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순왕(敬順王)
_ 성은 김(金)이고 이름은 부(傅)이며
시호는 경순(敬順)이다.
일명 김부대왕(金傅大王)이라고도 한다.
_ 후삼국시대 기울어진 신라의
마지막왕으로 신라를 고려에 양위하고
고려의 정순공으로 살아간 분이다.
1. 김부, 신라의 왕으로 등극
서기 927년 후백제 견훤이
신라의 수도 금성을 급습하여
포석정에서 연회를 베풀며 놀고 있던
경애왕을 사로잡아 자살하게 하고,
경애왕의 이종사촌 동생인 김부를
왕위에 세우며 경순왕이 등극한다.
2. 신라의 마지막 왕으로 재위
완전히 기울어진 천년왕조
신라의 마지막 왕으로
927년에서 935까지 8년간 재위한다.
3. 신라를 고려에 양위
935년 경순왕은 군신회의를 소집하여
나라를 고려에 양국을 논의하는데,
찬성과 반대가 분분하였으나
경순왕은 항복을 청하는 국서를
고려 왕건에게 바쳐 신라는 멸망했으며
경순왕은 문무백관과 함께 금성을 떠나
송악(지금의 개성)으로 향하였다.
4. 고려왕족과 혈연적 관계형성
고려 태조 왕건은
경순왕을 큰 딸인 낙랑공주,
그리고 아홉째 딸과 혼인시켰고
정승 상주국 낙랑왕에 봉했으며
경주를 식읍으로 하사했다.
고려왕족과의 혈연관계는 계속 이어져
고려왕실의 기틀이 된 현종도
경순왕의 인척인 신라왕실의 혈통이다.
5. 80여년 장수후 사망
경순왕은 고려 태조부터 혜종·정종·
광종·경종대까지 5대에 걸쳐 살았으며,
태조 왕건이 죽은 후에도 왕 다음으로
높은 존재로 영향력을 발휘했으며
978년(경종 3) 음력 4월 4일에 죽었다.
* 경순왕릉(敬順王陵)
정식명칭은 '정순공 김부의 묘'이다
_ 신라의 마지막 왕이었지만
왕건에게 신라를 양위(항복)한 후
고려의 신하로 정순공이란 칭호로
살다가 사망하여 만든 묘이니
정식명칭은 '정순공 김부의 묘'이다
그럼에도 신라의 왕이었던 상징성으로
공식 명칭을 경순왕릉으로 하고 있다.
1. 누구의 묘인가
신라 제56대이자 마지막 국왕인
경순왕(김부)의 무덤이다.
2. 어디에
경기도 연천군 장남면 고랑포리
산18-2 (장남로 288) 로
개경과 가까운 임진강변 장단 지역
(현 연천군 고랑포리)이다.
<신라의 왕릉중 유일하게 경주를
벗어난 곳에 위치하고 있다>
3. 건축 및 양식
봉분은 둥근 원형태
(높이 약 3m, 지름 약 7m)이며,
판석을 이용한 둘레돌(호석)과
고려시대 왕릉 양식인
곡장(낮은 담장)이 둘러져 있으며
능표, 상석, 장명등, 망주석 등의
석물이 갖춰져 있습니다.
4. 조성의 역사
가. 최초 조성 (978년)
경순왕은
고려의 수도인 개경에서 생을 마감했고
무덤은 개경의 인근인 장단에 위치했다.
신라의 마지막 왕이였으니
고향인 경주에 모시고자 했겠지만
고려왕실입장에서는
상징성 있는 인물의 시신이 경주로
내려가 세력화되거나 정치적 구심점이
되는 것을 경계했을 것이다.
'왕족이나 국왕의 능은 수도(개경)
도성에서 100리 밖으로 나갈 수 없다'는
당시의 장례 관련 국법을 들어 반대하여
임진강을 건너지 못한 임진강변 남쪽
야산(현재의 연천군 고랑포리)에
안장하게 되면서 신라 왕릉 중 유일하게
경주가 아닌 곳에 자리 잡게 되었습니다.
고려 왕실은
그의 죽음 직후 왕의 예우를 갖추어
장사 지냈으며, 이때 세워진 능의 양식은
고려시대 왕릉에서 나타나는 곡장 등의
형식을 따르고 있다.
나. 잊혀짐과 훼손 (조선시대)
오랜 세월이 흐르며
신라의 마지막 와믜 능은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잊혀져갔다.
무덤 주변은
잡목이 우거지고 황폐해져
봉분의 형체를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심각하게 훼손 및 방치되었습니다.
다. 1차 중수 (1747년, 영조 33년)
조선 영조 때 잊혀졌던 경순왕릉을
찾아내어 크게 정비하고,
무덤 앞에 '경순왕릉표'를 다시 세워
능역을 바로잡았습니다.
라. 또 다시 방치된 경순왕릉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또다시 제대로관리되지 못였으며
한국전쟁시에는
석물에 총탄자국을 남기는 등
훼손되는 수난을 겪었으며
전후에는
능이 있는 연천 지역이 최전방
비무장지대 인근 및 민간인 통제선
부근이 되면서 완전히 방치되었습니다.
마. 재발견 (1970년대)
1970년대 초반
지역 향토사학자들와 군부대에 의해
민통선 북방(현재의 위치)에서
능표와 함께 가시덤불에 파묻혀 형태를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망가져 있는
왕릉이 다시 발견되었다.
바. 복원 및 정비 과정 (1970년대 ~ 현재)
정부는 역사적·학술적 가치를 인정해
1975년 사적으로 지정하였고,
1976년이후에 봉분과 곡원(무덤 주위의
시설)을 보수하는 등 정비하여
오늘날의 단정한 모습에 이르고 있다.
* 경순왕릉 신도비
실제 신도비인지의 여부는 알 수 없으나
마모가 심하여 10자만 판독되는 비문에
경순왕과 김이라는 글씨로
신도비를 추정한다.
1. 겨우 제자리 찾은 신도비
_ 왕릉과 함께 신도비도 관리가 않되어
왕릉 인근의 장단면 고랑 마을 민가에
방치된 것을 1748년(영조 24)에
경주 김씨 김빈과 김굉 등이 찾았다.
_ 6·25 전까지는
고랑포리 시가지에 있었으며
수복 전후 도로변에 방치되어 오던 것을
1973년 고랑포초등학교로 이전하였다가,
1986년 경순왕릉 정화사업에 따라
현 위치로 옮겨지고 비각 및 재실을
새로 건립하였다.
2. 재질과 크기
화강석을 깎아 만든 것으로
가운데 차돌이 드러나 있으며
높이가 132㎝, 폭이 67㎝,
두께가 15-18㎝이다.
3. 비문
자연 풍화 등으로 심하게 마멸되어
판독이 불가능한 상태로
비신 중간과 하단의 일부분에서
경순왕(敬順王), 김(金),
시월여친지국(十月輿櫬至國)의
10자만 남아 있다.
* 탐방기
매월 한번씩 하는 역사탐방을
같은 방향을 바라보는 9분의 님들과
이번엔 연천과 파주에서 하게된다.
연천하면 군사도시에 호로고루성만
떠올리게 되는 도시였는데
이번 탐방으로 이미지가 확 바뀐다.
한마듸, 한마뒤가 의미있는
최교수님의 역사이야기를
현장에서 접하는 귀중한 경험이다.
오늘도 예외없이 살아움직이는 듯한
이야기들을 전해주신다.
경순왕인 김부, 왕건, 견훤 등과
낙랑공주와 고려 현종까지
끄집어 내어주신다.
오랜 세월이 지나며
방치와 훼손, 도굴 등으로
과거의 모습과는 영 다를 것 같은
왕릉의 모습은 현재는 잘 정돈되어
숲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세계문화유산은 아니지만
릉주변은 목책으로 둘러쳐져
출입금지로 막어 놓아
석물과 능침 등을 가까이 할 수 없어
아쉬움은 남는다.
멀리서 바라다 보이는 석물은
문인석은 없었으며
총탄자국과 총탄으로 뭉그러진
모습이 또렷하게 남아 있었다.
경순왕비로 추정되는 비석이
비각안에 있었으나
글짜가 있는지는 보이지도 않았다.
처음 조성당시에는 없었을 재실이
있었고 우린 재실마루에 앉아
최교수님의 이야기를 편히 들었다.
우리의 일행은 인근의
연천 임진강 호로고루성과
파주의 이율곡 유적지를 같이
탐방하는 호사를 누렸다.
이 곳을 탐방하고자 하시는 분들은
시간적 여유를 갖는 계획으로
같이 탐방하시면 좋을 듯 하다.
* 안내장의 내용
* 탐방시의 사진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