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게레오 타입은 이 방법을 고안해낸 루이 자끄 망데 다게르(Louis Jacques Mande Daguerre)의 이름을 따서 만든 이름이다. 다게르라는 사람은 원래 화가로서 스위스 알프스 산과 같은 웅장한 자연을 대형의 투명한 스크린에 그린 그림과 특수한 조명을 이용해서 보여주는 디오라마(Diorama)로 유명한 사람이었는데 그 또한 디오라마의 밑그림을 그릴때 카메라 옵스쿠라를 사용하고 있었다. 그러던중 1829년 12월에 헬리오 그라프를 완성시켰던 조셉 니세포르 니엡스의 제안으로 동업관계를 형성하여 사진의 발전을 도모하고자 하였는데 니엡스의 죽음으로 동업기간은 4년에 그치고 다게르 혼자서 연구를 계속 진행시킬 수 밖에 없었다. 그 결과 동업관계를 맺은지 10년이 지난 1839년 12월 7일에야 비로소 최초의 실용적인 사진처리 방법을 고안해 내는데 성공할 수 있었다. 이것이 '다게레오 타입'이라 불러지는 사진으로서 프랑스 과학 아카데미에서 발표되었는데 헬리오 그라프와는 달리 인간의 눈으로도 관찰하기 힘든 세부 디테일까지도 보여주는 놀라운 사진기법이었다. 그 과정을 보면 다음과 같다.
은으로 도금해서 광택을 잘 낸 구리판을 사용한다.
상자에 요오드 결정체를 담아놓고 은이 도금된 면을 아래로 향하게 하여 구리판을 적신다. 그러면 [요오드 증기 + 은 -> 요오드화은]이 형성되어 구리판에 감광성을 부여한다.
광선에 노출을 시키면 광선의 강도에 따라서 요오드화은을 은으로 환원시켜 상을 형성시킨다.
상자에 가열된 수은을 담아놓고 노출시킨 구리판의 은면을 아래로 향하여 수은 증기와 반응하도록 한다.
수은 증기와 반응하면 광선에 노출된 부분은 아말감이 형성되어 상이 생성되나 광선이 닿지 않은 부분은 아말감이 형성되지 않아 화학변화가 일어나지 않는다.
상이 생성된 판을 진한 식염수 속에 담근다. 이 과정을 통하면 더 이상 빛의 작용을 둔감하게 하기 때문에 태양 광선아래 다시 내어 놓아도 변하지 않고 정착시키는 역할을 하는 것이다.
세척후 건조시킨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은 직접 양화방식(Positif direct)으로서 니엡스가 발명했을 당시의 희미한 이미지를 뚜렷히 드러내어 선명도를 높였다는데 의의가 있다. 그러나 이때까지도 다게르는 10년전의 니엡스와의 계약관계가 계속 유효하였기 때문에 니엡스와의 발명과는 별개의 발명으로 남고자하여 니세포르 니엡스의 아들 이시도르 니엡스에게 액면가격 1천프랑짜리 주식 4백매를 발매하여 새로운 계약을 체결하므로써 다게레오 타입은 다게르만의 독창적인 발명으로 남게되었다.
초기의 다게레오 타입은 노출시간이 길었기 때문에 그 시간으로는 움직이는 물체나 사람들을 촬영하고 나면 그 형체를 알아보기 힘들 정도였다. 그래서 주로 건축물이나 풍경등 주로 고정된 이미지를 주축으로 하여 사진 촬영에 임하였는데 일부에서는 사람들의 욕구에 따라 자신의 모습이나 가족의 모습을 사진에 담고 싶어하여 초상사진도 제작되었다. 그당시 초상사진을 찍으려면 카메라 앞에 않은 사람들은 10분에서 20분 가량 처음 취한 자세와 똑같은 자세를 유지하고 있어야만 초상사진이 완성될 수 있었기에 초상사진에 찍히는 인물들은 큰 곤욕을 치러야만 했고 이렇게 어렵게 얻어진 사진들을 보면 고통스런 표정이 가득하였다. 또는 오랜동안 카메라 앞에서 자세를 취함이 불편하여 짧은 노출시간으로 사진을 완성하고자 하여 강한 빛을 인공적인 방법으로 거울로 반사시켜 조명을 주는 방법도 채택되었으나 이또한 조명이 너무 강렬한 나머지 초상사진을 찍고자 하는 사람들을 힘들게 하기는 마찬가지였다. 다게르는 마지막 이 초상문제에 더 이상 혁신적인 개발을 이루지 못하고 1851년에 사망하였다.
1840년 후반에는 다게레오 타입에 세가지 혁신적인 기술개발을 통하여 발전시킬 수 있었는데 그 첫번째가 비엔나의 피터 프리드리히 포히틀랜더(Peter Friedrich Voigtlander)에 의해 개발되었는데 다게르의 렌즈보다 22배나 더 밝은 개량 렌즈를 선보였다. 이 개량 렌즈는 독일렌즈(Germn Lenses)라고도 불렀는데 이 렌즈는 빛을 많이 받아들이도록 되어있어 노출시간을 줄이는데 큰 역할을 하게되었다. 두번째 기술개발은 런던의 존 프레드릭 고다드(John Frederick Goddard)에 의해서 이루어졌는데 감광판을 요오드화은으로 감광성을 입히는 대신에 할로겐으로 처리하여 빛에 대한 감광도를 한층더 높여 노출시간을 줄이는데 성공할 수 있었다. 세번째 기술개발은 프랑스의 이쁠리뜨 루이 피조(Hippolyte Louis Fizeau)에 의해서 이루어졌는데 감광판에 금염류(도금)로 덧입혀 명암을 풍부하게 만들어 아름답게 표현되었고 부가적으로 도금을 통해서 표면손상도 덜 되어 견고해졌다. 이로써 가장 취약했던 노출시간은 1분정도로 줄어들어 초상사진이 보다 손쉬워졌고 명암도 탁월하게 표현되는 기술개발에 따라 초상사진관들이 많이 생겼고 그 생산량면에 있어서도 급증하였다. 1840년에서 1841년 사이에는 대도시 위주로 많은 사진관들이 경쟁적으로 들어섰고 따라서 시장의 원리에 따라 가격은 폭락하고 가격이 내려감에 따라 더 많은 사람들이 초상사진을 쉽게 찍을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초기의 초상사진에서는 자신의 모습을 담아내고자 하는 기본적인 욕구에서 출발하였지만 19C에 이르러서는 소아의 사망률이 높았기 때문에 죽음에 대한 공포심에서 가족사진 또는 초상사진에 대한 사람들의 욕구가 더욱 높아졌다.
위에서 살펴본 다게레오 타입의 큰 특징은 빛의 세부묘사가 풍부하여 선명도에 있어서 매우 탁월하고 명암의 대비가 실감나는 장면을 연출한다는 장점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원판이 단 한장으로 끝나서 복제가 불가능 하였고 광택을 입힌 구리판을 이용했기 때문에 특정 각도로 기울일 때만 잘 보이지 다른 각도에서는 잘 안보이기도 했다. 그리고 동판에 은을 입혔기 때문에 가격에 큰 영향을 미쳤으며 인화되는 판의 두께가 얇아 쉽게 손상될 수 있었다. 물론 도금을 통하여 견고하게 만들어지는 발전이 있기는 했으나 이또한 가격을 상승시키는 요인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유독한 수은 증기 때문에 많은 사진사들의 건강에 매우 나쁜 영향을 끼쳤다. 이렇게 단점이 많았지만 다게레오 타입만의 풍부한 세부묘사와 선명도가 훨씬 독보여 제한점이 많은데도 불구하고 많이 쓰이게 되었다.
이러한 특징을 지닌 다게레오 타입은 소개된 각 나라와 지방마다의 상황에 따라서 차이가 있었는데 특히나 미국에서 가장 크게 유행하여 많이 사용되어졌다. 그러나 다게레오 타입이 제작된 것에 비하여 원판들에는 만든 작가들의 이름과 함께 현재는 거의 많은 부분이 유실되어 찾아보기 힘들다. 이것은 아마도 판화가들에 의해서 파괴되었다고 짐작하게 되는데 다게레오 타입과 같이 선명한 사진으로 인해 판화가 더이상 사람들에게 관심을 받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판화가 쓰이는 경우는 다게레오 타입이 다른 방법으로는 복제가 불가능하기 때문에 복제를 위한 수단으로 한 걸음 후퇴하여 판화기법을 도입하였다. 다게레오 타입의 기술적인 특수성에 때문에 또다른 특수성. 즉 미적인 부분은 잘 드러나지 않았다는 아쉬움을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다게레오 타입은 현실을 기록하는 기술적인 발명에 불과했다.
칼로타입(Calotype)
다게레오 타입의 사진술이 발표되고 3주도 지나지 않은 1839년 1월 25일에 발표된 칼로타입은 영국의 윌리엄 헨리 폭스 탈보트(William Henry Fox Talbot)에 의해서 발명되었다. 그리스어의 '아름다운 그림'이란 뜻을 지닌 칼로타입은 감광처리된 종이를 사용하여 상이 생길때 까지 빛에 계속 노출시키던 방법을 개선하여 짧은 노출시간으로 감광성을 띈 종이에 잠상을 맺게하여 나중에 화학처리 과정에서 상을 볼 수 있게하는 것이다. 즉 극소수의 입자만이 직접적으로 은으로 환원되고 나머지 대부분의 입자들은 현상과정에서 증폭되어 은으로 환원되는 것을 말한다. 칼로타입의 제작과정을 보면 다음과 같다.
질산은과 옥화칼륨 용액속에 각각 종이를 담궈 옥화은을 형성시킨다.
몰식자 + 질산은을 혼합하여 '몰식자 질산은'이라는 혼합용액에 위에서 적시었던 종이를 담궈 감광성을 부여한다.
광선에 노출시킨다.
다시 몰식자 질산은에 종이를 세척하면 상이 서서히 떠오르게 현상된다.
초에는 취소칼륨으로 하였으나 후에는 뜨거운 하이포 용액을 사용하여 상을 정착시킨다.
현상된 종이 네가티브를 다른 감광성 종이에 밀착시켜 햇빛에 노출을 주고 인화한다. 지금의 밀착인화와 같은 원리로..
이러한 일련의 과정을 거치는 칼로타입은 1841년 2월 8일자에 탈보트에 의해서 특허를 취득 할 수 있었고 이어 1844년 6월과1846년 4월에 런던에 있던 롱맨 출판사와 브라운 출판사. 그린 앤드 롱맨즈 출판사가 《자연의 연필 The Pencil of Nature》이란 제목으로 출판하였다. 이 책에서의 특징은 주로 건축이나 정물 등 움직임이 없는 사물이 많이 실려있으며 또한 네덜란드파 미술의 영향을 받아 일상에서의 장면들을 주제로 많이 삼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는 가운데에서도 기록위주의 다게르 사진과는 다르게 미를 주체적으로 창출하려는 의도가 보이는 사진을 찍었다. 그의 작품중에서 <열린문 The Open Door>를 예를들어 보면 집안의 창고문이 열린상태에서 빗자루가 세워져 있는 매우 일상적인 소재로도 미적감각이 보이는 사진을 찍었다.
탈보트에 의해서 고안된 칼로타입을 예술적 형상으로 표현한 사람들이 있었는데 그들이 바로 데이비드 옥타비우스 힐(David Octavius Hill)과 로버트 아담슨(Robert Adamson)이었다. 에든버러의 화가였던 힐과 스코틀랜드의 회화 아카데미 서기였던 아담스는 1843년부터 1848년 아담슨이 사망하기 전까지 공동작업을 하였는데 이들은 사진에 대한 공동작업의 창시자로서 화가인 힐이 구도를 정하고 기술자인 아담스가 촬영을 하는 방법으로 작업을 진행시켰다. 이들이 공동작업을 시작하게 된 계기는 스코틀랜드자유교파 설립시 에든버러의 집회에 참석한 457명의 집단 초상화를 그리는 일이 힐에게 맡겨지면서 힐이 이때 사진술을 이용하기로 결심하고 당시 에든버러에서 전문 사진관을 열었던 아담슨에게 도움을 청하여 집단 초상사진을 만들게 되면서 부터이다. 이들은 6년동안의 기간을 통하여 1500점 정도의 음화를 제작하였는데 이들의 사진에서는 회화적인 냄새가 물씬 풍기며 또한 사진속의 모델들로 하여금 개인적인 특징을 잘 표현하여 단순 기록성의 사진에서 벗어나 있었다.
이러한 칼로타입에도 기술적인 개선이 있어왔는데 여기서는 세가지만 언급하기로 한다.
우선 첫번째로 종이에 감광성을 입히기 전에 밀랍을 입혀 선명도를 높이는데 공헌 하였다. 그 과정을 볼 것 같으면 금속판에 밀랍을 입힌뒤 금속판에 종이를 눌러 밀랍을 밀착시킨다. 습기를 제거하고 옥화칼슘과 질산은 용액에 각각 종이를 적셔 감광성을 부여한뒤 노출을 시킨다. 그리고 후에 몰식자산 용액으로 현상을 하면 깨끗한 사진을 얻을 수 있었다.
두번째 기술적인 개선으로는 책이나 앨범등에 사용하기 위한 복제사진의 대량 생산이라는 점이다. 블랑까르 에브라르(Louis Desire Blanquart-Evrard)는 인화시간을 단축시키는 인화지를 개발하였는데 이 인화지를 이용한 사진집에는 <사진앨범 Album Photographique> 과 1852년의 <이집트.누비아.팔레스타인.시리아> 가 있다. 특히 '이집트.누비아.팔레스타인.시리아'에서의 사진은 문인이었던 막심 뒤 깡(Maxime Du Camp)이 중동지역을 여행하명서 촬영했던 음화를 인화한 사진이 들어있었는데 아마츄어였던 막심 뒤 깡이 과거의 여행을 통해 잊고싶지 않은 장면들을 남겨두고자 하는 욕망에서 제작했다고 한다.
마지막으로 세번째는 미국의 고고학자였던 존 그린(John B. Greene)에 의해서 이루어졌는데 1854년에<나일강 : 기념비, 풍경, 사진적 탐험 Le Nil : Monumente, Paysages, Explorations Photographiques> 에 나일강 연안의 풍경을 배경으로 하고 있는 고대 이집트 유적들을 칼로타입으로 제작하여 사진집을 펴냈다는 것이다.
위와같은 칼로타입은 지금의 폴라로이드 방식처럼 은판으로 영상을 정착시키는 은판기법(Plaque Argentee)인 다게레오 타입에서 음-양화기법(Processus Negatif-Positif)인 칼로타입으로 네가티브로된 몇장의 사진의 복제가 가능해져 보통사진의 기점으로 불리고 있다. 그렇다면 좀더 들어가 칼로타입의 실용적인 측면을 살펴보겠다. 영국에서의 칼로타입은 1852년이 될때까지 탈보트 자신의 이익을 위하여 칼로타입의 자격증 소지자에게만 쓰도록 허용하여 이를 어길시에는 가차없이 고소장이 법원으로 날라갔으므로 거의 실용화되지 못하였고 미국에서의 칼로타입은 미국인들이 즐기던 다게레오 타입을 단정적으로 무시했다는 점과 칼로타입 사용시 영국과도 같은 방법으로 특허료를 지불하는데 반발이 생겨 실용화되지 못하였다. 그리고 프랑스에서는 홍보가 부족하기는 했으나 다게레오 타입처럼 번들거림이 없어 고상하게 보인다하여 많이 애용하였다. 또한 칼로타입은 운반면에서나 조작면에서 살펴볼 것 같으면 그 과정이 쉬운 편이었고 색체반응에도 탁월한 특징이 있으며 완성된 사진에 색덧칠도 가능한 모습이었다. 그리고 다게레오 타입처럼 은염류를 입힌 판을 사용하지 않고 종이를 사용하여 비용이 절검되는 효과도 얻을 수 있었다
Artist Management 현대사진포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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