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강반야바라밀경론 중권
14. 인욕바라밀, 머무는 곳이 없는 마음, 중생은 중생이 아니다
【經】
“수보리야, 여래께서 말씀하신 인욕바라밀(忍辱波羅蜜)은 곧 인욕바라밀이 아니니라.
왜냐하면 수보리야, 내가 옛날에 가리왕(歌利王)에 의해 온몸이 분해되고 잘려진 일이 있었다.
나는 그때에 나라는 모습이 없었고, 남이라는 모습도 없었으며, 중생이라는 모습도 없었고, 오래 산다는 모습도 없었으며, 어떤 모습이나 모습 아닌 것도 없었느니라.
왜냐하면 수보리야, 내가 지난 옛날 마디마디와 사지가 분해될 때에 만약 나라는 모습ㆍ남이라는 모습ㆍ중생이라는 모습ㆍ오래 산다는 모습이 있었다면 틀림없이 노여움과 원한이 생겼을 것이다.
수보리야, 또 기억해 보건대 과거에 5백 세(世) 동안 인욕선인(忍辱仙人)이 되었었는데, 그때 그 장소에서도 나라는 모습ㆍ남이라는 모습ㆍ중생이라는 모습ㆍ오래 산다는 모습이 없었느니라.
그러므로 수보리야, 보살은 마땅히 일체의 모양을 여의고 아뇩다라삼먁삼보리(阿耨多羅三藐三菩提)의 마음을 내야 하느니라.
왜냐하면 마음에 머무름이 있다면 곧 머무르지 않게 해야 하니, 물질에 머무르지 않고 마음을 내야 하고, 소리ㆍ냄새ㆍ맛ㆍ촉감ㆍ법에도 머무르지 않고 마음을 내야 하느니라.
그리하여 마땅히 머무는 곳이 없는 마음을 내야 하느니라.
그런 까닭에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보살은 마음이 물질에 머무르지 않고 보시해야 한다’라고 하셨느니라.
수보리야, 보살은 모든 중생들을 이롭게 하기 위하여 마땅히 이와 같이 보시를 하여야 하느니라.”
수보리가 말하였다.
“세존이시여, 일체 중생의 모습은 곧 모습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여래께서는 일체의 중생은 곧 중생이 아니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論】
이것은 무슨 뜻을 나타낸 것인가?
게송으로 말하리라.
능히 고행(苦行)을 참아낼 적에
고행을 훌륭한 일이라 생각하면
그 복은 헤아릴 수 없으니
이와 같은 가장 훌륭한 뜻이 있다.
나라는 모습과 성내는 모습 여의었기 때문에
진실로 고뇌(苦惱) 없었으니
즐거움을 같이하고 자비 있었기에
괴로움을 행한 결과가 이와 같다.
이 두 게송은 무슨 뜻을 말한 것인가?
비록 이 고행이 고행의 결과와 함께 한다 하더라도 이 고행은 고되지 않다.
그런 까닭에 찬제바라밀(羼提波羅蜜)이 제일이라고 말한 것이다.
피안(彼岸)에 두 가지 뜻이 있으니,
첫째, 바라밀은 청정한 선근(善根)의 바탕이요,
둘째, 피안의 공덕을 헤아릴 수 없는 것이니,
경에서 “이것은 곧 바라밀이 아니다”라고 한 것과 같다.
‘바라밀이 아니다’라는 것은 어떤 사람도 저 피안의 공덕을 알 수 없기 때문에 바라밀이 아니라고 말한 것이다.
그러므로 제일가는 법을 얻게 되는 것이니, 이 고행이 저 몸을 버려 희사하는 것보다 뛰어난 것인데 더구나 나라는 모습과 진에(瞋恚)의 모습을 여읜 것이야 더 말할 필요가 있겠는가?
또 이 행(行)엔 괴로움이 없으니 비단 괴로움이 없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즐거움이 있었으니 이것은 자비의 마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마치 경에서
“나는 그때 나라는 모습이 없었고 나아가 모습이라는 것도 없었으며, 모습이 아니라고 하는 것도 없었다”라고 한 것과 같다.
이것은 자비의 마음이 서로 호응하기 때문에 이와 같이 말한 것임을 밝힌 것이다.
만약 어떤 보살이 나라는 모습 따위를 여의지 못한다면 그 보살은 고행의 괴로움을 보고, 또한 보리의 마음을 버리려고 할 것이기 때문에 그를 위해 일부러 그렇게 말한 것이니,
경에서
“그러므로 수보리야, 보살은 마땅히 일체의 모습 따위를 여의어야 한다”라고 한 것과 같다.
이것은 무슨 뜻을 밝힌 것인가?
어떤 사람이 제일가는 보리의 마음을 내지 못한다면 이와 같은 허물이 있을 것이므로 이 허물을 방지하기 위해서이다.
게송으로 말하리라.
보리를 버리지 않는 마음을 일으키려면
견고하고 수행해야 하나니
인욕바라밀을 행함으로써
저 능히 배우는 마음을 익힐 수 있다.
이 게송의 뜻은 무엇인가?
어떠한 마음을 일으키는 인식작용으로 수행을 해야 하며, 어떠한 마음이 보리를 버리지 않는 모습인가?
게송에 이르기를
“인욕바라밀을 행함으로써 저 능히 배우는 마음을 익힐 수 있다”라고 하였다.
‘또 제일의(第一義)의 마음이라’라고 한 것은 이미 초지(初地)에 들어가서 찬제바라밀(羼提波羅蜜:忍辱波羅蜜)을 얻었기 때문이니,
이것을 머무르지 않는 마음[不住心]이라고 한다.
경에서
“그러므로 수보리야, 보살은 마땅히 일체의 모양을 여의고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의 마음을 일으켜야 하느니라”라고 하였다.
무슨 까닭인가?
이것은 머무르지 않는 마음이 생겨나는 이치를 보여준 것이다.
만약 마음이 물질 따위의 법(法)에 머무른다면 그 마음은 틀림없이 불보리(佛菩提)에 머물지 않기 때문이다.
이것은 머무르지 않는 마음으로 보시를 행해야 한다는 것을 밝힌 것이다.
이 경문에서
“머무르지 않는 마음을 일으켜 방편을 행한다”라고 설한 것은
단(檀:布施)바라밀이 여섯 가지 바라밀을 포섭하고 있음을 말한 것이다.
‘어떻게 하는 것이 중생을 이롭게 하기 위한 수행이며, 또한 중생의 일에 머물지 않는 것인가?’라는,
이와 같은 의심을 끊게 하기 위하여 경에서
“수보리야, 보살은 모든 중생들을 이롭게 하기 위하여 마땅히 이와 같이 보시를 해야 하느니라”라고 한 것이다.
이것은 무슨 뜻을 밝히려는 것인가?
게송으로 말하리라.
수행은 중생을 이롭게 하나니
이와 같은 원인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
중생과 일의 모습에 대하여
멀리 여의어야 한다는 것도 반드시 알아야 한다.
이 게송의 뜻은 어떤 것인가?
보살의 수행은 이익을 주는 원인이요 바탕이 되기 때문에 그가 수행을 하여 중생을 이롭게 하지만, 중생의 모습이나 중생을 위한 일이라는 것에 집착해서도 안 되기 때문임을 나타낸 것이다.
어떤 것이 중생의 일인가?
게송으로 말하리라.
임시로 붙여진 이름과 5음(陰)의 일이니
여래는 그러한 모습을 여읜다
모든 부처님은 저런 두 가지가 없기에
진실한 법을 볼 수 있다.
이 게송의 뜻은 무엇인가?
중생과 그 5음의 일을 모습이라고 말하였다.
그는 어떤 것을 수행하여 중생의 일과 모습을 멀리 여읜다고 하는가?
곧 저 모습이라고 이름 붙인 모습은 모습이 아니니, 그것은 실체(實體)가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뜻이 있기 때문에 중생은 곧 중생이 아니라고 한 것인데, 어떠한 법으로써 5음(蔭)을 중생이라고 일컬었는가?
저 5음엔 중생의 실체가 없으니, 실상이 없기 때문에 이와 같이 법에도 나라는 것이 없고 인(人)에도 나라는 것이 없음을 밝힌 것이다.
무슨 까닭에 모든 불ㆍ여래께서는 여러 가지 모습을 멀리 여의셨는가?
이 구절은 저 두 가지 모습이 실상이 아님을 밝힌 것이니,
게송에 이르기를
“여래는 그러한 모습을 여의니 모든 부처님은 저런 두 가지가 없으므로 실상의 법을 볼 수 있다”라고 하였다.
이것은 무슨 뜻을 말한 것인가?
만약 저 두 가지가 실제로 존재하는 것이라면, 모든 불ㆍ여래께서는 마땅히 저 두 가지 모습이 있다고 하셨을 것이다.
왜냐하면 모든 불ㆍ여래는 실상을 보시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