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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물 제588호인 강민첨 장군의 초상. 충남역사문화연구원 제공 |
강민첨은 1005년 꽤 늦은 나이인 43세에 문과에 급제했는데 원래 그는 부모를 모시고 가업을 이어 안빈낙도(安貧樂道)의 삶을 살려고 했지만 주변의 지인들이 그의 학문적 능력이 아까워 계속해서 과거를 보라고 권유했기 때문이다.
결국 과거를 본 그는 을과(乙科)에 당당하게 합격했고 유명한 최충(崔沖)이 그와 과거시험 동문이다.
강민첨은 어려서부터 무(武)가 아닌 문(文)으로 두각을 나타냈는데 의지와 기개가 굳세고 과감해 주로 전공(戰功)을 통해 이름을 세상에 알렸다.
기록에 따르면 강민첨은 ‘지기(志氣)가 있고 강과(剛果)해 주로 전공(戰功)을 통해 입신했다’고 알려져 있다.
과거 강민첨이 장터를 지나가는데 모기가 손으로 내쫓아도 계속 달라붙자 크게 호통쳐 모기를 쫓아냈다고 한 설화는 매우 유명하다.
◆2차 거란족 침입과 여진 침입을 막아내다
1010년 거란족이 고려를 침입했는데, 당시의 거란족은 요(遼)나라를 세우고 발해를 무너뜨리며 위세가 막강해 함부로 얕보기 힘든 전력을 가지고 있었다.
과거 993년 고려를 침공했을 때도 고려는 정면승부를 피하고 서희(徐熙)의 외교력 덕분에 전쟁을 막을 수 있었다.
근 20년 만에 거란의 침입을 당한 고려의 군대는 초반에 거란의 침입에 맞서 잘 막아냈지만 계속되는 대군의 공격을
받고 패배해 고려군이 흩어지기 시작했다.
이에 당시 왕인 현종(顯宗)이 강감찬(姜邯贊)의 권유를 받아 들여 남쪽으로 피난하게 되는 사태까지 발생했다.
이 때 강민첨은 애수(隘守·현 함경남도 고원)의 진장(鎭將)으로 있으면서 군사가 흩어져 위기에 몰리게 되자
낭중(郎中), 방휴(方休) 등과 의논해 조원(趙元)을 현재의 지방자치단체장 격인 병마사(兵馬使)로 추대하고
흩어진 군사를 모아 서경(西京·현 평양)을 거란족으로부터 굳게 지켰다. 덕분에 현종의 피난은 안전하게 끝날
수 있었다. 2년 뒤인 1012년에 동여진(東女眞)이 청하현(淸河縣·현 경북 흥해)과 영일현(迎日縣·현 경북 포항)
등으로 침입하자, 강민첨은 총지휘부인 도부서(都部署)의 문연(文演)·이인택(李仁澤)·조자기(曹子奇) 등과 함께
주·군(州·郡)의 병사들을 독려하면서 맞서 싸웠다.
이 때 등장한 것이 날카로운 못이 돋아난 일종의 철갑선인 과선(戈船)인데 거북선과 비슷한 형태의 함선으로
거란 토벌에 적지 않은 역할을 한 것으로 알려졌다.
강민첨은 동여진의 공격까지 훌륭하게 막아내 1016년에 ‘내사사인(內史舍人)’, 이듬해인 1017년에는
태복경(太僕卿)까지 올라갔다.
고려사 열전에 강민첨 장군의 기록을 살펴볼 수 있다. 충남역사문화연구원 제공 |
◆흥화진전투와 귀주대첩으로 마무리된 3차 거란족 침입
고려에 패한 거란족은 또다시 고려를 공격했다.
1018년 8월 거란의 ‘소배압(蕭排押)’이 10만 대군을 이끌고 고려에 쳐들어오자 조정은 평장사(平章事)
강감찬(姜邯贊)을 상원수, 대장군 강민첨(姜民瞻)을 부원수로 각각 임명해 지휘권을 일임했다.
강감찬을 보좌하는 명이 내려진 것이다. 강감찬은 먼저 병력을 이끌고 흥화진(興化鎭·현 평안북도 의주)
으로 가서 흥화진 동쪽으로 흐르는 시내를 소가죽으로 막았다.
그리고 거란족이 건너기를 기다렸다가 물을 터뜨리고, 복병을 내어 흩어지는 적병들을 공격하도록 했다. 이
전투에서 7000여 명이 넘는 사상자를 낸 거란 장수 소배압은 무모하게도 개경을 향해 계속 진군을
강행했는데 이때 부원수 강민첨이 기병대를 이끌고 뒤를 쫓아 자산(慈山·현 평안남도 순천)에서 거란족을
격퇴시켰다.조원이 이끄는 고려군도 남하해온 거란족을 맞아 대동강 근방 마탄(馬灘·대동강 지류)에서 적을
습격해 1만여 명의 거란족을 물리쳤다.고려군이 흥화진전투에서 큰 승리를 거둔 것이다.
이처럼 계속되는 패배에도 불구하고 개경 입성의 망상을 버리지 않은 소배압은 1019년 1월에 자신의 직할대를
이끌고 개경에서 100여 리 떨어진 황해도까지 진출했는데 이때 고려는 개경에서 방어진을 구축한 상태였다.
고려는 성 밖의 백성들을 모두 성 안으로 불러들이고 들판의 작물과 가옥을 모두 철거했기 때문에 거란족은
식량과 물자를 구할 수 있는 방도가 모두 차단된 상황이었다.
막상 개경 근처에 도착한 소배압의 군대는 탈진한 상태에서 개경 공략을 포기하고 말머리를 돌릴 수밖에 없었다.
1019년 2월 강감찬은 귀주(龜州·현 평안북도 구성)에서 진을 치고 회군하는 적군을 가로막아 일전을 벌였다.
처음에는 양군 진영이 팽팽한 접전을 벌이면서 서로 대등한 형세를 이뤘지만 고려의 원군이 가세하면서 상황은
급변했다.
때 마침 갑자기 비바람이 남쪽으로부터 휩쓸려 와서 깃발이 북쪽으로 나부꼈고, 이 바람으로 고려군이 활을 쏘기
유리하게 됐다. 그 기세를 틈타 고려군이 맹렬히 공격하니 거란족은 북으로 도망치기 시작했다. 기회를 놓치지
않고 고려군이 추격하자 적들의 시체가 들에 널렸고 생포한 인원과 노획한 말, 낙타 갑옷, 투구 등은 이루
헤아릴 수 없다. 살아 고국으로 돌아간 자는 겨우 수천 명에 불과했다.
이것이 바로 한국의 전쟁 역사에서 길이 빛날 승전(勝戰) 가운데 하나인 귀주대첩(龜州大捷)으로 강민첨은
강감찬을 도와 큰 무훈을 세웠다.
◆현종도 슬퍼한 영웅의 죽음
강민첨이 거란족의 침입을 물리치고 개성으로 개선하자 왕이 직접 나와 이들을 맞이했고 연회를 베풀어 크게
치하했다.이 공으로 강민첨은 ‘응양상장군주국우산기상시(鷹揚上將軍柱國右散騎常侍)’가 되고,
‘추성치리익대공신(推誠致理翊戴功臣)’이 됐다. 이후 강민첨은 1020년 ‘지중추사 병부상서(知中樞事 兵部尙書)
’에 올랐다가 1021년 11월 세상을 떠났다.
영웅이 눈을 감자 왕인 현종은 3일 동안 조회를 열지 않았다. 그의 귀천(歸天)으로 슬픔에 찬 왕이 국사를
잠시 쉰 것이다.
이후 현종은 충남 예산에 거대한 무덤을 만들어 강민첨의 업적을 기리게 했고 강민첨을 ‘태자태부(太子太傅)
’로 추증하며 ‘은열(殷烈)’이란 시호를 내렸다.
진주 강 씨(晉州姜氏) 은열공파의 시조가 탄생한 것이다. 현종은 또 강민첨의 공로로 인해 아들 단(旦)의
녹봉과 품계도 올려주었다.
현종의 뒤를 이은 문종(文宗)은 즉위년인 1046년에 “1018년 거란이 침입했을 때 병부상서 지중추원사 강민첨이
적군을 맹렬히 공격해 반령(盤嶺) 들에서 크게 승리를 거두니, 거란이 북으로 도망가면서 창과 갑옷을 버린
것이 길에 가득 찼으며, 포로와 살해된 적병의 수가 만 명이나 되었다.
그의 공을 추억하면 표창함이 합당하니 공신각에 초상을 걸어 후대 사람들의 모범이 되게 하라”는 교서를 내려
강민첨 장군을 삼한벽상공신(三韓壁上功臣)에 봉하고 초상을 그려 공신각에 걸게 하였다.
1968년 충북 청원의 충현사(忠顯祠)에 강감찬과 함께 배향됐다.
진주강씨 은열공파 (晉州姜氏 殷烈公派)
은열사(殷烈祠)
소재지 : 경상남도 진주시 옥봉남 동 622
경상남도 기념물 제 14 호
이곳은 은렬공 ( 殷烈公 ) 강민첨 ( 姜民瞻 ) 장군의 탄생지
( 誕生地 )이다.
그래서 기념물 공식 명칭은"강민첨 장군 탄생지" 이다. 은열사 경내에 "
강 은렬공 유지 (姜殷烈公 遺址)라고 큰 바위에다 금석ans ( 金石文)이
새겨저 있다.은렬사는 1021년 (天禧 辛酉年,고려 현종 12년 ) 에 創建하였으며
"은렬 (殷烈 )이라 사액 (賜額) 하였다. 1609년 (광해 1 )에 公의 후손 慶尙監司
강첨 (姜籤)중건하였고 , 1644 (인조 22 ) 진주목사 홍경렴 (洪景濂) 이 다시중건
하였고846년 (현종 12 )에 비봉산 아래 봉곡 (鳳谷,현 봉산사 부근) 으로
移建 하였다가 그 뒤 현재의 자리에 1941 년 再建하여 지금까지 유덕을 기리고
있다. ( 무려 988 년이나 된 사우 (祠宇) 이다 )
매년 음력 3 월 11 일에 전국 유림 (儒林) 주관으로
향사 ( 享祀 )를 올리고 있으며 음력 11월 29 일 후손들이
모여 탄신제 (誕辰祭 ) 를 모시고 있다.
은열공(殷烈公) 강민첨 (姜民瞻)선조영정
1 子 단 (旦) (太子太師) 2세
1,子, 항( 恒) 2,子,보 ( 輔) 3세
1,子보문(補文)2,子,정두(貞叶) 4세
1,子,운익(雲翼)2子,여익(여翌) 5세
1,원길(元吉) 2子,元監) 6세
청 (請 ) 7 세
순 (珣 ) 8 세
조 (祚 ) 9 세
유 (惟 ) 10세
대규(大珪) 11세 (府使)
여위(汝渭 ) 12세
유노(惟老) 13세
신좌(臣佐) 14세
득시(得時) 15세
보충(輔忠) 16세
輔忠祖 墓所 좌익공신 병조판서 판서공파 파조
진주시 집현면 장흥리 와 냉정리 경게 에 있다.
▣(판서공파)
보충(輔忠) 16세
輔忠(보충) 고려 말엽 좌우위 보승랑장으로 왜구를 소탕한 공로로 좌익공신(佐翼功臣)이 되고 송덕비가 섰으며 병조판서(兵曹判書)를 역임했다. 산앙사에 위패가 있다. 감사 金世鎬(김세호)가 지은 嶠南誌(교남지)에 사적이 있다
▣ 용리(用鯉) 17세 문과 급제 부사,
▣희려(希呂) 18세 현감
▣취(就)영등만호(永登萬戶) 익(益) 홀(仡) 19세
▣지(持)상호군(上護軍) 언(彦) 총(摠) 20세
▣세호(世豪) 21세 자는 명원(明遠)이다,회양부사(淮陽府使) 의주판관
등9개고을을다스렸으며,모두 청덕비가 있다 묘소는진주 대곡면 와룡리
유곡촌에있다,부인은
진주정씨 희주(希周)의 따님이다, 21세
▣오수(鰲壽) 선무랑벼슬을 함, 22세
임계정종중(臨溪亭宗中)
▣강심 (姜深 )字 太涵 號 臨溪 23세
소재지 주소 경상남도 진주시 대곡면 설매리 749임계정
진주강씨 재실-임계정 진주시 대곡면 설매리 소재 우리 선조 임계공(臨溪公)이 만년에 수양을 하시던 곳으로 임계정 재실이있는 왼쪽에 상산(商山) 김인섭(金麟燮)이 지은 호조참의 유허비가 서있고 왼족 경의문(景義門) 안쪽에는 진양 강씨 중시조 은열공(殷烈公) 휘 민첨(民瞻)의 영당인 산앙사가 있다.
임계정 압 마당에는 호조참의 휘 심(深)의 유허비가 크게 서 있고, 그 조금 떨어진 곳에 1999년에
세운 공의 아들 매촌공 휘 덕룡의 '절충장군 중추부사 선무원종일등공신 증 가선대부 병조참의 매촌 강공 신도비'가 서 있다.임계공 강심이 호조참의에서 물러나 만년에 초가 정자를 짓고 수양하였으나 세월이 오래되어 무너졌고 그 자리에 1923년 후손들이 기와집으로 다시 중건.이 재실(임계정)은 종손인 강윤조씨가 관리하고 있으며 진주강씨 1세조 민첨 16세 휘 보충 증 공조참의 휘 심과 그아들
증 가선대부 병조참의 휘 덕용을 모시고 제향을 올린다.[증호조참의 강공유허비(曾戶曹參議姜公遺墟碑)]대곡면 설매마을 진양강씨 입향조인 23세 임계공 강심의 유허비가 임계정에 있다. 증호조참의 강공유허비(曾戶曹參議姜公遺墟碑)라고 새겨진 고색창연한 비석에는 한말 산청선비 단계 김인섭(1823~1903년)의 글이 적혀 있다.비문에 “공의 휘는 심(深)이며 자는 태함(太涵)이다 고려 현종조 태사(太師) 벼슬을 지낸 은열공의 후손이다.아버지 오수(鰲壽)는 선무랑의 벼슬을 지냈으며 어머니는 진양정씨 생원 이량(以良)의 따님이다. 1522년 어풍정(御風亭)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영특했으며 자라서는 기량이 뛰어났으나 과거에 급제하지 못해 마을 사람들이 애석하게 생각했다.”라고 되어 있다.임계는 어풍정에서 태어나 만년에 설매 마을로 들어왔다. 임계가 태어난 어풍정은 현 진주시 집현면 신당(新塘)마을 남강이 바라보이는 곳에 있었으며 외조부인 정생원이 살았던 집이다.만년에 대곡에 들어와 정자를 짓고 “감악산 아래 설매 마을/ 시냇가 초가집 대나무로 문을 만들었네/ 병든 몸 여러 해동안 인적 조차 드물어/이침부터 홀로 앉아 지는해 바라보네”라는 시를 지었다. 정자에는 많은 선비들이 찾아 왔으며, 진양지 편찬을 주도한 부사 성여신도 와서 수업을 했다고 한다. 임계는 정자에서 유유자적한 삶을 살다가 73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한다. 아들 덕룡(德龍)은 임란 때 창의해서 왜적을 무찌른 공이 높았다,
▣덕룡(德龍)字 汝中 號 梅村 武科及第 24세
1560~1627[조선] 선조 때의 무신(武臣).자는 여중(汝中).호는매촌(梅村).
18세부터 말타기와 활쏘기를 익혀 정기룡(鄭起龍), 주몽룡(朱夢龍)
등과 함께 모두 재용(才勇)이 뛰어나 삼룡(三龍)이라 불럿다.
1583년 (선조 16) 무과(武科)에 급제하고,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창의
(倡義)하여 큰 공을 세웠다.
1593년 (선조 26) 왜병이 울산(蔚山)으로 후퇴하고, 명나라 군사가 상주
(尙州)와 대구사이에 주둔했을 때 양료차관(糧料差官)이 되어 명군에 대한
군량 보급을 원활이 했고, 호남 체찰사(湖南 體察使) 이원익(李元翼)의
휘하에서 체부아문장(體府衙門將)과 본부영장(本部營將)을 역임했다.
이에 앞서 경상우병사(慶尙右兵使) 정기룡을 따라 성주 화원현(星州 花園縣)과 고령 안림역(高靈 安林驛)에서 별장 우 선(禹 善)과 함께 삼가(三嘉)에서 왜적을 격파한 공으로 절충장군(折衝將軍)에 올랐다.
다시 진주영장(晉州營將) 을 거쳐 장기현감 때 선정을 하였고,
경상도 우병영중군(右兵營中軍)을 제수 받았다.
진주 촉석루 아래에 공의 송덕비(頌德碑)가 있는데 비문은 참판 박명부
가 지었으며,
절충정군 중추부사(折衝將軍 中樞府事)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
1등에 책록되었다.
1700년 (숙종 26) 효자정려가 내려졌으며,
1856년(철종 7)에 가선대부 병조참판(嘉善大夫 兵曹參判)에 증직되었다.
[문헌] 영남인물지, 진양지, 임진전란사. 龍蛇日記,
* 墓 : 경남 의령군 화정면 덕교리 연월산 에 있고
부인은 정부인 밀양박씨 영등만호 士信의 따님이다
* 時享 : 음 10월 15일
* 姜 深 23세
* 子 : 錫胤, 得胤, 有胤, 光胤, 興胤
[문헌] 영남인물지, 진양지, 임진전란사. 龍蛇日記,
* 묘(墓) : 경남(慶南) 의령군 화정면 덕교리 연월산
* 시향(時享) : 음(陰) 10월 15일
* 강덕룡(姜德龍)
* 자(子) : 석윤(錫胤), 득윤(得胤), 유윤(有胤), 광윤(光胤), 흥윤(興胤)
강덕룡(姜德龍): 자(字)는 여중(汝中)이요, 호(號)는 매촌(梅村)이며, 임계(臨溪) 강심(姜
深)의 아들이다. 무과(武科)에 올라 임진란(任辰亂) 때에 수사(水使) 원균(元均)의 막(幕)
에 달려가서 왜(倭)로 더불어 연전(連戰)하여 열두번을 크게 이기니 초유사(招諭使) 김공성
일(金公誠一)이 조정에 아뢰어 함창현령(咸昌縣令)에 제수되었다. 갑오년(甲午)에 간을 만
났다가 상(喪)이 끝나니 이공원익(李公元翼)이 불러서 체부영장(體府營將)을 삼았다. 그리
하여 병사(兵使) 정기룡(鄭起龍)으로 더불어 적(賊)을 성주(星州)와 고령(高靈) 땅에서 파
하고 장기현으로 옮겼다가 예빈주부(禮賓主簿)에 옮아갔더니 어머니가 늙었으므로 사직(辭
職)하고 돌아와서 봉양하매 효성의 감동으로 고기가 들어오는 이변(異變)이 있었다.
수연(壽宴)을 베풀 때에 하죽헌 성(河竹軒 惺)이 서문(序文)을 만들었고 선조조(宣祖朝)에
서 선무원종일등훈(宣武原從一等勳)을 기록하였으며 숙종조(肅宗朝)에서 효행으로써 복호
(復戶)를 명령하였으며 철종조(哲宗朝)에서는 병조참판(兵曹參判)을 추증하였다.
강덕룡 1560-1627 여중 매촌 진양 창의 영남삼룡 매촌실기 진양세고
姜德龍 1560-1627 汝中 梅村 晋陽 倡義 嶺南三龍 梅村實記 晋陽世稿
남명학파(南冥學派) 관련(關聯) 인명록(人名錄)
이상필(문학박사, 경상대학교 한문학과 교수) 편찬, 제공(2005년 4월)
1. 무과(武科)
강덕룡(姜德龍): 계미년에 합격하여 현감(縣監)을 지냈다.
2. [음사인명(蔭仕人名)]
강덕용(姜德龍) (현감(縣監))
3. 진양속지 제2권/인물(人物)
○ 강덕룡(姜德龍) : 자는 여중(汝中)이요, 호는 매촌(梅村)이며, 임계(臨溪) 강심(姜深)
의 아들이다. 무과에 올라 임진란에 수사(水使) 원균(元均)의 진영에 달려가서 왜적과 연달
아 싸워 열두 번을 크게 이기니 초유사(招諭使) 김성일(金誠一)이 조정에 아뢰어 함창현령
(咸昌縣令)에 제수되었다. 갑오년에 상(喪)을 만났다가 상기가 끝나니 이원익(李元翼)이 불
러서 체부영장(體府營將)을 삼았다. 그리하여 병사(兵使) 정기룡(鄭起龍)과 함께 적을
(星州)와 고령(高靈) 땅에서 격파하고 장기현(長?縣)으로 옮겼다가 예빈주부(禮賓主簿
옮겼다. 어머니가 늙었으므로 사직하고 돌아와서 봉양함에 효성의 감동으로 고기가 들어오
는 이변이 있었다. 수연(壽宴)을 베풀 때에 죽헌(竹軒) 하성(河惺)이 서문을 만들었고 선
조(宣祖) 때에 선무원종일등훈(宣武原從一等勳)을 기록했으며 숙종(肅宗) 때에 효행으로써
세금을 면제받았으며 철종(哲宗) 때에는 병조참판(兵曹參判)에 추증되었다.
4. 강덕룡(姜德龍)(1560~1627) 본(本) 진주(晉州) 여중(汝中) 매촌(梅村)
梅村公實記 오림문고
▣석윤 (錫胤) 25세
1585년(乙酉 宣祖18) 生 으로1662년(任寅 顯宗3)세상을 떠났다,
자는 원술(元述)이며 승사랑(承仕郞)지냇다,부인은 진양하씨 송강 하항의 따님이다,
(진양 하씨큰집)
▣전(㙉) 26세
1617년(丁巳 光海9)생으로 1661년 (辛丑 顯宗2)정월 14일 세상을 떠났다,
생부 득윤(得胤)이며 자는 간중(幹仲),호는 괴당(槐當)이다, 용모가 준수했으며
재주가 뛰어낫다, 향시에 여러 번 합격했다,묘소는 대곡면 와룡리 유곡촌 부사공
묘 아래에 있다,
▣서주(瑞周)27세
1640년 (庚辰 仁祖18) 생으로 1680년(庚申 肅宗6) 세상을 떠났다,
자 숙황(叔璜),학문이 뛰어 났으나 일찍 세상을 떠났다,
▣ 여관(汝寬)1자 28세
자 군평 (君平) 호 매계 (梅溪) 임진왜란때 초유사 김성일 金誠一 도와 공을세운
梅村 강덕룡 (姜德龍) 의 현손 (玄孫) 손자의 손자이다,
.
▣ 여완(汝完)2자 28세
1672년생 (壬子 顯宗13 康熙11) 자는 군기(君器)이다, 외모가 준수 했으며 높은 벼슬을
할것이라는 기대를 한 몸에 받았다 ,1767년(丁亥 英祖 43년 乾隆32)4월23일 35세에
세상을 떠났다 配位는 진양정씨 斗齡의 따님 이시다,
진주강씨 은열공后 판서공파 설매 임계정 재실
아래 사진은 강기정이 촬영한 임계정 전면 사진인데 둥구나무.(기목나무) 대나무.
은행나무가 있었잖아요.
지금은 이 사진 아니면 옛 임계정 후편 나무모습 볼 수 없지요.
위 임계정 전경 및 매촌공 신도비
↓아래는 진주시 옥봉남동 662번지 위치한 은열사
진주강씨 은열공 강민첨1세조 춘향례
서기 2013년 음 3월 11일
초헌관 成煥圖 님
아헌관 鄭今永 님
종헌관 文水烈 님
3헌관님을 모시고 종친200여명과
춘향례_(유림례)를 엄숙이 봉향 하였습니다.
2012년 음 3월 11일 춘향례
진주강씨 은열공파 대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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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열공 1세조 두방영당(두방재)홍살문 중건
문화재등록(2011.12. 6 .제막)
하동군 옥종면 두양리 소재 두방재
은열공 강민첨 묘소와 예산재
↓ 예산재(禮山齋) 충남 예산군 대술면 이티리 산 34번지 강민첨 선조 재실과 묘소.
↓↓강민첨 선조 (은열공파 1세조 묘소)
충남 예산군 대술면 이티리 산 34 번지 강민첨 선조 묘소
매년 음 10월 5일 전국 진주강씨 종친들이 모여 시향을 올림.
민첨 조 의 마부 와 말 무덤
2013년 음10월 5일 은열공묘소에서 시행 묘제를 드렸습니다.
(위 예산재 사진 용동댁 2째딸 강미애 제공)
보충 (보충) 16세
판서공파 파조(判書公派派祖)
고려 말엽 좌우위 보승랑장으로 왜구를 소탕한 공로로 좌익공신(佐翼功臣)이 되고
송덕비가 섰으며 병조판서(兵曹判書)를 역임했다. 산앙사에 위패가 있다.
감사 金世鎬(김세호)가 지은 嶠南誌(교남지)에 사적이.
경상남도 진주시 집현면 냉정리에 있는 고려시대 분묘. 진양강씨인 강보충(姜輔忠)의 묘이다.
강보충은 고려 말의 사람으로 알려져 있으나, 관련 기록은 찾아 볼 수 없다.
경상남도 진주시 집현면 냉정리와 장흥리의 경계가 되는 야산에 위치하고 있다.
비교적 큰 봉토를 가지는 고려시대 방형분묘이다. 묘 앞쪽은 대형의 석재로 단을 만들었으며,
분묘 주위에는 후대에 세운 비석이 있다. 진양강씨 후손에 의해 보존·정비되고 있다.
산앙사에 위패를 봉안하고, 매년 음 3월 23일 춘향 음10월 15일 시향을 올리고 있다.
우리 16세조 보충할아버지는 역사적기록이 없는것이 특징이다.
어느문현을 찾아 보아도 할아버지의 행적이나 기록이 전무하다.
김세호 가 지은 교남지에 사적이 있다하나 찾아 볼수없고,
경상대 도서관에 교남지가 있다하여 찿아 보았으나 김세호가 지은 교남지는 없다.
경상북도 봉화군 문경군의 기록을 보면 경남 창녕군 남지읍의 한 교회에 김세호가 지은
교남지가 있다하나 찾아보지 못하였다. 구전에의하면 왜병을 물리친 공적으로 고려시대
병조판서에 올랏으나
왜구가 우리 나라를 처 들어와 輔자忠자 할아버지께서 왜구를 섬멸하신것을
왜구들이 알고 현재의 묘 주위의 모든 묘비 석물을 묘아래 집현면 광정교 아래 강물
소 에 매몰하고, 묘의 위치조차 모르든차 후손들이 집현면 냉정리 장흥리 부근의
노인들의 증언으로 묘를 찿아 후손들이 서기1958년 묘 설단비를 세우고 해마다
벌초하며 춘향과 시향을 드리고 있다.
산앙사 (山仰祠)
은열공(殷烈公) 1세조 강민첨 (姜民瞻)
고려 광종 계해년 963넌 11월 29일 진주옥봉 개경향 에서 탄생 하시다.
현종 12년 신유년 1021년 11월 12일 하세.
산앙사(山仰祠) 는 원래 진주 대안동 장능에 있었으나 殷烈公 姜民瞻 將軍의
影幀을모신 사당으로 임오년 1822년후손 한사공 (합천인) 강 대수 께서 진주목사로 부임하여 영정이 낡고 훼손된것을 보시고 화공을 불러 채색을
입히라하였다. 그 후 후손 필준 (은열공 후 30세 판서공파 청암소문중)이
다시 그릴것을 제창하여 1970년 정조14년(은,23세) 임계공후손(은,30세),
강필준이 영정을
등에업고 서울까지 가서 표암 강세황 선생 에게 부탁하여 존영2본을 그려
진주대안동의 사당과 하동 두방재에 각각 봉안하였으나 1868년
서원 철페령으로 대안동의 사당이 철거되어 70여년간 두방재에 존영2본을
함께 봉안하다가 존영2본을 함께 모시는것이 선조에 대한 모독이다 하여
경남 진주시 대곡면 설매리 진양강씨 판서공파 임계공 문중에서 서기 1954년에
산앙사 사우를 새로창건하여 두방재 에 묘셔진 영정1본을 설매 산앙사로
모셔와 봉안하고 제 향을 올리고 있다,
16세 휘 보충(輔忠) 23세 휘 심(深) 24세 휘 뎍용(德龍) 위패봉안
은열공1세조 강민첨 춘향일 매년 음 3월 23일 (16세 휘 보충. 23세
강 심 (姜 深). 24세 휘 뎍룡.)
시향일 매년 음 10월 15일 (산앙사. 임계정)
↓↓ 산앙사 2013년 음 10월 15일 시향 봉향
2013년 음 3월 23밀 춘향례
부산시 종회 회장 강봉환님과 종회원 산앙사 방문 예를 드림(2013년 음 3월 10일)
17세 용이 (用鯉) 문과급제 순천부사 견 진주연계안기록
18세 희여(希呂) 이조 태종조 (1381년)문과장원 광양현감 진주연게안운정통
신유년 문과 배위 파평윤씨
19세 취(就),영등만호(永登萬戶)
20세 지 (持) 상호군 (上護軍)
21세 세호 (世豪) 자는 명원(明遠) 희양부사(淮陽府使) 의주판관등 9개고을을
다스렸으며 모두 청덕비가 있다 묘소는 진주시 대곡면 유곡촌에 있다,
부인은 진주 정씨 희주(希周)의 따님이다,
22세 오수 (鰲壽) 선무랑 충훈위(宣務郞 忠訓衛) 이다,
진주강씨 은열공파后 판서공파 설매 임계정 재실
아래 사진은 강기정이 촬영한 임계정 전면 사진인데 둥구나무. 대나무. 은행나무가 있었잖아요. 지금은 이 사진 아니면 옜 임계정 후편 나무모습 볼 수 없지요.
위 임계정 전경 및 매촌공 신도비
23세 심 (深)임계공(臨溪公)
24세 덕룡 (德龍)
25세 長子석윤(錫胤)(설매1 매계공 2 지우당 용산재 여자완祖)
次子득윤(得胤)(청암파 익주祖의子 여보祖의子흥운祖)
득윤祖의 2子전 자 祖님은 득윤祖 형님 석윤祖에게 양子로 왔으나
득윤 祖님의 子가 아들이 없어 득윤祖2子의 子의 2子 오子가 子가 없어
전자 2子익주 祖 가 전자의 동생 오 祖 에게 양자 감으로 매계공 집안과
지우당 용산재 청암 집안은 한혈통 후손이다.
三子有胤 祖님과 女의壻는 尹右벽 덕룡 祖와 배위 밀양 박씨祖母의
子女이며. 四子는光胤. 五子는 興胤 祖이다.
상곡 麻氏 麻貴 의 증손자 마순상이 덕룡祖의 사위라니 병인 기사년
그리고 어느 문현을 보아도 우리종중역사 그리고 덕룡조의 5남 1여다.
보족 보책에도 없는 상곡 麻氏 마귀(麻貴)의 증손자 麻舜裳이 덕룡祖 의
사위(婿) 다 라고 하니 의문이다. 종원님 께서는 상곡마씨 麻舜裳 에 관한
의문점을 풀어봅 시다. 그리고 우리문중 출입 하시는 마호영 씨에게 전화로
마순상과 청주한씨에 대하여
전화 질문하여 문의 하였더니 덕룡祖의 後배위 淸州韓氏를 자기가 발견하였
다한다. 우리 종중족보 또는 타 서적에도 덕룡조 壻는 윤우벽 뿐인데 우리종원은
모르고 있는 光胤 祖 配 淑人陽川許氏 興胤 祖 는 配位
기록이없다. 마호영씨의 10대 祖 마순상이 우리 덕룡祖 壻라고하며 덕룡祖 의
후처(配位)는 우리 족보에도 기록이 없고 우리 후손들은 모르는 청주한씨가 德龍 祖의
2壻 의 子 마봉직 외조부 淸州韓氏 가선북병사 청주인 韓克誠 이라는데 궁금?
판서공파 우리종원은 이문제를 풀어봅시다. 마호영씨는 청주한씨는 모른다는 답변이며
마호영가의 족보에는 마순상의 아들 마봉직의 외조는 청주한씨 한극성 이라는데
청주한씨 전자 족보에도 한극성의 후대가 우리가문과 관련있는 이는없다. 마호영씨는
우리가문에 한극성의 족보 상 기록을 제시하여야 될것으로 생각된다.
마호영씨는 청주한씨도 모르며 김육의 필담집에 자기선조 마순상의기록이 있다하여
김육 필담 집에는 아무 근거도없다,
(김육 선생 필담 책 의글)
마동 지순상 (麻同知 舜裳)
마동지 순상은 중국 사람이다.내가홍주(洪州)에이르렀을때 나를찾아와서 만나보았는데.자기는 준화(遵化) 총사령관 이광의 아들이며.도독(都督)귀(貴)의 손자라 하였다. 대대 지위 동지를 지냈기에 동지라는칭호로 불린다한다.
그부친은 심하 전투에서 죽었고. 순상은 포로가되어 적군 속에 잡혀 있다가 6년 ..만에 도망해나와서.정묘년에 군량(軍糧) 수송의감독관으로.등주로 가는 도중 묘도에서 폭풍을 만나 3일만에 풍주에 표류하니 한배 탔던29명은 익사하고 그혼자만 살아남아서 지금은광주(光州)임시살고 있다는것이다 마동지가(麻同知)가 양잠(養蠶)과 목화(木花)재배하는사업을 아래와 같이 말하였다 남쪽에서 양잠 (누에 키우는것) 은 6.7월에 뽕잎을 많이 따서 말린것을 집안에 많이 따서 집안에 많이 쌓아두어. 습기가 젖거나 연기를쐬워서 변질하는 일이 없도록 하고 이듬해 누에가 나와서 3일후에 물에적시어 멱이면 누에는 살이 찌고 실이 많아 목화는 암수가있으니 잎이많고 거친것을 암이라하고 잎이적고 줄기가 가는것을 수라 하는데 갓 자라서 2촌 남짖 할 때 수를가려내고 암것을 남겨두어 그 속줄기를 뽑아 내면 몹시 무성하고 꽃이 많다는 것이였다.
종손 윤조 씨가 마호영 가의 족보 복사본을 2015년 음 3월 23일 산앙사 춘향례시
인수하여 청주한씨에 관련 추적 조사를 하고 있으니 밝혀질겄으로본다.
26세 1전 (전) 2오(墺) 祖 백부 석윤 출게 (석자윤祖님이 17세 별세함으로
석윤 동생 득윤祖 次子 전(墺) 祖할아버지가 석자윤 祖 에게 양자오셨다)
27세 1서주 2익주(26세 전자 祖 님의 1子 석주祖 2자 익주祖)
28세 1 여관 (매계공파)
2 여완子 1(제운) 2(래운.지우당)3(재운.용산재)
매화낙지자성촌(梅花落地自成村) 설매
임계공(臨溪公) 강심(姜深)
(生 중종 17년 임오 1522년 - 卒 선조 27년 갑오 1594년 7월 27일)
우리 선조 殷烈公 諱 민첨(民瞻)후 23세 임계공(臨溪公)할아버지께서
만년에 수양을 하시던 곳으로 임계정이 남향으로 서 있으며 임계정 옆에
山仰祠가 있고,
산앙사에는 은열공 휘 민첨 선조의 영정과 진주강씨은열공후 판서공파
파조 輔忠16세 위패.
臨溪公23세. 梅村公 德龍24세 위패가 모셔져 있다.
산앙사 앞쪽에는 공조참의(臨溪公)유허비가 있고,
임계공 유허비는 상산(商山) 김인섭(金麟燮)이 撰하고 璲桓 祖께서 글을 쓰시고,
東榮 祖 세운 비를 크게 재입석 하여 세워져 있다.
그러나 원 비문에는 수환(璲桓)祖글 쓰시고
비를 세운 동영(東榮)祖의 諱 자도 빠지고 임계공 深 祖 의 사위 (婿)이대기의
기록도 일부분 삭제되고 정문장 이 글쓰고 종중 에서 비를 세웟다,
臨溪亭 바깥마당에는 서기 1999년에 세운 임계공 심 할아버지의
아들 梅村公 諱 德龍'절충장군 중추부사 선무원종일등공신 증 가선대부 병조참의 매촌 강공 신도비'가 서 있다.
공조참의 臨溪公 姜深 祖님이 만년에 설매에 이거하여 시냇가에 초가
정자를 짓고 후학을 양성 하며 수양하였으나 세월이 오래되어 무너져 다시
그 자리에 서기1923년 후손들이 기와집 5간을 중건한것이 현재의 臨溪亭이다.매년 음 3월 23일에 제향을 올리며, 그리고
임계정과 산앙사에는 매년 음 10월 15일 시향제을 올리고 있다.
[증 호조참의 강공유허비(曾 戶曹參議姜公遺墟碑)]
경남 진주시 대곡면 설매리(설매실)는 입향조인
진주강씨 임계공 강심(晉州姜氏 臨溪公 姜深)의 유허비가 임계정에 있다.
증 호조참의 강공유허비(曾戶曹參議姜公遺墟碑)라고 새겨진 고색창연한
비석에는 한말 산청선비 단계 김인섭(1823~1903년)의 글이 적혀 있다.
비문에 “공의 휘는 심(深)이며 자는 태함(太涵)이다.
고려 현종조 태사(太師) 벼슬을 지낸 은열공 강 민첨 선조의 후손이시다.
아버지 오수(鰲壽)는 선무랑의 벼슬을 지냈으며
어머니는 진양정씨 생원 이량(以良)의 따님이시다.
1522년 출생 현재 진주시 집현면 산당리 (어풍정(御風亭)에서 태어나셨다.
어려서부터 영특하셨으며 자라서는 기량이 뛰어났으나 과거에 급제하지
못해 마을 사람들이 애석하게 생각했다.
임계 심 할아버지는 어풍정에서 태어나 만년에
설매실로 이거 하시여 들어 오셨다.
임계 할아버지가 태어나신 어풍정은 신당(新塘)마을 남강이 바라보이는
곳에서 살으셨으며 외조부인 정생원이 살았던 집이다.
임계 정자 에는 많은 선비들이 찾아와 수업 하였으며, 진양지 편찬을
주도하신 부사 성여신도 와서 수업을 했다고 한다.
임계 할아버지는 정자에서 유유적자한 삶을 사시다가 73세로 생을
마감하고 세상을 떠나셨다고 한다.
아들 덕룡(德龍)조(祖) 님은 임란 때 창의해서 왜적을 무찌른 공이 높았으며
임계공 深(심)할아버지 께서
만년에 진주시 대곡면 설매실에 들어 오셔서 매화꽃이 피는것을보시고
설매실 이란 지명을 지으셨다 한다 정자를 지어 임계공할아버지께서 지으신
臨溪公 祖 의 시 (詩)
臨溪公 原韻(임계공 원운)
紺巖山下雪梅村(감암산하 설매촌) 감암산 아래 설매마을이요
茅屋臨溪竹作門(모옥임계죽작문)띠집가에 맑은시내 푸른대가 문일러라.
多病年來人跡絶(다병년래인적절)병에 젖어 날보내니 인적마저 끊어지고
終朝獨坐到黃昏(종조독좌도황혼) 홀로 앉아 보내는 하루 어느듯 황혼일세.
敬差官 金行 次韻 (경차관 김행 차운)
山圍谷抱自成村 (산위곡포자성촌) 산골이 다정히 감싸주는 이 마을은
不是人間禍福門 (불시인간화복문) 아마도 인간의 시비영욕 없을레라.
座對竹林淸意足 (좌대죽림청의족) 푸른대숲 마주앉아 청의 또한 족하니
一塲春睡任昏昏 (일장춘수임혼혼) 봄날 깊이 든 잠 곤히도 취하네.
표암 강세황은 숙종 39년 1713년 계사년에 출생 하시고
정조15년 1791년 78 세로 별세함.
이 글은 경술년 동 표암 강세황 별세 1년전 77세 에 쓰셨다.
임계정 재실에 부착된 원운 현판의 글자가 다른 글자도 있다.
임계공 심 (臨溪公 深)할아버지 묘소 (墓所)
묘소 경남 의령군 화정면 덕교리 관곡 연월산 번지
임계공 할아버지 의 묘지 (산소) 입니다 묘지주변 잡목 제거 작업을 하여야 될 것같네요.
묘비석 아래 비석 돌이 일어나 글자도 안보일 지경 입니다.
종중에서 더 관리를 서둘야 되겠지요. 2013년 벌초날 성묘를 하고 왔는데 묘소를 다녀온지 마산 이거하고 처음 입니다. 묘소 관리를 소흘히 한것같아 종원님 에게 이런사실을 알릴 필요가 있겠다 생각하여 벌초(성묘) 후 2013년 추석 무렵 마산에서 산소에 가 사진 촬영 했어요. 봉분에 잔디를 심으면 좋을 텐데 주변의 울창한 수목들의 그늘로 인하여 잔디가 못살겠더군요.
강덕룡(姜德龍) (은렬공파 24 세)
1560년 명종 15년 경신년 3월 15일생
1627년 이조 5 년 정묘년 10월 25일 별세 (향년68세)
1560~1627 [조선] 선조(宣祖) 때의 무신(武臣). 자(字)는 여중(汝中). 호(號)는 매촌(梅村).
18세부터 말타기와 활쏘기를 익혀 정기룡(鄭起龍), 주몽룡(朱夢龍) 등과 함께
모두 재용(才勇)이 뛰어나 영남(領南) 삼룡(三龍)이라 불럿다.
1583년 (선조 16) 무과(武科)에 급제(及第)하고, 임진왜란(壬辰倭亂)이 일어나자
창의(倡義)하여 큰 공을 세웠다. 1593년 (선조 26) 왜병(倭兵)이 울산(蔚山)으로 후퇴하고,
명(明)나라 군사가 상주(尙州)와 대구(大邱)사이에 주둔했을 때 양료차관(糧料差官)이 되어
명군에 대한 군량 보급을 원활이 했고, 호남 체찰사(湖南 體察使) 이원익(李元翼)의
휘하(麾下)에서 체부아문장(體府衙門將)과 본부영장(本部營將)을 역임했다.
이에 앞서 경상우병사(慶尙右兵使) 정기룡을 따라 성주(星州) 화원현(星州 花園縣)과 고령(高靈) 안림역(高靈 安林驛)에서 별장(別將) 우선(禹善)과 함께 삼가(三嘉)에서 왜적(倭賊)을 격파(擊破)한 공으로 절충장군(折衝將軍)에 올랐다.
다시 진주영장(晉州營將)을 거쳐 장기현감 때 선정(善政)을 하였고,
경상도 우병영중군(右兵營中軍)을 제수(除授) 받았다.
진주(晋州) 촉석루 아래에 공(公)의 송덕비(頌德碑)가 있는데 비문(碑文)은
참판(參判) 박명부 가 지었으며, 공(公)유허비 진사 성여신 찬 하고 성해영 글 쓰고
촉석루 아래 비 를 세웟다 하나 현재 비 를 찿아보아도 비가 업다,
절충정군 중추부사(折衝將軍 中樞府事)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 1등에 책록되었다.
1700년 (숙종 26) 효자(孝子)정려(旌閭)가 내려졌으며,
1856년(철종 7)에 가선대부 병조참판(嘉善大夫 兵曹參判)에 증직(贈職)되었다.
묘(墓) : 경남(慶南) 의령군 화정면 덕교리 연월산
* 시향(時享) : 음(陰) 10월 15일
* 부(父) : 심(深)
강덕룡(姜德龍): 자(字)는 여중(汝中)이요, 호(號)는 매촌(梅村)이며,
임계(臨溪) 강심(姜深)의 아들이다. 무과(武科)에 올라 임진란(任辰亂) 때에
수사(水使) 원균(元均)의 막(幕)에 달려가서 왜(倭)로 더불어 연전(連戰)하여
열두번을 크게 이기니 초유사(招諭使) 김공성일(金公誠一)이 조정에 아뢰어
함창현감(咸昌縣監)에 제수되었다. 갑오년(甲午)에 상(喪) 을 만났다가 상(喪)
이 끝나니
이공원익(李公元翼)이 불러서 체부영장(體府營將)을 삼았다.
그리하여 병사(兵使) 정기룡(鄭起龍)으로 더불어 적(賊)을 성주(星州)와
고령(高靈) 땅에서
대파하고 장기현으로 옮겼다가 예빈주부(禮賓主簿)에 옮아갔더니
어머니가 늙었으므로 사직(辭職)하고 돌아와서 봉양하매 효성의 감동으로
강물의 고기가 배에 들어오는 이변(異變)이 있었다.
수연(壽宴)을 베풀 때에 하죽헌 성(河竹軒 惺)이 서문(序文)을 만들었고
선조조(宣祖朝)에서 선무원종일등훈(宣武原從一等勳)을 기록하였으며
숙종조(肅宗朝)에서 효행으로써 복호(復戶)를 명령하였으며
철종조(哲宗朝)에서는 병조참판(兵曹參判)을 추증하였다.
강덕룡 1560-1627 여중 매촌 진양 창의 영남삼룡 매촌실기 진양세고
姜德龍 1560-1627 汝中 梅村 晋陽 倡義 嶺南三龍 梅村實記 晋陽世稿
남명학파(南冥學派) 관련(關聯) 인명록(人名錄)
이상필(문학박사, 경상대학교 한문학과 교수) 편찬, 제공(2005년 4월)
덕룡(德龍) 할아버지 묘소 (墓所)
묘소 경남 의령군 화정면 덕교리 관곡 연월산 번지
덕룡 할아버지와 배 밀양박씨 조모 묘 (산소)입니다 관리를 더잘 하여야 될겁니다.
묘 위로 소나무가지가 늘어저 있고요, 역시 묘 주변 관리를 잘하여야 되겟지요.
2013년 벌초 성묘 후 심 할아버지 산소와 동일 촬영
↓↓ 28세 용산재 여완(汝完)
生 : 현종 서기 1673년 계축 2 월 1 일 生
卒 : 숙종 서기1707년 4월 23일 (35세)
墓碑文(묘비문) 汝자完 祖의 내종제 辛性中 찬(撰)
先瑩 소재지 : 진주시 미천면 미곡리 신촌 후산 乾좌
배(配) 진양정씨 현종 서기1673년 계축生
卒 : 영조 서기1743년 계해 6월 13일(70세)
여완조 후 (29세 1제운공. 2래운공 .3재운공..집안 대표 재실 용산재다)
9대 祖 汝完할아버버지의 묘소 여완조 별세후 건륭 년 서기1745년
할아버지별세 38년후 비를 입석 하였으나 입석한지 268년
후2013년 4월 5일 재입석 하였다.
(아래 용산재 사진은 모두 기정이가 제공)
비석을 세운지가 오래되고 풍파에 비문이 훼손되어 원문을 복원하는데 오랜시간이
걸렸지만 마침내 癸巳년 2013년 4월 5일에 한글로 번역한 새碑를 세우고 묘소를
재정비하였다.
재 입석하게된 동기는 기정이 내외가 10여년전에 할아버지 산소에 성묘 드리려 가서
오랜세월 묘의 큰 봉분이 풍파에 의해 자연으로 낮게 가라앉았으며, 비석이
마멸되어 비석 돌이 갈라진것을 보고 그자리에서 비가묻인 부분 파내고 비석을
사진촬영하여 기정이가 비문해역에 들어간지 10여년 후 기정이가 비문을 복원하여
종중돈으로 재입석하였다.
그리고 내가 기정이의 비문복원에 성과열을 다하는것을 본즉 수정 수정 비문 다시
수십번 수정하고 비문복사한 복사인쇄 자재비 량이 한짐 돨것이며 기정이의 노력한
노력대가 외 자비가 수십만원 들어간줄안다. 기정이 아니 였으면 비가 마멸 소실되어
원비문 글도 없으니 비는 다시 복원 못하게 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그리고 현재
서울지역 한문학 교수와 한문학하는 분 그리고 창원 지방의 대학교수 창원부근 유림
타 문중 대표들이 자기들 문중사로 기정이를 찿아와 상호 교류하며 상담하고 오가는
것을 자주보는 현실이다,
↑↑입석 하든날 비문 복원을 위해 애쓴 김병헌 선생과 종원 基正
강기정 정말 수고했어. 사문원 김병현 선생님 감사드리고,
그리고 소임을 맡은 순기 그리고 종손 용기 일백만원 헌성하고
수고 하였다.
추기(追記) 당시 여완祖 비문의 학생(學生)을 처사(處士)로 하자는 병원叔의 의견이였는데 여완祖님이 35세에 젊은 년수에 별세 하셨고 당시 용산재 의 모든가짜
현판이며 가짜글에 역겨워 원 비문의 학생(學生)을그대로 하자고 한것이 세월이 지나고보니 처사(處士)못고쳐
죄송한마음 금할길 없고 후회 됨니다 종원분에게 사과 드립니다 (2015년 12월12일 원기)
↓↓ 용산재 현판 (성파 하동주 친필)
용산
↓↓용산재호 (성파 하동주 선생 친필)필)
↓↓ 용산재 전경
용산재기 현재 왜곡된것이다 원래 용산재기를 찾아야 되겠지요?
용산재 사실기 이 사사실기도 갑오년용산재 건립20년후 글쓰시면서 용산재
기가 없어서 쓰신것으로 기록된것은 원용산재기를 업는것으로하여 용산재
기 를 숨겨 버리고 용산재기로 대신하겠다는 것으로 판단된다.
梅湖公 선항 祖의 용산재운
↓↓ 炳觀叔의 용산재 차운
↓↓珠杏祖의 용산재 차운 (용산재 건립20년후 글을 쓰면서 낙성운 이라니요)
그리고 병포숙은 낙성운을 원자를넣어 원운이라 고요?
龍山齋 柱聯
忠信謙恭 處世之方 (충신겸공 처세지방)
承先裕後 戒之勿替 (승선유후 계지물체)
黍稷非馨 惟德是馨 (서직비형 유덕시형)
儉勤孝友 齊家之法 (검근효우 제가지법)
金玉非珍 惟善是珍 (금옥비진 유선시진)
1.진실을 다하고 믿음으로 공경하고 겸손함은 세상을
살아가는 가장 올바른 길이다. (충신겸공 처세지방)
2.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재산은 소중히 보관하여 버리지
말고 지켜나가라. (승선유후 계지물체)
3.서직이 많다하여 향기가 아니라 오직 덕행의 향기가
널리 날리느니라. (서직비형 유덕시형)
4.부지런하고 검소하며 효도하고 동기간에 우애가 집을
다스리는 근본이니라. (검근효우 제가지법)
5.황금과 주옥이 보배가 아니라 오직 착함이
곧 보배이니라.(금옥비진 유선시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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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원래 비갈은 어떻게 하셨나요?
새로운 비석을 세운 후 사진에 더 이상 보이질 아니해서요
새 비를 세움도 좋지만,
원 비갈도 새 비의 옆에 나란히,
아니면 함께 볼 수 있는 적당한 곳에 세워서
구 비의 글자등이 아무리 마모되고 일부 파손탈락되었다 하더라도
오랜 풍파에도 꾸꾿하게 지켜온 역사적 유물임을
후손들이 실제 눈여겨 볼 수 있었으면...하는 아쉬움이 남네요
혹 매장하셨다면 다시 찾아 새 비와 함께 세우심이 어떨지요
비 를 어느비를 말씀 하시는 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