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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비달마장현종론 제7권
3. 변차별품③
3.6. 불상응행법(不相應行法)[3]
7) 명근(命根)
각기 상응하는 바에 따라 두 가지 선정에 대해 이미 분별하였다.
명근(命根)이란 무엇인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명근의 본질은 바로 목숨[壽]으로
능히 체온[煖]과 의식[識]을 유지하는 것이다.
논하여 말하겠다.
명근의 본질은 바로 목숨[壽]이다.
그래서 본론(本論)에서 말하기를
“무엇을 일컬어 명근이라 한 것인가? 이를테면 3계의 목숨이다”고 하였던 것이다.74)
[명근의] 이명(異名)이 비록 그러할지라도 그 자체에 대해서는 아직 자세하게 밝히지 않았으니, 이제 마땅히 다시 진술해 보아야 할 것이다. 어떠한 법을 일컬어 목숨이라 한 것인가?
이를테면 어떤 개별적인 법이 존재하여 능히 체온[煖]과 의식[識]을 유지하니, 이를 일컬어 목숨이라고 한다. 그래서 세존께서도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던 것이다.
목숨과 체온과, 그리고 의식
이 세 가지의 법이 몸을 버리게 될 때
그것이 버려진 몸은 나자빠지니
어떠한 생각도 없는 나무둥치와도 같다.
만약 그렇다면 이러한 목숨은 어떠한 법에 의해 능히 유지되는 것인가?
이러한 목숨을 능히 유지하는 것은 바로 업이라고 나는 설한다.75) 이것은 한결같이 업의 이숙과이기 때문이며, 일정한 기간[一期]의 생 중에 항상 수전(隨轉)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체온은 한결같이 업의 이숙과가 아니며, 의식은 두 가지가 모두 아니다.76) 비록 일정한 기간동안 항상 수전하는 처소(즉 소의신)를 가질지라도 한결같이 업의 이숙이 아니기 때문에 의식이 업에 의해 유지된다고는 말할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목숨이 능히 체온과 의식을 유지하는 것이라고 설한 것이다.
즉 업에 의해 낳아지지 않은 의식의 유전(流轉) 중에서 업은 능히 [의식을] 유지하는 어떠한 공용(功用)도 갖지 않으며, 하나의 동분 중에서 이숙생의 의식이 끊어졌다가 다시 상속하는 것은 목숨의 힘에 의해 유지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다시 목숨이 능히 체온을 유지한다는 사실은 어떻게 알게 된 것인가?
요컨대 목숨이 있는 자는 바야흐로 체온을 갖기 때문이다. 그러나 체온을 갖지 않은 자도 역시 목숨을 갖는 것으로 관찰되기 때문에(무색계에서는 색법인 체온이 존재하지 않음) 목숨 자체는 체온에 의해 유지되지 않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이에 따라 개별적인 실체로서 존재하는 법이 있어 그것의 힘이 능히 유정의 체온과 의식을 유지하는 것이니, 이를 설하여 ‘목숨’이라 하며, 이것이 바로 명근임을 알아야 한다.
그런데 이와 같은 명근은 오로지 소의신에 의지하여 [일어나는] 것이 아니니, 무색계에도 역시 존재하기 때문이며,
또한 오로지 마음에 의지하여 [일어나는] 것도 아니니, 무심의 상태에서도 역시 존재하기 때문이다.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명근은 무엇에 근거하여 [일어나는 것인가]?
이는 전세(前世)에 낳아진 업에 근거하여 일어나며,77) 아울러 현세의 중동분에 근거하여 일어나는 것으로, 그러한 중동분의 경우 역시 명근에 준하여 [알아야 한다].78)
그렇다면 명행(命行,jīvita saṁskāra)과 수행(壽行,āyuḥ saṁskāra)에는 어떠한 차별이 있는 것인가?
이를테면 생겨난 법[生法]의 목숨을 일컬어 명행이라 하고, 생겨나지 않은 법의 목숨을 일컬어 수행이라고 한다.
그런데 어떤 이는
“버려지지 않은 목숨을 일컬어 명행이라 하고, 버려진 목숨을 일컬어 수행이라고 한다”고 말하였으며,
다시 어떤 이는
“만약 그것이 신족(神足)의 과보라면 명행이라 이름하고, 만약 그것이 선행된 업의 과보라면 수행이라 이름한다”고 설하였다.
다시 어떤 설자(說者)는
“만약 명(明)의 증상력에 의해 낳아진 것이면 명행이라 이름하고, 만약 무명의 증상력에 의해 낳아진 것이면 수행이라고 이름한다”고 하였으며,
또 다른 어떤 설자는
“탐욕을 떠난 자의 상속에 획득된 것을 명행이라 하고, 탐욕을 가진 자의 상속에 획득된 것을 수행이라 한다”고 하였으니, 이것을 명행과 수행의 차별이라고 한다.
명근에 대해 이미 분별하였다.
8) 유위 4상(相)][1]
① 4본상(本相)
무엇을 온갖 상(相)이라고 한 것인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상(相)이란 말하자면 온갖 유위가
생(生)ㆍ주(住)ㆍ이(異)ㆍ멸(滅)하는 성질이다.
논하여 말하겠다.
이와 같은 네 종류가 바로 유위의 상(相)이다.79) 이는 곧 유위의 성질을 나타내기 때문에 그것(유위)의 ‘상(相)’이란 명칭을 얻게 된 것으로, 이에 따라 제행(諸行)의 종류가 있다고 설하게 된 것이다.
여기서 ‘생(生)’이란, 이를테면 어떤 개별적인 법으로서, 바로 이러한 유위행(行)이 생겨나는데 어떠한 장애도 없게 하는 두드러진 원인[勝因]을 말하니, 제행을 능히 인섭(引攝)하여 그것으로 하여금 생겨나게 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능히 인섭한다’고 함은, 그것이 생겨날 때 이러한 법(즉 生相)이 능히 그것의 두드러진 연[勝緣]이 되는 것을 말한다. 비록 제행(諸行)이 일어나는 것을 모두 ‘생’이라고 말할 수 있을지라도 여기서의 ‘생’이라는 개념은 다만 제행이 생겨나는데 어떠한 장애도 없게 하는 두드러진 원인에 근거하여 설정한 것으로, 제행이 일어나는 데에는 반드시 앞서 생겨났거나 동시에 생겨나는 동류(同類)나 이류(異類)의 연(緣)의 힘을 갖추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사(思)를 일으키는 인과관계로써 널리 현시(顯示)해 보면 [이와 같다]. 즉 앞서 생겨난 동류와 이류의 연 가운데 동류연은 강성하여 [결과는] 그것에 따라 일어난다. 따라서 [결과와] 동시에 생겨난 연[俱生緣] 중에는 동류연이 존재하지 않지만, 이류연 중에도 치우치게 두드러진 것이 있다.
이를테면 ‘안(眼)과 색(色)을 연(緣)으로 하여 안식이 생겨난다’고 하는 경우, ‘안’을 설하여 인(因)이라 하고, ‘색’을 설하여 연(緣)이라 한다.
비록 그 중 한 가지라도 결여되면 안식은 생겨나지 않을지라도 안식은 ‘색’이 아니라 ‘안’에 따라 생겨나니, 바로 [안식의] 직접적인 연[近緣性]이 되기 때문으로, 그래서 이를 인(因)이라고 말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안식이라는 동일한 결과를 함께 낳는 [색 등의] 제법은 연(緣)이 되니, 식[의 생기]를 돕는 두드러진 힘은 ‘안’이 아니다.80)
또한 동일한 결과를 함께 일으키는 법(즉 구생연) 중에 [결과의] 생기를 돕는 힘이 치우치게 두드러진 것이 있으니,
예컨대 바람과 불의 관계로 보자면, 바람은 불의 작용[力]을 도와 그것을 활활 타오르게 한다는 것은 세간의 상식적인 사실이기 때문이다.
현견(現見)하건대 다른 취집물[異聚]인 바람도 불의 [생기를 도와] 치우쳐 따르기 때문에, 동일한 취집물[同聚]도 필시 그러함을 헤아려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동시에 생겨난 제행의 연(緣) 가운데 생기의 힘이 두드러진 것을 바로 ‘생’이라는 말로 설정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생’의 공능은 첫 찰나[初念] 무루지(즉 苦法智忍)의 온갖 득(得)을 낳을 때 그 상이 가장 현저하다. 이미 여기(첫 찰나 무루지)서 [‘생’의] 뛰어난 공능이 존재함을 관찰하였으므로 그 밖의 다른 경우에 대해서도 헤아려 보아 역시 그러한 공능이 존재함을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이다.
‘주(住)’란, 이를테면 개별적인 법으로서, 이미 생겨나 아직 괴멸하지 않은 제행이 자신의 결과를 인기(引起)하는데 어떠한 장애도 없게 하는 두드러진 원인을 말한다.
이를테면 제행이 생겨날 때 반드시 개별적인 법(즉 生相)에 근거하고 그것을 뛰어난 원인으로 삼듯이, 결과를 인기하는 것을 돕는 뛰어난 작용 역시 마땅히 반드시 개별적인 법(즉 住相)에 근거하고 그것을 원인으로 삼아야 하는 것이다.
즉 대법자(對法者)가 인정하는 것은, 제행은 여러 인연에 근거하여 그 자체가 잠시 머무는 일이 있다[有住]는 것이 아니다.81)
대법의 여러 논사들은 [그것을] 설하여 ‘현재’라고 하였으며, 역시 ‘머무는 일이 있다’고 설하였으니, 제행은 그 때 자신의 결과를 인기하기 때문이다. 또한 바로 이를 ‘작용’이라 설정하였다.
세존께서도 역시 말씀하시기를,
“제행은 잠시 머문다[暫住]”고 하였으며,82) 또한
“온갖 색은 생겨나 머무는 때가 있다”고 설하였으니,
이를 상속에 근거하여 설한 것이라고는 말할 수 없다.83)
왜냐하면 일 찰나도 역시 괴로움이기 때문이며, 상속은 반드시 찰나를 두루 거치면서 이루어지기 때문으로,84) 온갖 유위상이 다만 상속에 근거하여 전후의 차별로서 건립된 것이라고 하는 이치는 필시 이루어지지 않는다.
따라서 개별적인 법이 있어 능히 제행이 결과를 낳는 작용에 어떠한 장애도 없게 하는데 직접적인 원인[近因]이 되는 것, 이것을 대법(對法)의 여러 논사들은 ‘주’라고 설하였던 것이다.
‘이(異)’란, 이를테면 개별적인 법으로서, 바로 제행이 상속하여 후 찰나의 그것이 전 찰나의 그것과 다르게 되는 원인을 말한다.
즉 거기에 원인이 없다고는 할 수 없으니, 저절로 다름이 있으며 그 특성[相]이 동일한 의식이 전후로 상속 전변하는데 원인이 없다는 것은 이치상 이루어질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무색계에서 생겨난 수(受) 등의 상속은 찰나찰나 변이하여 이것(즉 異相)의 작용이 가장 현저하게 관찰된다.85) 무색계에 뛰어난 변이의 공능이 존재한다는 사실로써 다른 경우도 [이러한 변이의 공능이 존재함을] 추리[比度]하여 볼 수 있으니, 마땅히 [다른 경우에도] 역시 그것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할 것이다.
‘멸(滅)’이란, 이를테면 개별적인 법으로서, 함께 생겨난[俱生] 행이 찰나 찰나마다 괴멸하는데 두드러진 원인을 말한다.
그러나 무위가 멸상의 본질이라고는 주장할 수 없으니,86) 그것은 연(緣)에 따라 일어나는 일이 없으며, 이치상으로도 이루어질 수 없기 때문이다. 또한 역시 마땅히 그것에 생멸이 존재한다고 설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또한 계경에서도
“생멸의 연이 대상을 갖지 않는 지식[無境智]이라고 하는 것은 이치상으로 필시 있을 수 없는 일임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고 하였기 때문에 무위를 멸상이라고 설할 수 없는 것이다.
또한 생겨나는 법이 그것과는 별도의 법인 ‘생상’에 의해 생겨나는 것과 마찬가지로 소멸하는 법 역시 마땅히 그것과는 별도의 법인 ‘멸상’에 의해 소멸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본송에서 생ㆍ주ㆍ이ㆍ멸] 모두에 대해 ‘성질’이라고 말한 것은 바로 실체(實體)의 뜻이다.
만약 유위상이 네 가지 개별적인 실체로서 존재하는 것이라면, 어째서 계경에서는 단지 세 가지만을 설하고 있는 것인가?87)
계경에서는 유위와 무위의 공덕과 과실의 차별을 나타내기 위해서였다. 그래서 ‘주’를 설하지 않은 것이다.88) 만약 온갖 상(相)이 오로지 유위만을 나타내는 것이라면, 계경에서는 바로 설하였을 것이지만, 주상(住相) 자체는 오로지 유위만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니, 항상하는 것[常,즉 무위법]에도 역시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할지라도] 이 경에서
“[유위법이] 머물게 되는 원인[住因,즉 주상]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설하지는 않았으니,
그 밖의 다른 경에서는 다만
“유위행에는 생법과 멸법이 존재한다”고 설하고 있지만, 이법(異法)이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니듯이,
이 경 역시 마땅히 그러한 경우라고 해야 하는 것이다.
비록 네 가지 상이 존재할지라도 교화되는 이에 따라 ‘주’를 감추고서 세 가지만 설하여도 아무런 과실이 없는 것이다.89)
혹은 이 경에서는 이미 은밀히 ‘주’를 설하였으니, [‘세 가지 상이 있다’고만 말하였을 뿐] ‘오로지’라는 말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90)
혹은 이 경에서는 ‘주’와 ‘이’를 합하여 설한 것으로, 만약 그렇지 않다고 한다면 다만 마땅히 ‘이’라고만 말했어야 하였다.
즉 [경에서 두 가지를 합하여 설한 것은] 유위의 지속[住]은 반드시 변이[異]와 함께 한다는 사실을 나타내기 위한 것으로, 지속은 있지만 변이는 없는 무위와는 같지 않은 것이다.
다시 말해 이 경에서 주이(住異)라고 말한 것은, ‘주’가 바로 ‘이’임을 나타내려고 함이 아니라, 다만 유위에는 일어남[起]이 있고 다함[盡]이 있으며, 지속함[住]이 있고 변이함[異]이 있다는 사실을 나타내기 위해서였다.
그렇지만 무위에는 지속함은 있으나 그 밖의 나머지 세 가지는 없다. 그래서 온갖 유위와 무위는 다른 것이다.
이 같은 사실에 따라 대법(對法)에서는 온갖 유위에는 결정코 네 가지 상이 존재한다고 설하였으니, 이치상 어떠한 어긋남도 없는 것이다.
② 4수상(隨相)
이러한 ‘생’ 등의 상이 이미 유위라고 하였으므로 그것은 마땅히 [그것을 낳게 하는] 별도의 ‘생’ 등의 4상을 또 다시 가져야 할 것이다.
그러나 만약 또 다시 그러한 상을 갖는다고 한다면 바로 무한소급[無窮]에 떨어지고 말 것으로, 그것(‘생’ 등의 법을 낳는 생상)은 다시 또 다른 ‘생’ 등의 상을 가져야 하기 때문이다.
실로 [‘생’ 등의 4상을] 또 다시 갖는다고 인정하지만, 그러나 무한소급에 떨어지는 것은 아니다.
어째서 그러한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이것(유위4상)은 생생(生生) 등을 가지니
여덟 가지와 한 가지 법에 대해 공능이 있다.
논하여 말하겠다.
‘생생(生生) 등’이란 말하자면 네 가지 수상(隨相)으로, 이러한 생의 생생(생을 낳게 하는 생), 내지는 멸의 멸멸(멸을 멸하게 멸)이 바로 그것이다.
곧 제행으로서의 유위는 네 가지 본상에 따르고, 본상의 유위는 네 가지 수상에 따르는 것이다.91)
세존께서는 어디서 수상을 설하셨던 것인가?
어떤 계경에서는 “노사(老死)가 일어나기 때문에…”라고 말하고 있으며,
이 경(주87의 경)에서도 역시 결정코 수상이 존재한다고 설하고 있으니,
‘생’ 등의 상을 역시 유위라고 하였기 때문이며, 생생 등의 상 역시 ‘생기’ 등의 존재[性]이기 때문이다.92)
즉 계경에서 이미
“세 가지 유위의 유위상이 있으니, 유위의 생기(生起)도 역시 알 수 있고, 멸진(滅盡)과 주이(住異)도 역시 알 수 있다”고 하였기 때문에
여기(유위의 유위상)에 역시 수상이 포섭되고 있음을 알아야 하는 것이다.
또한 온갖 상에 대해 모두 ‘역시’라는 말을 사용하고 있으므로 이 경문 중에서도 역시 수상을 설하고 있는 것이다. 즉
“유위의 생기도 역시 알 수 있다”고 말한 것에서,
‘생기’는 바로 본상의 ‘생’이며, ‘역시’는 생생의 뜻을 나타낸다.
“멸진과 주이도 역시 알 수 있다”고 하는 말에 대해서도
‘생기’와 ‘역시’라는 말에 유추하여 마땅히 참답게 해석해 보아야 할 것이니,
만약 그렇지 않다고 한다면 무슨 소용에서 ‘역시’라고 말하였겠는가?
그래서 계경 중에서는 무위법에 대해
“오히려 생기 등도 갖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고 설하였던 것이다.
이 경설은, 모든 무위법은 오히려 ‘생’ 등의 본상도 갖지 않음을 알 수 있거늘 하물며 생생 등의 수상이 획득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의미로서,
만약 그렇지 않다면 [경에서는] 다만 “[무위법은] ‘생기’ 등을 갖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고 설했어야지 마땅히 ‘오히려…’라고 말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93)
또한 박가범(薄伽梵)께서는 계경 중에서
“모든 유위상에는 다시 상을 갖는다”고 설하고 있으니,
그래서 계경에서
“색은 생기와 멸진을 가지며, 여기(생기와 멸진)에는 역시 생기와 멸진이 존재함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고 설하였던 것이다.
이에 따라 상은 다시 상을 갖는 것임을 알아야 하는 것이다.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본상은 소상법(所相法)과 마찬가지로 그 하나하나가 마땅히 네 가지 종류의 수상을 가져야 할 것이며, 이러한 수상에는 다시 각기 네 가지가 있어야 하는 등 끝없이 전전(展轉)하게 될 것이 아닌가?94)
그러한 과실은 없으니, 네 가지의 본상과 네 가지의 수상은 [각기] 여덟 가지에 대해서와 한 가지에 대한 것으로, 공능(功能)상에 차별이 있기 때문이다.95)
즉 직접적인 연[親緣]으로서 작용하는 것을 일컬어 공능이라고 한 것이니, 이를테면 네 가지의 본상은 하나하나가 모두 8법(法)에 대해 작용을 가지며, 네 가지 종류의 수상은 하나하나가 모두 1법에 대해서만 작용을 갖는 것이다.
이것이 무슨 뜻인가?
말하자면 어떤 법이 생겨날 때에는 그러한 법 자체와 아울러 9법(法)이 함께 생겨나니, 법 자체가 한 가지이며, 상과 수상이 여덟 가지이다.
즉 본상 중의 생상(生相)은 그 자신을 제외한 나머지 8법에 대해 능히 직접적인 연이 되어 그것을 낳게 하니, 제법은 그 자신에 대해 생 등의 작용이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수상인 생생상(生生相)은 9법 가운데 오로지 본상인 생상에 대해서만 직접적인 연으로 작용하여 그것만을 낳을 뿐이다.
이렇듯 [수상과 본상이 각기] 한 가지를 낳고 다수를 낳는 것은 공능이 다르기 때문이다.96)
‘낳는 것[生]’이라고 하는 성질에 이미 어떠한 차이도 없거늘 어찌 공능에 차별이 있다는 것인가?
예컨대 수(受)의 영납(領納)은 비록 그 성질상으로는 어떠한 차이가 없을지라도 손해와 이익이라고 하는 공능상의 차별이 있는 것과 같다.97)
또한 본상과 수상에는 경계대상이 많고 적음의 [차별이] 있으니, 5식과 의식에 대상의 적고 많음의 [차별이] 있는 것과 같다.
즉 직접적인 연이 되어 자신의 결과를 인기할 작용이 일어나게 하는 것, 이것이 바로 ‘생(生)’의 공능이다.
또한 본상 중의 주상(住相) 역시 그 자신을 제외한 나머지 8법에 대해 능히 직접적인 연이 되어 머무르게 하며, 수상인 주주상(住住相)은 9법 가운데 오로지 본상인 주상에 대해서만 직접적인 연이 되어 그것을 머무르게 할 뿐이다. 즉 직접적인 연이 되어 법으로 하여금 잠시 머물게 하여 능히 자신의 결과를 낳게 하는 것, 이것이 바로 ‘주(住)’의 공능이다.
또한 본상 중의 이상(異相)은 그 자신을 제외한 나머지 8법에 대해 능히 직접적인 연이 되어 그것을 변이하게 하며, 수상인 이이상(異異相)은 9법 가운데 오로지 본상인 이상에 대해서만 직접적인 연이 되어 변이하게 할 뿐이다. 즉 직접적인 연이 되어 자신의 결과를 낳는 작용을 쇠퇴 감손하게 하는 것, 이것이 바로 ‘이(異)’의 공능이다.
또한 본상 중의 멸상은 그 자신을 제외한 나머지 8법에 대해 능히 직접적인 연이 되어 그것을 소멸하게 하며, 수상인 멸멸상은 9법 가운데 오로지 본상인 멸상에 대해서만 능히 직접적인 연이 되어 소멸하게 할 뿐이다. 즉 직접적인 연이 되어 자신의 결과를 낳는 작용을 괴멸하게 하는 것, 이것이 바로 ‘멸(滅)’의 공능이다.
그렇기 때문에 ‘생’ 등의 상이 다시 상을 가질지라도 수상에는 오로지 네 가지만 있을 뿐으로, 무한소급의 과실은 없는 것이다.
아비달마장현종론 제8권
③ 4상 구유(俱有)에 관한 해명
비록 소상법(所相法,유위상에 의해 생ㆍ주ㆍ이ㆍ멸하는 본법)을 떠나 ‘생’ 등의 상이 별도로 존재한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소상법과 동시에 일어난다. 그렇더라도 어떠한 법도 동일한 시간에 생겨나고 머물고 변이하고 소멸하는 과실은 없으니, [상] 자체가 동일하지 않은 것처럼 작용에도 차별이 있기 때문이다.1)
그렇지만 유위를 떠나 별도의 생 등의 상은 존재하지 않으며, 각각의 찰나에 4상이 존재한다고 주장한다면, (다시 말해 본법 자체가 일 찰나에 생ㆍ주ㆍ이ㆍ멸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면,) 그와 같은 과실의 병은 구제하거나 치료할 수 없을 것이니, 어떠한 법도 동일한 시간에 [생 등의] 공능(功能)이 차별된다고 하는 것은 이치상 이루어질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유위를 떠나 별도의 생 등의 상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경우, 그러한 과실은 없을 것이니, 상 자체가 동일하지 않을뿐더러 보조적인 연[助緣]으로서 차별되어 이치상 시간에 따른 공능의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유위법의 분위(分位,작용하는 상태)는 동일하지 않지만 간략히 세 가지 종류가 있으니, 이를테면
결과를 인기(引起)하는 작용을 아직 획득하지 않은 것[未得]과
지금 막 획득하려고 하는 것[正得]과
이미 소멸한 것[已滅]의 차별이 있기 때문이다.
또한 이러한 온갖 유위법에는 다시 두 가지 종류가 있으니,
작용을 갖는 것(kāritra)과
오로지 본성 그 자체[體]로서만 존재하는 것(svabhāva)이 바로 그것이다.
그리고 전자가 바로 현재라면, 후자는 바로 과거와 미래이다.
나아가 이러한 유위법에는 다시 그 하나하나에 각기 두 종류가 있으니,
이를테면 그것의 공능이 뛰어난 것과 저열한 것이 바로 그것이다.
즉 온갖 유위법으로서 만약 능히 원인[因]이 되어 자신의 결과를 인섭(引攝)하는 것을 일컬어 ‘작용(즉 뛰어난 공능)’이라고 하며,
만약 능히 조건[緣]이 되어 다른 존재의 생기를 섭조(攝助)하는(돕는) 것이면, 이를 일컬어 ‘공능(즉 저열한 공능)’이라고 한다.
[그럴 때] 만약 어떤 개별적인 법이 있어 아직 [자신의] 결과를 인기할 만한 작용을 획득하지 않았을 경우, [그 법은] [자신의] 결과를 인기할 만한 작용을 아직 획득하지 않았거나 막 획득하려고 하거나 이미 소멸한, (다시 말해 미래ㆍ현재ㆍ과거의) 외적 조건[外緣]의 도움[攝助]으로 자신의 일[自事]을 성취하는 것을 돕는 공능인 내적 조건[內緣]을 일으키게 되는데, 이를 생상(生相)이라 이름하는 것이다.
혹은 다시 어떤 법이 있어 결과를 낳는 작용을 지금 막 획득하려고 할 때, 그 때 [그 법은] [자신의] 결과를 인기할 만한 작용을 아직 획득하지 않았거나 막 획득하려고 하거나 이미 소멸한 외적 조건의 도움으로 자신의 일을 성취하는 것을 돕는 공능인 내적 조건을 일으키게 되는데, 이러한 내적 조건이 바로 나머지 세 가지 상이다.
즉 막 생겨나려고 하는 상태[正生位]에서는 ‘생’이 내적 조건이 되어 소생법(所生法)을 일으켜 이미 생겨난 상태[已生位]에 이르게 하니, 이러한 소생법을 일컬어 ‘이미 일어난 것[已起]’이라고 한다.
또한 막 소멸하려고 하는 상태[正滅位]에서는 ‘주’가 내적 조건이 되어 소주법(所住法)을 안주시켜 자신의 결과를 낳고 이미 소멸한 상태[已滅位]에 이르게 하니, 이러한 소주법을 ‘이미 자신의 결과를 능히 낳은 것’이라고 말한다.
또한 막 소멸하려고 하는 상태에서는 ‘멸’이 내적 조건이 되어 소멸법(所滅法)을 괴멸시켜 이미 소멸한 상태[已滅位]에 이르게 하니, 이러한 소멸법을 일컬어 ‘이미 괴멸한 것’이라고 한다.
그리고 이상(異相)도 역시 그러함을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이다.
그런데 유여사는 설하기를
“원인은 요컨대 장소[處]ㆍ3세(世)ㆍ시간ㆍ상태[位]ㆍ반려[伴]에 근거[待]할 때 비로소 능히 결과를 낳기 때문에, [막] 생겨나려고 하는 때와 이미 생겨난 때에 일으키는 작용이 다르다”고 하였다.
이를테면 혹 어떤 원인은 장소에 근거하여 결과를 낳으니, 비는 요컨대 구름이 있는 곳에 근거하여 비로소 생겨나며, 섬부주(贍部洲)의 유정은 요컨대 금강좌(金剛座)에 처하여 비로소 무상정등보리(無上正等菩提)를 증득하는 것과 같다.
혹은 다시 어떤 원인은 3세에 근거하여 결과를 낳으니, 이를테면 이숙인이나 순해탈분과 같은 것은 요컨대 과거세에 존재할 때 비로소 능히 결과를 낳을 수 있는 것이다.
혹은 다시 어떤 원인은 시간에 근거하여 결과를 낳으니, 이를테면 전륜왕의 업과 같은 것은 요컨대 겁(劫)이 더해질 때 비로소 능히 전륜왕의 지위를 획득할 수 있는 것이다.
혹은 다시 어떤 원인은 상태에 근거하여 결과를 낳으니, 이를테면 온갖 종자는 그것이 변이한 상태에 이르러 비로소 능히 싹을 낳을 수 있으며, 첫 번째 무루심(고법지인)이나 광명 등은 본성 그 자체[體]가 비록 이전에 존재하였을지라도 요컨대 막 생겨나려고 하는 미래 상태[正生位] 중에서만 능히 작용하는 바가 있을 수 있는 것이다.
혹은 다시 어떤 원인은 반려에 근거하여 결과를 낳으니, 이를테면 온갖 대종이나 심ㆍ심소 등은 요컨대 그 반려와 함께 하여야 능히 작용하는 바가 있을 수 있는 것이다.
곧 이 같이 차별적인 연기의 올바른 이치에 따라 4상이 작용을 일으키는 상태[分位]는 동일하지 않다. 이를테면 막 생겨나려고 할 때[正生時]에는 생상(生相)이 작용을 일으키며, 이미 생겨난 상태[已生位]에 이르면 주ㆍ이ㆍ멸 세 가지가 다 같이 일시에 각기 개별적인 작용을 일으키는 것이다. 이와 같이 4상이 작용하는 시간이 이미 다르므로 어떠한 법도 동일한 시간에 생겨나고 머물고 변이하고 소멸하는 과실은 없는 것이다.
또한 막 소멸하려고 할 때[正滅時], 이러한 소상법은 그 밖의 또 다른 상인 주상(住相)을 두드러진 원인으로 삼기 때문에 잠시 안주하여 능히 자신의 결과를 낳으며,
바로 그 때 또 다른 상인 이상(異相)을 두드러진 원인으로 삼기 때문에 그것(결과를 낳는 작용)은 쇠퇴 변이하게 되고,
또한 바로 그 때 또 다른 상인 멸상(滅相)을 두드러진 원인으로 삼기 때문에 그것이 괴멸하게 된다. 따라서 세 가지 상이 일시에 [존재할지라도] 서로 모순되는 과실은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 때 그와 같은 법(즉 所相法)을 안주(安住)하는 것이라고 말해야 할 것인가, 쇠이(衰異)하는 것이라고 말해야 할 것인가, 괴멸(壞滅)하는 것이라고 말해야 할 것인가?”2)
능상(能相,즉 주ㆍ이ㆍ멸상)의 힘(작용)은 동일한 시간 중이라도 소상법과 관계하는 바[所望]가 같지 않기 때문에 세 가지 의미를 모두 갖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상(異相)은 무엇인가?
[이상이란 제행이] 머무를 때 능히 자신의 결과를 인기하는 작용(즉 ‘住’)을 쇠퇴 감손시키는 것이다.3)
즉 그러한 작용을 감손시켜 후 찰나의 결과[後果]가 낳아지는 상태에서는 전 찰나의 원인[前因]이 저열해지는데, 이것은 바로 이상의 힘이다.
따라서 결과가 [낳아지는 상태가] 점차 저열해지는 것은 [전 찰나의] 원인에 변이[異]가 있었기 때문이다.
나아가 이러한 결과의 [찰나] 다시 [결과와] 함께 일어난 [또 다른] 이상(異相)이 조건이 됨에 따라 [그와 같은 결과를] 쇠퇴하고 감손하게 하며, 따라서 그것은 다시 능히 후 찰나의 결과를 점차 저열하게 만드는 조건이 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일체의 유위의 상속은 찰나찰나에 걸쳐 후후(後後) 찰나를 달리하니, 그래서 전전(前前) 찰나에 이상(異相)이 존재한다는 사실은 성립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이상의] 뜻이 이미 성립하였으니,
‘최후 찰나에 차별이 있음을 관찰하였기 때문에 앞의 모든 찰나에서도 결정코 차별이 존재한다’고 마땅히 추리[比量]할 수 있는 것이다.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찰나의] 상속이 점차로 증장할 때 이상은 마땅히 존재하지 않아야 할 것이니, [감손 쇠퇴의] 결과를 관찰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와 같은 과실은 없으니, 그 때(상속이 점차 증장할 때) 주상은 외적 조건[外緣]의 도움으로 그 세력이 증강되어 이상을 억제하여 숨겼을 뿐이기 때문이다.
④ 생(生) 등의 상과 인연의 관계
만약 ‘생’이 미래 [상태]로 있으면서 소생법(所生法) 즉 생겨나야 할 법을 낳는 것이라면, 미래의 일체의 법은 어째서 단박[頓]에 생겨나지 않는 것인가?
그것(소생법)은 능히 그것을 낳는 원인[能生因]과 항상 화합해야 하기 때문으로, 이에 대해서는 앞에서 이미 분별하였다.
앞에서 어떻게 분별하였던 것인가?
이를테면 혹 어떤 개별적인 법이 있어 아직 [자신의] 결과를 인기할 만한 작용을 획득하지 않았을 경우, [그 법은] [자신의] 결과를 인기할 만한 작용을 아직 획득하지 않았거나 막 획득하려고 하거나 이미 소멸한, (다시 말해 미래ㆍ현재ㆍ과거의) 외적 조건[外緣]의 도움[攝助]으로 자신의 일[自事]을 성취하는 것을 돕는 공능인 내적 조건[內緣]을 일으키게 되는데, 이를 생상(生相)이라 이름한다고 하였다.
또한 “원인은 요컨대 장소[處]ㆍ3세(世)ㆍ시간ㆍ상태[位]ㆍ반려[伴]에 근거[待]할 때 비로소 능히 결과를 낳기 때문이다”고 말하기도 하였다.
바로 이러한 뜻에 근거하여 이와 같은 말을 설하게 되었던 것이다.
게송으로 말하겠다.
‘생’은 능히 소생법을 낳지만
인연과의 화합을 떠나서는 낳지 않는다.
논하여 말하겠다.
그 밖의 다른 인연(因緣)과의 화합을 떠나 오직 생상의 힘만으로는 소생법 즉 생겨나야 할 법을 능히 낳을 수 없기 때문에 온갖 미래법이 모두 단박에 일어나는 것은 아니다.
즉 생상은 비록 [소생법과] 동시 생기하는 직접적인 원인[近因]이 되어 능히 소생법을 낳을지라도, 제 유위법은 반드시 전 찰나의 자기존재로서의 원인[自類因]과, 그리고 그 밖의 외적 조건[外緣]과 화합하여 그것들의 도움을 받아야 하니, 이를테면 씨앗과 땅 등의 차별적인 인연이 싹 등의 ‘생’을 도와 싹 등을 낳게 하는 것과 같다.4)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우리(즉 經部師를 말함)들은 오로지 인연이 ‘생’의 공능을 갖는 것으로 간주할 것이다.
즉 생상이 별도로 존재하지 않더라도 인연과 화합하기만 하면 제법은 바로 생겨날 것이며, 화합하지 않으면 바로 생겨나지 않을 것인데, 무엇 때문에 수고스럽게 생상을 설정할 것인가?
따라서 오로지 인연의 힘만 갖추어지면 [제법은] 마땅히 생겨나야 하는 것이다.
이러한 힐책은 옳지 못하니, [그대들처럼] 오로지 중연(衆緣)에 의해 제법이 낳아진다는 사실만을 인정하더라도 동일하게 힐책될 수 있기 때문이다.
즉 만약 오로지 ‘미래의 제법은 인연이 화합하면 생겨날 수 있다’는 사실만을 인정한다면, 이 역시 동일하게 힐책되어야 할 것이니, 미래 제법의 인연은 [생기 순서상의] 어떠한 차별도 없는 것인데, 어찌 단박에 생겨나지 않는 것인가?
또한 인연 중의 어느 한 가지를 결여하더라도 그 밖의 인연을 갖추었기 때문에 결과 역시 마땅히 생겨나야 할 것이다.5)
그럴 경우 가령 안근과 같은 것은 선행한 업에 의해 인기(引起)되는 것이므로 비록 대종을 떠나서도 역시 마땅히 생겨나야 한다. 혹은 선행된 업에 의하지 않고 다만 대종의 공력(功力)만에 의해서도 안근은 생겨날 수 있어야 한다.
혹은 모든 안근은 업에 따라 인기된 것으로, 능히 대종을 낳아 그것과 화합하지 않는 때가 없으므로 하나의 안근이 생겨날 때 다른 안근도 역시 마땅히 일어나야 한다.6)
혹은 대종은 안근에 대해 어떠한 능력도 없어야 할 것이니, 전 찰나의 안근을 떠나 대종이 홀로 [안근을] 낳는 일은 관찰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약 다만 전 찰나의 안근에 의해 후 찰나의 안근이 생겨나는 것일 뿐이라면, 대종이 능히 [안근을] 낳는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무런 쓸모도 없는 말이 되어야 한다.
또한 종자의 경우, 물이나 흙 등의 조건 중 어느 하나라도 결여될 때 싹은 필시 생겨나지 않지만, 종자 등의 공력(功力)은 상식적으로 알 수 있다.
그러나 안 등이 생겨날 때, 지(地) 등의 대종이 갖는 능생(能生)의 공력은 바로 관찰[現見]되지 않는다. 따라서 마땅히 바로 관찰되지 않은 대종의 공력이 원인이 되어 안근 등을 낳는다고 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또한 그대는 ‘업의 종자(種子)가 있어 상속 전변한다’고 주장하는데, 그럴 경우 무엇이 장애하여 일체의 업의 과보를 능히 단박에 낳지 않는 것인가?7)
만약 중연의 도움에 의해 업의 종자가 비로소 능히 [과보를] 낳는 것이라고 한다면, 이는 다만 연이 능히 낳는 것이라고 해야 하거늘 무엇 때문에 수고스럽게 업의 종자를 설정하는 것인가? 즉 중연이 업을 도와 결과를 낳은 것이니, 만약 중연이 없었다면 결과는 생겨나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약] 이미 중연의 도움에 힘입었더라도 업의 종자가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니라고 한다면, 비록 중연을 갖추어야 할지라도 어찌 생상의 존재를 부정할 수 있을 것인가?
또한 안(眼) 등의 온갖 식(識)이 생겨나는 경우에 대해
“비록 안(眼)과 색(色)이 존재할지라도 만약 작의(作意)를 떠나 안식은 생겨나지 않는다”고 계경 곳곳에서 말하고 있음에도
[경에서는 다만]
“안식은 안과 색을 연으로 하여 생겨난다”고 설하고 있다.
따라서 마땅히 ‘[제법은] 인연의 힘만으로 생겨나는 것인데, 무엇 때문에 수고스럽게 생상을 설정할 것인가?’라고 힐난하지 말아야 하는 것이다.
또한 첫 찰나[初念]의 무루도가 생겨날 때를 살펴볼 것 같으면, ‘생’이 능히 원인이 되어 무루의 득(得)을 일으키는데, 득의 자상이 실유라는 것에 대해서는 앞에서 이미 잘 성립시켰다. 그럴 때 ‘생’을 배제하고 어떠한 별도의 법이 있어 능히 이러한 무루득의 전 찰나의 구기인(俱起因)이 된다고 설할 것인가?
만약 그러한 원인은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고 한다면, 득은 마땅히 일어나지 않아야 할 것이며, 그럴 경우 첫 찰나의 무루도가 성취되었다고 마땅히 설해서도 안 되는 것이다.
생상이 생겨날 때에도 역시 별도의 구생인(俱生因)이 있어야 하는 것인가, 그렇지 않아도 되는 것인가?
마땅히 역시 있어야 한다고 말해야 할 것이니, 이를테면 ‘생’ 자체를 제외한 그 밖의 결과가 동일한 법(다시 말해 동일한 결과를 낳는 법)이 바로 그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이(異)와 멸(滅)을 ‘생’의 보조적 원인[助因]이라 하겠는가?8)
옛날의 여러 스승[古昔諸師]들은 모두 이와 같이 해석하였다.
“동일한 결과를 낳는 법은 전전(展轉)하며 [서로] 원인이 되기 때문으로, 예컨대 온갖 대종이 서로가 서로를 따르는 것과 같다.”
다시 어떤 이는 해석하여 말하기를
“모든 유위법은 일체가 모두 바로 생[멸]하는 등의 존재[性]이기 때문에 ‘생’ 등의 4상 하나하나가 작용할 때, 이를 근거[門]로 하여 그 밖의 다른 [세 가지] 법은 모두 보조적인 힘[助力]이 된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앞에서] 설한 ‘생은 소생법을 낳지만 인연[과의 화합]을 떠나서는 낳지 않는다’고 한 이치는 잘 성립되는 것이다.
이 밖의 제 유위상에 대해 널리 결택해 보아야 할 것은 『순정리론』(제13~14권)과 『오사론(五事論)』의 해석에서와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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