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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살선계경 제6권
1.17. 공양삼보품(供養三寶品)
어떤 것을 일러 보살마하살이 여래를 공양한다 하는가?
여래를 공양하는 데에는 모두 열 가지가 있다.
첫째는 색신(色身)을 공양하는 것이고,
둘째는 탑(塔)을 공양하는 것이며,
셋째는 현견(現見)공양이고,
넷째는 불현견(不現見)공양이며,
다섯째는 자(自)공양이고,
여섯째는 타(他)공양이며,
일곱째는 이익(利益)공양이고,
여덟째는 최승(最勝)공양이며,
아홉째는 청정(淸淨)공양이고,
열째는 수지(受持)공양이다.
색신을 공양한다는 것은 보살마하살이 부처님의 색신을 보고 공양하는 것이다.
이것을 색신을 공양한다고 한다.
탑을 공양한다는 것은 만일 보살마하살이 여래를 위하여 탑묘(塔廟)를 짓고 불상과 불감(佛龕)과 석굴(石窟)을 만들었을 경우, 헐고 낡은 탑은 보수하고, 새 탑에는 꽃과 향을 공양하는 것이다.
이것을 탑에 공양한다고 한다.
현견(現見)공양이란 보살마하살이 만일 여래의 형상이 현상(現像)함을 보았을 경우, 마치 현실에 부처님을 보듯이 하는 것이다. 시방의 부처님을 보았을 때도 또한 이와 같다.
이것을 현견공양이라 한다.
불현견공양이란 보살마하살이 만일 현재의 모든 부처와 부처의 탑묘에 공양하여 믿고 이해하는 마음[信解心]을 얻을 경우, 지금 현재 보는 것에 대하여 이처럼 공양하면 역시 과거와 미래의 부처에게도 공양하는 것이다.
무엇 때문인가? 모든 여래는 동일한 법성(法性)이기 때문이다.
이러하기 때문에 과거와 미래의 모든 부처에게 공양하는 것이 된다.
만일 현재의 불탑(佛塔)에 공양할 경우 과거와 미래의 불탑에도 역시 공양하는 것이다.
어째서인가? 이러한 모든 불탑은 동일한 법성이기 때문이다.
만일 하나의 부처에 공양하면 이미 시방의 모든 부처에게 공양한 것이며,
만일 하나의 불탑에 공양하면 이미 시방의 불탑에 공양한 것이다.
불감과 석굴을 만들고, 낡은 탑을 보수하고, 불탑에 공양할 때도 역시 이와 같다.
이것을 불현견공양이라 한다.
또 불현견공양이란 만일 부처를 보지 못하고 불탑을 보지 못하더라도 마음속으로
‘이것이 여래이며 이것이 불탑이다’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모든 부처와 모든 탑과 모든 굴과 모든 상(像)에 대해서도 또한 이와 같다.
이것을 불현견공양이라 한다.
불현견공양이 또 있으니, 보살이 부처님께서 열반하신 뒤에 여래를 위하여 탑묘를 세우거나 감굴(龕窟)을 만들거나 하는 것이다.
하나, 둘 또는 한량없는 수를 지을 수 있는 대로 능력에 따라 짓는다.
이것을 불현견공양이라 한다.
이렇게 하면 복덕의 과보가 한량이 없으며 한량없는 범복덕과(梵福德果)를 섭취한다.
보살하마살은 이런 인연으로 해서 무량겁을 통해 악취(惡趣)에 떨어지지 않으며, 또한 능히 보리의 도를 장엄한다.
보살마하살이 삼보(三寶)를 실제로 보지 않고 공양을 베푸는 것이 실제로 보고 베푸는 공양보다 나아서 이를 헤아리거나 비교할 수가 없고 얻은 과보도 말로는 설명할 수가 없다.
어리석은 자는 직접 본 뒤에 공양을 베풀지만, 지혜로운 자는 비록 직접 보지 않더라도 능히 공양한다.
이것을 불현견공양이라 한다.
스스로 짓는 공양[自作供養]은 보살마하살이 부처님께 공양하거나 불탑에 공양할 경우 자신이 직접 주관하고 남을 시키지 않는 것이다. 이
것을 자공양(自供養)이라 한다.
타공양(他供養)은 부처나 불탑에 공양을 하려고 할 경우, 많은 사람들을 모아서 서로 어울려서 함께 하고 혼자 하지 않는 것이다.
많은 사람이란 이른바 부모ㆍ처자ㆍ종친(宗親)ㆍ권속ㆍ노비[僮僕], 왕(王)ㆍ신하ㆍ바라문ㆍ장자(長者), 이웃ㆍ아는 사람ㆍ내부인(內部人)ㆍ외부인ㆍ남녀ㆍ가난한 자ㆍ부자인 자ㆍ괴로운 자ㆍ즐거운 자, 스승ㆍ화상(和上), 동사(同師)ㆍ동화상(同和上), 동주(同住)ㆍ동법(同法)ㆍ동학(同學)ㆍ동국(同國)ㆍ동명(同名)ㆍ동성(同姓)과 내지 잘못된 견해를 가진 자 및 전다라(旃陀羅)이다.
이것을 타공양이라 한다.
타공양이 또 있으니, 보살마하살이 재물이 많아서 풍족할 경우, 자비심을 발하여 중생에게 혜시(惠施)하는 것이다. 혜시를 할 때에 이렇게 발원한다.
‘중생들이 가난하여 복덕이 적으니 이제 이 혜시를 받게 되면 나는 응당 권하여 삼보에 공양토록 하겠다. 삼보에 공양한 인연으로 해서 가난을 깨뜨리고 많은 복덕을 받기 바란다.’
이렇게 발원한 뒤 중생에게 혜시하고, 혜시가 끝나면 불보(佛寶)ㆍ법보(法寶)ㆍ승보(僧寶)에 공양하도록 한다.
이것을 타공양이라 한다.
이익공양(利益供養)이란 보살이 부처와 불탑에 의복ㆍ음식ㆍ와구(臥具)ㆍ의약ㆍ방사(房舍)를 받들어 보시하고 공경하고 예배하며, 또한 갖가지 꽃들과 바르는 향ㆍ가루 향ㆍ부스러기 향ㆍ기악(伎樂)ㆍ번기[幡]ㆍ일산[蓋]ㆍ등불을 공양하는 것이다.
또한 여래의 한량없는 공덕을 찬탄하며, 오체(五體)를 땅에 던져 오른쪽으로 세 번 내지는 한량없이 돈다.
그리고는 금ㆍ은ㆍ유리ㆍ수정ㆍ가패(珂貝)ㆍ자거(車渠)ㆍ마노(馬瑙) 및 몸의 영락(瓔珞)ㆍ종령(鍾鈴) 등과 나아가 한 보의 돈, 한 가닥의 실, 한 톨의 쌀알까지 받들어 바친다.
이것을 보살의 이익공양이라 한다.
최승(最勝)공양이란 보살이 부처와 불탑에 베푸는 공양으로 이익공양ㆍ상항(常恒)공양ㆍ호물(好物)공양ㆍ현견(現見)공양ㆍ불현견(不現見)공양ㆍ자(自)공양ㆍ타(他)공양ㆍ지심(至心)공양ㆍ희심(喜心)공양을 지극한 마음으로 참고 즐거워하여 삼보(三寶)에 공양하는 것이다.
이러한 공양으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회향한다.
이것을 최승공양이라 한다.
청정(淸淨)공양이란 보살이 부처와 불탑에 손수 공양하고,
교만과 가벼이 업신여기는[輕賤] 마음으로 남을 시켜 하게 하지 않으며,
방일(放逸)함이 없이 열심히 정진하되 지극한 마음, 청정한 마음으로 하는 것이다.
나라의 임금에게 믿음과 존경이 생기도록 하려는 것이 아니며, 국왕ㆍ대신ㆍ장자ㆍ거사의 공양을 얻으려는 것이 아니며,
자신의 공덕을 드러내기 위해 공양하는 것이 아니다.
지어진 형상(形像)에 대하여 자황(雌黃)ㆍ계란ㆍ나차교(羅差膠)ㆍ기름[油]ㆍ소(酥) 등으로 땅에 바르지 아니하며, 교향(膠香)이나 훈향(薰香)을 태워서 공양하지 아니하며, 파가화(頗迦花) 등도 또한 공양하지 않는다.
모든 냄새나는 꽃은 아무리 빛깔이 좋아도 공양하지 않으며, 기타 갖가지 냄새나고 더러운 물건은 공양하지 않는다.
이러한 여러 가지 공양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을 청정공양이라 한다.
수지(受持)공양이란 보살이 자신의 재산을 내거나 타인에게 구해서 불상과 불탑을 만들되, 하나ㆍ둘 또는 백ㆍ천ㆍ만ㆍ억으로 한량없이 만들며,
그 불상의 하나하나와 불탑의 하나하나에 공경하여 예배하고, 좋은 꽃이나 향, 기악ㆍ등불ㆍ영락ㆍ번기ㆍ일산으로써 공양하는 것이다.
그리고 또한 이러한 공양의 인연으로 해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구하거나 불도(佛道)를 구하지 않는다.
어째서인가? 보살마하살이 불퇴지(不退地)에 머물기 때문이다.
보살이 이처럼 불퇴지에 머물면 모든 불토에서 몸을 받아도 걸림이 없다.
보살마하살이 스스로 재물을 내지 않고 남의 재물을 걸구하지도 않고 이렇게 발원한다.
‘만일 염부제(閻浮提)에 있는 중생이 능히 불보ㆍ법보ㆍ승보에 공양하고, 사천하(四天下)로부터 삼천대천세계와 시방의 한량없고 가이없는 세계에 있는 중생에 이르기까지 상ㆍ중ㆍ하로써 삼보(三寶)에게 공양하면 나는 응당 지극한 마음으로 그 기쁨을 따르겠다.’
또 이렇게 발원한다.
‘이 인연으로 해서 모든 중생이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어 성취하게 하소서.’
이것을 보살이 위없는 보리의 도를 장엄한다고 하며,
이것을 법대로 공양을 짓는다고 한다.
보살마하살이 자심(慈心)을 닦되, 마치 각우경처럼 하며, 비심(悲心)ㆍ희심(喜心)ㆍ사심(捨心)도 역시 그와 같이 한다.
모든 유위(有爲)한 것은 항상함[常]이 없으며, 아(我)가 없으며, 즐거움[樂]이 없으며, 청정함[淨]이 없다.
열반 공덕의 미묘함을 깊이 관찰하여 불(佛)ㆍ법(法)ㆍ승(僧)ㆍ보시[施]ㆍ지계[戒]ㆍ천(天) 등과 나아가 보이지 않는 법계까지의 선설할 수 있는 작은 분상(分相)들을 염(念)한다.
지극한 마음으로 육바라밀을 취향(趣向)하여 행하며, 사섭법(四攝法)으로 중생을 섭취(攝取: 濟度)한다.
이것을 법대로 공양을 짓는다고 한다.
만일 비구가 금탑(金塔)ㆍ금상(金像)ㆍ은탑ㆍ은상과 수정ㆍ진주ㆍ자거(車渠)ㆍ마노ㆍ벽옥(璧玉)으로 만든 불탑과 불상에 공경하여 공양하는 것을 언제나 즐거워하면서 기쁘게 보고,
진흙과 나무로 된 불탑과 불상에 공양하고 공경하는 것을 즐겁게 보지 않는다면,
이런 자는 법대로 공양을 짓는다고 할 수 없다는 것을 알라.
이처럼 법대로 공양을 짓는 것을 더 높을 수 없는 공양[無上供養]이라 하며,
더 나을 수 없는 공양[無勝供養]이라 하며,
가장 높은 공양[最上供養]이라 한다.
이러한 공양은 모든 공양을 능가하여 능히 한량이 없고 더 나을 수 없는 과보[果]를 얻는다.
보살마하살이 삼보에게 공양하는 것은 여섯 가지 이유 때문인데,
첫째는 복전(福田)이 더 나을 수 없기 때문이며,
둘째는 은혜를 알아서 은혜에 보답하려는 때문이며,
셋째는 일족(一足)ㆍ이족(二足)ㆍ다족(多足)ㆍ무족(無足)의 모든 중생보다 낫기 때문이며,
넷째는 우담발화(優曇鉢花) 같은 꽃을 만나기 어렵기 때문이며,
다섯째는 스승이나 화상(和上)이 없이 저절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어 성취하기 때문이며,
여섯은 능히 중생으로 하여금 세간의 낙과 출세간의 낙의 인(因)을 획득하게 하기 때문이다.
법(法)과 승(僧)도 역시 그러하다.
보살이 보살계를 받고자 할 때는 당연히 화상(和上)을 보고 여덟 가지 법[八法]을 갖추었으면 그를 따라 계(戒)를 받는다.
그 첫째는 우바새계(優婆塞戒)와 사미계(沙彌戒)와 대비구계(大比丘戒)를 구족(具足)함이며,
둘째는 능히 공양을 바치는 것이며,
셋째는 계를 지키는 것[持戒]과 계를 훼손하는 것[毁戒]의 양상을 능히 잘 관찰하는 것이며,
넷째는 사마타(舍摩他)와 비바사나(毘婆舍那)를 얻는 것이며,
다섯째는 자비의 마음으로 모든 것을 연민하는 것이며,
여섯째는 능히 자신의 즐거움을 버리고 중생에게 혜시(惠施)하는 것이며,
일곱째는 두려움이 없음이며,
여덟째는 법이 아닌 것은 설하지 않고 법이 아닌 것은 듣지 않으며, 법이 아닌 것을 설하면 나무라고 타이르는 것이다.
능히 비방하고 헐뜯고 때리고 욕하고 괴롭히고 해치고 하는 등의 모든 고통을 참으며, 탐욕스럽고 성내고 어리석은 등의 금계(禁戒)를 허무는 자와 게으른 자를 인내한다.
대중 속에 처하여 법을 설하되 피로하다고 하여 사양하지 않으며, 뜻을 잘못 풀이하지 않고 또한 잘못 말하지도 않는다.
말이 부드러워서 본래 거칠거나 사납지 않으며, 언제나 중생을 생각하여 안락하게 하고자 하며, 의문이 있으면 즉시 묻고 부끄럽거나 창피하게 여기지 않는다.
방편을 잘 알아서 중생을 교화하고, 모든 중생들의 번뇌를 알아서 여기에 대치(對治)한다.
모든 중생에 대하여 마음을 평등하게 가지며, 귀함과 천함이나 높고 낮음에 대한 차별이 없고, 육근(六根)이 구족하고 위의(威儀)가 편안하고 단정하다.
참소하는 말을 믿지 않고 자상하고 청정하게 수행하며, 스스로 자만하여 남을 경멸하지 않고, 이로운 공양이나 외부에의 나타냄이나 아첨과 사곡(邪曲)을 위하지 않는다.
탐착하고 질투하고 아까워하는 마음을 버리고, 만일 자신이 이익을 얻으면 먼저 남에게 미루어 주며, 마음이 항상 여일하여 방일(放逸)함이 없고, 남들이 이익을 얻는 것을 보면 마치 자기 일인 것처럼 기뻐한다.
욕심이 적고 만족함을 알아서 오직 육물(六物)만을 비축하며, 육물 이외에는 생기는 대로 혜시(惠施)한다.
언제나 앞에 있는 이를 권하여 금지하는 것을 범하는 대로 이를 겉으로 드러내게 하고, 억념(憶念)을 보여주어 뉘우치는 법을 잘 알게 한다.
병들고 고통 받는 자를 잘 돌보아 보양(保養)하며, 결코 성문법장(聲聞法藏)이나 보살장의 허물을 들어서 말하지 않는다.
만일 이상의 법들을 구족한 이가 있으면 그를 화상(和上)으로 삼는 것이다.
보살마하살이 계(戒)를 받은 뒤에는 화상이 병이 날 경우 응당 급사(給使)가 되어 주고, 병이 없을 때에는 응당 가르침을 따라 행한다.
존중하고 공경하는 마음으로 맞이하여 예배하고 곁에서 모시면서 의복ㆍ음식ㆍ침구ㆍ의약을 받들어 보시한다.
법어(法語)를 따르며, 법에 따라 행하고 동전(動轉)하지 않는다. 범하는 죄는 그에 따라 성실하게 말한다.
법을 들을 때에 부처님 생각, 법에 대한 생각, 비구승에 대한 생각을 하고,
난상(難想)ㆍ안상(眼想)ㆍ대지인상(大智因想)ㆍ대광명상(大光明想)을 하면 대과보상(大果報想)이 바로 대열반의 무상도(無上道)의 인(因)이라는 생각을 얻으며,
상락상(常樂想)을 얻으며, 사마타(舍摩他)와 비바사나(毘婆舍那)의 생각을 얻는다.
이러한 생각들은 곧 진실법(眞實法)에 대한 생각으로서 이것을 법을 듣는 공덕(功德)을 구족한다고 한다.
또 법을 들을 때에는 지극한 마음으로 듣고 믿는 마음으로 들어야 하며,
‘나는 이제 파계한 자를 따르지 않겠다’고 생각하거나 말해서는 안 된다.
이런 사람은 하열한 종성(種姓)으로서 근기가 구족하지 못하다.
바르지 못한 말을 하는 사람은 성품이 좋지 못한 사람으로서 법을 물은 것이다.
이러한 생각을 버리고 지극한 마음으로 법을 들어야 한다.
보살마하살이 보살계를 받는 데에 두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지혜이고, 둘째는 어리석음이다.
만일 위에서와 같이 생각하고 관찰할 경우 이를 우치(愚癡: 어리석음)라 하는 것이니, 선법(善法)을 늘리지 못하며 큰 지혜를 얻지 못한다.
[4무량심]
보살은 네 가지 무량심(無量心)인 자심(慈心)ㆍ비심(悲心)ㆍ희심(喜心)ㆍ사심(捨心)을 닦는다.
네 가지 무량심에 세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중생연(衆生緣)이고, 둘째는 법연(法緣)이며, 셋째는 무연(無緣)이다.
중생연이란 보살마하살이 자심을 닦아서 삼취(三聚)의 모든 중생을 자세히 관찰하는 것인데,
삼취란
첫째는 즐거움을 받는 것[受樂]이고,
둘째는 고통을 받는 것[受苦]이고,
셋째는 괴롭지도 않고 즐겁지도 않은 것[不苦不樂]을 받는 것이다.
보살마하살이 자심을 닦아서 즐거움을 받는 것을 보면 이를 증장(增長)시키고,
고통받는 중생을 보면 그 고통을 멸하는 즐거움이 생기게 하고,
괴롭지도 않고 즐겁지도 않은 사람을 보면 고락(苦樂)을 끊어 없애고 열반을 얻게 한다.
이것을 중생연이라 한다.
법연이란 보살마하살이 오직 법상(法相)만 관하고 중생상(衆生相)을 짓지 않는 것이다.
만일 내가 자심을 닦음에 있어 중생이 없다면 누가 괴로움을 여의고 누가 즐거움을 얻겠는가?
이것을 법연(法緣)이라 한다.
무연(無緣)이란 중생상과 법상(法相)을 버리고 자심(慈心)을 증장하는 것이다.
이것을 무연이라 한다.
자심 이외의 나머지 세 가지 무량심에 있어서도 역시 이와 같다.
보살마하살이 만일 중생으로 인하여 무량심을 닦을 경우, 이런 마음이 외도(外道)와 다르지 않다는 것을 알아야 하며, 또한 성문이나 벽지불(辟支佛)과 같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보살마하살의 네 가지 무량심(無量心)을 합치면 비심(悲心)이다.
그래서 보살을 대비(大悲)라 한다.
보살이 중생의 고통을 관찰하니 백열 가지가 있는데, 이 고통을 없애기 위해서 대비를 닦는 것이다.
어떤 것이 백열 가지가 되는가?
한 가지는 생고(生苦: 受胎에서 出生까지의 고통)이다.
다시 두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구하나 얻지 못하는 고통[求不得苦]이고,
둘째는 얻은 뒤에 잃어버리는 고통[得已失苦]이다.
다시 세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고고(苦苦: 탐탁하지 않은 대상으로부터 받는 고통)이고,
둘째는 행고(行苦: 세상의 변화와 관련하여 받는 고통)이며,
셋째는 괴고(壞苦: 좋아하는 것의 變滅로부터 받는 고통)이다.
다시 네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사랑하는 자와 헤어지는 고통[愛別離苦]이고,
둘째는 미워하는 자와 만나는 고통[怨憎會苦]이며,
셋째는 죽음의 고통[死苦]이고,
넷째는 오음(五陰)이 없어지지 않는 고통이다.
다시 다섯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탐욕에 인연한 고통[欲因緣苦]이고,
둘째는 증오에 인연한 고통[瞋因緣苦]이며,
셋째는 수면(睡眠)에 인연한 고통이고,
넷째는 도회(掉悔: 들떠서 어지럽고 후회하며 걱정하는 것)에 인연한 고통이며,
다섯째는 믿지 못하고 의심하는 데 인연한 고통이다.
다시 여섯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악도(惡道: 三惡道)에 인연한 고통이고,
둘째는 악도의 과보[果]로서의 고통이며,
셋째는 많이 구하는 데 따른 고통이고,
넷째는 지켜 보호하려는[守護] 고통이며,
다섯째는 얻을수록 만족을 모르는 고통이고,
여섯째는 잃어버리는 데 따른 고통[失苦]이다.
다시 일곱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태어나는 데 따른 고통[生苦]이고,
둘째는 늙음에 따른 고통[老苦]이며,
셋째는 질병에 따른 고통[病苦]이고,
넷째는 죽음에 따른 고통[死苦]이며,
다섯째는 사랑하는 자와 헤어지는 고통이고,
여섯째는 미워하는 자와 만나는 고통이며,
일곱째는 구하여도 얻지 못하는 데 따른 고통[求不得苦]이다.
다시 여덟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추위의 고통이고,
둘째는 뜨거움의 고통이며,
셋째는 배고픈 고통이고,
넷째는 목마른 고통이며,
다섯째는 자재(自在)함을 얻지 못하는 고통이고,
여섯째는 니건자(尼揵子: 外道인 자이나敎. 苦行을 숭상함)처럼 스스로 만드는 고통이며,
일곱째는 왕사(王事: 임금의 일) 등과 같은 남이 주는 고통이고,
여덟째는 구위의고(久威儀苦)이다.
다시 아홉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자신의 가난에 따른 고통이고,
둘째는 남의 가난에 따른 고통이며,
셋째는 친하고 사랑하는[親愛] 것이 죽어 사라지는[死滅] 데 따른 고통이고,
넷째는 재물을 잃어버림에 따른 고통이며,
다섯째는 질병에 따른 고통이고,
여섯째는 파계(破戒)에 따른 고통이며,
일곱째는 사견(邪見)에 따른 고통이고, 여
덟째는 현재의 고통이며,
아홉째는 다른 세상[他世]에 대한 고통이다.
다시 열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음식이 있으나 그릇이 없는 고통이고,
둘째는 길을 가는 데 있어 탈 것이 없는 고통이며,
셋째는 갖가지 영락과 꽃과 향기를 구하는 데도 얻지 못하는 고통이고,
넷째는 기악(伎樂: 음악, 풍류)과 유희(遊戱: 놀이)를 구하나 얻지 못하는 고통이며,
다섯째는 광명(光明)을 구하는 데도 얻지 못하는 고통이고,
여섯째는 부릴 자를 구해도 얻지 못하는 고통이며,
일곱째는 장수(漿水: 米飮, 끓여서 식힌 물)를 구하나 얻지 못하는 고통이고,
여덟째는 옷을 구하나 얻지 못하는 고통이며,
아홉째는 얻어서 쓰지 못하는 고통이고,
열째는 찾아와 걸구하는 것을 보는 고통이다.
다시 아홉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일체고(一切苦)이고,
둘째는 대고(大苦)이며,
셋째는 일체자고(一切自苦)이고,
넷째는 법대로 주(住)하지 못하는 고통이며,
다섯째는 전고(轉苦)이고,
여섯째는 자재함을 얻지 못하는 고통이며,
일곱째는 해고(害苦)이고,
여덟째는 좇아다니는 고통이며,
아홉째는 일체행고(一切行苦)이다.
일체고란 지난날의 인연으로 연유하여 현재에 얻는 고통이며,
대고란 중생들이 무량한 세간에서 지옥의 고통을 받는 것과 같은 것이며,
일체자고는 지옥ㆍ축생ㆍ아귀ㆍ인간ㆍ천상의 고통과 같은 것이며,
법대로 주하지 못하는 고통은 모의를 해서 남을 해치려다가 일을 이루지 못하고 도리어 화를 당한다든가, 음식을 탐내다가 나중에 큰 고통을 받는다든가, 탐욕ㆍ분노ㆍ어리석음을 생각하는 고통이라든가, 몸과 입과 마음의 악업(惡業)을 인연하여 받는 고통이라든가, 금계(禁戒)를 깨뜨리고 받게 되는 근심 걱정과 같은 것들이며,
전고(轉苦)는 현재는 임금의 몸으로서 타세에 이르러 노비가 되는 고통이나, 현재는 부모ㆍ형제ㆍ처제간이면서 타세에 이르러 증오하는 원수가 되는 고통이나, 현재는 큰 부자인데도 타세에 이르러 가난뱅이가 되는 고통과 같은 것이다.
자재(自在)함을 얻지 못하는 고통은 오래 살고 싶고, 단정한 모습을 갖고 싶고, 상족(上族)의 신분을 얻고 싶고, 부귀를 누리고 싶고, 육체의 힘을 얻고 싶고, 지혜를 얻고 싶고, 원수나 대적하는 자를 없애고 싶지만, 뜻대로 되지 않는 고통이다.
해고(害苦)란
세간의 사람들이 가난에서 벗어나고 싶으나 벗어나지 못하는 고통이고,
출가한 사람이 번뇌를 없애고 싶으나 없애지 못하는 고통,
일이 어려운 고통, 전쟁이 일어나는 고통, 무인지경의 광막한 길을 가야 하는 고통, 손발이 잘리게 되는 고통, 갇히고 매이고 얻어맞고 묶이는 고통, 몰리어 바깥으로 쫓겨나는 고통 같은 것들이다.
일체행고(一切行苦)란 고통을 인해서 고통을 받고, 즐거움을 여의어 고통을 받고, 모든 감수(感受)를 끊지 못해서 고통을 받고,
출가를 못해서 괴롭고, 적정(寂靜)할 수 없어서 괴롭고, 보리를 못 얻어서 괴롭고, 생각이 복잡해서 괴롭고,
범부(凡夫)라서 괴롭고, 사대(四大: 地ㆍ水ㆍ火ㆍ風으로 이루어진 몸)가 괴롭고, 삼계(三界)가 괴롭고, 번뇌가 괴로운 것들이다.
이러한 것들을 백열 가지의 고통이라 한다.
보살은 이러한 고통들을 관찰하여 대비(大悲)의 마음을 증장시킨다.
이러한 큰 고통들은 열여덟 가지에 인연해서 증장하게 된다.
열여덟 가지란 무엇인가?
첫째는 어리석음에 따른 고통이고,
둘째는 과보를 받는 고통이며,
셋째는 행위의 고통[行苦]이고,
넷째는 항상하다는 것에 대한 고통[常苦]이며,
다섯째는 태어나는 고통[生苦]이고,
여섯째는 스스로 만드는 고통이며,
일곱째는 남들이 주는 고통이고,
여덟째는 계(戒)를 깨뜨리는 것에 따른 고통이며,
아홉째는 사견(邪見)에 따른 고통이고,
열째는 과거세상에 대한 고통이며,
열한째는 대고(大苦)이고,
열두째는 지옥고(地獄苦)이며,
열셋째는 인간과 천상(天上)의 고통이고,
열넷째는 전고(轉苦)이며,
열다섯째는 받음에 대한 고통[受苦]이고,
열여섯째는 알지 못함에 대한 고통[不知苦]이며,
열일곱째는 증장되는 고통[增長苦]이고,
열여덟째는 게으름의 고통[懈怠苦]이다.
보살은 언제나 네 가지 일의 인연으로 해서 대비(大悲)라 한다.
그 첫째는 중생들이 고통을 받게 되는 인연이 깊고 깊어 이해하기 어려움을 자세히 관찰하는 것이고,
둘째는 한량없는 세간을 통하여 닦아 쌓는 것이며,
셋째는 지극한 마음으로 닦아 쌓는 것이고,
넷째는 지극한 마음으로 하기 때문에 중생을 위하여 신명(身命)을 아끼지 않는 것이다.
이 네 가지 일의 인연 때문에 능히 중생을 위하여 수고하고, 겸손하고, 인내하고, 괴로워하며 괴로운 몸을 받는다. 그래서 보살을 정대비(淨大悲)라 하고 정대비는 여래지(如來地)라 한다.
보살마하살은 이 백열 가지를 본다. 그리하여 모든 보살이 이를 닦아 쌓으니 중생을 위하기 때문에 대비를 증장한다.
이러한 보살은 능히 중생상(衆生相)과 법상(法相)이 대비를 낳는 것을 보지만 무연(無緣)의 상(相)이 대비를 낳는 것은 볼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대비라는 이름을 얻지 못한다.
여래가 능히 이러한 세 가지를 구족하기 때문에 대비라 한다.
보살이 대비(大悲)를 닦기 때문에 몸의 적정(寂靜)을 얻고 마음의 적정을 얻으며,
이와 같은 몸과 마음의 적정한 인연으로 해서 능히 중생들이 가진 번뇌를 깨뜨리고 정지(淨地)와 일자지(一子地: 모든 중생을 외아들처럼 여기는 보살의 지위)에 주(住)하여 모든 중생을 자식처럼 사랑한다.
대비의 인연으로 해서 모든 중생을 위하여 열심히 행하고 괴로이 행하면서도 마음에 후회하거나 물러섬이 없으며,
성문(聲聞)의 도(道)와 같이 네 가지 진리[四諦]를 깨달을 때에 무루(無漏)의 즐거움을 받는다.
보살이 비심(悲心)을 닦는 것도 역시 이와 같다.
보살이 비심을 닦는 것은 단지 중생을 위한 것으로, 자신을 위하여 비인연(悲因緣)을 닦지 않는다.
보살은 신명(身命)과 재물까지 아끼지 않으면서 비인연을 닦아서 몸을 버리고 몸을 받고 하되 끝내 여래의 금계(禁戒)를 허물어서 잃지 않으며,
얻기 어려운 삼매를 능히 즉시 얻고, 얻기 어려운 지혜를 능히 즉시 얻는다.
그래서 여래가 경(經) 가운데서 설하였다.
“보살이여, 아뇩다라삼먁삼보리는 어디에 있는가?
응당 대비에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한량없고 가이없어 헤아릴 수 없기 때문에 대비라 한다.
보살이 이와 같이 한량없는 마음을 닦아서 현재의 즐거움을 얻어 능히 중생으로 하여금 멀리 고뇌를 여의게 하며, 한량이 없고 위가 없는 공덕을 쌓아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장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