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 로베르트 발저
아침의 꿈과 저녁의 꿈, 빛과 밤, 달, 태양 그리고 별. 낮의 장밋빛 광선과 밤의 희미한 빛. 시와 분. 한 주와 한 해 전체. 얼마나 자주 나는 내 영혼의 은밀한 벗인 달을 올려다보았던가. 별들은 내 다정한 동료들. 창백하고 차가운 안개의 세상으로 황금의 태양빛이 비쳐들 때 나는 얼마나 크나큰 기쁨에 몸을 떨었던가. 자연은 나의 정원이며 내 열정, 내 사랑이었다. 내 눈에 들어오는 것은 모두 나에게 속하게 되니, 숲과 들판, 나무와 길들. 하늘을 올려다볼 때 나는 왕자와도 같았다. 하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아름다운 것은 저녁이었다.
-로베르트 발저,『산책자-로베르트 발저 작품집』(배수아 옮김, 한겨레출판, 2017.)
해석과 감상
스위스 작가 로베르트 발저(Robert Walser, 1878~1956)는 가난 탓에 중학교를 중퇴하고 인생의 밑바닥 생활을 전전한다. 40대 중반 이후엔 절필을 선언하고 걷기와 도보여행 외에는 별다른 활동을 하지 않는다. 그는 호모 비아토르(Homo viator), 즉 길 위의 인간이다. 그런 그에게 '자연'과 '저녁'이란 말은 얼마나 벅찬 기쁨이고 아름다움인가. 영혼의 은밀한 벗인 달을 벗하는 저녁이 없다면, 숲과 들판, 나무와 길들, 하늘의 자연이 아니라면, 생명에 대한 열정과 그의 사랑은 어떻게 실현될 것인가. 아름답고 깊고 먼 것들은 길 위에 있다. 그것은 고독한 산책자로서 시인의 운명이자 형식이다. 그는『산책자』의 역자(배수아)에 의하면, 광적일 만큼 현란하게 아이러니하고 달빛 비치는 차가운 밤이면 내면의 황야를 홀로 가로지르는 고독한 왈츠(Walzer)!
헤르만 헤세와 프란츠 카프카, 발터 벤야민에게 많은 영감을 가져다 준 발저의 문장은 고도로 정제되어 있고 유니크한 데가 있다. 특히「쳄파하 전투」("어느새 저녁이 되었다. 나무와 덤불은 희미한 저녁빛 속에 은은하게 빛났고, 태양은 검은 산기슭 언덕 사이로 슬프고도 아름다운 죽은 남자처럼 가라앉았다. 잔혹한 전투는 끝이 났다. 세계의 배경에는 눈처럼 새하얗고 창백한 알프스가 아름답고 차가운 이마를 드리우고 있었다.")에 나타난 문채(文彩)에는 섬뜩하리만치 잔혹한-차가운 아름다움이 있다. 저녁의 푼크툼이다. "우리가 한 번도 되어 본 적 없는 어떤 존재, 그것이 우리 자신"이거나 시인이라면, 시인은 내가 나이고 내가 나에게 만족하는 순간이다.
저녁 금호강은 스산한 바람이 불었다. 옷깃을 조금 여미고 길게 이어진 나무 데크를 지나 아양 기찻길로 들어선다. 해는 지고 달빛 아래 물억새가 한눈에 들어온다. 먼나무로 돌아가는 새들. 달빛을 잃어버리고, 달빛을 잊고 산지 얼마이던가. 지금은 달빛 테라피가 필요한 시간, 아니 로베르트 발저를 가만히 호명해 보는 시간이다. (김상환)
첫댓글 "우리가 한 번도 되어 본 적 없는 어떤 존재, 그것이 우리 자신"이거나 시인이라면, 시인은 내가 나이고 내가 나에게 만족하는 순간이다. - 채우 김상환 평론가의 문장은 빛나는 금강이다. 시인은 그 자체가 우주의 가장 아름다운 악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