벽암록 17칙 향림화상과 조사가 서쪽에서 오신 의미
“지식으로 알기보다는 삶 자체를 바꿔야”
{벽암록} 제17칙은 향림 화상에게 조사가 중국에 오신 의미를 다음과 같이 질문하고 있다.
어느 스님이 향림 화상에게 질문했다.
“달마조사가 서쪽에서 오신 의미는 무엇입니까?”
향림 화상이 대답했다.
“오랫동안 앉아서 좌선하니 피곤하군.”
‘부처님 정법 전파’라는 생각도 분별
‘불법은 당연한 일’ 멋대로 왜곡말라
이 공안은 〈오등회원〉 15권 향림장에 전하고 있다. 향림 화상은 운문문언의 법을 이은 징원(澄遠: 908~987)선사다. 그의 전기는 〈전등록〉22권, 〈회요〉26권 등에 전하고 있다.
중국 사천성(蜀) 성도의 향림사 주지로서 운문 선사의 선풍을 정통으로 계승하고 있다는 사실을 원오도 ‘평창’에서 인정하고 있다. 이 공안도 그 연장선상에 있다.
향림 화상은 운문 선사의 문하에서 18년간 시자로 있었기 때문에 ‘원시자(遠侍者)’로 잘 알려진 선승이다.
운문의 불법을 직접 체득하는 시기는 늦었지만 참으로 그는 그릇이 큰 선승이었다고 원오도 ‘평창’에 칭찬하고 있다.
어떤 스님이 향림 화상에게 “달마 조사가 중국에 오신 의미는 무엇입니까?”라고 질문했다.
즉 ‘달마가 인도에서 중국에 불법을 전하게 된 참된 정신은 무엇입니까?’ 라는 의미의 질문이다.
원오는 “많은 사람들이 이 문제에 의심을 가지고 있다”라고 착어하고 있듯이,
‘달마조사가 서쪽에서 오신 의미는 무엇입니까(如何是祖師西來意)?’라는 질문은 선어록에 약 220회 이상 등장하고 있을 정도다.
이는 천하의 모든 선승들이 가졌던 문제였음을 말해준다. 사실 선수행자가 이 한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 수행한 다는 것은 무의미한 일이기 때문이다.
그 가운데서도 유명한 대답이 〈종용록〉47칙과 〈무문관〉37칙에 싣고 있는 조주 화상의 ‘뜰 앞의 잣나무’이다.
〈벽암록〉제20칙에도 용아 화상이 ‘달마가 서쪽에서 온 뜻(祖師西來意)’이라는 공안을 싣고 있다.
과연 달마대사가 인도에서 중국에 오신 의도가 있는가를 문제로 제기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달마가 중국에 오신 의도나 목적을 묻는 말이 아니다.
달마대사가 중국에 전한 선불교의 참된 정신은 무엇인가를 문제로 삼고 있는 것이다.
문제의 초점을 잘못 이해하면 엉뚱한 줄(칸)에 답안을 쓰게 된다.
향림 화상은 이에 대해 한마디로 “오래 앉아서 좌선 수행하느라고 애썼네(坐久成勞)!”라고 대답하고 있다.
원오도 “물고기가 헤엄치니 흙탕물이 일어나고, 새가 날아가니 깃털이 떨어진다.”고 코멘트를 붙이고 있다. 즉 너무나도 지극히 당연한 사실(일)이라고 언급하고 있는 것이다.
선원에서는 상당설법이 끝난 뒤에 주지는 대중들에게 “오래서서 나의 법문을 듣느라고 수고 했네(久立珍重)!” 라고 일상적인 인사말을 한다.
향림 화상의 대답도 선원에서 수행자들이 일상생활을 하는 가운데 주고받는 지극히 당연한 인사말이다.
그런데 이 말을 단순한 범부의 중심으로 나눈 인사말로 잘못 이해하는 사람이 많다.
그래서 원오도 ‘평창’에 다음과 같이 지적하고 있다.
“사람들이 향엄 화상이 ‘오래 앉아서 좌선수행 하느라 애썼네!’라고 말한 것을 잘못 알고 있다.
‘달마조사가 서쪽에서 오시어 9년 동안 면벽(面壁)을 했으니 오랫동안 앉아 있어 피로하지 않겠는가?’ 라고 말하지만, 전혀 근거도 없는 말이다.
이러한 주장은 향엄 화상이 체득한 완전하고도 자유로운 불법의 깨달음의 경지를 전혀 파악하지 못한 안목 없는 주장이다.”
원오가 지적한 것처럼, 당시 불법에 대한 안목 없는 선승들이 향엄 화상이 대답한 ‘오래 앉아서 좌선 수행하느라고 애썼네(坐久成勞)’란 말을 가지고 여러 가지 제멋대로 이해하고 주장하는 말들을 비판하고 있다.
다시말해, 올바른 안목으로 향엄 화상의 법문을 참구해야 할 것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해석을 하는 안목 없는 사람들은 글자대로 해석하여 달마대사가 9년간 앉아서 좌선수행한 모습으로 이해한 말이다.
최근에 간행한 〈벽암록〉 주석서에도 “달마는 소림사에서 오랫동안 앉아 좌선하며 뛰어난 제자가 오는 것을 기다리다 지쳤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또, 달마가 아니라 “향엄 자신이 오랫동안 좌선 수행하고 앉아 있지만 찾아오는 제자가 없어 지치고 피로했다”라는 해석도 보인다.
이러한 주장은 누가 누구에게 “오랫동안 앉아서 좌선 수행하느라고 애썼네!”라고 말을 했을까? 라고 그 주인공을 찾는 분별적인 해석에 불과하다.
선문답을 단순히 글자 해석으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
선승들이 대답한 한마디 한 구절에도 불법의 대의를 체득할 수 있는 법문을 제시하고 있기 때문에 정법의 안목이 없으면 선문답의 내용을 파악할 수가 없다.
단순히 글자로 이해할 수 있는 대화라면 굳이 선문답이라는 말로 기록하지 않아도 된다.
선문답은 평범한 범부들의 차별심 분별심으로 나눈 일상적인 대화가 아니라 일체의 분별과 차별적인 인식으로 이해하는 중생심을 초월한 불심(佛性)의 지혜로 나눈 법문이기 때문이다.
불법의 지혜를 체득한 선승들의 대화(선문답) 내용은 평범한 일상생활의 대화를 나누는 깨달음의 지혜로운 생활임과 동시에 불법의 진실을 나누는 보살행의 법문이다.
불법을 체득한 선승들의 지혜로운 법문이기 때문에 기록할 가치가 있고, 많은 사람들에게 대화를 통하여 불법을 체득할 수 있는 참된 인간교육의 의미를 갖고 있는 것이다.
이 공안의 이해에 가장 어려운 점은 ‘달마가 중국에 오신 의도는 무엇인가?’라는 문제제기와 ‘오랫동안 좌선 수행하느라 애썼네!’ 라는 말을 글자대로 해석하는 오류에서 비롯된다.
많은 사람들이 달마가 중국에 오신 의도(의지)를 파악하려고 참선을 한다.
무자화두를 참구할 때도 “왜 무(無)라고 했는고?”라면서 조주의 의지를 참구하라고 가르치고 있다.
왜 자신의 의지를 참구하지 않고, 달마의 의지나 조주의 의지를 참구해서 무엇 하려고 하는가?
참구한다고 달마나 조주의 의지가 파악될 수 있는 문제인가?
세월만 헛되이 보내고, 자신도 중생심의 선병에서 허덕이는 불법에 대한 안목이 없는 사람들의 주장이다.
달마가 중국에 온 것은 부처님의 정법을 전하기 위한 것이라는 분별심이 작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달마가 중국에 온 것은 의도나 의지가 없다.
의도나 의지는 목적의식이 있는 중생심인데, 달마대사는 한갓 범부로서 중생심으로 불법을 전하고 중생을 교화한 인물이 아니기 때문이다.
달마대사는 자신이 세운 원력을 실행하기 위해서 시절인연에 맞는 자기의 일을 당연히 실천한 것일 뿐, 별다른 목적의식이나 의도를 가지고 중국에 온 것이 아니다.
불보살이 실행하는 일은 원력을 세운 보살도의 일임과 동시에 지금 여기 자신의 일을 하고 있는 것이다.
자신의 일은 매일 매일 반복되는 일상생활 가운데 지극히 당연히 해야 할 일이다.
때문에 자신이 해야 하며, 결코 남이 대신 할 수가 없는 것이다.
자신의 육체를 움직이고 숨쉬는 일, 음식을 먹고 마시고 잠자는 일과 같이 당연한 일을 한 것이다.
그래서 향엄 화상은 “오랫동안 좌선수행 하느라 애썼네!”라고 대답하고 있다.
이 말은 선원에서 수행하는 사람은 많은 시간 좌선하며 불법을 사유하고 정법의 안목을 체득하는 지극히 당연한 일을 하고 있는 것이다.
달마가 중국에 오신 참된 정신이 자신의 일을 당연히 한 것처럼,
그대도 “좌선 수행하느라 애쓰고 있네!”라고 지극히 당연한 일을 일상의 인사말로 대답한 것이다. 일상의 인사말 하는 가운데 불법의 정신을 체득해야 하는 것이 선문답이다.
불법의 체득한 깨달음의 생활은 지금 여기 자신의 평범한 일상생활을 떠나서 존재하거나 실행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원오는 “향림 화상이 ‘오랫동안 좌선수행 하느라 애썼네(坐久成勞)!’라고 말한 의미를 이 공안을 읽는 그대는 아는가?
안다면 자신의 삶이 안목 있는 불심의 생활이 되어 다툼이 없을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