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보살영락경 제4권
9. 음향품(音響品)[1]
그때에 부처님께서 다시 여래 신족의 한량없는 법의 뜻을 거듭 펴시고자 문득 하나의 게송을 시방의 한량없는 세계에 두루 가득 차게 하셨다.
이때 부처님께서 즉각 게송을 말씀하셨다.
있고 없음은 공(空)으로부터 생기나니
저 소리는 내 것이 아니로다.
소리 소리마다 각각 다르니,
이 때문에 존귀한 법의 가르침을 말하도다.
부처님의 행(行)은 헤아릴 수 없나니
있음도 아니고 또한 없음도 아니로다.
한 목소리로 모든 법을 설하시니,
이로 말미암아 부처를 이루었도다.
이때에 부처님께서 이 게송을 말씀하시고 나서 문득 시방의 부처님들을 보시고 각각 찬탄하면서 말씀하셨다.
“훌륭하고 훌륭하도다. 모든 부처님은 청정하고 온갖 행이 가지런히 똑같으시고[齊同], 시방의 무앙수 세웅최승(世雄最勝:부처님)께서는 똑같은 한 목소리로 모든 법을 연설하신다.
6바라밀의 하나하나 바라밀 속에 한량없는 모든 부처님의 종성(種姓)이 있도다.
다함없는 법은 불가사의한데, 어떻게 종성은 불가사의한가?
가령 시방의 부처님께서는 모두 똑같은 음향으로 한 게송의 뜻을 널리 시방의 한량없는 중생으로 하여금 다함없는 법문에 모두 들어가게 하여 누구나 똑같은 지취(志趣)로 한 날 한시에 도를 이루게 하느니라.
다시 한 목소리로 한량없는 항하 모래 수효와 같이 많은 국토에 두루 가득 차게 하여 저 중생들로 하여금 이 음성을 듣고서 자연히 얽매인 것을 인식하여 영원히 해탈하게 하느니라.”
당시 보살이 있었으니 그 이름을 해석(解釋)이라고 하였다.
그 보살은 이미 뭇 망령됨을 버리고 온갖 법을 다 깨달았으며,
뭇 지혜가 자재하여 불기법인(不起法忍)에 이르렀는데,
즉시 자리에서 일어나 위의를 가다듬고서 오른쪽 어깨를 드러내고 꿇어앉아 합장한 채 부처님 앞에서 여쭈었다.
“매우 기이하시고 매우 훌륭하나이다. 지금 부처님의 일음(一音)ㆍ일향(一響)을 듣사오니, 한 바라밀 속에 법전(法典)을 다 설하고 뭇 행을 갖추었사오니, 이는 아라한ㆍ벽지불의 경지로도 능히 미칠 수 있는 바가 아니옵나이다.
이제 여쭙고자 하옵니다.
어떻게 음향 속에 여래의 온갖 행의 법을 갖추시었기에 저 중생이 먼저 온갖 법을 얻고 나서 나중에 이 소리를 듣고 비로소 깨달음을 얻사옵니까?
그리고 음성 가운데서 온갖 법의 이름이 나오게 되나이까?”
이때 부처님께서 해석보살이 묻는 것을 들으시고 곧 답하여 말씀하셨다.
“훌륭하도다, 족성자여. 그대가 이제 공(空)하여 형상 없는 법을 묻는구나.
이것은 아라한이나 벽지불이 미칠 수 있는 경지가 아니니라.
이제 그대를 위하여 마땅히 낱낱이 분별하리니, 살펴 듣고 살펴 들어서 잘 생각하고 생각하여라.
여래의 음향은 허공처럼 형상이 없으므로 온갖 법을 낳음이 불가사의하니라.”
해석보살이 부처님께 여쭈었다.
“부처님이시여, 어떻게 여래의 음향은 허공처럼 형상이 없사오며,
어떻게 다시 말씀하시기를 온갖 법을 낳는다고 하시나이까?”
부처님께서 해석보살에게 말씀하셨다.
“여래의 음향은 형상이 있느냐?”
“형상이 없나이다.”
“음향이 형상이 없으면 메아리는 어디로부터 나오는가?”
“4대(大)의 인연으로 식(識)을 두어 분별하나이다.”
“그대가 물은 여래의 음향은 허공처럼 형상이 없느니라.
어떻게 형상 없는 법이 온갖 법을 낳는가? 메아리는 4대(大)를 따를 뿐, 공법계(空法界)가 아닌가?”
“그렇지 않나이다.”
“어떠한가, 족성자여. 여래 음향의 근본이 4대(大)에서 나왔다고 하면, 메아리가 멸해 없어질 경우 다시 어디로 돌아가는가?”
“메아리는 돌아가는 데가 없나이다.”
“그렇다면 다른 허공이 있어 이 메아리를 내느냐?”
“그렇지 않나이다. 다른 허공으로부터 음향이 나오지 않나이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다른 허공도 아니고, 이 허공도 아니며, 장차 여래도 아니라고 하면, 그대의 말에는 잘못이 있는 것이 아닌가?”
해석보살이 부처님에게 여쭈었다.
“세존께서 여래의 음향은 허공처럼 형상이 없어서 문득 온갖 법을 능히 낳는다고 스스로 일컬으셨기 때문에 이 법이 여래의 메아리로 말미암아 비로소 온갖 법을 낳는 것이라고 살펴 알았사온데,
어째서 다시 허공계에서 온갖 법을 다시 낳는다고 말씀하시나이까?
마치 사람이 어두움 속에서 밝음을 구하는 것 같아서 얻기가 매우 어렵나이다. 이제 제가 품은 의심은 전보다 갑절이나 더 심해졌나이다.”
부처님께서 다시 해석보살에게 말씀하셨다.
“어떠한가, 족성자여. 지금 이 온갖 법의 이름이 생겨남은 어떻게 해서 있는가? 공으로부터인가, 공으로부터가 아닌가?”
대답하였다.
“이제 온갖 법의 법성(法性)은 스스로 본래 공이요, 공의 성품도 또한 공이옵나이다.
공의 공함도 스스로 공이거늘, 어찌 온갖 법이 있겠습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옳고 옳도다. 그대가 말한 대로 여래의 온갖 법은 허공처럼 형상이 없으며, 4대(大)의 음향은 4대(大)에서 나온다.
여래의 음향과 허공계가 어찌 다르지 않겠느냐?”
대답하였다.
“그렇지 않나이다. 제가 질문한 바는 여래의 음향이 근본의 4대(大)에서 나와서 문득 일체 모든 법을 낳았다면, 이것은 곧 의심하지 않사옵니다.
그러나 어째서 허공이 다시 온갖 법을 낳는다고 말씀하시나이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그만두어라, 그만두어라. 족성자여, 이제 그대가 물음을 발한 것은 모두 여래의 위신(威神)이시다.
어떠한가, 족성자여. 여래의 음향은 있는 것이냐?”
“없는 것이옵나이다.”
“어째서 족성자여, 여래의 음향은 없는 것이냐?”
“여여(如如)하나이다.”
“여래의 음향은 ‘있음’도 아니요 ‘없음’도 아니다.
마땅히 이 법을 무엇이라고 이름 짓겠는가?”
“이 법은 마땅히 공이라고 일컬어야 하나이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공은 스스로 형상이 없어서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며 또한 중간도 없거늘, 어떻게 공이라고 일컬을 수 있겠느냐?”
해석보살이 부처님께 여쭈었다.
“부처님께서는 장광설(長廣舌)로 공의 성품을 스스로 말씀하시면서 ‘있음’도 아니고 ‘없음’도 아니며 또한 ‘약간도 없다’고 하셨지만,
제가 보는 바로는 본래 이 공이 없는데 하물며 제가 어찌 공의 명호(名號)를 다시 세울 수 있겠습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족성자여, 공은 ‘있음’도 아니요 ‘없음’도 아니요 또한 중간도 없느니라.
가령 내가 오늘 여래ㆍ지진ㆍ등정각의 열 가지 명호를 갖추었지만, 또한 ‘있음’도 아니요 ‘없음’도 아니요 또한 중간도 없으니,
설해진 온갖 법도 또한 마찬가지니라.
어찌하여 여래의 말을 비방하여 공의 이름이 여래에게서 나왔다고 일컫겠느냐?”
그때 부처님께서 모인 대중들의 마음속 의심을 풀어주고자 문득 사부대중에게 말씀하셨다.
“여래는 한소리[一音]로 문득 일체의 모든 법을 능히 낼 수 있으니, 이 말은 허망하지 않아서 옳지 않음이 없느니라.
다만 중생은 계교와 집착의 상념을 내기 때문에 미혹에 처하여 영원히 4류(流:煩惱)에 있느니라.
여래의 신령스런 지혜는 불가사의해서, 가령 불식(佛識)이 염(念)하는 바는 한량없는 행의 근본으로써 온갖 중생이 응하는 과보를 다 알 수 있으니, 이는 아라한이나 벽지불의 경계가 아니니라.
이런 까닭에 여래의 한소리는 일체의 모든 법을 다 낳을 수 있느니라.”
그때 해석보살이 다시 부처님에게 여쭈었다.
“부처님이시여, 매우 기이하시고 매우 훌륭하시나이다. 중생의 경계는 불가사의합니다.
혹은 큰 서원이 있어 대승에 나아가기도 하며,
혹은 아라한이나 벽지불의 마음을 발하며,
혹은 공정(空定)ㆍ무상(無相)ㆍ무원(無願)을 즐겨하며,
다시 천상과 인간 세상에서 복 받는 것을 즐겨하는 이도 있어,
이와 같은 부류는 불가사의합니다.
저 중생마다, 저 심식(心識)마다 생각하는 바가 같지 않고 행도 또한 동일하지 않은데,
어떻게 한소리로 온갖 법을 낳아서 온갖 중생에게 다 두루할 수 있나이까?”
부처님께서 해석보살에게 말씀하셨다.
“여래의 신령스런 지혜는 형상이 없어서 볼 수 없느니라.
어떤 지혜는 그 이름을 속질자재(速疾自在)라고 하는데, 중생 심식(心識)의 깊고 얕음을 두루 알아서 모두 능히 분별하느니라.”
[일체지를 내는 법, 해의 광명의 비유]
해석보살이 다시 부처님에게 여쭈었다.
“중생의 신식(神識)은 ‘있음’도 아니고 ‘없음’도 아니오며, 혹은 ‘항상한다’고 계교하고 혹은 ‘무상하다’고 계교하나이다.
어떻게 해야 속질자재(速疾自在)의 지혜로 일체지(一切智)를 능히 다 낼 수 있나이까?”
부처님께서 해석보살에게 말씀하셨다.
“이제 그대에게 비유를 들어 보리니, 지혜 있는 이는 비유로써 스스로 이해하느니라.
어떠한가, 족성자야. 가령 일천자(日天子)가 받은 4대(大)의 몸은 12유순이고, 내궁(內宮)의 담장과 밖의 담장의 거리는 7유순인데, 그 사이에 광명의 비춤이 갑절이나 밝아서 한량이 없다.
그리고 제2의 궁전 담장과 제3의 궁전 담장의 거리가 다시 7유순으로 광명이 더욱 줄어들고,
나아가 제7에 이르기까지 각각 서로의 거리가 7유순으로 광명의 비춤도 저마다 같지 않다.
가장 밖의 제7 담장 밖에는 다시 호위 담장이 있어서 서로의 거리가 2유순인데, 광명이 더욱 같지 않다.
안에 있는 제1 궁전의 담장은 그 이름을 여의주로 만든 것[如意隨珠所作]이라고 하는데, 그 사이의 뜨거움은 근본 없는 불과 같다.
제2의 담장은 그 이름을 수염주로 만든 것[隨焰珠所造]이라고 하는데, 그 뜨거움은 흑승(黑繩)지옥의 불과 같다.
제3의 담장은 그 이름을 불꽃 광명의 그림자[焰光影]라고 부르는데, 그 뜨거움은 불꽃과 같다.
제4의 담장은 그 이름을 용맹한 불꽃 구슬[勇焰珠]이라고 부르는데, 그 뜨거움은 재 끓이는 불과 같다.
제5의 담장은 그 이름을 지극한 불꽃의 그늘[極焰陰]이라고 하는데, 그 뜨거움은 구리 잎사귀의 불과 같다.
제6의 담장은 그 이름을 유리(琉璃)라고 하는데, 그 뜨거움은 붉은 연꽃의 불과 같다.
제7의 담장은 그 이름을 수정(水精)이라고 부르는데, 그 뜨거움은 푸른 연꽃의 불과 같다.
어떠한가, 족성자여. 이 일천자가 하루 낮 하루 밤에 네 구역을 두루 다니는데 그 행(行)이 몹시 빠르고,
그 광명이 네 천하를 비추는데 푸르고 노랗고 붉고 희고, 높기도 하고 낮기도 하고,
성곽과 언덕, 성씨와 이름을 다 능히 스스로 보아서 낱낱이 분별하느니라.
어떠한가, 족성자여. 중생이 한량이 없어서 형품(形品)이 똑같지 않은데
어떻게 일천자의 광명이 능히 저들을 다 비추어 모두 동일한 빛을 드러내는가?
햇볕 속으로부터 한량없는 광명을 내어서 한량없는 형상을 비출 수 있으며,
한 광명으로부터 한량없는 형상을 비출 수 있느냐?”
이때 해석보살이 앞에 나아가 부처님께 여쭈었다.
“제가 물어 여쭌 바와 같나니,
여래께서 한소리로 한량없는 온갖 법을 낳는 것이니, 이 소리는 4대(大)로부터 나오는 것이어서,
오는 세상ㆍ지나간 세상ㆍ지금 세상에 내시는 언교(言敎)는 제가 의심하지 않사온데,
오늘의 광명의 성분(性分)은 스스로 그러할 뿐이니, 어떻게 언교(言敎)와 그것이 같나이까?”
부처님께서 족성자에게 말씀하셨다.
“여래의 4대(大)에서 나오는 음향은 다 저마다 가르침이 있으며, 모두 일체의 온갖 법을 능히 다 낳을 수 있다.
모든 부처님이 법을 설하실 때는 또한 말을 염(念)하지 않아서 설해도 옳고 그냥 두어도 옳으니, 마음이 고요히 멸해서 약간(若干)도 염(念)하지 않는다.
마치 일천자(日天子)의 한 광명이 비추는 바가 여러 지역에 두루하는 것처럼
나의 비추는 바를 염(念)하지 아니해서 그 광명을 입는 이는 각자 나아갈 곳을 아느니라.
이것을 해석보살아, 여래의 속질자재(速疾自在) 지혜라고 하니, 이는 이로움이 많아서 시방의 형상 있는 식을 두루 알아 교화하여 제도한다고 말하느니라.”
이때 해석보살이 다시 부처님께 여쭈었다.
“부처님께서 내시는 음향은 광명이 있거나 광명이 없거나 어둠이 있거나 어둠이 없거나 모두 능히 나아가서 도의 가르침을 이루지만,
그러나 햇빛이 비춤은 상하게 하는 일이 많아서 어둠을 즐겨하는 이가 많거늘,
어째서 이것으로써 비유를 삼으시나이까?”
부처님께서 족성자에게 말씀하셨다.
“마치 사람이 공(空)에 노닐지만 뜻이 미혹하면 깨치기 어려운 것처럼,
그대도 지금 이처럼 나의 비유를 이해하지 못하는구나.
내가 이제 설한 바는 여래의 음향이 4대(大)로부터 벗어나서 일체 모든 법을 능히 내는 것이고, 일광 천자의 광명은 온갖 형상 있는 것을 능히 두루 비추는 것이니라.
첫째는 온갖 법을 능히 낳는 것이고,
둘째는 형상 있는 것을 능히 두루 비춤이니,
무슨 차별이 있기에 의심을 품는가?”
그때 해석보살은 깊이 스스로 사유한 끝에 확연히 크게 깨닫고 다시 거듭 부처님에게 아뢰었다.
“거룩하시고 거룩하나이다. 부처님이시여, 여래ㆍ지진ㆍ등정각께서는 형상 없는 법이므로 형상으로써 가르치시고, 말없는 교법이므로 말로써 가르치시나이다.
이제 거듭 여쭙나이다. 오직 원하오니, 여래께서는 때에 맞게 발견(發遣)하시어 의심을 없애 주옵소서.”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옳도다. 족성자여, 여래는 마땅히 권도의 방편으로써 발하여 보내주겠노라.”
[6신통]
“부처님이시여, 어떤 것이 항상함이 있는 신통[有常神通]이고 항상함이 없는 신통[無常神通]이며,
스스로 전생 일을 아는 신통[自識宿命神通]이고 남의 전생 일을 아는 신통[識他宿命神通]이며,
안식(眼識)의 신통이고 이식(耳識)의 신통이옵나이까?
이 여섯 가지 법의 뜻에 무슨 차별이 있나이까?”
부처님께서 해석보살에게 말씀하셨다.
“그렇고 그렇도다. 그대가 물은 대로 이 6신통은 각각 다르지 않느니라. 이제 그대를 위하여 마땅히 설명하리라.
보살마하살이 항상함이 있는 신통[有常神通]을 얻어서 만물을 다 관하니 생겨나고 생겨나면서 끊어지지 않지만, 전생은 전생이요 후생은 후생이다.
만일 한 겁을 지나 백천 겁에 이르더라도 겁이 일어나면 일어나고 겁이 멸하면 멸한다.
이 식을 관하여 보니 또한 썩어 없어지지 않으니, 왜냐하면 무명의 뿌리가 깊어서 망가뜨릴 수가 없기 때문이니라.
다시 다음에 항상함이 없는 신통[無常神通]에서도 다시 온갖 중생의 형상 있는 무리를 관하여 보니, 생겨나는 자와 멸하는 자가 있다.
한 겁으로부터 백천 겁에 이르기까지 겁이 일어나면 일어나고 겁이 멸하면 멸한다.
저 형체 받은 것은 다 마멸(磨滅)로 돌아가서 항상 존재할 수 없느니라.
이상을 보살마하살이 항상함이 있는 신통과 항상함이 없는 신통을 각각 차별한다고 말하느니라.”
부처님께서 다시 해석보살에게 말씀하셨다.
“그래서 족성자여, 만일 보살마하살이 스스로 인식하는 신통[自識宿命神通]을 얻은 이라면,
문득 한 몸, 두 몸으로부터 백천 몸에 이르기까지 능히 스스로 보아서 겁으로부터 겁에 이르기까지 그 중간에 지내온 것을 능히 다 스스로 인식하여
‘나는 아무 나라 아무 고을에 나서 성명은 이와 같고 종성(種姓)은 이와 같다’고 하느니라.
다시 처음에 받은 4대(大)와 형상을 받은 약간(若干)을 능히 스스로 인식하고 알아서 그 선ㆍ악의 행을 능히 분별하는 것을 스스로 인식하는 신통이라고 스스로 말하느니라.”
부처님께서 다시 족성자에게 말씀하셨다.
“보살마하살로서 다른 사람의 신통지혜[識他宿命神通]를 얻은 이라면,
이 욕계와 색계로부터 유상천(有想天)ㆍ무상천(無想天)에 이르기까지 하나하나 나아가는 바를 능히 다 분별하고,
한 살에서부터 백천만 살에 이르기까지, 한 겁으로부터 백천만 겁에 이르기까지 그 중간에 성공하고 실패하면서 지나온 곳을 모두 능히 분별하여 다 인식하고 아나니,
이것을 보살마하살이 다른 사람을 아는 신통이라고 말하느니라.”
부처님께서 다시 족성자에게 말씀하셨다.
“보살마하살이 안식(眼識)의 신통을 얻어서 삼천대천세계를 보매 형상을 받은 이와 형상을 받지 않은 이를 알아서 모조리 형상 있는 것을 보는데,
한 살에서부터 백천만 살에 이르기까지, 한 겁에서부터 백천만 겁에 이르기까지 모조리 다 살펴보아서 잘못된 혼란이 없나니,
이것을 보살마하살이 눈의 신통을 갖추어서 집착한 바가 없음이라고 말하느니라.”
부처님께서 다시 족성자에게 말씀하셨다.
“보살마하살이 이식(耳識)의 신통을 얻으면, 시방 중생 중 괴로움과 즐거움이 있는 소리와 괴로움과 즐거움이 없는 소리를 다 듣고,
선악의 과보를 받는 소리와 선악의 과보를 받지 않는 소리를 듣되,
모두 다 들어 알아서 잘못된 혼란이 없나니,
이것을 보살마하살이 귀의 신통을 갖추어서 집착한 바가 없음이라고 하느니라.
이상을 여섯 가지 법 각각의 차별이라고 말하느니라.”
[신통의 차별에 대한 질문]
이때 해석보살이 부처님에게 여쭈었다.
“부처님이시여, 항상함이 있는 신통의 보살이 그 신통을 얻으면 형질(形質)이 있는 것은 생겨나고 생겨나면서 끊어지지 않음을 모두 알고,
항상함이 없는 신통을 얻으면 생겨나고 생겨나도 멸함을 아나이다.
이제 관하여 보면 전생은 후생이 아닌데, 어째서 생겨나고 생겨나면서 끊어지지 않는다고 말씀하시나이까?
다시 다음에 여래께서는 스스로 인식하는 신통을 얻으셨기 때문에 전생 일을 아시나이다.
한 몸, 두 몸에서 백천 몸에 이르기까지, 한 겁, 두 겁에서 백천만 겁에 이르기까지 지금의 몸이 뒤의 몸이 아니며, 이 몸이 앞의 몸과 다르고, 지금의 식이 뒤의 식이 아니며, 이 식이 뒤의 식과 다르나이다.
식이 이 식을 여의면 곧 중생과 같거늘, 어째서 부처님께서는 전생의 일을 아는 신통[宿命通]을 스스로 인식하신다고 말씀하시나이까?
또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보살마하살로서 다른 사람의 마음을 아는 신통을 얻은 이는 온갖 중생의 심식의 아는 바를 다 안다’고 하셨고,
‘스스로 인식하는 마음의 신통은 또한 자기 마음과 다른 사람의 마음을 알며,
다른 사람의 마음을 아는 신통도 또한 자기 마음과 다른 사람의 마음을 안다’고 하셨는데,
이 두 가지 신통에 무슨 차별이 있나이까?
가령 부처님의 말씀으로는
‘보살마하살로서 눈의 신통을 얻은 이는 시방의 욕계에서부터 위로 유상무상천(有想無想天)에 이르기까지 형상을 받은 이, 형상을 받지 않은 이, 선악의 과보를 받은 이, 선악의 과보를 받지 않은 이를 다 관하여 본다’고 하셨고,
다시 말씀하시기를
‘귀의 신통을 얻은 보살은 시방의 괴로움과 즐거움이 있는 소리와 괴로움과 즐거움이 없는 소리를 모조리 듣고,
선악의 과보를 받는 이, 선악의 과보를 받지 않는 이를 듣는다’고 하셨나이다.
눈의 신통도 보고, 귀의 신통도 듣는데, 이 둘에 무슨 차별이 있나이까?
오직 원하옵나이다, 부처님이시여. 거듭 설하시고 분별하시어서 저희들로 하여금 영영 의심이 없게 해 주십시오.”
[항상함이 없는/있는 신통]
부처님께서 해석보살에게 말씀하셨다.
“보살마하살이 항상함이 있는 신통을 얻으면 모든 법의 앎의 머묾과 법의 성품은 변하지 않음을 깨달아 알 것이며,
보살마하살이 항상함이 없는 신통을 얻으면 모든 법은 변하여 바뀌는 것이라고 깨달아 알 것이니,
이것을 항상함이 없는 신통이라고 말하느니라.
다시 다음에는, 모든 법의 체성도 스스로 그러해서 부처가 있든 부처가 없든 또한 나고 멸함이 없으니,
이것을 항상함이 있는 신통이라고 말하느니라.
다시 다음에, ‘모든 법의 항상함이 없는 신통’이란 다 마멸(磨滅)로 돌아가서 오래 존속하지 못하고 생겨나고 생겨나면서 머물러 있지 못함이니,
이것을 항상함이 없는 신통이라고 말하느니라.
다시 다음에 보살마하살이 항상함이 있는 신통을 얻으면 문득 여래의 갖가지 법인 4의지(意止)ㆍ4의단(意斷)ㆍ4신족(神足)ㆍ5근(根)ㆍ5력(力)ㆍ7각의(覺意)ㆍ8현성도(賢聖道)를 갖추게 된다.
이것이 항상함이 있는 신통이 되느니라.
다시 다음에 모든 법은 오는 세상ㆍ지나간 세상ㆍ지금 세상에서 좋은 법과 악한 법이 다 있는 바가 없으니,
이것을 항상함이 없는 신통이라고 말하느니라.
다시 다음에 보살마하살은 다시 중생이 3승의 도를 발해서 나한을 얻으려고 스승을 찾아가 깨쳐서 그 과(果)가 원하는 대로 필연이라서 의심하지 않음을 보며,
다시 중생이 연각의 마음을 발하여 넓은 들에 혼자 사는데 그 과(果)와 같이 필연임을 의심하지 않음을 보며,
다시 중생이 보살의 마음을 발하여 그 원하는 바대로 필연임을 의심하지 않음을 보니,
이것을 보살마하살의 항상함이 있는 신통이라고 말하느니라.
만일 어떤 선남자나 선여인이 처음에 아라한이나 벽지불의 도를 구하다가 비로소 보살의 도를 행하는데,
중간에서 물러나 범부의 경지에 있으면서 성취하지 못한 자라면,
이것을 항상함이 없는 신통이라고 말하느니라.
[숙명통]
다시 다음에 만일 어떤 보살마하살이 스스로 전생 일을 아는 신통을 이미 얻고 무수한 전생 일을 스스로 알게 되어서
처음으로 도의 뜻을 발하여 공덕을 세우고 여러 부처님을 받들어 섬기고 공양하면 도과(道果)를 반드시 얻는데,
다시 스스로 4대(大)를 받지 않았음을 스스로 기억해 알아서 공(空)에 의지하거나 색(色)에 집착하지 않는다면,
이것을 이름하여 스스로 전생 일을 안다[自識宿命]고 말하느니라.
[타심통]
혹은 어떤 보살은 다른 사람의 마음을 아는 신통을 얻었지만,
저 받은 몸마다, 저 받은 형상마다 본래 쫓아온 곳을 능히 알지 못하니,
이것을 세속의 다른 사람의 마음을 아는 지혜[世俗他心智]라고 말하느니라.
다시 어떤 선남자나 선여인이 신통으로 다른 사람의 마음을 아는 지혜를 이미 얻어서 안팎의 신통을 모두 능히 갖추었다면,
이것을 스스로 인식한 신통이 다른 사람의 마음을 아는 지혜라고 말하는데 저마다 구별이 있느니라.
[천안통]
만일 어떤 선남자나 선여인이 눈의 신통을 이미 얻었다면 안팎이 청정하여서 3세(世) 중생의 근원을 모두 보느니라.
혹 어떤 보살은 천안(天眼)으로 1천 국토를 보며, 혹 어떤 보살은 2천 국토를 보며, 혹 어떤 보살은 삼천대천 국토를 보며, 혹 어떤 보살은 천안(天眼)으로 하나의 불국토를 보며, 두 국토를 보며, 세 국토를 보면서 그 중에서 퇴전(退轉)하는 자와 퇴전하지 않는 자를 다 아는데,
이것을 보살마하살이 천안통(天眼通)을 얻어서 온갖 계(界)를 다 알면서도 있는 바가 없다고 말하느니라.”
[천이통]
부처님께서 다시 족성자에게 말씀하셨다.
“만일 어떤 보살마하살이 이미 이통(耳通)을 얻어 시방 모든 찰토의 음향을 다 듣는데, 선한 소리가 있고 선한 소리가 없으며, 좋은 소리가 있고 좋은 소리가 없다.
다시 선남자나 선여인이 1천, 2천, 3천 찰토를 들으며, 혹은 어떤 보살이 하나의 불국토ㆍ두 불국토ㆍ세 불국토, 나아가 무수한 불국토의 음향을 듣느니라.”
이때 부처님께서 해석보살에게 말씀하셨다.
“여섯 가지 일의 법에서 문득 갖춤을 얻어 저마다 차별이 있느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