이란 사무가 많은 것이고 집을 떠남이란 하는 일이 없는 것이며,
집에 머묾이란 과보(果報)가 적고 집을 떠남이란 과보가 많은 것이며,
집에 머묾이란 아첨하거나 그릇됨이 많은 것이고 집을 떠남이란 마음이 진실하고도 곧은 것이며,
집에 머묾이란 항상 근심이 있는 것이고 집을 떠남이란 항상 기쁨을 가지는 것이다.
집에 머묾이란 마치 가시[棘]가 몸을 찌르는 것과 같은 것이고 집을 떠남이란 그러한 가시가 없는 것이며,
집에 머묾이란 바로 질병(疾病)이 있는 곳이고 집을 떠남이란 질병이 없는 것이며,
집에 머묾이란 바로 노쇠해지는 법이고 집을 떠남이란 젊고 씩씩한 법이며,
집에 머묾이란 방일로써 죽게 되는 것이고 집을 떠남이란 지혜가 생명이 되는 것이며,
집에 머묾이란 바로 거짓으로 속이는 법이고 집을 떠남이란 바로 진실한 법이며,
집에 머묾이란 하는 일이 많은 것이고 집을 떠남이란 하는 일이 적은 것이며,
집에 머묾이란 독을 마시는 일이 많은 것이고 집을 떠남이란 제호(醍醐)를 마시는 것이며, 집에 머묾이란 산란함이 많은 것이고 집을 떠남이란 산란함이 없는 것이며,
집에 머묾이란 바로 유전(流轉)하는 곳이고 집을 떠남이란 유전하는 곳이 아니며,
집에 머묾이란 독한 약과 같고 집을 떠남이라 감로(甘露)와 같으며,
집에 머묾이란 사랑하는 이와 이별하는 것이고 집을 떠남이란 이별이 없는 것이다.
집에 머묾이란 어리석음이 많은 것이고 집을 떠남이란 지혜가 깊은 것이며,
집에 머묾이란 더러운 법을 좋아하는 것이고 집을 떠남이란 청정한 법을 좋아하는 것이며,
집에 머묾이란 안의 생각함을 잃어버리는 것이고 집을 떠남이란 안의 생각함을 얻는 것이며,
집에 머묾이란 귀의할 데가 없는 것이고 집을 떠남이란 귀의할 데가 있는 것이며,
집에 머묾이란 존귀함과 뛰어남도 없는 것이고 집을 떠남이란 존귀함과 뛰어남이 있는 것이며,
집에 머묾이란 일정하게 머무는 곳이 없는 것이고 집을 떠남이란 일정하게 머무는 곳이 있는 것이며,
집에 머묾이란 귀의할 곳을 마련할 수 없는 것이고 집을 떠남이란 능히 귀의할 곳을 마련하는 것이며,
집에 머묾이란 성내거나 미워함이 많은 것이고 집을 떠남이란 인자함과 가엾이 여김이 많은 것이며,
집에 머묾이란 무거운 짐이 있는 것이고 집을 떠남이란 무거운 짐을 버리는 것이며,
집에 머묾이란 구경(究竟)의 일이 없는 것이고 집을 떠남이란 구경의 일이 있는 것이다.
집에 머묾이란 죄과가 있는 것이고 집을 떠남이란 죄과가 없는 것이며,
집에 머묾이란 과환(過患)이 있는 것이고 집을 떠남이란 과환이 없는 것이며,
집에 머묾이란 고난이 있는 것이고 집을 떠남이란 고난이 없는 것이며,
집에 머묾이란 생사에 유전하는 것이고 집을 떠남이란 제한(齊限)이 있는 것이며,
집에 머묾이란 더러움이 있는 것이고 집을 떠남이란 더러움이 없는 것이며,
집에 머묾이란 교만이 있는 것이고 집을 떠남이란 교만이 없는 것이며,
집에 머묾이란 재물로써 보배를 삼는 것이고 집을 떠남이란 공덕으로써 보배를 삼는 것이며,
집에 머묾이란 재역(災疫)이 많은 것이고, 집을 떠남이란 재역을 여읜 것이고,
집에 머묾이란 항상 물러나는 것이고 집을 떠남이란 항상 증장하는 것이며,
집에 머묾이란 쉽게 얻을 수 있는 것이고 집을 떠남이란 어렵게 얻을 수 있는 것이며,
집에 머묾이란 누구나 할 수 있고 집을 떠남이란 좀처럼 할 수 없는 것이다.
집에 머묾이란 흐름[流]을 따르는 것이고 집을 떠남이란 흐름을 거스르는 것이며,
집에 머묾이란 바로 번뇌의 바다이고 집을 떠남이란 바로 번뇌의 바다를 건넘이며,
집에 머묾이란 바로 이 언덕[此岸]이고 집을 떠남이란 바로 저 언덕[彼岸]이며,
집에 머묾이란 얽매임에 사로잡히는 것이고 집을 떠남이란 사로잡힌 얽매임을 여의는 것이며,
집에 머묾이란 원수를 만들어 내는 것이고 집을 떠남이란 원수를 없애버리는 것이며,
집에 머묾이란 국왕의 교훈을 받는 것이고 집을 떠남이란 불법의 교훈을 받는 것이며,
집에 머묾이란 죄를 범함이 있는 것이고 집을 떠남이란 죄를 범함이 없는 것이다.
집에 머묾이란 바로 괴로움이 자라나는 것이고 집을 떠남이란 바로 즐거움이 자라나는 것이며,
집에 머묾이란 바로 얕은 것이고 집을 떠남이란 바로 깊은 것이며,
집에 머묾이란 짝[伴]을 쉽게 얻는 것이고 집을 떠남이란 짝을 얻기 어려운 것이며,
집에 머묾이란 부인이 짝이 되는 것이고 집을 떠남이란 선정이 짝이 되는 것이며,
집에 머묾이란 바로 그물이고 집을 떠남이란 바로 그물을 찢어버리는 것이며,
집에 머묾이란 상해(傷害)함을 훌륭한 것으로 여기는 것이고 집을 떠남이란 섭수(攝受)함을 훌륭한 것으로 여기는 것이며,
집에 머묾이란 마왕(魔王)의 당기[幢]와 번기[幡]를 가지는 것이고 집을 떠남이란 부처님의 당기와 번기를 가지는 것이며,
집에 머묾이란 바로 여기에 머무는 것이고 집을 떠남이란 저기에 머무는 것이며,
집에 머묾이란 번뇌를 증장시키는 것이고 집을 떠남이란 번뇌를 여의는 것이며,
집에 머묾이란 가시덤불과 같은 것이고 집을 떠남이란 가시덤불을 벗어나는 것이다.
문수사리여, 만약에 내가 집에 머무는 것을 헐뜯고 집을 떠남을 칭찬한다면, 그 말이 허공에 가득 차더라도 말로 다할 수 없을 것이니,
문수사리여, 이것이 이른바 집에 머무는 것의 과환이고 집을 떠나는 것의 공덕이다.”
그때 문수사리가 부처님께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보살마하살은 항상 몇 가지 생각함이 있습니까?”
부처님께서는 말씀하셨다.
“문수사리여, 보살은 스스로가 생각하기를,
‘나는 언제 출가하여 승방(僧坊)에 머무를까?’라고 하며,
‘나는 언제 자자(自恣)의 모임에 화합할까?’라고 하며,
‘나는 언제 계율ㆍ선정ㆍ지혜ㆍ해탈과 해탈지견(解脫知見)을 수행할까?’라고 하며,
‘나는 언제 대모니존(大牟尼尊)처럼 옷을 입을까?’라고 하며,
‘나는 언제 선사(仙師)의 상호를 얻을까?’라고 하며,
‘나는 언제 공한(空閒)한 곳을 얻어 그곳에 곧 머물까?’라고 하며,
‘나는 언제 걸식할 적에 좋고 나쁘거나 많고 적음에 대해 생각을 내지 않고,혹 얻고 못 얻거나, 혹 차갑고 뜨겁거나 차례로 다니면서 걸식하되 굶주림과 쓰라림을 치료하기 위해 마치 기름을 수레에 바르듯 수명만을 유지하여 적은 것으로써 스스로가 살아갈까?’라고 하며,
‘나는 언제 세간의 여덟 가지 법을 떠나 여덟 가지 법에 흔들리지 않고, 언제 도시를 떠나 숲을 사랑함으로써 12입(入)에 집착하지도 않고 좋아하지도 않을까?’라고 하니라.
‘나는 언제 6근(根)을 수호하여 선정을 얻을까?라고 하며,
‘나는 언제 6근을 조복하기를 종[僕] 부리듯이 할까?’라고 하며,
‘나는 언제 좌선(坐禪)에 정진하고 경서를 읽어 외워서 항상 모든 번뇌를 끊고 모든 행을 갖춰 닦기를 좋아할까?’라고 하며,
‘나는 언제 만족할 줄을 알까?’라고 하며,
‘나는 언제 과거에 희락(戱樂)하던 일을 좋아하지 않을까?’라고 하며,
‘나는 언제 자신 또는 남을 위해 부지런히 정진을 행할까?’라고 하며,
‘나는 언제 보살이 행하는 도를 행할까?’라고 하며,
‘나는 언제 세간제일의 귀중함이 될까?’라고 하며,
‘나는 언제 애욕의 노예를 벗어날까?’라고 하며,
‘나는 언제 속가의 삶을 벗어날까?’라고 하니,
문수사리여, 이것이 이른바 보살이 마음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부처님께서는 이 게송을 읊어 말씀하셨다.
만약에 보살의 마음을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나는 알겠노라. 그의 모든 공덕은
그 수가 한량없고 끝이 없어서
청정한 부처님의 법신을 얻을 것이며
나쁜 갈래에 들어가 모든 괴로움을 받지 않고
부처님의 지혜를 구족하게 성취하리라.
그때 문수사리가 부처님께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다른 부처님 세계에도 여러 부처님들이 현존해 계실 것이니, 어떤 사람이 여기에서 저 부처님을 뵈려면 어떻게 해야 뵐 수 있습니까?”
부처님께서는 말씀하셨다.
“문수사리여, 만약에 여래의 열 가지 명호를 오로지 생각한다면 그 사람에게 부처님께서 항상 있어 사라지지 않고, 또 여러 부처님의 설법을 들을 수 있으며, 아울러 저 부처님의 현재 사부대중을 볼 수도 있고 수명을 더하여 모든 질병이 없을 것이니, 열 가지 명호가 무엇인가?
하면,여래ㆍ응공(應供)ㆍ정변지(正遍知)ㆍ명행족(明行足)ㆍ선서(善逝)ㆍ세간해(世間解)ㆍ무상사(無上士)ㆍ조어장부(調御丈夫)ㆍ천인사(天人師)ㆍ불세존(佛世尊)이다.
그리고 문수사리여, 열 가지 명호를 염(念)하는 자로서 먼저 부처님 육신[色身]의 구족한 상호를 염하고, 또 법신(法身)의 수명이 다함없음을 염하되,
‘부처님께서는 육신이 아니라 부처님이 바로 법신이다’라고 염할 것이며,
꼭 잡고 굳게 잡아서 부처님을 허공과 같다고 볼 것이니, 허공을 좋아하기 때문에 일체 법의 이치를 아는 것이다.
문수사리여, 수미산(須彌山)과 같은 경우에도 건타산(乾陀山)ㆍ이사타산(伊沙陀山)ㆍ수타리산(須陀梨山)ㆍ가라저가산(珂羅底迦山)ㆍ아수가라산(阿輸迦羅山)ㆍ비나다산(毘那多山)ㆍ니민타라산(尼民陀羅山)ㆍ작가라산(斫迦羅山)으로 말미암아 이러한 산들이 다 장애가 되거니와,
만약 어떤 사람이 한마음으로 부처님의 열 가지 명호를 염한다면 이러한 산들이 장애가 될 수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바른 생각이기 때문이고, 부처님의 위신(威神) 때문이다.
다시 문수사리여, 부처님의 열 가지 명호를 허공과 같이 염하는 것은,
허공과 같음을 알기 때문에 과실(過失)이 없고,
과실이 없기 때문에 무생법인[無生忍]을 얻으며,
이와 같이 명자(名字)에 의지해 바른 생각을 증장하여 부처님의 상호를 보는 동시에 바로 선정을 구족하고,
선정을 구족해서는 여러 부처님을 보되 마치 물과 거울에 비추어 스스로 그 얼굴을 보듯이 그가 모든 부처님을 보는 것도 그러할 것이니,
이것이 이른바 맨 처음의 선정이다.
다시 한 부처님의 형상이 거울 가운데 분명히 나타나는 것처럼 시방 부처님의 형상도 다 그렇게 분명함을 볼 때에 이로부터 항상 바른 생각으로 사유한다면 반드시 상(相)이 일어나고, 상이 일어남으로써 항상 즐겁게 부처님을 보게 되며, 이러한 생각을 일으킬 때 여러 부처님께서 곧 나타나실 것이다.
그러나 신통을 얻을 수는 없고 저 세계에 갈 수도 없으면서 다만 이곳에 머물러 저 여러 부처님들을 보고 부처님들의 설법을 듣고서 실다운 이치를 얻을 것이다.”
문수사리는 부처님께 여쭈었다.
“어떤 법으로써 이 선정의 보배를 일으킵니까?”
부처님께서는 말씀하셨다.
“문수사리여, 마땅히 선지식을 친근하여 선지식들을 공양하며, 항상 정진을 일으켜 정진을 버리지 않으며 지혜를 버리지 않아 그 지혜를 동요하지 않고 지혜를 굳게 하고 지혜를 날카롭게 하며, 항상 신심에 들어가 정진의 뿌리를 견고하게 하여 천마(天魔)ㆍ사문ㆍ바라문들에게 파괴되지 않으니, 이 네 가지 법으로 말미암아 능히 이 선정을 낸다.”
문수사리는 부처님께 여쭈었다.
“다시 어떤 법이 있어서 이 선정을 냅니까?”
부처님께서는 말씀하셨다.
“문수사리여, 부끄러움을 참회하고, 설법하는 사람을 공경하여 공양하고 섬기되 부처님을 공양하듯 하니, 이 네 가지 법으로써 능히 선정을 내되, 다시 90일 동안에 걸쳐 무아(無我)의 생각을 닦아 식사ㆍ경행(經行)ㆍ대소변 보는 시간을 제외하고는 항상 일어나지 않고 단정히 앉아 전념할 뿐 잡된 생각을 하지 않아야 한다.
그리고 다시 네 가지 법이 있어서 능히 이 선정을 일으키니, 모든 부처님들을 보고 사람들에게 설법 듣기를 권하고, 보리심 내는 사람을 질투하지 않고, 모든 보살이 행할 바를 행함이 그것이니라.
다시 네 가지 법이 있으니,
첫째는 불상을 만드는 것이고,
둘째는 신심 있는 사람에게 보시하는 것이고,
셋째는 중생들을 교화하되 기만(欺慢)을 떠나 보리를 얻게 하는 것이고,
넷째는 모든 부처님의 바른 법을 수호하고 섭수(攝受)함이 그것이니라.
다시 네 가지 법이 있으니,
말을 적게 하고,
속가 사람들과 함께 있지 않고,
출가한 사람들과 화합하고,
모든 법에 잡착하지 않으면서 고요한 곳을 좋아함이 그것이니라.
다시 여러 가지 법이 있으니,
이른바 무생법인으로써 일체 지어감과 일체 태어나는 곳을 싫어하고,
일체 삿된 소견과 일체 5욕을 생각하지도 않고 한량없는 선정의 행을 닦아서 성내거나 미워함을 일으키지 않고,
4섭법(攝法)을 항상 기억하여 잊지 않고,
인자함과 가엾이 여김과 기뻐함과 버림을 성취하여 남의 허물을 비방하지 않고,
항상 설법을 들음으로써 순박하고도 정직하게 청정한 세 가지 업을 수행하고,
재물의 보시를 즐거이 찬탄하여 아끼는 마음을 일으키지 않고,
법의 보시를 즐거이 찬탄하여 법에 대한 아끼는 마음을 일으키지도 않고,
인욕을 닦아 동료끼리 안락함으로써 어떤 사람이 깔보거나 비방하거나 구타하더라도 이것이 나의 본업으로 이러한 과보를 받는 것이라 생각하여 그에게 진심을 내지 않고,
듣는 대로 받아 간직하여 자세히 사람들을 위해 선설함으로써 다른 사람들까지 바른 행을 수행할 것을 생각하게 하고,
질투를 내지 않는 동시에 자신을 자랑하거나 남을 헐뜯지 않고,
졸음과 게으름을 떠나 불ㆍ법ㆍ승에 신심을 내고 상ㆍ중ㆍ하의 자리를 모두 공경함으로써 남의 조그마한 덕(德)을 보더라도 항상 기억하여 잊지 않고,
말함이 진실하여 다른 허망한 말이 없는 이러한 법들이다.
다시 문수사리여, 집을 떠난 사람이 이 선정을 닦을 수 있는 것처럼 집에 있는 사람도 닦을 수 있고,
집에 있는 사람이 이 선정을 닦을 수 있는 것처럼 집을 떠난 사람도 닦아 익히고 다른 사람을 위해 자세히 선설하여 그들로 하여금 수행하게 할 수 있다.
집에 있는 사람이 이 선정을 닦을 수 있음이란 어떤 것인가?
업과 과보를 믿고서 일체 재물을 희사해 삼보(三寶)에 귀의하여 5계를 받아 간직하되 범하지도 않고 파괴하지도 않고 더럽히지도 않고 모자라지도 않게 하며,
10선도(善道)를 받아 모든 선한 일을 일으키며, 범행(梵行)을 수행하여 5욕을 헐뜯어도 질투를 내지 않고 처자를 사랑하지 않고 항상 집을 떠나기를 좋아하며,
8계를 받아 지녀 언제나 승방(僧坊)에 나아가 부끄러워하는 마음을 갖는 동시에 집을 떠난 사람에게 항상 공경하는 마음을 내며,
법을 감추거나 아끼지 않고 항상 교화하기를 즐기며,
화상ㆍ아사리(阿闍梨) 및 설법하는 사람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공경하며,
한편 부모와 선지식에게도 부처님같이 생각하는 마음으로써 부모와 선지식을 편히 모셔 안온한 처소에 머물게 함이니,
이것이 바로 집에 있는 사람이 이 선정을 닦는 것이다.
그리고 집을 떠난 사람이 이 선정을 닦아야 함이란 어떤 것인가?
깨뜨리지 않는 계율과 더럽히지 않는 계율과 헐뜯음이 없는 계율과 청정한 계율과 더럽지 않는 계율과 삿되지 않은 계율과 의지할 데 없는 계율과 얻을 바 없는 계율과 타락하지 않은 계율과 성인들이 찬탄한 계율과 슬기로운 사람들이 찬탄한 계율과바라제목차(波羅提木叉)를 잘 수호하여 일체 수행할 것을 다 성취하며,
항상 조그마한 죄를 두려워함으로써 깨끗한 업과 깨끗한 생명을 지니고,
깊은 무생법인을 좋아함으로써 공하고 형상 없고 조작 없음을 겁내지 않으며,
항상 부지런히 정진하여 바른 생각이 앞에 나타나며,
믿음이 있어 마음을 따르되 부끄러움을 성취하며,
세간 법에 집착하지 않고 질투하지 않고 항상 두타(頭陀)의 공덕을 행하며,
세간의 말을 싫어하여 꾸민 말을 좋아하지 않고,
은혜를 아는 동시에 은혜 갚을 줄을 알며,
화상과 아사리에게 공경하고 두려워하여 교만한 마음을 없애고,
훌륭한 스승과 착한 벗에 친근하기를 좋아하여 착한 벗이 있으면 내가 마땅히 법을 물으리라 생각하고서 이미 법을 듣고는 그 말대로 수행하니라.
경서에 의지하거나 스승의 말씀에 의지하여 설법하는 사람과 부모 또는 착한 벗을 항상 부처님처럼 생각하고,
고요한 곳을 좋아할 뿐 세간을 좋아하지 않으며,
몸과 목숨과 재물에 대해 마음이 집착하지 않으며,
죽음을 생각하고 이익에 의지하지 않아 부딪쳐 범하는 일도 없고 안타까운 애착의 마음도 없고,
바른 법을 거두어 받기 위해 존장들을 사랑하고 공경하며,
옷과 발우를 저축하지 않고 묵혀 둔 음식을 받지 않고,
항상 걸식하기를 좋아하여 차례로 다니면서 걸식하되 언제나 부끄러움을 느껴 스스로 자기의 죄를 살피고,
금ㆍ은 등 값진 보물을 잡지 않는 반면 진실한 법에 대해 놀라거나 의심을 내지 않으며,
항상 인자한 마음을 닦아 성내는 마음을 끊고 항상 가엾이 여기는 마음을 닦아 살해하는 마음을 끊어서 일체 세간을 요익케 하고,
일체 중생들에게 자비를 베풀며, 항상 경행(經行)하기를 좋아하여 졸음과 게으름을 없앰이니,
만약 이러한 공덕에 머문다면 능히 이 선정을 닦을 것이다.
다시 문수사리여, 항상 모든 선(善)함을 구족하여 여래를 염하되 전일한 마음으로 생각할 뿐 산란한 생각을 일으키지 않으며,
모든 감관[根]을 수호하여 음식에 만족할 줄 알고 초저녁이나 새벽이나 수면을 덜고 모든 번뇌를 떠나 선정을 내게 하되, 선정의 맛에 집착하지 않으며,
빛깔과 모양을 분별하되 깨끗하지 못하다는 생각을 내어 5온과 18계와 12처에 집착하지 않으며,
스스로 칭찬하지 않고 교만이 없으므로 일체 법에 대해 고요한 생각을 일으키고,
일체 중생들에게 친한 벗이란 생각을 내며,
명문(名聞)을 위해 금계(禁戒)를 지니지 않고 항상 선정을 행하여 많이 들음을 싫어하지 않으며, 많이 들음으로 해서 교만을 내지 않으며,
법에 의심이 없어서 부처님을 비방하지 않고 법을 헐뜯지 않고 승가를 파괴하지 않으며,
항상 선한 사람을 가까이하고 불선한 사람을 멀리하여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출세간의 말씀을 즐겨 하며,
여섯 가지 법을 받아 염하고 다섯 가지 해탈의 자리[五解脫處]를 닦고 아홉 가지 성냄과 미워함[九種瞋恚]을 없애고 여덟 가지 게으름[八懈怠]을 끊고 여덟 가지 정진[八精進]을 닦고 아홉 가지 생각의 선정[九想定]을 행하고 여덟 가지 대인의 깨달음[八大人覺]을 닦아 모든 선정과 해탈의 삼매와 삼마발제(三摩跋提)를 성취함으로써 일체 소견이 흔들리지 않느니라.
귀 기울여 법을 듣되 5온[陰]을 분별하여 상(相)에 머묾이 없음으로써 생사를 마치 칼 뽑는 도적처럼 겁내고,
12입(入)을 허공 덩어리처럼 생각하고, 18계를 독사처럼 생각하고,
열반의 자리에 고요한 생각을 내고, 5욕을 관하되 가시처럼 생각하며,
생사를 벗어나기를 좋아하여 아무런 쟁송(諍訟)이 없고 다만 중생들을 교화하여 모든 공덕을 닦으니,
능히 이와 같이 하는 자면 깊은 선정을 얻을 것이다.
문수사리여, 어떤 사람이건 이 선정을 수행한다면 그가 얻는 공덕은 길이 퇴전하지 않을 것이니,
문수사리여, 설령 삼천대천세계를 다 부수어 티끌을 만들되 그 얼마나 많은 세계 가는 티끌 수 같은 세계마다 모두 7보를 깔아서 그것을 가지고 보시한다면,
네 생각엔 어떠하냐? 이 사람의 이러한 보시 공덕이 많다고 하겠느냐?”
문수사리는 여쭈었다.
“매우 많겠습니다, 세존이시여.”
부처님께서는 말씀하셨다.
“내가 이제 그대에게 일러두겠다. 어떤 선남자ㆍ선여인이 바로 이 선정을 듣고서 겁내거나 두려워하는 마음이 없으면 그가 얻는 공덕이 저 보시의 공덕보다 많을 것인데,
하물며 신심으로 생각하여 수행하고 받아 지니고 읽어 외우는 자이겠으며,
하물며 또 남을 위해 자세히 설하는 자이겠으며,
하물며 이 선정을 닦고 익혀 얻는 자이겠느냐?
이 공덕의 수야말로 나도 이루 말할 수 없으니,
이 때문에 문수사리여, 선남자ㆍ선여인은 마땅히 이 선정을 닦아 익히고 이 선정을 기억해 지녀야 하며, 나아가선 다른 사람을 위해서도 이 선정을 자세히 선설해야 할 것이다.
문수사리여, 겁의 불[劫火]이 탈 때에 어떤 보살이 이 선정을 지니고서도 불에 탈 이치는 없으며, 국왕의 환란이나 나쁜 귀신이나 갖가지 악독한 경우를 만나더라도 곤란을 받지 않을 것이니, 다만 악업이 너무 깊고 무거워서 반드시 과보를 받아야 할 자는 제외될 것이다.
다시 문수사리여, 만약 보살마하살로서 이 선정을 지닌 자라면, 질병이 없어 6근(根)이 청정하며, 모든 잘못된 고뇌가 없을 것이다.
다시 문수사리여, 만약 이 선정을 지닌 자라면 모든 하늘ㆍ용ㆍ귀신들이 다 수호하고 모든 천신이 찬탄하고, 나아가 모든 부처님들도 항상 칭찬하실 것이며, 모든 천신들이 항상 보기를 좋아하고 나아가 모든 부처님들도 항상 보기를 좋아하실 것이다.
다시 문수사리여, 만약 이 선정을 받는 자라면 아직 듣지 못한 법을 다 듣게 되며, 나아가 잠잘 때 꿈에서라도 이 선정을 얻을 것이니,
문수사리여, 내가 이 선정의 공덕을 말하려면 1겁 또는 1겁을 지나더라도 남김없이 다 말할 수 없고 끝이 없는데, 하물며 보살로서 이 선정을 얻는 자이겠느냐.
문수사리여, 설령 어떤 사람이 몸이 굳세고 힘이 많아서 동쪽을 향해 가기를 백천 세 지나고, 남쪽ㆍ서쪽ㆍ북쪽과 위쪽ㆍ아래쪽에도 역시 그렇게 했다면, 네 생각엔 어떠하냐?
그 누가 이것을 헤아리는 사람이 있겠느냐?
이 사람이 다닌 곳이 1유순(由旬)이겠느냐, 2유순이겠느냐? 나아가 백천 유순이겠느냐?”
문수사리는 대답하였다.
“일체종지(一切種智)이신 부처님과 큰 지혜 사리불과 아울러퇴전하지 않는 보살을 제외하고는 나머지는 헤아릴 자가 없겠습니다.”
부처님께서는 말씀하셨다.
“문수사리여, 설령 어떤 선남자ㆍ선여인이 저 사람이 다니는 곳마다 그 가운데 가득 찬 값진 보물로써 모두 보시할지라도 다시 어떤 사람이 이 선정을 듣고 나서 수희(隨喜)하는 마음으로 원을 세워 삼보리(三菩提)를 얻고자 하거나 다문(多聞)을 얻고자 한다면,
이 수희하는 공덕이야말로 저 보시하는 공덕에 비교할 때 백분, 천분 내지 백천만억분도 비교가 될 수 없을 것이니,
이 사람은 과거 여러 부처님께서 따라 기뻐하셨고, 현재ㆍ미래의 부처님들도 따라 기뻐하실 것이고, 나 역시 따라 기뻐한다.”
문수사리는 부처님께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그렇습니다, 그렇습니다. 이 선정의 공덕과 과보야말로 이루 생각하거나 헤아릴 수 없겠습니다.”
부처님께서는 말씀하셨다.
“문수사리여, 만약 보살이 하루 동안만 이 선정을 수행하더라도 과거ㆍ미래ㆍ현재 중생들이 닦은 공덕으로는 이 선정의 백천만분의 일(一)에도 미치지 못할 것이다.”
부처님께서는 이 게송을 읊어 말씀하셨다.
여래의 열 가지 명호와
그지없는 덕을 염한다면
이러한 모든 공덕은
이루 칭량할 수 없을 것이니
값진 보물을 널리 보시할지라도
그것보다는 앞서 말한 그대로
선정을 듣고서 따라 기뻐하는 마음
이보다 뛰어나 헤아릴 수 없으리.
그때 문수사리가 부처님께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모든 공양한 나머지의 꽃으로써 많은 병을 치료하는 데 사용하면 혹 나쁜 독을 소멸하게 되니, 그 법이 어떤 것입니까?
부처님께 공양한 나머지의 꽃이라면 반야바라밀의 꽃과 부처님 발아래의 꽃과 보리수의 꽃과 법의 바퀴를 굴리는 곳의 꽃과 탑의 꽃과 보살의 꽃과 대중 스님들의 꽃과 불상의 꽃이니, 그 법이 어떤 것입니까?
그리고 세존이시여, 이 꽃을 사용함에는 몇 가지 주문의 법이 있습니까?
세존이시여, 일체 꽃이 어째서 다 부처님 꽃 가운데 들어가야 합니까?
세존이시여, 이 꽃들을 사용하는 법으로서 한 가지내지 몇 가지의 많은 법이 있으며, 이 주문 역시 한 가지 내지 몇 가지의 많은 주문이 있습니까?”
부처님께서는 말씀하셨다.
“문수사리여, 그 각각 꽃마다 각각의 주문이 있고, 낱낱 꽃에 대한 주문을 백여덟 번씩 외워야 한다.
부처님께서 외우는 꽃의 주문[花呪]은 다음과 같다.
나모몯달샤야사바하
南無佛闥寫冶莎呵
반야바라밀 꽃의 주문은 다음과 같다.
나마가로리 바야바라밀다리사바하
那末柯盧履民旨反波若波羅蜜多裔莎呵
부처님 발아래 꽃의 주문은 다음과 같다.
나모바타제점담염사바하
那莫波陁制點耽鹽莎呵
보리수 꽃의 주문은 다음과 같다.
나모몯디핍력감람사바하
南無菩提逼力龕嵐莎呵
법의 바퀴 굴리는 곳의 꽃 주문은 다음과 같다.
나모달마자가라야사바하
南無達摩斫柯羅夜莎呵
탑 꽃의 주문은 다음과 같다.
나모유바야사바하
那莫踰跛耶莎呵
보살 꽃의 주문은 다음과 같다.
나모몯디사다야사바하
南無菩提薩埵冶莎呵
대중 스님들의 꽃 주문은 다음과 같다.
나모싱가야사바하
那莫僧伽冶莎呵
불상의 꽃 주문은 다음과 같다.
나모바라디야사바하
那莫波羅底耶莎呵
문수사리여, 주문의 경이 이러하니 네가 마땅히 간직하고 지녀라.”
부처님께서는 다시 말씀하셨다.
“문수사리여, 이 꽃들을 사용하는 법에 있어서 어떤 비구ㆍ비구니나 우바새ㆍ우바이가 만약 믿고서 수행하려면 마땅히 일찍 일어나 깨끗이 목욕하고 양치질한 다음 부처님의 공덕을 염하면서 이 꽃을 공경하되, 발로 밟거나 꽃 위를 넘어 다니지 말고 법 그대로 고이 모셔 깨끗한 그릇에 안치해야 할 것이다.
그러고 나서 어떤 사람이 한증[寒熱]과 열증[寒熱]이 있을 때 이 꽃을 냉수에 갈아서 몸에 바르고, 혹은 두통이 있을 때에도 모두 이것을 바르며,
또는 토사ㆍ이질ㆍ출혈에나 혹 복통과 번열[煩痛]에도 장물[漿]에다 이 꽃을 갈아 마시며,
또는 구환창(口患瘡)을 앓을 때에도 따뜻한 물에 꽃을 갈아서 이 꽃 즙[汁]을 머금는다.
뿐만 아니라 진심[瞋]이 많은 사람도 혹은 냉수에 혹은 사탕에 이 꽃을 갈아서 꽃 즙을 마시고, 탐염(貪染)이 많은 사람도 잿물 즙[灰汁]에다 꽃을 갈아서 그 음부[隱處]에 바르거나 다시 냉수로 꽃을 갈아 그 이마 위에 바르면 탐염이 점점 소멸되어 항상 일체 사람에게 사랑과 공경을 받으며,
또는 장맛비가 그치지 않을 때에도 한적한 곳을 택하여 불로써 꽃을 사르면 비를 곧 그치게 할 수 있고, 오래 가뭄이 계속될 때에도 역시 한적한 곳을 택하여 꽃을 물속에 안치하고서 다시 주문을 외움과 동시에 냉수를 꽃 위에 뿌리면 곧 하늘로부터 비를 퍼붓게 할 수 있다.
또는 소ㆍ말ㆍ코끼리 등의 근본 성질이 사나운 것도 이 꽃을 먹이면 곧 성질이 조복되고, 과일 나무의 꽃, 열매가 무성하지 않은 것도 냉수와 쇠똥으로써 꽃 즙을 갈아내어 그 나무뿌리에 물을 주되 밟지 말고서 그대로 두면 꽃ㆍ열매가 곧 많아지고,
밭 가운데 물이 너무 많아 곡식의 싹이 녹아질 경우에도 이 꽃을 두드려 가루를 만들어서 밭 가운데 뿌리면 그 싹들이 곧 자라나며,
높은 언덕이나 육지의 물이 없는 곳이라도 네 비구를 청하여 그곳에 꽃을 깔아두고서 하루 동안 백여덟 번 주문을 외우고, 다음 또 하루 동안에 꽃을 먼저 꽃 위에 깔고서 역시 백여덟 번 주문을 외우되 이같이이레 동안을 계속한 끝에 땅을 파면 곧 물을 얻게 된다.
나라 안에 질병이 많을 경우에는 냉수에다가 꽃을 갈아 그것을 피리와 북 등에 발라서 불거나 두드려 소리를 내면 듣는 이의 병이 곧 낫게 되며,
또는 적국이나 원수들이 국경에 와서 침범하려 할 경우에도 물로써 꽃을 갈아 그곳에 뿌려두면 곧 물러가게 되며,
높은 산 반석(盤石)이 있는 곳일지라도 많은 비구들이 돌 위에다가 꽃을 갈고, 이미 꽃을 다 갈고 나서 함께 예배하면 오랜 뒤에 돌 위에서 저절로 값진 보물이 솟아 날 것이다.
어리석은 사람일지라도 공양한 나머지의 꽃을 백 가지 내지 최하 일곱 가지를 갖고서 그것을 두드려 가루를 만들어 우유에 배합하면서 먼저 주문을 백여덟 번 외우고 그 가루를 배합한 것을 환(丸)을 만들어 탄알[彈丸] 크기와 같이 하여 날마다 한 알씩을 먹으면서, 먹을 때 역시 주문을 백여덟 번 외운다면 점점 총명해지고 근기가 영리해져서 하루 동안에 백 게송을 외울 수 있을 것이며,
또는 어떤 사람이 할 일이 있어서 우발라꽃[優鉢羅花]ㆍ구물두꽃[拘物頭花]ㆍ분다리꽃[分陀利花]ㆍ울파라꽃[鬱波羅花] 등 물에서나 육지에서 자라난 꽃 백 가지를 구하여 먼저 공양한 다음 물에다가 꽃을 갈아서 그 필요에 따라 바르기도 하고 뿌리기도 하면 모두 효과가 있을 것이다.
혹은 백 가지 꽃을 구해 그것을 부수어 가루를 물에 섞어 환(丸)을 만들어서 어떤 악독한 중병이 있을 경우 그 헌 데에 바르면 그 병이 곧 나을 수 있고, 종기와 관절염 같은 온갖 독기에도 이 환을 먹거나 바르면 병이 곧 제거될 수 있고, 만약 오랫동안 병에 지친 사람으로서 신체가 소멸되었을지라도 보리나 밀 등 즙(汁)에다가 이 꽃을 갈아서 그 몸 위에 바르면 곧 몸이 충실해지고, 다시 이 가루를 꽃 즙에 섞어 고약을 만들어서 그 이마 위에 붙이면 일체 원수들도 그것을 보는 대로 사랑하는 생각을 낼 것이다.
문수사리여, 이 꽃 주문의 법은 다음과 같다.
나모몯달샤야사바하 나마가로리 반야바라밀다리사바하 나모바타제
점담염사바하 나모모디핍력감람사바하 나모달마자가라야사바하 나모유
바야사바하 나모모디사다야사바하 나모싱가야사바하 나모바라디야사
南無佛闥寫冶莎呵一那末柯蘆履民旨反般若波羅蜜多裔莎呵二那莫波扡制點耽鹽莎呵三南無菩提逼力龕嵐莎呵四南無達摩斫柯羅夜莎呵五那莫鍮跋耶莎呵六南無菩提薩埵野莎呵七那莫僧伽野莎呵八那莫波羅底耶莎呵九
낱낱 주문을 백여덟 번씩 외워야 하니, 이 주문의 장구(章句)를 그대가 곳곳마다 선설하여라. 부처님 꽃을 피우는 법과 같이 다른 꽃들도 역시 그러하다.”
부처님께서는 이 게송을 읊어 말씀하셨다.
선한 사람은 발아래 티끌마저
뛰어나고 훌륭함이 제일이므로
모든 세계 가운데서
금산(金山)도 이를 넘을 수 없네.
부처님의 발아래 가는 티끌이
근심ㆍ슬픔ㆍ괴로움을 끊으니
모든 겁과 두려움을 더하는
저 금산과는 같지 않네.
부처님의 반야바라밀다 발은
보리의 법 바퀴의 자리이며
곧 탑과 보살이고
뭇 스님들이고 또는 불상이라.
이곳에 아홉 가지가 있으니
마땅히 공양을 닦아야 하고
온 세간 사람으로서도
다 예배하고 공경해야 하며
능히 일체의 악업을 끊고
삼계의 번뇌를 제거함으로써
공덕이 저절로 늘어나며
수명의 늘어남도 역시 그러하며
얼굴이 언제나 즐거운 빛깔이고
단정하고 몸도 힘이 있고
하는 일마다 길상(吉祥)하고
부처님들이 다 칭찬해 좋아하시리.
그때 문수사리를 비롯한 여러 보살과 아야교진여(阿若憍陳如)를 비롯한 여러 성문과 하늘ㆍ용ㆍ야차ㆍ건달바ㆍ아수라ㆍ가루라ㆍ긴나라ㆍ마후라가등 인비인(人非人)의 일체 대중들이 부처님의 말씀을 듣고 환희심을 내어서 받들어 행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