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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여명을 맞이하는 공간 원문보기 글쓴이: 이준용
※ 朔 寧 面
삭녕면은 본래 삭녕군 읍내면(邑內面)의 지역으로, 동변리(東邊里)·서변리(西邊里)·여척리(餘尺里)·하마산리(下馬山里)·상마산리(上馬山里)·대사동리(大寺洞里) 등 6개 동리를 관할하였는데, 1914년 4월 1일 행정구역이 축소 폐합되면서 삭녕군 읍내면·동면(東面)·남면(南面)·서면(西面)은 연천군에, 인목면(寅目面)·내문면(乃文面)·마장면(馬場面)은 강원도 철원군에 분리 편입되면서 읍내면을 연천군의 가장 북쪽에 있다 하여 북면(北面)으로 개명함과 동시에 동변리와 서변리를 병합하여 삭녕리(朔寧里), 하마산리를 고마리(古馬里)로, 대사동리를 대사리(大寺里)로 명칭을 변경하여 삭녕·대사·여척·고마·상마산의 5개 리를 관할하여 오다,
1934년 4월 1일 "조선총독부 경기도령 제4호"에 의해 동면의 도연리(陶淵里)·적음리(笛音里)·진곡리(辰谷里)·어적산리(魚積山里)·적동산리(積洞山里) 등 5개 리를 편입하여 북면을 삭녕면이라 개칭, 10개 리를 관할하였으나, 1945년 8·15 광복과 동시에 삭녕면 전지역이 3·8선 북쪽에 위치하여 공산 치하에 놓였다가 6·25가 끝난 뒤에도 휴전선을 끼고 있는 완충지대 및 북한 지역에 속하였으나, 1963년 1월 1일 법률 제1178호인 "수복지구와 동 인접지구의 행정구역에 관한 임시조치법"에 의거 삭녕면 10개 리를 연천군 중면에 편입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 6·25 전의 삭녕면 소재지 : 연천군 삭녕면 삭녕리.
7. 도연리(陶淵里)
본래 삭녕군 동면(東面)의 도사리(刀寺里) 지역인데, 조선 고종 32년 지방관제 개정에 따라 도사리를 도연리(陶淵里)로 개칭하였고,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동면이 연천군에 편입되면서 연천군 동면에 속하였으나, 1934년 4월 1일 "조선총독부 경기도령 제4호"에 의해 동면이 북면과 병합하여 삭녕면으로 개칭되면서 삭녕면 도연리가 되었다.
1945년 8·15 광복과 동시에 삭녕면 전지역이 3·8선 북쪽에 위치하여 공산 치하에 놓이게 되었고, 6·25가 끝난 뒤에도 군사분계선을 포함하고 있는 완충지대 지역인데, 1963년 1월 1일 법률 제1178호인 "수복지구와 동 인접지구의 행정구역에 관한 임시조치법"에 의거 연천군 중면에 편입되어 있는 하나의 법정리 지역이다.
1 생건이고개 : 정자말과 어적산리 사이에 있는 고개.
2 방아다리산 : 생건이고개 북쪽에 있는 조그만 산. 예전에 방앗간이 있었다 한다.
3 응달말(陰地村) : 삼계정 남쪽, 골짜기 안에 있었던 마을. 해가 늦게 뜨고 일찍 지는 곳이라 하여 지어진 이름으로, 6·25 전에는 전주 이씨가 5가구 살았던 곳이다.
4 벌말(坪村) : 양지말 남쪽, 벌판에 있었던 마을. 6·25 전에는 한 집이 살던 곳이다. 전설에 의하면 예전에 이 마을에서 장수가 태어낳는데 몸에 비늘과 날개가 있어 역적이 될 운이라하여 죽였다 한다. 도연리에서 이 장수의 탄생설화와 용마로 인한 용마네골, 굴레방고개, 자작고개 등의 관련 지명이 남아 있다.
5 산골거리들 : 벌말 남쪽, 골짜기 안에 있는 들판.
6 용마네골 : 벌말 남쪽에 있는 골짜기. 벌말에서 장수가 태어나자 이 골짜기에서는 그 장수가 탈 용마(龍馬)가 낳는데, 그 집안에서 장수를 죽이자 용마는 슬피 울며 북쪽에 있는 굴레방고개에서 굴레를 벗고, 자작고개에 가서 자작 죽었다 한다.
7 산골거리고개 : 도연리에서 진곡리의 산골(山谷)로 넘어 다니던 고개.
8 두룩골 : 용마네골 남쪽, 진명산에 딸린 골짜기.
9 진명산(振鳴山) : 도연리 남쪽, 적음리·적거리와 경계에 있는 산.
10 진명산고개 : 진명산 동쪽, 덕현동에서 적거리의 옻나무골로 넘어 다니던 고개.
11 덕고개(德峴) : 덕현동에서 마거리의 재래울로 넘어 다니던 고개. 여진족어로 산(山)을 뜻하는 '덕(德)'이 '고개'와 합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보여진다.(신서면 마전리 "천덕산" 참고)
12 사당터골 : 덕고개 아래에 있는 골짜기. 예전에 대성각(大聖閣)이라는 사당이 있던 곳이라 한다.
13 덕현동(德峴洞 = 덕고개) : 사당터골 서쪽에 있었던 마을. 덕고개의 밑이 된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며, 6·25 전에는 전주 이씨가 8가구 살았던 곳이다.
14 능골 : 벌말 동쪽에 있는 골짜기.
15 매봉재 : 정자말 동쪽에 있는 산. 예전에 매사냥을 했던 곳이라 한다.
16 양지말(陽地洞) : 벌말 북쪽에 있었던 마을. 하루종일 햇볕이 잘 드는 곳이라 하여 지어진 이름으로, 6·25 전에는 전주 이씨가 12호 살았던 곳이다.
17 정자말(亭子村) : 응달말 북쪽에 있던 큰 마을. 삼계정이 이 마을에 있어 지어진 이름이다. 6·25 전에는 도연리 일대에 큰 집성을 이루었던 전주 이씨 시중공파 후손 40여호가 살았으며, 약 350년 전에 이 곳에 정착했다 한다.
18 삼계정(三溪亭) : 정자말에 있던 정면 3칸, 측면 2칸 규모에 팔작지붕 형태의 정자. 전설에 의하면 전주 이씨 시중공파 후손들이 이 곳에 정착하였을 때 이미 박모(朴 某)라는 고관대작의 개인소유인 팔송정(八松亭)이 있었으나, 그 후 전주이씨들의 소유가 되면서 등골·덕고개·정자말에서 내려오는 세개의 개울이 이 정자 앞에서 뒷내강에 합류한다 하여 편액을 삼계정으로 고쳤다 한다.
6·25 전의 삼계정은 삭녕의 우화정과 함께 빼어난 풍광으로 인하여 명성이 널리 퍼져 있었고 주위에 우거진 500년 수령의 느티나무, 참나무, 가닥나무 고목들은 정자의 운치를 더해 주었다 한다.
그러나, 이 정자는 6·25 때 아깝게 소실된 것으로 전해 오며 유지 또한 완충지대 안에 놓여 있다.
19 먹통산 : 삼계정 북쪽, 들판에 있는 먹통처럼 생긴 산.
20 돌모루 : 정자말에서 덕은동으로 가는 곳에 있는 산 끝을 돌아가는 모퉁이.
21 갱거리들 : 정자말 북쪽에 있는 들판. 한 달을 가는 넓이라 한다.
22 낭말 : 갱거리들 동쪽에 있었던 마을. 쳔연벼랑이 있어 지어진 이름이다.
23 도차불 : 낭말과 덕은동 사이에 있었던 작은 마을. 연주 현씨가 몇 집 살던 곳이다.
24 신거터(新居垈) : 도차불 옆에 있었던 마을. 지금부터 120년 전에 연주 현씨가 처음 정착했다 하여 지어진 이름이다. 6·25 전에는 6가구가 살았던 곳이다.
25 보락골 : 덕은동 남쪽에 있는 골짜기.
26 쇠네미(車踰峴. 수루네미) : 덕은동에서 마거리의 엄현동으로 넘어 다니던 고개.(마거리편 참고)
27 덕은동(德隱洞. 등골) : 신거터 동쪽에 있었던 마을. 6·25 전에는 40여호가 살았던 곳이다.
28 양강골(兩江谷) : 덕은동 북쪽에 있는 골짜기. 6·25 전에는 연주 현씨가 몇 집 살았던 곳이다.
29 안말(內洞) : 도차불 북쪽, 골짜기 안에 있던 마을. 임진왜란 때 청도 김씨가 피난하여 개척한 마을로, 6·25 전에는 20여호가 집성을 이루었던 곳이다.
30 벌메이들 : 덕은동 서쪽, 논이 많았던 들판.
31 원터거리 : 안말 입구에 있었던 마을. 유래는 자세하지 않다.
32 두룩골 : 낭말 동쪽에 있는 골짜기.
33 진거리 : 두룩골 서북쪽에 있는 골짜기.
34 굴레방고개 : 갱거리들에서 윗개묵이로 넘어 다니던 고개.(용마네골 참고)
35 쟁강골 : 정자말과 아랫개묵이 사이에 있는 골짜기. 약수가 유명한 곳이다.
36 장구네피소 : 쟁강골 앞, 뒷내강에 있는 깊은 소(沼).
37 아랫개묵이(下浦防) : 쟁강골 북쪽에 있는 벌판.
38 자작고개 : 윗개묵이에서 인목면의 석고개로 넘어 다니던 고개.(용마네골 참고)
39 윗개묵이(上浦防) : 굴레방고개 너머에 있는 벌판.
40 시다막(柴多幕) : 윗개묵이 동쪽에 있었던 마을. 나무가 무성히 우거져 숯, 목재등이 많이 산출되었던 곳이라 하여 지어진 이름이다. 6·25 전에는 연주 현씨와 한양 조씨 두 성이 15호 살았던 곳이다.
41 부흥데미고개 : 시다막에서 인목현 신현리의 부흥동으로 넘어 가는 고개 이름.
42 백로산(白鷺山) : 도연리 동쪽, 마거리와 인목면 신현리의 경계에 있는 산.(마거리편 참고)
※ 제 보 자 : 이 만 분(85) 연천읍 상1리 10반
김 기 준(74) 전곡읍 전곡1리 10반
이 호 석(70) 동두천시 생연2동 687 - 21
8. 적음리(笛音里)
본래 삭녕군 동면(東面)의 격음리(隔音里) 지역인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동면이 연천군에 편입되면서 격음리를 적음리(笛音里)로 개칭하였고, 1934년 4월 1일 "조선총독부 경기도령 제4호"에 의해 동면이 북면과 병합하여 삭녕면이 되면서 삭녕면 적음리가 되었으나,
1945년 8·15 광복과 동시에 삭녕면 전지역이 3·8선 북쪽에 위치하여 공산 치하에 놓였다가 3년 동안의 6·25가 끝난 뒤에도 군사분계선을 포함하고 있는 북한 지역에 속해 있었으나, 1963년 1월 1일 법률 제1178호인 "수복지구와 동 인접지구의 행정구역에 관한 임시조치법"에 의거 연천군 중면에 편입되어 있는 하나의 법정리 지역이다.
1 고작골(高作洞) : 계호동 남쪽에 있었던 마을. 6·25 전에는 20여호가 살았던 곳으로, 이 마을 명칭 '고작'은 한자 표시와는 무관한 '골짜기'가 변한 땅이름으로 보인다.
2 수리봉(= 두렁산. 242m) : 계호동 동쪽, 중사리와 경계에 있는 봉우리. 6·25 때 치열한 격전장이었던 '박고지(朴高地)'라는 이름으로도 불리워지는 곳이다.(수리봉의 유래는 신서면 대광리 "수리봉" 참고)
3 진명산(振鳴山) : 산골 동쪽, 적음리·중사리·적거리·도연리 경계에 있는 산.
4 산골거리고개 : 적음리 산골에서 도연리로 넘어 다니던 고개.
5 산골(山谷) : 정골 북쪽에 있는 골짜기.
6 정골(正洞) : 수리봉 북쪽에 있던 적음리에서 가장 큰 마을. 6·25 전에는 약 80 여호가 거주하였던 곳이며, 1934년 전까지 연천군 동면 사무소와 보통학교가 있어 동면의 중심지가 되었던 곳이다.
7 무당소 : 수리봉 서쪽, 하천에 있던 소(沼).
8 계호동(桂湖洞. 겨휘) : 고작골 북쪽에 있었던 마을. 6·25 전에는 50여호가 살았던 곳이다.
9 동면이골 : 계호동 북쪽에 있는 작은 골짜기.
10 깸북골 : 동면이골 북쪽에 있는 골짜기. 예전에 심하게 흉년이 들었을 때 이 곳에서 논을 경작하던 어떤 사람이 배고픔을 참지 못하여 깻묵 한 덩어리와 논을 맞바꾸었다 하여 지어진 이름이라 한다.
일제 강점기 때에는 이 곳에서 많은 홍주석이 산출되었던 곳이기도 하다.
11 부엉이낭 : 왕재봉 북쪽, 임진강변에 있는 벼랑으로, 부엉이가 서식했던 곳이라 전해 온다.
12 장군비냥 : 부엉이낭 아래에 있는 벼랑.
13 덕바위 : 장군비냥 남쪽, 임진강 옆에 있는 버섯처럼 생긴 바위.
14 왕재봉 : 계호동 북쪽에 있는 봉우리.
15 당모루 : 장군비냥 아래에 있는 모퉁이. 이 곳 첫음절 '당'의 뜻은 산(山)의 뜻으 로 씌었던 고어의 '닫'이 '닷' 또는 '닥'으로 음이 옮겨 가며 ㄴ,ㅁ을 초성으로 하는 음절의 말이 뒤에 따라올 경우 '당'으로 발음되는 현상에 따라 '당모루'가 된 곳으로, '산자락을 돌아가는 모퉁이'란 뜻을 가지고 있는 곳이다.
16 두멍소 : 왕재봉 서쪽, 임진강에 있는 소(沼). 전설에 의하면 명주실 세 꾸러미가 들어가는 깊이라 전해 온다.
17 두멍터나루 : 두멍소 아래에 있는 임진강 나루. 왕징면 오탄리(옛 서남면)와 연결되었던 곳이다.
* 제 보 자 : 민 홍 식(73) 연천읍 상2리 6반
한 상 순(60) 군남면 남계2리 4반
9. 진곡리(辰谷里)
본래 삭녕군 동면(東面)의 지역으로,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동면이 연천군에 편입되면서 연천군 동면의 진곡리가 되었으나, 1934년 4월 1일 "조선총독부 경기도령 제4호"에 의해 동면이 북면과 병합하여 삭녕면이 되면서 삭녕면 적음리가 되었고
1945년 8·15 광복과 동시에 삭녕면 전지역이 3·8선 북쪽에 위치하여 공산 치하에 놓였다가 6·25가 끝난 뒤에도 북한 지역에 속해 있으나, 1963년 1월 1일 법률 제1178호인 "수복지구와 동 인접지구의 행정구역에 관한 임시조치법"에 의거 연천군 중면에 편입되어 있는 하나의 법정리 지역이다.
1 느릅고개(楡峴) : 진곡리에서 적음리의 장군비냥으로 통하는 고개. 느릅벌과 연결되어 있다 하여 지어진 이름이다.
2 삼밭골(麻田谷) : 느릅고개 북쪽에 있는 골짜기. 예전에 삼베를 많이 심었던 곳이라 한다.
3 느릅벌 : 삼밭골 입구, 임진강 옆에 펼쳐진 벌판. 예전에 느릅나무가 군락을 이루었던 곳이라 하여 지어진 이름이다.
4 진따백이 : 임진강 옆에 있던 밭. 땅이 습하고 질어 피만 무성하게 자생하던 곳이다.
5 차돌소 : 느릅벌 서쪽, 임진강에 있는 소(沼).
6 가림자 : 차돌소 북쪽, 임진강에 있는 모래섬.
7 굴용뿌리 : 낡은터 남쪽, 농바위에서 뻗어나온 산부리.
8 농바위 : 낡은터 동쪽, 어적산리와 경계에 있는 봉우리. 정상에 농처럼 생긴 큰 바위가 있다 하여 지어진 이름이다.
9 몰이고개 : 낡은터에서 어적산리로 넘어 다니던 고개 이름. 산의 뜻으로 씌었던 '뫼'의 뿌리말인 ' '이 후세에 내려오면서 뒤에 접미사 구실의 '이'가 붙어 연철되어 '몰이'가 된, 단순히 농바위와 우제봉 사이를 넘어 가는 '산 고개' 또는 '산을 넘는 고개'라는 뜻을 가진 곳이다.
> + 이 > 이 > 몰이 + 고개 = 몰이고개
10 우제봉(雨祭峰. 222m) : 농바위 북쪽에 있는 봉우리. 예전에 한발이 심할 때면 이 곳에서 기우제를 지냈다 한다.
11 낡은터(舊垈洞) : 진곡리에서 가장 컷었던 마을. 6·25 전에는 초계 정씨가 40여 호 집성촌을 이루었던 곳이다.
12 범바위나루(= 문바위나루) : 낡은터 서쪽, 임진강에 있는 나루. 왕징면 장학리(옛 서남면)의 심복골로 연결되었던 곳이다.
13 상나무고개 : 낡은터에서 고지동으로 넘어 다니던 고개 이름. 예전에 이 고개 위에 큰 향나무가 있어 '향나무고개'로 불리웠던 것이 '향'이 '상'으로 발음이 변하는 구개음화 현상에 의해 어휘가 변한 이름이다.
14 고지동(古地洞) : 낡은터 북쪽에 있었던 마을. 6·25 전에는 영산 신씨(靈山辛氏)가 20여호 집성촌을 이루었던 곳이다.
15 장사굴 : 고지동에서 삭녕의 우화정으로 가는 326번 지방도에 있는 천연석굴. 전설에 의하면 예전에 이 굴에서 장사가 낳다 하여 지어진 이름이라 하며, 일제 강점기 때 도로확장공사를 진행하던 중 큰 구멍이 뚤리면서 내부면적 약 30∼40평, 높이 150m의 큰 굴이 발견되었는데, 이 곳에서 불을 지피면 그 연기가 철원으로 나왔다 한다.
16 도여울 : 장사굴 옆에 있는 임진강 여울.
17 후천동(後川洞) : 고지동 북쪽, 세 가구가 살았던 마을.
18 우화정다리(羽化亭橋) : 진곡리에서 삭녕의 우화정으로 건너다니던 뒷내강(= 역곡천)에 있는 콘크리트 다리.
19 월하두비냥 : 우화정다리 북쪽, 뒷내강에 있는 현무암으로 이루어진 수직절벽.
20 동말(東村) : 진곡리 가장 북쪽에 있었던 마을. 이 곳은 다른 지역에 비하여 돌(石)이 많은 곳이 되어 '돌말'로 불리웠던 것이 음이 변하여 '동막'으로 된 곳이다.
조선시대에는 '돌'이 '돋','돗' 등으로 발음되었는데 '돗'은 다시 '독'으로 변하여 아직도 지방 사투리로 쓰이고 있으며, 이 곳 독말 역시 '돌마을'이란 뜻의 '독말'이 자음동화로 '동말'이 되어 쓰이던 중에 한자로 지명을 옮기는 과정에서 돌과는 거리가 먼 음차의 '東村'이 된 곳이다.
또한 전설에 의하면 이 곳의 지형이 곡식 20말이 들어가는 가마니인 '섬'의 형국이 되어 늘 20가구 만 살았다고 하며, 6·25 전에는 능성 구씨가 집성촌을 이루었다.
* 제 보 자 : 정 학 운(71) 경기도 구리시 수택동 345 - 9호 동원APT 가동 302호
10. 어적산리(魚積山里)
본래 삭녕군 동면의 지역인데, 북쪽에 굽어 흐르는 뒷내강(역곡천)에 유난히 민물고기가 많아 '언치미' 또는 '어적산리'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동면이 연천군에 편입되면서 연천군 동면에 속하였으나,
1934년 4월 1일 "조선총독부 경기도령 제4호"에 의해 동면이 북면과 병합하여 삭녕면이 되면서 삭녕면 어적산리가 되었으며, 1945년 8·15 광복과 동시에 3·8선 북쪽에 위치하여 공산 치하에 놓이게 되었고, 6·25가 끝난 뒤에도 군사분계선을 포함하고 있는 북한 지역에 위치하고 있으나, 1963년 1월 1일 법률 제1178호인 "수복지구와 동 인접지구의 행정구역에 관한 임시조치법"에 의거 연천군 중면에 편입되어 있는 하나의 법정리 지역이다.
1 생건이고개 : 어적산리와 도연리의 응달말 사이에 있는 고개.
2 박촌말 : 보습곶이 동쪽에 박씨들이 살았던 마을.
3 안촌말 : 박촌말 아래, 골짜기 안에 있던 작은 마을.
4 농바위 : 어적산리 동쪽, 진곡리와 경계에 있는 봉우리.(진곡리편 참고)
5 몰이고개 : 농바위 북쪽에 있는 고개. 진곡리의 낡은터와 통한다.(진곡리편 참고)
6 우제봉(雨祭峰. 222m) : 농바위 북쪽에 있는 봉우리.(진곡리편 참고)
* 제 보 자 : 정 학 운(71) 경기도 구리시 수택동 345 - 9호 동원아파트 가동 302호
이 호 석(70) 동두천시 생연2동 687 - 21
11. 적동산리(積洞山里)
본래 삭녕군 동면(東面)의 지역으로,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동면이 연천군에 편입되면서 연천군 동면에 속하게 되었으나, 1934년 4월 1일 "조선총독부 경기도령 제4호"에 의해 동면이 북면과 병합하여 삭녕면이 되면서 삭녕면 적동산리가 되었다.
1945년 8·15 광복과 동시에 3·8선 북쪽에 위치하여 공산 치하에 놓였다가 6·25가 끝난 뒤에도 군사분계선 북쪽의 북한 지역인데, 1963년 1월 1일 법률 제1178호인 "수복지구와 동 인접지구의 행정구역에 관한 임시조치법"에 의거 연천군 중면에 편입되어 있는 하나의 법정리 지역이다.
1 보습고지 : 독쟁이 남쪽, 뒷내강(역곡천)으로 쑥 뻗어 나온 지형의 이름. 그 모양이 쟁기나 극쟁이의 술바닥에 맞추어 끼우는 삽과 비슷한 쇳조각인 보습과 닮았다 하여 지어진 이름이다.('곶'은 삼곶리편 참고)
2 독쟁이(篤長洞) : 봉화산 남쪽, 뒷내강 옆에 있었던 마을. 돌(石)이 유난히 많은 곳이 되어 돌을 뜻하는 고어의 '돗'이 음이 변한 '독'과, 고개의 뜻을 가진 '재'가 합하여 '독재'가 되었다가, 다시 '독쟁이'로 음이 변한 땅이름으로 보인다. 6·25 전에는 평산 신씨가 7가구 살았던 곳이다.
3 봉화산(烽火山. 238m) : 적동산리 중앙에 있는 산. 예전에 이 봉우리 정상에서 봉화를 올렸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4 한치(寒峙洞) : 봉화산 북쪽, 골짜기 안에 있었던 마을. 감수봉 남쪽, 팔운이로 넘어 다니는 큰 고개가 있다 하여 '크다'는 뜻의 우리 고어인 '한'과 고개의 다른 이름인 '치'를 합하여 '한치'라 불리워오던 것이 아무 의미가 없는 한자 이름인 '寒 峙'로 음차된 곳이다. 6·25 전에는 12호가 있었다.
5 방아골 : 한치와 중간말 사이에 두 집이 살았던 마을.
6 중간말 : 한치와 배드루 사이에 있었던 작은 마을. 6·25 전에는 평산 신씨 5가구가 살았던 곳이다.
7 감수봉(甘水峰. 317m) : 봉화산 북쪽, 상마산리와 인목면 검사리의 경계가 되는 봉우리.(상마산리편 참고)
8 팔운이고개(靑雲峴) : 문동산리에서 상마산리의 팔운이로 넘어 다니던 높은 고개.
9 문동산리(文登村) : 감수봉 동쪽, 골짜기 안에 있었던 마을. 6·25 전에는 김씨 집안의 가옥 10여호가 있었다 한다.
10 그러리장터(文月市) : 문동산리 동쪽, 뒷내강 옆에 있었던 마을. 예전에 큰 장이 형성되었던 곳이며, 6·25 전에는 10여호가 있었다.
11 배드루(舟坪) : 그러리장터 남쪽에 있었던 마을. 전설에 의하면 이 곳의 지형이 배(舟)의 형국을 하고 있다 하여 '배드루'라 불리워지게 되었다는 유래를 달고 있으나, 실제 뜻은 '배'와는 아무 연관이 없는 '산골에 있는 들'이라는 의미를 가진 곳이다.(장남면 원당리 '배골' 참고)
6·25 전에는 20여호가 살았다.
12 미루둔치 : 도연리 정자말로 건너다니는 뒷내강의 앞소 옆에 있는 둥근산. 정자말 전주 이씨의 선대 묘가 있다.
13 미역골(沐浴洞) : 봉화산 동쪽에 있었던 마을. 6·25 전에는 세 집이 살았다.
14 봉우재(烽火峴) : 배드루와 미역골 사이에 있는 고개. 서쪽의 봉화산으로 인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15 논골(畓洞) : 미역골 서쪽, 봉화산 밑에 있었던 마을. 6·25 전에는 평산 신씨가 다섯가구 살았던 곳이다.
16 독쟁이고개 : 논골에서 독쟁이로 넘어 다니던 고개.
17 빼울(抽洞) : 미역골 남쪽에 있었던 마을. 배드루와 같이 '산(山)'의 뜻을 가지고 있는 고어의 '받'에 어근을 둔 '배'가 된소리인 '빼'로 발음되면서 골짜기란 뜻의 '울'과 합해 이루어진 땅이름으로, 발음 그대로를 음차하여 지어진 한자의 '抽洞' 과는 무관한 단순히 '산골짜기 마을'이라는 뜻을 가진 곳이다.
* 제 보 자 : 이 호 석(70) 동두천시 생연2동 687 - 21
12. 삭녕리(朔寧里)
본래 삭녕군 읍내면(邑內面)의 동변리(東邊里)와 서변리(西邊里) 지역인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읍내면이 연천군에 편입되면서 북면으로 개칭됨과 동시에 동변리와 서변리를 병합하여 삭녕리라 하여 연천군 북면에 편입되었으나, 1934년 4월 1일 "조선총독부 경기도령 제4호"에 의해 북면과 동면이 병합되어 삭녕면으로 개칭되면서 삭녕면 삭녕리가 되었고,
1945년 8·15 광복과 동시에 삭녕면 전지역이 3·8선 북쪽에 위치하여 공산 치하에 놓이게 되었다. 6·25가 끝난 뒤에도 휴전선 북쪽이 되어 북한 지역에 속해 있으나, 1963년 1월 1일 법률 제1178호인 "수복지구와 동 인접지구의 행정구역에 관한 임시조치법"에 의거 연천군 중면에 편입되어 있는 하나의 법정리 지역이다.
1 놋다리나루 : 삭녕시가지 남쪽, 왕징면 장학리(옛 서남면)로 건너 다니던 임진강 나루.
2 갈마다리 : 삭녕시가지 서쪽, 여척리로 가는 326번 지방도에 있는 콘크리트로 된 다리.
3 서편말(西邊洞, 서켠말) : 삭녕시가지를 반으로 나누어 서쪽에 있었던 마을로, 옛 삭녕군 읍내면의 서변리 지역이 된다.
4 동편말(東邊洞, 동켠말) : 서편말 동쪽에 있었던 마을. 조선시대에는 삭녕군의 rhks아가 있었고 삭녕장이 열리는 5·10일이 되면 황해도 토산, 강원도 철원·안협과 연천·장단 지역에서 모여드는 많은 상인들로 인하여 경기북부 지역에서는 큰 상권이 형성되었던 곳이며, 일제 강점기 때에는 면사무소, 보통학교, 우체국, 주재소 등의 공공기관이 소재하고 있던 곳이다.
5 삭녕관아터(朔寧官衙址) : 삭녕시가지 북쪽에 있던 조선시대 삭녕군의 관아 터. 조선 세종 23년(1441) 대사리에서 이 곳으로 이건(移建)된 뒤에 530여년 동안 삭녕군 7개 면을 관할했던 관청으로, 객사(客舍)·동헌(東軒, 편액은 詠恩堂)·아사(衙舍)·향사당(鄕射堂) 등의 건물이 있었던 것으로 삭녕의 옛 지리지에는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일제 강점 직후에 삭녕군이 연천군과 철원군으로 분리 편입되면서 관아건물은 강제로 철거되었는데, 특히 포도청 건물은 일제의 삭녕신사 건립에 이용되었으며, 그 자리에는 새로 면사무소가 세워지게 되었고, 그 후로는 식민지정책에 의하여 공공건물과 민가가 들어서면서 아무런 자취도 없이 세월 속에 묻쳐버렸다. 지 금은 북한 지역이 되어 확인이 어려운 곳이다.
6 표절사지(表節祠址) : 삭녕관아터 위에 있던 사당 터.(문화유적·유물편 "사묘" 참고)
7 매봉산(191m) : 삭녕시가지 북쪽에 있는 산. '매봉재'로도 불리워졌으며, 매년 10 월이 되면 정상에 있는 산제당산에서 동편말 주민들에 의하여 산제가 올려졌던 곳이다.
8 차도래기(白石洞) : 삭녕리 가장 북쪽, 고마리와 경계에 있었던 마을. 흰차돌이 많다 하여 지어진 이름으로, 6·25 전에는 박씨들만 13가구 살았던 곳이다.
9 무당소 : 차도래기 아래, 말미개울에 있는 소(沼).
10 말미개울 : 고마리에서 발원하여 삭녕리를 경유, 임진강에 합류하는 개울.
11 노장골(魯張洞) : 갈미봉 북쪽, 골짜기 안에 있었던 마을. 6·25 전에는 봉화 금씨가 다섯가구 살았던 곳이다.
12 천나다리 : 매봉산 동북쪽, 말미개울에 있었던 다리. 이 다리 아래에는 집채만한 큰 바위가 있다 한다.
13 갈미봉 : 매봉산 동쪽에 있는 바위 봉우리. 수백년 묵은 큰 참나무와 우물이 있고 예전에 장사가 밟았다는 큰 발자욱이 정상에 있는 바위에 남아 있었다 한다.
14 물레방앗간 : 동편말 동쪽에 있던 큰 물레방앗간. 아래 위로 두 곳에 있었다 한다.
15 굿당 : 물레방앗간 동쪽, 갈미봉에서 내려온 산 등에 있던 산제당. 큰 반송한 그루가 정상에 있었는데 동편말 주민들이 치성을 올리던 곳이다.
16 도깨비연당 : 놋다리나루 북쪽, 326번 지방도 아래에 있는 고목나무 군락. 참나무, 오리나무, 옻나무로 우거진 이 곳에서 밤이면 도깨비가 자주 나타난다 하여 지어진 이름이라 한다.
예전 삭녕군의 관아가 있었을 때에는 이 곳에서 서쪽의 여척리까지 일직선으로 긴 축동(築 )나무가 있어 수구막이 역활을 했었으나, 일제 강점기 때 대부분 베어 없어지고 도깨비연당 주위에만 고목이 남아 있었다 한다.(축동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청산면 백의리 "축동" 참고)
* 제 보 자 : 정 학 운(71) 구리시 수택동 345 - 9호 동원아파트 가동 302호
전 준 호(67) 서울시 성북구 삼성동2가 420 - 14
이 태 호(65) 연천읍 상1리 10반
13. 대사리(大寺里)
본래 삭녕군 읍내면의 대사동리(大寺洞里) 지역인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삭녕군이 연천군에 편입되면서 읍내면을 북면으로, 대사동리를 대사리로 개칭하였고, 1934년 4월 1일 "조선총독부 경기도령 제4호"에 의해 동면을 병합하여 삭녕면으로 개칭되면서 삭녕면 대사리가 되었다.
1945년 8·15 광복과 동시에 3·8선 북쪽에 위치하여 공산 치하에 놓였다가, 6·25가 끝난 뒤에도 지금까지 북한 지역 위치하고 있으나, 1963년 1월 1일 법률 제1178호인 "수복지구와 동 인접지구의 행정구역에 관한 임시조치법"에 의거 연천군 중면에 편입되어 있는 하나의 법정리 지역이다.
1 우화정(羽化亭) : 대사리 남쪽, 임진강과 뒷내강(역곡천)이 합류하는 강언덕 경승지에 있었던 정자.(문화유적·유물편 "사묘·정자" 참고)
2 우화정다리(羽化亭橋. 朔寧渡) : 우화정 북쪽, 뒷내강에 있는 콘크리트다리. 일제 강점기 때 가설된 이 다리는 삭녕면 통행에 가장 중요한 역활을 했으며, 이 다리 옆에는 삭녕 각처에서 생산된 농산물이 모여드는 농산물집판장이 있던 곳이다.
6·25 전에는 이 다리 부근에 3가구가 살고 있었고 예전 삭녕군의 관문이 되었던 이 곳 대로 변에는 10여기의 선정비가 있었다 하나, 지금은 확인할 수 없는 북한 지역이다.
3 성산(城山. 大寺里城址. 137m) : 우화정 북쪽에 있는 산. 6·25 전까지도 자연지형을 이용한 정상부에 큰 규모의 퇴뫼식 산성의 유지가 남아 있었다 한다.
이 산성의 축성 연대는 상세하지 않지만 옛 삭녕군의 읍성(邑城)역활을 했던 중요한 성임을 알 수 있고, 일제 강점기 때까지도 윤곽이 뚜렷한 성벽과 건물지·문지·우물터·와편·토기편 등의 유물이 많은양 널려 있었다 한다.
지정학적으로 매우 중요한 역활을 했던 것으로 추정되나, 현재 북한 지역에 속해 있어 확인이 어려운 상태이다.
4 독쟁이고개 : 성산 북쪽, 한절골에서 적동산리의 독쟁이로 넘어 가는 고개.
5 한절골(大寺洞) : 성산 북쪽에 있었던 마을. 삭녕의 옛 문헌에는 이 곳의 한자지명과 연관되는 큰 절(大寺)에 대한 일체의 언급과 소개가 없고 제보자들도 절터를 확인하지 못했다는 점으로 보아 '한절'을 한자의 '大寺'로 해석하기에는 의문이 있으나, 좀 더 자세히 주위 땅이름들과 비교해 보면 아래와 같은 본래의 뜻을 가지고 있 음을 알 수 있다.
우리 땅이름에는 앞 글자에 '한'이 들어간 것이 수 없이 많은데 대개 어떤 명사앞에 붙어서 여러 가지 뜻을 나타내고 있으나, 가장 흔한 뜻은 '큰(大)'을 들 수 있고 이 곳 한절골의 앞음절 '한'은 뒤의 명사인 '절'에 좋은 뜻을 보태 주고 있으나, 실제 의미는 '절(寺)'과는 무관한 '성(城)'을 칭하는 것으로 보아야 옳을 것이다.
대사리 한절골 앞에는 오래 전에 축성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삭녕 내에서 가장 큰 규모의 성이 위치한 성산(城山)이 있는데 '성(城)'은 우리 고어로 '잣','자', '재' 등으로 발음되어 왔으므로, 큰 규모의 이 성이 '한 잣(재)'로 불리워오던 것이 한절로 음이 변하면서 '큰 성이 있는 마을'이라는 뜻의 '한절골'이 음차되면서 본래 뜻과는 무관한 '大寺洞'이라는 한자지명으로 바뀐 것으로 볼 수 있다.
또한 이 곳은 고려∼조선 초까지 삭녕군의 관아가 있었던 곳으로, 삭녕의 여러지리지에는 "고려와 조선 초에 삭녕의 관아가 지금의 동헌에서(삭녕리 관아) 동쪽으로 5리 쯤에 위치하는데 세종 23년(1441) 현재의 위치로 옮겼다."라는 기록으로 보아 원래 이 마을에 삭녕군의 관아가 있었음을 증명해 주고 있다.
6·25 전에는 방씨들이 20여호 집성촌을 이루었던 곳이다.
6 향교골(校洞) : 한절골 서쪽에 있는 골짜기. 조선시대 때 삭녕향교가 있던 곳이다.
7 장작가리 : 성산 서쪽, 임진강 옆에 있는 모래 언덕. 일제 강점기 때까지도 서해안에서 임진강을 거슬러 올라온 새우젓, 소금배들이 이 곳에 배를 정박시키고 삭녕에서 생산되는 땔감용 장작을 물물교환 하였는데, 당시 새우젓배가 들어오기 전에 이 일대가 장작더미로 가득차 있었다 하여 지어진 이름이라 한다.
8 역골(驛村) : 향교골 서쪽에 있었던 마을. 옛 삭녕군의 역이 있던 곳이라 하여 지어진 이름이다. 6·25 전에는 이 곳에 10여호의 집이 있었다.
9 방학동(放鶴洞) : 역골 위에 있었던 작은 마을.
10 불문이(佛門洞) : 방학동과 가마데미 사이에 있었던 마을. 6·25 전에는 10여호가 살았고 한지공장이 성업을 이루었던 곳이다.
11 가마데미 : 불문이 북쪽, 상마산리의 닥밭골 입구에 있는 산 모퉁이.
12 한치고개(寒峙) : 무학동에서 적동산리의 한치마을로 넘어 가는 고개.(적동산리 참고)
13 무학동(舞鶴洞. 문배울) : 영원산 동쪽, 10집이 살았던 마을.
14 영원산(寧原山. 214m) : 대사리 중앙에 있는 산.
* 제 보 자 : 정 학 운(71) 구리시 수택동 345 - 9호 동원아파트 가동 302호
14. 여척리(餘尺里)
본래 삭녕군 읍내면의 지역으로, '여저리' 또는 '여척리'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연천군 북면에 편입되었고, 1934년 4월 1일 "조선총독부 경기도령 제4호"에 의해 북면과 동면을 병합하여 삭녕면 여척리가 되었으나,
1945년 8·15 광복과 동시에 3·8선 북쪽에 위치하여 공산 치하에 놓였고, 6·25가 끝난 뒤에도 휴전선 북쪽의 북한 지역에 놓여 있으나, 1963년 1월 1일 법률 제1178호인 "수복지구와 동 인접지구의 행정구역에 관한 임시조치법"에 의거 중면에 편입되어 있는 하나의 법정리 지역이다.
1 갈마다리 : 무정골 남쪽, 삭녕리와 경계에 있었던 콘크리트 다리.
2 양푼소 : 갈마다리 옆에 있는 소(沼). 약 100여평 정도의 넓이에 사시사철 맑은 샘물이 펑펑 솟아 나오는 곳이라 한다.
3 개목이나루 : 갈마다리 서쪽, 서남면의 석둔리로 건너다니던 임진강 나루.
4 돗둔이나루(席屯渡) : 개목이나루 위에 있는 서남면의 석둔리로 건너 다니던 임진강 나루.
5 달밭모루(月田洞) : 여척리 가장 서쪽, 임진강변에 있었던 마을. 이 곳은 한자표시인 '달(月)'과는 아무연관이 없는 '산(山)'의 옛말인 '달'과, '밖(外)'이 음이 변한 '밭'이 합쳐 '달밭'이 되었던 것이 다시 한자로 음차되면서 '달밭(月田)'으로 굳어지면서 모퉁이란 뜻의 '모루'와 합쳐 '산 밖에 있는 모퉁이 마을'이란 원래 의미를 잃어 버린 전혀 다른 뜻의 '달밭모루'가 된 곳이다. 6·25 전에는 20여호가 살았다 한다.
6 용못 : 달밭모루 북쪽, 임진강변에 남북으로 길게 있는 큰 못. 예전에 이 곳에서 용이 등천했다 하여 용못으로 이름지어 졌고, 이 부근에 소를 방목해 놓으면 이무기가 잡아먹고 코뚜레만 남겨 놓았다는 전설과 함께, 용못 중앙의 가장 깊은 곳은 명주실 한 꾸러미가 다 들어가고도 모자랐다 한다.
7 독골(獨洞) : 여저리 북쪽, 골짜기 안에 있었던 마을. 6·25 전에는 15호가 살았던 곳이다. 이 곳 역시 산(山)의 뜻으로 씌었던 우리 고어인 '돋'이 '독'으로 음이 변하면서 '산골 마을'이라는 원래 뜻이 아닌 엉뚱한 한자 이름이 지어진 곳이다.
8 여저리(餘尺里, 細洞) : 달밭모루 동쪽에 있었던 마을. 6·25 전에는 제주 고씨가 50여호 집성촌을 이루었던 곳이다.
9 벼락바위 : 무정골 북쪽, 고마리와 경계가 되는 산 모퉁이에 있는 큰 바위. 전설에 의하면 예전에 이 바위 아래에 큰 지네가 살며 지나가던 행인을 잡아먹기를 밥먹 듯하였는데, 이 것을 보다 못한 하나님이 벼락을 때려 지네를 벌하였고 그 때 지네가 죽어가며 흘린 피가 이 바위에 스며들어 바위색깔이 붉다고 한다.
10 삼박골(三朴谷) : 벼락바위 남쪽에 있는 골짜기. 예전에 박씨 성을 가진 세 사람이 살았던 곳이라 하여 지어진 이름이다.
이 곳은 암벽사이에 솟아 나오는 약수가 유명한 곳으로, 앉은뱅이가 이 약수물로 물맞이를 하고 그 즉시 다리가 펴져 걸어가는 효험을 보았다는 전설이 있어 매년 여름이면 많은 사람이 모여들었다고 한다.
11 무정골(武昌洞) : 삼밭골 남쪽에 있었던 마을. 6·25 전에는 정선 이씨 30여호가 집성촌을 이루었던 곳이다. 또한 이 마을 입구에 있는 100여평 정도의 넓이가 되는 조그만 동산에 약 300년 수령의 큰 느티나무 한 그루가 부군나무로 받들어지고 있었고, 매년 추수가 끝난 10월이 되면 이 나무에 대동제를 올렸다 한다.
마을 중앙에 사시사철 샘물이 용솟음 치는 박아지우물과 한지를 만들던 제지공장으로도 유명했던 곳이다.
* 제 보 자 : 이 석 영(76) 전곡읍 은대1리 3반
15. 고마리(古馬里)
본래 삭녕군 읍내면(邑內面)의 하마산리(下馬山里) 지역인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삭녕군에서 연천군 북면에 편입되면서 하마산리를 고마리로 개칭하였으며, 1934년 4월 1일 "조선총독부 경기도령"에 의하여 북면이 삭녕면으로 개칭되면서 삭녕면에 속하였으나,
1945년 8·15 광복과 동시에 3·8선 북쪽에 위치하여 공산 치하에 놓였고, 6·25가 끝난 뒤에도 휴전선 북쪽의 북한 지역에 위치하고 있으나, 1963년 1월 1일 법률 제1178호인 "수복지구와 동 인접지구의 행정구역에 관한 임시조치법"에 의거 연천군 중면에 편입되어 있는 하나의 법정리 지역이다.
1 장개울(長浦洞) : 고사래울 서북쪽에 있었던 마을. 6·25 전에는 20여호가 살았던 곳으로, 임진강과 멀리 떨어져 있는 산골짜기 마을의 특성을 가지고 있는 이 곳에 '포구 포(浦)'자가 쓰이고 있어 지명 풀이에 의문을 남기고 있다.
우리 땅이름 가운데에는 '작은','좁은','가는' 등의 뜻을 나타내는 말인 '잔'이 쓰이는 경우가 많은데 이 '잔' 뒤에 ㄱ의 음이 따라오는 경우에는 역행동화현상으로 인하여 '장'으로 발음이 옮겨지는 흔한 예가 있다.
그러므로, 이 곳 장개울은 포구(浦)와는 무관한 '작은(小) + 개(川) + 울(洞)'이 합쳐진, 다락골에서 내려오는 '작은 개울이 흘러가는 마을'로 해석해야 함이 옳다 하겠다.
2 다락골(樓洞) : 장개울 북쪽, 산골짜기 안에 있었던 마을. 이 곳의 실제 의미는 다락(樓)과는 무관한 '산(山) 골짜기 마을'의 뜻을 가지고 있는 곳이다.
우리 고어에 산은 '달'로 씌어 왔는데, 이 '달'과 '골'이 합하여 산골이라는 '달골'이 되었으나, 아래와 같이 음의 변화를 거치며 '다락골'이 되었다.
달골(山谷) > 달아골 > 다라골 > 다락골(樓洞)
6·25 전에는 20여호의 집이 있었다.
3 안터(內垈) : 고사래울 북쪽, 산골짜기 안에 있었던 작은 마을.
4 아랫말미(下馬洞) : 고사래울 동쪽에 있었던 마을. 6·25 전에는 20여호가 있었으며, 약 600년의 수령이 된다는 큰 느티나무 한 그루가 있던 곳이다.(상마산리의 "윗 말미" 참고)
5 고사래울(古寺洞) : 고마리 중앙에 있었던 마을. 이 곳의 한자 표시인 옛 절에 대한 전설 및 터가 확인된 바 없어 유래는 자세하지 않다.
6·25 전에는 25가구가 있었다 한다.
* 제 보 자 : 이 석 영(76) 전곡읍 은대1리 3반
김 종 갑(73) 서울시 도봉구 쌍문동 498 - 92
16. 상마산리(上馬山里)
본래 삭녕군 읍내면의 지역으로,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삭녕군에서 연천군 북면에 편입되었고, 1934년 4월 1일 "조선총독부 경기도령"에 의하여 북면이 삭녕면으로 개칭되면서 삭녕면에 속하였으나,
1945년 8·15 광복과 동시에 3·8선 북쪽에 위치하여 공산 치하에 놓이게 되었고 6·25가 끝난 뒤에도 휴전선 북쪽의 북한 지역에 위치하고 있으나, 1963년 1월 1일 법률 제1178호인 "수복지구와 동 인접지구의 행정구역에 관한 임시조치법"에 의거 연천군 중면에 편입되어 있는 하나의 법정리 지역이다.
1 닥밭골(楮田洞) : 상마산리 가장 남쪽에 있었던 마을. 이 곳은 예전에 닥나무가 많이 자생했던 곳이라 하여 지어진 이름이라 하나, 실제로는 닥나무와 전혀 연관이 없는 한자풀이의 지명이다.
전국의 땅이름 가운데에는 첫음절에 '닥','닭','닷' 등이 들어가 있는 곳이 수 없이 나타나는 것을 흔히 볼 수 있는데, 이 모두는 산의 뜻을 가지고 있고 그 말들의 뿌리는 '닫'에 두고 있다.
이러한 어원의 분석을 통한다면 이 곳 닥밭골의 '닥'은 닥나무의 뜻이 아닌 '산(山)'을 뜻하는 것이며, '밭(田)' 또한 '밖(外)'이 음이 변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이 마을은 '楮田洞'이 아닌 깊은 산골에 자리한 상마산리의 여러 마을가운데 ' 산 밖에 위치한 마을(山外洞)'이라는 원래의 뜻을 가지고 있는 곳으로 보인다. 6·25 전에는 열다섯 가구가 살았다 한다.
2 배나무고개 : 팔운이 마을에서 배나무골로 넘어 다니던 고개.
3 배나무골(梨木洞) : 닥밭골 북쪽에 있었던 마을. 예전에 배나무가 많았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 하나, 한자식 풀이의 '배(梨)'와는 무관한 단순히 '산골 마을'의 뜻을 가지고 있는 곳이다. 6·25 전에는 열다섯 가구가 살았다 한다.(장남면 원당리 "배골" 참고)
4 윗말미(上馬洞) : 배나무골 서북쪽에 있었던 마을. 이 곳 산의 형상이 말의 모습과 닮았다 하여 지어진 이름으로, 윗말미·아랫말미·고마리 등의 부근 지명들 모두가 이 곳과 연결되어 붙여진 지명이다. 말미의 '미'는 산의 뜻인 '뫼'가 발음이 변한 것으로 보여진다. 6·25 전에는 10여호가 살았던 곳이다.
5 새누골(新陵洞) : 윗말미 북쪽, 십여호가 살았던 마을. 릉(陵)과 관련된 내용은 자세하지 않다.
6 당귀동(當歸洞) : 새누골 동쪽에 있었던 작은 마을.
7 추돈지(楸屯洞) : 당귀동 동쪽에 있었던 마을. 가래나무가 많아서 추둔동이라 했다는 설과 철원군 마장면 밀암리로 넘어 가는 추가령고개의 밑이 된다 하여 추둔동이라 했다는 두 가지 유래가 전해 오는 곳이다. 6·25 전에는 10여호가 살았던 작은 마을이다.
8 팔운이고개(靑雲峴) : 추돈지에서 팔운이 마을로 넘어 다니던 고개.
9 뒷고개 : 팔운이 북쪽에 있는 고개. 인목면 검사리의 용수동과 통하였다.
10 망덕산(望德山. 258m) : 팔운이 서쪽, 인목면 검사리와 경계에 있는 산. 여진족어에서 산(山)의 뜻으로 쓰인 '덕(德)'의 영향을 받은, 단순히 '산(山)'을 뜻하는 이름으로 보인다. (신서면 마전리 "천덕산" 참고)
6·25 전까지 이 산 아래에 있는 큰 소나무에서 매년 가을이 되면 팔운이 주민들이 산제를 올렸던 곳이다.
11 팔운이(靑雲洞) : 망덕산 서쪽에 있었던 마을. '산'·'머리'의 뜻으로 씌었던 우리 고어인 '발'이 음이 변하여 '팔'이 되었고, 이 마을 주위에 병풍처럼 펼쳐져 있는 망덕산, 감수봉, 316m 무명고지가 호위하듯 감싸고 있는 골짜기의 안(內)이 되어 '골짜기 안의 마을'이라는 뜻의 '발안'이 '팔운이'로 음이 변하면서 아무런 연관이 없는 한자의 '靑雲洞'으로 음차된 땅이름으로 보인다. 6·25 전에는 약 450년 전에 정착한 연안 김씨들이 40여호 집성촌을 이루었고, 일제 강점기 때에는 한지공장이 성업을 이루었던 마을이다.
12 쉰짐터 : 팔운이 남쪽, 연안 김씨 네 집이 살았던 작은 마을. 유래는 자세하지 않다.
13 감수봉(甘水峰. 317m) : 쉰짐터 동쪽 적동산리·상마산리, 신서면 검사리(옛 인목면)와 경계가 되는 산. 이 봉우리의 한자표기 '甘水'는 한자 풀이식의 '달다'와는 거리가 먼 '거룩한','큰'의 뜻으로 씌었던 고어의 ' (감)'에 뿌리를 둔 것으로, 단순히 '큰 봉우리'라는 뜻을 가진 이름이다.
* 제 보 자 : 김 종 명(76) 전곡읍 전곡6리 사랑동
김 종 갑(73) 서울시 도봉구 쌍문동 498 - 92
첫댓글 와 .대단 하십니다 이많은 글과 사연을 다 담아 카페에 올려 주신 덕 분에 앉아서 읽고 있으면서 감탄 사가 절 로 나옴니다 정말 수고 많이 하쎴읍니다 감사함니다
제 집사람이 삭녕 최씨 입니다. 경남 사천과 고성쪽에 삭녕 최씨 많이 삽니다. 무슨 인연 인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