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생명체와 인식의 문제
이 세계에는 다양한 인식 주체들이 있다.
이러한 인식 주체들의 인식 기관의 차이와 더불어, 몸의 크기와 모양, 사는 곳의 차이 등에 따라 그들은 각기 다른 방식으로 다른 세상을 본다. 곧 어떤 인식 주체가 세상을 바라볼 때, 그들을 중심으로 바라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동일한 것이라 생각되는 사물이나 일들도 사실은 인식 주체에 따라 그것의 빛깔이나 모양 등의 성질이 제 각각으로 인식할 수 밖에 없다. 예컨대 안 또는 바깥, 밝거나 어두음, 크거나 작음, 길거나 짧음, 많거나 적음, 높거나 낮음, 넓거나 좁음, 두껍거나 얇음, 무겁거나 가벼움, 거칠거나 부드러움, 멀거나 가까움, 모이거나 흩어짐, 생겨나거나 없어짐, 늘어나거나 줄어짐, 깨끗하거나 더러움, 아름답거나 추함, 같거나 다름, 있거나 없음, 가거나 옴, 들어가거나 나옴 등의 모든 것들이 인식 주체에 따라 다를 수밖에 없다.
인식에는 시간도 영향을 미친다.
모든 것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끊임없이 변화한다. 그런데 이러한 시간에 대한 인식은 인식 주체의 상황과 연관되어 있다. 예컨대 객관적으로는 동일한 길이의 시간일지라도 인식 주체의 상황에 따라 길거나 짧게 느껴진다.
또 시간의 길이는 인식 주체의 수명에 따라 달리 느껴질 것이다. 예컨대 하루살이와 몇 십 년을 사는 생명체가 느끼는 시간은 다를 수박에 없을 것이다. 나아가 백년을 살지 못하는 인간이 느끼는 시간은 몇 백 년이나 몇 천 년, 또는 그보다 휠씬 오래 사는 생명체가 느끼는 시간과 다를 것이다.
인식 주체둘이 관찰할 수 있는 시간에 따른 변화도 그들이 처한 상황과 수명에 다라 당연히 달라질 수밖에 없다.
인식 주체의 처지에서 보면, 어떤 변화가 너무 짧은 시간 동안에 일어나기 때문에 그러한 변화를 관찰하기 어려운 경우도 있다. 또 거꾸로 너무 긴 시간 동안에 일어나기 때문에 그러한 변화를 알아차리기 어려운 경우도 있다.
또 객관적으로는 동일한 길이의 시간에 일어난 일이라 할지라도, 수명의 차이로 말미앟아, 어떤 인식 주에는 충분히 관찰할 수 있으나, 어떤 인식 주체는 관찰하지 못할 수도 있다.
우리는 아주 짧은 시간 동안에 일어나는 변화도 있고, 아주 긴 시간 동안에 천천히 일어나는 변화도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렇지만 사실은 그러한 변화의 차이는 인식 주체의 수명에 따라 달라질 수도 있다는 것을 알 수 있겠다
여기서 생각해 볼 두 가지 문제가 있다.
하나는 인식의 대상에 관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인식의 주체에 관한 것이다.
2. 인식의 대상, 공
여기서 우리가 알고 있는 세계에 관한 지식의 속성을 생각해 보자.
앞에서 말한 것은 세계와 그 구성요소들에 관한 모든 지식은 인간의 인식을 거쳐 형성된 것이라는 것이다.
간단히 말하면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다.
인식 이전의 세계는 결정된 것이 아무것도 없다.
세계와 그 구성요소들의 모습은 인식 주체의 인식 과정을 통하여 비로소 결정된다.
불교에서 말하는 ‘공’은 인간이 인식하기 이전의 세계와 유사한 개념이다.
공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가리키는 말이다.
그렇지만 이것은 인식 이전에는 인식의 대상인 어떤 물질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인식 이전에도 존재하는 무언인가가 있겠지만, 빛깔이나 모양과 같은 어떤 고유한 성질을 가지면서 분리된 상태로 존재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우리가 그 무엇인가를 인식함으로써 비로소 어떤 사물의 존재를 알게 된다.
에컨대 말을 하는 최초의 인간이 맨 처음으로 어떤 사물의 존재를 알게 되는 순간을 상상해 본다고 하자.
그는 무언가를 바라보면서 먼저 빛깔과 모양 등의 차이로 드러나는 것들을 분리하여 인식하고는, 그것들에 빛깔과 모양 등의 차이를 드러내는 일정한 이름을 부여한다. 그것에 익숙해딘 다음에는 사람들은 어떤 이름을 가진 어떤 사물이 어떤 빛깔로 모양 등의 성질을 가졌다고 말한다.
따라서 우리가 경험하는 어떤 빛깔과 모양, 소리, 냄새, 맛, 감촉, 현상[법]들은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들은 우리의 눈과 귀, 코, 혀, 몸, 마음에 비친, 곧 인간이 인식함으로써 생겨난 것들이다.
요컨대, 인식 주체의 인식 이전에는 다른 사물과 분리되고 고유한 성질을 가진 어떤 사물도 없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생각은 불교의 ‘공’과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다.
불교의 공의 세계는 인식 이전의 세계의 상태를 가리키는 것이라고 생각해 볼 수도 있겠다.
우리가 일상적으로 알고 경험하는 세계는 공의 세계가 아니다. 그 세계는 인간의 인식으로 말미암아 어떤 방향으로 결정된 세계이디. 불교에서는 이러한 세계를 세속의 세계라고 한다. 일상적인 용어로는 경험의 세계라고 할 수 있겠다.
불교에서는 우리의 경험적 세계는 잘못된 생각으로 빚어진 고통으로 가득한 세계로 본다.
그리고 그러한 경험의 세계를 벗어나서 공의 세계에 도달하기를 추구한다.
3. 인식의 주체, 비아/무아
인식의 주체인 인간도 세계의 다른 사물들과 마찬가지로 인간의 인식에 의하여 규정된 존재이다. 인간의 눈, 귀, 코, 혀, 몸, 마음도 인간의 인식 대상으로 보면 사물의 한 부분이기 때문이다. 곧 인간의 눈, 귀, 코, 혀, 몸, 마음도 어떤 다른 인간의 눈, 귀, 코, 혀, 몸, 마음에 비친 어떤 사물로 인식된다는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개별적인 인식 주체와 이 세계의 모든 인식 주체들의 관계를 다음과 같이 생각해 볼 수 있겠다.
개체의 눈, 귀, 코, 혀, 몸, 마음[뜻]은 무수한 유정 개체들이 가진 무수한 인식 기관들의 하나이다.
개체가 인식하는 빛깔과 모양, 소리, 냄새, 맛, 감촉, 법[현상]은 무수한 유정 개체들이 인식하는 무수한 것들의 하나이다.
그리고 끝없는 땅, 물, 불, 불, 허공이 있고, 그 한 부분들을 유정 개체들이 나누어 가지고 있다.
무수한 유정 개체들은 무수한 인식 기관들의 하나를 가지고 있으며. 또 그들이 인식한 무수한 빛깔과 모양, 소리, 냄새, 맛, 감촉, 법의 한 부분을 나누어 가지고 있다.
이상을 아주 거칠게 간추린다면, 다음과 같이 정리해 볼 수도 있겠다.
세상은 모든 인식 주체들의 몸과 마음과 인식의 흐름이며, 개별적 인식 주체들의 몸과 마음과 인식도 그 흐름의 한 부분이다.
그렇다면 나는 무엇인가?
만일 윤회의 관점에서 본다면, 나라는 존재는 인식 주체들의 몸과 마음과 인식의 흐름 속에서 과거에 있었거나 지금 있거나 앞으로 있을 다른 많은 인식 주체들의 집합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러므로 내가 한 개체로서 과거나 현재에 보고 듣고 냄새를 맡고 맛을 보고 몸으로 느끼고 마음으로 아는 모든 것들은 아주 작은 것들이다. 미래에 겪을 것돌도 마찬가지이다.
나의 몸과 마음과 인식이 그 좁고 작은 것에 갇혀 있기에, 아주 조그마한 가시에 찔려도 온 몸과 마음이 다 아프다.
그러한 아픔에서 벗어나려면, 좁고 작은 몸과 마음과 인식을 벗어나야 한다.
사실 인간의 눈, 귀, 코, 혀, 몸, 마음도 세계의 다른 사물들과 마찬가지로 모두 공한 것이다.
그것들은 본래 공한 것이니, 애초부터 무엇이라고 말할 것이 없다.
내가 지금 나라고 알고 있는 것은 몸과 마음과 인식의 흐름에서 순간순간 나타났다 사라지는 것들인데, 인간이 그것을 인식하여 ‘나’라고 이름붙인 것일 뿐이다.
이를 불교에서는 비아(非我)나 무아(無我)라고 한다.
그것들은 나라고 할 수 없으며, 나가 아니다. 곧 비아이다.
그것들에는 나라고 할 만한 것이 없다. 곧 무아이다.
그러니 나, 나의 인식, 나의 느낌, 나의 생각, 나의 의도와 행위 등은 나도 아니고 내 것도 아니니, 그것에 더 이상 집착해서는 안 된다.
그리고 우리가 일상적인 경험의 세계에 갇혀 있는 몸과 마음을 열고, 끝없는 허공이나 하늘처럼 넓고 큰 몸과 마음과 인식을 얻어야 한다.
4. 세계관의 문제
인간을 비롯한 인식 주체들은 비교적 비슷한 상황이나 수명을 공유하는 개체들은 비슷한 방식으로 인식할 것이다. 예컨대 인간은 인간대로, 돌고래는 돌고래대로, 사자는 사자대로, 참새는 참새대로, 매뚜기는 메뚜기대로, 개미는 개미대로, 뱀은 뱀대로, 물고기는 물고기대로, 소라는 소라대로 등등으로 말이다.
그런데 동일한 부류의 종이라 할지라도, 또 개벌적 상황 등의 여러 차이들에 따라 인식이 방식이 다양하게 달라질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어떤 인식 주체들 알고 있는 세상은 그들이 바라본 세상이다.
전체 인식 주체의 처지에서 보면, 세계는 수없이 다양한 인식 주체들이 인식한 세계들의 집합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개별적인 인식 주체가 바라보는 세상은 수많은 인식 주체들이 바라보는 수많은 세상 가운데 아주 작은 한 부분일 뿐이다.
세상의 모든 유정 개체들은 그렇게 세상을 바라보고 살아간다.
그것은 유정 개체의 한계이며, 숙명이다.
인식 주체들에 따라 달리 인식된 그러한 세계들은 분리되어 있는데, 그 세계들은 공유하는 정보의 정도에 따라 다양한 차이들이 있을 것이다. 어떤 세계들의 인식 주체들은 다른 세계의 인식 주체들과 비교적 소통하기가 쉬운 경우도 있고, 소통하기가 매우 어려운 경우도 있으며, 아예 소통이 되지 않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인식 주체들에 따라 달리 인식된 그러한 세계들은 분리되어 있는데, 그 세계들은 공유하는 정보의 정도에 따라 다양한 차이들이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 세계들은 어떤 세계가 더 낫다거나 더 못하다거나 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렇게 판단할 기준을 세울 수 없기 때문이다.
물론 우리는 보통 인간 세계가 동물 세계보다는 더 낫고, 인간 세계 중에서도 이전의 세계보다는 지금의 세계가 더 낫고, 어떤 문명이 다른 어떤 문명보다 낫다 등으로 생각한다. 그렇지만 그렇게 말할 만한 객관적인 근거는 없다.
만일 지금 그렇게 생각단다면, 그런 생각은 기본적으로는 인간 중심의 생각에 기초한 것이며, 또 지구 어느 한쪽의 사람들의 가치관이 그렇다는 것이지, 어떤 절대적인 기준에 따라 그렇게 분류된 것은 아니다.
물론 이러한 세계관의 차이를 관찰할 때 보편적 가치와 개별적 가치의 문제도 있을 수 있다. 이 문제도 매우 중요한 것이지만, 여기서는 더이상 말하기 어려운 문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