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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정론 제6권
6. 내구잠편(內九箴篇)
6.1. 밖의 구미론(九迷論)에 대한 대답
첫째, 주나라 세상에는 기연(機緣)이 없다는 것
둘째, 불상과 불탑을 조성하여 세운다는 것
셋째, 위의와 기복(器服)에 대한 것
넷째, 밭가는 것을 버리고 분위(分衛)하는 것
다섯째, 가르침이 다스림의 근본이 되는 것
여섯째, 충성과 효도에 어긋나지 아니한 것
일곱째, 삼보에 번복이 없는 것
여덟째, 이방(異方)에 제도가 동일한 것
아홉째, 노자의 몸은 부처가 아닌 것
외적으로 논하여 말하였다.
“대저 말은 화려한 언사를 숭상하지 않고 이치에 맞는 것을 귀하게 여기며, 노래는 맑은 소리를 숭상하지 않고 가락에 맞는 것을 귀하게 여긴다. 불경에서 부처님께서 법을 말씀하실 때에 여러 나라의 천자들이 널리 와서 모여 들었으며 혹은 부처님께서 광명을 놓으시어 대천세계(大千世界)를 두루 비추셨다.
다만 석가모니가 세상에 계실 때요, 곧 우리 주나라 왕조에 해당함은 여러 역사책에 실려 있어서 진실로 유루(遺漏)가 없다. 그런데도 주나라 임금이 저 파밀고원에 나갔음을 듣지 못하였으니, 이는 어찌 중화(中華)의 임금은 착함이 없어서 부처님 도량에 참예하지 못하고 변두리의 임금은 인연이 있어서 널리 법좌(法座)에 참석하였음이겠는가?
그리고 부처의 광명이 비치는 곳에는 중생들이 고통에서 벗어난다. 그런데 우리 중국은 무슨 죄로 치우치게 광명의 사실을 깨닫는 사람이 없어서 홀로 은혜의 밖에 막혀 있어서 일찍이 보고 듣지 못하였는가? 우러러 생각하니 부처님은 사사로움을 가리지 않는다.
[주] 그대가 부처님을 보지 못하는 것은 업(業)에 성인을 비방한 허물이 있음이니 어찌 신(神)을 원망하겠는가? 오직 스스로를 허물할 것이다.
구하는 마음으로 사실인 양 책망하는 것은 일이 어긋나고 말이 틀려서 망령되고 괴이함이 분명하니 이를 허위(虛僞)라고 일컬으나 범부들은 이를 깨닫지 못하고 그림자를 쫓으며 소리를 듣고 짖어서 그래도 세상에서 알지 못하니 그의 미혹함이 첫째이다.”
1) 불교의 측면에서 주나라에서는 기연(機緣)이 없었음
불교의 입장에서 훈계하여 말하였다.
“대저 순수한 해가 하늘에 솟았지만 눈이 먼 늙은이는 그 빛을 보지 못하고, 격렬한 천둥이 땅을 놀라게 하지만 귀먹은 자는 그 소리를 듣지 못하는 것은 대개 기감(機感)이 끊어져서이다. 사나움을 지은 흉한 도척(盜跖)은 공자의 지혜로도 그의 마음은 막을 수 없었고, 분노에 찬 야인(野人)은 자공[賜]의 변재로도 그의 분노를 덜어 줄 수 없었으니, 이는 뜻과 성품이 다르기 때문이다.
[주] 『장자』에
‘공자가 도척을 보니, 도척이 도리어 공자를 책망하였기에 공자가 두려워서 뒷걸음 쳐서 돌아왔다’ 한다.
『유자(劉子)』에
‘공자의 말이 야인의 곡식을 침노하니 야인이 성이 나서 그의 말을 못 가게 하였다. 공자가 자공을 시켜 즐겁게 풀어 주도록 하였으나 그 야인이 더욱 성을 내었기에 이에 말먹이는 사람을 보내 사죄하니 그 야인이 그제야 기뻐하였다’ 한다.
그러기에 도와 합해지면 1만 리의 먼 데까지 응하게 되고 형세가 어그러지면 간과 쓸개도 초나라와 월나라같이 멀어지는 것이다. 하물며 무시(無始)로 번뇌가 커지면 번뇌와 사랑이 푸른 바다만큼 깊어지고 유위(有爲)의 업이 넓어지면 티끌의 시달림이 큰 산과 같이 높음을 다투게 되어서 여러 뜻이 한꺼번에 이르지 못한다. 그러기에 점차적으로 인도해야지 하고 여러 행을 한꺼번에 닦지 못한다. 그러기에 제한된 분수로써 계책(計策)하는 것이 마치 하늘과 땅의 3화(化)가 비로소 자연에 합하는 것과 같다.
[주] 『노자』에
‘사람은 땅을 본받고 땅은 하늘을 본받으며 하늘은 도를 본받는다’ 하였다.
제나라와 노나라가 두 번 변하여야 이에 지극한 도에 이른다. 마치 빽빽한 구름이 때맞춰 비를 인도하고, 굳은 얼음이 서리를 밟는 데에서 시작되는 것과 같으니 다 점차적으로 쌓음을 이르는 것이다. 그러기에 3황(皇)이 거느려 교화하였다.
[주] 『수미사역경(須彌四域經)』에
‘응성(應聲)보살은 복희(伏羲)가 되고, 길상(吉祥)보살은 여와(女媧)가 되었다’ 한다.
순수한 풍속의 초기에 있어서 세 성인이 말을 세웠다.
[주] 『공적소문경(空寂所問經)』에서는
‘가섭(迦葉)이 노자가 되고, 유동(儒童)이 공자가 되고, 광정(光淨)이 안회(顔回)가 되었다’고 하였다.
이미 흐려진 말기에 일어나서 현묘하고 비어 충일(沖一)한 요지(要旨)는 황제(黃帝)와 노자가 그 말을 성하게 하였으며, 시(詩)와 서(書)와 예(禮)와 악(樂)의 글은 주공과 공자가 그 가르침을 높였다.
밝고 겸손하며 바탕을 지키는 것은 이에 성인으로 올라가는 섬돌과 사다리요, 3외(畏)
와 5상(常)은 사람과 하늘이 점차 말미암는 것이다. 대개 부처님의 이치에 가만히 부합되어서 바로 말하는 극치의 말은 아니다. 그러기에 벙어리와 귀머거리에게 길을 물으면 방위를 몰라서 멀고 가까움을 궁구할 수 없고, 토끼와 말에게 나루를 물으면 건널 줄은 알아도 얕고 깊음을 헤아리지 못한다. 이를 인하여 은(殷)나라와 주나라 세상은 석가모니의 가르침이 마땅히 행하여지지 못하였다. 마치 더위가 심하여 해가 붉게 빛나면 동자가 눈을 바로하여 보지 못하며, 빠른 우레가 사납게 치면 겁쟁이가 귀를 펴서 듣지 못하는 것과 같다.
그러기에 하수와 연못이 솟아오르니 주나라 소왕(昭王)이 부처님의 탄생을 기뻐하셨으며, 구름과 무지개가 사방으로 변하니 주나라 목왕(穆王)이 성인의 죽음을 탄식하였다 한다.
[주] 『주서이기(周書異記)』에
‘주나라 소왕 34년 4월 8일에 강과 하수와 샘과 연못이 넘쳐흘렀으며, 주나라 목왕 52년 2월 15일에 폭풍이 갑자기 일어나서 나무들이 꺾이고 하늘이 음산하고 구름이 검으며 흰 무지개의 괴변이 있었다’ 하였다.
이로 보면 어찌 능히 총하(蔥河)를 건너서 교화를 물으며 설령(雪嶺)을 넘어서 정성을 바치겠는가?
『정명경(淨名經)』에
‘이는 눈먼 자의 허물이요, 해와 달의 잘못이 아니라’ 하였으니,
구멍을 뚫는 변을 다하고자 하나 그대의 혼돈의 성품을 상할까 두렵다. 그대가 알 바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의 눈먼 것의 첫 번째이다.”
외적으로 논하여 말하였다.
“동산(銅山)이 무너짐에 낙종(洛鍾)이 응하고, 가회(葭灰)가 이지러짐에 월휘(月暈)가 생긴다 합니다. 범이 휘파람 부는데 바람이 나지 않고, 용이 올라가는데 구름이 일지 않음을 보지 못하였습니다.
이제 석가모니께서 말씀하신 것에 부처의 힘이 가장 높으니 한 생각으로 마음을 운반하면 와서 응하지 아니함이 없다 하였습니다. 그러기에 범부의 속인들이 각기 재산을 기울여 다투어 탑과 사당을 지으며 구슬과 옥을 아끼지 않고 다투어 당우(堂宇)를 베풉니다.
혹은 진흙을 개고 전단나무를 조각하여 오랑캐 사람의 모습을 만들며, 금을 녹이고 비단을 짜서 오랑캐의 얼굴을 그리기도 합니다. 미묘함은 단청(丹靑)에 다하였고, 교묘함은 기궐(剞劂)에 다하였습니다. 한 번 절하고 한 번 예함에서 감통(感通)하기를 바랍니다.
오랑캐의 법이 남점(南漸)한 이래로 6백여 년이 되었지만 한 사람도 부처를 보았다 함을 듣지 못하였으니, 어찌 오랑캐의 사람들은 정례(頂禮)하여 곧 부처님을 감동케 하고, 중국 사람은 정성과 공경을 하여도 부처님[調御]을 만나지 못하겠습니까? 만일 부처의 교화가 이곳에 이르지 못하였다면 이는 곧 영험이 없는 것입니다.
인간들을 속이고 헛되게 위력이 있다고 말하여도 세상이 그것을 알지 못한다고 하는 것이 그의 미혹함의 두 번째입니다.”
2) 불교의 측면에서 불상과 탑을 건조(建造)하는 취지
불교의 입장에서 훈계하여 말하였다.
“좌철(左徹)이 성인을 사모하여 상(像)을 조각하여 헌원(軒轅)의 임금께 절하였고, 구천(勾踐)은 현인(賢人)을 생각하여 금을 부어서 범여(范蠡)를 본떠 만들었으며, 정란(丁蘭)은 극히 효성스럽기에 조각으로 만들어 어버이 대신 섬겼으며, 안재(顔在)는 어진 것을 의뢰하여서 구슬을 캐어 성인을 그렸다. 그러기에 근심하고 기뻐함이 얼굴색에 나타나고 정성이 꿈에서나 깨어서나 통하는 것이 또한 지극하다.
그 도리천(忉利天)에서 돌아오지 아니하니 우전왕(優塡王)이 이 때문에 나무에 부처님의 형상을 조각하였으며, 견림(堅林)에서 그림자를 감추시니 아수타국(阿輸陀國)이 여기에서 금으로 부어 만들었다. 그래서 미묘한 모습을 단청에 의탁하였고 신령한 위의를 선옥(銑鋈)에 부쳤다. 그래서 혹은 진영(眞影)을 보고 자리를 피해 앉았고, 모습을 그림에 진영이 몸을 돌렸다.
[주] 『감응전(感應傳)』에
‘양주(楊州) 장간사(長干寺)에는 아육왕(阿育王)의 상이 있었는데 사람들이 그것을 모사(模寫)하고자 하였으나 금빛이 손상될까 두려워서 그 절의 스님이 허락하지 않았다.
이에 그 상을 모사하려는 자가 이에 지극한 마음으로 원(願)을 발하기를
≺만일 이 정성에 감동함이 있으시면 상이 몸을 돌려서 서쪽으로 향하기를 빕니다≻ 하고,
이에 높은 누각을 자물쇠로 채우고 닫고 기도한 후 그 이튿날 아침에 높은 누각을 열어보니, 상의 몸이 완전히 서쪽으로 향하였기에 그 절의 스님이 드디어 모사하기를 허락하였다’고 한다.
신의 응감이 다함없음은 유래가 오래되었다. 상법(像法)이 동방으로 유전함으로부터 바른 교화가 남방으로 옮길 적에 꿈에 금인(金人)이 하수에 옥마(玉馬)를 띄우니 신비한 빛이 상수(湘水)에서 인도하고 상서로운 광채가 단계(檀溪)에서 발하였다.
[주] 『감응전』에
‘여릉(廬陵) 발몽사(發蒙寺)의 아육왕 상(像)의 기문(記文)에
≺상의 몸이 여공의 삼곡(三曲)에서 나왔는데 상서로운 빛이 상주(湘州)의 소담(昭潭)에서 나와서 모두 광명을 놓아 벼랑과 언덕까지 비추었다 하고, 무창(武昌)의 단계사(檀溪寺)에는 상서로운 상이 몸소 단계에서 나왔고 광명이 물 위를 비추었다≻고 하였다’ 하였다.
장사(長沙)에서 해가 모은 듯한 자세를 표하였고, 여산(廬山)에는 융금(融金)의 바탕을 나타냈으니 그의 사적이 넓지만 간략하게 말한 것이다.
간보(干寶)의 『수신(搜神)』과 임천(臨川)의 『선험(宣驗)』ㆍ『징응(徵應)』ㆍ『명상(冥祥)』ㆍ『유명록(幽明錄)』ㆍ『감응전(感應傳)』 등에는 한나라 명제(明帝)로부터 제나라와 양나라의 왕공(王公)과 수목(守牧)과 청신사(淸信士)ㆍ청신녀(淸信女)와 비구(比丘)ㆍ비구니(比丘尼) 등에 이르기까지 지극한 성인에 그윽히 감응하여서 눈으로 직접 신비한 광명을 본 자가 무릇 2백여 인이었다고 나와 있다.
만산(萬山)에서 부처님의 자취를 보고 호독(滬瀆)에서 광명을 띄운 것과 청대(淸臺)의 아래에서 만월(滿月) 같은 얼굴을 뵈옵고 옹문(雍門) 밖에서 상륜(相輪)의 그림자를 보며 남평(南平)이 상서로운 상의 감응함을 얻고, 문선제(文宣帝)가 성스러운 어금니의 꿈을 감득하였으며, 소후(蕭后)는 한 번 부어서 이루어졌는데 송황(宋皇)은 네 번 본을 떴어도 성취되지 못함과 같은 데 이르러서는 그 사례가 너무나 많아서 이루 다 펼 수가 없다. 그러니 어찌 그대의 눈이 없으면서 저들의 영험 있음을 배척하겠는가?
그런데 덕이 갖추어지지 않음이 없는 것을 열반이라 이르고, 도가 통하지 않음이 없는 것을 보리라고 이르며, 지혜가 두루하지 않음이 없는 것을 부처라고 일컬어서 이 중국말로써 저 인도 글을 번역하였으니, 저곳과 이곳에서 부처를 분명하게 믿겠다.
어찌하여 분명한가?
부처라 함은 중국말로는 대각(大覺)이요, 보리라 함은 중국말로는 대도(大道)이고, 열반이라 함은 중국말로는 무위(無爲)이다. 그러니 그대가 종일토록 보리의 땅을 밟으면서 대도가 곧 보리의 다른 칭호임을 알지 못하는구나. 대각의 경계에서 형체를 받았으면서도 대각이 곧 부처의 번역된 이름임을 알지 못한다.
그러기에 장주(莊周)가 ‘대각이 있은 뒤에 그의 대몽(大夢)을 알겠다’ 하였는데, 곽씨(郭氏)의 주석에 ‘각(覺)이라 함은 성인이다. 그래서 근심이 품에 있다고 말하는 자는 다 꿈이다’ 하였고, 또 ‘공자가 자유(子游)와 더불어 말을 잊고 신해(神解)하지 못하니 그러기에 대각이 아니다’라고 하였다. 군자가 ‘공자의 말이 모두 지극하다’고 하였다.
열반은 고요하게 비추어서 식(識)으로써 알지 못하며 지혜로써 알지 못한다. 곧 언어의 길이 끊어지고 심행(心行)의 처소가 멸하였기에 말을 잊었다고 하였으며, 법신은 3점(點)과 4덕(德)의 이름과 말로 이루어졌지만 소연(蕭然)하여 누(累)가 없기에 해탈이라 일컬으니, 이는 신해하여서 근심이 없어지는 것이다.
공자는 비록 성인이지만 공덕을 멀리 부처에게 미룬 것이다.
어찌하여 그런가?
조사하여 보니, 유향(劉向)의 옛날 두 기록에 ‘불경이 중국에 유전된 지 1백50년 뒤에 노자가 바야흐로 5천의 글을 설하였다’고 하였다. 그렇다면 주나라와 노자가 모두 불경에서 본 것으로서 말과 가르침이 가끔씩 증험이 있음을 본 것이다.
공자가 ‘대저 역(易)이라 함은 무위(無爲)이고 무사(無思)이다. 적연(寂然)하여 움직이지 않으면서 감(感)하면 드디어 통한다’고 하였다. 이는 천하의 지신(至神)이 아니고서는 그 뉘라서 여기에 참여하겠는가?
내가 이제 귀를 끌어다가 그대에게 말한다. 그대는 마땅히 쌓인 미혹을 버리고 뒤늦은 깨달음을 짊어질지어다. 지제(支提)의 만듦은 그의 유전이 오래다. 그러기에 봉(封)하고 심었다. 비간(比干)은 충성과 굳셈으로써 무덤을 나타냈기에 그 무덤을 깎지 말게 하여서 전계(展季)는 맑고 정숙함으로써 금롱(禁壟)하였고, 사민(四民)들은 10선(善)을 생각하였다. 멀고 먼 윤왕(輪王)의 은덕은 삼계에서 여섯 가지 신통을 높이었으니 이는 아라한의 덕을 드러내 밝힌 것이었다.
『정법념경(正法念經)』에 ‘네 종류의 사람이 투바(偸婆)를 세우게 된다’고 하였다. 투바라 함은 중국말로는 무덤이요, 네 종류의 사람이라 함은 전륜성왕과 아라한과 벽지불(辟支佛)과 부처님이다. 하물며 부처님은 지혜가 열 가지의 힘에 두루하고, 덕이 네 가지의 큰 서원에 가득 찼으며, 미묘한 말은 말을 잊는 데 계합하여서 교훈을 헤아릴 수 없는 데에 드리우고 크게 밝음은 비추지 않는 데까지 다하여서 이에 어두움이 없는 데를 비추신다.
그러기에 향탄(香炭)과 금병(金甁)의 전신(全身)이 여덟 나라에 두루하였으며, 광나(光螺)와 선패(鮮貝)의 산체(散體)가 시방에 두루하였다.
다섯 빛깔로 광채가 얽히어서 공중을 돌아 한나라 세상에 비추시고, 여덟 채색이 광채를 나누어 신응(神應)이 오나라 궁중에 나타났다.
그러기에 1백 거울의 신령한 감(龕)과 1천 꽃의 묘한 탑이 구름과 이슬을 손바닥으로 받들었고, 높은 바람에 방울소리 운치가 있으며, 붉은 기둥과 붉은 서까래는 허공의 경계에 멀리 떴으며, 날개 치는 곤계[鵾]와 발돋움하는 봉황은 멀리 허공에 접하여서 웅장하고 화려한 얼굴을 다하였으며 윤환(輪奐)의 아름다움을 다하였다.
그러니 어찌 높은 산을 우러러 그치듯 하여 경행(景行)을 잊지 않고 높은 궁궐을 높이 표하여 큰 계책을 세울 뿐이겠는가? 난추(欄甃)의 말로써 창해(滄海)의 넓고 좁음을 기롱하지 말아야 하며, 유방(楡枋)의 지혜로써 곤륜산의 높고 낮음을 헤아리지 말아야 한다.
그런데 그대가 이를 알지 못하니 그의 눈먼 것의 두 번째이다.”
외적으로 논하여 말하였다.
“대저 예의와 의리는 덕을 이루는 미묘한 가르침이요, 충성과 효도는 몸을 세우는 행실의 근본이어서 신하와 백성이 예의를 잃고서 그 나라가 있겠으며, 아들과 손자가 효도하지 못하고서 그 집이 서게 됨을 보지 못하였다.
이제 석가모니가 제정한 법도가 옷은 반드시 오랑캐의 복식과 같으면서 이는 곧 사람 가운데의 스승이라 하고, 입으로 오랑캐의 말을 외우면서 문득 세상의 귀한 분이라 하여서 무뢰(無賴)한 무리들로 하여금 이를 인하여 패역(勃逆)하여서 아버지와 형의 위에 기거(箕踞)하면서 스스로 사문이라 부르고, 임금의 앞에서 오만하면서 이에 석가의 종족이라 일컬으니, 어질지 못하고 효성스럽지 못함이 이미 집에서 나타났고, 즐거움이 없고 공손함이 없는 것이 다시 나라에 나타났다.
[주] 『예기』에 ‘아들이 관(冠)을 쓰면 부친이 초제(醮祭)를 지내고 모친이 절을 한다’ 합니다. 그러니 하는 곳이 높아도 또한 예가 없고 효도가 없다고 하겠는가?
그리되면 이는 곧 가문마다 올빼미와 원숭이 같은 아들을 낳을 것이요, 사람마다 승냥이와 이리 같은 아이를 기를 것이니 가슴을 어루만지고 심장을 논하여 참으로 아픈 일이다. 하늘의 도는 친함이 없으니 화(華)와 이(夷)를 어찌 가리겠으며, 오직 덕이 있는 이를 도우니 어찌 호(胡)와 한(漢)을 나누겠는가? 그러니 어찌 도교가 수건을 쓰고 착함을 닦아도 치우치게 뛰어난 복이 없을 것이요, 불교가 머리를 깎고 보시를 행한들 홀로 능히 과보를 감득하겠는가? 어질고 은혜로움이 어찌 머리를 깎는 데 있으며, 진(眞)을 지키는 것에 용모(容貌)를 허는 수고가 있어서 되겠는가?
그런데도 세상에서 이를 알지 못하니 그의 미혹함의 세 번째이다.”
3) 불교의 측면에서 위의와 기복(器服)을 가르침
불교의 입장에서 훈계하여 말하였다.
“대저 불교에서는 현묘한 성인이 법전(法典)을 만드실 적에 인(因)과 과(果)로써 종을 삼았으며, 유교에서는 소왕(素王)이 교훈을 펼 적에 이름[名]과 가르침[敎]으로써 근본을 삼았다. 이름과 가르침은 다스려서 이루는 데 있고, 인과 과는 도가 서기를 기약한다. 도를 세우는 데는 이미 애정(愛情)을 버리는 것이 우선이 되고, 다스림을 이루는 데는 또한 충성과 효도가 앞선다. 두 뜻이 하늘처럼 다르니 어찌 같은 등급으로 말하겠는가?
사문(沙門)은 행실이 세속의 밖에 초월하고 마음이 진세(塵世)의 밖에 노닐어서 위의와 진취(進趣)는 법이 아니면 움직이지 않고, 용모와 복식과 응기(應器)는 도가 아니면 행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물들여 입는 것은 1만 바탕이 한가지로 돌아옴이요, 검은 옷을 입는 것은 여러 채색이 색깔을 무너뜨리는 것이요, 간이(簡易)한 것은 해탈(解脫)을 따름이요, 조(條)를 막은 것은 복전(福田)을 본뜬 것이요, 간편한 복장은 집노(執勞)가 있지 않음이요
[『예』에 ‘집(執)이라 함은 소매가 없는 옷이다’ 하였다. 소매가 없는 것은 울력에 편하게 함이다.]
『논어』에
‘평소에 입는 갖옷은 긴데, 오른쪽 소매를 짧게 한다’ 하였으니, 말하자면 일을 함에 있어서 편하게 하고자 한 것이다. 그러니 성인의 제도가 까닭이 있어서이지 마침내 공연히 그런 것이 아니다.
그러기에 애정을 버리고 친척을 떠나는 것은 여러 성인을 우러르는 것이요,
소리와 빛을 꺾어버리는 것은 범행(梵行)을 따름이요,
수염과 머리를 깎아 없애는 것은 화려하게 다툼을 버리는 것이요,
얼굴을 구부리고 바탕을 정숙히 하는 것은 공경함을 잊지 아니함이요,
분소의(糞掃衣)를 입는 것은 몸과 목숨을 지탱함이요,
말에 숨기고 굽음이 없음은 간사함과 망령됨을 여읨이요,
소리를 온화하게 하고 기운을 즐겁게 하는 것은 다툼이 없는 데 들어감이요,
뱉고 들임이 안상(安詳)한 것은 사령(辭令)을 삼감이요,
세속의 귀한 이에게 굽히지 않음은 굳고 굳셈을 지킴이요,
맑고 비고 편안하고 조용한 것은 도의 성품을 따르는 것이요,
삿된 모양에 흔들리지 않음은 여덟 가지의 정사에 머무는 것이요,
얼굴을 바로하고 얼굴빛을 낮추는 것은 여러 병든 이를 불쌍하게 여김이요,
사람과 하늘이 높여 우러르는 것은 3업(業)을 청정히 함이요,
현묘함을 다하고 참됨에 극(極)한 것은 구경(究竟)을 취함이요,
어짊을 넓혀서 크게 제도하는 것은 또한 충성과 효도의 성함이다.
그런데 도사는 그러하지 않아서 도를 사모한다고 말하면서 마음은 참됨에 물들지 않고,
집을 버린다고 이르면서 형체는 세속에 변하지 않으며,
둥근 갓을 쓰지만 현묘한 기상을 보는 것이 없으며,
모난 신을 신지만 지리(地理)의 밝음이 없으며,
남정(南鄭)은 한나라를 배반한 수건을 쓰고,
공기(公旗)는 집을 패망하게 하는 홀(笏)을 잡았으며,
도욱(道昱)은 송나라에 화가 되는 옷을 입었고,
손은(孫恩)은 진(晋)나라를 패하게 하던 치마를 끌어서 평상(平常)의 직업을 폐지하지 않고 용예(庸隸)의 역사를 하면서 부끄러움이 없었다.
세상을 친압(親押)하면서 충성과 효도의 예가 이지러지고 신선되기를 구하면서 고상한 풍도가 부족하였다.
마치 파리를 보고 흰 것이냐, 검은 것이냐 하는 이론이 있고, 박쥐를 보고 새냐 쥐냐 하는 기롱이 있는 것과 같으니,
대개 요사하고 의혹하는 무리들인데 그대가 스스로 보지 못하니 그의 눈먼 것이 세 번째이다.”
[주] 『정법념처경』에
‘비유하면 박쥐가 사람들이 새를 잡을 때에는 굴에 들어가서 쥐가 되고, 사람들이 쥐를 잡을 때에는 굴에서 나와 새가 되는 것과 같다’고 하였는데
지금의 좨주(祭酒)가 그러하구나. 아내와 아들을 기르면서 자비와 사랑이 있다고 이르고, 밭 갈고 심기를 부지런히 하면서 부모에게 타고난 터럭과 살을 헐지 않기 위해서라고 말하면서 왕역(王役)으로 조세를 과(課)하면 출가한 자라고 이르니, 또한 박쥐가 나가고 들어가는 것과 같다 하겠다.”
외적으로 논하여 말하였다.
“대저 성인이 세상에 응함은 본래 창생(蒼生)들을 제도하여 이익케 함으로써 우러러보고 굽어 살피면서 여러 품류(品類)들을 이익되게 하는 것이다. 그 때문에 풀과 나무를 맛보고 오곡의 정기에 합하며 뽕나무들을 심어서 팔잠(八蠶)의 실에 충당한다. 그러기에 의상(衣裳)을 드리우고 가색(稼穡)이 있게 되며 사(社)의 정(正)을 세우고 옷 맡는 이를 두어서 백성들을 이익하게 함이 이에 있게 된다. 만일 한 여자가 길쌈을 하지 않으면 천하가 그 때문에 추위에 괴롭게 되고, 한 남자가 농사를 짓지 않으면 천하가 그 때문에 먹을 것이 적게 된다.
그런데 석가모니가 가르친 법은 길쌈을 하지 않고 농사를 짓지 않게 한다. 불경에는 밥을 먹지 말라는 법이 없는데 밭에는 밭갈고 심는 사람이 없고, 가르침에는 전련(轉練:金丹을 단련하는 것)하는 방법이 없고, 베 짜는 것을 업으로 삼는 지어미가 없어졌으니, 그러므로 알겠다.
발우를 가지고 석장(錫杖)을 흔들어서 입에 풀칠을 하려 하여도 누구를 기대겠으며, 옷깃을 왼쪽으로 하고 편단우견(偏袒右肩) 하고자 한들 어디에 취탁(取託)하겠는가?
그러므로 한 해 중에 굶주리고 추위가 다 이를 것이니, 중생을 이익하게 함을 듣지 못하였으며 또 곤궁함을 보인다.
그런데도 세상에서 이를 알지 못한다고 하는 것이 그 미혹함의 네 번째이다.”
4) 불교의 측면에서 농사를 버리고 걸식[分衛]하기를 가르침
불교의 입장에서 훈계하여 말하였다.
“도를 도모하는 데는 먹을 것을 먼저 해서는 안 되고, 믿음을 지키는 데는 배고픔을 반드시 뒤에 한다. 그 때문에 걸닉(桀溺)이 농사에 힘쓰자 공자는 그를 새와 짐승에 비유하였으며, 번수(樊須)가 농사짓기를 배웠는데 공자는 그를 소인(小人)이라고 기롱하였다. 직하(稷下)에는 지위가 없는 선비지만 녹(祿)을 주어 부른 것은 그들의 어짊을 높인 것이요, 금루(黔婁)는 벼슬하지 않았지만 상사(賞賜)를 받은 것은 그의 청정함을 숭상한 것이다. 그러니 착한 사람의 도는 어찌 반드시 농사를 지어야 하겠는가?
청하노니 그대를 위하여 말하겠다. 석가모니의 가르침은 인과 과를 증험하여 3세(世)의 넓은 근원을 꾸렸지만, 선도(仙道)는 금과 옥을 숭상하여 겨우 일생의 허비만 수고한다.
어찌하여 그런가?
어질고 어리석고 장수하고 요절(夭折)함을 손바닥을 가리키듯이 믿고, 가난하고 부하고 귀하고 천한 것은 눈 앞에 분명하여서 보응(報應)은 형체와 그림자 같이 어긋남이 없고, 업연(業緣)은 또한 소리와 메아리처럼 다르지 않으니 이것이 그의 취지이다. 단약(丹藥)을 복용하여도 죽지 않고 진액(津液)을 먹어서 오래 사는 것을 보지 못하였다.
고시(古詩)에 ‘약을 복용하여 신선되기를 구하면, 약에 그릇되기 쉬우니, 아름다운 술을 마시고 고운 명주와 흰 천을 입는 것만 못하다.’고 하였는데, 후세의 사람에게 말을 붙이기를 ‘도사를 삼가 짓지 마오’ 하였다. 이는 헛되이 공부를 버리고 허망하게 수명과 요절을 말하기 때문임을 말한 것이다.
그대에게 전련(轉練)의 방법이 있으면 무엇으로 인하여 다시 전지(田地)를 청구하며, 다시 길쌈하는 부인을 말하겠는가? 이는 반드시 알겠다. 그들이 모두 아내와 첩을 두었기 때문에 도사가 전용하는 농사짓는 남자와 길쌈하는 여자가 필요한 것이다.
어찌하여 입에 풀칠하는 것을 충당하지 못하며, 항상 몸을 자양하는 것을 못한다 하며, 만일 그들이 길쌈을 하지 않고 농사를 짓지 않으면 곧 가난한 곳에 떨어진다 하는가? 가만히 보니, 누관(樓觀)의 황건(黃巾)들이 사슴의 가죽을 벗겨서 땅에 얽매이며, 현도(玄都)의 귀졸(鬼卒)들이 횡피(橫帔)를 버리고 농사지어도 이미 양식 끊어진 사람이 없고 자못 객작(客作)의 게으름이 부끄럽다. 스스로 방아찧고 스스로 갈아도 굶주림이 그 가운데 있다. 그래서 몸을 수고하고 마음을 조이니 무슨 도가 있겠는가?
찾아보니, 한나라 안제(安帝)의 원년 임오년에 도사 장릉(張陵)이 황서(黃書)를 분별하여 ‘남자와 여자가 화합하는 법으로서 삼(三)과 오(五)와 칠(七)과 구(九)의 교접(交接)하는 도가 있다. 그 도의 참다운 비결은 단전(丹田)에 있으니, 단전이라 함은 옥문(玉門)이다. 오직 금비(禁秘)로써 중요하게 여기어서 도로에 함부로 누설(漏泄)하는 것을 허락하지 아니하였다. 도로라 함은 오줌누는 구멍이다. 스승이니 벗이니 부모니 하면서 성근(性根)을 더럽히는 이름이 있다’ 하였다.
또 ‘여자 아이로서 시집가지 아니한 14세 이상의 아이에게 결명(決明)의 도가 있다’ 하였다.
그러기에 『오천문(五千文)』에 주석하여 ‘도를 도라 함은 이른바 아침에 맛있는 음식을 먹음이요, 항상한 도가 아니라 함은 저녁에 오줌이 됨이다. 둘은 같은 것에서 나왔지만 이름이 다르니 이른바 사람의 성근이 오줌을 내고 오줌에서 정(精)이 나오는 것이다. 현(玄)하고 또 현하다 함은 이른바 코와 입이다’ 하였다.
능미(陵美)가 이 방법을 아들과 손자 삼대로 서로 계속하여 행하였다. 그대의 법이 이와 같이 백성들을 더럽히고 어지럽히니, 만일 백성들에게 권하여 그대의 방법을 의지하여 행하게 하면 효성스럽지 못하고 공손하지 못하여서 대대로 승냥이와 이리 같은 종자들만 낳을 것이요, 예가 없고 의리가 없어서 집마다 올빼미와 원숭이 같은 아이를 낳을 것이 분명하다.
대저 기이한 재물을 가려 구하는 자는 검은 용의 턱 밑에 있는 구슬을 캐기 위하여 아홉 굽이로 돌아 흐르는 깊은 곳도 꺼리지 않고, 빛나는 박옥(璞玉)을 구하는 자는 남염(藍琰)의 구슬을 추구하여 삼습(三襲)의 위험함도 꺼리지 않는 것은 그 보물을 귀하게 여김이요, 지극한 도를 사모하는 자는 그 창을 엿보아서 세력과 이익을 기러기의 털같이 가볍게 여기고 그 은밀한 곳에 들어가서 영화와 지위를 벗어놓은 신과 같이 소홀하게 여기는 것은 그의 참됨을 중하게 여기는 것이다.
그러기에 게으른 사람으로 하여금 그의 힘을 아끼지 않게 하고, 가난한 길손으로 하여금 그의 재물을 아끼지 않게 하는 것은 대개 그윽한 이익을 바람이요, 그들이 미혹한 것이 아니다.
그런데 신선되는 술법이 탄망(誕妄)한 데 이르러서는 그의 근원과 흐름이 오래 되었으니 한종(韓終)과 서시(徐市)가 처음으로 진(秦)나라에서 속였고, 문성(文成)과 오리(五利)는 거짓을 이어서 한나라에서 속였다. 그래서 학을 당겨 타는 것을 서술하였지만 구름을 능멸하는 실효를 거두지 못하였으며, 노을을 먹는 것을 말하였지만 배고픔을 치료하는 믿음을 보지 못하여서 노원(猱猨)과 신합(蜃蛤)과 같다는 이론이 있는 데에 이르렀다.
[주] 조식(曹植)의 『변도론(辯道論)』에
‘신선이라 함은 노원의 무리와 같은 부류인가? 세상 사람들이 도를 얻으면 변하여 신선이 된다 하였으니, 마치 꿩이 바다에 들어가서는 변화하여 조개가 되고, 제비가 바다에 들어가서는 변하여 큰 조개가 되지만 그들이 배회(徘徊)함에 있어서는 그의 날개를 연못에 드리운다. 그것은 스스로 변하였음을 알기 때문이다.
그런데 홀연히 스스로 던져서 신(神)이 변화하고 체가 변하여 다시 물고기와 자라로 되었으니, 어찌 옛날 임박(林薄)에 날개치고 원옥(垣屋)에 집을 지었던 즐거움을 알겠는가?
우애(牛哀)가 병을 앓다가 변하여 범이 되었는데 그의 형을 만나 잡아먹었으니 이와 같이 되면 어찌 변화를 귀하게 여기겠는가?’라고 하였다.
바람을 붙잡아 매고 그림자를 붙잡는다는 말이 있다. 그러기에 박의 열매를 버리는 것은 그릇이 못되기 때문이요, 돌밭을 폐지하는 것은 경작(耕作)하기 어렵기 때문이요, 좌도(左道)를 천하게 여기는 것은 허위(虛僞)이기 때문이다.
대개 실지를 검사하면 그와 같은 것을 일컫고, 헛된 것을 연구하면 그와 다른 것을 모은다. 이치가 부합하면 세상에서 귀중하게 여기고 뜻을 속이면 물건이 어긋남은 일상(日常)의 일이다. 어찌 그를 미혹하다 하겠는가? 도교를 낮게 여기고 불교를 높이 보는 것이 또한 옳지 않겠는가?
그런데도 스스로 알지 못하니 그의 눈먼 것의 네 번째이다.”
외적으로 논하여 말하였다.
“대저 나라는 백성으로 근본을 삼는다. 근본이 굳으면 나라가 편하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하사[賜]는 아들을 기르는 문에 미치고 은혜는 아이를 밴 부인의 집에 흐른다. 그리고 아들과 손자가 제사를 받드는 것이 대대로 실려 이지러지지 않는다. 비록 지극한 효도가 몸을 헐더라도 제사를 끊이지 않게 한다. 그러기에 국가가 부하고 굳세어서 천하가 번창하고 성하는 것이니, 인민이 쇠잔하여 없어지고 나서 국가가 있다 함을 듣지 못하였다.
그런데 불교에서는 시집가지 않고 장가들지 않는 것을 법을 받드는 것이라 하고, 오직 부처님만 섬겨야 열반을 얻는다 하니 이미 길이 사는 방법이 없고, 또한 죽지 않는 술법이 없다. 그렇게 되면 한 세상 가운데 집과 나라가 빌 것이며, 세속 사람들이 비록 복을 구하고자 하나 형체와 목숨이 이미 쇠잔하게 됨을 알지 못하니 다투어 집이 편안하기를 사모한들 어찌 종(宗)의 제사가 오래 전에 없어졌음을 깨닫겠는가? 이를 일러 죽음을 두려워하면서 독초를 복용하는 격이요, 물에 빠짐을 두려워하면서 큰 하수에 나가는 격이라고 한다.
또 천황씨와 지황씨의 앞 세대에는 부처가 없었어도 국운(國運)이 길었으며, 후조(後趙)와 후위(後魏) 이래는 승려가 있었어도 국운이 단축되었다. 이것은 바로 참과 거짓이 뒤섞이고 예와 악이 고르지 못함으로 말미암는 것이다.
그런데도 세상에서 알지 못하니 그 미혹됨이 다섯 번째이다.”
5) 불교의 측면에서 교가 다스림의 근본이 된다는 취지
불교의 입장에서 훈계하여 말하였다.
“대저 신(神)을 맑게 하고 성품에 돌아오는 것은 도에 들어가는 요긴한 문이요, 정(情)을 끊고 욕심을 버리는 것은 성인에 오르는 먼 근본이다. 그러기에 ‘도가 높은 자를 숭상하고 덕이 큰 자를 상을 준다’고 하였으니, 도로써 신을 전하고 덕으로써 성인에게 준다. 신과 성인을 서로 전하는 것, 이를 훌륭한 계승이라고 이른다. 그러기에 도의 근원을 막고 덕의 뿌리를 치는 것, 이를 뒤를 이을 자가 없다 한 것이요, 애욕을 버리는 것을 뒤를 이을 자가 없다고 이른 것이 아니다.
그대는 듣지 못했는가?
옛날 하상지(何常之)는
‘석가모니의 교화는 옳지 않음이 없다. 도에 들어가는 교의 근원을 알고 풍속을 제도하는 데 우두머리로 일컬음을 알아야 한다. 대저 하나의 착함을 행하면 하나의 악함을 버리고, 하나의 악함을 버리면 하나의 형벌이 없어져서 하나의 형벌이 집에서 없어지면 만 가지의 형벌이 나라에서 없어진다. 그러기에 다섯 가지의 계와 열 가지의 착함이 바로 다스리는 근본이 된다’ 하였으며, 또
‘다섯 가지의 계를 닦음에 악취(惡趣)가 멸하여지고, 열 가지의 착함이 드러남에 사람과 하늘이 자성(滋盛)한다. 사람과 하늘이 자성하면 바른 교화가 높아지고, 악취가 쇠잔하면 재해가 없어진다’ 하였다.
[주] 『정법념처경(正法念處經)』에
‘사람이 계를 가지지 않으면 여러 하늘은 감소하고, 아수라(阿修羅)는 번성하며, 착한 용은 힘이 없고 악한 용이 힘이 있게 된다.
악한 용이 힘이 있으면 서리와 우박이 내리고, 때가 아닌데 사나운 바람과 세찬 비가 와서 오곡이 풍성하지 않고, 전염병이 다투어 일어나며 인민들이 굶주려서 서로서로 잔해(殘害)한다.
만일 사람이 계를 가지는 이가 많으면 여러 하늘들이 위엄과 광명을 충족하게 되고, 아수라가 감소하고 악한 용이 힘이 없으며 착한 용이 힘이 있게 된다.
착한 용이 힘이 있으면 바람과 비가 때에 맞추어 사기(四氣)가 화창해지고, 단 비가 때에 맞게 내리며, 백곡이 풍성해지고, 인민들이 안락해지며 전쟁이 그치고 전염병이 돌지 않는다.
이는 마치 섶을 숨기고 풀을 없애면 이익은 무겁지만 드러나기 어렵고, 불꽃을 끄고 불타는 것을 끄면 행적은 미미하나 드러나기 쉬운 것과 같다.
그리고 또 뼈를 강하게 하고, 기를 약하게 하는 것은 노자의 지극한 말이요, 골수를 보전하고 정기를 아끼는 것은 신선 공부의 깊은 뜻이다.
그런데 이제 도리어 음욕(淫欲)을 일러 묘한 가르침이라 하고, 아내와 자식을 교화의 근원이라 하는 것은 노자를 종(宗)으로 받들면서 그가 말한 것을 헐뜯는 것이며, 신선을 공부하면서 그의 술법을 버리는 것이 아닌가?
또 개와 말을 사랑하는 것은 그것이 은혜를 아는 것을 귀하게 여김이요,
올빼미와 원숭이를 미워하는 것은 그것이 은혜를 잊고 주인을 무는 것을 미워함이다.
그러한즉 밤을 경계하여 수고를 대신하여도 공은 개와 말보다도 못할 것이요,
비늘을 거슬러서 혀를 뒤집어도 해가 올빼미와 원숭이보다 깊음을 깨달아야 한다.
수컷 뱀 아홉 마리가 그렇지 않은가?
귀신 한 수레를 싣는 것이 또한 두렵다고 하겠다.
또한 나라의 운이 길고 짧은 것은 비록 하늘의 명이라 하지만 흥하고 흥하지 못함과 길고 짧은 것은 또한 사람이 하기에 달렸다.
그러기에 요임금과 순임금과 우(禹)임금과 탕(湯)임금은 다 아름다운 수(壽)를 누렸고, 걸(桀)임금과 주(紂)임금과 유(幽)임금과 여(厲)임금은 하늘의 명대로 살지 못하였다.
그리고 주나라 무왕 발(發)은 도를 밟았기에 국운이 길어졌고, 진시황 정(政)은 형벌을 혹독하게 하여 국운이 짧았다.
진사(陳思)의 논(論)에
‘옛날 요임금과 순임금과 우임금과 탕임금과 문왕(文王)과 무왕(武王)과 주공(周公)과 소공(邵公)과 태공(太公)은 모두 백 년의 수를 누렸다.
이들 일곱 성인과 세 현인(賢人)은 모두 도를 행하여서 천하에서 정치를 닦았기에 신(神)을 허비하지 않았고, 한 나라에 어진 재상으로서 생각을 수고하지 않았으니, 이 때문에 각기 천 년을 다한 것이다.
걸 임금은 명조(鳴條)에 추방당하였으며, 주임금은 목야(牧野)에서 죽었고, 견융(犬戎)은 유임금을 죽였으며, 여임금은 천수를 마치지 못하였다.
주나라의 운수는 8백 년을 갔고 진나라는 두 대에서 멸망하였다. 이때는 본래 부처와 중이 없었다’고 하였다.
모(謨)와 곡(誥)을 보게 되니 헛된 말이 아니라 하겠다. 이때는 부처가 없었는데도 국운이 연장되었고 후세에는 부처와 중이 있었는데도 나라의 운수가 짧았는가?
말하기를 어찌 그리 쉽게 하며 어찌 그리 쉽게 하겠는가?
아깝구나. 그대가 스스로 근심을 샀으니 참으로 탄식하겠다. 어둡기가 밤에 노는 것과 같구나.
그대의 눈먼 것이 다섯 번째이다.
외적으로 논하여 말하였다.
“대저 효도는 덕의 근본이 된다. 인륜이 먼저 할 것으로서 이보다 큰 종(宗)은 없다. 진실로 아버지 어머니는 호천(昊天) 같은 은택이 있으니 어찌 갚는다 하겠는가? 그러기에 살아서는 따뜻하게 하고 시원하게 하는 공손함을 다하고, 돌아가셔서는 무덤과 능의 예를 갖추어야 한다. 그런데 이제 부처의 가르침은 반드시 그의 해골을 버려서 풀과 들판에 두게 하면서 많은 재산을 내서 부처의 탑과 사당을 경영하게 하니, 드디어 어리석은 지아비들로 하여금 의혹하고 어지럽게 하여 이 전례(典禮)를 폐지하게 해서 아버지와 어머니의 관에 일찍이 봉하고 나무를 세울 마음이 없게 하였다.
[주] 상황(上皇)의 세상을 보니, 빈장(殯葬)하는 예가 없었는데 주나라 시대에 이르러서 땅 속에 묻는 일[窀穸]이 비롯되었다. 그러기에 노끈으로 혜독(槥櫝:작은 관)을 묶고 기와로 우관(虞棺)을 닫는 것들은 다 중고(中古)에서 일어난 것이다. 주나라 문왕(文王)의 때에 이르러서 해골들이 들에 아무렇게나 나와 있던 것을 거두어 감추었기에 비로소 장사(葬事)의 예가 행하여졌다.
그러기에 ‘장사한다는 것은 감추는 것이다’ 하였으니,
사람들이 보지 않게 하고자 함이었다. 이 때문에 공자가 병이 위독할 적에 제자들이 후장(厚葬)하려 하니,
공자가 ‘내가 하늘을 속이겠는가?
불모(不毛)의 땅을 가려서 봉하지 말고 나무도 심지 말며 오직 가시와 모감주나무[欒]만을 심어라’ 하였으니,
말세에 장례(葬禮)가 행해진 것과 같았으니, 이는 대개 세속의 일을 면치 못한 것이다.
오랑캐들은 시체의 영(靈)을 돌이켜서 조각하여 장식하는 묘를 다하였다. 한 귀신도 그의 자손이 아니면 제향(祭享)을 받지 않고 사람들 또한 제 조상이 아니면 제사지내지 않는데, 그의 어버이는 공경하지 않고 다른 사람은 공경한다 함이 이를 이름이다.
또 수장(水葬)이 있고 화장(火葬)이 있어서 풍속이 다르며, 시체를 파묻음이 있고 시체를 드러냄이 있으니, 마을과 나라가 본래 다르다. 그러니 자기를 버리고 남을 따름으로써 복을 구한다. 어찌 지방의 풍속이 달라서 각자가 그러한 것임을 알겠는가? 이를 세상이 알지 못한다고 하는 것이니,
그 미혹함이 여섯 번째이다.”
6) 불교의 측면에서 충과 효가 어김이 없다는 취지
불교의 입장에서 훈계하여 말하였다.
“목쉬고 귀먹은 자를 인도하는 자는 반드시 구부리고 우러르며 손가락으로 휘둘러야 하고, 어리석고 막힌 것을 여는 자는 또한 귀를 끌고 손바닥을 들어야 한다. 대저 인륜은 효도와 공경을 근본으로 하고, 효도와 공경은 생성(生成)을 의뢰한다. 그러기에 ‘아버지와 어머니가 아니면 날 수 없고 성인이 아니면 서지 못하며, 성인이 아니면 법이 없고 효도가 아니면 어버이가 없다’고 하였으니, 이는 곧 생성의 의리가 통하고, 스승과 어버이의 정이 나타나는 것이다. 그러기에 안회(顔回)가 죽었을 적에 안로(顔路)가 공자의 수레를 청하니 공자가 ‘안회는 나를 대하기를 아버지와 같이 하였지만 나는 안회 보기를 아들과 같이 하지 아니하였다’ 하였으니, 그것은 의리이다.
또 사랑하고 공경하는 예가 다르나 얼굴은 두 가지의 이치에서 벗어나지 않고, 어질고 어리석음의 성품이 다르나 품질은 세 가지의 계층을 넘지 않는다. 그러기에 살아서는 효도로 봉양하여 어김이 없어야 하고, 죽으면 장사와 제사를 예로써 해야 하니, 이것이 예제(禮制)의 다름이다. 그리고 작은 효도는 힘을 쓰고, 중간 효도는 수고로움을 써야 하고, 큰 효도는 다함이 없어야 하니, 이는 성분(性分)이 다름이다.
불교와 비교하면 그러한 뜻이 있다. 피를 뿌리고 몸을 태우는 무리와 보탑(寶塔)과 인사(仁祠)의 예에 이르러서는 또 처음을 공경하고 마침을 삼가는 것을 이름이다. 전륜성왕의 8만 보탑과 제석천왕(帝釋天王)의 3천 보탑이겠는가?
『아육왕경(阿育王經)』에 ‘아육왕이 8만 4천의 궁인(宮人)을 죽였는데 밤에 궁 밖에서 호곡하는 소리가 들리기에 아육왕이 뉘우쳐서 8만 4천의 보탑을 세웠다’ 한다. 지금 이 중국에도 또한 비슷한 것이 있다. 석제환인(釋提桓因)이 하늘 위에서 3천 개의 탑을 조성하였다 한다.
명해(溟海)를 마르게 하여 구슬을 구하고 거리를 깨끗이 하여 돌을 옮기는 것은 대개 힘을 수고롭게 함이요, 여러 중생을 총괄하여 자기의 임무로 삼고 함기(含氣)를 천속(天屬)과 같게 하며 유루(有漏)의 땅에 깃들이고 무뢰(無賴)한 무리들을 짊어지는 것은 대개 마음을 수고롭게 함이요, 실상(實相)의 구역에 회헌(回軒)하고 적조(寂照)의 마당에 응신(凝神)하며 열반을 가리켜서 길이 돌아가고 법신을 타고 멀리 보는 것은 다함이 없는 도리이다. 어머니가 하늘에서 내려옴에 금관(金棺)을 깨뜨려 글귀를 연설하였고, 아버지 왕이 세상을 떠남에 보상(寶床)을 들고 세상 마침을 전송하기에 이르렀다.
『지도론(智度論)』에 ‘아버지 정반왕(淨飯王)이 목숨을 마치자 부처님이 스스로 승상(繩牀)의 다리 하나를 들고 화장하는 곳에 갔다. 그래서 후세의 일체 중생에게 낳고 길러주는 은혜를 보답함을 보였다’ 하니 효도와 공경을 표한 위의가 또한 갖추어졌다. 그런데 해골을 버리게 가르쳤다 함은 무슨 말인가?
또 불경에 시다림(屍陀林)을 권한 것은 날짐승과 길짐승에게 널리 베푼 것이니, 뜻은 묵은 빚을 갚아 장래를 면하기를 바란 것이다. 장주(莊周)의 말세에서 후장(厚葬)하여 예를 잃는 것을 그르다 말한 근본과는 같지 않다. 그러한데도 개미들은 어찌 친하고 새짐승들은 어찌 소홀하게 한다 이르겠는가? 살아서는 자기의 몸을 역려(逆旅:여관ㆍ客舍)로 보고 죽어서 마땅히 하늘과 땅으로써 관곽(棺槨)을 삼는 것이니, 이는 도리어 상고에서 매장을 허락하지 아니하여 중생들이 생을 가볍게 여기고 죽음을 중하게 보는 폐단을 혐오함에 의지한 것이라 하겠다.
신선의 도를 구하는 자는 혹은 책을 짊어지고 스승을 좇아 먼 산에 지고 가며 등칡을 헤치고 혜초(蕙草)로 짜며 검은 신을 끌고 경을 읽는다. 그러나 황금 부엌은 이루기 드물고 옥의 꽃은 보기 어렵다. 골수를 응시하고 뼈로 화한다는 것은 공연히 이러한 말만 이루고, 무지개를 이고 용에 기댄다는 것은 그 실상을 보지 못하였다.
혹은 해골을 지필(地胇)에 버리고, 뼈를 천태(天台)에 잃으며, 살아서는 증양(蒸養)하는 은혜를 궐하였고 죽어서는 명익(冥益)하는 이익이 없다. 전도된 마음은 뭇 사물에 위태롭고 삿된 그물은 여러 중생에게 걸림이 된다. 아홉 겨레는 바름을 헐뜯는 재앙을 맞이하고, 여섯 친척은 성인을 속인 업을 부른다. 위태로움을 반연하고 섞음을 의거(依據)하니 알기에 한심스러우며 거만하여 두려워하지 않으니 얼마나 어리석음이 심한가?
유유하여 깨닫지 못하니 그대의 눈먼 것의 여섯 번째이다.”
외적으로 논하며 말하였다.
“대저 중국과 오랑캐는 말이 달라서 음운(音韻)이 같지 않다. 그래서 불경에서 석가(釋迦)를 모니(牟尼)라고 일컫는 것은 오랑캐의 말이고, 중국에서는 번역하여 능유(能儒)라고 말한다. 능유의 이름은 지위가 주공이나 공자보다 낮으니 그래서 능유라는 용렬한 말을 쓰지 않고 석가라는 오랑캐의 칭호를 그냥 썼다.
아뇩다라삼먁삼보리(阿耨多羅三藐三菩提)라 함은, 중국말로는 아(阿)는 없다는 것이요, 뇩다라(耨多羅)는 위라는 뜻이며 삼먁삼은 정변지(正遍知)라는 뜻이요, 보리(菩提)는 도(道)라는 뜻이다. 중국에서 먼저 더 위가 없는 바르고 참된 도가 있었으니 노자와 장자의 가르침은 오랑캐의 법에는 없어서 다르기 때문에 그래서 번역하지 않았다.
또 보살마하살(菩薩摩訶薩)이라 한 것은 중국말로 큰 착한 마음을 가진 중생이라는 말이다. 이 이름은 낮고 용렬하여서 상사(上士)가 되지 못하기에 그 더러운 칭호를 버리고, 또한 번역하지 않았으니, 무릇 번역하지 않는 종류는 그 예가 이와 같아서 세속을 덮어 가리고 중생들의 마음을 의혹하여 어지럽힌다.
그러나 옛 것을 싫어하고 새것을 숭상하는 것은 유행의 항상 있는 폐단이요, 같은 것을 싫어하고 다른 것을 좋아하는 것은 세속의 더러운 정이다.
이 때문에 한단(邯鄲)에서는 엎드려 기는 손님이 있었고, 익상(溺喪)에서는 돌아감을 잊는 길손이 있었어도 세상에서 알지 못하니
그의 미혹함이 일곱 번째이다.”
7) 불교의 측면에서 삼보(三寶)는 번역하지 않는 취지
불교의 입장에서 훈계하여 말하였다.
“대저 이름은 얻는 물건이 없다 하였으니 대개 실지의 빈(賓)임을 이른 것이다. 그러니 어찌 세상에 순(順)하는 가담(假談)으로써 현묘한 성인의 우열(優劣)을 따지겠는가? 대저 순씨(荀氏) 집에서 우두머리는 질(質)을 부르고, 중씨(仲氏)는 산을 가져다 이름을 지으니 산이 구(丘)보다 높았지만 중씨의 어짊이 공자만큼 넓지 못하였고, 머리는 귀를 총괄하였다. 그러나 순씨의 덕이 노담(老聃)에 미치지 못하였으니, 능유의 이름이 어찌하여 주공과 공자보다 아래겠는가?
그런데 석가모니의 호는 뜻이 여러 가지를 포함하여서 1만 덕에 두루 관통하니 인(仁) 한 가지만으로 치우쳐 새겨서는 안 된다. 통인(通仁)은 4구(句)의 변론이 끊어졌다. 그러니 어떻게 일정하게 번역하겠는가? 번역하여 찬술한 자가 일이 부득이하여 억지로 옛 호칭을 두었을 뿐이다.
또 ‘도가에서 옛날에 정변지(正遍知)가 있었다고 하고, 도와 보리는 다르지 않다고 말한 것은 참으로 정교(正敎)였던 것이 후세에 유전하면서 이 이름을 훔쳐 쓴 것이다. 그러나 사실을 따지고 근원을 찾으면 어떻게 이 호칭을 얻겠는가? 대저 상법(上法)은 높고 뛰어나며 도의 뜻은 통현(通玄)한 것이다. 바르고 진실한 것은 삿된 것을 뒤집고, 진(眞)은 거짓된 데서 돌아옴을 말미암는다. 이제 부적의 글은 주저(呪咀)이니 바르다고 말할 수 없고, 향기로운 풀[薰]과 누린내 나는 풀[蕕]이 혼잡하니 참되다고 할 수 없다’ 하였다.
도사의 외귀장부(畏鬼章符)에 ‘왼쪽에는 태극장(太極章)을 차고 오른쪽에는 곤오철(昆吾鐵)을 띠어서 해를 가리키면 해가 멈추고, 귀신을 견주면 천 리나 달아났다’고 하였다. 동중(董仲)은 「황신월장(黃神越章)」을 지어 귀신을 죽였으며, 또한 「적장법(赤章法)」을 지어 사람을 죽였다.
자(雌)를 지키는 것은 하(下)이고 상(上)이라고 이를 수는 없다.『노자』가 ‘자를 지키는 것만 못하다’ 하였으며, 또 ‘도의 성품은 물과 가깝다’고 하였다.
입에 자물쇠를 채우고 눈에 아교칠을 하였으니, 어찌 도라고 할 수 있으리오.『장자』에 ‘이주(離朱)의 눈에 아교칠을 하고, 양묵(楊墨)의 입에 자물쇠를 한다’고 하였다.
이는 마치 봄 새가 지저귀는 것이 혹은 노래하는 것과 같지만 새는 실로 노래할 수 없고, 가을 벌레가 나무를 쪼면 혹은 글자에 가깝지만 벌레는 진실로 글자를 알지 못하는 것과 같으니, 이름과 실지가 뒤죽박죽이 된 것은 대개 이를 말하는 것이다.
또 보살을 번역하지 않았음을 의심하는 것은 이의 오류(誤謬)가 더욱 심하다. 서(書)에 ‘상성(上聖)은 초명(鷦螟)에 달한다’ 하였으니, 모두 벌레의 칭호이다. 불경에서는 ‘발이 여러 개인 것이나 발이 둘인 것 중에 여래(如來)가 가장 존귀하다’ 하였다.
그런데 벌레는 영성(靈性)을 함유한 것에 공통되는 것이니, 중생이 어찌 범성(凡聖)을 초월하겠는가? 대심(大心)이라 일컬음은 하열(下劣)한 것이 아니다. 그대가 아무리 때를 씻고 티를 찾으려 하여도 남위(南威)의 고움은 손감(損減)할 수 없고, 마음을 받들어서 흉을 보려 하여도 서시(西施)의 고움은 변하지 않는 것이다.
마땅히 다시 그대를 위하여 손바닥 가리키듯이 베풀어 보이겠다. 석가모니는 부처님의 나타난 이름이요, 보리는 법의 존칭이요, 보살은 스님의 도수(導首)이다. 삼보의 뛰어난 호칭을 불경을 번역하는 사람이 그의 본 이름으로 두었으니, 도교의 주문옥주(朱門玉柱)의 참(讖)과 양부음모(陽父陰母)의 음란한 것과는 같지 않다.
『황서(黃書)』에 ‘명문(命門)을 열어서 진인(眞人)을 안는다. 어린애가 돌듯, 용이 서리듯 세 번 다섯 번 일곱 번 아홉 번을 실으며, 하늘이 그물이요, 땅이 그물이듯이 주문을 열어서 옥주를 나아간다. 양(陽)은 음모(陰母)의 희기가 옥 같음을 생각하고, 음(陰)은 양부(陽父)가 손으로 만지는 것을 생각합니다’ 하였으며, 말똥을 영신(靈薪)이라 부르고, 입의 침을 옥액(玉液)이라 부르며, 이를 두드리는 것을 천고(天鼓)라 하고, 목구멍의 침을 예천(醴泉)이라 하였다. 말똥을 영신이라 하고, 늙은 쥐를 옥박(玉璞)이라 한 것은 『상청경(上淸經)』에 나온다. 일이 더러워서 드러내기를 겁내고 말이 더러워서 나타내기 어려운 것이 마치 영봉(靈鳳)이 덕을 받아들여 보기를 바라는 것과 같고, 다람쥐가 추하고 두려워함으로써 형체를 숨기는 것과 같으니 비록 숨기는 바탕은 일이 같으나 추함과 고움은 다른 것이다.
그런데도 명연(冥然)히 알지 못하니 그대의 눈먼 것이 일곱 번째이다.”
외적으로 논하여 말하였다.
“대저 성인의 응화(應化)는 방소(方所)를 따라 가까이 이끌어 들인다. 그러기에 오랑캐에 있으면 머리를 깎고 정수리를 드러내며, 중국에 있으면 단위(端委)하게 홀(笏)을 대대(大帶)에 꽂으니, 이는 중국과 오랑캐의 평상시의 모습이지 교화하는 방소가 뛰어나고 못함은 아니다. 만일 부처님께서 구차스럽게도 이 관면(冠冕)을 버리고 치의(緇衣)를 입게 하며, 우리 중국의 풍속을 버리고 멀리 오랑캐의 풍속과 같이하였다면 이는 곧 관면에 겸하여 통달하지 못하여서 문득 지혜의 힘이 두루하지 못하였을 것이니, 어찌 천축에는 방소를 따라 형체를 나타내어 설교한다고 이르겠는가?
진실로 이를 하지 못한다면 이는 곧 부처는 천축에서 난 오랑캐의 신이요, 중국의 큰 성인은 아닐 것이다. 그러니 어찌 머리를 깎는 교훈을 정국(正國)에 베푼다고 이르겠는가? 만일 중국에서 오랑캐의 형체를 배워서 머리를 깎는 것을 부처를 섬긴다고 이른다면 옛날부터 중국의 법을 익혀서 수건을 쓰는 것이 또한 도교를 받든다고 하겠다.
그러므로 알겠다. 정수리를 드러내는 것과 머리를 기르는 것은 나라의 풍속이 다른 것이다. 슬픈 것은 선비와 백성들이 이렇게 해서 착함을 닦는다고 하니, 이를 일러 이웃의 떨어진 옷을 귀하게 여기면서 자기 집의 보불(黼黻)은 천히 여기는 것과 같다고 하겠다.
이를 세상 사람들이 알지 못하니 미혹한 것의 여덟 번째이다.”
8) 불교의 측면에서 방소가 다르면서 제도가 같음을 가리킴
불교의 입장에서 훈계하여 말하였다.
“대저 지극한 도는 운수를 응하여 방소가 따로 없고 성현은 기틀을 타서 가까이 이끌어 들이는 것이니, 공자가 구이(九夷)에 살았으면 그들의 풍속을 더럽게 여기지 않았을 것이요, 우(禹)임금이 벌거벗는 나라에 들어갔으면 기쁘게 옷을 벗었을 것이요, 희백(姬伯)이 월(越)나라에 갔으면 문신(文身)을 하였을 것이요, 무령(武靈)은 세상을 순종하여 오랑캐의 옷을 입었다. 비록 다시 통발[筌]과 올가미[蹄]를 쓰는 방법은 다르나 물고기와 토끼를 잡는 공은 같은 것이다.
하물며 풍속을 바꾸어 마음을 봉하고 형체를 헐어서 뜻을 맺어 관직을 버림으로써 도를 알며, 수염과 머리털을 버림으로써 진(眞)을 닦는다면 성인의 제도가 한갓 이름이 있을 뿐만은 아닐 것이다. 다만 인(仁)과 의(義)가 3유(遊)에 변하고 도척(盜跖)이 5선(善)으로 의뢰한다면 성인의 가르침이 멀고 멀기 때문에 마침내 쥐와 박옥(璞玉)이 이름을 뒤섞었고『유자(劉子)』에 ‘주나라 사람이 죽은 쥐를 박옥이라 한다’ 하였다., 현묘한 교화가 그윽하고 미미하기에 드디어 닭과 봉황이 바탕을 섞었다.『문심(文心)』에 ‘초나라 사람은 산의 닭을 봉황이다’ 하였다. 그러기에 95가지의 철학이 서쪽 건방(乾方)에서 날렸고 36부(部)의 철학이 동쪽 나라에서 뒤섞여 어지러웠다.
우루거자(優婁佉子)의 논과 위세사주(衛世師主)의 경
[『열반경(涅槃經)』에 ‘위세사(衛世師)의 논이다’ 하였다.]
길두(吉頭)와 이라(夷羅)의 신선
[화선외도(火仙外道)를 길파두(吉波頭)라 하였고, 수선외도(水仙外道)를 이숙두라(夷叔斗羅)라고 하였다.]
말가사야(末伽闍夜)의 도
[약제(若提)의 아들이니 단견외도(斷見外道)이다.]
와 같은 데 이르러서는 혹은 물과 불을 의탁하여 성인이라 일컬으며, 해와 달을 기대서 신이라 일컬으며, 4대(大)를 가져다가 인(因)이 아니라 하고, 3업(業)을 가리켜서 과보가 없다 하여 식(識)의 체는 어두운 산과 똑같이 어둡고, 삿된 마음은 어두운 골짜기와 같이 어둡다. 이와 같은 무리들을 서쪽 지방의 삿된 이론이라 한다.
그 다음으로는 괴기스럽게 웃고 신령스럽게 말하며 편안하게 노래하고 넓게 부르며 칼을 삼키고 불을 토하여서 중경(仲卿)의 보통 마음을 놀라게 하고, 비에 양치질하고 바람을 불어서 유안(劉安)의 얕은꾀를 놀라게 하며, 혹은 몸에 중황(中黃)의 부적을 차고 입으로 영비(靈飛)의 부적을 외우며 금궐(金闕)을 밟아 신을 노닐고 옥경(玉京)에 기대서 번뇌를 씻는다. 이와 같은 사례는 동쪽 나라의 이교도의 학문이어서 모두 다 삿된 그물이 마음을 덮고 거꾸로 된 바늘이 눈을 찌르며 깊이 의혹의 참호를 가지고 높게 의심의 성을 쌓아서 각기 한 귀퉁이를 차지하여 삼계에 미혹하여 빠지며 다투어 상견(常見)과 단견(斷見)의 두 가지 견해를 지켜서 9류(流)에 빠져 어두워진다. 식(識)의 체가 윤회하니 무명이 그의 본 성품을 가리었고, 마음의 작용이 떠서 움직이니 취하는 모양이 그의 긴 근원에 빠졌다.
이에 큰 성인이 도의 눈으로 미리 보시고 근기(根機)를 따라 약을 베푸시어 서쪽 국토에 몸을 탄생하시었으며 정교(正敎)가 동쪽으로 흘러 전하였다. 병이 무거움에 의사의 왕이 친히 강림하시고, 병이 가벼움에 약방문을 붙여서 멀리 주셨다. 그것은 치우쳐서 올빼미와 짐승을 제어하게 하고 무거우면 고래와 암고래를 죽임이니, 이는 또한 불교[釋門]의 화타(和陀)와 편작(扁鵲) 같은 방법이요, 법왕의 손자(孫子)와 오기(吳起)와 같은 형세이다.
성인은 두 가지 제도가 없어서 얼굴과 복식의 뜻이 고르니, 마치 맑으면 흐린 하수를 건너서 창해(滄海)를 한 가지 맛으로 돌아오게 하고, 푸르면 붉은 이마에 응하여서 수미산을 한 빛으로 모은다.
충화자(冲化子)는 ‘선기(琁璣)의 글은 다 신선의 죽지 않는 도를 구함이요, 그 다음의 도는 나를 기르는 것이다’ 하였으니, 오늘날 몸과 목숨이 채색을 머무르고 꽃을 연장하여서 3백 년이나 5백 년에 이르면 이로써 참이라 하니, 장생구시(長生久視)의 뜻이 이에 있다.
그런데 지금 도사의 배우는 법은 이로써 생각을 하지 않는다. 그래서 대개는 불가(佛家)에서 몸은 죽어도 정신은 밝아서 다시 뛰어난 곳에 난다 함과 같게 한다. 그러니 만일 이 몸을 귀하게 여기지 않는다면 마음을 오로지하여 부처의 도를 배우는 것만 못할 것이다.
부처의 도는 정신을 경영하고 단련해서 날로 밝히고 날로 이익됨에 매우 이름[名]과 이치[理]가 있다. 정(定)과 혜(慧)의 법은 역력하여 닦을 만하니 어찌 부지런하고 수고함을 하겠는가? 스스로 도사라고 이름하면서 실지로는 불가의 승려들의 법을 배우는 것인데 배움이 또한 전일(專一)하지 못하니, 대개는 용을 그리고 범을 그리는 무리들이다. 그러니 어찌 녹건(鹿巾)을 버리고 황갈(黃褐)을 풀어버리고 수염과 머리털을 깎고 가사를 물들여 입고서 세존께 귀의하지 않는가?
세간의 도사의 경과 도를 행하는 의리는 불가의 두어 논을 본 뒤에 통한다. 말하자면 불가의 경과 논을 훔쳐다가 도교의 서적으로 고쳐 지은 것이니 『황정경(黃庭經)』과 『원양경(元陽經)』과 『영보경(靈寶經)』과 『상청경(上淸經)』등의 경전과 3황(黃)의 법전은 모두 『법화경(法華經)』과 『무량수경(無量壽經)』 등을 고쳐서 지은 것이다. 또한 마음을 닦으려면 좌선(坐禪)의 법을 의지하여 감득(感得)함을 바라는데 좌선의 이름을 고쳐서 정사(精思)라고 부르는 것이다.
상청(上淸)의 법은 더욱 높은데 스승들이 상청 경계의 구역을 넘지 못하였으며, 다음이 태청(太淸)의 신선되는 법인데도 그것마저 버려두어서 논하지 않으니, 그들이 무슨 법을 취하는 것이 불가와 다르기에 도사라고 칭하는지 알지 못하겠다. 그 뜻을 얻은 자는 부처를 스승으로 해야 할 것이다.
그대는 남방의 사람으로서 몸소 모산(茅山) 도사 충화자의 법을 배운 이다. 충화자는 도은거(陶隱居)와 더불어 항상 부처의 법을 공경하여 중히 여김으로 업을 삼으며, 다만 여러 스님들을 만나면 예배하지 아니함이 없었고 바위굴에 불상을 모셨으며, 스스로 문도(門徒)의 배움을 받는 사람들을 인솔하여 아침저녁으로 참회하면서 항상 불경을 읽었다.
조사하여 보니, 『선기초문(琁璣抄文)』의 글은 충화자가 지은 것이니, 그는 당세의 도사로서 부처님을 공경하지 아니함이 없었다. 그러기에 도은거가 대란(大鸞)법사에게 답한 편지에서 ‘지난 초하루에 귀로 스님의 음성을 들었는데, 이 새벽에 눈으로 직접 스님의 편지를 받았습니다. 혹은 스님께 정례(頂禮)한 지 여러 해기에 이러한 진응(眞應)을 이루었습니다. 주신 편지가 바로 그러하기에 등나무와 포류(蒲柳)를 정돈하고 꽃나무에 물을 주고 옷깃을 정돈하여 엄연히 생각하며 경계하는 말씀을 듣는 것 같습니다. 제자 화양(華陽) 도홍경(陶弘景)은 화남(和南)합니다’ 하였다.
그대의 스승이 부처를 섬기고 스님을 존경하여 일찍이 다른 말이 없었다. 그런데 그대는 어찌하여 스스로 본종(本宗)을 위배하는 데 빠졌는가? 의리가 아니요 어짊이 아니어서 죄가 극한 형법을 부른다.
『모자론(牟子論)』에 ‘요임금과 순임금과 주공과 공자와 노자의 교화를 부처에게 비교하면 마치 흰 사슴이 기린과 함께하는 것과 같다’ 하였다. 그런데도 그대가 깨닫지 못하는구나.
그의 눈먼 것이 여덟 번째이다.”
외적으로 논하여 말하였다.
“천황씨의 9기(紀)의 전에는 서계(書契)를 짓지 않았으며, 태호(太昊)의 6효(爻) 이후에야 문자가 일어났다. 그로부터 이래로 재적(載籍)이 점차 커져서 앞의 현인과 가신 성인들이 다 전분(典墳)을 저술하여서 읍하고 양보한 일과 창과 방패의 일이 모두 전책(篆冊)에 진술되어 있다. 그 때문에 왼쪽의 사관(史官)은 일을 기록하고, 오른쪽 사관은 말을 기록하여 바른 붓과 바른 말로써 잘못됨이 없고 거짓됨이 없었다.
그런데 『위서(魏書)』의 「외국전(外國傳)」과 황보밀(皇甫謐)의 『고사전(高士傳)』에 모두 ‘상문부도(桑門浮圖)의 경은 노자가 지었다’ 하였다.
[주] 부도경(浮圖經)이라 함은 『위략(魏略)』과 『서역전(西域傳)』에서 ‘임예국(臨猊國)에 신인이 있으니 이름이 사율(沙律)이다. 사율이 나이가 들어 머리가 희도록 항상 사람들을 가르쳐서 부도가 되게 하였다. 그리고 사람들에게 재앙과 화가 있거나 자손이 없는 자에게는 권하여 부도의 재계를 행하게 하며, 재물을 희사하여 죄를 면하게 하였다. 임예국의 임금이 나이가 많도록 태자가 없었는데 그의 왕비 막야(莫耶)가 부도에 제사함으로 인하여 태자를 낳았다. 그래서 그 태자의 이름을 부도라고 일렀다. 전한(前漢)의 애제(哀帝) 때에 진경(秦景)이 월지국(月氏國)에 사신으로 가니 그 나라 임금이 태자를 시켜서 진경에게 구전해 주었다’ 하였다. 그 때문에 부도경의 가르침이 전한 시대에 일찍이 행하여졌다.
63년 뒤에 한나라 명제(明帝)가 상서로운 꿈을 꾸고서 부도경이 크게 행하여졌다. 그러나 조사하여 보니, 진경의 전에는 경을 노자가 말하였다고 이르지 않았다. 조사하여 보니, 진(晋)나라 때에 도사 왕부(王浮)가 『서역전』을 고쳐서 『명위화호경(明威化胡經)』이라 하였으며, 이에 노자가 유사(流沙)를 건너가서 오랑캐의 임금을 교화하여 부도가 되게 하고, 몸을 변하여 부처가 되었기에 불교가 일어났다고 하니, 이는 거짓되고 속임이 매우 심한 것이다.
다만 계빈국(罽賓國)은 여기서 1만여 리이고 진나라와 한나라 시대로부터 지금까지 장사꾼과 외국 사신들이 서로 이어서 그치지 않으나 노자가 그곳에 있으면서 오랑캐의 임금을 교화하였다고 전하지 않았다. 하물며 부도경과 노자가 몸을 변하여 부처가 되었음을 듣지 못하였다. 설사 노자가 부도가 되었다 하더라도 그가 비로소 부처의 은혜에 보답하여 사리를 공양하여 바야흐로 부처의 성스러운 덕을 나타낸 것이다. 그러니 어찌 이름이 허탄(虛誕)한가?
원굉(袁宏)의 『후한기(後漢紀)』에
‘노자가 오랑캐에 들어가서 몸을 나누어 부처가 되었다’ 하였는데,
도가의 경고(經誥)에는 그러한 말이 매우 많다.
그러나 원굉의 『후한기』를 검사하여 보니, 노자가 부처가 되었다는 글이 본래 없다. 그 당시에는 조정에 박식(博識)한 자가 많았다. 그러니 귀를 막고 요령(搖鈴)을 훔치는 격이며, 사슴을 가리켜서 말이라 하는 격이다. 얼마나 어리석음이 심한가.
『명위화호경』 등에 모두
‘오랑캐의 임금이 노자를 믿지 않았기에 노자가 신비한 힘으로 조복하여서 바야흐로 허물을 뉘우침을 구하니 오랑캐의 임금이 스스로 머리를 깎고 허물을 사과하고 죄를 사과하였다. 이에 노자가 큰 자비로써 그의 어리석고 우매함을 불쌍하게 여겨서 그를 위해 권교(權敎)를 설해서 근기에 따라 계를 지키게 하였다. 두타(頭陀)의 마음을 일으켜서 걸식하게 하였다. 그리하여 그들의 흉악하고 미련한 마음을 제어하게 하였고, 붉은 옷을 편단우견(偏襢右肩)함으로써 강하고 날뛰는 성품을 꺾게 하였으며, 그의 얼굴 모습을 끊어 훼손시키고 경죄(剠罪)와 코를 베는 형벌을 한 몸에 보이게 하고 아내를 금약(禁約)함으로써 그의 발역(勃逆)하는 종자를 끊게 하였다’ 한다.
[주] ‘그대가 아내를 금약함으로써 죄로 여긴다면 도교에서 현도(玄都)에 성인을 모아서 이에 연이(燕爾)하는 방(坊)으로 삼고 지극한 덕이 맑고 비어서 문득 동뢰(同牢)의 관이 있구나’라고 하였다.
그런데 이미 오래 사는 것을 배우면서 그대가 항상 부인을 대하고 노자를 친히 사모하니 다 양아(養兒)이다.
다만 이이는 이씨의 종인(宗人)인데도 사람마다 부인을 취하고, 장릉(張陵)과 장노(張魯)는 대대로 아내를 두었다. 그러기에 남관(男官)과 여관(女官)의 두 이름이 있고 계사(係師)와 사사(嗣師)의 별호가 있어서 위(魏)나라 진(晋)나라로 오면서 관(舘)에서 아들을 낳고, 진(陳)나라와 양(梁)나라 때에는 정(靜)의 안에서 아이를 기르며, 부녀(婦女)를 주문(朱門)이라 부르고 사내를 옥주(玉柱)라고 부르니, 음욕의 더럽고 거만함이 도가로부터 나왔다. 밖으로는 맑고 빈 것을 가장하면서 속으로는 더러운 일을 오로지 하니 부끄러움이 심하다 하겠다. 이른바 무거운 병에 독한 약을 더하였으니 배를 가르고 창자를 씻어야 한다. 깊은 죄는 엄한 형벌로 다스려야 하니 반드시 종(宗)을 목베이고 제사를 멸해야 하겠다. 그런데 이 땅의 군자(君子)들은 일찍부터 도교의 참됨을 받았구나.
『한관의(漢官儀)』를 검사하여 보니,
‘경제(景帝)로부터 오면서 국학(國學)의 안에 비로소 도관(道舘)을 세워서 학도(學徒)들을 가르치게 하였고, 인민들 사이에 따로 관사 짓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고 하였다.
상고하여 보니, 양나라ㆍ진나라ㆍ제나라ㆍ위나라의 이전에는 오직 호로(瓠盧)로서 경의 근본을 삼았고 천존(天尊)의 형상이 없었다.
임자(任子)의 『도론(道論)』과 두씨(杜氏)의 『유구(幽求)』를 조사하여 보니, 모두
‘도는 형체와 바탕이 없으니 대개 음과 양의 정기다’ 하였다.
『도은거내전(陶隱居內傳)』에
‘모산(茅山) 가운데 불교와 도교의 두 당(堂)을 세우고 하루씩 건너서 조례(朝禮)하였는데 불당에는 상(像)이 있고 도당에는 상이 없었다’ 한다.
왕순(王淳)의 『삼교론(三敎論)』에는
‘근세의 도사들이 살 방도가 없다. 그래서 사람들이 귀의하여 믿게 하려고 이에 불가에서처럼 형상을 만들어 세워서 거짓으로 천존이라 부르고 왼쪽과 오른쪽에 있는 두 진인(眞人)을 도당(道堂)에 두고 그것으로써 의식에 충당하였다.’고 하였다.
양나라 육수정(陸修靜)이 이 형상을 만들어서 머리 깎는 것을 수고하지 않는다. 본래 지극한 가르침을 따랐으니 어찌 머리 깎음을 빌리리오. 이를 일러 몸에 허물과 티가 없는데도 형틀에 매달리는 것을 즐기며, 집에 죽음의 재화가 없는데도 상복을 즐겨 입는다 하겠다. 어둡고 미련함이 심하니 참으로 슬퍼 통곡하겠다.
옛날 한나라 명제(明帝)가 꿈을 감득하고서 이 법이 비로소 이 땅에 와서 도리어 오랑캐들로 하여금 사당을 세우게 하였으나 중국 땅에서는 그를 따라 행함을 허락하지 않았었다. 그리고 위나라가 한나라의 법을 따라서 도리어 옛 제도를 행하였었다.
석륵(石勒)의 때에도 그의 오랑캐의 바람을 염려하여 불도징(佛道澄)의 도인에게 세상을 바로잡게 하였다. 그러나 무릇 하천한 부역을 피하는 무리들이 다투어서 머리를 깎았다.
이를 세상에서 알지 못하니 그의 미혹함이 아홉 번째이다.”
9) 불교의 측면에서 노자의 몸이 부처가 아니라는 취지
불교의 입장에서 훈계하여 말하였다.
“큰 집은 여러 재목으로 이루어지는 것이요, 여러 중생은 한 사람이 교화하는 것이 아니다. 시방의 성스러운 지혜는 미진수(微塵數)와 항하사(恒河沙)에 비겨 다함이 없고, 8만 가지의 법문은 강과 바다를 기울여도 헤아리지 못한다. 그러기에 이 성인과 저 성인이 방소를 달리하는 것이 어깨를 비비는 것과 같으며, 앞의 부처와 뒤의 부처가 세상을 달리하는 것이 발꿈치를 맞대는 것과 한가지이다. 비록 상법(像法)의 시대와 정법(正法)의 시대가 다르고, 청정한 국토와 더러운 국토가 구분되지만 악을 징계하고 착함을 권하는 그 흐름은 하나라 하겠다.
또 주공과 공자 시대의 교훈은 오히려 1백 임금에서 고쳐짐이 없다. 그러나 맹자(孟子)의 극렬한 말은 오히려 1천 년 동안 아름다움을 드리우니, 어찌 주나라 한 대(代)에 세 번 변하고 세 번 옮기며 노자의 한 몸이 도교를 이루고 불교를 이룬다 함을 용납하리오. 그 나머지 사람들은 성인의 지위를 밟을 이치가 없고 여러 벗은 도에 오르기를 바람이 끊어졌을 것이다.
또 먼저는 열 가지의 다름을 기롱하고 뒤에는 한 가지의 같음을 말하였으니 처음과 끝의 사이에 헐뜯고 칭찬함이 모순되고, 말고 펴는 즈음에 스스로가 다 삼성(參星)과 상성(商星) 같으니, 눈을 가리고 갖옷을 훔치는 것이 참으로 이러한 속담이 있구나.
대저 참과 거짓이 서로 형성됨은 마치 벼와 피가 서로 비슷함과 같으나 김을 잘 매는 자는 벼를 두고 피를 버리는 것이요, 도를 구하는 자는 또한 참을 의지하고 거짓을 버린다. 그러니 사문의 훌륭함은 종(宗)의 흐름이 오래다.
한나라의 임금은 가섭마등(迦葉摩騰)에게 예를 내렸다.『법본전(法本傳)』과 같다.
오나라 임금이 강승회(康勝會)에게 절개를 굽힘.
『오록(吳錄)』에 ‘오나라 임금이 강승회에게 ≺부처의 법이 어찌하여 세속과 다릅니까?≻라고 묻자 강승회가 ≺악한 일을 하여 드러나면 사람이 그를 목베고, 악한 일을 하여 숨기면 귀신들이 그를 목벱니다≻라고 대답하였다.
『역(易)』에서 ≺착한 일을 쌓으면 남아도는 경사가 있다≻라고 하였으며, 『시(詩)』에서 ≺복을 구함이 간사하지 않다≻라고 하였습니다.
이는 비록 유속(儒俗)의 격언(格言)이지만 또한 부처님 법의 점차적인 가르침이라 하겠다’고 하였다.
담시(曇始)를 위나라 임금의 자리에 맞이함.
『위록(魏錄)』에 ‘척발도(拓拔燾)가 최호(崔浩)와 구겸지(寇謙之)의 말을 듣고서 드디어 부처의 법을 멸하여서 다 불상을 헐고 불경을 불살랐으며 중을 몰아 속가(俗家)로 돌려보냈다. 담시가 정월 초하룻날 석장(錫杖)을 짚고 법의(法衣)를 입고 성문에 서 있으니 성문을 지키는 자가 척발도에게 아뢰었다. 척발도가 명하여 그의 목을 베게 하였으나 세 차례나 칼질을 하여도 담시는 상하지 않았다. 이에 형벌을 주는 자가 척발도에게 그 사실을 아뢰니, 척발도가 스스로 차고 있던 칼을 뽑아 전과 같이 목을 베었으나 상하지 않기에 척발도가 담시를 호랑이 우리에 넣으니 호랑이들이 눈을 감고 머리를 숙였다. 척발도가 이에 도교의 천사(天師)를 우리 옆에 두었더니 호랑이들이 날뛰며 천사를 물고자 하였다. 척발도는 이에 부처님의 교화가 맑고 높아서 황로(黃老)의 가르침이 미치지 못함을 알고서 담시를 상석(上席)으로 맞으며 사과하였다’고 한다.
[도림(道林)은 진나라 임금의 상에 오름]
진(秦)나라 시대에 도사 안영삼(安榮參)이 연(輦)을 함께 타고, 조방징(趙邦澄)과 상총무(上寵懋)가 비단옷을 입었다.
『부서(符書)』에 ‘부씨 임금이 나가 노닐면서 안영삼에게 명하여 연을 함께 타고 앉았다’고 하였다.
『고승전(高僧傳)』에 ‘석호(石虎)가 불도징(佛圖澄)스님을 대화상(大和上)이라 부르고 비단 옷을 입혔으며, 매양 전(殿)에 오를 적에는 여러 왕공(王公) 이하에게 칙명을 내려 여(輿)를 붙들게 하였다’ 하였으니 다 도가 극존(極尊)에서 내려오고 덕이 만승(萬乘)에서 돌아왔다 함이 참으로 까닭이 있다 하겠다.
황로의 술법이 유래(由來)로 다투지 못한다. 비재(費才)는 이기고 짐을 다투다가 몸을 죽였고 최호(崔浩)는 삿됨으로써 무고(誣告)하다가 바탕을 잃었다.
『위서(魏書)』에 ‘최호와 구겸지(寇謙之)가 척발도를 권하여 바른 가르침을 헐어 멸하려 하였더니, 척발도가 뒤에 무서운 병이 났기에 이에 최호와 구겸지 두 사람을 목베었다’라고 하였으며 강빈(姜斌)은 거짓을 모았기에 바탕을 옮겼고, 왕부(王浮)는 거짓을 지었다 하여 목베었으니, 다 눈과 귀로 경험한 것이요, 취하여 주는 헛된 말이 아니다. 그 부처의 법을 높여 공경함이 이와 같으며 그 티를 보아 견책(譴責)함이 이와 같다.
대저 안연(顔淵)과 민자건(閔子虔)은 공자의 문을 만나서 덕과 행실의 우두머리로 표방되었고, 소진(蘇秦)과 장의(張儀)는 귀곡(鬼谷)선생을 만나서 뜨고 거짓의 선두에 거처하게 되었으니, 이는 홀로 사람 성품의 우열(優劣)만이 아니라 또한 익힌 것의 참과 거짓에 있다 하겠다.
또한 어짊과 허망함이 서로 섞이면 허망한 것은 새고 어진 것은 드러나며, 성인과 거짓이 나뉘기 어렵지만 거짓은 다 없어지고 성인은 나타나는 것이니, 마치 사상(蛇床)이 궁궁이[蘼蕪:香草]와 더불어 질(質)이 같지만 꽃다움에 통달한 자는 그의 얼굴을 가려내고, 구문(鉤刎)과 소화(素華)가 뿌리는 같지만 약을 아는 자는 그의 성품을 분간하는 것과 같다. 이 때문에 주공(周公) 단(旦)은 내쫓겼지만 다시 보좌가 되었으며, 공자의 문이 비었다가 다시 차는 것은 스스로의 내력(來歷)이 있다.
한나라 명제(明帝) 때의 각시(捔試)로부터 삿된 견해가 칼날 부러지듯 했고, 지혜의 해가 빛남을 모았으며, 법의 구름이 그늘을 폈다. 그러기에 강번(姜藩)은 집을 희사하여 도에 들어왔으며, 여집(呂集)은 거짓을 버리고 참에 돌아왔고, 조씨(曹氏)와 마씨(馬氏)는 등(燈)을 전하여 다함이 없게 하였고, 진(秦)나라와 위(魏)나라는 샘솟듯이 다함 없었다. 그러나 그대가 ‘징석(澄石)에서 시작하였다’ 함이 또한 속임이 아니겠는가?
황로의 풍속이 요박(澆薄)하였고, 얼굴과 복장이 또한 변하여서 도교도 아니고 속인도 아니기에 속담에 고자라고 하고 잘 저주하고 잘 꾸짖으니 옛 이름이 귀졸(鬼卒)이다. 그의 괴로움을 구하는 것이 머리채를 더듬어 목을 붙잡아 메어 노끈으로써 스스로 결박하며 소똥을 몸에 바르고 서로서로 채찍으로 치는 것이 그들의 법률이다.
만일 부록(符錄)을 잃어버리면 수판(手板)을 거꾸로 물고 바람을 거슬러 땅을 쓸며 버들가지 1백 단을 스스로 쪼개고 스스로 짊어져야 하며, 주장(奏章:상소문)을 훔치면 재의 감옥에서 엎드려 기고 등에는 물동이를 져야 한다.도사 손씨(孫氏)의 『법의(法儀)』에 나온다. 벌을 주어 꾸짖음이 더욱 무거워서 마치 노예의 법과 같으며, 죄의 책망에 복종하는 것이 축생들의 무리와 같다.
그런데 불교에서는 종과 경쇠를 치면 대중이 모이고 경책할 때에도 한나라와 위나라 이래로 도가에서는 금강사자(金剛師子) 법을 보호하는 착한 신이 없다. 이는 대개 불교에서 밝힌 것이요, 황로에서 먼저 밝힌 것이 아니다. 그러기에 도가에서 불교의 좋은 모범을 본받아서 우리 성스러운 자취를 훔친 것이라 하겠다.
그러기에 안지추(顔之推)는 ‘신선의 일은 금과 옥의 비용만 들고 자못 허방(虛放)하다. 화산(華山)의 아래에는 흰 뼈가 풀무더기 같으니 어찌 신선을 얻을 이치가 있겠으며, 설사 신선됨을 얻더라도 마침내는 마땅히 죽음이 있어서 세간을 벗어나지 못한다. 그러기에 그대들에게 배우기를 권하지 않는다. 불가에는 3세(世)의 일이 분명하여 증험이 있으니 집의 업으로 마음을 돌리고 가볍게 보아 업신여겨서는 아니 된다’고 하였다.
원래 4진(塵)과 5음(廕)은 분석하면 형체가 있지만 6주(舟)와 3가(駕)로 여러 중생들을 운반하여 싣기에 1만 행이 공(空)으로 돌아가지만 1천 문이 착함으로 들어가니, 변재와 지혜가 어찌 한갓 7경(經)과 백씨(百氏)의 넓음뿐이겠는가?
요임금과 순임금과 주공과 공자와 노자와 장자 등이 미치지 못함이 분명하다. 그러기에 「귀심편(歸心篇)」을 지어서 그로써 자제들을 경계하지만
그대가 알지 못하니, 그 눈먼 것이 아홉 번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