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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승보요의론 제7권
[보살은 항상 정법으로 일체를 거두어 받아들인다]
여기에서 보살은 항상 정법(正法)으로 일체를 거두어 받아들인다는 것을 반드시 알아야 한다.
정법으로 일체를 거두어 받아들인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신력입인법문경(信力入印法門經)』에서 말하였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묘길상이여, 정법을 거두어 받아들이는 까닭에 곧 보살도 거두어 받아들이며,
보살이 거두어 받아들이는 까닭에 정법도 거두어 받아들이며,
정법이 거두어 받아들이는 까닭에 일체 유정들도 거두어 받아들이고,
일체 유정들이 거두어 받아들이는 까닭에 곧 부처의 씨앗은 끊어지지 않고 지은 바를 성취한다.
또한 만약 부처의 씨앗이 끊어지지 않도록 하고자 하거나,
일체 유정들의 업에 의한 번뇌를 부수고자 하거나,
악한 업으로써 나아가는 곳의 문을 닫고자 하거나,
한량없고 셀 수 없는 전륜성왕의 높고 미묘한 쾌락과 아울러 범왕(梵王)과 제석(帝釋)과 사천왕(四天王) 등의 쾌락을 받고자 하거나,
일체 악마의 올가미를 끊고 나아가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의 과보를 이루고자 하는 사람은 한결같이 반드시 그 정법으로써 거두어 받아들여야 한다.’”
[문] 여기에서 마땅히 묻기를, 처음 마음을 낸 보살이 적은 선근(善根)으로써 어떻게 정법을 거두어 받아들여야 하는가?
[답] 『보살장경(菩薩藏經)』에서 말한 것과 같다.
“보살이 만약 네 가지의 법을 갖추면 그는 곧 보리를 덜어내지 않으며,
생(生)이 바뀌면 반드시 전륜성왕을 이루어서 그 원력(願力)과 같이 일체의 선근을 바로 이루며,
더불어 바뀌어서 큰 힘이 있고 굳고 단단한 나라연(那羅延)과 같은 육신을 얻는다.
그는 전륜성왕을 얻고 일찍이 네 가지 범행(梵行)을 닦아 범천(梵天)세계에 태어나서 범천왕이 된다.
무엇을 네 가지라고 하는가?
첫째는 만약 보살이 여래의 사리탑이 낡아서 허물어진 것을 보면 부지런하고 용맹한 마음을 내어 고치고 꾸미며 나아가 진흙 덩어리 하나라도 공양하여 올린다.
둘째는 사거리나 혹은 시장의 입구쯤 되는 곳에 높이 돋보이도록 여래의 사리탑을 세우거나 혹은 둥근 무덤 모양의 탑을 세우거나,
혹은 깃발 모양을 따라 세우거나, 혹은 단지 당간(幢竿)만을 단단히 하거나,
혹은 여래의 형상을 안치하거나, 혹은 여래의 온갖 형상을 따로따로 안치하는 것이다.
말하자면 전법륜상(轉法輪相)이나 혹은 다시 성을 넘어 출가하시는 모습이나,
혹은 보리수 밑에서 정각을 이루신 모습이나,
혹은 크나큰 신통력을 나타내어 악마의 군대를 굴복시키시는 모습이나,
혹은 대열반에 들어감을 드러내 보이시는 모습이나,
혹은 도리천(忉利天)에서 아래로 내려오시는 모습 등이다.
셋째는 만약 성문제자(聲聞弟子)들의 무리 안에 이간질하는 사람이 있음을 보면 화합하도록 한다.
넷째는 여래의 가르침 안에서 만약 정법을 덜어내 멸하고자 하는 때를 당하거든 이에 사구게(四句偈)하나라도 용맹한 힘으로 보호하여 지키고 그것을 유통시켜서 잊어 없어지지 않도록 하며,
또한 정법이나 혹은 설법사(說法師)를 모두 거두어 받아들여서 이에 육신의 생명을 잃어버릴 때까지 끝내 법을 버리지 않는다.”
『보운경(寶雲經)』에서 말하였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선남자여, 보살이 만약 열 가지의 법을 고루 갖추면 곧 정법을 능히 거두어 받아들인다.
열 가지란 무엇을 말하는가?
첫째는 뒤에 오는 말세(末世)의 후오백세(後五百歲)에 정법이 줄어드는 때에는 여래의 가르침 안에서 잡되고 혼란한 일이 일어나 모든 유정들이 삿된 도에 빠지며 지혜의 등불이 꺼져 없어져서 바른 스승의 가르침이 없다.
이때에는 마땅히 넓고 큰 경전으로써 큰 위력을 갖추고 넓고 큰 뜻을 가져야 하되, 마치 일체 법의 어머니인 듯이 존중하고 공양하면서 받아 지니고 읽으며 독송하고 해석을 베풀어 설한다.
둘째는 깊고 깊은 경전으로써 다른 사람들을 위해 펼쳐 설하고 해석하며 열어 보여서 그것을 모두 알도록 한다.
셋째는 바른 도인(道人) 자리에 대해 기뻐 즐거워하고 청정한 마음을 낸다.
넷째는 먼저 기뻐 즐거워함을 얻고 저들을 거두어 받아들인다.
다섯째는 집착이 없는 마음으로써 다른 사람들을 위해 법을 설하여 그것을 받아 듣도록 한다.
여섯째는 법을 설하는 사람 자리에 대해 스승을 존경하는 생각을 일으킨다.
일곱째는 그 정법에 대해 감로(甘露)라는 생각을 일으킨다.
여덟째는 정법을 또한 훌륭한 약과 같이 생각한다.
아홉째는 육신의 생명을 아까워하지 않고 정법을 바라고 구한다.
열째는 얻은 바의 법을 설한 그대로 닦고 행한다. 이것을 열 가지 법이라고 한다.’”
『적정결정신변경(寂靜決定神變經)』에서 말하였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현호(賢護)여, 보살이 만약 네 가지의 법을 갖추면 능히 정법을 거두어 갖는다.
네 가지란 무엇을 말하는가?
첫째는 자신의 즐거움에 대해 집착하지 않는다.
둘째는 다른 사람들에게 높고 미묘한 즐거움을 베푼다.
셋째는 크게 자비로운 마음을 갖춘다.
넷째는 법을 구하기를 싫어하지 않는다.’”
그 경전에서는 또한 말한다.
“과거세계 어느 때에 무구위광왕(無垢威光王)은 대고(大高)여래 자리에 대해 천 년 동안 여러 가지 선근을 심었으니, 일체의 즐거움을 주는 물건들로써 저 부처님을 공양하였으며 아울러 네 가지 일을 8만 4천의 모든 비구 대중에게 베풀어 주었다.
이와 같이 하여 천 년이 지나갔다.
저 대고여래께서 무구위광왕에게 말씀하셨다.
‘대왕이시여, 이와 같이 여래 자리에 대해 모든 보시의 법을 행하기를 천 년을 가득 채우더라도
만약 부지런히 행하여 법을 구하는 보살이 한 번 숨을 들이쉬고 내쉬는 가운데에 있는 선근에 비한다면,
백분의 일에도 미치지 못하고 나아가 오파니살담분(烏波尼殺曇分)의 일에도 미치지 못하거늘, 하물며 정법(正法) 안에서나 혹은 하나의 사구게(四句偈)만이라도 부지런히 행하고 설법을 베풀며 그 뜻을 해석함이겠습니까?
저 복의 끄트머리를 나는 말할 수가 없습니다.
대왕이시여, 이 일은 그만두고라도 만약 이와 같이 천 년을 가득 채워서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보시하고 공양하되, 쌓아 놓은 모든 것으로써 한 무리의 비구들에게 보시하고 이와 같이 하여 혹은 모든 비구 무리를 보시하더라도,
만약 부지런히 행하고 법을 설하여 가르쳐 주는 보살 자리에 대해 법을 즐거워하는 까닭에 그를 존중하고 청정한 믿음을 일으켜 음식으로 지켜주면서
≺나는 정법을 구하는 까닭에 이 음식을 바쳐 보시한다≻는 마음을 내면,
이전의 보시법(布施法)은 이 선근에 비해 백 분의 일에도 미치지 못하며 나아가 오파니살담분의 일에도 미치지 못합니다.’”
『여래비밀경(如來秘蜜經)』에서 말하였다.
“보살이 가지고 있는 복덩어리를 만약 정법을 거두어 받아들이는 복덩어리에 비한다면 이것이 다시 배나 많다.
만약 일체 모든 부처님들께서 부지런히 힘써 경을 설하신 정법은 구지(俱胝)의 겁(劫)이 지나더라도 오히려 정법을 받아 지니는 복덩어리의 끄트머리조차 얻을 수 없다.”
[정법이란 무엇인가]
정법(正法)이란 무엇을 말하는가?
『승만사자후경(勝鬘師子吼經)』에서 말한 것과 같다.
“이 정법이라는 것은 곧 대승(大乘)의 다른 이름이다.
왜냐하면 대승은 성문과 연각의 승(乘)을 낳고 아울러 세상 밖이나 세상 안의 일체 훌륭한 법을 낳기 때문이다.”
『법집경(法集經)』에서 말하였다.
“저 정법을 거두어 받아들인다는 것은, 말하자면 일체 여래들께서 모두 설하신 심히 깊고 깊은 경전을 펼쳐 설하고 가르쳐 주며 마음을 한곳으로 집중하는 것이다. 이것을 정법을 거두어 받아들인다고 한다.
반드시 알아야 하니, 모든 보살들이 만약 얻을 바가 있는 행에 기대고 집착한다면 비록 한량없는 시간을 지나면서 모든 여래들을 공양하더라도, 저 부처님들로부터 수기를 받지 못하거늘 하물며 다시 보리를 이루겠느냐?”
『범왕문경(梵王問經)』에서 말한 것과 같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대범(大梵)이여, 나는 한 겁이나 혹은 한 겁이 지나도록 저 여래들의 이름을 펼쳐 설하기도 하고, 혹은 나는 이 모든 여래들을 공양하기도 하고, 혹은 다시 저들에 대하여 나는 범행(梵行)을 닦고 아울러 여섯 가지 바라밀다를 닦기도 하였지만,
나는 저 부처님들 자리로부터 미처 수기를 받지 못했다. 왜냐하면 나는 얻을 바가 있는 행에 기대고 집착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이 때 연등(然燈)여래의 처소에서 저 부처님을 잠시 뵙고 바로 생겨남이 없는 법의 앎[無生法忍]을 얻었으며, 저 부처님께서는 나에게 기별을 주셨다.
나는 이 때 얻을 것이 있는 일체의 행을 넘어섰으며
다시 여섯 가지 바라밀다를 두루 채우고 심히 깊은 법 안에서 능히 믿음과 이해를 냈으며,
모든 보살들이 가지고 있는 자신을 이익되게 하고 남도 이익되게 하는 가장 훌륭한 모든 행을 빠짐없이 완전히 끝낼 수 있었다.’”
『대집경(大集經)』의 「월장품(月藏品)」에서 말하였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월장(月藏)이여, 저 승의제(勝義諦)는 능히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바로 성취하여 일체 성문과 연각이 가진 바와 함께 하지 않는다.
이러한 까닭에 세속제(世俗諦)는 능히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의 최상의 선근과 뛰어난 모든 행을 이루지 못한다.
월장이여, 마치 어떤 사람이 횃불을 들고서는 심히 깊은 큰 바닷물을 능히 말려 없애지 못하는 것과 같다.
저 세속제도 이와 같아서 오히려 자기 번뇌의 바다조차 능히 말리지 못하거늘, 하물며 다시 다른 유정들을 위함이겠느냐?’”
[어떻게 능히 심히 깊은 법을 믿고 이해할 수 있는가]
여기에서, 어떻게 능히 심히 깊은 법을 믿고 이해할 수 있는가?
『보살장경(菩薩藏經)』에서 말한 것과 같다.
“보살은 두 가지의 지혜가 있다.
첫째는 다른 사람의 가르침을 듣고 좇아서,
둘째는 자신의 마음에서 깊고 견고하게 생각을 지어서이다.
이 가운데 ‘다른 사람의 가르침을 듣고 좇아서’란 어떤 것인가?
만약 어떤 보살이 비록 서로 응하는 모든 행은 거듭 즐겨 닦지만,
보살장(菩薩藏)인 정법(正法)은 즐겨 받아 듣지 않고 또한 모든 거룩한 진리도 즐겨 듣지 않고
선정(禪定) 안에서 조금 맛만 보고 기뻐 만족하여 으스대는 마음이 치성(熾盛)한 까닭에, 한껏 부풀어 올라 교만에 떨어진다.
저 보살은 능히 생로병사(生老病死)와 우비고뇌(憂悲苦惱)를 해탈하지 못하며, 또한 여섯 곳으로 윤회하는 일을 해탈하지 못하며, 또한 다시 고통의 덩어리도 해탈하지 못한다.
이러한 까닭에 여래께서는
‘다른 사람의 가르침을 듣고 좇아서’라는 말씀을 설하셨다.
이 듣는 것만으로는 노사(老死) 등을 능히 해탈하지 못하는 법이다.
‘깊고 견고하게 생각을 짓는다’란 어떤 것인가?
말하자면 보살은 스스로 이렇게 배워서 가질 바가 없는 법이지만, 가히 화합(和合)하고 불화합하지 않는다.
이것이 깊고 견고한 행(行)이다. 이 깊고 견고한 행은 곧 행이 아님의 다른 이름이다.
그는 이와 같이 말한다.
만약 앞의 때이든 뒤의 때이든, 무엇이든 생겨나는 것을 좇거나 혹은 다시 무엇이든 스러지는 것을 좇아서 엿보아 살피고,
또한 만약 언설(言說)이든 의리(義理)이든, 혹은 단(斷)이든 증(證)이든, 혹은 이설(已說)이든 당설(當說)이든, 그것들 일체를 있는 그대로 엿보아 살핀다면
과거의 모양도 없고 미래의 모양도 없고 현재의 모양도 없음을 가히 얻는다.
곧 일체 법의 자성(自性)은 적멸(寂滅)하고, 자성은 적정(寂靜)하고, 자성은 원만(圓滿)하여 끝내 생겨남도 없고 일어남도 없고 알맹이[實]도 없다.
마땅히 모든 법을 볼 적에는 구경[畢竟]의 열반을 보아야 한다.
만약 이와 같이 본다면 곧 보는 바도 없고 또한 보지 않음도 없다.
이것을 일컬어 정관(正觀)이라고 하는데, 하물며 다시 일체 법을 가히 있는 그대로 봄이겠는가?
이것이 곧 보는 바 없음이다. 이 보는 바 없음은 또한 곧 덧붙일 말도 없다.
만약 일체 법이 생겨나지 않는다면 곧 정리(正理)를 벗어나지 않으며, 만약 일체 법이 평등하다면 곧 불법(佛法)도 평등하다.
이와 같이 설하는 이것을 정리(正理)를 벗어나지 않는다고 하며, 이것을 깊고 견고하게 생각을 짓는다고 한다.
이와 같이 하여 이에 능히 최상의 심히 깊은 정법을 깨달아 들어가는 것이다.”
[자성은 공하다]
『부자합집경(父子合集經)』에서 말하였다.
“부처님께서 정반왕(淨飯王)에게 말씀하셨다.
‘대왕이시여, 만약 공겁(空劫)의 때에 어떤 범천(梵天)의 누각이 앞에 나타난다면, 일곱 가지 보배로 이루어진 그 굳고 단단한 성품은 정작 일어나 생겼을 당시에 어디로부터 왔을까요?
욕계(欲界)의 타화자재천(他化自在天)과 화락천(化樂天)ㆍ도솔천(兜率天)ㆍ야마천(夜摩天)ㆍ도리천(忉利天)ㆍ사대왕천(四大王天)의 이 모든 하늘의 누각도 이와 마찬가지로 한결같이 일곱 가지 보배로 이루어져 있으며,
또한 철위산(鐵圍山)과 대철위산(大鐵圍山)도 굳고 실팍한 한 무더기의 금강(金剛)으로 이루어졌는데,
이 모든 산들의 굳고 실팍한 성품은 어디로부터 왔을까요?
또한 수미산(須彌山)ㆍ이민달라산(你民達囉山)ㆍ지쌍산(持雙山)ㆍ지축산(持軸山)ㆍ지금강산(持金剛山)ㆍ걸나리고산(朅那里酤山)ㆍ미나달고산(尾那怛酤山)ㆍ마이산(馬耳山)ㆍ선견산(善見山)ㆍ대선견산(大善見山)ㆍ오잠아로산(烏昝誐盧山)ㆍ향취산(香醉山)ㆍ설산(雪山)과 아울러 그 외에 흑산(黑山)도 앞에 나타나고,
나아가 일체의 삼천대천세계가 모두 나타나 보이며,
또한 저 수미산왕(須彌山王)은 8만 유순(由旬)의 땅에 걸쳐 있는데,
그 굳고 실팍한 성품은 어디로부터 와서 모두 모여 앞에 나타나는 걸까요?
대왕이시여, 만약에 이 세계가 이루어진 다음에 대지가 불타오르고 큰물이 흘러넘치고 큰 바람이 들이치고 때리면,
그 불꽃은 허공에 가득하여 있는 것을 모두 태워서 남은 것이라고는 한결같이 보이지 않는 것이 마치 혹은 소(酥)나 혹은 기름을 불 속에 넣어 태우면 타고 남은 것이 없는 것과 같으며,
그 물이 흘러넘칠 때는 달리 가히 얻을 수 있는 것이라고는 없는 것이 마치 소금을 물속에 넣으면 뒤섞이고 녹아서 남음이 없는 것과 같으며,
그 바람이 들이치고 때리면 하찮은 물건마저도 보이는 것이라고는 없는 것이 마치 비람풍(毘嵐風)이 불어치는 때를 당하는 것과 같은데,
어찌 나는 새라도 있어서 가히 나타날 수 있겠습니까?
이 삼천대천세계도 역시 거듭 이와 같아서 불꽃이 타오르고 물이 흘러넘치고 바람이 들이칠 때는 달리 가히 볼 수 있는 것이라고는 없으니, 저 굳고 실팍한 성품은 이와 같이 허물어지고 부서지면 어디로 따라가겠습니까?
이러한 말은 지상 안의 세계든 지상 밖의 세계든 똑같이 그러하며, 아울러 다른 모든 세계의 안이나 혹은 밖도 역시 거듭 이와 같습니다.
이러한 까닭에 일체 법은 생겨날 때도 비롯하여 오는 곳이 없고 스러질 때도 역시 가는 곳이 없습니다.
저 생겨남이 있는 것들은 결정코 모두가 공(空)이며 이미 생겨난 것들도 역시 또한 자성(自性)이 한결같이 공입니다.’”
『아사세왕경(阿闍世王經)』에서 말하였다.
“이 때 아사세왕은 그 궁전 안에서 세존과 아울러 모든 보살과 성문(聲聞)의 대중에게 공양하고 대야에 손을 씻고 그릇을 닦아 마치자 묘길상보살 앞에 삼가 공손하게 앉아서 정법을 받아 들었다.
왕이 말했다.
‘보살이시여, 원컨대 이제 저를 위해 제가 지은 악한 일들을 모두 풀어 없애 주십시오.’
묘길상이 말했다.
‘대왕이시여, 만약에 긍가의 모래알만큼 많은 모든 불세존이라도 역시 거듭 그대의 악한 일을 능히 풀어 없앨 수는 없습니다.’
아사세왕은 이 말을 듣더니 구원이 없다 함에 놀랍고 두려워서 걱정 끝에 기절하여 땅바닥에 쓰러졌다.
이 때 대가섭존자(大迦葉尊者)가 바로 왕에게 일렀다.
‘그만 하십시오, 그만 하십시오. 대왕이시여, 놀라 떨지 마십시오.
이 묘길상 보살은 능히 그대를 위해 몸소 인연을 설해 주실 것입니다.
그러니 ≺어떤 이유로 보살님께서는 이와 같이 말씀하십니까?≻ 하고 보살님께 물어야 합니다.’
이 때 아사세왕은 땅바닥에서 천천히 일어나더니 묘길상보살에게 일러 말했다.
‘어떤 이유로 보살님께서는 이와 같이 말씀하십니까?’
묘길상이 말했다.
‘대왕이시여, 그대의 생각은 어떻습니까? 그대의 마음에 원인이 있어서 불세존을 봅니까?’
왕이 말했다.
‘아닙니다.’
묘길상이 말했다.
‘그대는 지금 무엇인가가 마음을 낳는 것을 봅니까?’
왕이 말했다.
‘아닙니다.’
묘길상이 말했다.
‘마음이 스러짐을 봅니까?’
왕이 말했다.
‘아닙니다.’
묘길상이 말했다.
‘함이 있는 법을 봅니까?’
왕이 말했다.
‘아닙니다.’
묘길상이 말했다.
‘불세존께서 함이 있는 법을 드러내어 나타내시는 일이 있음을 봅니까?’
왕이 말했다.
‘아닙니다.’
묘길상이 말했다.
‘대왕이시여, 그대의 생각은 어떻습니까? 만약 모든 법 안에 가히 볼 수 있는 법이 없다면 어떤 법이든지 있어서 가히 풀어 없애 줌을 받을 수 있겠습니까?’
왕이 말했다.
‘아닙니다.’
묘길상이 말했다.
‘대왕이시여, 이러한 까닭에 만약 긍가강의 모래알만큼 많은 모든 불세존이라도 역시 거듭 그대의 악한 일을 능히 풀어 없앨 수 없기 때문에 그렇게 말했습니다.
또다시 대왕이시여, 만약 이 허공 안에서 혹은 연기나 혹은 먼지가 허공을 더럽히려 한다면 그대 생각은 어떠합니까?
저 연기와 먼지가 능히 허공을 더럽힐 수 있겠습니까?’
왕이 말했다.
‘아닙니다.’
묘길상이 말했다.
‘대왕이시여, 또한 혹시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나는 허공을 청정히 하겠다≻고 이와 같이 한다면
저 허공 그것은 능히 청정해집니까, 아닙니까?’
왕이 말했다.
‘아닙니다.’
묘길상이 말했다.
‘대왕이시여, 여래께서도 역시 거듭 이러한 허공과 같으며, 일체 법은 본래 더러움이 없는 자성(自性)을 서로 이어간다고 설하십니다.
저 법이 만약 더럽든지 청정하든지 참으로 볼 수 없는데 이 안에서 어떻게 다시 풀어 없애 주는 일이 있겠습니까?
대왕이시여, 나는 이러한 뜻을 있는 그대로 보는 까닭에, 만약에 긍가의 모래알만큼 많은 모든 불세존이라도 역시 거듭 그대의 악한 일을 능히 풀어 없앨 수는 없다고 이와 같이 말했던 것입니다.
또 대왕이시여, 모든 불세존들의 내심(內心)은 얻을 것이 있지도 않고 일어날 것이 있지도 않으며 바깥도 역시 얻을 것이 아니고 일어날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일체 법의 자성은 일어나는 바가 없기 때문입니다.
만약 법의 자성이 일어나는 바가 없다면 곧 일어나는 바가 있는 성품을 받아들일 곳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일체 법의 자성은 일어나는 바가 없기 때문에 곧 이루어지는 바도 없습니다.
일체 법은 이루어지는 바가 없기 때문에 곧 모이는 바도 없습니다.
일체 법은 모임이 없기 때문에 곧 생겨남도 없습니다.
일체 법은 생겨남이 없기 때문에 법은 곧 흩어지는 성품이며,
일체 법은 흩어지는 성품이기 때문에 곧 능히 행하여 지음이 없으며,
일체 법은 능히 행하여 지음이 없기 때문에 곧 생겨나 있음이 없으며,
일체 법은 생겨나 있음이 없기 때문에 곧 다른 과보를 받는 법이 없으며,
일체 법은 다른 과보를 받는 법이 없기 때문에 곧 지어 일으킴이 없으며,
일체 법은 지어 일으킴이 없기 때문에 곧 물드는 바가 없으며,
일체 법은 물드는 바가 없기 때문에 곧 자성이 밝고도 밝으며,
일체 법은 자성이 밝고도 밝기 때문에 곧 법은 청정하며,
일체 법은 청정하기 때문에 곧 허공과 같으며,
일체 법은 허공과 같기 때문에 곧 맞서 견줌이 없으며,
일체 법은 맞서 견줌이 없기 때문에 곧 둘이 아니며,
일체 법은 둘이 아니기 때문에 곧 두 끝을 여의며,
일체 법은 두 끝을 여의기 때문에 곧 법은 가장자리가 없으며,
일체 법은 가장자리가 없기 때문에 곧 끝이 없습니다.
일체 법은 끝이 없기 때문에 곧 구경(究竟)이 없으며,
일체 법은 구경이 없기 때문에 곧 원인이 없으며,
일체 법은 원인이 없기 때문에 곧 일체의 것에 대해 뒤바뀌어 머무르는 성품이 없으며,
일체 법은 일체의 것에 대해 뒤바뀌어 머무르는 성품이 없기 때문에 곧 항상됨[常]과 즐거움[樂]과 나[我]와 청정함[淨]을 한결같이 가히 얻을 수가 없으며,
일체 법은 항상하기 때문에 곧 움직여 옮겨가서 서로 따르는 일이 없으며,
일체 법은 청정하기 때문에 곧 자성이 이루는 바가 밝고도 밝으며,
일체 법은 즐겁기 때문에 곧 분별하여 서로 따름이 없으며,
일체 법은 나의 자성이기 때문에 곧 나를 나타내 보여 서로 따름이 없으며,
일체 법은 악(惡)을 지음이 없기 때문에 곧 속마음이 고요히 멈추어 있으며,
일체 법은 알맹이[實]가 없기 때문에 곧 승의제(勝義諦)가 평안히 서 있을 바가 없으며,
일체 법은 적정(寂靜)하기 때문에 곧 두루 고요한 모습입니다.
일체 법은 내가 없기 때문에 곧 나[我]와 내 것[我所]을 모두 버리며,
일체 법은 맛이 없기 때문에 곧 해탈의 모습이며,
일체 법은 이름을 버렸기 때문에 이름에 의한 차별을 얻을 수 없으며,
일체 법은 분별이 없기 때문에 곧 여러 가지 성품을 버리며,
일체 법은 하나의 맛이기 때문에 곧 해탈을 널리 거두어 가지며,
일체 법은 모양을 여의기 때문에 곧 모양의 끝이 없으며,
일체 법은 모양이 없기 때문에 곧 대상의 청정함을 온통 앎이 없으며,
일체 법은 공(空)하기 때문에 곧 일체의 보고 지은 것을 한결같이 여의며,
일체 법은 바라는 바가 없기 때문에 곧 삼세(三世)를 넘어서며,
일체 법은 삼세가 끊어졌기 때문에 곧 과거ㆍ미래ㆍ현재를 한결같이 붙잡을 수 없으며,
일체 법은 열반을 널리 거두어 가지기 때문에 곧 끝내 생겨남이 없습니다.
대왕이시여, 그대의 생각은 어떻습니까?
만약 법이 생겨남도 없고 다시 쌓여 모임도 없다면 이 안에서 다시 능히 물드는 바가 있겠습니까, 없겠습니까?’
왕이 말했다.
‘없습니다.’
묘길상이 말했다.
‘또다시 가히 풀어 없앨 법이 있겠습니까?’
왕이 말했다.
‘없습니다.’
묘길상이 말했다.
‘대왕이시여, 이러한 까닭에 여래께서는 일체 법이 열반과 같다는 것을 아시며, 그리하여 이 안에 악한 일이 있어서 능히 풀어 없앨 만한 것은 있지 않은 것입니다.
이러한 까닭에 대왕이시여, 저 깊고 단단하게 서로 따르는 일은 반드시 이와 같이 행해야하니, 전도되지 않은 마음으로써 마땅히 있는 그대로 행하고 엿보아 살펴야 합니다.
이와 같이 이미 엿보아 살펴서 엿보아 살핀 대로 따를 때, 가히 붙잡거나 가히 버릴 사소한 법조차 있지 않으며 또한 역시 어떤 법이 있어서 가히 함께 머무를 것도 없습니다.
이와 같이 일체 법이 함께 머무르지 않는다면, 이것을 일컬어 심신이 평안한 경지라고 합니다.
만약 법이 심신이 평안한 경지라고 한다면 곧 법은 적정(寂靜)하며,
만약 법이 적정하면 이것이 바로 법의 자성(自性)이며,
만약 이것이 법의 자성이라면 곧 자성이란 없으며,
일체 법이 자성이 없는 까닭에 곧 맡아 다스리는 주인도 없습니다.
대왕이시여, 이 안에서 마땅히 인욕(忍辱)의 법을 지어야 하되, 바로 이 역시 또한 가히 지을 법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대왕이시여, 지은 바가 적정하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이 아는 사람은 반드시 열반을 증득하나, 이 안에서도 역시 가히 지을 법이 없으며 또한 지음이 없는 것도 아닙니다.
혹시 짓든 혹시 짓지 않든, 이것을 일컬어 모든 것은 열반적정(涅槃寂靜)으로 돌아간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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