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민족에 내놓은 몸
을사신조약이 체결되어서 대한의 독립권이 깨어지고 일본의 보호국이 되었다. 이에
사방에서 지사와 산림학자들이 일어나서 경기, 충청, 경상, 강원 제도에 의병의 혈전이
시작되었다. 허위, 이강년, 최익현, 민긍호, 유인석, 이진룡, 우동선 등은 다
의병대장으로 각각 일방의 웅이었다. 그들은 오직 하늘을 찌르는 의분이 있을 뿐이요,
군사의 지식이 없기 때문에 도처에서 패전하였다.
이때에 나는 진남포 엡웜 청년회의 총무로서 대표의 임무를 띠고 경성대회에 출석케
되었다. 대회는 상동 교회에서 열렸는데 표면은 교회 사업을 의논한다 하나 속살은
순전한 애국운동의 회의였다. 의병을 일으킨 이들이 구사상의 애국운동이라면 우리
예수교인은 신사상의 애국운동이라 할 것이다.
그때에 상동에 모인 인물은 전덕기, 정순만, 이준, 이동녕, 최재학, 계명륙, 김인즙,
옥관빈, 이승길, 차병수, 신상민, 김태연, 표영각, 조성환, 서상팔, 이항직, 이희간,
기산도, 김병헌(현재는 왕삼덕), 유두환, 김기홍 그리고 나 김구였다.
우리가 회의한 결과로 작정한 것은 도끼를 메고 상소하는 것이었다. 1회, 2회로
4, 5명씩 연명으로 상소하여 죽든지 잡혀 갇히든지 몇 번이고 반복하자는 것이었다.
제 1회 상소하는 글은 이준이 짓고 최재학이 소주가 되고 그 밖의 네 사람이 더
서명하여 신민 대표로 다섯 명이 연명하였다. 상소를 하러 가기 전에 정순만의 인도로
우리 일동은 상동교회에 모여서 한 걸음도 뒤로 물러가지 말고 죽기까지 일심하자고
맹약하는 기도를 올리고 일제히 대한문 앞으로 몰려갔다. 문 밖에 이르러 상소에
서명한 다섯 사람은 형식적으로 회의를 열고 상소를 한다는 결의를 하였으나 기실
상소는 별감의 손을 통하여 벌써 대황제께 입람이 된 때였다.
홀연 왜 순사대가 달려와서 우리에게 해산을 명하였다. 우리는 내정간섭이라 하여
일변 반항하며 일변 일본이 우리의 국권을 강탈하여 우리 2천만 신민으로 노예를 삼는
조약을 억지로 맺으니 우리는 죽기로 싸우자고 격렬한 연설을 하였다. 마침내 왜
순사대는 상소에 이름을 둔 다섯 지사를 경무청으로 잡아가고 말았다.
우리는 다섯 지사가 잡혀 가는 것을 보고 종로로 몰려와서 가두 연설을 시작하였다.
거기도 왜 순사가 와서 발검으로 군중을 해산하려 하므로 연설하던 청년 하나가
단신으로 달려 들어 왜 순사 하나를 발길로 차서 거꾸러뜨렸더니 왜 순사들은 총을
쏘았다. 우리는 어물전도가 불탄 자리에 쌓인 와륵을 던져서 왜 순사대와 접전을
하였다. 왜 순사대는 중과부적하여 중국인 점포에 들어가 숨어서 총을 쏘고 있었다.
우리는 그 점포를 향하여 빗발같이 와륵을 던졌다. 이때에 왜 보병 한 중대가
달려와서 군중을 해산하고 한인을 잡히는 대로 포박하여 수십 명이나 잡아갔다.
이날 민영환이 자살하였다 하므로 나는 몇 동지와 함께 민 댁에 가서 조상하고
돌아서 큰 길에 나서니, 웬 40세나 되어 보이는 사람 하나가 맨상투바람으로 피묻은
흰 명주저고리를 입고 여러 사람에게 옹위되어서 인력거에 앉아 큰 소리를 내어 울며
끌려가고 있었다. 누구냐고 물어본 즉 참찬 이상설이 자살하려다가 미수한 것이라고
하였다.
당초 상동회의에서는 몇 번이고 상소를 반복하려 하였으나 으례 사형에 처할 줄
알았던 최재학 이하는 흐지부지 효유방송이나 할 모양이어서 큰 문제도 되지 않는 것
같았고, 또 정세를 돌아보니 상소 같은 것으로 무슨 효과가 생길 것 같지도
아니하여서 우리 동지들은 방침을 고쳐서 각각 전국에 흩어져 교육사업에 힘을 쓰기로
하였다. 지식이 멸이하고 애국심이 박약한 이 국민으로 하여금 나라가 곧 제 집이라는
것을 깨닫게 하기 전에는 아무 것으로도 나라를 건질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었다. 그래서 나도 황해도로 내려와서 문화 초리면 종산 서명의숙의 교원이
되었다가 이듬해 김용제 등 지기의 초청으로 안악으로 이사하여 그곳 양산학교의
교원이 되었다. 종산에서 안악으로 떠나온 것이 기유년 정월 18일이라 갓난 첫딸이
찬바람을 쐬서 안악에 오는 길로 죽었다.
안악에는 김용제, 김용진 등 종형제와 그들의 자질 김홍량과 최명식 같은 지사들이
있어서 신교육에 열심하였다. 이때에는 안악 뿐이 아니라 각처에 학교가 많이
일어났으나 신지식을 가진 교원이 부족한 때라 당시 교육가로 이름이 높은 최광옥을
평양으로부터 연빙하여 안악 양산학교에 하기 사범강습회를 여니 사숙훈장들까지
강습생으로 오고 백발이 성성한 노인도 있었다. 멀리 경기도, 충청도에서까지 와서
강습생이 사백여 명에 달하였다. 강사로는 김홍량, 이시복, 이상진, 한필호,
이보경(지금은 광수), 김낙영, 최재원 등이요, 여자 강사로는 김낙희, 방신영 등이
있었고, 강구봉, 박혜명 같은 중도 강습생 중에 끼어 있었다.
박혜명은 전에 말한 일이 있는 마곡사 시대의 사형으로, 연전 서울서 서로 작별한
뒤에는 소식을 몰랐다가 이번 강습회에 서로 만나니 반갑기 그지 없었다. 그는 당시
구월산 패엽사의 주지였다. 나는 그를 양산학교의 사무실로 인도하여 내 형이라고
소개하고 내 친구들이 그를 내 친형으로 대우하기를 청하였다.
혜명에게 들은즉 내 은사 보경당, 하은당은 석유 한 초롱을 사다가 그 호부를
시험하노라고 불붙은 막대기를 석유통에 넣었다가 그것이 폭발하여 포봉당까지 세
분이 일시에 죽었고, 그 남긴 재산을 맡기기 위하여 금강산에 내가 있는 곳을 두루
찾았으나 종적을 몰라서 할 수 없이 유산 전부를 사중에 붙였다고 하였다.
나는 여기서 김효영 선생의 일을 아니 적을 수 없다. 선생은 김용진의 부친이요,
김홍량의 조부다. 젊어서 글을 읽더니 집이 가난함을 한탄하여 황해도 소산인 면포를
사서 몸소 등에 지고 평안도 강계, 초산 등 산읍으로 행상을 하여서 밑천을 잡아
가지고 근검으로 치부한 이라는데, 내가 가서 교사가 되었을 때에는 벌써 연세가 70이
넘고 허리가 기억자로 굽었으나 기골이 장대하고 용모가 탈속하여 보매 위엄이
있었다. 선생은 일찍부터 신교육이 필요함을 깨닫고 그 장손 홍량을 일본에 유학케
하였다. 한 번은 양산학교가 경영난에 빠졌을 때에 무명씨로 벼 백 석을 기부하였는데,
나중에야 그가 자여질에게도 알리지 아니하고 한 것인 줄을 알게 되었다. 나로 말하면
선생의 자질의 연배건마는 며칠에 한 번씩 정해 놓고 내 집 문전에 와서,
"선생님 평안하시오?"
하고 문안을 하였다. 이것은 자손의 스승을 존경하는 성의를 보임인 동시에 사마골
오백금 격이라고 나는 탄복하였다.
나는 교육에 종사한 이래로 성묘도 못하고 있다가 여러 해만에 본 해주 본향에 가
보니 많은 변화가 생겼다. 첫째로 감개무량한 것은 나를 안아 주고 귀애해 주던
노인들이 많이 세상을 떠나고 전에는 어린아이던 것들이 인제는 커다란 어른들이 된
것이었다. 그러나 기막히는 것은 그 어른된 사람들이 아무 지각이 나지 아니하여
나라가 무엇인지 모르는 것이었다.
예전에 양반이라는 사람들도 찾아 보았으나 다들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효몽한 중에
있어서 자녀들을 학교에 보내라고 권하면 머리를 깎으니만 못한다 하고 있었다. 내게
대하여서는 전과 같이 아주 하대는 못하고 말하기 어려운 듯이 어물어물하였다.
상놈은 여전히 상놈이요, 양반은 새로운 상놈이 될 뿐, 한 번 민족을 위하여 몸을
바쳐서 새로운 양반이 되리라는 기개를 볼 수 없으니 한심한 일이었다.
고향에 와서 이렇게 실망되는 일이 많은 중에 가장 나를 기쁘게 한 것은 준형
계부께서 나를 사랑하심이었다. 항상 나를 집안을 망칠 난봉으로 아시다가 내가
장연에서 오 진사의 신임과 존경을 받는 것을 목도하시고부터는 비로소 나를
믿으셨다.
나는 본향 사람들을 모아 놓고 내가 지고 온 환등을 보이면서
"양반도 깨어라, 상놈도 깨어라. 삼천리 강토와 2천만 동포에게 충성을 다하여라."
하고 목이 터지도록 외쳤다.
안악에서는 하기사범강습소를 마친 뒤에 양산학교를 크게 확장하여 중학부와
소학부를 두고 김 홍량이 교장이 되었다.
나는 최광옥 등 교육가들과 함께 해서 교육총회를 조직하고 내가 그 학무총감이
되었다. 황해도 내에 학교를 많이 설립하고 그것을 잘 경영하도록 설도하는 것이 내
직무였다. 나는 이 사명을 띠고 도내 각 군을 순회하는 길을 떠났다.
배천 순수 전봉훈의 초청을 받았다. 읍 못 미쳐 오리정에 군내 각 면의 주민들이
나와서 등대하다가 내가 당도한즉 군수가 선창으로,
"김구 선생 만세!"를 부르니 일동이 화하여 부른다. 나는 경황실색하여 손으로
군수의 입을 막으며
그것이 망발인 것을 말하였다. 만세라는 것은 오직 황제에 대하여서만 부르는 것이요,
황태자도 천세라고 밖에 못 부르는 것이 옛 법이기 때문이다. 그런 것을 일개 서민인
내게 만세를 부르니 내가 경황하지 아니할 수 없었다. 그러나 군수는 웃으며 내 손을
잡고 개화시대에는 친구 송영에도 만세를 부르는 법이니 안심하라고 하였다. 나는
군수의 사제에 머물렀다.
전봉훈은 본시 재령 아전으로 해주에서 총순으로 오래 있을 때에 교육에 많은 힘을
썼다. 해주 정내학교를 세운 것도 그요, 각 전방에 명령하여 사환하는 아이들을 야학에
보내게 하고 만일 안 보내면 주인을 벌하는 일을 한 것도 그여서 해주 부내의 교육의
발달은 전총순의 힘으로 됨이 컸다. 그의 외아들은 조사하고 장손무길이 5, 6세였다.
전 군수는 대단히 경골한 이어서 다른 고을에서는 일본 수비대에게 동헌을 내어
맡기되 그는 강경히 거절하여서 여전히 동헌은 군수가 차지하고 있었다. 이 때문에
왜의 미움을 받았으나 그는 벼슬자리를 탐내어 뜻을 굽힐 사람이 아니었다.
전봉훈은 최광옥을 연빙하여 사범강습소를 설립하고 강연회를 각지에 열어 민중에게
애국심을 고취하였다. 최광옥은 배천 읍내에서 강연을 하는 중에 강단에서 피를
토하고 죽었다. 황평양서 인사들이 그의 공적을 사모하고 뜻과 재주를 아껴서
사리원에 큰 기념비를 세우기로 하고 평양 안태국에게 비석 만드는 일을 맡기기까지
하였으나 합병조약에 되었기 때문에 중지하고 말았다. 최광옥의 유골은 배천읍 남산에
묻혀 있다.
나는 배천을 떠나 재령 양원학교에서 유림을 소집하여 교육의 필요와 계획을 말하고
장연 군수의 청으로 읍내와 각 면을 순회하고, 송화 군수 성낙영의 간청으로 수년
만에 송화읍을 찾았다. 이곳은 해서의 의병을 토벌하던 요해지이므로 읍내에는 왜의
수비대, 헌병대, 경찰서, 우편국 등의 기관이 있어서 관사를 전부 그런 것에 점령이
되고 정작 군수는 사가를 빌어서 사무를 보고 있었다. 나는 분한 마음에 머리카락이
가락가락 일어날 지경이었다.
환등회를 여니 남녀 청중이 무려 수천 명이니, 군수 성낙영, 세무서장 구자록을
위시하여 각 관청의 관리며 왜의 장교와 경관들도 많이 출석하였다. 나는 대황제
폐하의 어진영을 뫼셔오라 하여 강단 정면에 봉안하고 일동 기립 국궁을 명하고 왜의
장교들까지 다 그리하게 하였다. 이렇게 하니 벌써 무언중에 장내에는 엄중한 기운이
돌았다.
나는 '한인이 배일하는 이유가 무엇인고.'하는 연제로 일장의 연설을 하였다. 과거
일청, 일아 두 전쟁 때에는 우리는 일본에 대하여 신뢰하는 감정이 극히 두터웠다. 그
후에 일본이 강제로 우리나라 주권을 상하는 조약을 맺음으로 우리의 악감이
격발되었다. 또 일병이 촌락으로 횡행하며 남의 집에 막 들어가고 닭이나 달걀을 막
빼앗아서 약탈의 행동을 하므로 우리는 배일을 하게 된 것이니, 이것은 일본의
잘못이요 한인이 책임이 아니라고 탁을 두드리며 외쳤다. 자리를 돌아보니 성낙영.
구자록은 낯빛이 흙빛이요, 일반 청중의 얼굴에는 격앙의 빛이 완연하고 왜인의
눈에는 노기가 등등하였다. 홀연 경찰이 환등회의 해산을 명하고 나는 경찰서로 불려
가서 한인 감독 순사 숙직실에 구류되었다. 각 학교 학생들의 위문대가 뒤를 이어
밤이 새도록 나를 찾아왔다.
이튿날 아침에 하르빈 전보라 하여 이등박문이 '은치안'이라는 한인의 손에 죽었다는
신문 기사를 보았다. '은치안'이 누구일까 하고 궁금하였더니 이튿날 신문으로 그것이
안응칠 중근인 줄을 알고 십 수년 전 내가 청계동에서 보던 총 잘 쏘던 소년을
회상하였다.
나는 내가 구금된 것이 안중근 관계인 것을 알고 오래 놓이지 못할 것을
각오하였다. 한 달이나 지난 후에 나를 불러 내어서 몇 마디를 묻고는 해주
지방법원으로 압송되었다. 수교장을 지날 때에 감승무의 집에서 낮참을 하는데, 시내
학교의 교직원들이 교육 공로자인 나를 위하여 한턱의 위로연을 베풀게 하여 달라고
호송하는 왜 순사에게 청하였더니 내가 해주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하는 것이 좋지
아니하냐 하면서 허락하지 아니하였다.
나는 곧 해주 감옥에 수감되었다. 이튿날 검사정에 불려 안중근과 나와의 관계에
대한 질문을 받았으나 나는 그 부친과 세의가 있을 뿐이요, 안중근과는 직접 관계가
없다는 것을 말하였다. 검사는 지나간 수년간의 내 행적을 적은 책을 내어놓고
이것저것 심문하였으나 결국 불기소로 방면이 되었다.
나는 행구를 가지고 감옥에서 나와서 박창진의 책사로 갔다가 유훈영을 만나 그
아버지 유장단의 환갑연에 참예하고 송화에서 나를 호송해 올 때에 왜 순사와 같이
왔던 한인 순사들이 내 일의 하회를 알고 가려고 아직도 해주에 묵고 있단 말을 듣고
그들 전부를 술집에 청하여서 한턱을 먹이고 지난 일을 말하여서 돌려보냈다. 한인
순사는 기회만 있으면 왜 순사의 눈을 피하여 내게 동정하였던 것이다.
안악 동지들은 내 일을 염려하여 한정교를 위해 해주로 보내어 왔으므로 나는
이승준, 김영택, 양낙주 등 몇 친구를 방문하고는 곧 안악으로 돌아왔다.
안악에 와서 나는 양산학교 소학부의 유년반을 담임하면서 재령군 북률면 무상동
보강학교의 교장을 겸무하였다. 이 학교는 나무리벌의 한 끝에 있어 가난한 사람들이
힘을 내어 세운 것이었다. 전임 교원으로는 전승근이 있고 장덕준은 반 교사, 반
학생으로 그 아우 덕수를 데리고 학교 안에서 숙식하고 있었다.
내가 보강학교 교장이 된 뒤에 우스운 삽화가 있었다. 그것은 학교에 세 번이나
도깨비불이 났다는 것이다. 학교를 지을 때에 옆에 있는 고목을 찍어서 불을
때었으므로 도깨비가 불을 놓는 것이니 이것을 막으려면 부군당에 치성을 드려야
한다고 다들 말하였다. 나는 직원을 명하여 밤에 숨어서 지키라 하였다. 이틀 만에
불을 놓는 도깨비를 등시 포착하고 보니 동네 서당의 훈장이었다. 그는 학교가 서기
때문에 서당이 없어서 제가 직업을 잃은 것이 분하여서 이렇게 학교에 불을 놓는
것이라고 자백하였다. 나는 그를 경찰서에 보내지 아니하고 동네를 떠나라고 명하였다.
이 지방에는 큰 부자는 없으나 나무리가 크고 살진 벌이 있어서 다들 가난하지는
아니하였다. 또 주민들이 다 명민하여서 시대의 변천을 잘 깨달아 운수, 진초, 보강,
기독 등 학교들을 세워 자녀를 교육하는 한편으로는 농무회를 조직하여 농업의 발달을
도모하는 등 공익사업에 착안함이 실로 보암직하였다. 의사 나석주도 이곳 사람이다.
아직 20내외의 청년으로서 소년, 소녀 8, 9명을 배에 싣고 왜의 철망을 벗어나 중국
방면에 가서 마음대로 교육할 양으로 떠나가 장연 오리포에서 왜경에게 붙들려서 여러
달 옥고를 받고 나와서 겉으로는 장사도 하고 농사도 한다 하면서 속으로 청년간에
독립사상을 고취하고 직접 간접으로 교육에 힘을 써서 나무리벌 청년의 신망을 받는
중심 인물이 되어 있었다. 나는 종종 나무리에 내왕하면서 그와 만났다.
하루는 안악에서 노백린을 만났다. 그는 그때에 육군정령의 군직을 버리고 그의
향리인 풍천에서 교육에 종사하고 있었는데 서울로 가는 길에 안악을 지나는
것이었다. 나는 부강학교로 갈 겸 그와 작반하여 나무리 진초등 김정홍의 집에서
하룻밤을 잤다. 김은 그 동네의 교육가였다.
저녁에 진초 학교 직원들도 와서 주연을 벌이고 있노라니 동네가 갑자기
요란하여졌다. 주인 김정흥이 놀라며 걱정스러운 얼굴로 설명하는 말이 이러하였다.
진초학교에 오인성이라는 여교원이 있는데 무슨 이유인지 모르나 그의 남편 이재명이
와서 단총으로 오인성을 위협하여 인성은 학교 일을 못 보고 어느 집에 피신하여
있는데 이재명은 매국적을 모조리 죽인다고 부르짖으면서 미쳐 날뛰며 방포를 하므로
동네가 이렇게 소란한 것이라고 했다.
나는 노백린과 상의하고 이재명이라는 사람을 불러왔다. 그는 22, 3세의 청년으로서
미우에 가득하게 분기를 띠고 들어섰다. 인사를 청한즉 그는 자기는 어려서 하와이에
건너가서 거기서 공부를 하던 중에 우리나라가 왜에게 빼앗긴다는 말을 듣고 두어 달
전에 환국하였다는 말과, 제 목적은 이완용 이하의 매국적을 죽임에 있다 하여 단도와
권총을 내어 보이고, 또 자기는 평양에서 오인성이라는 여자와 결혼하였는데 그가
남편의 충의의 뜻을 몰라본다는 말을 기탄없이 하였다.
그러나 우리는 이 사람이 장차 서울 북달은재에서 이완용을 단도로 찌른 의사
이재명이 될 사람이라고 생각지 못하고 한 허열에 뜬 청년으로만 보았다. 노백린도
나와 같이 생각한 모양이어서 그의 손을 잡고 큰 일을 하려는 사람이 큰 일을 할
무기를 가지고 아내를 위협하고 동네를 소란케 하는 것은 아직 수양이 부족한
것이라고 간곡히 말하고 그 단총을 자기에서 맡겨 두고 마음을 더 수양하고 동지도 더
얻어 가지고 일을 단행하라고 권하였더니, 이재명은 총과 칼을 노백린에게 주기는
주면서도 선선하게 주는 빛은 없었다.
노백린이 사리원역에서 차를 타고 막 떠나려 할 때에 문득 이재명이 그곳에
나타나서 노에게 그 맡긴 물건을 도로 달라고 하였으나 노는 "서울 와서 찾으시오."
하고 떠나버렸다.
그 후 일삭이 못 되어 이 의사는 동지 몇 사람과 서울에 들어와 군밤장수로
변장하고 천주교당에 다녀오는 이완용을 찌른 것이었다. 완용이 탔던 인력거꾼은
즉사하고 완용의 목숨은 살아나서 나라를 파는 마지막 도장을 찍을 날을 주었으니
이것은 노백린이나 내가 공연한 간섭으로 그의 단총을 빼앗은 때문이었다.
나라의 명맥이 경각에 달렸으되 국민 중에는 망국이 무엇인지 모르는 이가 많았다.
이에 일변 깨달은 지사들이 한데 뭉치고 또 일변 못 깨달은 동포를 계발하여서 다
기울어진 국운을 만회하려는 큰 비밀운동이 일어났으니, 그것이 신민회였다. 안창호는
미국으로부터 돌아와서 평양에 대성학교를 세우고 청년 교육을 표면의 사업으로
하면서 이면으로는 양기탁, 안태국, 이승훈, 전덕기, 이동녕, 주진수, 이갑, 이종호,
최광옥, 김홍량 등과 기타 몇 사람을 중심으로 하고 4백여명 정수분자로 신민회를
조직하여 훈련. 지도하다가 안창호는 용산 헌병대에 잡혀 갇혔다. 합병이 된 뒤에는
소위 주의인물을 일망타진할 것을 미리 알았음인지, 안창호는 장연군 송천에서 비밀히
위해위로 가고, 이종호, 이갑, 유동열 등 동지는 뒤를 이어서 압록강을 건넜다.
서울에서 양기탁의 이름으로 비밀회의를 할 터이니 출석하라는 통지가 왔기로 나도
출석하라는 통지가 왔기로 나도 출석하였다. 그때 양기탁의 집에 모인 사람은 주인
양기탁과 이동녕, 안태국, 주진수, 이승훈, 김도희와 그리고 나 김구였다. 이 회의의
결과는 이러하였다.
왜가 서울에 총독부를 두었으니 우리도 서울에 도독부를 두고 각 도에 총감이라는
대표를 두어서 국맥을 이어서 나라를 다스리게 하고, 만주에 이민 계획을 세우고 또
무관학교를 창설하여 광복 전쟁에 쓸 장교를 양성하기로 하고, 각 도 대표를 선정하니
황해도에 김구, 평안남도에 안태국, 평안북도에 이승훈, 강원도에 주진수, 경기도에
양기탁이었다. 이 대표들은 급히 맡은 지방으로 돌아가서 황해. 평남. 평북은 각
15만원, 강원은 10만원, 경기는 20만원을 15일 이내로 판비하기로 결정하였다.
나는 경술년 11월 1일 아침, 서울을 떠났다. 양기탁의 친 아우 인탁이 재령 재판소
서기로 부임하는 길로 그 부인과 같이 동차하였으나 기탁은 내게 인탁에게도 통정은
말라고 일렀다. 부자와 형제간에도 필요 없이는 비밀을 누설하지 아니하는 것이었다.
사리원에서 인탁과 작별하고 안악으로 돌아와 김홍량에게 이번 비밀회의에서 결정된
것을 말하였더니 김홍량은 그대로 실행하기 위하여 자기의 가산을 팔기로 내놓았다.
그리고 신천 유문형 등 이웃 고을 동지들께도 비밀히 이 뜻을 통하였다. 장연
이명서는 우선 그 어머니와 아우 명선을 서간도로 보내어 추후하여 들어오는 동지들을
위하여 준비하기로 하고 일행이 안악에 도착하였기로 내가 인도하여 출발시켰다.
이렇게 우리 일은 착착 진행중에 있었다.
어느 날 밤중에 안명근이 양산학교 사무실로 나를 찾아왔다. 그는 내가 서울 가
있는 동안에도 누차 찾아왔었던 것이었다. 그가 나를 찾은 목적은, 독립운동의
자금으로 돈을 내마 하고 자기에게 허락하고도 안 내는 부자들을 경계하기 위하여
우선 안악 부자들을 육혈포로 위협하여 본을 보일 터이니, 나에게 지도해 달라는
것이었다. 이것은 지금 우리가 진행하고 있는 사업과는 상관이 없고 안명근이 독자로
하는 일이었으므로 나는 그에게 돈을 가지고 할 일이 무엇인가를 물었다. 그의 계획에
의하면 동지를 많이 모아서 황해도의 전신과 전화를 끊어 각지에 있는 왜적이 서로
연락하는 길을 막아 놓고 지방지방이 일어나서 제 지방에 있는 왜적을 죽이라는 영을
내리면 반드시 성사가 될 것이니 설사 타지방에서 왜병이 대부대로 온다 하더라도
닷새는 걸릴 것인즉 그동안은 우리의 자유로운 세상이고 실컷 원수를 갚을 수 있다는
것이었다.
나는 명근의 손을 잡고 이 계획은 버리라고 만류하였다. 여순에서 그 종형 중근이
당한 일을 생각하면 다른 사람과 달리 격분도 할 일이지마는, 국가의 독립은 그런
일시적 설원으로 되는 것이 아닌즉 널리 동지를 모으고 동포를 가르쳐서 실력을 기른
뒤에 크게 싸울 준비를 하여야 한다는 뜻을 말하고, 서간도에 이민을 할 것과 의기
있는 청년을 많이 그리로 인도하여 인재를 양성함이 급무라는 뜻을 설명하였다. 내
말을 듣고 그도 그렇다고 수긍은 하나 자기의 생각과 같지 아니한 것이 불만한
모양으로 서로 작별하였다.
그런 일이 있은 후 며칠이 아니하여서 안명근이 사리원에서 잡혀 서울로
압송되었다는 것이 신문으로 전하였다.
해가 바뀌어 신해년 정월 초닷샛날 새벽, 내가 아직 기침도 하기 전에 왜 헌병
하나가 내 숙소인 양산학교 사무실에 와서 헌병 소장이 잠깐 만나자 한다 하고 나를
헌병 분견소로 데리고 갔다. 가보니 벌써 김홍량, 도인권, 이상진, 양성진, 박도병,
한필호, 장명선 등 양산학교 직원들이 하나씩 하나씩 나 모양으로 불려 왔다.
경무총감부의 명령이라 하고 곧 우리를 끌어내어 사리원으로 가더니 거기서 서울 가는
차를 태웠다. 같은 차로 잡혀가는 사람들 중에는 송화 반정 신석충 진사도 있었으나
그는 재령강 철교를 건널 적에 차창으로 몸을 던져서 자살하고 말았다.
신 진사는 해서에 유명한 학자요 또 자선가였고 그 아우 석제도 진사였다. 한 번
내가 석제 진사를 찾아갔을 때에 그 아들 낙영과 손자 상호가 동구까지 마중 나오기로
내가 모자를 벗어서 인사하였더니 그들은 황망히 갓을 벗어서 답례한 일이 있었다.
또 차중에서 이승훈을 만났다. 그는 잡혀가는 것은 아니었으나 우리가 포박되어
가는 것을 보고 차창 밖으로 고개를 돌리고 눈물을 흘리는 것이 보였다. 차가
용산역에 닿았을 때에(그때에는 경의선도 용산을 지나서 서울로 들어왔었다) 형사
하나가 뛰어올라 와서 이승훈을 보고,
"당신 이승훈 씨 아니오?"
하고 물었다. 그렇다 한즉 그 형사놈이,
"경무총감부에서 영감을 부르니 좀 가십시다."
하고 차에서 내리자마자 우리와 같이 결박을 지어서 끌고 갔다. 후에 알고 보니
황해도를 중심으로 다수의 애국자가 잡힌 것이었다. 이것은 왜가 한국을 강제로
빼앗은 뒤에 그것을 아주 제 것을 만들어 볼 양으로 우리 나라의 애국자인 지식계급과
부호를 모조리 없애 버리려는 계획의 제일회였다. 그러기 위하여는 감옥과 이왕 있는
유치장만으로는 부족하여 창고 같은 건물을 벌의 집 모양으로 간을 막아서 임시
유치장을 많이 준비하여 놓고 우리들을 잡아 올린 것이었다.
이번 통에 잡혀 온 사람은 황해도에서 안명근을 비롯하여 신천에서 이원식, 박만준,
신백서, 이학구,유원봉, 유문형, 이승조, 박제윤, 민영룡, 신효범, 안악에서 김홍량,
김용제, 양성진, 김구, 박도병, 이상진, 장명선, 한필호, 박형병, 고봉수, 한정교, 최익형,
고정화, 도인권, 이태주, 장응선, 원행섭, 김용진등이요, 장연에서 장의택, 장원용,
최상륜, 은률에서 김용원, 송화에서 오덕겸, 장홍범, 권태선, 이종록, 김익룡, 장연에서
김재형, 해주에서 이승준, 이재림, 김영택, 봉산에서 이승길, 이효건 그리고 배천에서
김병옥, 연안에서 편강렬등이었고, 평안남도에서는 안태국, 옥관빈, 평안북도에서는
이승훈, 유동열, 김용규의 형제가 붙들리고, 경성에서는 양기탁, 김도희, 강원도에서
주진수, 함경도에서 이동휘가 잡혀와서 다들 유치되어 있었다. 나는 이동휘와는 전면이
없었으나 유치장에서 명패를 보고 그가 잡혀온 줄을 알았다.
나는 생각하였다. 평거에 나라를 위하여 십분 정성과 힘을 쓰지 못한 죄로 이 벌을
받는 것이라고, 이제 와서 내게 남은 일은 고후조 선생의 훈계대로 육신과 삼학사를
본받아 죽어도 굴치 않는 것뿐이라고 결심하였다.
심문실에 끌려나가는 날이 왔다. 심문하는 왜놈이 나의 주소. 성명 등을 묻고 나서,
"네가 어찌하여 여기 왔는지 아느냐." 하기로 나는, "잡아오니 끌려 왔을 뿐이요,
이유는 모른다." 하였더니 다시는 묻지도 아니하고 내 수족을 결박하여 천정에
매달았다. 처음에는 고통을 깨달았으나 차차 정신을 잃었다가 다시 정신이 들어보니
나는 고요한 겨울 달빛을 받고 심문실 한구석에 누워 있는데 얼굴과 몸에 냉수를
끼얹는 감각 뿐이요, 그동안 무슨 일이 있었는지 기억이 없었다.
내가 정신을 차리는 것을 보고 왜놈은 비로소 나와 안명근과의 관계를 묻기로 나는
안명근과는 서로 아는 사이나 같이 일한 것은 없다고 하였더니, 그놈은 와락 성을
내어서 다시 나를 묶어 천정에 달고 세 놈이 둘러서서 막대기와 단장으로 수없이 내
몸을 후려갈겨서 나는 또 정신을 잃었다. 세 놈이 나를 끌어다가 유치장에 누일
때에는 벌써 훤하게 밝은 때였다. 어제 해질 때에 시작한 내 심문이 오늘 해뜰 때까지
계속된 것이었다.
처음에 내 성명을 묻던 놈이 밤이 새도록 쉬지 않는 것을 보고 나는 그놈들이
어떻게 제 나라의 일에 충성된 것을 알았다. 저놈은 이미 먹은 나라를 삭히려기에
밤을 새거늘 나는 제 나라를 찾으려는 일로 몇 번이나 밤을 새웠던고 하고 스스로
돌아보니 부끄러움을 금할 수가 없고, 몸이 바늘방석에 누운 것과 같아서 스스로
애국자인 줄 알고 있던 나도 기실 망국민의 근성을 가진 것이 아닌가 하니 눈물이
눈에 넘쳤다.
이렇게 악형을 받는 것은 나뿐이 아니었다. 옆 방에 있는 김홍량, 한필호, 안태국,
안명근 등도 심문을 받으러 끌려나갈 때에는 기운 있게 제 발로 걸어나가나 왜놈의
혹독한 단련을 받고 유치장으로 돌아올 때에는 언제나 반죽음이 다 되어 있었다.
그것을 볼 때마다 나는 치미는 분함을 누를 길이 없었다.
한 번은 안명근이 소리소리 지르면서,
"이놈들아, 죽일 때에 죽이더라도 애국 의사의 대접을 이렇게 한단 말이냐."
하고 호령하는 사이사이에,
"나는 내 말만 하였고 김구, 김홍량들은 관계가 없다고 하였소."
하는 말을 끼어서 우리의 귀에 넣었다.
우리들은 감방에서 서로 통화하는 방법을 발명하여서 우리의 사건을 보안법 위반과
모살급 강도의 둘로 나누어서 아무쪼록 동지의 희생을 적게 하기로 의논하였다.
양기탁의 방에서 안태국의 방과 내가 있는 방으로, 내게서 이재림이 있는 방으로 이
모양으로 좌우 줄 20여 방, 40여 명이 비밀리 말을 전하는 것이었다.
왜놈들은 우리의 심문이 진행됨을 따라 이것을 통방이라고 칭하였다. 사건의 범위가
점점 축소됨을 보고 의심이 났던 모양이어서 우리 중에서 한순직을 살살 꾀어 우리가
밀어하는 내용을 밀고하게 하였다. 어느 날 양기탁이 밥 받는 구멍에 손바닥을 대고,
우리의 비밀한 통화를 한순직이가 밀고 하니 금후로는 통방을 폐하자는 뜻을 손가락
필답으로 전하였다. 과연 센 바람을 겪고야 단단한 풀을 알 것이었다. 안명근이 한
순직을 내게 소개할 때에 그는 용감한 청년이라고 칭하더니 이 꼴이었다. 어찌 한
순직뿐이랴, 최명식도 악형을 못 이겨서 없는 소리를 자백하였으나 나중에 후회하여
긍허라고 호를 지어서 평생에 자책하였다. 그때의 형편으로 보면 내 혀끝이 한 번
움직이는 데 몇 사람의 생명이 달렸으므로 나는 단단히 결심을 하였다.
하루는 또 불려 나가서 내 평생의 지기가 누구냐 하기로 나는 서슴지 않고,
"오인형이 내 평생의 지기다."
하고 대답하였더니 종시 다른 사람의 이름을 부는 일이 없던 내 입에서 평생의 지기의
이름을 말하는 것을 극히 반가워하는 낯빛으로 그 사람은 어디서 무엇을 하는가 하고
정신을 바짝 차리고 내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천연하게,
"오인형은 장연에 살더니 연전에 죽었다."
하였더니 그놈들이 대로하여 또 내가 정신을 잃도록 악형을 하였다.
한 번은 학생 중에는 누가 가장 너를 사모하더냐 하는 질문에 나는 창졸간에 내
집에 와서 공부하고 있던 최중호의 이름을 말하고서는 나는 내 혀를 물어 끊고
싶었다. 젊은 것이 또 잡혀와서 경을 치겠다고 아픈 가슴으로 창 밖을 바라보니 언제
잡혀왔는지 반쯤 죽은 최중호가 왜놈에게 끌려 지나가는 것이 보였다.
진고개 끝 남산 기슭에 있는 소위 경무총감부에서는 밤이나 낮이나 도수장에서 소나
돼지를 때려 잡는 소리가 끊임없이 들었다. 이것은 우리 애국자들이 왜놈에게 악형을
당하는 소리였다.
하루는 한필호 의사가 심문을 당하고 돌아오는 길에 겨우 머리를 들어 밥구멍으로
나를 들여다보면서,
"모두 부인했더니 지독한 악형을 받아서 나는 죽습니다."
하고 작별하는 모양을 보이기로, 나는
"그렇게 낙심 말고 물이나 좀 자시오."
하고 위로하였더니, 한 의사는,
"인제는 물도 먹을 필요가 없습니다."
하고는 다시 소식을 몰랐는데 공판 때에야 비로소 한필호 선생이 순국한 것과 신석충
진사가 사리원으로 끌려오는 도중에 재령강에서 몸을 던져 자살한 것을 알았다.
하루는 나는 최고심문실이라는 데로 끌려갔다. 뉘라서 뜻하였으랴, 17년 전 내가
인천 경무청에서 심문을 당할 때에 방청석에 앉았다가 내가 호령하는 바람에 '칙쇼
칙쇼'하고 뒷방으로 피신하던 도변 순사놈이 나를 심문하려고 앉았을 줄이야. 그놈은
전과같이 검은 수염을 길러 늘이고 낯바닥에는 약간 노쇠한 빛이 보였으나 이제는
경무총감부의 기밀과장으로 경시의 제복을 입고 위의가 엄숙하였다.
도변이 놈은 나를 보고 첫말이, 제 가슴에는 엑스광선이 있어서 내 평생의 역사와
가슴 속에 품은 비밀은 소상히 다 알고 있으니 일호도 숨김이 없이 다 자백을 하면
괜찮거니와 만일에 은휘하는 곳이 있으면 이 자리에서 나를 때려 죽인다는 것이다.
그러나 도변이 놈의 엑스광선은 내가 17년 전 인천 감옥의 김창수인 줄은 모르는
모양이었다. 연전 해주 검사국에서 검사가 보고 있던 '김구'라는 책에도 내가
치하포에서 토전양량을 죽인 것이나 인천 감옥에서 사형정지를 받고 탈옥 도주한 것은
적혀 있지 아니하였던 것과 같이 이번 사건에 내게 관한 기록에도 그것은 없었던
모양이다. 그러고 보면 내 일을 일러바치는 한인 형사와 정탐들도 그 일만은 빼고 내
보고를 하는 모양이니 그들이 비록 왜의 수족이 되어서 창귀 노릇을 한다 하더라도
역시 마음의 한구석에는 한인 혼이 남아 있는 것이라고 나는 생각하였다.
도변이 놈이 나의 경력을 묻는데 대하여서 나는 어려서는 농사를 하다가 근년에
종교와 교육사업을 하고 있거니와 모든 일을 내놓고 하고 숨어서 하는 것이 없으며,
현재에는 안악 양산학교의 교장으로 있노라고 대답하였더니 도변은 와락 성을 내며,
내가 종교와 교육에 종사한다는 것은 껍데기요, 속으로는 여러 가지 큰 음모를 하고
있는 것을 제가 소상히 다 알고 있노라 하면서, 내가 안명근과 공모하여 총독을
암살할 음모를 하고, 서간도에 무관학교를 설치하여 독립운동을 준비하려고 부자의
돈을 강탈한 사실을 은휘한들 되겠느냐고 나를 엄포하였다. 이에 대하여 나는
안명근과는 전연 관계가 없고 서간도에 이민이란 것은 사실이나 이것은 빈한한
농민에게 생활의 근거를 주자는 것뿐이라고 답변한 뒤에, 나는 화두를 돌려서 지방
경찰의 도량이 좁고 의심만 많아서 걸핏하면 배일로 사람을 보니 이러고는 백성이
아무 일도 할 수 없어서 모든 사업에 방해가 많으나 이후로는 지방의 경찰에 주의하여
우리 같은 사람들이 교육이나 잘 하고 있도록 하여 달라, 학교 개학기도 벌써
넘었으니 속히 가서 학교일을 보게 하여 달라 하였다. 도변이 놈은 악형은 아니하고
나를 유치장으로 돌려보냈다.
이제 보니 도변이 놈은 내가 김창수인 것을 전연 모른 것이 확실하고 그렇다 하면
내 과거를 소상히 잘 아는 형사들이 그 말을 아니 한 것도 분명하였다. 나는 기뻤다.
나라는 망하였으나 민족은 망하지 아니하였다. 왜 경찰에 형사질을 하는 한인의
마음에도 애국심은 남아 있으니 우리 민족은 결코 망하지 아니하리라고 믿고 기뻐하는
동시에 형사들까지도 내게 이러한 동정을 주었으니 나로서는 최후의 일각까지 동지를
위하여 싸우고 원수의 요구에 응치 아니하리라 하였다. 그리고 김홍량은 나보다
활동할 능력도 많고 인물의 품격도 높으니 나를 희생하여서라도 그를 살리리라 하고
심문시에도 내게 불리하면서도 그에게 유리하게 답변하였고, 또
"(구몰니중홍비해외)
거북은 진흙 속에 있으며 기러기는 바다 위를 나른다."
라고 중얼거렸다.
전후 일곱 번 심문 중에 도변의 것을 제하고 여섯 번은 번번이 악형을 당하여
정신을 잃었다. 그러나 악형을 받고 유치장으로 끌려 돌아올 때마다 나는,
"나의 목숨은 너희가 빼앗아도 나의 정신은 너희가 빼앗지 못하리라."
하고 소리를 높여 외쳐서 동지들의 마음이 풀어지지 않도록 하였다. 내가 그렇게
떠들면 왜놈들은,
"나쁜 말이 해소도 다다꾸."
하고 위협하였으나 동지들의 마음은 내 말에 격려되었으리라고 믿는다.
내게 대한 제 8회 심문은 과장과 각 주임경시 7, 8명 열석 하에 열렸다. 이놈들이
나를 향하여 하는 말이,
"네 동류가 거개 자백을 하였는데 네놈 한 놈이 자백을 아니하니 참 어리석고
완고한 놈이다. 네가 아무리 입을 다물고 아니하기로서니 다른 놈들의 실토에서 나온
네놈의 죄가 숨겨지겠느냐. 너, 생각해 보아라, 새로 토지를 매수한 지주가 밭에
거치장거리는 돌멩이를 추려 내지 아니하고 그냥 둘 것이냐. 그러니 똑바로 말을 하면
괜찮거니와 일향 고집하면 이 자리에서 네놈을 때려 죽일 터이니 그리 알아라."
한다. 이 말에 나는,
"오냐, 이제 잘 알았다. 내가 너희가 새로 산 밭에 돌이라면 그것을 맞았다. 너희가
나를 돌로 알고 파내려는 수고보다 패어내우는 내 고통이 더 심하니, 그렇다면
너희들의 손을 빌 것이 없이 내 스스로 내 목숨을 끊어 버릴 터이니 보아라."
하고 머리로 옆에 있는 기둥을 받고 정신을 잃고 엎어졌다.
여러 놈들이 인공 호흡을 한다, 냉수를 면상에 뿜는다 하여 내가 다시 정신이
들었을 때에 여러 놈 중에서 한 놈이 능청스럽게,
"김구는 조선인 중에 존경을 받는 인물이니 이같이 대우하는 것이 마땅치 아니하니
본직에게 맡기시기를 바라오."
하고 청을 하니 여러 놈들이 즉시 승낙한다.
승낙을 받은 그놈이 나를 제 방으로 데리고 가더니 담배도 주고 말도 좋은 말을
쓰고 대우가 융숭하다. 그놈의 말이 자기는 황해도에 출장하여 내게 관한 조사를 하여
가지고 왔는데 그 결과로 보면 나는 교육에 열심하여 월급을 받거나 못 받거나
여일하게 교무에 열심하고 일반 인민의 여론을 듣더라도 나는 정직한 사람인데
경무총감부에서도 내 신분을 잘 모르고 악형을 많이 한 모양이니 대단히
유감된다 하고, 또 말하기를 심문하는 데는 이렇게 할 사람과 저렇게 할 사람이
따로 있는데 나 같은 인물에 대하여서 그렇게 한 것은 크게 실례라고 아주 뻔뻔스럽게
듣기 좋은 소리를 한다.
왜놈들이 우리 애국자들의 자백을 짜내기 위하여 하는 수단은 대개 세 가지로
구별할 수 있으니 첫째는 악형이요, 둘째는 배고프게 하는 것이요, 그리고 세째는
우대하는 것이다. 악형에는 회초리와 막대기로 전신을 두들긴 뒤에 다 죽게 된 사람을
등상 위에 올려 세우고 붉은 오라줄로 뒷짐결박을 지워서 천정에 있는 쇠갈고리에
달아 올리고는 발등상을 빼어버리면 사람이 대룽대룽 공중에 달리는 것이다. 이
모양으로 얼마 동안을 지나면 사람은 고통을 못 이기어 정신을 잃어버린다. 그런 뒤에
사람을 끌러 내려놓고 얼굴과 몸에 냉수를 끼얹으면 다시 소생하여 정신이 든다. 나는
난장을 맞을 때에 내복 위로 맞으니 덜 아프다 하고 내복을 벗어 버리고 맞았다.
그 다음의 악형은 화로에 쇠꼬챙이를 달구어 놓고 그것으로 벌거벗은 사람의 몸을
막 지지는 것이다.
그 다음의 악형은 세 손가락 사이에 손가락만한 모난 막대기를 끼우고 그 막대기 두
끝을 노끈으로 꼭 졸라매는 것이다.
그 다음은 사람을 거꾸로 달고 코에 물을 붓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악형을 당하면 나도 악을 내어서 참을 수도 있지마는 이보다 더
견디기 어려운 것은 굶기는 벌이다. 밥을 부쩍 줄여서 겨우 죽지 아니할 만큼 먹이는
것인데 이리하여 배가 고플 대로 고픈 때에 차입밥을 받아서 먹는 고기국과 김치
냄새를 맡을 때에는 미칠 듯이 먹고 싶다. 아내가 나이 젊으니 몸을 팔아서라도
맛있는 음식을 늘 들여 주었으면 좋겠다는 생각까지도 난다. 박영효의 부친이
옥중에서 섬거적을 뜯어 먹다가 죽었다는 말이며, 옛날 소무가 전을 씹어 먹으며 19년
동안 한나라 절개를 지켰다는 글을 생각할 때에 나는 사람의 마음은 배고파서 잃고
짐승의 성품만이 남은 것이 아닌가 하고 자책하였다.
차입밥! 얼마나 반가운 것인가. 그러나 왜놈들이 원하는 자백을 아니하면 차입은
허하지 아니한다. 참말이나 거짓말이나 저희들의 비위에 맞는 소리로 답변을 해야만
차입을 허하는 것이다. 나는 종내 차입을 못 받았다. 조석 때면 내 아내가 내게
들리라고 큰 소리로,
"김구 밥 가져 왔어요."
하고 소리치는 것이 들리나 그때마다 왜놈이,
"깅 가메 나쁜 말이 했소데. 사시이래 일이 오브소다."
하고 물리치는 소리가 들렸다. '깅가메'라는 것은 왜놈들이 부르는 내 별명이다.
그러나 배고픈 것보다도 견디기 어려운 것이 있으니 그것은 우대였다.
내가 아내를 팔아서라도 맛있는 것을 실컷 먹고 싶다고 생각할 때에 경무총감
명석의 방으로 나를 불러들여 극진히 우대하였다. 더할 수 없는 하지하천의 대우에
진절머리가 났던 나에게 이 우대가 기쁘지 않음이 아니었다.
명석이 놈이 내게 한 말의 요령은 이러하였다. 내가 신부민으로 일본에 대한 충성만
표시하면 즉각으로 자기가 총독에게 보고하여 옥고를 면하게 할 터이요, 또 일본이
조선을 통치함에 있어서 순전히 일본인만을 쓰는 것이 아니라 덕망이 높은 조선
인사를 얻어서 정치를 하게 하려 하니 그대와 같이 충후한 장자로서 대세의 추이를
모를 바 아닌즉 순응함이 어떠냐. 그런즉 안명근 사건에 대한 것은 사실대로 자백을
하라는 것이었다.
나는 명석에게 대하여,
"당신이 나의 충후함을 인정하거든 내가 자초로부터 공술한 것도 믿으시오."
하였다. 그놈은 가장 점잖은 체모를 가지나 기색은 좋지 못하였다.
이런 일이 있은 뒤에 오늘 내가 불려 나와서 처음에 당장 때려 죽인다고 하다가
이놈의 방으로 끌려 들어온 것이었다.
이놈은 국우라는 경시다. 그는 제가 대만에 있을 때에 어떤 대만인 피의자 하나를
담임하여 심문하였는데 그 사람이 나와 같이 고집하다가 검사국에 가서야 일체를
자백하였노라 하는 편지를 국우에게 보내었다 하며, 나도 검사국에 넘어가거든 잘
자백을 할 터이니 그러면 검사의 동정을 얻으리라 하고 전화로 국수장국에 고기를
많이 넣어서 가져오라고 명하여 그것을 내 앞에 놓고 먹기를 청한다. 나는 나를
무죄로 한다면 이 음식을 먹으려니와 나를 유죄로 한다면 나는 입에 대지 않는다고
하고 숟가락을 들지 아니하였다.
그런즉 그놈이,
"김구씨는 한문병자야. 김구는 내게 동정을 아니하지마는 나는 자연히 김구씨께
동정이 간단 말요. 그래서 변변치 못하나마 드리는 대접이니 식기 전에 어서 자시오."
한다. 그래도 나는 일향 사양하였더니 국우는 웃으면서 한자로,
'(군의치독부)
그대는 음식에 독을 넣었다고 의심하는가.'
하는 다섯 자를 써 보이며, 이제는 심문도 종결되었고 오늘부터는 사식 차입도
허한다고 하였다. 나는 독을 넣었다고 의심하는 것은 아니라 하고 그 장국을 받아
먹고 내 방으로 돌아왔다. 그날 저녁부터 사식이 들어왔다.
나와 같은 방에 이종록이라 하는 청년이 있는데 그를 따라온 친척이 없어서 사식을
들여 줄 이가 없었다. 내가 밥을 그와 한 방에서만 먹으면 그를 나눠줄 수도
있겠지마는 사식은 딴 방에 불러내어서 먹이기 때문에 그리할 수가 없어서 나는 밥과
반찬을 한 입 잔뜩 물고 방에 들어와서 제비가 새끼 먹이듯이 입에서 입으로 옮겨
먹였다. 그러나 그것도 한 때 뿐이요, 이튿날 나는 종로 구치감으로 넘어갔다. 방은
독방이라 심심하나 모든 것이 총감부보다는 편하고 거기서 주는 감식이라는 밥도
총감부의 것보다는 훨씬 많았다.
내 사건은 사실대로만 처단한다 하면 보안법 위반으로 극형이라 하여 징역 일년밖에
안될 것이지마는 나를 억지로 안명근의 강도사건에 끌어다 붙이려 하였다. 내가
억지로라 하는 것에는 분명한 이유가 있다. 내가 서울 양기탁의 집에서 서간도에
이민을 하고 무관학교를 세울 목적으로 이동녕을 파견할 회의를 한 날짜가 바로
안악에서 안명근, 김홍량 등이 부호를 협박할 의논을 하였다 하는 그 날짜이므로 나는
도저히 안악에서 한 회의에 참예할 수 없는 것이 분명하였다. 그러하건마는 안악
양산학교 교직의 아들 이원형이라 하는 14세 되는 어린아이를 협박하여 내가 그
자리에 참예하는 것을 보았노라고 거짓 증언을 시켜서 나를 안명근의 강도 사건에
옭아 넣었다. 애매하기로 말하면 김홍량이나 도인권이나 김용제나 다 애매하지마는
그래도 이들은 그날 안악에는 있었으니 회의에 참예했다고 억지로 우겨댈 수도
있겠으나 5백 리 밖에서 다른 회의에 참예하였다고 저희 기록에 써놓은 내가, 같은
날에 안악의 회의에도 참예했다는 것은 요술이라고 아니할 수 없었다.
나는 내게 대한 유일한 증인인 이원형 소년이 내가 심문 받는 옆방에서 심문 받는
소리를 분명히 들었다.
"너는 안명근과 김구가 그 자리에 있는 것을 보았지?"
하는 심문에 대하여 이 소년은,
"나는 안명근이라는 사람은 얼굴도 모르고, 김구는 그 자리에 없었소."
하고 사실대로 대답하였다. 옆에서 어떤 조선 순사가,
"이 미련한 놈아. 안명근이도 김구도 그 자리에 있었다고만 하면 너의 아버지를
따라 집에 가게 해줄 터이니 시키는 대로 대답을 해."
하는 말에 원형은,
"그러면 그렇게 할 터이니 때리지 마셔요."
하였다.
검사정에서도 이원형을 증인으로 불러 들였으나, 이 소년이,
"네."
하는 대답이 있자마자 다른 말이 더 나오는 것을 꺼리는 듯 곧 문 밖으로 몰아내었다.
나는 5백 리를 새에 둔 회의에 한 날에 참예하는 김구를 만드노라고 매우
수고롭겠다고 검사에게 말하였더니 검사는 그 말에 대답도 아니하고,
"종결!"
하고 심문이 끝난 것을 선언하였다.
내가 경무총감부에 갇혀 있을 그때 의병장 강기동도 잡혀 와 있었다. 그는 애초에
의병으로 다니다가 귀순하여서 헌병 보조원이 되었다. 한 번은 사형을 당할 의병
10여명이 갇힌 감방을 수직하게 되었을 때에 그는 감방문을 열어 의병들을 다
내어놓고 무기고를 깨뜨리고 무기를 꺼내어 일제히 무장을 하고 그도 같이 달아나서
경기, 충청, 강원도 등지로 왜병과 싸우고 돌아다니다가 안기동이라고 변명하고 원산에
들어가 무슨 계획을 하다가 붙들려 온 것이었다. 그는 육군 법원에서 사형선고를 받고
총살되었다. 김좌진도 애국운동으로 강도로 몰려 징역을 받고 나와 같은 감방에서
고생을 하였다.
하루는 안악 군수 이모라는 자가 감옥으로 나를 찾아와서 양산학교 집과 기구를
공립보통학교에 내어놓는다는 도장을 찍으라고 하므로, 나는 집은 나랏집이니까
내어놓지마는 기구는 사삿 것이니 사립학교인 양산학교에 기부한다고 하였으나 그것도
공립으로 가져가고 말았다. 양산학교는 우리들 불온분자들의 학교라 하여 강제로
폐지해 버린 것이었다. 내가 그렇게 사랑하는 아이들은 목자를 잃은 양과 같이 다
흩어져 버렸을 것이다. 특별히 손두환과 우기범 두 학생이 생각났다. 재주로나
뜻으로나 특출하였고 어리면서도 망국 한을 느낄 줄 아는 이들이었다.
어떻게 하여서라도 이 자리를 모면하여 해외에서 활동하고 싶던 김홍량도 자기가
안명근의 부탁으로 신천 이원식에게 권고하였다는 것을 자백하였으니 도저히 빠지기
어려울 것이다. 심혈을 다 바치던 교육사업도 수포로 돌아가고 믿고 사랑하던 동지도
이제는 살아 나갈 길이 망연하니 분하기 그지 없었다. 어머니는 안악에 있던
가장집물을 다 팔아 가지고 내 옥바라지를 하시려고 서울로 올라오셨다. 내 처와 딸
화경이는 평산 처형네 집에 들렸다가 공판날이 되어서 온다는 어머니의 말씀이셨다.
어머니가 손수 담으신 밥그릇을 열어 밥을 떠 먹으며 생각하니 이 밥에 어머니
눈물이 점점이 떨어졌을 것이었다. 18년 전 해주에서의 옥바라지와 인천 옥바라지를
하실 때에는 내외분이 고생을 나누기나 하셨건마는 이제는 어머니 혼자셨다. 어머님께
도움이 되기는커녕 위로를 드릴 능력이 있는 자가 그 누군가.
이렁저렁 공판날이 되었다. 죄수를 태우는 마차를 타고 경성 지방 재판소 문전에
다다르니 어머니가 화경이를 업으시고 아내를 데리고 거기 서 계셨다.
우리는 2호 법정이라는 데로 끌려 들어갔다. 법정 피고석 걸상에 앉은 차례는
수석에 안명근, 다음에 김홍량, 세째로는 나 그리고는 이승길, 배경진, 한순직, 도인권,
양성진, 최익형, 김용제, 최명식, 장윤근, 고봉수, 한정교, 박형병 등 모두 열 다섯 명이
늘어앉고 방청석을 돌아 보니 피고인의 친척, 친지와 남녀 학생들이 와 있었다.
변호사, 신문기자석에도 다 사람이 있었다. 한필호 선생이 경무총감부에서 매맞아
별세하고 신석충 진사는 사리원으로 호송되는 도중에 재령강 철교에서 투신 자살을
하였단 말을 여기서 들었다.
소위 판결이라는 것은 안명근이 징역 종신이요, 김홍량, 김구, 이승길, 배경진,
한순직, 원행섭, 박만준 등 일곱 명은 징역15년(원행섭, 박만준은 궐석이었다), 도인권,
양성진이 10년, 최익형, 김용제, 장윤근, 고봉수, 한정교, 박형병은 각각 7년, 또는
5년이니 이것은 강도사건 관계요, 보안법사건으로는 양기탁을 주범으로 하여 안태국,
김구, 김홍량, 주진수, 옥관빈, 김도희, 김용규, 고정화, 정달하, 감익룡과 이름은
잊었으나 김용규의 족질 한 사람이 있었는데 판결되기는 양기탁, 안태국, 김구, 김홍량,
주진수, 옥관빈은 징역 2년이요, 나머지는 1년으로부터 6개월이었다. 그리고 재판을
통하지 아니하고 소위 행정처분으로 이동휘, 이승훈, 박도병, 최종호, 정문원, 김영옥
등 19인은 무의도, 제주도, 고금도, 울릉도로 일년간 거주 제한이라는 귀양살이를 하게
되었다. 그러고 보니 김홍량이나 나는 강도로 15년, 보안법으로 2년, 모두 17년
징역살이를 하게 된 것이었다.
판결이 확정되어 우리는 종로 구치감을 떠나서 서대문 감옥으로 넘어갔다. 지금까지
미결수였으나 이제부터는 변통없는 전중이었다. 동지들의 얼굴을 날마다 서로 대하게
되고 이따금 말로 통정도 할 수 있는 것이 큰 위로였다.
7년, 5년 징역까지는 세상에 나갈 희망이 있지마는 10년, 15년으로는 살아서 나갈
희망은 없었다. 그러므로 나는 몸은 왜에 포로가 되어 징역을 지면서도 정신으로는
왜놈을 짐승과 같이 여기고 쾌활한 마음으로 낙천 생활을 하리라고 작정하였다. 다른
동지들도 다 나와 뜻이 같았다.
옥중에 있는 동지들은 대개 아들이 있었으나 나는 딸이 하나가 있을 뿐이요, 아들이
없었다. 김용제 군은 아들이 4형제나 되므로 그 세째 아들 문량으로 하여금 내 뒤를
잇게 한다고 허락하였다. 나도 동지의 호의를 고맙게 받았다.
또 한 가지 나로 하여금 비관을 품지 않게 하는 일이 있으니, 그것은 일본이 내가
잡혀오기 전에 생각하던 것과 같이 크고 무서운 나라가 아니라는 것을 본 것이었다.
밑으로는 형사, 순사로부터 꼭지로는 경무총감까지 만나 보는 동안에 모두 좀것들이요,
대국민다운 인물은 하나도 없었다. 가슴에 엑스광선을 대어서 내 속과 내력을 다
뚫어본다면서도 내가 17년 전의 김창수인 줄도 몰라보고 깝죽대는 도변이야말로
일본을 대표한 자인 것 같다.
'일본은 한국을 오래 제 것을 만들지는 못한다. 일본의 운수는 길지 못하다.'
나는 이렇게 단정하기 때문에 우리나라의 장래에 대하여서 비관하지 아니하게
되었다.
허위 이강년 같은 큰 애국지사의 부하로 의병을 다니다가 들어왔다는 사람들이
인물로나 식견으로나 보잘 것 없음을 볼 때에는 낙심도 되지마는 이재명, 안중근 같은
의사의 동지로 잡혀 들어온 사람들의 애국심이 불같고 정신이 씩씩한 것을 보면,
교육만 하면 우리 민족은 좋은 국민이 될 것을 아니 믿을 수 없었다. 저 무지한
의병들도 일본에 복종하는 백성이 되지 아니하고 10년, 15년의 벌을 받는 사람이 된
것만 해도 고맙고 존경할 일이라고 생각하였다. 나도 고후조 선생 같은 어른의
가르침이 없었던들 어찌 대의를 아는 사람이 되었으랴.
옥에 있는 동안에 나는 내 심리가 차차 변하는 것을 느꼈다. 그것은 지난 10여
년간에 예수의 가르침을 따라서 무엇에나 저를 책망할지언정 남을 원망하지 아니하고
남의 허물은 어디까지나 용서하는 그러한 부드러운 태도가 변하여서 일본에 대한
것이면 무엇이나 미워하고 반항하고 파괴하려는 결심이 생긴 것이었다.
나는 아침 저녁으로 다른 죄수들과 같이 왜 간수에게 절을 하는 것이 무척 괴롭고
부끄러웠다. 다른 죄수들은 대의를 몰라서 그러하거니와 너는 고 선생의 제자가
아니냐 하고 양심을 때리는 것이 있었다.
나는 내 손으로 밭갈고 길쌈함이 없이 오늘까지 먹고 입고 살아왔다. 그 먹은 밥과
입은 옷이 뉘게서 나왔느냐, 우리 대한 나라의 것이 아니냐. 나라가 나를 오늘날까지
먹이고 입힌 것이 왜놈에게 순종하여 붉은 요에 콩밥이나 얻어먹으라고 한 것이
아니었다.
'(식인지식의인 소지평생막유위)
사람의 밥을 먹고 사람의 옷을 입었으니, 품은 뜻은 평생토록 어김이 없어야 한다.'
내가 대한 나라의 밥을 먹고 옷을 입고 살아 왔으니 이 수치를 참고 살아나서
앞으로 17년 후에 이 은혜를 갚을 공을 세울 수가 있느냐.
내가 이 모양으로 고민할 때에 안명근 군이 굶어 죽기를 결심하였노라고 내게
말하기로 나는 서슴지 않고,
"할 수 있거든 단행하시오."
하였다. 그날부터 안명근은 배가 아프다고 칭하고 제게 들어오는 밥은 다른 죄수에게
나눠주고 4,5일을 연해 굶어서 기운이 탈진하였다. 감옥에서는 의사를 시켜 진찰케
하였으나 아무 병이 없으므로 안명근을 결박하고 강제로 입을 벌리고 계란 등속을
흘려 넣어서 죽으려는 목숨을 억지로 붙들었다. 죽을 자유조차 없는 이 자리였다.
"나는 또 밥을 먹소,"하고 안명근은 내게 기별하였다.
우리가 서대문 감옥으로 넘어온 후에 얼마 아니하여서 또 중대사건이 생겼으니,
그것은 소위 사내 총독 암살음모라는 맹랑한 사건으로 전국에서 무려 7백여 명
애국자가 검거되어 경무총감부에서 우리가 당한 악형을 다 겪은 뒤에는 105인이
공판으로 회부된 사건이다. 105인 사건이라고도 하고 신민회 사건이라고도 한다. 2년
형의 진행 중에 있던 양기탁, 안태국, 옥관빈과 제주도로 정배갔던 이승훈도 붙들려
올라왔다. 왜놈들은 새로 산 밭에 뭉우리돌을 다 골라 버리고야 말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것으로 대한이 제것으로 될까?
내가 복역한 지 칠팔 삭 만에 어머니께서 서대문 감옥으로 나를 면회하러 오셨다.
딸깍하고 주먹 하나 드나들 만한 구멍이 열리기로 내다본즉 어머니가 서 계시고 그
곁에는 왜간수 한놈이 지키고 있다. 어머니는 태연한 안색으로,
"나는 네가 경기 감사나 한 것보담 더 기쁘게 생각한다. 면회는 한 사람밖에
못한다고 해서 네 처와 화경이는 저 밖에 와 있다. 우리 세 식구는 잘 있으니 염려
말아라. 옥중에서 네 몸이나 잘 보중하여라. 밥이 부족하거든 하루 두 번씩 사식 들여
주랴?"
하시고 어성 하나도 떨리심이 없었다. 저렇게 씩씩하신 어머니께서 자식을 왜놈에게
빼앗기시고 면회를 하겠다고 왜놈에게 고개를 숙이고 청원을 하셨을 것을 생각하니
황송하고도 분하였다.
우리 어머니는 참말 갸륵하셨다! 17년 징역을 받은 아들을 대할 때에 어쩌면 저렇게
태연하실 수가 있었으랴. 그러나 면회를 마치고 돌아가실 때에는 눈물이 앞을 가려서
발부리가 아니 보이셨을 것이다.
어머니께서 하루 두 번 들여 주시는 사식을 한 번은 내가 먹고 한 번은 다른
죄수들에게 번갈아 나눠 주었다. 그들은 받아 먹을 때에는 평생에 그 은혜를 아니
잊을 듯이 굽신거리지마는 다음 번에 저를 아니 주고 다른 사람을 줄 때에는 "그게 네
의붓아비냐, 효자정문 내릴라." 이러한 소리를 하면서 내게 욕설을 퍼부었다. 그러면
그때에 내게 얻어 먹는 편이 들고 나서 나를 역성하므로 마침내 툭탁거리고 싸움이
벌어져서 둘이 다 간수에게 흠씬 얻어 맞는 일도 있었다. 나는 선을 한다는 것이
도리어 악이 되는 것이었다.
나도 처음 서대문 감옥에 들어갔을 때에는 먼저 들어온 패들이 나를 멸시하였으나
소위 국사 강도범이란 것이 알려지면서부터는 대접이 변하였다. 더구나 이재명 의사의
동지들이 모두 학식이 있고 일어에 능통하여서 죄수와 간수 사이에 무슨 일이 있을
때에는 통역을 하기 때문에 죄수들간에 세력이 있었는데, 그들이 나를 우대하는 것을
보고 다른 죄수들도 나를 어려워하게 되었다.
나는 처음에는 한 백여 일 동안 수갑을 채인 대로 있었다. 더구나 첫날 수갑을
채우는 놈이 너무 단단하게 졸라서 살이 패이고 손목이 통통 부었으므로 이튿날
문제가 되어서,
"왜 아프다고 말하지 아니하였느냐?"
고 하기로 나는,
"무엇이나 시키는 대로 복종하라고 하지 아니하였느냐."
하였다. 그랬더니,
"이 다음에는 불편한 일이 있거든 말하라."
고 하였다.
손목은 아프고 방은 좁아서 몹시 괴로웠으나 나는 꾹 참았다. 사람의 일이란 알 수
없는 것이어서, 이러한 생활에도 차차 익으면 심상하게 되었다. 수갑도 끄르게 되어서
몸이 좀 편하게 되니 불현듯 최명식 군이 보고 싶었다. 수갑 끄른 자리에 허물은
지금도 완연히 남아 있다. 최군은 옴이 올라서 옴방에 있다 하니 나도 옴이 생기면
최군과 같이 있게 되리라 하여 인공적으로 옴을 만들었다. 의사의 순회가 있기 30분
전쯤하여 철사 끝으로 손가락 사이를 꼭꼭 찔러 놓으면 그 자리가 볼록볼록 부르트고
말간 진물이 나와서 천연 옴으로 보였다. 이것은 내가 감옥살이에서 배운 부끄러운
재주였다.
이 속임수가 성공하여 나는 옴장이 방으로 옮겨져서 최명식과 반가이 만날 수가
있었다. 반가운 김에 밤이 늦도록 둘이 이야기를 하다가 좌동이라 하는 간수놈에게
들켜서 누가 먼저 말을 하였느냐 하기로 내가 먼저 하였노라 하였더니 나를 창살
밑으로 나오라 하여 내어 세워 놓고 곤봉으로 난타하였다. 나는 아무 소리도 내지
아니하고 맞았으나 그때에 맞은 것으로 내 왼편 귀 위의 연골이 상하여 봉충이가
되어서 지금도 남아 있다. 그러나 다행히 최군은 용서한다 하고 다시 왜말로,
"하나시 헷소도 다다꾸도(이야기하면 때려줄 테야.)"
하고 좌등은 물러갔다.
감옥에서 죄수에게 이렇게 가혹한 대우를 하기 때문에 죄수들은 더욱 반항심과
자포자기심이 생겼다. 그래서 사기나 횡령으로 들어온 자는 절도나 강도질을 하였다.
그리고 만기로 출옥하였던 자들도 다시 들어오는 자를 가끔 보았다. 민족적 반감이
충만한 우리를 왜놈의 그 좁은 소갈머리로는 도저히 감화할 수 없겠지마는 내
민족끼리의 나라에서 감옥을 다스린다 하면 단지 남의 나라를 모방만 하지 말고
우리의 독특한 제도를 만들 필요가 있었다. 즉 감옥의 간수부터 대학교수의 자격이
있는 자를 쓰고 죄인을 죄인으로 보는 것보다는 국민의 불행한 일원으로 보아서
선으로 지도하기에만 힘을 쓸 것이요, 일반 사회에서도 입감자를 멸시하는 감정을
버리고 대학생의 자격으로 대우한다면 반드시 좋은 효과가 있으리라고 믿는다.
왜의 감옥제도로는 사람을 작은 죄인으로부터 큰 죄인을 만들 뿐더러 사람의
자존심과 도덕심마저도 마비시켰다. 예하면 죄수들은 어디서 무엇을 도둑질하던
이야기, 누구를 어떻게 죽이던 이야기를 부끄러워함도 없이 도리어 자랑삼아서 하고
있었다. 그도 친한 친구에게면 몰라도 초면인 사람에게도 꺼림이 없고, 또 세상에
드러난 죄도 아니고 저 혼자만 아는 죄를 뻔뻔스럽게 말하는 것을 보아도 그들이
감옥에 들어와서 부끄러워하는 감정을 잃어버린 표다. 사람이 부끄러움을 잃을진대
무슨 짓은 못하랴. 짐승과 다름이 없을 것이니 감옥이란 이런 곳에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하였다.
나는 최명식과 함께 소제부의 일을 하게 되었다. 이것은 죄수들이 부러워하는
'벼슬'이다. 우리는 공장에서 죄수들에게 일감을 돌려주고 뜰이나 쓸고 나면 할 일이
없어서 남들이 일하는 구경이나 돌아다녔다. 이 기회를 이용하여 최 군과 나와는 죄수
중에서 뛰어난 인물을 고르기로 하였다. 내가 돌아보다가 눈에 띄는 죄수의 번호를
기억하고 명식 군도 기억하여 나중에 맞추어 보아서 둘의 본 바가 일치하는 자가
있으면 그의 내력과 인물을 조사하는 것이었다.
이 방법으로 우리는 한 사람을 골랐다. 그는 다른 죄수와 같이 차리고 같은 일을
하지마는 그 눈에 정기가 있고 동작에도 남다른 데가 있었다. 나이는 40내외였다.
인사를 청한즉 그는 충청북도 광산 사람이요, 5년 징역을 받아 이태를 치르고 앞으로
3년을 남긴 강도범으로 통칭 김진사라는 사람이었다. 나는 누구며 무슨 죄로 왔느냐고
묻기로, 나는 황해도 안악 사람이요, 강도로 15년을 받았다고 하였더니 김진사는,
"거, 짐이 좀 무겁소 그려."
하였다. 그리고 이어서 그가 나에게 '초범이시오?' 하기로 그렇다고 대답할 때에 왜
간수가 와서 더 말을 못하고 헤어졌다.
내가 그 사람과 이야기하는 것을 본 어떤 죄수가 나에게 그 사람을 아느냐 하기로
초면이라 하였더니, 그 죄수의 말이,
"남도 도적 치고 그 사람 모르는 도적은 없습니다. 그가 유명한 삼남 불한당 괴수
김진사요. 그 패거리가 많이 잡혀 들어왔는데 더러는 병나 죽고 사형도 당하고 놓여
나간 자도 많지요."
하였다.
그랬더니 그날 저녁에 우리들이 벌거벗고 공장에서 감방으로 들어올 때에 그 역시
벌거벗고 우리 뒤를 따라서,
"오늘부터 이 방에서 괴로움을 끼치게 됩니다."
하고 내가 있는 감방으로 들어왔다. 나는 퍽이나 반가워서,
"이 방으로 전방이 되셨소?"
하고 물은즉 그는,
"네. 아, 노형 계신 방이구려."
하고 그도 기쁜 빛을 보인다. 옷을 입고 점검도 끝난 뒤에 나는 죄수 두 사람에게
부탁하여 철창에 귀를 대어 간수가 오는 소리를 지켜 달라 하고 김진사와 이야기를
시작하였다.
내가 먼저 입을 열어, 아까 공장에서는 서로 할 말을 다 못하여서 유감일러니 이제
한 방에 있게 되니 다행이란 말을 하였더니 그도 동감이라고 말하고는 계속하여서
그는 마치 목사가 신입 교인에게 세례문답을 하듯이 내게 여러 가지를 물었다. 그 첫
질문은,
"노형은 강도 15년이라 하셨지요?"
하는 것이었다.
"네, 그렇소이다."
"그러면 어느 계통이시오, 추설이요, 목단설이시요? 북대요? 또 행락은 얼마
동안이나 하셨소?"
나는 이게 다 무슨 소린지 한마디도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추설', '목단설'은
무엇이요, '북대'는 무엇이며, '행락'은 대체 무엇일까? 내가 어리둥절하고 있는 것을
보더니 김진사는 빙긋 웃으며,
"노형이 북대인가 싶으오."
하고 경멸하는 빛을 보였다.
내 옆에서 우리들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죄수 하나가 김진사를 대하여 나를
가리키며, 나는 국사범 강도라, 그런 말을 하여도 못 알아 들을 것이라고 변명하여
주었다. 그는 찰강도라 계통 있는 도적이었다. 그의 설명을 듣고야 김진사는 고개를
끄덕이며,
"내 어째 이상하다 했소. 아까 공장에서 노형이 강도 15년이라기에 위아래로
훑어보아도 강도 냄새가 안 나기에 아마 북대인가 보다 하였소이다."
한다.
나는 연전에 양산학교 사무실에서 교원들과 함께 하던 이야기를 생각하지 아니할 수
없었다. 세상에 활빈당이니 불한당이니 하는 큰 도적 떼가 있어서 능히 장거리와 큰
고을을 쳐서 관원을 죽이고 전재를 빼앗되 단결이 굳고 용기가 있으며 동에 번쩍 서에
번쩍 동작이 민활하여 나라 군사의 힘으로도 그들을 잡지 못한단 말을 들었는데,
우리가 독립운동을 하자면 견고한 조직과 기민한 훈련이 필요한즉 이 도적 떼의
결사와 훈련의 방법을 연구할 필요가 있다 하여 두루 탐문해 보았으나 마침내 아무
단서도 얻지 못하고만 일이었다.
사흘을 굶으면 도적질할 마음이 난다고 하지마는 마음만으로 도적이 될 수는 없을
것이니 거지도 용기와 공부가 필요할 것이다. 담을 넘고 구멍을 뚫는 좀도둑은 몰라도,
수십 명 수백 명 떼를 지어 다니는 도적이라면 거기는 조직도 있고 훈련도 있고
의리도 있으려니와 무엇보다도 두목되는 지도자가 있을 것인즉 수십 명 수백 명 도적
떼의 지도자가 될 만한 인물이면 능히 한 나라를 다스려 갈 만한 지혜와 용기와
위엄이 있어야 할 것이다.
그래서 나는 김진사에게 도적 떼의 조직에 관한 것을 물었다. 그런즉 진사는
의외에도 은휘함 없이 내 요구에 응하였다.
"우리 나라의 기상이 다 해이한 이때까지도 그대로 남은 것은 벌과 도적의
법뿐이외다."
라는 허두로 시작된 김진사의 말에 의하면, 고려 이전은 상고할 길이 없으나
이조시대의 도적 떼의 기원은 이성계의 이신벌군의 불의에 분개한 지사들이 도당을
모아 일변 이성계를 따라서 부귀영화를 누리는 소위 양반들의 생명과 재물을 빼앗고
일변 그들이 세우려는 질서를 파괴하여서 불의에 대한 보복을 하려는 데서 나왔으니,
그 정신에 있어서는 두문동 72현과 같았다. 그러므로 그들은 도적이라 하나 약한
백성의 것은 건드리지 아니하고 나라 재물이나 관원이나 양반의 것을 약탈하여서
가난하고 불쌍한 자를 구제함으로 쾌사를 삼았다. 이 모양으로 나라를 상대로 하기
때문에 자연히 법이 엄하고 단결이 굳어서 적은 무리의 힘으로 능히 5백 년간 나라의
힘과 겨루어 온 것이었다.
이 도적의 떼는 근본이 하나요, 또 노사장이라는 한 지도자의 밑에 있으나 그
중에서 강원도에 근거를 둔 일파를 '목단설'이라고 부르고, 삼남에 있는 것을
'추설'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그러나 이 두 설에 속한 자는 서로 만나면 곧 동지로
서로 믿고 친밀하게 되었다. 이 두 설에 들지 아니하고 임시임시로 도당을 모아서
도적질하는 자를 '북대'라고 하는데 이 북대는 목단설과 추설의 공동의 적으로 알아서
닥치는 대로 죽여 버리게 되었다.
노사장 밑에는 유사가 있고 각 지방의 두목도 유사라고 하여 국가의 행정조직과
방사하게 전국의 도적을 통괄하였다. 일년에 일차 '대장'을 부르니 이것은 한 설만의
대회였다. 대회라고 전원이 출석하기는 불가능하므로 각 도와 각 군에서 몇 명씩
대표자를 파견하기로 되었는데, 그 대표자는 각기 유사가 지명하게 되며 한 번 지명을
받으면 절대 복종이었다.
이 '장' 부르는 처소는 흔히 큰 절이나 장거리였다. 대소공사를 혹은 의논하고 혹은
지시하여 장이 끝난 뒤에는 으례 어느 고을이나 장거리를 쳐서 시위를 하는 것이었다.
그들이 대회에 참예하러 갈 때에는 혹은 양반으로 혹은 등짐장수로 혹은 장돌림,
혹은 중, 혹은 상제로 별별 가장을 하여서 관민의 눈을 피하였다. 어디를 습격하러 갈
때에도 마찬가지였다. 당시에 세상을 놀라게 한 하동장 습격은 장례를 가장하여
무기를 관에 넣어 상여에 싣고 도적들은 혹은 상제, 혹은 복인, 혹은 상두꾼, 혹은
화장객이 되어서 장날 백주에 당당히 하동 읍내로 들어간 것이었다.
김진사는 이러한 설명을 구변 좋게 한 후에 내게,
"노형, 황해도라셨지? 그러면 연전에 청단장을 치고 곡산원을 죽인 사건을
아시겠구려?"
하기로 아노라고 대답하였더니, 김진사는 지난 일을 회상하고 유쾌한 듯이 빙그레
웃으며,
"그때에 도당을 지휘한 것이 바로 나요. 나는 양반의 행차로 차리고 사인교를 타고
구종별배로 앞뒤 벽제까지 시키면서 호기당당하게 청단장에를 들어갔던 것이요. 장에
볼일을 다 보고 질풍신뢰와 같이 곡산읍으로 들이 몰아서 곡산 군수를 잡아 죽였으니
이것은 그놈이 학정을 하여서 인민을 어육을 삼는다 하기로 체천 행도를 한
것이었소."
하고 말을 마쳤다.
"그러면 이번 징역이 그 사건 때문이요."
하고 내가 묻는 말에 그는,
"아니오. 만일 그 사건이라면 5년 만으로 되겠소? 기위면키 어려울 듯하기로 대단치
아니한 사건 하나를 실토하여서 5년 징역을 졌소이다."
나는 그들이 새 동지를 구할 때에 어떻게 신중하게 오래 두고 그 인물을 관찰하는
것이며, 이만하면 동지가 되겠다고 판단한 뒤에도 어떻게 그의 심지를 시험하는
것이며, 이 모양으로 동지를 고르기 때문에 한 번 동지가 된 뒤에는 서로 다투거나
배반하는 일이 거의 없다는 것이며, 장물(도적한 재물)을 나눌 때에 어떻게 공평하다는
것이며, 또 동지의 의리를 배반하는 자가 만일에 있으면 어떻게 형벌이 엄중하다는
것도 김진사에게 들었다.
인물을 고를 때에는 먼저 눈 정기를 본다는 것이며 죄 중에 가장 큰 죄는 동지의
처첩을 범하는 것과 장물을 감추는 것이요, 상 중에 가장 큰 상은 불행히 관에
잡혀가더라도 동지를 불지 아니하는 것이니 이러한 사람을 위하여서는 그 가족이
편안히 살도록 하여 준다는 말도 들었다.
김진사의 말을 듣고 나는 나라의 독립을 찾는다는 우리 무리의 단결이 저 도적만도
못한 것을 무한히 부끄럽게 생각하였다.
여기서 나는 동지 도인권을 생각하지 아니할 수 없었다. 그는 본시 용강 사람으로
노백린, 김희선, 이갑 등이 장령으로 있을 때에 군인이 되어서 정교의 자리에까지
올랐다가 군대가 해산되매 향리에 돌아와 있는 것을 양산학교 체육 선생으로 연빙하여
와서 우리와 동지가 되어 이번 사건에도 10년 징역을 받고 나와 같이 고생을 하게 된
사람이다. 이때에 옥중에서는 죄수를 모아서 불상 앞에 예불을 시키는 예가 있었는데,
도인권은 자기는 예수교인이니 우상 앞에 고개를 숙일 수 없다 하여 아무리
위협하여도 고개를 빳빳이 하고 있었다. 이것이 문제가 되어서 마침내 강제로 시키지
아니하기로 작정이 되었다.
또 옥에서 상표를 주는 것을 그는 거절하였다. 자기는 죄를 지은 일도 없고 따라서
회개한 일도 없으니 개준을 이유로 하는 상표를 타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또 그 후에 가출옥을 시킬 적에도 도인권은, 내가 본래 무죄한 것을 지금 와서
깨달았으니 판결을 취소하고 나가라 하면 나가겠지마는 가출옥이라는 '가'자가
불쾌하니 아니 받는다고 버티어서 옥에서도 할 수 없이 형기를 태우고 도로 내보냈다.
도인권의 이러한 행동은 강도로서는 능히 못할 일이라, '만산고목일지청'의 기개가
있었다.
'(외외낙낙적나나 독보건곤수반아)
홀로 높고 정갈하여 구애됨이 없으니 천하를 홀로 걸으매 누가 나를 짝하랴.'
라고 한 불가의 귀절을 나는 도군을 위하여 한 번 읊었다.
하루는 나가서 일을 하고 있는데 갑자기 일을 중지하고 명치가 죽었다는 것과 그
때문에 대사를 내린다는 말을 하였다. 이 때문에 최고 2년인 보안법 위반에 걸린
동지들은 즉일로 나가고 나는 8년을 감하여 7년이 되고 김홍량 기타 15년은 7년을
감하여 8년이 되고 10년이라도 다 그 비례로 감형이 되었다. 그런 뒤 수삭이 지나서
또 명치의 처가 죽었다 하여 다시 잔기의 3분지 1을 감하니 내 형은 5년 남짓한
경형이 되고 말았다.
이때 종신이던 것이 20년으로 감하여진 안명근은 형을 가하여 죽임을 받을지언정
감형은 아니 받는다고 항거하였으나 죄수에게 대하여서는 일체를 강제로 집행하는
것인즉 감형을 아니 받을 자유도 죄수에게는 있지 아니하다 하여 필경 20년이 되고
말았다. 그리고는 안명근은 새로 지은 마포 감옥으로 이감이 되어서 다시는 그의
면목을 대할 기회도 없게 되었다. 안명근은 전후 17년 동안 감옥에 있다가 연전에
방면되어 신천 청계동에서 그 부인과 같이 여생을 보내고 있더니 아령에 있는 그
부친과 친 아우를 그려서 권하고 그리로 가던 길에 만주 화룡현에서 만고의 한을 품고
못 돌아올 길을 떠나고 말았다.
이렇게 연거푸 감형을 당하고 보니 이미 꺾어 버린 3년 남짓을 떼면 나머지 형기가
2년밖에 아니된다. 이때부터는 확실히 세상에 나가서 활동할 희망이 생겼다. 나는
세상에 나가면 무슨 일을 할까, 지사들이 옥에 다녀 나가서는 왜놈에게 순종하여
구질구질하게 살아가는 사람이 많은 것을 보니 나도 걱정이 되었다. 나는 왜놈이
지어준 뭉우리돌대로 가리라 하고 굳게 결심하고 그 표로 내 이름 김구를 고쳐 김구라
하고 당호 연하를 버리고 백범이라고 하여 옥중 동지들께 알렸다. 이름자를 고친
것은 왜놈의 국적에서 이탈하는 뜻이요, '백범'이라 함은 우리 나라에서 가장 천하다는
백정과 무식한 범부까지 전부가 적어도 나만한 애국심을 가진 사람이 되게 하자 하는
내 원을 표하는 것이니 우리 동포의 애국심과 정도를 그만큼이라도 높이지 아니하고는
완전한 독립국을 이룰 수 없다고 생각한 것이었다. 나는 감옥에서 뜰을 쓸고 유리를
닦을 때마다 하나님께 빌었다. 우리 나라가 독립하여 정부가 생기거든 그 집의 뜰을
쓸고 유리창을 닦는 일을 하여 보고 죽게 하소서 하고.
나는 앞으로 2년을 다 못 남기고 인천 감옥으로 이감이 되었다. 나는 그 원인을
안다. 내가 서대문 감옥 제 2과장 왜놈하고 싸운 일이 있는데 그 보복으로 그놈이
나를 힘드는 인천 축항공사로 돌린 것이었다.
여러 동지가 서로 만나고 위로하며 쾌활하게 3년이나 살던 서대문 감옥과 작별하고
40명 붉은 옷 입은 전중이 떼에 편입이 되어서 쇠사슬로 허리를 얽혀서 인천으로
끌려갔다. 무술년 3월 초열흘날 밤중에 옥을 깨뜨리고 도망한 내가 17년 만에
쇠사슬에 묶인 몸으로 다시 이 옥문으로 들어올 줄을 누가 알았으랴.
문을 들어서서 둘러보니 새로이 감방이 증축되었으나 내가 글을 읽던 그 감방이
그대로 있고 산보하던 뜰도 변함이 없다. 내가 호랑이같이 소리를 질러 도변이 놈을
꾸짖던 경무청은 매음녀 검사소가 되고 감리사가 좌기하던 내원당은 감옥의 집물을
두는 곳간이 되고, 옛날 주사, 순검이 들끓던 곳은 왜놈의 천지를 이루었다. 마치
죽었던 사람이 몇 십 년 후에 살아나서 제 고향에 돌아와서 보는 것 같다. 감옥 뒷담
너머 용동 마루터에서 옥에 갇힌 불효한 이 자식을 보겠다고 우두커니 서서
내려다보시던 선친의 얼굴이 보이는 듯하다. 그러나 오늘의 김구가 그날의 김창수라고
하는 자가 없으리라고 생각하였다.
감방에 들어가니 서대문에서 먼저 전감된 낯익은 사람도 있어서 반가웠다.
어떤 자가 내 곁으로 쓱 다가앉아서 내 얼굴을 들여다보면서,
"그분 낯이 매우 익은데, 당신 김창수 아니오."
한다.
참말 청천벽력이다. 나는 깜짝 놀랐다. 자세히 본즉 17년 전에 나와 한 감방에 있던
절도 10년의 문종칠이었다. 늙었을망정 젊을 때 면목이 그대로 있다. 오직 그때와 다른
것은 이마에 움쑥 들어간 구멍이 있는 것이었다. 내가 의아한 듯이 짐짓 머뭇거리는
것을 보고 제 낯바닥을 내 앞으로 쑥 내밀어 나를 쳐다보면서,
"창수 김서방. 나를 모를 리가 있소. 지금 내 면상에 이 구멍이 없다고 보면 아실 것
아니오? 나는 당신이 달아난 후에 죽도록 매를 맞은 문종칠이요, 그만하면 알겠구려."
하는데는 나는 모른다고 버틸 수가 없어서 반갑게 인사를 하였다. 그 자가 밉기도
하고 무섭기도 하였다.
문가는 나에게,
"당시에 인천 항구를 진동하던 충신이 무슨 죄를 짓고 또 들어오셨소?"
하고 묻는다. 나는 귀찮게 생각하여서,
"15년 강도요."
하고 간단히 대답하였다.
문가는 입을 삐죽거리며,
"충신과 강도는 상거가 심원한데요. 그때의 창수는 우리 같은 도적놈들과
동거케한다고 경무관한테까지 들이대지 않았소? 강도 15년은 맛이 꽤 무던하겠구려."
하고 빈정거린다.
나는 속에 불끈 치미는 것이 있었으나 문의 말을 탓하기는 고사하고 빌붙는 어조로,
"충신 노릇도 사람이 하고 강도도 사람이 하는 것 아니오? 한때에는 그렇게 놀고
한때에는 이렇게 노는 게지요. 대관절 문 서방은 어찌하여 또 이렇게 고생을 하시오?"
하고 농쳐 버렸다.
"나요? 나는 이번까지 감옥 출입이 일곱 번째니 일생을 감옥에서 보내는 셈이요."
"역한(징역 기한)은 얼마요?"
"강도 7년에 5년이 되어서 한 반 년 지내면 또 한 번 세상에 다녀오겠소."
"또 한 번 다녀오다니, 여보시오 끔찍한 말도 하시오. 또 여기를 들어와서야
되겠소?"
"자본 없는 장사가 거지와 도적질이지요. 더우기 도적질에 맛을 붙이면 별 수가
없습니다. 당신도 여기서는 별꿈을 다 꾸리다마는 사회에 나가만 보시오. 도적질하다가
징역한 놈이라고 누가 받자를 하오? 자연 농공상에 접촉을 못하지요. 개눈에는 똥만
보인다고 도적질하던 놈은 배운 길이 그것이라 또 도적질을 하지 않소?"
문가는 이렇게 술회를 한다.
"그렇게 여러 번째라면 어떻게 감형이 되었소?"
하고 내가 물었더니 문은,
"번번이 초범이지요. 지난 일을 다 말했다가는 영영 바깥 바람을 못 쏘여 보게요?"
하고 흥 하고 턱을 춘다.
나는 서대문에 있을 적에 어떤 강도가 중형을 지고 징역을 하는 중에 그의
공범으로서 잡히지 않고 있다가 횡령죄의 경형으로 들어온 것을 보고 밀고하여 중형을
지우고 저는 감형을 받아서 다른 죄수들에게 미움을 받는 사람을 보았다. 이것을
생각하니 문가를 덧들여 놓았다가는 큰일이다. 이자가 내가 17년 전의 김창수라는
것을 밀고하거나 떠벌리는 날이면 모처럼 일년 남짓하면 세상에 나가리라던 희망은
허사가 되고 만다. 그래서 나는 문가에게 친절 또 친절하게 대접하였다. 사식도 틈을
타서 문가를 주어 먹게 하고 감식(감옥에서 주는 밥)이라도 문가가 곁에 있기만 하면
나는 굶으면서도 그를 먹였다. 이러다가 문가가 만기가 되어 출옥할 때에 나의
시원함이란 내가 출옥하는 것 못지 아니하였다.
나는 아침이면 다른 죄수 하나와 쇠사슬로 허리를 마주 매어 짝을 지어 축항
공사장으로 나갔다. 흙지게를 등에 지고 십여 길이나 되는 사닥다리를 오르내리는
것이다. 서대문 감옥에서 하던 생활은 여기 비기면 실로 호강이었다. 반 달 못하여
어깨는 붓고 등은 헐고 발은 부어서 운신을 못하게 되었다. 그러나 면할 도리는
없었다. 나는 여러 번 무거운 짐을 진 채로 높은 사닥다리에서 떨어져 죽을 생각도
하였으나 그것도 할 수가 없는 것이 나와 마주 맨 사람은 대개 인천에서 구두켤레나
담뱃갑이나 훔치고 두서너 달 징역을 지는 판이라 그런 사람을 죽이는 것은 도리가
아니었다. 그래서 나는 조금도 편하려 하는 잔꾀를 버리고
'(열즉열살도리 한즉한살도리)
더울 때는 더위로 도리를 죽이고 추울 때는 추위로 도리를 죽여라'
의 선가의 병법으로 일하기에 아주 몸을 던져 버리고 말았다. 그리하였더니 몸이
아프기는 마찬가지라도 마음은 편안하였다.
이렇게 한 지 두어 달에 소위 상표라는 것을 주었다. 나는 도인권과 같이 이를
거절할 용기는 없고 도리어 다행으로 생각하였다.
날마다 축항공사장에 가는 길에 나는 17년 전 부모님께 친절하던 박영문의
물상객주집 앞을 지났다. 옥문을 나서서 오른편 첫째집이었다. 그는 후덕한 사람이요,
내게는 깊은 동정을 준 이였다. 아버지와는 동갑이라 해서 매우 친밀히 지냈다고 했다.
우리들이 옥문으로 들고 날 때에 박노인은 자기 집 문전에 서서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었다. 이렇게 목전에 보면서도 가서 내가 아무개요 하고 절할 수 없는 것이
괴로웠다.
박씨 집 맞은편 집이 안호연의 물상객주였다. 안씨 역시 내게나 부모님께나
극진하게 하던 이었다. 그도 전대로 살고 있었다. 나는 옥문을 출입할 때마다
마음으로만 늘 두 분께 절하였다.
7월 어느 심히 더운 날 돌연히 수인 전부를 교회당으로 부르기로,
나도 가서 앉았다. 이윽고 분감장인 왜놈이 좌중을 향하여,
"55호!"
하고 부른다. 나는 대답하였다. 곧 일어나 나오라 하기로 단위로 올라갔다. 가출옥으로
내보낸다는 뜻을 선언한다. 좌중 수인들을 향하여 점두레를 하고 곧 간수의 인도로
사무실로 가니 옷 한 벌을 내어 준다. 이로써 붉은 전중이가 변하여 흰 옷 입은
사람이 되었다. 옥에 맡아 두었던 내 돈이며 물건이며 내 품값이며 조수히 내어준다.
옥문을 나서서 첫번째 생각은 박영문, 안호연 두 분을 찾는 일이었으나 지금 내가
김창수라는 것을 세상에 알리는 것이 이롭지 못할 것을 생각하고 안 떨어지는 발길을
억지로 떼어서 그 집 앞을 지나 옥중에서 사귄 어떤 중국 사람의 집을 찾아가서 그날
밤을 묵었다.
이튿날 아침에 전화국으로 가서 안악 우편국으로 전화를 걸고 내 아내를 불러달라고
하였더니 전화를 맡아 보는 사람이 마침 내게 배운 사람이라 내 이름을 듣고는 반기며
곧 집으로 기별한다고 약속하였다.
나는 당일로 서울로 올라가 경의선 기차를 타고 신막에서 일숙하고 이튿날 사리원에
내려 배넘이 나루를 건너 나무리벌을 지나니 전에 없던 신작로에 수십 명 사람이
쏟아져 나오고 그 선두에 선 것은 어머니이셨다. 어머니는 내 걸음걸이를 보시며 마주
오셔서 나를 붙들고 낙루하시면서,
"너는 살아왔지마는 너를 그렇게도 보고 싶어하던 화경이 네 딸은 서너 달 전에
죽었구나. 네게 말할 것 없다고 네 친구들이 그러길래 기별도 아니하였다. 그나
그뿐인가. 일곱 살밖에 안 된 그 어린 것이 죽을 때에 저 죽거든 아예 옥중에 계신
아버지한테 기별 말라고 아버지가 들으시면 오죽이나 마음이 상하겠느냐고 그랬단다."
하는 말씀을 하셨다. 나는 그 후에 곧 화경의 무덤을 찾아 보아 주었다. 화경의 무덤은
안악읍 동쪽 산기슭 공동묘지에 있었다.
어머니 뒤로 김용제 등 여러 사람이 반갑게, 또 감개 깊게 나를 맞아 주었다.
나는 안신학교로 갔다. 내 아내가 안신학교에 교원으로 있으면서 교실 한 칸을 얻어
가지고 살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내는 다른 부인들 틈에 섞여서 잠깐 내 얼굴을
바라보고는 보이지 아니하였다. 그는 내 친구들과 함께 내가 저녁을 먹게 하려고
음식을 차리러 간 것이었다. 퍽 수척한 것이 눈에 띄었다.
며칠 후에 읍내 이인배의 집에서 나를 위하여 위로연을 배설하고 기생을 불러
가무를 시켰다. 잔치 중도에 나는 어머니께 불려 가서,
"내가 여러 해 동안 고생을 한 것이 오늘 네가 기생을 데리고 술 먹는 것을 보려고
한 것이냐?"
하시는 걱정을 들었다. 나를 연회석에서 불러 낸 것은 아내가 어머니께 고발한
때문이었다.
어머니와 내 아내와는 전에는 충돌도 없지 아니하였으나 내가 옥에 간 후로 서울로,
시골로 고생하고 다니시는 동안에 고부가 일심동체가 되어서 한 번도 뜻 아니 맞은
일이 없었다고 아내가 말하였다. 아내는 서울서 책 매는 공장에도 다녔고 어떤 서양
부인 선교사가 학비를 줄 테니 공부를 하라는 것도 어머니와 화경이가 고생이 될까
보아서 아니했노라고, 내외간에 말다툼이 있을 때면 번번이 그 말을 내세웠다. 우리
내외간에 다툼이 생기면 어머니는 반드시 아내의 편이 되셔서 나를 책망하셨다.
경험에 의하면 고부간에 무슨 귓속말이 있으면 반드시 내게 불리하였다. 내가 아내의
말을 반대하거나 조금이라도 아내에게 불쾌한 빛을 보이면 으례 어머니의 호령이
내렸다.
"네가 옥에 있는 동안에 그렇게 절을 지키고 고생한 아내를 박대해서는 안 된다. 네
동지들의 아내들 중에 별별 일이 다 있었지마는 네 처만은 참 절행이 갸륵하다.
그래서는 못 쓴다."
하시는 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집안 일에 하나도 내 마음대로 해본 일이 없었고 내외
싸움에 한 번도 이겨 본 일이 없었다. 내가 옥에서 나와서 또 한 가지 기뻤던 것은
준영 삼촌이 내 가족에 대하여 극진히 하신 것이었다. 어머니께서 아내와 화경이를
데리고 내 옥바라지하러 서울로 가시는 길에 해주 본향에 들르셨을 적에 준영 삼촌은
어머니께, 젊은 며느리를 데리고 어떻게 사고무친한 타향에 가느냐고, 당신이 집을
하나 마련하고 형수님과 조카 며느리 고생을 아니 시킬 테니 서울 갈 생각은 말고
본향에 계시라고 굳이 만류하시는 것을 어머니는 며느리는 옥과 같은 사람이라 어디를
가도 걱정이 없다 하녀 뿌리치고 서울로 가셨다는 것이었다.
또 어머니와 아내가 서울서 내려와서 종산 우종서 목사에게 의탁하여 있을 때에는
준영 삼촌이 소바리에 양식을 실어다 주셨다고 한다.
어머니는 이렇게 준영 삼촌의 일을 고맙게 말씀하시고 나서,
"네 삼촌님이 네게 대한 정분이 전과 달라 매우 애절하시다. 네가 나온 줄만 알면
보러 오실 것이다. 편지나 하여라."
하셨다.
어머니는 또 내 장모도 전 같지 않아서 나를 소중하게 아니, 거기도 출옥하였다는
기별을 하라고 하셨다. 내가 서대문 감옥에 있을 때에 장모가 여러 번 면회를 와
주셨다.
나는 곧이라도 준영 숙부를 찾아가 뵈옵고 싶었으나 아직 가출옥중이라 어디를
가려면 일일이 헌병대의 허가를 얻어야 하는데 왜놈에게 고개 숙이고 청하기가 싫어서
만기가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오는 정초에 세배 겸 준영 숙부를 찾을 작정이었다.
그 후 내 거주 제한이 해제되어서 김용진군의 부탁으로 수일 타작간검을 다녀왔더니
준영 숙부가 다녀가셨다. 점잖은 조카를 보러오는 길이라 하여 남의 말을 빌어 타고
오셨는데 이틀이 지나도 내가 아니 돌아오기 때문에 섭섭하게 돌아가셨다는 어머니의
말씀이었다.
정초가 되었다. 나는 찾을 어른들을 찾고, 어머니를 찾아 세배 오는 손님들 접대도
끝이 나서 초닷샛날은 해주로 가서 준영 숙부님을 뵈옵고 오래간만에 성묘도 하리라고
벼르고 있던 차에 바로 초나흗날 저녁때에 제종제 태운이가 준영 숙부께서
별세하셨다는 기별을 가지고 왔다. 참으로 경악하였다. 다시는 준영 숙부의 얼굴을
뵈옵지 못하게 되었다. 아버지 4형제 중에 아들이라고는 나 하나뿐, 준영 숙부는 딸
하나가 있을 뿐이었다. 오직 하나인 조카 나를 못 보고 떠나시는 숙부의 심정이
어떠하셨을까. 백영 백부는 관수, 태수 두 아들이 있었으나 다 조졸하여 없고 딸 둘도
시집간 지 얼마 아니하여 죽어서 자손이 없고 필영, 준영 두 숙부는 각각 딸 하나씩이
있을 뿐이었다.
날이 새는 대로 나는 태운과 함께 해주로 달려가서 준영 숙부의 장례를 주장하여
텃골 고개 동녘 기슭에 산소를 모셨다. 그리고는 돌아가신 준영 숙부의 가사 처리를
대강하고 선친 묘소에 손수 심은 잣나무를 점검하고 거기를 떠난 뒤로는 이내 다시
본향을 찾지 못하였다. 당숙모와 재종조가 생존하시다 하나 뵈올 길이 망연하다.
나는 아내가 보고 있는 안신학교 일을 좀 거들어 주었으나 소위 전과자인 나로서,
그뿐 아니라 시국이 변하여서 나같은 사람이 전과같이 당당하게 교육 사업에 종사할
수도, 더구나 신민회와 같은 정치 운동을 다시 계속할 수도 없었다. 지금까지
애국자이던 사람들은 해외로 망명하거나 문을 닫고 숨을 길밖에 없는 세상이 되어
버렸다. 왜놈은 우리 민족의 청소년을 우리 지도자가 들어가지 못하도록 백방으로
막아 놓고 노려보고 있었다.
나는 그렇다고 가만히 있을 수도 없어서 농촌 사업이나 해보려고 마음을 먹고
김홍량 일문의 농장 중에 소작인의 풍기가 괴악한 동산평 농장의 농감이 되기를
자청하였다. 동산평이란 데는 수백년 궁장으로, 감관들이 협잡을 하고 농민을
타락시켜서 집집이 도박이요, 사람사람이 모두 속임질과 음해로 일을 삼아서 할 수
없이 가난하고 괴악하게 된 부락이었다. 게다가 이곳은 수토가 좋지 못하여 토질
구덩이로 소문이 났었다.
김씨네는 내가 이런 데로 가는 것을 원치 아니하여 경치도 수토도 좋은 다른
농장으로 가라고 권하였다. 그들은 내가 한문 야학으로 벗을 삼아 은거하는 생활을
하려는 것으로 아는 모양이었다. 그러나 나는 고집하여 동산평으로 왔다.
나는 도박하는 자, 학령 아동이 있고도 학교에 안 보내는 자의 소작을 불허하고 그
대신 아이를 학교에 보내는 자에게 상등답 이 두락을 주는 법을 내었다. 이리하여
학부형이 아니고는 땅을 얻지 못하게 되었다.
그리고 오랫 동안 이 농장 마름으로 있으면서 소작인을 착취하고 도박을 시키던
노형극군 형제의 과분한 소작지를 회수하여서 근면하고도 땅이 부족한 사람에게
분배하였다. 이 때문에 나는 노형극에게 팔을 물리고 집에 불을 놓는다는 위협을
받았으나 조금도 굴치 아니하고 마침내 이들 형제에게 항복 받아서 다시는
성군작당하여 남을 음해하는 일을 아니하기로 맹세를 시켰다.
이곳은 본래 학교가 없던 데라 나는 곧 학교를 세우고 교원을 연빙하였다. 처음에는
20명 가량의 아동으로 시작하였으나 이 농장 작인의 자녀가 다 입학하게 되니 제법
학교가 커져서 교원 한 사람으로는 부족하여 나 자신도 시간을 내어서 도왔다.
장덕준은 재령에서, 지일청은 나와 같은 지방에서 나와 비슷한 농촌 개발 운동을 하고
있었다.
내 운동은 상당한 효과를 거두어서 동산평에는 도박이 없어지고 이듬해 추수 때에는
작인의 집에 볏섬이 들어가 쌓였다고 작인의 아내들이 기뻐하였다. 지금까지는
노름빚과 술값으로 타작 마당에서 일년 소출을 몽땅 빚장이에게 빼앗기고 농민은 키만
들고 집으로 들어갔다는 것이었다. 나는 농촌 중에도 가장 괴악한 동산평을 이
모양으로 그만하면 쓰겠다 할 정도의 농촌을 만들어 보려 하였다. 그러나 기미년
3월에 일어난 만세 소리에 나는 이 사업에서 손을 떼고 고국을 떠나게 되었다. 떠날
날을 하루 앞두고 나는 작인들을 동원하여 만세 부르는 운동에는 아무 관심도 없는
듯이 가래질을 하고 있었다. 내 동정을 살피러 왔던 왜 헌병도 이것을 보고는
안심하고 돌아가는 모양이었다.
그 이튿날 나는 사리원으로 가서 경의선 열차를 타고 압록강을 건넜다. 신의주에서
재목상이라 하여 무사히 통과하고 안동현에서는 좁쌀 사러 왔다고 칭하였다.
안동현에서 이레를 묵고 영국 국적인 이륭양행 배를 타고 동지 15명이 나흘 만에
무사히 상해 포동 마두에 도착하였다. 안동현을 떠날 때에는 아직도 얼음덩어리가
첩첩이 쌓인 것을 보았는데 황포강가에 벌써 녹음이 우거졌다. 공승서리 15호에서
첫날밤을 잤다.
이때에 상해에 모인 인물 중에 내가 전부터 잘 아는 이는 이동녕, 이광수, 김홍서,
서병호 네 사람이었고 그 밖에 일본, 아령, 구미 등지에서 이번 일로 모인 인사와
본래부터 와 있는 이가 5백여 명이나 된다고 하였다.
이튿날 나는 벌써부터 가족을 데리고 상해에 와 있는 김보연 집을 찾아서 거기서
숙식을 하게 되었다. 김군은 내가 장연에서 교육사업을 총감하는 일을 할 때에 나를
성심으로 사랑하던 청년이다. 김 군의 지도로 이동녕, 이광수, 김홍서, 서병호 등
옛동지를 만났다.
임시정부의 조직에 관하여서는 후일 국사에 자세히 오를 것이니 약하거니와 나는
위원의 한 사람으로 뽑혔었다. 얼마 후에 안창호 동지가 미주로부터 와서
내무총장으로 국무총리를 대리하게 되고, 총장들이 아직 모이지 아니하였으므로
차장제를 채용하였다. 나는 안 내무총장에게 임시정부 문 파수를 보게 하여 달라고
청원하였다. 도산은 처음에는 내 뜻을 의아하게 여기는 모양이었으나 내가 이 청원을
한 동기를 말하자 쾌락하였다. 내가 본국에 있을 때에 순사 시험 과목을 어디서 보고
내 자격을 시험하기 위하여 혼자 답안을 보았으나 합격이 못된 일이 있었다. 나는
실력이 없는 허명을 탐하기를 두려워할 뿐더러, 감옥에서 소제를 할 때에 내가
하나님께 원하기를 생전에 한 번 우리 정부의 정청의 뜰을 쓸고 유리창을 닦게 하여
줍소서 하였단 말을 도산 동지에게 한 것이었다.
안 내무청장은 내 청원을 국무회의에 제출한 결과 돌연 내게 경무국장의 사령을
주었다. 다른 총장들은 아직 취임하기 전이라 윤현지, 이춘숙, 신익회 등 새파란 젊은
차장들이 총장의 직무를 대행할 때라 나이 많은 선배로 문 파수를 보게 하면
드나들기에 거북하니 경무국장으로 하자고 하였다는 것이었다. 나는 순사될 자격도 못
되는 사람이 경무국장이 당하냐고 반대하였으나 도산은,
"만일 백범이 사퇴하면 젊은 사람들 밑에 있기를 싫어하는 것같이 오해될 염려가
있으니 그대로 행공하라."고 강권하기로 나는 부득이 취임하여 시무하였다.
대한민국 2년에 아내가 인을 데리고 상해로 오고 4년에 어머니께서 또 오시니
오래간만에 재미있는 가정을 이루게 되었다. 그 해에 신이 났다.
나의 국모 복수사건이, 24년 만에 이제야 왜의 귀에 들어갔다는 보도가 왔다. 내가
본국을 떠난 뒤에야 형사들도 안심하고 김구가 김창수라는 것을 왜 경찰에 말한
것이었다. 아아, 눈물나는 민족의식이여! 왜의 정탐 노릇은 하여도 속에는 애국심과
동포애를 감추고 있는 것이다. 이 정신이 족히 우리 민족으로 하여금 독립 민족의
행복을 누리게 할 것을 아니 믿고 어이하랴.
민국 15년에 내가 내무총장이 되었다.
그 안에 아내는 신을 낳은 뒤에 낙상으로 인하여 폐렴이 되어서 몇 해를 고생하다가
상해 보륭의원의 진찰로 서양인이 시설한 격리 병원인 홍구폐병원에 입원하기로 되어
보륭의원에서 한 작별이 아주 영결이 되어 민국 6년 1월 1일에 세상을 떠나매 법계
숭산로의 공동묘지에 매장하였다.
내 본의는 독립운동 기간 중에는 혼상을 물론하고 성대한 의식을 쓰는 것을
불가하게 알아서 아내의 장례를 극히 검소하게 할 생각이었으나 여러 동지들이, 내
아내가 나를 위하여 평생에 무쌍한 고생을 한 것이 곧 나라 일이라 하여 돈을 거두어
성대하게 장례를 지내고 묘비까지 세워 주었다. 그 중에도 유세관, 인욱군은
병원교섭과 묘지 주선에 성력을 다하여 주었다.
아내가 입원할 무렵에는 인이도 병이 중하였으나 아내 장례 후에는 완쾌하였고
신이는 겨우 걸음발을 탈 때요, 아직 젖을 떼지 아니하였으므로 먹기는 우유를
먹었으나 잘 때에는 어머니의 빈 젖을 물었다. 그러므로 신이가 말을 배우게 된
때에도 할머니란 말을 알고 어머니란 말을 몰랐다.
민국 8년에 어머니는 신이를 데리고 환국하시고 이듬해 9년에는 인이도 보내시라는
어머니의 명으로 인이도 내 곁을 떠나서 본국으로 갔다. 나는 외로운 몸으로 상해에
남아 있었다.
민국 9년 11월에 나는 국무령으로 선거되었다. 국무령은 임시정부의 최고 수령이다.
나는 임시의정원 의장 이동녕을 보고, 아무리 아직 완성되지 아니한 국가라 하더라도
나같이 미미한 사람이 한 나라의 원수가 된다는 것은 국가의 위신에 관계된다 하여
고사하였으나 강권에 못 이기어 부득이 취임하였다.
나는 윤기섭, 오영선, 김갑, 김철, 이규홍으로 내각을 조직한 후에 헌법 개정안을
의정원에 제출하여 독재적인 국무령제를 고쳐서 평등인 위원제로 하고 지금은 나
자신도 국무위원의 하나로 일하고 있다.
내 육십 평생을 돌아보니 상리에 벗어나는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대개 사람이
귀하면 궁함이 없겠고 궁하고는 귀함이 없을 것이건마는, 나는 귀역궁 불귀역궁으로
평생을 궁하게 지내었다. 우리 나라가 독립하는 날에는 삼천리 강산이 다 내 것이
될는지 모르거니와 지금의 나는 넓고 넓은 지구면에 한 치 땅, 한 칸 집도 가진 것이
없다. 나는 과거에는 궁을 면하고 영화를 얻으려고 몽상도 하고 버둥거려보기도
하였다. 옛날 한유는 '송궁문'을 지었으나 나는 차라리 '우궁문'을 짓고 싶다.
자식들에게 대하여 아비된 의무를 조금도 못하였으니 너희들이 나를 아비라 하여
자식된 의무를 하여 주기를 원치 아니한다. 너희들은 사회의 윤택을 입어서 먹고 입고
배우는 터이니 사회의 아들이 되어 사회를 아비로 여겨 효도로 섬기면 내 소망은
이에서 더 만족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이 붓을 놓기 전에 두어 가지 더 적을 것이 있다.
내가 동산평 농장에 있을 때 일이다. 기미년 2월 26일이 어머니의 환갑이므로 약간
음식을 차려서 가까운 친구나 모아 간략하나마 어머니의 수연을 삼으리라 하고 내외가
상의하여 진행하던 차에 어머니께서 눈치를 채시고, 지금 이 어려운 때에 환갑 잔치가
당치 아니하니 후년에 더 넉넉하게 살게 된 때로 미루라 하시므로 중지하였더니 그 후
며칠이 못하여 나는 본국을 떠났다. 어머니께서 상해에 오신 뒤에도 마음은 먹고
있었으나 독립운동을 하노라고 날마다 수십 수백의 동포가 혹은 목숨을, 혹은 집을
잃는 참보를 듣고 앉아서 설사 힘이 있기로서니 어떻게 어머니를 위하여 수연을 차릴
경황이 있으랴. 하물며 내 생일 같은 것은 입밖에 낸 일도 없었다.
민국 8년이었다. 하루는 나석주가 조반 전에 고기와 반찬거리를 들고 우리 집에
와서 어머니를 보고 오늘이 내 생일이라, 옷을 전당 잡혀서 생일 차릴 것을 사왔노라
하여서, 처음으로 영광스럽게 내 생일을 차려 먹은 일이 있었다. 나석주는 나라를
위하여 동양척식회사에 폭탄을 던지고 제 손으로 저를 쏘아 충혼이 되었다. 나는 그가
차려 준 생일을 영구히 기념하기 위하여 또 어머니의 화연을 못드린 것이 황송하여
평생에 다시는 내 생일을 기념치 않기로 하고 이 글에도 내 생일 날짜를 기입하지
아니한다.
인천 소식을 듣건대 박영문은 별세하고 안호연은 생존한다 하기로선 편에 회중시계
한 개를 사 보내고 내가 김창수란 말을 하여 달라 하였으나 회보는 없었고 성태영은
길림에 와 산다 하기로 통신하였으며, 유인무는 북간도에서 누구에게 죽임을 당하고,
그 아들 한경은 아직도 거기 살고 있다고 한다. 나와 서대문 감옥에서 이태나 한 방에
있으며 내게 글을 배우고 또 내게 끔찍이 하여 주던 이종근은 아라사 여자를 얻어
가지고 상해에 와서 종종 만났다. 이종근은 의병장 이운룡의 종제로, 헌병 보조원을
다니다가 이운룡이 죽이려 하매 회개하고 그를 따라 의병으로 다니다가 잡혀 왔었다.
김형진 유족의 소식은 아직도 모르고 강화 김주경 유족의 소식도 탐문하는 중이다.
지난 일의 연월일은 어머니께 편지로 여짜와서 기입한 것이다.
내 일생에 제일 행복은 몸이 건강한 것이다. 감옥 생활 5년에 하루도 병으로 쉰
날은 없었고 인천 감옥에서 학질로 반 일을 쉰 일이 있을 뿐이다. 병원이라고는 혹을
떼느라고 제중원에 1개월, 상해에서는 서반아감기로 20일 동안 입원하였을 뿐이다.
기미년에 고국을 떠난 지 우금 10여 년에 중요한 일, 진기한 일도 많으나 독립 완성
전에는 말할 수 없는 것이매 아니 적기로 한다.
이 글을 쓰기 시작한 지 일년 넘은 대한민국 11년 5월 3일에 임시정부 청사에서
붓을 놓는다.
--상권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